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잠든 사이에 <13부>
13부
내가 왜 여기있는 걸까...?
쉴새 없이 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지만 그 이유는 정작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그냥 그렇구나..그랬구나..하면서 중얼거리다가 어느덧 나도 모르게 신문으로 내 얼굴을 가리고는 레스토랑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엄마가 말해준, 인애가 선을 본다는 그 장소는 나같이 자주 다니는 곳만 숙지하고 있는 길치역시 말만들어도 아는 고급 레스토랑 이었다. 그곳에서 선을 보는구나..좋은데서 보네..라며 혼잣말을 하는 사이에 나는 이미 그 안에 조심스레 들어가고 있었던 거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절대 이런곳에 올리 없는 행색을 하고서 그것도 혼자서 스포츠 신문을 거꾸로 들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들어온 나를 보며 점원은 상당히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다.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아직 인애가 오지 않았음을 확인한 나는 그제서야 메뉴판을 볼수 있었다.
‘크헉!’
순간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아니..아..아무리 고급 식당이라지만 이 가격이 사람이 먹는 밥의 가격인가? 나는 내가 실수로 0이라는 숫자를 하나 더 센건가 하는 의심을 할 정도로 놀라 몸이 굳어 버렸다.아니 무슨 고깃덩어리가 이렇게 비싼거야? 수정이랑 밥먹으러 간 곳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쉴새없이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태연한척 무시하며 메뉴판의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Dessert라고 씌여진 부분들. 역시나 비쌌지만 비교적 편안한 가격대가 눈에 들어왔다.
“오..오렌지 쥬스 한잔.”
“....알겠습니다.”
나에대한 수상한 느낌을 팍팍 풍기면서도, 역시나 네임벨류있는 곳에서 서비스란 당연한 덕목이기 때문인지 점원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메뉴판을 들고 가버렸다.
휴..한숨이 나왔다. 수정이에게 그것을 전하고 나서 집을 비운거 까진 좋았다. 준혁이 형에게도 양해를 구하고 녹음실에서 자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내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이유도 모르는 채로, 나는 엄마가 말해주었던 이 장소로 이끌리듯 와버린 것이다.
휴대폰을 꺼내어 재빨리 진동으로 돌렸다. 행여나 전화가 와서 내 벨소리를 들으면 인애는 바로 나 인줄 알아차릴 테니까.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어도 수정이로 부터 온 연락이 없는 내 휴대폰을 바라보는 마음이 왠지 씁쓸했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착잡한 얼굴까지 하고 있는 나를 다시 한번 의아하다 는 듯 바라보는 종업원의 시선은 이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쥬스가 담긴 컵을 입가로 가져가던 내 눈이 살짝 커졌다. 내 대각선 방향의 테이블에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아..혹시 서인애씨 맞으신가요?”
역시...! 저 남자가 오늘 인애가 선 볼 남자인가?하는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자신의 쪽으로 걸어오는 여자를 보며 입을 여는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른 들고 있던 신문으로 내 얼굴을 가렸다. 반갑습니다..라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운좋게도 제대로 된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신문을 밑으로 내려 빼꼼히 눈만 내밀고는 소리가 들려온 곳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허...헉!”
나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혀왔고, 큰 소리가 날 뻔한 내 입이 내 손에 의해 봉해졌다. 동공이 엄청나게 크게 확대되며 유체이탈을 체험하는 듯한 기분이 들며 내 혼이 들락날락 하고 있었다.
선을 볼 남자가 너무나 잘생겨서가 아니었다. 그냥 비싸보이는 옷을 입은거 빼고는 흔히 볼수 있는 3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내가 질겁을 하고 놀란 이유는, 그의 앞에 다소곳이 앉은 인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충격이었다. 남자가 나를 등지고 앉아서, 내 자리는 자연스레 인애와 마주보는 위치가 되어 있었다.
‘저..저게 서인애라고?’
신문을 쥐고 있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매일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그녀는 무릎이 살짝 보이는 스커트 정장을 입고 있었다. 늘상 수정이가 회사에서 입는 것과 비슷한 여성스러운 정장에 높은 구두까지..놀라운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언제나 스타일이 변하지 않는 그녀의 머리는 미용실에서 멋을 냈는지 웨이브까지 들어가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장 충격인 것은, 20년동안 친구하면서 인애가 저렇게 짙은 화장을 한 것은 처음본다는 사실이었다.
예뻤다.
인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우스운 말이 되어 버렸지만, 화장을 한 인애의 얼굴은 너무나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늘 맨얼굴로 있다가 얼굴에 기름끼면 남자처럼 푸아!푸아! 이러면서 세수를 하던 인애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긴 속눈썹이 수줍게 내리 깔렸고, 입술은 핑크빛이 돌며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죄송해요..제가 너무 늦었죠?”
아..내 두 눈은 경악으로 떨리기 시작했다.저게..저게..서인애의 모습이란 말인가! ‘죄송해요..너무 늦었죠’ 라니! 오자마자 담배를 한대 피워 물면서 ‘ 아 시바 차 존나게 밀려’ 라고 하는게 정상인데..게다가 저 수줍은 표정은 뭐란 말이냐!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미인이시네요.”
“어머..감사합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수줍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만 집어치워!라고 소리를 지를 뻔할 것을 겨우 참아내었다. 인애야..너 왜 안하던 짓 하는거야..응?
“식사 안하셨죠?여기는 이게 맛있어요..인애씨도 이거 좋아하세요?”
녀석은 느끼한 목소리를 연신 깔면서 인애쪽으로 메뉴판을 돌려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다소곳한 표정으로 앉아 맞선남이 추천하는 메뉴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있었다.아..아놔 저 새끼가..그냥 메뉴만 보여주면 되지 왜 은근히 인애쪽으로 메뉴판 돌리면서 가까이 가는거야?
“저 처음에 선보라고 하길래 안나간다고 했는데..인애씨를 보니까 나오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머..정말요?호호호..”
내가 자신의 대각선 방향에서 앉아 쉴새 없이 구토를 하고 있는것도 모르는건지, 인애는 연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살포시 눈을 내리 깔기 까지 하는 가식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왜이러지? 왜이렇게 부글부글 화가 치미는거야?
이상하게도, 그런 인애를 보며 내 가슴은 떨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단아한 치마를 입고, 누가봐도 여성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한 외모까지..부정하고 싶었지만 나는 계속 인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인애씨는 방송일 하신다고 들었는데..”
“네..작가일을..하고 있어요.”
