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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 <9부>

9부

꿈과 현실을 간혹 구분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꿈 속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싸우고 나면 꿈을 깨고 나서도 몇 초간 그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딜레이가 존재하듯이,나 역시 잠에서 깨어 한참이나 현실과 몽상사이를 오가고 나서야 가까스로 현실의 아침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좁은 내 침대위. 어제 잠들어 버린 바로 그 침대위였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안락하게 잠을 잘수 없었다. 침대와 붙어있는 벽너머로 수정이의 숨소리 마저 환하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한번 방을 보고 나서 더욱더 구체화 되는 내 상상속의 세계는 나를 점점 더 심각한 불면증으로 밀어 넣었다.

‘환타지’가 재미있는 이유는 경험하지 못하고 겪지 못하기 때문이다.현실을 도피하고 싶다는 욕망을 풀어주니까. 절대 죽었다 깨어나도 겪을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환타지에 미치고 환타지를 통해 꿈을꾼다. 만약 그 환타지가 마음만 먹을수 있으면 바로 경험할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되면 환타지에 대한 매력과 동경은 줄어들수 밖에 없는것이다.

수정이는 나에게 있어 환타지였다.아니, 지금도 그렇다고 하는게 옳을 것이다.절대로 가질수 없는 미지의 세계.나는 어제 아주 조금, 그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는 특례를 누린것이다. 내 주변에 아른거리는 그녀의 향기를 고스란히 체험하며, 그녀가 타주었던 헤이즐럿을 맛보고,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대화를 나눈 것이다.하지만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이상하게 더더욱 무거웠다.

오전 11시. 내 일상은 늘 그렇듯 이렇게 늦게 시작했다.뭐..원래는 정해진 생활 패턴을 갖고 있는 직장인과 크게 다르기 때문이겠지만, 사실 근래에는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서 취침시간이 늦어지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추가 되었다. 그래도 그나마 많이 안정된 것이, 오늘은 아침에 수정이가 출근하는 소리에 깨지 않았다는 거겠지만.

-아직도 자요?전 일합니다.스님~ㅋㅋ-

세수를 하고 나서 휴대폰을 열었을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결코 먼저 연락이 온적 없던 수정이로 부터 문자 메세지 하나가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나는 아직도 물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을 몇번이고 빡빡 문데고는 재차 그녀의 문자를 확인했다.

잘못보낸게 아니었다. 설마 스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겠어? 발신자 역시 몇번을 다시 보아도 수정이가 맞았다.보낸시간은 1시간 전인 10시. 하하. 웃음이 세어나왔다. 뿌듯해서 웃는 웃음이 아니라..뭔가 허무함이 몰려오면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수정이와 내가 만난건 어제가 처음이 아니었다.지하철에서 흡사 천사와 같던 그녀의 외모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갔고, 처음만난 남자에게 웃으며 농담을 하는 그녀의 밝은 성격에 또 한번 반했다.이제는 1주일이 훌쩍 지나버린 이야기였다. 그녀가 내 전화번호를 갖고 있는 것 역시 1주일이 넘었다는 뜻이었다.

그 1주일 동안에 그녀는 내가 연락을 해도 답을 주지 못했던 때가 많았다. 먼저 연락오는 것은 기대한 적도 없었다.그저 잘자라는 답장 하나를 몇번이나 보며 기뻐했던 적도 있었다.분명..먼저 그녀에게로 연락이 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고 기쁜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이상하게 쓰려왔다.내가 그녀의 지인으로서 있었던 1주일은, 그만큼 그녀에게 비중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그 간 그녀를 생각하며 가슴아파했던 내 자신이 초라해졌다. 내가 그녀의 옆집 사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하나 붙고 나서야, 그녀가 나를 먼저 인지하고 문자를 보내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우울했다.

