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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 <10부>

10부


머리가 무거웠다.

흡사 삼장법사의 주문에 의해 조여지는 금고아를 착용한 손오공처럼, 내 머리를 누가 양옆에서 짓누르며 압박하는 것만 같았다. 속이 뒤집힐 것처럼 쓰리고 괴로웠다. 나는 머리를 한껏 감싸쥐며 천근과도 같이 느껴지는 눈꺼풀을 힘겹게 위로 들어올렸다.

‘여긴..?’

딱딱하기 그지 없는 내 방의 침대 감촉과는 사뭇 다른 넓고 푹신한 침대위에 내가 누워있었다. 부드러운 이불을 살짝 젖히고 주변을 둘러보니, 상당히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집 전체가 방 하나로 이루어진 넓직한 공간이었다.거대한 벽걸이 티비를 비롯해서,가구 하나하나와 인테리어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꾸며놓은 것처럼 과도하게 깔끔하고 세련된 공간이었다.

“일어났냐?”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여기가 누구의 집인지 파악할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의자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커피를 홀짝 거리는 준혁이 형의 모습을 발견할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방 한구석에 놓인 악기들과 음향기기들에게 자연스레 눈을 돌릴수 있었다.

“제가 형 집에서 잔거에요?”

“그걸 몰라서 묻는건 아니지?”

“아휴..어쩌다가..”

머리를 긁적거리자 그는 내가 한심하다는 듯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정작 답답한 것은 나였다.수정이와 남자친구의 행동에 화가 나서 집을 뛰쳐나오고,근처 포장마차를 간 것까지는 분명히 기억이 나는데,내가 어째서 이 형의 집에 누워있는지는 전혀 감히 잡히지 않았다.

“왜 그렇게 퍼마신거야?”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술을 못하진 않지만 즐기지 않는 내가 술에 쩔어 일어나는 것은 준혁이 형에게도 쉽게 볼수 없는 광경인 모양이었다.

“수정이랑..남자친구가 옆방에 있어서요.”

목이 갈라져서 쉰 목소리가 나왔지만, 그는 내 이야기를 듣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채 다시금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언뜻 보면 굉장히 뜬금없을 내 대답에 그는 조용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언제부터 이 형이 이렇게 진지해졌을까? 그런 생각이 잠시 고개를 들었지만 곧 그가 내미는 차가운 냉수한잔을 받아들고 벌컥벌컥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너,어제 우리집에 어떻게 왔는지 알아?”

“어떻게 왔다니요?”

그는 담배를 피워 물고 후~하고 허공에 연기를 뿜었다.질책 보다는 안쓰러움이 깃든 그의 표정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인애씨한테 전화왔었어.너 데려가라고.”

“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인애..인애? 어째서 인애가 등장을 한단 말인가.나는 분명 혼자서 포장마차에 갔었다. 적어도 아직까지 보존 되어 있는 어제밤 내 기억속에는 인애가 등장하지 않았다.

“인애..가 왜요?”

“그걸 왜 나한테 묻냐? 가보니까 넌 포장마차 테이블에 뻗어있고 인애씨가 그 앞에 있더만.”

“에?”

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 쓸대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거 같지는 않았다.나는 재빨리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통화 목록을 누르니,발신 목록에 인애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것을 확인할수 있었다.순간 눈앞이 캄캄해 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얼른 준혁이 형을 바라보았다.

“아주 가관도 아니더만.인애씨를 붙잡고 혼자 했던말 또하고 했던말 또하고..인애씨는 가만히 술만 마시더라.너 요새 왜그렇게 혼이 빠져있냐?”

그의 질책에 끊어져 버린 정신을 가다듬으려 어제의 일에 집중해 보았다.온통 수정이로만 이루어진 기억들.그리고 기억들의 파편들은 좀처럼 붙잡기 힘든 건너편 세계에 있는 듯했다. 기억이 나질 않도록 술을 마시다니...사실 자의에 의해 그렇게 마신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어째서..어째서 인애에게 전화를 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술에취해 있다는 그런 제정신 아닌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인애를 불러내 버리고, 또 그녀를 귀찮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애가 뭐라는데요?”

“신경은 쓰이는 모양이지?”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이질감이 들었다. 저 형이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하다니.음악에 관련된 것 이외에는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수 없었던 그가 어째서 저런표정을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어제 인애가 있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상상속에서 떠올린 인애 역시 내 상상속에서 저 형과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 말 없었어.너가 불러냈을때는 너무 취해 있었다 하더라.미안하지만 부탁한다고. 그리고 내가 태워준다는 말도 거절하고 택시타고 가버렸어.”