“아..힘드시겠어요. 거기 꽤나 거친곳으로 알고 있었는데..밤 새는것도 부지기수고..사람들은 피곤이랑 담배에 쩔어있다고 들었어요. 힘들지 않으세요?”
“아..저도..담배냄새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회의실에서는 담배를 안피우셨으면 좋겠어요.”
이..인애야. 지금 우리집 쓰레기통에만 니가 버린 빈 담배값이 세 갑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그리고 난 너랑 친구하는 동안 니 담배 심부름을 어림잡아 약 300회 이상 한것 역시 잊은거니? 인애야 너 왜그러는 거니?
“아 그렇군요. 저도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때 방송 엔지니어링을 하는 친구가 있어서 몇번 들은적이 있는데요..”
이윽고 입을 연 남자는 본격적인 자기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말만들어도 다 아는 미국의 명문대에서 MBA과정을 마쳤다는 것을 시작으로, 본인이 갖고 있는 회사의 연 매출액까지 들먹거리기 시작했다.곱상한 인애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인지, 자신의 능력으로 승부를 보려는 모양이었다.아...저 놈은 모르고 있었다. 돈 많고 능력좋으면 홀랑 넘어와 버리는 요새의 여자들과 인애는 다르다는 것을. 잘나가는 남자 연예인이 조금만 거만하게 굴어도 자기가 맡은 라디오 프로 게스트로 섭외자체를 하지 않는 인애의 성격을 녀석이 알리 없었다. 덧붙여서, 여태까지 얌전하고 새침한 숙녀의 모습을 보여주던 인애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몇십분이고 계속해서 신문을 들고 있어서 팔이 저리는 것도 대수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렌지 쥬스를 시킨 나와 달리 비싼 코스요리를 시킨 인애의 테이블에 유독 친절한 미소를 띄우는 점원의 모습에도 불만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바라본 인애의 모습은 천천히 좌불안석이 되어가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인애씨는 이런거 좋아할거 같아서 시켰어요.립 스테이크인데..괜찮으시죠?”
다행히 인애는 ‘등갈비 아닌가요?’하는 질문을 하지 않고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인애씨도 이제 슬슬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나요?”
“결혼요?”
“네.이렇게 아름다운 여성분이 결혼적령기 지나도록 결혼 안하신게 좀 의아해서.”
녀석의 느끼한 멘트에 내 주먹은 바들바들 떨렸고, 인애는 웃고 있긴 했지만 내 눈에는 썩소로 느껴지고 있었다. 인애야. 많이 참았다. 그냥 니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줘.응?
“네..일을 하다 보니까..그렇게 되었네요.”
“아 그러시군요.”
인애는 눈 앞에 있는 립스테이크의 뼈 부분을 살짝 포크로 잡고는 천천히 칼로 그것을 분리해 내었다.나와 단둘이 고기를 먹을때에 상추안에 마늘과 고추, 쌈장, 무채, 파채등등을 한번에 집어넣고 입을 쩍 벌려 우겨넣던 모습과는 360도 다른 고상한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 눈에는 얼마전에 내가 수정이 앞에서 씻을수 없는 개망신을 당했던 레몬이 띄워져 있는 물이 담긴 작은 사발 역시 놓여져 있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립이라는 음식을 파는 곳에서는 늘 저런게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렇죠..방송일이라는게 돈도 안되고..고생하는거에 비해 박봉이지 않나요? 이제 안정적인 남편을 만나서 취미생활하고 그러실 나이인데..”
아..저자식 돌았구나. 인애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나는 속으로 그 녀석의 명복을 빌어주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인애는 그것을 꾹 참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열이 받는건 어쩔수 없는 모양인지 고기를 힘주어 씹어대는 인애의 모습이 귀여워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이..인애씨..?”
본래 성격 죽이고 얌전한 숙녀 컨셉을 하는것에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걸까. 아니면 답답해서 일까. 인애는 살짝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음에 그녀가 취한 행동에 나는 폭소를 터트릴 뻔한 것을 겨우 참아내었다.
벌컥벌컥.
인애는 나와 똑같은 실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마셨던 그 손씻는 물을 인애는 양 손으로 쥐더니, 흡사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농사짓고 야참으로 막걸리 들이키듯이 걸쭉하게 들이키고 있었다. 맞선남의 표정은 금세 창백해졌고, 나는 허벅지까지 꼬집어 가며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저.잠시 화장실좀 다녀올게요.”
인애는 맞선남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것도 모른채, 인애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스윽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는 인애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는 황당한 표정으로 시간이 정지된듯 앉아 있었다.
“9천원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잔에 9천원짜리 오렌지 쥬스를 마신나는 서둘러 인애가 나간곳으로 따라나갔다. 나는 인애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애는 화장실을 간것이 아니다. 아마 분을 삭히려 자리를 비운 것이리라.
그녀가 나간곳은 건물의 뒷문 쪽이었다. 대로변에 있는 정문과는 달리 뒷문은 작은 주차장이 있을뿐 사람들의 통행은 없는 곳이었다. 나는 코너에 숨어서 슬쩍 인애가 서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오..진짜 못해먹겠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인애는 너무나 여성스러운 복장을 한채로 치마를 다리사이에 살짝 끼우고는 쪼그려 앉아 깊게 담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내가 아는 인애의 모습이 드디어 나온거 같아서 푸하하하!하고 크게 웃고 싶은 것을 겨우겨우 참았다.
“뒤질라구 지가 사장이면 사장이지 사람 직업 무시하고 있어 십새가..”
그래그래 인애야.니 마음 이해가 간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욕 안한게 어디니. 너의 인내심은 그것만으로도 한단계 진보한 거야. 그래도 너희 어머님이 해준 선 자리인데 그렇게 갱판은 치면 안되지..암..그렇고 말고.
“야 서인애.”
허공으로 길게 담배연기를 뿌리던 그녀의 얼굴이 획 하고 돌아가며 나를 향했다. 눈화장을 해서 더욱더 커보이는 인애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떨렸다.
“뭐..뭐야 박재하 니가 여기 왜있어?”
치마를 입고 쪼그려 앉아서 하얀 다리가 훤히 보이는 것을 모르는 걸까? 인애는 곱슬곱슬한 웨이브 머리 사이로 큰 눈을 껌벅 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녀를 바라보는 내 입가엔 잔뜩 미소가 걸려있었다.
“안어울리게 그게 무슨 꼴이냐?머리까지 볶구.”
