당신이 잠든 사이에 <8부>
8부
평소에는 수족처럼 가깝고 반가웠던 음향기기들이, 오늘따라 왜이렇게 낯선지 몰랐다.열을 맞춰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 각종 버튼들과 스위치들이 매직아이처럼 무언가를 내 회상속에서 만들었다가 지웠다를 반복했다.
“얌마!뭘 멍때리고 자빠졌어?”
“아..죄송합니다.”
작곡가 형의 불호령이 떨어졌다.녹음이 진행될때의 녹음실이 얼마나 살벌한 분위기인지 잘 알면서..나는 그만 멍하니 정신을 놓다가 큐싸인을 놓쳐버린 것이다.
허둥지둥 장비쪽으로 손을 뻗었다. 준혁이 형은 그런 나를 힐끗 바라보고는 다시금 박스안에 있는,어쩌면 나보다 더 긴장해 있는 신인 여가수를 바라보았다.
“됐어.긴장풀고 천천히 가보자.”
“네!”
햇볕 한땀 비추지 않는 녹음실에 선글라스까지 착용하고 온 신인 여가수가 그렇게 밉지만은 않았다.저 자리에 서면 얼마나 긴장을 하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아마 선글라스로 라도 가리지 않으면 자신을 위해서 녹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할 것이다.덧붙여서 저 자리에서 저렇게 한없이 겸손하고 긴장하던 사람들도 1~2년이 지나 인지도 있는 가수가 되고 난 후면 거만한 모습으로 다시 후속 앨범을 내러 다른 모습으로 찾는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오케이.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무려 다섯시간에 걸친 녹음은 끝이났다.나는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번쩍 정신이 들었고,반대로 여가수는 이제서야 가까스로 잡고 있던 정신줄을 자유롭게 놓아주기 시작했다.
“야야.박재하.밖으로 나와봐.”
준혁이 형이 담배를 한대 물고는 내게 손짓을 했다.이마에 고인땀을 닦아내고는 그를 따라갔다. 그가 간 곳은 큰 창문이 있는 건물 복도였다. 벽에 붙어 있는 금연이라는 딱지는 이미 무시의 상징이 되어버린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너 뭔일있냐?”
헉..어떻게 아셨어요?혹은 왜요?라는 말은 양심상 나오지 않았다.아마 누가 봐도 내 모습은 무슨일 있는 녀석의 전형적인 행동패턴을 보이고 있었으니까.멍하니 있다가 큐싸인 놓치고, 스톱싸인 놓치고, 욕먹고, 그리고 나서도 멍해져 있고.
“죄송해요 형.”
“니가 평소에 약간..아니 좀 많이 어리바리한것은 인정한다만 그래도 너 녹음할때는 열심히 하던 놈이잖아.음악에 열정도 있고.갑자기 주식투자로 전재산 날린 놈마냥 입벌리고 뭐하고 있던 거야?”
“약간..일이 있어서요.”
“읊어봐.”
“에?”
“뭔지 들어야 할거 아냐 임마.”
그는 내게 꿀밤을 먹이려는 시늉을 해보였다.너무나 가볍게 보이긴 해도 좋은 사람이었지 이 형...하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말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 날, 인애는 분명 술에 취해 있었지만,끝까지 취해있지 않았다.마지막에 정확하게, 그리고 조금도 술에 취하지 않은 톤으로 내 이름을 불렀으니까.행위 후 곧바로 그녀가 침대에 얼굴을 묻은것도 내가 단순히 생각했던 취기로 인한 졸음이 아니었다.뭐라고 말할수는 없지만, 분명 인애는 완전히 깨어난 상태 였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복잡했다.
아침에 일어나 연락을 받고 녹음실에 오기까지,나는 땀에젖은 옷 그 상태 그대로 귀에 이어폰을 꽂은채 잠들어 있었다. 방안에 인애의 술냄새가 남아 있는거 같아 괴로워 몇번이고 방향제를 뿌렸다. 그녀의 체취는 없어졌을지 모르지만, 내 기억안에 있는 인애의 슬픈 눈빛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러고 나서 집을 나올때 내 고개가 옆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었다.이미 출근했을게 뻔한 그녀의 집 현관문을 나는 한참이나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잡을수 없는 허상이나 다름없었다. 한 발자국만 옆으로 내딛으면 그녀의 현관앞에 설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형의 기운이 나를 가로막는 것처럼, 현실 상에는 붙어 있는 그녀와 내 집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내 말을 듣는 준혁이 형의 눈빛은 차츰 게슴츠레 해지더니,이내 동공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기 시작했다.놀라울테지. 당사자인 나도 아직까지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뭐어?이..인애씨랑?”
“...네.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됐어요 라니 그게 말이 돼?”
좀처럼 놀라지 않는 성격인 그가 이렇게 펄펄 뛰는것을 보니 내 말이 적잖이 충격적이긴 한 모양이다.무리도 아닌것이.. 내 주변의 인물은 모두 인애를 알고 있으니까. 반대로 인애의 주변에서도 나를 다 알고 있었다. 아무리 붙어다녀도 절대 스캔들이 날 염려가 없는 까닭일까? 하긴 사귄다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사람들이 보는것은 새까맣고 꾀죄죄한 인애의 어린시절이 아니라, 세련되고 예쁜 지금의 인애의 모습이니까. 내가 젖먹이 때부터 친구라는것을 배제한다 하더라도 그녀가 내 옆에 있다면 다들 ‘아..친한 친구구나’라고 생각하기 일쑤였다.
“와..그건 정말 말이 안되는데..”
준혁이 형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도 인애의 성격을 잘 아니까,아마도 그렇게 말을 했을지 모른다.하지만 그날밤의 일을 디테일하게 설명해줄순 없었다. 일이 이모양 이꼴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녀는 내 친구니까.남자들끼리 술자리에서 안주거리 삼아 이야기하는 음담패설의 범주에 인애를 두고 싶진 않았다.
“너 임마..소꿉친구와 자는것은 타부인거 몰라?”
“타부요?”
“그래.절대 해선 안되는 거란 말이야. 너 생각해봐라. 너한테 인애만한 친구가 어딨냐? 그렇게 남자보다 의리있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친구를 너는 한방에 잃은거야. 바로 요놈 때문에 임마.”
그는 라이터를 검지와 중지사이에 끼우고는 내 바지 후크쪽을 쿡쿡 하고 눌렀다.평소같았으면 기겁을 하고 뒷걸음질 쳤겠지만 지금은 달랐다.조금 과격할뿐 그의 말은 틀린게 하나도 없으니까.
“저도 미치겠어요.그거 때문에..”
아주 많이 망설여졌지만,나는 결국 준혁이 형에게 수정이의 일도 털어놓을수 밖에 없었다.남자친구가 있었으며,내가 듣고 있는 사이에 격렬하게 사랑도 나눴고, 또 알면서 차이러 고백하러 갔다는 그 말과 함께.
물론 당시에 내가 그만큼 취했으며, 인애를 여자로 보았던 게 타당하다는 핑계를 대려는 것은 아니었다.해결책이 없더라도 누군가가 말을 들어준 다는 것은 혼자서 썩히는 것보다 백배의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이 형은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몇천배 복잡한 사람이니까, 조언을 듣고 싶었다.
“음...어째 스토리가 좀 이상하다? 굉장히 꼬이는 기분인데..”
나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수정이에 관한 일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심란한데, 인애와의 문제까지 겹쳐버린 것이다.다 등신같은 내가 자초한 일이겠지만,내 잘못 이기에 어디가서 하소연조차 할 수없는게 더더욱 답답했다.
내 두번째 고해성사,그러니까 하소연이 끝나자 금세 적막이 찾아들었다.연애라는 분야에 닳고 닳은 준혁이 형도 단숨에 묘안을 낼수 없을 정도로 내가 제시한 문제는 너무나 어려운 모양이었다.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한참이나 창밖을 응시하며 거친 연기를 뿜어대었다. 매연보다 담배연기를 더 못견뎌하는 나도 묵묵히 그것을 참으며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기다렸다.차라리 쌍욕이라도 좋으니까, 내 우유부단함을 철저하게 비난해준다면 차라리 속이라도 편할거 같았다. 하지만, 다시 그의 입이 한참만에 열리고 흘러나온 말은 내 예상과는 정반대 성격의 것이었다.
“따라와. 나랑 잠깐 갈데가 있으니까.”
눈 앞에 수십명의 여고생들이 아른아른 거렸다.학교를 마치고 바로 온 것인지 하나같이 교복차림을 하고는, 또 하나같이 손에 큰 플랜카드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 까치발을 들고 건물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여긴 왜 온거에요?”