그제서야 상황판단이 제대로 되었다.인애가 내 뒤치닥 거리를 했구나.방송국에서 만나 미안하다고 까지 말을 해버리고는..

“근데..어제 실컷 마신 그 술은 수정이를 완전히 포기하겠다라는 의미의 술이었냐?”

바로 대답할수는 없었다.내가 마신 술의 의미는 그가 말한 것과 정반대의 것이었고, 수정이를 잊으라 권유했던 그에게 쉽게 내뱉을수 없는 말이었다.

“아뇨.”

“아니라니?”

그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내가 사랑에 있어서 ‘바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그 일테니까..어쩌면 내 대답이 너무나 의외였을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잊으려는게 아니에요.”

“그렇게 갖고 싶어?잘 지내는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고 싶을만큼?”

“갖고 싶은게 아니에요.제 것이 아니라도 좋은데..그 남자에게 속해 있는게 싫어요.잘 지내는걸로 보이진 않거든요.”

“말했듯이, 그건 둘만의 사정이 있을수도 있는거다.몰래 촬영하는거? 단지 그거때문에 열받아 있는거 아냐?”

마음속으론 아니라고 하지만 말로써 반박할 길이 없었다.다시금 입에 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단순히 내가 반한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하찮은 오지랖이 아니었다.왠지 싫었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어제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형 말이 맞을수도 있지만..끼어들 생각이에요.”

내 말이 의외였는듯,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내가 본인의 충실한 스탭이자,사랑에 적극적인 성격이 절대로 아닐거라고 믿는 그에겐 놀라울 만한 일일지도 모를것이다.

“어떤 식으로?”

“적어도..형이 말한대로 그게 둘만의 일이라면..그 카메라가 발각 되었을때 수정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이번엔 그의 말문이 막혔다.그는 두번째 담배를 피워물고 나를 응시했다.

“형 말대로, 정말 그것도 사랑으로 감싸줄수 있다면야 아무런 일이 없겠죠.”

“아무런 일이 없다면?그럼 너도 그 둘 사이에서 빠져줄수 있다?”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아프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 테니까. 나를 알아봐 달라고 하는게 아니었다.적어도..그런 자식에게 수정이가 있는게 싫었다.

“좋아.그럼 어떤방식으로 할건데?”

“알게 할 거에요.수정이에게..자기가 사귀는 남자가 어떤놈인지 알릴거에요.”

“후우..이 단순한 놈아.”

그는 철없는 동생을 마주대한 형 처럼 깊게 한숨을 쉬어버린다. 내가 너무 어리다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에 자존심은 상하지 않았지만,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끊고 사는 그가 보이는 행동은 사뭇 낯설었다.

“니가 정말 좋아한다면 꼭 그렇게 하는것이 능사일까?”

“무슨뜻이에요?”

“좋아.니 말대로 수정이에게 알린다 치자. 그러면 니 마음에 허전한거는 맥궈 질거라고 생각하는거야?”

그의 질문의 의도는 잘 알고 있었다.그래..아마 그럴거다. 그냥 둘 사이에서 하나의 과오를 일러바치는, 이간질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거니까.아마도 나는 내 무능함을 더 탓하게 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차라리 당당하게 수정이를 꼬셔.니가 그런 놈에게 맡길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짜증이 난다면,당당하게 물을 먹이라고. 그 카메라의 존재를 알리는게 너한테 수단이 될수는 있어도 목적이 되지 말라는 거야.”

답답해서 머리를 마구 긁어버렸다.형의 말은 옳았다. 내가 무슨 수로 그녀에게 의심을 받지 않고 그 카메라의 존재를 알릴까?방법은 다양하겠지만 그것은 그저 둘을 떼놓기 위한 목적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녀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라고 포장하면 그만일 테지만.

하지만 형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그것을 이용해서 수정이를 갖지 않을것이라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말라고 나에게 충고하는 듯했다.

“나도..나도 그러고 싶다구요.”

다른 누구보다 답답한 것은 내 자신이었다.수정이와 대화를 하는것 만으로도 설레여 했던 나였다.그녀를 좋아한다는 마음의 끝에는 아마도 그녀를 갖고 싶다는 원초적인 바램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부딪혀.오늘부터라도 당장.”