내 말에 인애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다시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인애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끄고는 일어나며 몸을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서인애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떨리는 내 자신이 이상하고 웃겼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이에 존재하던 ‘가족같은 편안함’은 그 때 그날 밤이후에 사라져 버리고 없는 듯했다.대신에 미묘한 어색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너가 여기 왜 있는거야?”
같은 질문을 두번이나 하는 인애의 눈은 의아함으로 가득차 있었다.나도 모르게 쿡쿡 거리며 웃어버렸다. 치마를 입은 모습이 웃겨서 내가 웃는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인애의 표정은 금세 험상궂게 변했다.
“야..너 왜 비웃어..”
눈화장을 해서 더욱 커보이는 인애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늘 저런 표정을 할때는 날 때리곤 했는데...그런 분위기가 아니란걸 알면서도 눈이 감기는 이유는 왜일까? 아무것도 안했는데 움찔하는 나를 보며 인애가 피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풉..하하하하!”
이윽고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 뭐가 웃긴건지도 모르는 주제에 나도 따라 웃어 버리고 말았다. 오랜만이었다. 인애가 저렇게 활짝 웃는 것은 내 기억을 더듬어 봐도 꽤 오래전 과거를 제외하면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문득 내 시선은 인애의 손쪽으로 향했다.잠깐 화장실을 간다면서 핸드백도 가져온 이유가 뭐지?하고 잠시 의아해 했으나 금세 그 이유를 파악할수 있었다.사실 아무리 인애라도 그간 떤 내숭이 있으니 갑자기 핸드백에서 담배만 꺼내 가져올수는 없을 테니까.
“가자.”
“어딜가?”
인애의 눈이 동그래 졌다. 다짜고짜 가자라고 했으니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하지만 인애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지금 그녀가 좋아서 선을 보는 것일까?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저 남자가 인애의 맘에들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인애가 재수없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인물상이니까.
“너 배고프잖아.떡볶이나 먹자. 니가 저런 레스토랑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야! 내가 어디가 어때서! 솔직히 그 빠박 머리로 오는 것보다 낫구만.”
“푸하하하! 안어울려 바보야.”
나도 모르게,20여년전 그때처럼 인애의 손을 잡아 끌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구슬치기를 하다가 몽땅 잃어서 울고 있던 인자의 손을 잡고 마을 어귀로 뛰어가던 8살 박재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다만 그때에 인자가 오른손에 구슬을 꽉 쥐고 있었다면, 지금의 인애는 핸드백을 꼭 들고 있다는 점이 다르겠지만.
“이 근처에 떡볶이 하는데가 어딨어...”
“길거리에서 팔잖아.”
“야..이렇게 쫙 빼입고 길거리에서 먹으라고?”
인애는 입술을 삐죽 거리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어느새 인애는 너무나 오랜만에 나를 보며 웃어주고 있었다.
“바보야 안어울리게 이런데서 먹는거 보다 낫지. 그리고 아까 니가 마신 물..그거 손씻는 물이야.푸하하하하!”
“뭐..뭐?”
그녀의 손을 잡고 길거리로 나가면서 배를 잡고 웃었지만, 정작 그녀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며..멱살이라도 잡히면 어쩌지? 내가 이렇게 웃어 제끼는데 조용한 그녀의 반응이 더더욱 무섭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면서,그녀의 표정을 보기위해 힐끗 고개를 돌린 나는 창백하게 얼굴이 질리고 말았다. 인애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표정을 한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엄청난 속도로 내 멱살을 잡아쥐었다.
“꺽..야..이..인애야 왜그래..”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평소에 뿌리지도 않는 향수냄새까지 내 코를 자극했다. 화장한 얼굴의 인애가 가까이 다가오니 순간적으로 두근거리는 내 가슴이 이상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애는 내 멱살을 잡아쥔채로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너..그거..뻥이면 죽는다..”
저녁은 빨리 찾아왔다.
무슨생각으로 인애가 선보는 자리에서 훼방을 놓은 것일까? 고향에서 사장 사위를 들일 생각에 두근두근 하고 계실 인애의 어머님께 죄송했지만, 인애가 하루종일 웃는 모습을 보여줬다는게 괜시리 뿌듯했다.
이상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인애다운 모습으로 떡볶이를 같이 먹고, 역시 인애다운 모습으로 소주까지 같이 마시고 돌아오는 길이지만 이렇게 인애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던 적은 처음이었다. 소주를 마시면서도 그녀의 길어진 속눈썹을 한참이나 바라본 내 자신이 웃기다.
인애는 술을 마시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의 일을 사과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지만, 그녀는 아예 잊어버린 일이라는 듯 선본남자가 너무 재수없었다면서 툴툴거리며 술잔을 기울였을 뿐이었다.그리고 더욱더 중요한것은, 왠지 모르지만 인애의 기분이 매우 좋아보였다는 점이었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단순히 예전처럼 인애와 웃으면서 술을 마시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 좋다기 보다, 그녀와 있다는 거 자체를 기분좋아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며 놀라고 있었다. 단순히 민낯을 고수하던 아이가 화장을 해서만은 아닐것이다.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한참을 생각하다보니, 어느덧 내 발걸음은 내가 사는 집에 다다라 있었다.
인애는 술을 마시면서 내게 넌지시 물었었다. 요즘 어떠냐고..그것이 비단 내가 하는 일만을 지칭하는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었다.그녀가 내게 물었던 단 한개의 질문 때문이었다.
-잘 되어 가냐?-
수정이와의 일을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잘 되어가고 있고, 얼마전에 키스도 했노라고 말하지 못했다.벙어리 마냥 입을 다물어 버린 내 모습을 인애는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술잔을 넘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포장마차를 나가기전에 인애가 했던 말은 나를 더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도대체 그 말은 무슨 뜻일까? 도대체...
그제서야 수정이의 생각이 번뜩 하고 떠올랐다. 오늘 하루 종일 연락도 없었던 그녀. 아니,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표현하는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캠코더의 존재를 알려 줬으니, 수정이와 염문진 사이에는 뭔가 변화가 있을 것이다.이제는 수정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모든것을 맡겨야 했다. 심호흡까지 크게 하고는 천천히 내가 사는 2층으로 발길을 옮겼다.
‘세상에 없는 사랑..’
인애가 했던 그 말을 조용히 곱씹으며 코너를 돌았다.센서에 의해 복도불이 켜지고 그 복도의 맨끝에 나란히 위치한 두 개의 집이 보였다.그리고...
“어어?”