그래.분명 그녀는 나와 달랐다.밝고,예쁘고, 명랑했다.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있었으며,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에게도 적당한 거리를 두되 불친절하게 하지 않는 착한 여자였다. 나와는 다른 사람.나에게는 환타지.

-지금에서야 일어났어요.좋은 하루 보내세...-

그녀에게 답장을 쓰려던 나는 도어락 버튼이 눌려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출입문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구분이 갔다. 그것은 우리집 도어락을 눌러대는 소리가 아니었다.가깝게 들리지만 약간은 이질적인 느낌.

‘수정이가 집으로 온거야?’

문자를 쓰던 휴대폰의 폴더를 닫고는 나는 출입문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문이 열리는 소리와 닫히는 소리. 그리고 수정이의 것이라고는 믿을수 없는 걸걸한 헛기침 소리.

나는 황급히 벽에 귀를 갖다 대었다.신발을 벗고,성큼성큼 방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내 귓가를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황급히 고개를 돌려 침대 발치에 던져져 있는 해드폰을 바라보았다.단 한번 사용했을 뿐이었고, 다시는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저 도구.나는 옆방에서 들리지 않게 발을 뻗어 그 해드폰을 살살 내쪽으로 끄집어 당겼다. 이유는 단 하나. 옆방에 있는 사람이 수정이가 아닐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드르르륵

급한대로 작은 음성판 들을 아무렇게나 벽에다가 대고는 해드폰을 착용했다.무언가가 열리는 소리. 그녀의 침대 옆에 있는 옷장서랍을 여는 소리인거 같았다.

-흠..내가 사준 속옷은 여전히 안입네..아 씨발.-

귓속을 파고드는 굵직한 남자의 혼잣말 소리.나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침을 꿀꺽 삼키며 해드폰에 집중했다. 그는 그녀의 서랍장을 뒤지며 수정이의 속옷들을 하나하나 뒤적거리고 있는거 같았다.

남자친구일까? 아니면 스토커? 머리속이 혼란스러워 견딜수가 없었다. 내가 사준 속옷 이라는 말을 한것으로 보아 그녀를 맹목적으로 따라다니는 인물은 아닌거 같았다.게다가 약간은 낯이 익은 목소리 톤. 틀림없었다.그녀와 사랑을 나누던 그 남자.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쿵쿵.

그는 내가 듣고 있는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인지, 전혀 조심스럽지 않은 발걸음으로 그녀의 방안을 누비고 있었다. 남자친구가 와서 잠시 쉬어갈수도 있다고 생각하려던 나는 곧 그 생각을 수정해야만 했다. 그는 방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쓰레기통을 뒤지거나,서랍을 열어 보거나...그것은 결코 여친의 집에 휴식을 하러 온 남친의 행동이 아니었다.무언가를 ‘검사’하러 온 검열관같은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해 보였다.

나는 자세마저 고쳐잡고, 해드폰 끝에 달려있는 자그마한 음성판을 벽에 대며 그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껴졌다. 사랑하는 여자의 방안에 가서, 그녀가 쓰는 물건이나 옷들을 보며 귀엽거나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무언가 불만이 쌓여 있었다.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고, 신경질 적으로 서랍장을 닫기를 반복했다.무언가 이상했다.무언가가.

철크덕..우웅..철컥.

침대위에 일어서서 벽에 음성판을 대고 천천히 옆으로 이동하던 나는 뭔가 이질적인 음색에 살짝 놀라 고개를 갸웃했다.마치 보일러에 청진기를 댄것처럼, 우우웅..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게 뭐지?’

그 소리가 워낙 큰 탓에 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잠시 멍해져 있을때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아직까지는 모르고 있나보네..다른곳에다가 숨겨야 하는데..-

그의 중얼거림. 그리고 무언가를 쉴새없이 부스럭 거렸다.흡사 총을 장전하는 것처럼 철크덕,철크덕 하는 기계의 마찰음이 귓가로 들려왔다.답답했다. 그간 귀를 통해서 모든것을 판단할 수 있었는데, 이 남자가 무엇을 하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계속해서 해드폰속의 음성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그만 뒤로 넘어갈 뻔한 것을 겨우겨우 참아내었다.