“일이 있어서.니가 좀 도와줘야 겠다.”
“일이요?”
오늘 녹음이 끝난 신인가수를 대동하고 그가 찾아온 곳은 다름아닌 방송국이었다. 인애의 야무진 따귀를 맞았었던 자리가 내 눈에도 보였다. 어째서지? 그는 방송국에 자주가는 스타일이 아니었다.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럴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오늘 녹음이 끝난 여가수와 그의 매니져 까지 끌고 방송국에 행차한 거다.
“야.저 쪽 문으로 들어가.빠순이들 차로 치지 말고.”
게다가 무슨 연유인지 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차하고 담쌓은 삶이 몇년째인데,그것도 뒤에 매니져가 있는데도...여튼 간만에 하는 운전에 살짝 떨면서도 잠자코 그가 시키는 그대로 차를 몰아 안으로 진입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수위가 우리의 차를 저지시키고는 창문을 두드리며 물었다.준혁이형은 너무나 능숙하게 뒷문의 창문을 열더니, 잠자코 앉아있던 그 여가수의 팔을 쑥 잡아끌며 수위에게 보여주었다.
“아저씨 얘 알죠? 신인인데 얼마전에 버라이어티에도 나오고 그랬는데..”
그는 준혁이 형의 말을 듣고도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뭐..저 여가수도 요새 미인의 트랜드대로 성형을 했으니 이 아저씨의 시선에는 그 얼굴이 그 얼굴이겠지만 말이다.
“아놔..여기 ID카드도 있잖아요.”
준혁이형은 최후의 보루라는 듯 자그마한 신분증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처음부터 저렇게 들어갈 것이지..수위는 결국 살짝 목례를 하고는 입장하라는 수신호를 전달해 주었다.
“그 카드는 어디서 났어요?”
“그냥 아는 사람꺼 빌렸지.”
“에?”
“너도 이 일 오래해봐. 다 어찌저찌 하다가 요런거 하나씩은 들고 다니게 돼 임마.”
말해 무엇하랴.사실 가장 묻고 싶은 것은 내가 이 방송국에 온 이유였다.한창 주가를 올리며 저작권 랭킹 탑 파이브에 진입하려는 작곡가도 자주 올일이 없는곳이 방송국인데,하물며 그 작곡가의 스탭인 내가 이런 곳에 올 이유는 전혀 없어 보였다.
주차를 하고 나니 그가 나에게 가방하나를 내민다.내가 고개를 갸웃하니 준혁이 형이 팔꿈치로 나를 쿡 하고 찔렀다.
“그냥 들어.그런 역할이라도 해야 자연스럽게 들어가지.”
“제가 왜 자연스럽게 방송국을 몰래 들어가야 하는데요?”
“아 글쎄..내가 일이 있다니까 임마. 오늘 녹음한거 후하게 처줄테니까 따라와.”
안그래도 심난한데, 이 형은 도대체 무슨짓을 하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답답했지만, 사실 거부할 권리는 없었다. 내가 정신줄을 놓고 있어서 오늘 하루 녹음에 지장을 주었으니 이 정도 일은 달갑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상담을 해주다 말고 잡일이라니..한숨이 나왔지만 불만을 표시하진 않았다.
“여어~~잘 있었어?”
준혁이 형이 지나가자 몇몇의 가수들은 그에게 꾸벅 하고 인사를 했고, 내 뒤를 따르던 신인 여가수는 또 그 가수들에게 인사하느라 바빴으며,또 그녀의 매니져 역시 초짜인 모양인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풴ㅈ아가기 바빴다.나만 멀뚱히 정체불명의 가방을 들고 흡사 다섯살 먹은 꼬맹이마냥 준혁이 형의 뒤를 쫄래쫄래 풴ㅈ아가는 형상이 되어 있었다.
“음..여긴가?아..아닌가?”
준혁이 형은 자신만만하게 들어간 것과는 달리 이상하게 갈팡질팡 하더니만,이윽고 그녀와 매니져를 자신의 앞에 불러세웠다.
“자자.신인은 발빠른 홍보인거 알지?쟤 데리고 다니면서 쫙 홍보도 하고 그래.”
“아..그런것까지 신경써 주시다니..감사합니다.”
우리의 신인 매니져씨는 신인가수를 대동한채로 감격에 어린 눈빛으로 준혁이형에게 구십도로 인사했다.잘나가는 작곡가를 섭외한것은 순전 소속사의 몫이었다 쳐도, 작곡가가 이런일까지 신경써준다는 것에 크게 감동한 모양이었다. 물론 평소의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나는 의심어린 눈으로 형을 바라보았지만 말이다.
“재하야 그 가방 줘봐.”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것을 내밀었고, 그는 가방의 지퍼를 쫙 하고 열었다.보기에도 숨막히는 시디들이 빼곡히 가방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게 뭐에요?”
“뭐긴 뭐야 임마.CD지.”
“그건 아는데 무슨 CD..”
문득 CD의 표지가 눈에 들어오자 나는 말을 멈췄다.얼마전에 준혁이 형이 프로듀싱한 또다른 신인가수의 CD였다.
“갑자기 이건 왜 갖고 왔어요?”
“홍보하려고 그러지 임마. 라디오에서 엉아 노래를 팍팍 틀어줘야 노래가 뜨고, 노래가 떠야 엉아도 저작권료좀 먹지 않겠어?”
일리없는 말은 아니었다.하지만 무슨 작곡가가 지 곡을 녹음한 가수를 직접 홍보한단 말인가. 내가 아는 준혁이 형은 귀찮아서라도 이런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게다가..
“자자.어서 이걸 라디오 피디들에게 돌리고 와라.”
“제가요?”
“그럼 여기 누가 있어?”
“그걸 왜 제가해요?”
“그럼 내가 하리?”
당당해 보이기 까지 하는 형의 표정에 내가 어이없는 얼굴을 해보이자, 그는 내 빠박 머리를 찰싹 하고 때렸다.
“아..눈치 없는 쉐키! 그냥 엉아가 하라면 해 이 좌식아!”
“제가 무슨 매니져도 아니...알았어요 할게요.”
“우선 딱 10장만 돌려.엉아는 방송국 구경하고 있을테니까.알긋냐?”
“네에..”
그는 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썩소 한방으로 일축시켜 버리고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나는 양손에 CD들을 든 상태 그대로 인포에 가서 라디오 방송국의 층수를 확인해야만 했다.
‘왜..하필 라디오 방송국에 가는걸 시키는거야..’
왜 하필 지상파 3사중 인애가 있는 이 방송국에 와야했던 걸까? 나는 계단앞에서 한참이나 망설여야만 했다. 가장 편하게 보는 사이인 인애가 이렇게 어려운 존재가 될줄이야.마주치면 어쩌지? 그리고 인애가 CD들을 잔뜩들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뭐라고 해야하지?
땅이 꺼져라 푹 하고 한숨이 나왔다.왜 이런일을 시키는지 준혁이 형이 원망스러웠다.나는 최대한 얼굴을 가리고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라디오 방송국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PD라는 직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이들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고,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테잎들을 잔뜩 손에 들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이들도 보였다.뭐..그들의 공통점이라면 CD10장을 들고 똥마려운 강아지 마냥 서성대며 안절부절 하는 빠박이 하나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겠지만.
“저기..신인가수..인데요.음반나왔는데 들어보시면 어떨까 해서..”
“가수라구요?”
용기있게 말을 걸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니 얼굴로 가수?’라는 의아함과 신비감이 가득담긴 적대적 눈빛이었다.
“아뇨...제가 아니구요. 저는 그..작곡가 최준혁씨 음향기사인데..암튼 말하자면 긴데요. 저희가 녹음한 겁니다.한번 들어보심이..”
사실 매니져들 사이에서는 음료수와 함께 CD를 껴주는게 천편일률적이고도 식상한 홍보 방식이지만, 사실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을것만 같았다.
“거기다가 놓고 가요.”
직업이 저거니, 나같은 놈을 얼마나 많이 봤을까. 가수치곤 평범하게 생겨서 잠시 적선되었던 관심은 다시금 그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린 듯했다. 그들이 서있는 곳에 애매하게 위치한 난간위에 CD를 올려둔 나는 살짝 몸을 돌려 옆에 있는 통로로 들어갔다.
-아 그러니까..그게 말이 되냐고요!-
아..잘못들어온 모양이다. 열띈 회의와 토론이 이어지고 있는 미팅룸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앙칼진 여자의 목소리.어라?많이 들어본 목소리인데?