순간 조금 마신 소주에 취한건가 하며 황급히 눈을 비볐다. 우리집 현관앞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슬픈 눈을 하고는, 잠겨있는 내 현관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모습을 확인했을때에, 나는 그녀의 눈에 가득고인 눈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정씨..”
내 말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늘상 그렇듯이 눈은 나를 향해 웃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모습이 너무나 슬퍼보였다.
“기다렸는데..이제..왔군요.”
나를 기다렸다라...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녀의 마음을 헤집어 놓은 가해자는 염문진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시리 고개가 숙여졌다. 내가 아니었다면..그녀는 그냥 모르고 지냈을 수도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에 술 있어요?”
내가 다가가자 처음으로 그녀가 물은 말이었다. 너무나 편한 평상복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눈은 벌겋게 부어 있었다. 어느정도 충격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왠지 그 모습을 확인하자 더욱더 죄책감이 들어오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게다가 그 질문을 하는 그녀에게서는 이미 술냄새가 나고 있었다.
“소주뿐인데 괜찮나요?”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는 내가 이상할 법도 한데..수정이는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퀴퀴한 남자냄새를 덮으려고 뿌려둔 방향제의 향이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찔렀다. 공교롭게도 수정이가 즐겨 마시는 헤이즐럿향의 싸구려 방향제였다.
“오빠방은 처음 와보네요.바로 옆집 사는데.”
“그러네요.”
전보다 훨씬 더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처음처럼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흘렀다. 다행히 얼마전에 방을 청소해서 그렇게 까지 더럽지는 않은게 천만 다행이었다.
“잠시만요.술 꺼낼게요.근데 안주가 마땅한게 없네요.”
“괜찮아요..그냥 술만 주셔도 돼요.”
술을 꺼내려 그녀쪽이 아닌 싱크대와 냉장고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사실 딱히 그 쪽을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맥주를 조금 먹어도 걸음을 비틀거릴 정도로 술이 약한 수정이가 어째서 소주를 찾는지 그 이유를 잘 알기 때문에 더욱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 이유 안물어봐요?오늘 점심먹자고 안한거...내가 갑자기 술마시자고 한거..”
소주한병과 밑반찬 몇개를 테이블위에 올려놓았을때 들려온 수정이의 질문에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거기다가 대놓고 내가 그 일들의 원흉이게 때문이란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냥..사정이 있는거 같아서요.”
“그런가요 ...”
수정이의 빈잔에 술잔을 따라주었다. 늘상 정장을 입고 있는 모습만 보았었는데, 오늘은 집에서 입는 편안한 복장이었다. 면트레이닝 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화장기 없는 초췌한 얼굴까지도.
그녀는 내가 따라준 술을 조금 맛보더니 이윽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이미 소주를 한잔 하고 온나도 그녀를 혼자 마시게 둘 수 없어 한잔을 비웠다.
상황이 묘했다.예전이라면 절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에도 그것에 두근거리거나 떨리지 않는게 이상했다. 그녀를 슬프게한 간접적인 장본인이기 때문일까? 수정이 특유의 향기와 특유의 샴푸냄새가 손을 뻗으면 잡을수 있을만큼 가까이, 그것도 내 방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있음에도 예전처럼 미친듯이 긴장하지 않는 내가 이상했다.
내 침대를 등받이 삼아 기대어 앉아 한잔의 소주를 마신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색한 적막이 흐르고, 목이 바싹바싹 말라갈 때쯔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남자친구와..헤어졌어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그토록 바라던 일이니 만세를 불러야 할까?아니면 울먹이는 그녀를 달래줘야 할까. 좀처럼 감이 서지 않아 고개를 숙여 버렸다.
“나 몰래..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는거 같았어요. 그리고..내 방에..”
수정이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키스를 하고, 손을 잡은 남자라 해도 차마 캠코더가 있었다는 말은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된 캠코더에 다른 여자와의 정사장면이 찍혀 있다는 것은 더더욱 입에 담을수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미안해요..재하오빠 앞에서 이런말 하는거 예의가 아닌거 알아요..미안해요..”
이윽고 내 앞에서는 그녀는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참을수 없었는지 무릎을 세우고 두 팔로 감싸안으며, 그 사이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당황해 버렸다. 내 앞에서 여자가 우는 장면이 여태까지 살면서 몇번이나 있었던가?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나에겐 무슨말을 해줄 자격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태연하게 위로의 말을 해줄정도의 뻔뻔함 역시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정이에게 티슈를 건냈다. 분명 내가 오기전에도 많이 울었을텐데, 계속해서 휴지를 적실 정도로 우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어깨좀 빌려주세요.”
한참 후에 그녀가 꺼낸 말에, 나는 군말없이 그녀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가슴이 쓰렸다. 이유는 알수 없었지만 수정이가 우는 모습은 내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품안가득 수정이의 작은 몸이 들어와 안겼다.내 방에 오기전 혼자 술을 좀 마셨는지, 향기와 술냄새가 섞여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종일 잔뜩 비를 맞고 떨고 있는 강아지 처럼,내 품에서 몇번이고 조금씩 몸을 들썩이는 수정이가 안쓰러웠다.
“무슨일인지는 묻지 않을게요.울지 말아요.”
거기까지가 내 양심이 허락하는 최대치의 위로였다.뺨을 때린 놈이 위로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웃긴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한참이나 수정이를 끌어안고 있을때에, 비로소 내 품안에서 점점 움직임이 잦아드는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안해요.이런모습 보여서..”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거 따위는, 수정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그러니 내 앞에서 우는 것을 미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뇨..그냥..이렇게 라도 안을수 있으니까 전 상관없어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수정이의 하얀 얼굴이 천천히 위로 들어올려졌다.촉촉히 젖은 두 눈이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반짝 하고 빛이 났다. 무언가 결심을 한 듯한 수정이의 표정에 나 역시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좋아하나요?”
너무나 쉬운 질문이었다. 누가 들어도 답이 뻔한 난이도 제로의 문제지만 나는 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늘 나와 일정량의 거리를 두던 수정이가 그 거리를 반이상 줄여줬음에도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그녀의 손이 내 목을 끌어안는가 싶더니 아주 약한 힘으로 나를 잡아당겼다.수정이의 맨얼굴 감촉이 볼을 통해 전달되어 왔다.자연스레 눈이 감기고 알콜섞인 호흡이 내 입안으로 들어와 부딪혔다.