- 누구세요?-

-네?-

-아..잠시만요..-

-스님?-

-옆방사는 사람이 스님이었어요?우와와!-

맙소사..해드폰으로 들려오는 것은 수정이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집으로 들어와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무언가에 의해 ‘재생’되는 듯한 음성이었다.게다가..그것은 어젯밤 내가 그녀의 집을 두드리고 택배를 건내줄때 나누던 대화였다.중간중간 어눌하게 떨리는 내 목소리가 함께 들려오고 있었다. 손발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와..너무 신기하다.그쵸?커피 드실래요?--

-네?아..네..-

-와..신기하네요..그쵸?언제부터 여기 살았어요?-

-아..저는 몇달 되었어요.-

어제밤에 나눴던 그 대화들. 그것들이 고스란히 내 귀를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도대체..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이..씨발년..-

곧이어 벽너머로 분노에 어린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내 눈망울이 천천히 떨리기 시작했다.순간적으로 멈춰버린 나와 수정이의 목소리.뭔가 윙~하고 감기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트득!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신경질적으로 분리되는 소리가 나며,더이상 어제나눈 우리 둘의 대화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 개년..다른 남자를 집에 불러서 대화를 해?그것도 옆집사는 남자새끼를?이..이 씨발년..-

그는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손이 떨려왔다. 그는 감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렇게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무언가에 의해 어제 나와 수정이가 나눈 짧은 대화들이 재생되고 있었고,그는 그것을 확인하고 있었다.자신의 여자친구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대화를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그녀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치가 떨렸다. 수정이가 무엇을 하던지 그는 이렇게 똑똑히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소리가 서서히 떨리는 것으로 보아 그는 엄청 분노하고 있었다.

-이 개같은년..-

마지막까지, 그는 그녀에 대한 욕설을 끊지 않았다.그리고 다시금 들려오는 우웅~하는 소리.틀림없다.그녀를 감시할만한 무언가를 내가 해드폰 음성판을 두었던 자리에 다시 올려놓은 것이다.그 우웅~하는 소리는 그녀를 감시하는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콰아앙!

나도 모르게 질겁을 하며 해드폰을 벗어버렸다.볼일을 마친 그가 신경질 적으로 현관문을 닫아 버렸기 때문이었다.그것은 방안으로 쩌렁쩌렁 울리며,그 방안에 귀를 기울이던 내 고막을 찢듯 귀를 때렸다.

저벅.저벅.

문이 닫히며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들렸고, 그의 발자국 소리는 고작 두 걸음에서 멈춰서졌다.틀림없이,그는 내 현관앞에 있는 것이다.나도 모르게 현관쪽을 노려보았다.

-개새끼..수정이한테 찝적대면 죽인다.-

내가 없다고 생각해서 일까? 그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경고를 내 현관을 보며 날리고 있었다.어금니에서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너무나 이를 꽉 물었기 때문이리라. 화가 치밀었다.나에게 욕을해서가 아니었다. 수정이의 사랑을 받고도, 그녀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별거 아닌 모습에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는 그를 세개 후려치고 싶었다.

저벅..저벅..

이윽고 그의 발소리가 복도끝으로 멀어져갔다.문을 열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단 말인가? 그리고..내가 그런 행동을 했을때에 수정이는 뭐가 되는 거지?

머리가 복잡했다.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만 같았다.분명..분명히 지금 나를 감싸고 있는 불행이 틀림없었다.보지 않으려 두 눈을 가리고, 듣지 않으려 두 귀를 막아도 느낄수 밖에 없는 불행.눈앞이 아득해진다.





쪼르르르..