“부딪..히라고요?”

“적어도 니가 하는 행동에 후회없는 삶을 살으라고. 병신같이 떠나간 버스 뒤에서 더 빨리 뛰어서 버스를 잡을걸 이라는 자책하는거 이제 졸업하라고 임마.내가..도와줄수 있는건 도와줄 테니까.”

내 의아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근데...형이 왠일로 그렇게 진지하게 나서는 거죠?”

“이 미친년은 도와준데도 지랄이야..”

내 말에 그는 발끈하며 담배를 비벼꺼버린다. 여전히 수상하다는 내 표정을 보고는, 그는 더이상 할말이 없다는 듯 뒤를 돌아서 버리며 중얼거렸다.

“내 옛날 모습이랑 너무 비슷해서..답답했을 뿐이야 이 멍청한 새꺄.너도..겪어 보고 나서야 뭐가 잘못된것인지 알겄지. ”






이제는 꽤나 쌀쌀해졌다.

대낮인데도 바람이 부니,살짝 어깨를 움츠리게 되는 것 같았다.이런 계절에 누군가에게 반해 버리거나 짝사랑 하는것은 아주 가혹한 일이다.가을이라는 계절이 주는 쓸쓸함에 좌절감까지 더해지면 그건 겉잡을수 없는 딜레마로 빠지기 쉽기 때문이었다.

기계적으로 시계를 보았다.아직까지 남아있는 어제밤의 술기운으로,그리고 준혁이 형의 말에 힘을 얻은 김에 나답지 않게 점심을 사주겠노라고 그녀에게 말은 했지만 타고난 성격이 어딜가지는 않는 모양인지 나는 계속해서 초조해했다.

그녀의 회사 앞. 길눈이 어두운 나도 단번에 찾아올수 있을정도로 내 기억에 남긴 인상이 강한 그 회사 건물이 보였다. 점심을 사고 싶다는 말을 전화를 걸어 겨우겨우 했던 내 자신의 한심한 모습이 떠올려지자 한숨이 나왔다.

말쑥한 내 모습이 우스웠다.술냄새에 쩔어있는 내 모습을 보고 준혁이 형은 자신의 옷을 던져주고는 갈아입으라고 성화를 했었다.사실 좋은 브랜드의 멋진 옷이었지만 평소 이런것과는 거리가 먼 내가 입으니 우스꽝스러웠다. 이런것은 키가 크고 슬림하게 근육이 잘빠진 사람이 입어야 하는건데..마치 시골에서 갓 올라와 어줍잖게 서울애들 흉내를 내는 촌놈같이 느껴져 싫었다.

“오와?오늘 무슨일로 밥을 사준다는 거에요?”

혼자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고운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사람은 환히 웃고 있는 한명의 천사였다.

예뻤다. 눈웃음을 치는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예뻤다. 스커트 정장을 입은 그녀의 단아한 모습은 또 한번 내 말문을 잠시 막아버렸다.

“아..언제 왔어요?”

“지금요.혼자 고개 푹숙이고 뭐해요?”

수정이는 살짝 웃으며 킥킥 거렸다.평소와는 다른 내 옷차림까지는 인식하고 있지 않은듯 그녀는 달라진 내 옷차림에는 일언반구 없이 그저 농담을 건내며 살짝 웃는다.

“미안해요.갑자기 점심 먹자고 해서.”

“에이. 미안하긴요. 제가 얻어먹는 건데..그리고 어차피 다들 회사에서 점심은 각자 해결하는 거여서 큰 상관이 없는걸요.”

“아아.그렇군요.”

또다시 맞장구만 쳐버리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저 내 다음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뭐 사주실 건데요?”

“아..음...파스타 좋아하세요?”

내가 꺼낸 말은 물론 내 머리에서 나온게 아니었다.형이 알려준 파스타집을 참고로 하여 던진 말일 뿐이었다.준혁이 형은 곳곳에 존재하는, 여자가 좋아할만한 맛집의 위치를 꿰고 있는 고수였으니까.

“아..좋아하죠!”

다행히도 그녀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나는 우물쭈물 거리면서도 그녀의 앞에 앞장을 서며 형이 알려준 식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설레였다.그녀가 살짝 걸음을 빨리 해서 내 옆에 발을 맞춰 걸어주었기 때문이었다.이럴때 무언가 대화를 나눠야 하는데..나는 가만히 내 코에 전달되는 그녀의 향기만을 음미할뿐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음.근데 뭐하나 물어봐도 되요?”