한강에서 나눴던 충동적인 키스와는 너무 달랐다. 그때와는 달리 격렬하게 나를 끌어안는 그녀는 평소의 잘 웃는 수정이와 완전히 다른 여자 같았다.
키스는 갈수록 격렬해졌다. 서로의 알콜기운을 공유한 탓인지 머리가 띵해지며 더더욱 취하는것 같았다. 수정이가 갖고 있는 달콤함은 치명적인 독처럼 내 온몸을 잠식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손은 그녀의 허리를 더듬고 있었다.
“음..으음..”
그녀의 혀가 내 입안을 계속해서 훑어 나갔다. 이렇게 적극적인 여자인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찔해졌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마냥 그녀를 밀어붙였고 그녀는 내게 밀리는 그 순간에도 자연스럽게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침대를 등지고 있는 수정이의 허리가 활처럼 휘며 침대를 타고 올라갔다.자연히 그녀의 몸과 1미리의 오차도 없이 붙어있던 내 몸이 따라 올라가며, 금세 침대위에서 뒹구는 형상이 되어 버렸다.
입김이 뜨겁다.입술이 떨어지며 내 눈에 들어온 그녀의 눈에는 알수 없는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주 잠시 서로를 바라보는 그 찰나의 사이에, 수정이는 무언의 표정으로 내게 허락의 뜻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시금 키스가 시작되었다.너무나 목말라 있던 사람들처럼 서로의 입술과 혀를 갈망했다. 예전에 망설이며 멈춰있던 내 손은 거침없이 그녀의 티셔츠 안으로 들어가 속옷위의 가슴을 주물렀다. 생각보다 글래머라는 느낌을 느낄틈도 없이 내 손에 가득 들어오는 육질감에 이성과 명분이라는 단어는 내 머릿속에서 분리되어 버렸다.
“하아..하아..”
둘다 어느정도 취해 있다는게 옳았다.아이러니 하게도 서로 키스를 하면 할수록 취하고 있는것만 같았다.누가 먼저 이 스킨쉽을 이끌었는지,그리고 어쩌다 이런 전개가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머리속에서 아득해져 갔다.
수정이의 몸은 뜨거웠다.감히 만져볼 생각, 갖고 싶다는 생각 한번 해본적없던 그녀의 몸은 부드럽기 그지 없었다. 뭐가 그리 급한걸까.나는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수정이의 브라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손안가득 만져지는 부드러운 살덩이를 계속해서 주물럭 거렸다. 키스를 하고 있는 내 입안에서 점점 거세지는 그녀의 숨결은 나를 더욱 앞으로 나아가게 보채는 듯했다.
용기를 낸 것인지, 이번에는 수정이의 손이 움직이며 내 티셔츠를 끌어 올렸다.그 순간마져 아까워 그녀의 입술에서 입을 떼지 못하며 나는 정신없이 옷을 벗어나갔다.이미 그녀의 티셔츠는 속옷과 함께 훤히 올라가 버린 상태였고, 내 몸이 알몸이 되는 동시에 내 손에 의해 수정이의 바지는 팬티와 함께 밑으로 끌어당겨졌다.
“하아..하아..”
눈으로 보고도 밑을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반신을 훤히 드러낸 그녀의 하얀 다리와 허벅지.그리고 위로 말려 올라가 얇은 허리와 통통한 가슴을 보여주는 모습은 순백색의 화면을 보는 착각마져 불러 일으켰다. 붉게 상기된 그녀의 표정은, 쉴새없이 안아달라고 하는 무언의 어리광으로 보여 참을수가 없었다.
내 몸이 그녀와 포게어졌다. 꿈결의 끝자락이 아닐까 하는 몽롱한 착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알몸인채로 그녀를 힘껏 껴안아 살결의 감촉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눈앞의 상대가 수정이라는 사실은 수십번 상기해도 믿어지지 않는 신기루만 같았다.
“흑..흑..”
부드럽게 만지는 내 손길에 수정이의 감겨진 두 눈이 파르르 떨린다.손을 뻗어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감촉이 손가락사이에 찡 하고 전해져왔다.
깜짝 놀라버렸다. 부드러운 키스.그리고 몸을 어루만진 정도뿐인데 그녀의 다리사이는 뜨거운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손가락으로 닫혀있는 꽃잎사이를 조심스레 열어보았다.젖어있는 자신이 부끄러운지 수정이는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흑!”
그녀의 다리사이로 내 몸을 묻었다.잔뜩 성이난 불기둥이 그녀의 하반신과 마찰되었다.눈앞에 보이는 그녀의 하얀 가슴사이에 입을 맞추었고, 그와 동시에 무언가 뜨겁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어오며 자연스럽게 나는 그녀의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엔 나에게 문자하나 보내도 떨려서 잠을 못자던 상대와 남녀가 할수 있는 가장 가까운 스킨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늘 정장만 입어서 알수 없었던 그녀의 가슴과 허리와 도톰한 허벅지를 모두 머리에 세겨 넣겠다는 듯 허겁지겁 내 눈으로 집어 넣었다.
“흑..흐응..흑..”
벽 너머로 들었던 그녀의 신음소리와 달랐다.같은 목소리지만 묘하게 뉘앙스가 달랐다.내가 점점 더 그녀의 안으로 깊게 진입하고 있을 그때에, 감겨있던 수정이의 두 눈이 떠지며 내 눈과 마주쳤다.
“흐응..흑..”
왠지 모르지만 눈물이 났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너무나 좋아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눈물이 나오는게 이상했다. 그녀에게 눈물을 보여주기 싫어 입을 맞춰 버렸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내 입안에 막혀 헛돌기 시작했다.
내 허리는 조금씩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부드러운 점액이 내 귀두부분부터 뿌리까지 감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확실히 부드러웠다. 약간은 통통한 수정이의 허벅지에 부딪혀서 그런지, 자꾸만 살끼리의 마찰음이 야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내가 벽너머로 들었던 그 모든 행위들이 지금 내가 주체가 되어 이뤄지고 있었다.다만, 그녀석처럼 내가 욕설과 협박,윽박지름을 하지 않는것 뿐이다.
“오빠..흑..흐응..아앙..”
내 목을 끌어안은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자세한번 바꾸지 않고 수정이의 몸을 느끼는데만 열중했다. 중간중간 그녀가 몸을 비틀때마다 그녀의 몸안에 있는 빳빳한 고기덩어리에 지속적으로 자극이 오고 있었다.