왔던길을 돌아 나가려 등을 돌렸던 나는 그 자세 그대로 뒤로 목을 쓰윽 빼고는 미팅룸을 바라보았다. 남자 둘과 여자셋.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 한명이 이마를 움켜쥐고 볼펜을 돌리고 있었다.딱 봐도 방송일에 쩔은 PD의 모습이었다.
‘인애잖아..’
그의 앞에는 인애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여전히 하얀 얼굴위로 까만 머릿결을 새초롬하게 묶어 올린 채로. 그녀는 대본으로 보이는 A4용지들을 움켜쥐고는 내가 알아들을수 없는 용어를 써가며 PD를 공격하고 있었다.
-아휴..알았어요 알았어.서작가 맘대로 진행해.청취율 조사 조만간 들어가는 거 염두에 둔거 맞지?-
-무슨 남자가 그렇게 깡이 없어요?두고 보라니까요!-
인애를 보면 당황할줄 알았는데, 반대로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역시 이 아이는 씩씩하구나.소심한 나와는 달리 어디에서나 자기 의견을 꼭 피력하고 마는 여장부. 화장기 없이 다니는 털털한 성격이 오히려 예뻐 보일수 밖에 없는 인애의 모습. 외모는 많이 변했지만,구슬치기를 하던 20년전의 인자의 성격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그 모습까지.
‘어..?’
이크.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애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나는 후다닥 서둘러 복도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촤아아악!
아..최악이었다.서두르다가 그만 들고있던 9장의 CD들을 놓쳐버린 것이었다.경쾌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추락하는 그것들을 서둘러 줍고 있을 그때에,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너 여기서 뭐하냐..?”
에휴. 이건 정말 빼도박도 못하는 찐따의 모습이었다.형광등 조명을 빠박머리에 반사시키며, 궁댕이 골을 고대로 보여주는 것을 알면서도 CD를 줍는 내 모습. 빨리 벗어나야 할것만 같았다.
“야.박재하.”
아..습관이란 무서운 것이었다.인애의 말 한마디에 나는 반사적으로 응..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었다. 행동을 취한 후에 움찔하며 후회해도 그것은 너무나 늦은 것이었다.인애의 억양은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뭐하냐고 너.”
“아..그게..”
당황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내 뺨을 때리며 다신 나타나지 말라고 했었는데..아직 그녀의 화가 풀리지 않았을텐데..당황을 하니 더더욱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그게..신인가수..음반 홍보..때문에.”
인애의 동그란 눈이 나를 향했고, 나는 양심에 찔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우발적 범죄를 저지른 죄인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법관앞에서가 아닌 피해자 앞에서일 테니까.
“매니져로 취직했냐?”
“아..그건 아니고..암튼 일이 그렇게 됐어.방해해서 미안해.금방 갈게.”
나는 허둥지둥 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수습해서는 양손에 꼭 쥐고 앞으로 달려갔다.아니, 달려가려고 했다.
“컥!”
인애의 약력이 새삼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그녀는 내 티셔츠의 목 뒷부분을 잡고 달려나가려는 나를 잡아세운 것이었다.목젖에 티셔츠 라인이 걸리는 통증에 나는 그만 숨을 집어 삼키고 말았다.
“따라와.”
인애는 성큼성큼 앞장을 서서 어디론가 걸어나갔다.도망칠까?기회는 지금인데..하지만 그런 바보같은 생각은 생각에서 끝내야만 했다.행동으로 나와서는 더욱 더 찐따스러운 모습일테니까.
“너 왜 방송국에 얼쩡거려?”
인애가 다다른 곳은 자판기 앞이었다.그녀는 살며시 팔짱을 끼고는 미안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기가 겁이 났다.늘 그랬듯이 인애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미안한 마음도 마음이지만, 평소와는 달리 냉정한 표정을 짓는 인애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낯설어서 무서웠다.
“준혁이 형이..시켜서..”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내 입가에서 들려오자,인애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다.
“바보야.그 사람이 시킨다고 이런걸 해?”
“아니..뭐..그게..”
이상하게도 인애의 톤은 한층 낮아져 있었다.용기를 내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차분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거 줘.”
“응?”
“그 CD들..달라고.내가 전달해줄게.”
“아..응.”
나는 쭈뼛쭈뼛 양손에 들고 있던 그것들을 모아 인애에게 건내주었고,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다가오며 내 손에 들려있던 CD들을 잡아채듯 끌어당겼다.
“어..?”
멍하니 서있던 나는 내 손에 무언가 까칠한 느낌이 전해지는것에 깜짝 놀라 내 양손을 바라보았다.내 손에는 접혀져 있는 만원짜리 지폐 두장이 들려있었다.
“그걸로 택시타고가. 뭐하러 이런일을 해. 그럴거면 그 시간에 일 그만두고 작곡연습이나 해.”
“아..인애야 이건 괜찮은..”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애는 나를 스쳐 지나가버렸다.오늘따라 유난히 높아 보이는 인애의 구두굽 소리가 또각또각 하고 울리는가 싶더니 이내 멈춰섰다.
“그 여자하고는 잘 되가?”
나는 여전히 영문을 알수 없는 눈동자를 하고는 인애의 말에 대답하지 못한채로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본의 아니게 침묵으로 일관해 버리게 된 내 반응에, 인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주 자주 얼굴비춰. 애인있어도..열번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잖아.”
다시금 들려오는 또각 거리는 구두소리.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그렇게, 저 멀리 복도끝으로 멀어져가는 인애의 뒷모습만 계속해서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뜻일까..’
준혁이 형에게 대충 들어간다는 문자를 보내놓고는 집으로 향했다.난 왜이렇게 바보처럼 태어났을까?왜..왜 항상 내 옆에 있는 친구의 마음도 읽지 못하겠는 걸까?
내 자신을 탓해도 알수 없는것은 어쩔수 없었다.어째서 인애가 나를 보고 화를 내지 않았을까?그리고..그 아이가 말한 마지막 그 한마디의 의미가 뭘까?내가 아는 인애는 절대로 내숭을 떨며 말을 빙빙 돌려 하는 그런조는 아니었다.
뚜두두두.
집에 도착해서 도어락을 누르는 내 손가락에 조차도 힘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피곤했다.몸이 힘든게 아니라, 마음이 너무나 피곤하고 무거웠다.
-그래..아직도 안왔다니까?택배사에 조회해 보면 수령되었다고 나와.이거 사기인가봐!-
침대에 그대로 쓰러지려 했던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이 목소리는..
-아..진짜 배송조회해도 소용없고, 업체는 보냈다고 하고 이거 어떡해?이럴줄 알았으면 회사로 배송시키는건데...-
틀림없었다.벽에 귀를 대어보니 옆방에 그녀..수정이가 있는 것이었다.누군가와 통화를 하는듯한 목소리.내 시선은 반사적으로 현관앞에 놓인 택배박스로 향했다가 다시금 벽에 걸린 시계쪽으로 움직였다.
‘7시..밖에 안되었는데?’
평소 그녀의 행동패턴을 생각하면 턱없이 이른 시간이었다.늘 내 방에서 모든 사건이 종결되야만 그녀가 귀가했었고, 또 내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그녀는 나가곤 했었기 때문이었다.
‘전해..줘야 하나?’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벨을 누르고 택배박스를 전해줘야 하는데,내가 옆집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의 모습을 보는것에 용기가 서질 않았다.눈치없이 식은땀이 흘러내리고,별일 아닌데 가슴이 뛰었다.
-알았어.연락좀 자주하고..오랜만에 일찍 퇴근하니까 너무 좋다.또 전화해!-
그녀는 명랑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고 있었다.이윽고 티비의 전원이 켜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여전히 벽에 귀를 댄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어쩌지..?’
사실 답이 나온것이나 다름없었다.그냥 두면 속옷이 든 택배를 빼돌린 변태가 될것이고, 망설이고 계속 미룬다 한들 언젠가 마주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벌떡 일어나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 보았다.삭발을 한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베어 나오는 땀방울들.어떻게 해야 할까?연기를 해야 할까?이제서야 수정씨가 내 옆집에 산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넘길 머리카락도 없는 주제에 거울을 보며 손으로 연신 머리통을 비벼대었다.고작 옆집벨을 누르는게 뭐 대단한 거라고 택배박스를 들고 후후~하며 임산부마냥 라마즈 호흡을 하는 내 모습이 너무나 한심했다.