“네?”

내가 살짝 고개를 돌리니 수정이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깝게 내 옆에 붙어서서 걷고 있었다.내 착각탓일까? 그렇게 느껴버리니 가슴이 뛴다.

“왜 갑자기 점심을 사주신다고 한 거에요?”

“아..”

그 상황에서 솔직하게 ‘당신을 꼬시려구요..’라는 말을 할 수 있을리 없다.아니,사실 어찌보면 그게 솔직한 내 심정이라 말 할수 없는 거였다. 갖고싶다는 것은 욕심일 뿐이었다.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주 단순히 보고싶었기 때문에 라는 말이 옳았다.

분명히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이지만, 그 남자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여자였다. ‘악녀’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자에게는 남자를 휘어잡을 무기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처럼 이렇게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어리바리한 놈들이 있는 이상,세상은 절대 남자들만의 것이 될수 없을 것이다.

“아..그냥요.그냥 사드리고 싶어서.”

“어엇!진짜요?그럼 비싼거 사달라고 할걸..괜히 파스타에 동의했네요.”

농담까지 건내며 웃는 그녀지만, 수정이가 바보가 아닌 이상 아직도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나 역시 수정이에게 묻고 싶었다.어째서 내 제안을 승낙했는지..그냥 동정심의 일종이었는지..하지만 그것을 묻는 것은 꾹꾹 눌러 참아버렸다.

“와..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네요.”

준혁이 형이 설명한 대로 오니, 정말로 조그마하고 아담한 가게 하나가 길가에 자리잡고 있었다.깜찍하게 꾸민 입구 앞에는 작은 칠판 하나가 놓여져 있었고,그 칠판에는 오늘의 추천메뉴들이 귀여운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아..저도 그냥 들었어요.”

“에이 거짓말. 예전에 여자친구랑 온적 있죠?”

“에?정말 아닌데..”

자꾸만 그녀가 웃으니 나도 따라 웃어 버렸다.들어오고나니 가게는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아담하고 귀여웠다.과연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분위기였다.주문을 받은 점원이 물잔을 놓고 주방으로 사라졌고, 수정이는 그것을 홀짝 거리며 얼굴로 넘어오는 머리를 살짝 뒤로 쓸어넘겼다.

잠시지만 기쁘다. 누군가가 행복인지도 모르고 일상 처럼 누리는 것을 잠시 체험하는 것 뿐인데도 그녀와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는 것은 너무나 설레고 기뻤다.

“그러고 보니까..전 재하 오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네요.”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사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말을 나눈 적이 별로 없었고, 그녀역시 내게는 관심이 없었을 테니까.

“아..저는 음향기사 일을 해요.”

“음향기사요?”

“네.작곡가가 꿈이긴 하지만..아직은 배울게 많아서 음향기사부터 하고 있어요.작곡가 최준혁씨라고..요새 가장 유명한 분인데..그 사람이랑 같이 일해요.”

“아..제가 그쪽은 잘 몰라서..근데 음향기사라니 뭔가 대단한데요?”

“대단하긴요.그냥...음악말고는 할줄 아는게 없을 뿐인걸요 뭐.”

하지만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수정이의 눈은 살짝 반짝이고 있었다. 작고 고운 입술에 미소가 걸린것을 계속해서 볼 자신이 없어 나는 서둘러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왠지 부러운데요?저처럼 책상앞에서 하루 왠종일을 보내는 사람들은 다 부러워 할 직업인데요.”

“아..그..그런가요.”

“더 들려주세요.재밌는 이야기 많을 거 같은데.”

“음...”

기대감 가득한 그녀의 모습에,나는 곰곰히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재밌는 이야기라..사실 녹음실에서의 내 일상은 결코 재밌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괜시리 당황스럽다. 프로페셔널의 세계에서 녹음실은 늘 긴장감이 도는 그런 곳이니까.

“혹시..요새 가장 인기있는 여가수..”

나는 재빨리 최근 우리 녹음실에서 신곡을 발표한 가수의 이야기를 꺼냈다.보통 연예인에 대해 궁금해 하기 마련이니까.뭐 내가 보는 모습들은 그래도 일반인이 보기 힘든 모습들 뿐이니..그거라도 말해야 할거 같았다.