너무도 야했다. 벽 너머로 둘의 정사장면을 듣고서도 그녀를 실제로 보고서 그런생각을 한적이 없었다. 티셔츠와 속옷이 말려 올라가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는 가슴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야했다.표정도 야했고 우리가 취하는 포즈도 야했다. 자꾸만 그녀가 야하게 느껴지는 내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하지만 내 몸은 점점 정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내 목을 부여잡고 누군가를 불러대는 수정이의 목소리도 내 움직임에 비례하여 고조되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뜨거운 느낌이 올라오려 하는 그때, 나는 수정이의 감은 두 눈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보고야 말았다.
“하아..하아..”
결국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버렸다.좁은 그녀의 입구를 빠져나오자 마자 하얀 정액이 수정이의 허벅지 위로 쏟아져 나왔다.그녀가 흘린 물과 내가 토해낸 정액들이 하얀 허벅지를 통해 타고 내려갔다.
“흑..흑,.”
몸을 비트며 얼굴을 감싸는 그녀의 모습에 그만 허물어져 버렸다.흠뻑 젖어버린 몸을 가리며 그녀는 베개사이로 얼굴을 묻어 버렸다. 옆으로 누워도 아름다운 곡선은 망가지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은 알수 없는 그 무언가로 인해 계속해서 처참히 구겨지고 있었다.
“흑..흑...”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하얀색 물감을 쉴새없이 짜넣는 것만 같은 공허함과 상실감이 몰려들었다.
“미안해요..흑..미안..미안해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조금씩 흐르던 그녀의 눈물이 흐느낌으로 바뀌고, 이제는 그녀가 엉엉 울고 있었다.쉴새 없이 나에게 사과를 하며 자신의 몸을 이불로 가리는 그녀의 모습에 넋이 나가버렸다.
그녀가 왜 우는지, 무엇 때문에 서럽게 울면서 내게 알수 없는 사과를 하는지 어렴풋이 느껴질수록 내 가슴은 조금씩 찢어지고 있었다.추악해 보이기 까지 하는 내 알몸을 몸을 움츠려 가렸다.나는 너무나 한심하게도 이제서야 깨닫고 있었다. 수정이에게 오늘 어떤일이 일어 났는지,그리고 그녀는 지금 어떤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진실과 진심이라는 존재는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내 가슴을 찢어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없는 사랑 찾으려 애쓰지 말고, 지금 너에게 맞는 사람을 찾아.-
마지막에, 인애가 포장마차를 나서며 내게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서야 깨달은 내가 병신같았다. 점점 깊어가는 밤. 내 조그만 방은 계속해서 흐느끼는 수정이의 목소리만 조용히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있는 걸까...?
쉴새 없이 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지만 그 이유는 정작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그냥 그렇구나..그랬구나..하면서 중얼거리다가 어느덧 나도 모르게 신문으로 내 얼굴을 가리고는 레스토랑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엄마가 말해준, 인애가 선을 본다는 그 장소는 나같이 자주 다니는 곳만 숙지하고 있는 길치역시 말만들어도 아는 고급 레스토랑 이었다. 그곳에서 선을 보는구나..좋은데서 보네..라며 혼잣말을 하는 사이에 나는 이미 그 안에 조심스레 들어가고 있었던 거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절대 이런곳에 올리 없는 행색을 하고서 그것도 혼자서 스포츠 신문을 거꾸로 들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들어온 나를 보며 점원은 상당히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다.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아직 인애가 오지 않았음을 확인한 나는 그제서야 메뉴판을 볼수 있었다.
‘크헉!’
순간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아니..아..아무리 고급 식당이라지만 이 가격이 사람이 먹는 밥의 가격인가? 나는 내가 실수로 0이라는 숫자를 하나 더 센건가 하는 의심을 할 정도로 놀라 몸이 굳어 버렸다.아니 무슨 고깃덩어리가 이렇게 비싼거야? 수정이랑 밥먹으러 간 곳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쉴새없이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태연한척 무시하며 메뉴판의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Dessert라고 씌여진 부분들. 역시나 비쌌지만 비교적 편안한 가격대가 눈에 들어왔다.
“오..오렌지 쥬스 한잔.”
“....알겠습니다.”
나에대한 수상한 느낌을 팍팍 풍기면서도, 역시나 네임벨류있는 곳에서 서비스란 당연한 덕목이기 때문인지 점원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메뉴판을 들고 가버렸다.
휴..한숨이 나왔다. 수정이에게 그것을 전하고 나서 집을 비운거 까진 좋았다. 준혁이 형에게도 양해를 구하고 녹음실에서 자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내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이유도 모르는 채로, 나는 엄마가 말해주었던 이 장소로 이끌리듯 와버린 것이다.
휴대폰을 꺼내어 재빨리 진동으로 돌렸다. 행여나 전화가 와서 내 벨소리를 들으면 인애는 바로 나 인줄 알아차릴 테니까.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어도 수정이로 부터 온 연락이 없는 내 휴대폰을 바라보는 마음이 왠지 씁쓸했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착잡한 얼굴까지 하고 있는 나를 다시 한번 의아하다 는 듯 바라보는 종업원의 시선은 이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쥬스가 담긴 컵을 입가로 가져가던 내 눈이 살짝 커졌다. 내 대각선 방향의 테이블에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아..혹시 서인애씨 맞으신가요?”
역시...! 저 남자가 오늘 인애가 선 볼 남자인가?하는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자신의 쪽으로 걸어오는 여자를 보며 입을 여는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른 들고 있던 신문으로 내 얼굴을 가렸다. 반갑습니다..라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운좋게도 제대로 된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신문을 밑으로 내려 빼꼼히 눈만 내밀고는 소리가 들려온 곳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허...헉!”
나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혀왔고, 큰 소리가 날 뻔한 내 입이 내 손에 의해 봉해졌다. 동공이 엄청나게 크게 확대되며 유체이탈을 체험하는 듯한 기분이 들며 내 혼이 들락날락 하고 있었다.
선을 볼 남자가 너무나 잘생겨서가 아니었다. 그냥 비싸보이는 옷을 입은거 빼고는 흔히 볼수 있는 3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내가 질겁을 하고 놀란 이유는, 그의 앞에 다소곳이 앉은 인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충격이었다. 남자가 나를 등지고 앉아서, 내 자리는 자연스레 인애와 마주보는 위치가 되어 있었다.
‘저..저게 서인애라고?’