빈 잔에 소주가 채워졌다. 몇잔째인지 모르겠다.그저 어미새가 물어다주는 벌레를 받아먹는 까치새끼마냥, 나는 준혁이 형이 따라주는 술잔을 그저 손으로 잡아 입가로 가져가고,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일련의 행위들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너도 참...아효..”

준혁이 형은 술상대가 되어 달라는 호출에 당장 달려와 주었다.작업이 없는 시즌에는 그저 여자에만 몰두하는 형으로서는 최대한의 배려일테지.너무나 고마웠다.이런것은 인애에게 부탁하기 어려우니까.아니, 지금의 상황에서는 어렵게 되었으니까 라고 하는게 옳을려나?

만난곳은 고급스런 바가 아닌 고기집이었다. 그는 삼겹살집보다는 재즈가 흘러나오는 바를 더 좋아하긴 하지만, 그곳엔 소주가 없기 때문이다.

“야.천천히 마셔 이 미친놈아.”

알딸딸했다.연거푸 8~9잔을 쉬지 않고 마신것 같았다.알딸딸한 기운이 없으면 감당하기 힘들것만 같았다.

“그러니까..그 옆방사는 수정씨의 남자친구가..자기 여친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 말 아니냐?”

“그렇겠죠.말했다시피.”

“허어.그 참 변태스런 놈일세.”

짜증이 솟구쳤다.소주잔을 하도 꽉 움켜쥐어서 깨질것만 같았다.그제서야 최근에 가졌던 소소한 의문들이 조금씩 풀려가는 느낌을 받았다.인애가 예전에 우리집에서 자고 갔을때, 대낮에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이야기.당시에는 일하다 말고 옆집 그녀가 왔었나 보다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수정이는 아침일찍 나가서 늘 야근과 싸우고 집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대낮에 옆집에서 들려온 그 모든 소리들은 바로 그 녀석이 수정이를 감시할 그 무언가를 설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네 변태같은 놈이죠.지 여친방에 녹음기를 설치할 정도로..”

“녹음기가 아닌듯한데?”

“그럼요?”

“드드드 하는 소리가 났다면,캠코더 아닐까?”

형의 말에 내 미간이 삽시간에 구겨졌음은 말할것도 없었다.그는 내 옆쪽으로 후우 하고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내고는 말을 이었다.

“생각해봐.니 말대로 그런 변태새끼라면, 영상을 보지 뭣하러 음성을 듣냐? 사람이란게 그런거야.처음엔 듣고 싶다..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곧 내 눈으로 보고싶다라는 욕망으로 바뀌는 법이거든. 그 웅하는 소리는 카메라가 돌아가는 소리가 틀림없어.내가 캠코더에 대해 잘 모르니 확답은 할수 없지만.”

열이 받았다.화가 치솟았다.단순히 그녀와 말 한마디 섞은 것만으로도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나 같은 자식도 있단 말이다.언제든지 수정이와 대화하고, 그녀를 쓰다듬고, 나아가서는 침대위에서 사랑을 나눌수 있는 그런 자격을 가진 자식이 그녀를 감시한다고 생각하니 열이 치솟았다. 수정이는 일에 쩔어 있어도 늘 밝게 웃는 그런 여자였다. 그런여자를 의심하고 욕설을 퍼붓다니..신경질이 뻗쳤다. 그 자식에게도 화가 났지만, 내 분노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수 없는 나라는 존재였다.

“수정이라는 여자는 어째서 남자친구를 좋아할까?”

“무슨뜻이에요?”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이거야.늘 일에 치이는 여자.웹디자이너라면 연봉도 뻔한데,그 여자가 과연 그 남자 자체를 사랑하는 걸까?”

“주제와 어긋나는 말이잖아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소주를 넘겼다.

“아니,그렇지 않을껄.냉정하게 생각해봐라.요새 여자 나이 스물 넷이면 로맨스 운운할 어린 나이가 아니란 거다.그 남자가 그 여자보다 나이도 많고,능력도 좋을껄?아마 멋진차를 탈지도 모를 일이지.”