생각외로 수정이는 굉장히 흥미 진진해 하며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방송에서는 늘 착하고 순한 컨셉으로 나오는 여가수가, 녹음실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담배를 뻑뻑 피운다는 이야기가 충격인지 깜짝 놀라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신이났다. 없는 이야기라도 만들어서 하고 싶을 정도였다.

“정말요?그럼 방송에서 본 이미지는 죄다 거짓이네?”

“그거 뿐만이 아니에요.욕도 되게 잘하고..사실 라이브 실력으로 인정받고 있지만,그 가수가 하는건 라이브가 아니에요.”

“에에?립싱크였어요?”

“네.일부러 라이브하는 것을 녹음한 걸 다시 립싱크 하는거죠.한마디로 라이브 AR을 틀고 입만 뻥긋하며 춤을 추는..”

“와아..저는 되게 라이브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가요..?”

의외로 대화는 순조롭게 이어졌다.그녀와 이야기를 나눈것중에 처음으로 그녀는 내 이야기에 완벽히 빠져들어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주제가 어떤것이든 기분이 좋았다.비록 ‘나’라는 사람을 물어본 것에서 ‘연예인들’의 이야기로 번진 것은 분명 주제의 이탈이었지만 상관없었다.그녀가 질문하고, 나는 신이나서 대답을 하는 동안에 식사가 나왔다.

“와 맛있겠다.잘먹을게요 재하오빠.”

“네.뭐 이런거 가지고..”

괜시리 쑥쓰러워 하는 내 모습에 그녀는 살짝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이면서 웃었다.자꾸만 앞으로 내려오는 머리칼이 방해되서 였는지, 그녀는 수저를 들기전에 살짝 머리를 뒤로 잡아 올렸다.하얀 목선이 드러나며 그녀의 귀에 앙증맞게 걸려있는 귀걸이가 내 눈을 간지럽혔다.멍해져 버린 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그녀는 손목에 있는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고는 포크를 들고 파스타를 살짝 감아 올린다.

“남자친구와는..어때요?”

내 질문이 너무나 의외였는지, 얌전하게 파스타를 숟가락에 올려 입에 넣던 그녀의 눈이 살짝 커지며 나를 향했다.나도 모르겠다.내가 왜 이런질문을 했을까?

“아..음...괜찮아요.”

그녀는 서둘러 대답을 했지만,순간 뭐라고 딱 집어 말할수 없는 어색함이 흘러버렸다.조금씩 흔들리는 듯한 그녀의 두 눈. 흡사 철옹성 같은 방어를 자랑하던 성벽에 자그마한 균열이 생긴 것처럼, 나를 방어하던 그녀의 모습에 일순간 헛점이 비춰졌다.

“남자친구는 뭐하는 사람인가요?”

내 모습에 나도 놀랍다.상대방의 약점을 보고 눈을 돌려 외면하기는 커녕, 지금 나는 왠일인지 그 약점을 계속해서 공략하는 것 같았다.수정이는 물을 한모금 마시고는 포크로 살살 파스타를 건드렸다.

“음..그냥..아무것도 안해요.”

“아무것도?”

“네..사실..경영공부를 하긴 해요.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도록 되어 있어서..”

“그렇군요.”

수정이는 아마 모를것이다. 테이블 밑에 있는 내 주먹이 꽉 쥐어져 있는 것을. 그제서야 수긍이 갔다. 보통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이른 대낮에 여자친구 집을 감시하러 오지 않을테니까.그간의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면, 그는 늘 낮에 수정이의 집에 몰래 들어와 그간에 찍혔던 영상으로 수정이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을 한량이라..그래서 였군. 그래서 수정이에게 방을 얻어줄 정도로 여유가 있는 것이구나.

“어제밤에는 왜 갑자기 나갔어요?”

이번엔 내 동작이 멎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나서 수정이가 내게 던진 질문에 잠시 할말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아..옆집에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들리길래요.”

역시나 수정이는 모르는 듯했다.반대로 내가 떠들면 그녀역시 훤히 들릴 텐데..그저 방음이 안되는 집인줄 모르고 내가 문을 세게 닫아서 들렸을거라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그냥 술마시러 나갔어요.”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해서 그렇게 얼버무려 버렸다.

“술요? 술 자주먹네요?”

그녀의 미소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하긴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남자친구와 섹스하는 소리를 듣고 열받아서 나갔다고는 말할수 없는 것이겠지.내가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도 상관없지만,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청했다는 것을 알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게요.요새 자주 먹게 되네요.”