신문을 쥐고 있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매일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그녀는 무릎이 살짝 보이는 스커트 정장을 입고 있었다. 늘상 수정이가 회사에서 입는 것과 비슷한 여성스러운 정장에 높은 구두까지..놀라운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언제나 스타일이 변하지 않는 그녀의 머리는 미용실에서 멋을 냈는지 웨이브까지 들어가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장 충격인 것은, 20년동안 친구하면서 인애가 저렇게 짙은 화장을 한 것은 처음본다는 사실이었다.
예뻤다.
인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우스운 말이 되어 버렸지만, 화장을 한 인애의 얼굴은 너무나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늘 맨얼굴로 있다가 얼굴에 기름끼면 남자처럼 푸아!푸아! 이러면서 세수를 하던 인애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긴 속눈썹이 수줍게 내리 깔렸고, 입술은 핑크빛이 돌며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죄송해요..제가 너무 늦었죠?”
아..내 두 눈은 경악으로 떨리기 시작했다.저게..저게..서인애의 모습이란 말인가! ‘죄송해요..너무 늦었죠’ 라니! 오자마자 담배를 한대 피워 물면서 ‘ 아 시바 차 존나게 밀려’ 라고 하는게 정상인데..게다가 저 수줍은 표정은 뭐란 말이냐!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미인이시네요.”
“어머..감사합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수줍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만 집어치워!라고 소리를 지를 뻔할 것을 겨우 참아내었다. 인애야..너 왜 안하던 짓 하는거야..응?
“식사 안하셨죠?여기는 이게 맛있어요..인애씨도 이거 좋아하세요?”
녀석은 느끼한 목소리를 연신 깔면서 인애쪽으로 메뉴판을 돌려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다소곳한 표정으로 앉아 맞선남이 추천하는 메뉴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있었다.아..아놔 저 새끼가..그냥 메뉴만 보여주면 되지 왜 은근히 인애쪽으로 메뉴판 돌리면서 가까이 가는거야?
“저 처음에 선보라고 하길래 안나간다고 했는데..인애씨를 보니까 나오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머..정말요?호호호..”
내가 자신의 대각선 방향에서 앉아 쉴새 없이 구토를 하고 있는것도 모르는건지, 인애는 연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살포시 눈을 내리 깔기 까지 하는 가식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왜이러지? 왜이렇게 부글부글 화가 치미는거야?
이상하게도, 그런 인애를 보며 내 가슴은 떨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단아한 치마를 입고, 누가봐도 여성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한 외모까지..부정하고 싶었지만 나는 계속 인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인애씨는 방송일 하신다고 들었는데..”
“네..작가일을..하고 있어요.”
“아..힘드시겠어요. 거기 꽤나 거친곳으로 알고 있었는데..밤 새는것도 부지기수고..사람들은 피곤이랑 담배에 쩔어있다고 들었어요. 힘들지 않으세요?”
“아..저도..담배냄새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회의실에서는 담배를 안피우셨으면 좋겠어요.”
이..인애야. 지금 우리집 쓰레기통에만 니가 버린 빈 담배값이 세 갑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그리고 난 너랑 친구하는 동안 니 담배 심부름을 어림잡아 약 300회 이상 한것 역시 잊은거니? 인애야 너 왜그러는 거니?
“아 그렇군요. 저도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때 방송 엔지니어링을 하는 친구가 있어서 몇번 들은적이 있는데요..”
이윽고 입을 연 남자는 본격적인 자기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말만들어도 다 아는 미국의 명문대에서 MBA과정을 마쳤다는 것을 시작으로, 본인이 갖고 있는 회사의 연 매출액까지 들먹거리기 시작했다.곱상한 인애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인지, 자신의 능력으로 승부를 보려는 모양이었다.아...저 놈은 모르고 있었다. 돈 많고 능력좋으면 홀랑 넘어와 버리는 요새의 여자들과 인애는 다르다는 것을. 잘나가는 남자 연예인이 조금만 거만하게 굴어도 자기가 맡은 라디오 프로 게스트로 섭외자체를 하지 않는 인애의 성격을 녀석이 알리 없었다. 덧붙여서, 여태까지 얌전하고 새침한 숙녀의 모습을 보여주던 인애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몇십분이고 계속해서 신문을 들고 있어서 팔이 저리는 것도 대수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렌지 쥬스를 시킨 나와 달리 비싼 코스요리를 시킨 인애의 테이블에 유독 친절한 미소를 띄우는 점원의 모습에도 불만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바라본 인애의 모습은 천천히 좌불안석이 되어가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인애씨는 이런거 좋아할거 같아서 시켰어요.립 스테이크인데..괜찮으시죠?”
다행히 인애는 ‘등갈비 아닌가요?’하는 질문을 하지 않고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인애씨도 이제 슬슬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나요?”
“결혼요?”
“네.이렇게 아름다운 여성분이 결혼적령기 지나도록 결혼 안하신게 좀 의아해서.”
녀석의 느끼한 멘트에 내 주먹은 바들바들 떨렸고, 인애는 웃고 있긴 했지만 내 눈에는 썩소로 느껴지고 있었다. 인애야. 많이 참았다. 그냥 니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줘.응?
“네..일을 하다 보니까..그렇게 되었네요.”
“아 그러시군요.”
인애는 눈 앞에 있는 립스테이크의 뼈 부분을 살짝 포크로 잡고는 천천히 칼로 그것을 분리해 내었다.나와 단둘이 고기를 먹을때에 상추안에 마늘과 고추, 쌈장, 무채, 파채등등을 한번에 집어넣고 입을 쩍 벌려 우겨넣던 모습과는 360도 다른 고상한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 눈에는 얼마전에 내가 수정이 앞에서 씻을수 없는 개망신을 당했던 레몬이 띄워져 있는 물이 담긴 작은 사발 역시 놓여져 있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립이라는 음식을 파는 곳에서는 늘 저런게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렇죠..방송일이라는게 돈도 안되고..고생하는거에 비해 박봉이지 않나요? 이제 안정적인 남편을 만나서 취미생활하고 그러실 나이인데..”
아..저자식 돌았구나. 인애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나는 속으로 그 녀석의 명복을 빌어주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인애는 그것을 꾹 참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열이 받는건 어쩔수 없는 모양인지 고기를 힘주어 씹어대는 인애의 모습이 귀여워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이..인애씨..?”
본래 성격 죽이고 얌전한 숙녀 컨셉을 하는것에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걸까. 아니면 답답해서 일까. 인애는 살짝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음에 그녀가 취한 행동에 나는 폭소를 터트릴 뻔한 것을 겨우 참아내었다.
벌컥벌컥.