“그러니까 나는 상대도 안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죠?”

“많이 직설적이긴 하지만 맞아.잘 생각해 보란 말이야.열받아 하는 니 맘은 이해하지만, 정작 수정이에게는 그게 열받지 않을 일일수도 있어.그 남자가 좋은차를 타고, 지갑이 빵빵한 남자라면 눈감을수 있는거야.어쩌면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가 보다 하면서 스스로 합리화 시켜줄지도 모를 일이지.”

“...저 더 비참하게 하려고 여기까지 왔나 보네요.”

“너 그 여자를 사랑하냐?”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들어 준혁이 형을 바라보았다.아주 평범하고도 진부한 질문이지만, 그것이 준혁이 형의 입에서 나오니 신선했다.

“네..그런거 같아요.”

“확실해?”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데요.”

“야 박재하. 반했다 라는 것과 사랑에 빠졌다 라는것은 천지 차이야. 알아? 반했다 라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을 ‘알고싶다’라는 궁금증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아.사랑에 빠졌다 와는 아예 다른 거라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술을 마셔서 인지, 왜 그딴말을 나에게 해?라는 듯한 불만어린 시선이 준혁이 형을 향했다.

“인애는 어떤데?”

“인애 이야기는 왜 해요?”

“사랑한다는 감정은 자기도 모를때가 있거든.반했다는 감정은 확실히 알게 돼. 하지만 사랑하고 있는 것은 본인도 모르는 경우가 많지.”

“그만 둬요. 어려운 말 하고 싶지 않아요.”

준혁이 형은 뭐라고 또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아 버렸다.뭔가 굉장히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이 나에게 오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내 말은, 니가 열받아 할 문제가 아니란 거야.”

그는 한참의 침묵끝에 그 한마디만을 던지고는 일어나 버렸다.하..무슨 뜻일까.수정이는 나를 그저 이웃사촌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러니 내가 그녀의 일에 관여할수 없다는 걸까?

먼저 출입구를 통해 나가버리는 형이 원망스러웠다.내가 상관할 바 아니라는 것이 크게 틀린말이 아니라는게 더 가슴아프다. 내 분노의 정체는 뭘까?그 자식에 대한 열등감? 아니면 그녀를 갖을수 없다는 괴리감?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맞다.분명 내가 관여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어제부로 나는 그녀에게 있어서 ‘옆집 사는 사람’으로 업그레이드 되었을 뿐이다.그 전에는?그저 하루중에 단 1초도 생각할 이유따윈 없는 그냥 타인이었을 뿐이었다. 처음만난 그 순간부터 늘 특별한 존재였던 내 마음속 수정이의 모습과는 달리, 수정이 마음속의 나는 그냥 옆방사는 오빠, 내지는 자신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봤던 남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비틀대는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서 나간 사람이 음식값을 계산했다는 사장님의 말에 나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고 가게문을 열고 나왔다.너무나 어두운 달빛.어느새 날은 너무나 어두워져 있었다.

번화가는 분명 나와 그다지 친한 공간이 아님에 분명했다.늘 사람많은 곳은 싫어했으니까.나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준혁이 형이나 인애에 의해서 몇번 불려나간거 빼고는 나는 시끄러운것을 참 싫어했다.

준혁이 형은 없었다.술동무를 해달라고 했는데, 없어진거 보니 아까 나에게 한 말이 자신이 줄 수 있는 해답의 전부인 모양이었다.화가났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에게 당신의 방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고 말해야 할까?당신이 자는것,밥을 먹는것 그 모두가 감시의 대상이라고..그렇게 말해줘야 할까? 하지만 그것을 말하면 그녀는 물을 것이다.내가 어째서 그런것들을 알고 있냐고. 물론 대답할 길은 없었다. 벽에 귀를 대고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몰래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노라고, 나는 절대 그렇게 말할 자신이 없다.