“누구세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벨을 누르니,벽너머 들려왔던 그녀의 목소리가 두꺼운 철문너머로 들려왔다.조금씩 들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내 심장소리도 내 목을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저..저기..옆..옆집인데요.”
“네?”
“택배가 와있어서요.”
“아..잠시만요!”
무언가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아 싫다..이 와중에도 옷을 안입고 있었기 때문일까?하는 등신같은 상상을 하는 내가.
“어어어?”
문이 빼꼼히 열렸고,자그맣고 하얀 얼굴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화장기 없는 뽀얀 얼굴과, 그 위로 드러나는 반짝거리는 두 눈망울이 나를 향하는가 싶더니,이윽고 작고 반짝이는 입술이 살며시 열리며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스님?”
아..바보 같이 나는 계속 마음속으로 연습하던 리액션을 칠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말았다.오!이런 우연이!수정씨?라고 하려고 했었는데 그 말은 그녀의 하얀 얼굴을 보는 순간 목구멍으로 꿀꺽 삼켜버렸다.
“아..아..”
하지만 오히려 어리바리한 내 모습이 ‘나 지금 이런 우연때문에 참 많이 놀랐다’라는 것을 더욱더 잘 보여주는 것인지,수정이는 손뼉까지 쳐가며 신기해 했다.
“옆방사는 사람이 스님이었어요?우와와!”
신기한듯 빙그레 웃는 그녀의 미소가 아름다워 나는 그만 얼간이 같이 따라웃고 말았다.조그마한 박스를 들고 있는 내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아..안녕하세요.택배가 와있어서.”
“아!고마워요!”
“전해줄 시간이 없어..서요.”
나에게 남친이 있다고 밝히고,그것에 실망한 내 뒷모습을 보아서..미안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내가 처음 반했던 그 미소 그대로 변함없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아..들어오세요!”
“네에?”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튀어나와 버렸다.들어오라니..그냥 이렇게 마주서서 보는것도 힘든데..
하지만 내 의지와는 달리,마법에 걸린것처럼 들어오라는 그녀의 손짓에 이끌리듯 현관앞으로 한발 내딛어 버리고 말았다.그녀는 내 손에 들린 택배박스를 받아들더니 선반위에 올려두었다.
달콤한 향기가 났다.
상상속에 등장하던 그녀의 방과는 조금 달랐다.핑크빛 공주톤일거 같았는데..의외로 연두색깔로 톤을 맞춘 가구며 집기들이 내 맘을 편안하게 해주는 듯했다.연두빛 책장과 서랍장들,그리고 연두빛 톤의 침대까지도,모두 하나가 셋트인 것마냥 앙증맞고 깔끔했다.방안을 둘러보며 멍해져 있을때, 하늘하늘한 치마와 집에서 편하게 입는 가디건을 입은 그녀가 손짓했다.
“와..너무 신기하다.그쵸?커피 드실래요?”
“네?아..네..”
엉거주춤 바닥에 놓인 조그마한 티테이블 앞 방바닥에 털썩 하고 앉았다.나도 모르게 옆에서 열심히 커피를 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남색 가디건 위로 하얗게 뻗은 목선과 얼굴선.그리고 귀 뒤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길고 가녀린 손가락까지.
고개를 떨궈 버렸다.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번도 연락이 없었던 그녀였다.하지만 나를 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마치 반가운 사람을 만난것처럼, 수정이는 나를 보고 활짝 웃어주었다.
“와..신기하네요..그쵸?언제부터 여기 살았어요?”
“아..저는 몇달 되었어요.”
“전 얼마 전에 이사왔어요”
헤이즐럿 커피를 내밀며 싱긋 웃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하마터면 알고 있어요 라고 대답할 뻔했다.생글생글 웃는 그녀의 표정과는 다르게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아 맞다!저거 착불일 텐데..얼마였어요?”
“에?아..아니에요.”
나는 깜짝 놀라 손사레까지 쳤지만, 이미 그녀는 택배박스에 붙은 송장의 금액을 확인하며 지갑을 열고 있었다.
“무슨소리에요.받아주셨는데 드려야죠.”
수정이는 싱긋 웃으며 억지로 내 손에 돈을 쥐어주었다.가녀린 손끝에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뭔가가 찌릿하는 것만 같았다.그리고는 바로 커피잔을 들고 내 맞은 편에 앉는 그녀. 뭐라 콕 찝어 말할수는 없지만 혼자 사는 내 방에서 절대로 느낄수 없는 미지의 향기가 났다.
“아..저기요.”
“네!”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몇번이고 묻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물어보지 못했던 그 말.
“묻고 싶은게 있어서요.”
“뭔데요?”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나를 비추었다.
“사실..수정씨를 처음본게..지하철에서 였어요.”
그때를 생각하니 차분해졌다.요란하던 내 안의 떨림도 차츰 안정궤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순수하게 그녀에게 반해버렸던 그때의 감정이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것일까?그 이유는 나도 알수 없었다.수정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내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근데...여기에 사는 거였으면..그때 왜 지하철을 타고 있었나요?그날 분명히 일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잖아요.”
“아..!”
수정이는 내 말에 잠시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는 생각이 난듯 손뼉을 쳤다.자연스레 그녀의 눈이 초승달 처럼 웃었다.
“외근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그때.근데 겨우 궁금한게 그거 였어요?”
그녀는 싱겁다는 듯 살짝 소리죽여 웃었지만,사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큰 문제었다.아니,문제 였었다.우리 옆집에 살고,우리 동네로 직장을 다니는 그녀가 지하철에서 처음 봤다는 것은, 어쩌면 옆방의 그녀가 수정이와 동일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희망이었기 때문이었다.뭐..그런건 진작에 깨지긴 했었지만.
“아..네. 사실 그게 너무 궁금했어요.”
“하하 재하오빠는 엉뚱하네요.그럼 지금 제 방에 오자마자 지하철 생각부터 난거에요?”
그녀의 말에 약간은 뜨끔했다.나야 그녀가 내 옆방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녀 본인도,나도 오늘에서야 안 사실일테니까.
“웹 디자인 일을 해서..외근이 종종 있어요.물론 그것보다 야근이 훨씬 많지만.”
“그..그럼 오늘은 일찍 온거네요?”
“음..맞아요.저번에 오빠랑 이야기 할때도 쭉 회사에 있던 상태였으니까요.”
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색했다. 여자를 짝사랑하는 남자와,그리고 눈 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을 짝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는 여자가 단 둘이 있는 상황은, 주된 토픽이 끝나버리면 바로 적막이 찾아와 버렸다.
그녀가 살짝 커피잔을 만지작 거렸다.밝은 성격의 그녀지만 대화가 좀처럼 이끌리지 않으니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럼..들어갈게요.주무세요.”
“아..가시게요?”
“네.커피 잘마셨어요.”
미련없이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나혼자 설레여봐야 소용없었다.수정이는 내게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으니까.그냥 고마움을 표시한것이고, 기본적인 예의가 있는 여성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단지 내가 설레이고,좁은 공간에 단 둘이 있는게 행복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계속 이 자리에 비비고 있는것은 그녀의 감사의 표현에 대해서 예의없는 행동으로 되갚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하고 나니,마치 찬물로 세수를 한것 처럼 정신이 들었다.
“들어갈게요.”
“아!재하오빠 택배 고마워요.”
“아..뭘요.늦게 전달을 해서..”
“그건 제가 매일 늦으니까요.”
그제서야 다시금 눈웃음을 보여주는 그녀.나는 애써 그것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돌아섰다.조용히 닫히는 그녀의 집 문과 그와 동시에 열리는 우리집 현관.
‘휴우..’
다시금 쾨쾨한 냄새가 나는,그리고 그녀의 방에 비해 너무나 단조로운 내 방의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인위적인 방향제 냄새마저 짜증이 났다.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어왔다. 나는 그녀에게 그저 대신 받은 택배박스를 건내준 것이 아니라, 그녀와 말을 할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건내줘 버린것은 아닐까?
우우웅..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너무너무 신기했어요^^앞으로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해요!잘자요 재하오빠-
언제 보냈는지, 수정이의 문자메세지가 들어와 있었다.이상했다.그동안 애타게 기다렸던 수정이로부터의 문자메세지가 왔는데도,이상하게 어깨에 힘이 빠지는 이유가 뭘까?
-수정씨도 잘자요.-
띵동.
옆방에서, 내가 방금 보낸 답장 메세지가 수신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오늘은,오늘은 왠지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벽에 귀를대고 감청하고 싶지 않았다.이유는 알수 없었지만,오늘은 싫었다.