수정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내가 어째서 술을 마셨는지, 세세하게 이유를 대지 않아도 근원적으로는 수정이라는 존재를 알고 나서부터 라는걸 그녀도 잘 알기 때문이리라.나도 모르게 그녀를 바라보며 했던 내 말에는 그만큼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그녀는 애써 명랑하게 보이려는 듯한 뉘앙스로 포크를 들어 파스타를 감아 올렸다.나 역시 아무말 하지 않고 있을 그때에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술..자주 먹으면 몸에 안좋아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고개를 숙인채로, 음식을 먹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는 듯이 그녀의 포크는 의미없이 접시위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다음엔 저도 같이 마셔요.나도..요새는 술마시고 싶은 날이 종종 있거든요.”





-잘 먹었어요.너무 고마워요 재하 오빠.다음에 봐요.-

그녀를 회사까지 바래다 주고나서야, 나는 터덜 거리는 걸음으로 집까지 올수 있었다.그녀를 향해 맹목적으로 느껴지던 설레임들은 마음속에서 정리가 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속마음을 알수 없는 수정이의 태도에 애가 탔다.

무슨뜻일까.그녀는 분명 다음에 같이 마시자고 했다. 그저 인사치레로 하는 말일까? 아니면 남자친구있는 자신을 좋아하는..그저 ‘착해보이는’남자에 대한 사소한 동정일까?

수정이와 조금은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나를 만나주는것이 기쁘긴 하지만 자꾸만 들어오는 몹쓸 기대감때문에 화가 났다.나도 그녀에게 있어서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나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짝사랑에 있어서 기대감이라는 존재가 후에 얼마나 큰 무기가 되어 가슴을 헤집어 버리는지를. 하지만 그것이 무서운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부정을 해도 은연중에 마음속 깊은곳에서 자리잡고 점점 뿌리를 내린다는 것에 있었다.

‘후우..’

원룸의 건물앞에 서서 고개를 들으니,나란히 자리한 그녀와 우리집의 현관이 보였다.저 두개의 문처럼 그녀와 가까워 질수 있을까?벽 하나를 두고 자리한 사람들이지만 마음의 거리는 너무나 먼 듯한 느낌이 들었다.내가 다가가려 하면 다가갈 수록 조금씩 뒷걸음 질 치는것도 같았다. 확실히 알수 없는 그녀의 마음은 도대체 뭘까? 정답이 없는 물음이었다.

“어..어?”

나도 모르게 황급히 눈 앞에 보이는 전봇대 뒤로 숨어버렸다.한참을 궁상에 잠겨 있을 때에 그녀의 집 현관문이 빼꼼히 열렸기 때문이었다.그리고 나서 누군가가 나와서 현관문을 닫고 있었다.

‘어..?저사람은..’

누군지는 뻔했다.자신의 여친을 향해 변태적인 감시를 하고 있는 그 녀석일 테지.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왠지 모르게 낯익은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구나..그때 그 자식이다..’

천천히 복도를 걸어나가는 녀석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던 나는 이마를 탁 하고 쳤다.인애의 방송국으로 황급히 나가던 그날, 우리집 복도에서 나와 부딪혔던 바로 그 남자였다.그랬구나..그때의 저 자식이 낯설었던 이유..그리고 대낮에 마주쳤던 이유가 바로..그가 매일 대낮에 수정이 집에 출근하는 남친이었기 때문이었던 거다.

나는 황급히 몸을 숨겼다.시간이 지나고 원룸 건물의 현관으로 그 녀석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약간은 날카로운 눈매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옷가지를 걸친 그 녀석. 실제로 보니 더더욱 비열하게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삐비빅!

그는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고급 승용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준혁이 형이 끌고 다니는 외제차 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스포츠 카였다. 이름만 말하면 누구나 아는 외제차이기도 했다.

끼이이익.

그의 차가 가볍게 미끄러지며 내가 숨어있는 전봇대를 지나쳐 골목끝으로 사라져갔다.나는 황급히 고개를 틀어 녀석의 번호판을 응시했다.

다시금 주먹이 쥐어졌다. 수정이를 구해내야 한다는 생각보다, 저 녀석을 끌어내려 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불타올랐다. 내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녀석의 자동차. 하지만 내 머리속에는 조각칼로 각인된 듯이, 그 자식의 자동차 넘버가 세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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