그것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괴로운 것이었다.입을 다무느냐, 혹은 입을 여느냐의 2지 선다형 문제는 오히려 다양한 문항이 있는 문제보다 백배는 어려웠다. 입을 다물게 된다면 어떨까? 그 녀석은 계속 수정이를 감시하며 지켜볼 것이고, 나는 그것을 알면서 그들이 나누는 사랑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죽기보다 싫었다. 나는 외로움이나 비참함을 고독한 로맨스로 승화시킬 정도의 싸이코가 아니었다. 그건..너무나 가혹한 상처일 뿐이었다.

“아...”

꿈을 꾸는 걸까? 내가 너무 망상에 젖어서 헛것이 보이나?길을 걷다 멈춰 서서 눈을 몇번이고 비벼보았다.나와 몇미터 떨어져 있지 않은 작은 호프집 간판 밑으로, 누군가가 전화를 받고 있는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늘 그래왔듯이 단정한 치마 정장을 입고 있었다.튀지도 않고,그렇다 해서 지나치게 점잖기만 한 옷이 아닌 은은한 차림이었다. 치마의 톤과 센스있게 조화를 맞춘 자켓위로 움푹 들어간 허리라인과,치마 밑으로 뻗어있는 날씬한 종아리가 눈에 띄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칼.그리고 그 위로 하얗고 앙증맞은 손에 의해 휴대폰 하나가 귀를 덮고 있었다. 수정이..몇번이나 눈을 크게 뜨고 확인해도 그것은 수정이었다.

“또 왜그래..회식하는 중인데 도대체 왜 화를 내는데..”

하지만 목소리는 수정이 같지가 않았다.늘 밝고 명랑했던 목소리가 아니었으니까.그녀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다.불과 몇미터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알았어.회식만 끝나고 갈거야.그리고 오빠 예민해 보여.그렇게 화내지 마.”

오빠?오빠라고 한다면 그 자식일까?아마 맞을 것이다.회식 자리였구나..그래서 이런 시간에 번화가에 있는 거고.

그녀는 쉽사리 전화기를 끊지 못하고 있었다.남자친구라는 그 자식은, 오늘 낮에 확인했던 그 영상을 보고 쌓인 분노를 수정이에게 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지도 대놓고 카메라를 설치했다고 말할수 없을 테니 저렇게 쓸모없는 화를 내며 수정이를 압박하고 있음이리라.

“휴..알았어.먼저 간다고 하고 집으로 갈게.됐지?그러니까 화내지 마.”

그녀가 몇번이고 화내지 말라며 당부하고는 다시금 회식자리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그리고 그런 치졸한 남자의 모습에 화 한번 내지 않고, 순순히 남자가 시키는 대로 회식장소를 이탈하려 들어가는 수정이의 모습에 화가 났다.알려주고 싶었다.당신의 남자는 당신을 사랑하는게 아냐.그냥 집착의 대상일 뿐이야. 당신이 하는 일거수 일투족을 관리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애정결핍증 싸이코일 뿐이야.





어떻게 집에까지 왔는지 모르겠다.어디가서 마구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다못해 누군가가 시비를 걸어주기를 바라기 까지 했다.누구를 흠씬 두들겨 패주거나,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라도 좋았다.그렇게 하면 지금의 분노가 조금 사그러 들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이 들어왔다.