평소에는 수족처럼 가깝고 반가웠던 음향기기들이, 오늘따라 왜이렇게 낯선지 몰랐다.열을 맞춰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 각종 버튼들과 스위치들이 매직아이처럼 무언가를 내 회상속에서 만들었다가 지웠다를 반복했다.
“얌마!뭘 멍때리고 자빠졌어?”
“아..죄송합니다.”
작곡가 형의 불호령이 떨어졌다.녹음이 진행될때의 녹음실이 얼마나 살벌한 분위기인지 잘 알면서..나는 그만 멍하니 정신을 놓다가 큐싸인을 놓쳐버린 것이다.
허둥지둥 장비쪽으로 손을 뻗었다. 준혁이 형은 그런 나를 힐끗 바라보고는 다시금 박스안에 있는,어쩌면 나보다 더 긴장해 있는 신인 여가수를 바라보았다.
“됐어.긴장풀고 천천히 가보자.”
“네!”
햇볕 한땀 비추지 않는 녹음실에 선글라스까지 착용하고 온 신인 여가수가 그렇게 밉지만은 않았다.저 자리에 서면 얼마나 긴장을 하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아마 선글라스로 라도 가리지 않으면 자신을 위해서 녹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할 것이다.덧붙여서 저 자리에서 저렇게 한없이 겸손하고 긴장하던 사람들도 1~2년이 지나 인지도 있는 가수가 되고 난 후면 거만한 모습으로 다시 후속 앨범을 내러 다른 모습으로 찾는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오케이.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무려 다섯시간에 걸친 녹음은 끝이났다.나는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번쩍 정신이 들었고,반대로 여가수는 이제서야 가까스로 잡고 있던 정신줄을 자유롭게 놓아주기 시작했다.
“야야.박재하.밖으로 나와봐.”
준혁이 형이 담배를 한대 물고는 내게 손짓을 했다.이마에 고인땀을 닦아내고는 그를 따라갔다. 그가 간 곳은 큰 창문이 있는 건물 복도였다. 벽에 붙어 있는 금연이라는 딱지는 이미 무시의 상징이 되어버린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너 뭔일있냐?”
헉..어떻게 아셨어요?혹은 왜요?라는 말은 양심상 나오지 않았다.아마 누가 봐도 내 모습은 무슨일 있는 녀석의 전형적인 행동패턴을 보이고 있었으니까.멍하니 있다가 큐싸인 놓치고, 스톱싸인 놓치고, 욕먹고, 그리고 나서도 멍해져 있고.
“죄송해요 형.”
“니가 평소에 약간..아니 좀 많이 어리바리한것은 인정한다만 그래도 너 녹음할때는 열심히 하던 놈이잖아.음악에 열정도 있고.갑자기 주식투자로 전재산 날린 놈마냥 입벌리고 뭐하고 있던 거야?”
“약간..일이 있어서요.”
“읊어봐.”
“에?”
“뭔지 들어야 할거 아냐 임마.”
그는 내게 꿀밤을 먹이려는 시늉을 해보였다.너무나 가볍게 보이긴 해도 좋은 사람이었지 이 형...하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말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 날, 인애는 분명 술에 취해 있었지만,끝까지 취해있지 않았다.마지막에 정확하게, 그리고 조금도 술에 취하지 않은 톤으로 내 이름을 불렀으니까.행위 후 곧바로 그녀가 침대에 얼굴을 묻은것도 내가 단순히 생각했던 취기로 인한 졸음이 아니었다.뭐라고 말할수는 없지만, 분명 인애는 완전히 깨어난 상태 였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복잡했다.
아침에 일어나 연락을 받고 녹음실에 오기까지,나는 땀에젖은 옷 그 상태 그대로 귀에 이어폰을 꽂은채 잠들어 있었다. 방안에 인애의 술냄새가 남아 있는거 같아 괴로워 몇번이고 방향제를 뿌렸다. 그녀의 체취는 없어졌을지 모르지만, 내 기억안에 있는 인애의 슬픈 눈빛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러고 나서 집을 나올때 내 고개가 옆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었다.이미 출근했을게 뻔한 그녀의 집 현관문을 나는 한참이나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잡을수 없는 허상이나 다름없었다. 한 발자국만 옆으로 내딛으면 그녀의 현관앞에 설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형의 기운이 나를 가로막는 것처럼, 현실 상에는 붙어 있는 그녀와 내 집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내 말을 듣는 준혁이 형의 눈빛은 차츰 게슴츠레 해지더니,이내 동공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기 시작했다.놀라울테지. 당사자인 나도 아직까지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뭐어?이..인애씨랑?”
“...네.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됐어요 라니 그게 말이 돼?”
좀처럼 놀라지 않는 성격인 그가 이렇게 펄펄 뛰는것을 보니 내 말이 적잖이 충격적이긴 한 모양이다.무리도 아닌것이.. 내 주변의 인물은 모두 인애를 알고 있으니까. 반대로 인애의 주변에서도 나를 다 알고 있었다. 아무리 붙어다녀도 절대 스캔들이 날 염려가 없는 까닭일까? 하긴 사귄다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사람들이 보는것은 새까맣고 꾀죄죄한 인애의 어린시절이 아니라, 세련되고 예쁜 지금의 인애의 모습이니까. 내가 젖먹이 때부터 친구라는것을 배제한다 하더라도 그녀가 내 옆에 있다면 다들 ‘아..친한 친구구나’라고 생각하기 일쑤였다.
“와..그건 정말 말이 안되는데..”
준혁이 형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도 인애의 성격을 잘 아니까,아마도 그렇게 말을 했을지 모른다.하지만 그날밤의 일을 디테일하게 설명해줄순 없었다. 일이 이모양 이꼴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녀는 내 친구니까.남자들끼리 술자리에서 안주거리 삼아 이야기하는 음담패설의 범주에 인애를 두고 싶진 않았다.
“너 임마..소꿉친구와 자는것은 타부인거 몰라?”
“타부요?”
“그래.절대 해선 안되는 거란 말이야. 너 생각해봐라. 너한테 인애만한 친구가 어딨냐? 그렇게 남자보다 의리있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친구를 너는 한방에 잃은거야. 바로 요놈 때문에 임마.”
그는 라이터를 검지와 중지사이에 끼우고는 내 바지 후크쪽을 쿡쿡 하고 눌렀다.평소같았으면 기겁을 하고 뒷걸음질 쳤겠지만 지금은 달랐다.조금 과격할뿐 그의 말은 틀린게 하나도 없으니까.
“저도 미치겠어요.그거 때문에..”
아주 많이 망설여졌지만,나는 결국 준혁이 형에게 수정이의 일도 털어놓을수 밖에 없었다.남자친구가 있었으며,내가 듣고 있는 사이에 격렬하게 사랑도 나눴고, 또 알면서 차이러 고백하러 갔다는 그 말과 함께.
물론 당시에 내가 그만큼 취했으며, 인애를 여자로 보았던 게 타당하다는 핑계를 대려는 것은 아니었다.해결책이 없더라도 누군가가 말을 들어준 다는 것은 혼자서 썩히는 것보다 백배의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이 형은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몇천배 복잡한 사람이니까, 조언을 듣고 싶었다.
“음...어째 스토리가 좀 이상하다? 굉장히 꼬이는 기분인데..”
나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수정이에 관한 일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심란한데, 인애와의 문제까지 겹쳐버린 것이다.다 등신같은 내가 자초한 일이겠지만,내 잘못 이기에 어디가서 하소연조차 할 수없는게 더더욱 답답했다.
내 두번째 고해성사,그러니까 하소연이 끝나자 금세 적막이 찾아들었다.연애라는 분야에 닳고 닳은 준혁이 형도 단숨에 묘안을 낼수 없을 정도로 내가 제시한 문제는 너무나 어려운 모양이었다.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한참이나 창밖을 응시하며 거친 연기를 뿜어대었다. 매연보다 담배연기를 더 못견뎌하는 나도 묵묵히 그것을 참으며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기다렸다.차라리 쌍욕이라도 좋으니까, 내 우유부단함을 철저하게 비난해준다면 차라리 속이라도 편할거 같았다. 하지만, 다시 그의 입이 한참만에 열리고 흘러나온 말은 내 예상과는 정반대 성격의 것이었다.
“따라와. 나랑 잠깐 갈데가 있으니까.”
눈 앞에 수십명의 여고생들이 아른아른 거렸다.학교를 마치고 바로 온 것인지 하나같이 교복차림을 하고는, 또 하나같이 손에 큰 플랜카드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 까치발을 들고 건물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여긴 왜 온거에요?”