걸음걸이에 힘이 빠졌다.급하게 술을 마신탓에 통증이 가슴을 옥죄여 왔다.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힘들었다. 세상은 핑핑 도는데, 이상하게도 내 의식은 너무나 또렸했다.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 내 마음속에 들어오는 분노와 스트레스가 그녀의 남자친구를 향한 질투인지, 나라는 못난놈에 대한 자괴감과 열등감인지 나조차 구분할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번뜩 하고 들어오는 생각에 걸음걸이를 빨리 했다.아까의 통화내용으로 미루어 볼때,수정이는 회식자리에 양해를 구하고 집으로 올것이기 때문이었다.괜시리 추격당하는 사람마냥 슬금슬금 뒤를 돌아보았다.그녀와 길에서 마주치기 싫었다. 정작 그녀는 나를 보고도 아무런 감정이 없을텐데, 이렇게 나혼자 절절매며 생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수정이의 눈망울을 보면,또 의미없는 고백을 해버리며 바보라는 사실을 확인사살 당할까봐 싫었다. 걷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헉..헉..”

술기운을 머금은 내 숨결이 공기중으로 내 뱉어지는 바람에, 나는 달리는 와중에도 알콜섞인 공기를 들이마셔야 했다.가슴 통증이 심하게 들어왔다.알콜때문에 쳐져 있는 몸을 무리해서 계속 움직인 탓에 마치 고산지대에서 뛰는 것처럼 산소가 부족하다는 느낌까지 들어왔다.

“하아..하아..”

다행히 내 방에 수정이보다 먼저 도착한 듯했다.다행이라기 보다, 밖에서 그녀와 마주치는것을 피했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미친놈마냥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한쪽에 내던져진 해드폰과,그것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음성 진동판들. 망설임없이 그것을 침대옆에 있는 벽에 여기저기 붙이기 시작했다.끈이 짧아 벽 전체적인 부분에 모두 붙일수는 없겠지만 상관없었다. 오늘은 들어야만 할거 같았다.이대로 귀를 막고 자는것이 오히려 더 괴로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휴대폰이며 알람,소리가 들릴수 있는것들은 모두 꺼버렸고,방안의 조명마저 내려버렸다.그저 내 앞을 가로막는 하얀 벽만을 노려본채 그렇게 해드폰을 쓰고 몇십분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 와중에도 살며시 들려오는 기계음성에 나는 주먹을 꾹 쥐어버리고 말았다.

뚜벅..뚜벅..

얼마나 그렇게 삭히고 있었을까.정신이 번쩍 들었다.복도 끝에서부터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긴장감으로 손발이 차가워진다.발자국 소리는 한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화났어? 오늘 도대체 왜그래.집앞에서 기다리기 까지 하고.-

-됐어.그런거 아냐.-

문이 열리는 소리,닫히는 소리,그리고 그 후에 수정이의 목소리와 그 자식의 목소리가 해드폰으로 전달되었다.하고싶은 만큼 지껄여라. 니 변태적인 집착과 역겨운 가식 얼마든지 들어줄테니까.

-이리와봐.-

종종 걸음소리.그녀의 몸이 무언가에 강제로 끌려가는 듯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이윽고 침대의 시트가 이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 참..오빠 오늘 왜그래-

-너나 사랑하지?응?-

-사랑해.몇번이고 말했잖아.무슨일 있어?-

-그럼 가만히 있어.-

-오..오빠..왜이래..이럴거면 씻고 해..응?-

-가만있어!-

그는 거칠게 수정이를 다루고 있었다.입술로 무언가를 빠는 소리가 들렸고,바스락 거리는 소리는 주기적으로 계속해서 들려왔다.수정이는 계속해서 그를 만류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확신할수 있었다.그 자식인 강제로 수정이를 벗겨내고 있었다.

-천천히..살살 해줘..제발..-

-가만이 있어..아무말도 하지 말라고 했지?엉!-

그는 수정이를 윽박질렀다.마치 굶주린 늑대새끼 마냥 수정이의 살결을 더러운 입술로 함부로 다루고 있었다.수정이는 딱 잘라 말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애원할 뿐이었다.화가 났다.하지말라는 거부의 애원이 아니라, 살살 해 달라는 그녀의 말에 머리는 폭발할 지경이었다.녀석은 사랑의 힘으로 여자의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닌, 단순한 물리적인 힘 그것으로 수정이를 벗겨내고 있었다.

-아악..윽..-

-이거봐..완전 젖은거 보니까 너도 원했잖아.다리좀 더 벌려-

이윽고 철썩철썩 하는 육체의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이게 서로 사랑하는 사이의 섹스라고? 그런말은 들어본적도 없다. 그냥 한명의 욕망과 집착에 의한 욕구해소에 지나지 않는다. 상호 커뮤니케이션따윈 없었다.한명은 윽박지르고 한명은 수용할 뿐이다. 보이진 않지만 느낄수 있다.수정이가 그를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따윈 알수 없지만, 확실한건 지금의 섹스는 사랑이 결여되 있다는 것을. 수정이는 단지 그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며 눈을 감고 있을 것이다.

-헉..헉..이거 조이는 거좀 봐.너도 하고싶었지?응?-

-흑..오빠..흑..옆방에 들릴지도 몰라..제발..제발..-

-뭐?옆방새끼가 듣는게 신경쓰여?그새끼 좋아하냐?엉!-

-제발 내 말좀 들어..그런 말 한적 없잖아-

-야 윤수정.너나 사랑하지?응? 내 돈이나 배경이 아니라..날 사랑하지?-

-흑..흑..-

-대답해! 내가 너 옆방새끼 눈치나 보라고 이 방 구해준거 같아?엉?-

-사랑해..사..흑..흐윽..-

-씨발 이거 봐라..너 왜울어? 니가 누구때문에 여기서 자리잡고 편하게 사는데..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아냐?엉?헉..헉..-

주먹을 쥔 손에서 찔끔하고 피가 났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때까지, 그 자식은 수정이를 더럽히고 협박하고 있었다.거칠었다. 수정이가 흐느끼는 소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에서 오는 희열이 아닌 겁에 질린 울음이었다. 대화가 아닌 협박과 강요당한 대답. 그리고 녀석은 쉴새없이 욕설을 퍼부으며 수정이를 범하고 있었다.

-헉..헉..더 조여..쌀거 같아..헉..-

-안에는..안돼..오빠 제발..-

-응?왜안돼..이젠 그런것도 허락 안하냐?엉?-

-악.아아..오빠..아..안..흑..흐윽!-

급기야 투두둑!하고 벽에 붙어있던 음성판들이 떨어져 나갔다.나도 모르게 연결된 줄을 손으로 꽉 쥐어버린 탓에 그것들이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다시금 아득하게 들려오는 옆방의 소리들.하지만 알수 있었다.녀석은 수정이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안에 욕정섞인 정액들을 토해내고 있음을.

해드폰을 벗어 던지고 현관문을 뛰쳐나왔다.그녀의 집 반대편 복도로 내달렸다.조금이라도 망설이다간 그녀의 집안으로 쳐들어갈 것만 같았다.오늘 만큼은 우리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아니,그럴수 없었다. 적어도 저 자식이 계속해서 수정이를 괴롭히는 현장을 듣고 있으면 나 자신이 미쳐버릴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달렸다.정신이 멀쩡한게 후회될 만큼 짜증스러웠다.

“하아..하아..하아..”

한참이나 뒤돌아 달리니 내가 사는 원룸 건물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폐가 터질것 같은 압박감이 들어왔다.내 자신이 병신같았다.아무것도, 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그저 분노하는 것 외에는..

자격이 없기 때문이었다.혼자 분노하는것 이외에, 내가 그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자격요건 자체가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손을 꽉 움켜쥐었다.이대로는 안되었다.

‘구해내고 만다..꼭..’

그녀를 갖고 싶고,소유하고 싶은 욕심에서가 아니었다.그들의 애증관계에서 멀어질 자신이 없다면, 내가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꼭 그렇게 해보이고 말거다.수정이를..

‘기필코...그 자식에게서 구해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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