“일이 있어서.니가 좀 도와줘야 겠다.”
“일이요?”
오늘 녹음이 끝난 신인가수를 대동하고 그가 찾아온 곳은 다름아닌 방송국이었다. 인애의 야무진 따귀를 맞았었던 자리가 내 눈에도 보였다. 어째서지? 그는 방송국에 자주가는 스타일이 아니었다.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럴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오늘 녹음이 끝난 여가수와 그의 매니져 까지 끌고 방송국에 행차한 거다.
“야.저 쪽 문으로 들어가.빠순이들 차로 치지 말고.”
게다가 무슨 연유인지 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차하고 담쌓은 삶이 몇년째인데,그것도 뒤에 매니져가 있는데도...여튼 간만에 하는 운전에 살짝 떨면서도 잠자코 그가 시키는 그대로 차를 몰아 안으로 진입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수위가 우리의 차를 저지시키고는 창문을 두드리며 물었다.준혁이형은 너무나 능숙하게 뒷문의 창문을 열더니, 잠자코 앉아있던 그 여가수의 팔을 쑥 잡아끌며 수위에게 보여주었다.
“아저씨 얘 알죠? 신인인데 얼마전에 버라이어티에도 나오고 그랬는데..”
그는 준혁이 형의 말을 듣고도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뭐..저 여가수도 요새 미인의 트랜드대로 성형을 했으니 이 아저씨의 시선에는 그 얼굴이 그 얼굴이겠지만 말이다.
“아놔..여기 ID카드도 있잖아요.”
준혁이형은 최후의 보루라는 듯 자그마한 신분증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처음부터 저렇게 들어갈 것이지..수위는 결국 살짝 목례를 하고는 입장하라는 수신호를 전달해 주었다.
“그 카드는 어디서 났어요?”
“그냥 아는 사람꺼 빌렸지.”
“에?”
“너도 이 일 오래해봐. 다 어찌저찌 하다가 요런거 하나씩은 들고 다니게 돼 임마.”
말해 무엇하랴.사실 가장 묻고 싶은 것은 내가 이 방송국에 온 이유였다.한창 주가를 올리며 저작권 랭킹 탑 파이브에 진입하려는 작곡가도 자주 올일이 없는곳이 방송국인데,하물며 그 작곡가의 스탭인 내가 이런 곳에 올 이유는 전혀 없어 보였다.
주차를 하고 나니 그가 나에게 가방하나를 내민다.내가 고개를 갸웃하니 준혁이 형이 팔꿈치로 나를 쿡 하고 찔렀다.
“그냥 들어.그런 역할이라도 해야 자연스럽게 들어가지.”
“제가 왜 자연스럽게 방송국을 몰래 들어가야 하는데요?”
“아 글쎄..내가 일이 있다니까 임마. 오늘 녹음한거 후하게 처줄테니까 따라와.”
안그래도 심난한데, 이 형은 도대체 무슨짓을 하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답답했지만, 사실 거부할 권리는 없었다. 내가 정신줄을 놓고 있어서 오늘 하루 녹음에 지장을 주었으니 이 정도 일은 달갑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상담을 해주다 말고 잡일이라니..한숨이 나왔지만 불만을 표시하진 않았다.
“여어~~잘 있었어?”
준혁이 형이 지나가자 몇몇의 가수들은 그에게 꾸벅 하고 인사를 했고, 내 뒤를 따르던 신인 여가수는 또 그 가수들에게 인사하느라 바빴으며,또 그녀의 매니져 역시 초짜인 모양인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풴ㅈ아가기 바빴다.나만 멀뚱히 정체불명의 가방을 들고 흡사 다섯살 먹은 꼬맹이마냥 준혁이 형의 뒤를 쫄래쫄래 풴ㅈ아가는 형상이 되어 있었다.
“음..여긴가?아..아닌가?”
준혁이 형은 자신만만하게 들어간 것과는 달리 이상하게 갈팡질팡 하더니만,이윽고 그녀와 매니져를 자신의 앞에 불러세웠다.
“자자.신인은 발빠른 홍보인거 알지?쟤 데리고 다니면서 쫙 홍보도 하고 그래.”
“아..그런것까지 신경써 주시다니..감사합니다.”
우리의 신인 매니져씨는 신인가수를 대동한채로 감격에 어린 눈빛으로 준혁이형에게 구십도로 인사했다.잘나가는 작곡가를 섭외한것은 순전 소속사의 몫이었다 쳐도, 작곡가가 이런일까지 신경써준다는 것에 크게 감동한 모양이었다. 물론 평소의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나는 의심어린 눈으로 형을 바라보았지만 말이다.
“재하야 그 가방 줘봐.”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것을 내밀었고, 그는 가방의 지퍼를 쫙 하고 열었다.보기에도 숨막히는 시디들이 빼곡히 가방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게 뭐에요?”
“뭐긴 뭐야 임마.CD지.”
“그건 아는데 무슨 CD..”
문득 CD의 표지가 눈에 들어오자 나는 말을 멈췄다.얼마전에 준혁이 형이 프로듀싱한 또다른 신인가수의 CD였다.
“갑자기 이건 왜 갖고 왔어요?”
“홍보하려고 그러지 임마. 라디오에서 엉아 노래를 팍팍 틀어줘야 노래가 뜨고, 노래가 떠야 엉아도 저작권료좀 먹지 않겠어?”
일리없는 말은 아니었다.하지만 무슨 작곡가가 지 곡을 녹음한 가수를 직접 홍보한단 말인가. 내가 아는 준혁이 형은 귀찮아서라도 이런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게다가..
“자자.어서 이걸 라디오 피디들에게 돌리고 와라.”
“제가요?”
“그럼 여기 누가 있어?”
“그걸 왜 제가해요?”
“그럼 내가 하리?”
당당해 보이기 까지 하는 형의 표정에 내가 어이없는 얼굴을 해보이자, 그는 내 빠박 머리를 찰싹 하고 때렸다.
“아..눈치 없는 쉐키! 그냥 엉아가 하라면 해 이 좌식아!”
“제가 무슨 매니져도 아니...알았어요 할게요.”
“우선 딱 10장만 돌려.엉아는 방송국 구경하고 있을테니까.알긋냐?”
“네에..”
그는 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썩소 한방으로 일축시켜 버리고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나는 양손에 CD들을 든 상태 그대로 인포에 가서 라디오 방송국의 층수를 확인해야만 했다.
‘왜..하필 라디오 방송국에 가는걸 시키는거야..’
왜 하필 지상파 3사중 인애가 있는 이 방송국에 와야했던 걸까? 나는 계단앞에서 한참이나 망설여야만 했다. 가장 편하게 보는 사이인 인애가 이렇게 어려운 존재가 될줄이야.마주치면 어쩌지? 그리고 인애가 CD들을 잔뜩들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뭐라고 해야하지?
땅이 꺼져라 푹 하고 한숨이 나왔다.왜 이런일을 시키는지 준혁이 형이 원망스러웠다.나는 최대한 얼굴을 가리고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라디오 방송국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PD라는 직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이들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고,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테잎들을 잔뜩 손에 들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이들도 보였다.뭐..그들의 공통점이라면 CD10장을 들고 똥마려운 강아지 마냥 서성대며 안절부절 하는 빠박이 하나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겠지만.
“저기..신인가수..인데요.음반나왔는데 들어보시면 어떨까 해서..”
“가수라구요?”
용기있게 말을 걸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니 얼굴로 가수?’라는 의아함과 신비감이 가득담긴 적대적 눈빛이었다.
“아뇨...제가 아니구요. 저는 그..작곡가 최준혁씨 음향기사인데..암튼 말하자면 긴데요. 저희가 녹음한 겁니다.한번 들어보심이..”
사실 매니져들 사이에서는 음료수와 함께 CD를 껴주는게 천편일률적이고도 식상한 홍보 방식이지만, 사실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을것만 같았다.
“거기다가 놓고 가요.”
직업이 저거니, 나같은 놈을 얼마나 많이 봤을까. 가수치곤 평범하게 생겨서 잠시 적선되었던 관심은 다시금 그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린 듯했다. 그들이 서있는 곳에 애매하게 위치한 난간위에 CD를 올려둔 나는 살짝 몸을 돌려 옆에 있는 통로로 들어갔다.
-아 그러니까..그게 말이 되냐고요!-
아..잘못들어온 모양이다. 열띈 회의와 토론이 이어지고 있는 미팅룸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앙칼진 여자의 목소리.어라?많이 들어본 목소리인데?
왔던길을 돌아 나가려 등을 돌렸던 나는 그 자세 그대로 뒤로 목을 쓰윽 빼고는 미팅룸을 바라보았다. 남자 둘과 여자셋.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 한명이 이마를 움켜쥐고 볼펜을 돌리고 있었다.딱 봐도 방송일에 쩔은 PD의 모습이었다.
‘인애잖아..’
그의 앞에는 인애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여전히 하얀 얼굴위로 까만 머릿결을 새초롬하게 묶어 올린 채로. 그녀는 대본으로 보이는 A4용지들을 움켜쥐고는 내가 알아들을수 없는 용어를 써가며 PD를 공격하고 있었다.
-아휴..알았어요 알았어.서작가 맘대로 진행해.청취율 조사 조만간 들어가는 거 염두에 둔거 맞지?-
-무슨 남자가 그렇게 깡이 없어요?두고 보라니까요!-
인애를 보면 당황할줄 알았는데, 반대로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역시 이 아이는 씩씩하구나.소심한 나와는 달리 어디에서나 자기 의견을 꼭 피력하고 마는 여장부. 화장기 없이 다니는 털털한 성격이 오히려 예뻐 보일수 밖에 없는 인애의 모습. 외모는 많이 변했지만,구슬치기를 하던 20년전의 인자의 성격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그 모습까지.
‘어..?’
이크.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애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나는 후다닥 서둘러 복도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촤아아악!
아..최악이었다.서두르다가 그만 들고있던 9장의 CD들을 놓쳐버린 것이었다.경쾌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추락하는 그것들을 서둘러 줍고 있을 그때에,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너 여기서 뭐하냐..?”
에휴. 이건 정말 빼도박도 못하는 찐따의 모습이었다.형광등 조명을 빠박머리에 반사시키며, 궁댕이 골을 고대로 보여주는 것을 알면서도 CD를 줍는 내 모습. 빨리 벗어나야 할것만 같았다.
“야.박재하.”
아..습관이란 무서운 것이었다.인애의 말 한마디에 나는 반사적으로 응..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었다. 행동을 취한 후에 움찔하며 후회해도 그것은 너무나 늦은 것이었다.인애의 억양은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뭐하냐고 너.”
“아..그게..”
당황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내 뺨을 때리며 다신 나타나지 말라고 했었는데..아직 그녀의 화가 풀리지 않았을텐데..당황을 하니 더더욱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그게..신인가수..음반 홍보..때문에.”
인애의 동그란 눈이 나를 향했고, 나는 양심에 찔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우발적 범죄를 저지른 죄인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법관앞에서가 아닌 피해자 앞에서일 테니까.
“매니져로 취직했냐?”
“아..그건 아니고..암튼 일이 그렇게 됐어.방해해서 미안해.금방 갈게.”
나는 허둥지둥 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수습해서는 양손에 꼭 쥐고 앞으로 달려갔다.아니, 달려가려고 했다.
“컥!”
인애의 약력이 새삼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그녀는 내 티셔츠의 목 뒷부분을 잡고 달려나가려는 나를 잡아세운 것이었다.목젖에 티셔츠 라인이 걸리는 통증에 나는 그만 숨을 집어 삼키고 말았다.
“따라와.”
인애는 성큼성큼 앞장을 서서 어디론가 걸어나갔다.도망칠까?기회는 지금인데..하지만 그런 바보같은 생각은 생각에서 끝내야만 했다.행동으로 나와서는 더욱 더 찐따스러운 모습일테니까.
“너 왜 방송국에 얼쩡거려?”
인애가 다다른 곳은 자판기 앞이었다.그녀는 살며시 팔짱을 끼고는 미안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기가 겁이 났다.늘 그랬듯이 인애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미안한 마음도 마음이지만, 평소와는 달리 냉정한 표정을 짓는 인애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낯설어서 무서웠다.
“준혁이 형이..시켜서..”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내 입가에서 들려오자,인애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다.
“바보야.그 사람이 시킨다고 이런걸 해?”
“아니..뭐..그게..”
이상하게도 인애의 톤은 한층 낮아져 있었다.용기를 내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차분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거 줘.”
“응?”
“그 CD들..달라고.내가 전달해줄게.”
“아..응.”
나는 쭈뼛쭈뼛 양손에 들고 있던 그것들을 모아 인애에게 건내주었고,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다가오며 내 손에 들려있던 CD들을 잡아채듯 끌어당겼다.
“어..?”
멍하니 서있던 나는 내 손에 무언가 까칠한 느낌이 전해지는것에 깜짝 놀라 내 양손을 바라보았다.내 손에는 접혀져 있는 만원짜리 지폐 두장이 들려있었다.
“그걸로 택시타고가. 뭐하러 이런일을 해. 그럴거면 그 시간에 일 그만두고 작곡연습이나 해.”
“아..인애야 이건 괜찮은..”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애는 나를 스쳐 지나가버렸다.오늘따라 유난히 높아 보이는 인애의 구두굽 소리가 또각또각 하고 울리는가 싶더니 이내 멈춰섰다.
“그 여자하고는 잘 되가?”
나는 여전히 영문을 알수 없는 눈동자를 하고는 인애의 말에 대답하지 못한채로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본의 아니게 침묵으로 일관해 버리게 된 내 반응에, 인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주 자주 얼굴비춰. 애인있어도..열번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잖아.”
다시금 들려오는 또각 거리는 구두소리.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그렇게, 저 멀리 복도끝으로 멀어져가는 인애의 뒷모습만 계속해서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뜻일까..’
준혁이 형에게 대충 들어간다는 문자를 보내놓고는 집으로 향했다.난 왜이렇게 바보처럼 태어났을까?왜..왜 항상 내 옆에 있는 친구의 마음도 읽지 못하겠는 걸까?
내 자신을 탓해도 알수 없는것은 어쩔수 없었다.어째서 인애가 나를 보고 화를 내지 않았을까?그리고..그 아이가 말한 마지막 그 한마디의 의미가 뭘까?내가 아는 인애는 절대로 내숭을 떨며 말을 빙빙 돌려 하는 그런조는 아니었다.
뚜두두두.
집에 도착해서 도어락을 누르는 내 손가락에 조차도 힘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피곤했다.몸이 힘든게 아니라, 마음이 너무나 피곤하고 무거웠다.
-그래..아직도 안왔다니까?택배사에 조회해 보면 수령되었다고 나와.이거 사기인가봐!-
침대에 그대로 쓰러지려 했던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이 목소리는..
-아..진짜 배송조회해도 소용없고, 업체는 보냈다고 하고 이거 어떡해?이럴줄 알았으면 회사로 배송시키는건데...-
틀림없었다.벽에 귀를 대어보니 옆방에 그녀..수정이가 있는 것이었다.누군가와 통화를 하는듯한 목소리.내 시선은 반사적으로 현관앞에 놓인 택배박스로 향했다가 다시금 벽에 걸린 시계쪽으로 움직였다.
‘7시..밖에 안되었는데?’
평소 그녀의 행동패턴을 생각하면 턱없이 이른 시간이었다.늘 내 방에서 모든 사건이 종결되야만 그녀가 귀가했었고, 또 내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그녀는 나가곤 했었기 때문이었다.
‘전해..줘야 하나?’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벨을 누르고 택배박스를 전해줘야 하는데,내가 옆집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의 모습을 보는것에 용기가 서질 않았다.눈치없이 식은땀이 흘러내리고,별일 아닌데 가슴이 뛰었다.
-알았어.연락좀 자주하고..오랜만에 일찍 퇴근하니까 너무 좋다.또 전화해!-
그녀는 명랑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고 있었다.이윽고 티비의 전원이 켜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여전히 벽에 귀를 댄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어쩌지..?’
사실 답이 나온것이나 다름없었다.그냥 두면 속옷이 든 택배를 빼돌린 변태가 될것이고, 망설이고 계속 미룬다 한들 언젠가 마주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벌떡 일어나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 보았다.삭발을 한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베어 나오는 땀방울들.어떻게 해야 할까?연기를 해야 할까?이제서야 수정씨가 내 옆집에 산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넘길 머리카락도 없는 주제에 거울을 보며 손으로 연신 머리통을 비벼대었다.고작 옆집벨을 누르는게 뭐 대단한 거라고 택배박스를 들고 후후~하며 임산부마냥 라마즈 호흡을 하는 내 모습이 너무나 한심했다.
“누구세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벨을 누르니,벽너머 들려왔던 그녀의 목소리가 두꺼운 철문너머로 들려왔다.조금씩 들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내 심장소리도 내 목을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저..저기..옆..옆집인데요.”
“네?”
“택배가 와있어서요.”
“아..잠시만요!”
무언가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아 싫다..이 와중에도 옷을 안입고 있었기 때문일까?하는 등신같은 상상을 하는 내가.
“어어어?”
문이 빼꼼히 열렸고,자그맣고 하얀 얼굴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화장기 없는 뽀얀 얼굴과, 그 위로 드러나는 반짝거리는 두 눈망울이 나를 향하는가 싶더니,이윽고 작고 반짝이는 입술이 살며시 열리며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스님?”
아..바보 같이 나는 계속 마음속으로 연습하던 리액션을 칠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말았다.오!이런 우연이!수정씨?라고 하려고 했었는데 그 말은 그녀의 하얀 얼굴을 보는 순간 목구멍으로 꿀꺽 삼켜버렸다.
“아..아..”
하지만 오히려 어리바리한 내 모습이 ‘나 지금 이런 우연때문에 참 많이 놀랐다’라는 것을 더욱더 잘 보여주는 것인지,수정이는 손뼉까지 쳐가며 신기해 했다.
“옆방사는 사람이 스님이었어요?우와와!”
신기한듯 빙그레 웃는 그녀의 미소가 아름다워 나는 그만 얼간이 같이 따라웃고 말았다.조그마한 박스를 들고 있는 내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아..안녕하세요.택배가 와있어서.”
“아!고마워요!”
“전해줄 시간이 없어..서요.”
나에게 남친이 있다고 밝히고,그것에 실망한 내 뒷모습을 보아서..미안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내가 처음 반했던 그 미소 그대로 변함없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아..들어오세요!”
“네에?”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튀어나와 버렸다.들어오라니..그냥 이렇게 마주서서 보는것도 힘든데..
하지만 내 의지와는 달리,마법에 걸린것처럼 들어오라는 그녀의 손짓에 이끌리듯 현관앞으로 한발 내딛어 버리고 말았다.그녀는 내 손에 들린 택배박스를 받아들더니 선반위에 올려두었다.
달콤한 향기가 났다.
상상속에 등장하던 그녀의 방과는 조금 달랐다.핑크빛 공주톤일거 같았는데..의외로 연두색깔로 톤을 맞춘 가구며 집기들이 내 맘을 편안하게 해주는 듯했다.연두빛 책장과 서랍장들,그리고 연두빛 톤의 침대까지도,모두 하나가 셋트인 것마냥 앙증맞고 깔끔했다.방안을 둘러보며 멍해져 있을때, 하늘하늘한 치마와 집에서 편하게 입는 가디건을 입은 그녀가 손짓했다.
“와..너무 신기하다.그쵸?커피 드실래요?”
“네?아..네..”
엉거주춤 바닥에 놓인 조그마한 티테이블 앞 방바닥에 털썩 하고 앉았다.나도 모르게 옆에서 열심히 커피를 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남색 가디건 위로 하얗게 뻗은 목선과 얼굴선.그리고 귀 뒤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길고 가녀린 손가락까지.
고개를 떨궈 버렸다.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번도 연락이 없었던 그녀였다.하지만 나를 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마치 반가운 사람을 만난것처럼, 수정이는 나를 보고 활짝 웃어주었다.
“와..신기하네요..그쵸?언제부터 여기 살았어요?”
“아..저는 몇달 되었어요.”
“전 얼마 전에 이사왔어요”
헤이즐럿 커피를 내밀며 싱긋 웃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하마터면 알고 있어요 라고 대답할 뻔했다.생글생글 웃는 그녀의 표정과는 다르게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아 맞다!저거 착불일 텐데..얼마였어요?”
“에?아..아니에요.”
나는 깜짝 놀라 손사레까지 쳤지만, 이미 그녀는 택배박스에 붙은 송장의 금액을 확인하며 지갑을 열고 있었다.
“무슨소리에요.받아주셨는데 드려야죠.”
수정이는 싱긋 웃으며 억지로 내 손에 돈을 쥐어주었다.가녀린 손끝에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뭔가가 찌릿하는 것만 같았다.그리고는 바로 커피잔을 들고 내 맞은 편에 앉는 그녀. 뭐라 콕 찝어 말할수는 없지만 혼자 사는 내 방에서 절대로 느낄수 없는 미지의 향기가 났다.
“아..저기요.”
“네!”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몇번이고 묻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물어보지 못했던 그 말.
“묻고 싶은게 있어서요.”
“뭔데요?”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나를 비추었다.
“사실..수정씨를 처음본게..지하철에서 였어요.”
그때를 생각하니 차분해졌다.요란하던 내 안의 떨림도 차츰 안정궤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순수하게 그녀에게 반해버렸던 그때의 감정이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것일까?그 이유는 나도 알수 없었다.수정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내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근데...여기에 사는 거였으면..그때 왜 지하철을 타고 있었나요?그날 분명히 일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잖아요.”
“아..!”
수정이는 내 말에 잠시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는 생각이 난듯 손뼉을 쳤다.자연스레 그녀의 눈이 초승달 처럼 웃었다.
“외근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그때.근데 겨우 궁금한게 그거 였어요?”
그녀는 싱겁다는 듯 살짝 소리죽여 웃었지만,사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큰 문제었다.아니,문제 였었다.우리 옆집에 살고,우리 동네로 직장을 다니는 그녀가 지하철에서 처음 봤다는 것은, 어쩌면 옆방의 그녀가 수정이와 동일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희망이었기 때문이었다.뭐..그런건 진작에 깨지긴 했었지만.
“아..네. 사실 그게 너무 궁금했어요.”
“하하 재하오빠는 엉뚱하네요.그럼 지금 제 방에 오자마자 지하철 생각부터 난거에요?”
그녀의 말에 약간은 뜨끔했다.나야 그녀가 내 옆방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녀 본인도,나도 오늘에서야 안 사실일테니까.
“웹 디자인 일을 해서..외근이 종종 있어요.물론 그것보다 야근이 훨씬 많지만.”
“그..그럼 오늘은 일찍 온거네요?”
“음..맞아요.저번에 오빠랑 이야기 할때도 쭉 회사에 있던 상태였으니까요.”
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색했다. 여자를 짝사랑하는 남자와,그리고 눈 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을 짝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는 여자가 단 둘이 있는 상황은, 주된 토픽이 끝나버리면 바로 적막이 찾아와 버렸다.
그녀가 살짝 커피잔을 만지작 거렸다.밝은 성격의 그녀지만 대화가 좀처럼 이끌리지 않으니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럼..들어갈게요.주무세요.”
“아..가시게요?”
“네.커피 잘마셨어요.”
미련없이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나혼자 설레여봐야 소용없었다.수정이는 내게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으니까.그냥 고마움을 표시한것이고, 기본적인 예의가 있는 여성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단지 내가 설레이고,좁은 공간에 단 둘이 있는게 행복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계속 이 자리에 비비고 있는것은 그녀의 감사의 표현에 대해서 예의없는 행동으로 되갚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하고 나니,마치 찬물로 세수를 한것 처럼 정신이 들었다.
“들어갈게요.”
“아!재하오빠 택배 고마워요.”
“아..뭘요.늦게 전달을 해서..”
“그건 제가 매일 늦으니까요.”
그제서야 다시금 눈웃음을 보여주는 그녀.나는 애써 그것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돌아섰다.조용히 닫히는 그녀의 집 문과 그와 동시에 열리는 우리집 현관.
‘휴우..’
다시금 쾨쾨한 냄새가 나는,그리고 그녀의 방에 비해 너무나 단조로운 내 방의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인위적인 방향제 냄새마저 짜증이 났다.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어왔다. 나는 그녀에게 그저 대신 받은 택배박스를 건내준 것이 아니라, 그녀와 말을 할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건내줘 버린것은 아닐까?
우우웅..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너무너무 신기했어요^^앞으로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해요!잘자요 재하오빠-
언제 보냈는지, 수정이의 문자메세지가 들어와 있었다.이상했다.그동안 애타게 기다렸던 수정이로부터의 문자메세지가 왔는데도,이상하게 어깨에 힘이 빠지는 이유가 뭘까?
-수정씨도 잘자요.-
띵동.
옆방에서, 내가 방금 보낸 답장 메세지가 수신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오늘은,오늘은 왠지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벽에 귀를대고 감청하고 싶지 않았다.이유는 알수 없었지만,오늘은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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