인애는 나와 똑같은 실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마셨던 그 손씻는 물을 인애는 양 손으로 쥐더니, 흡사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농사짓고 야참으로 막걸리 들이키듯이 걸쭉하게 들이키고 있었다. 맞선남의 표정은 금세 창백해졌고, 나는 허벅지까지 꼬집어 가며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저.잠시 화장실좀 다녀올게요.”
인애는 맞선남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것도 모른채, 인애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스윽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는 인애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는 황당한 표정으로 시간이 정지된듯 앉아 있었다.
“9천원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잔에 9천원짜리 오렌지 쥬스를 마신나는 서둘러 인애가 나간곳으로 따라나갔다. 나는 인애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애는 화장실을 간것이 아니다. 아마 분을 삭히려 자리를 비운 것이리라.
그녀가 나간곳은 건물의 뒷문 쪽이었다. 대로변에 있는 정문과는 달리 뒷문은 작은 주차장이 있을뿐 사람들의 통행은 없는 곳이었다. 나는 코너에 숨어서 슬쩍 인애가 서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오..진짜 못해먹겠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인애는 너무나 여성스러운 복장을 한채로 치마를 다리사이에 살짝 끼우고는 쪼그려 앉아 깊게 담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내가 아는 인애의 모습이 드디어 나온거 같아서 푸하하하!하고 크게 웃고 싶은 것을 겨우겨우 참았다.
“뒤질라구 지가 사장이면 사장이지 사람 직업 무시하고 있어 십새가..”
그래그래 인애야.니 마음 이해가 간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욕 안한게 어디니. 너의 인내심은 그것만으로도 한단계 진보한 거야. 그래도 너희 어머님이 해준 선 자리인데 그렇게 갱판은 치면 안되지..암..그렇고 말고.
“야 서인애.”
허공으로 길게 담배연기를 뿌리던 그녀의 얼굴이 획 하고 돌아가며 나를 향했다. 눈화장을 해서 더욱더 커보이는 인애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떨렸다.
“뭐..뭐야 박재하 니가 여기 왜있어?”
치마를 입고 쪼그려 앉아서 하얀 다리가 훤히 보이는 것을 모르는 걸까? 인애는 곱슬곱슬한 웨이브 머리 사이로 큰 눈을 껌벅 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녀를 바라보는 내 입가엔 잔뜩 미소가 걸려있었다.
“안어울리게 그게 무슨 꼴이냐?머리까지 볶구.”
내 말에 인애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다시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인애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끄고는 일어나며 몸을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서인애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떨리는 내 자신이 이상하고 웃겼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이에 존재하던 ‘가족같은 편안함’은 그 때 그날 밤이후에 사라져 버리고 없는 듯했다.대신에 미묘한 어색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너가 여기 왜 있는거야?”
같은 질문을 두번이나 하는 인애의 눈은 의아함으로 가득차 있었다.나도 모르게 쿡쿡 거리며 웃어버렸다. 치마를 입은 모습이 웃겨서 내가 웃는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인애의 표정은 금세 험상궂게 변했다.
“야..너 왜 비웃어..”
눈화장을 해서 더욱 커보이는 인애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늘 저런 표정을 할때는 날 때리곤 했는데...그런 분위기가 아니란걸 알면서도 눈이 감기는 이유는 왜일까? 아무것도 안했는데 움찔하는 나를 보며 인애가 피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풉..하하하하!”
이윽고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 뭐가 웃긴건지도 모르는 주제에 나도 따라 웃어 버리고 말았다. 오랜만이었다. 인애가 저렇게 활짝 웃는 것은 내 기억을 더듬어 봐도 꽤 오래전 과거를 제외하면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문득 내 시선은 인애의 손쪽으로 향했다.잠깐 화장실을 간다면서 핸드백도 가져온 이유가 뭐지?하고 잠시 의아해 했으나 금세 그 이유를 파악할수 있었다.사실 아무리 인애라도 그간 떤 내숭이 있으니 갑자기 핸드백에서 담배만 꺼내 가져올수는 없을 테니까.
“가자.”
“어딜가?”
인애의 눈이 동그래 졌다. 다짜고짜 가자라고 했으니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하지만 인애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지금 그녀가 좋아서 선을 보는 것일까?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저 남자가 인애의 맘에들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인애가 재수없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인물상이니까.
“너 배고프잖아.떡볶이나 먹자. 니가 저런 레스토랑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야! 내가 어디가 어때서! 솔직히 그 빠박 머리로 오는 것보다 낫구만.”
“푸하하하! 안어울려 바보야.”
나도 모르게,20여년전 그때처럼 인애의 손을 잡아 끌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구슬치기를 하다가 몽땅 잃어서 울고 있던 인자의 손을 잡고 마을 어귀로 뛰어가던 8살 박재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다만 그때에 인자가 오른손에 구슬을 꽉 쥐고 있었다면, 지금의 인애는 핸드백을 꼭 들고 있다는 점이 다르겠지만.
“이 근처에 떡볶이 하는데가 어딨어...”
“길거리에서 팔잖아.”
“야..이렇게 쫙 빼입고 길거리에서 먹으라고?”
인애는 입술을 삐죽 거리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어느새 인애는 너무나 오랜만에 나를 보며 웃어주고 있었다.
“바보야 안어울리게 이런데서 먹는거 보다 낫지. 그리고 아까 니가 마신 물..그거 손씻는 물이야.푸하하하하!”
“뭐..뭐?”
그녀의 손을 잡고 길거리로 나가면서 배를 잡고 웃었지만, 정작 그녀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며..멱살이라도 잡히면 어쩌지? 내가 이렇게 웃어 제끼는데 조용한 그녀의 반응이 더더욱 무섭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면서,그녀의 표정을 보기위해 힐끗 고개를 돌린 나는 창백하게 얼굴이 질리고 말았다. 인애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표정을 한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엄청난 속도로 내 멱살을 잡아쥐었다.
“꺽..야..이..인애야 왜그래..”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평소에 뿌리지도 않는 향수냄새까지 내 코를 자극했다. 화장한 얼굴의 인애가 가까이 다가오니 순간적으로 두근거리는 내 가슴이 이상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애는 내 멱살을 잡아쥔채로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너..그거..뻥이면 죽는다..”
저녁은 빨리 찾아왔다.
무슨생각으로 인애가 선보는 자리에서 훼방을 놓은 것일까? 고향에서 사장 사위를 들일 생각에 두근두근 하고 계실 인애의 어머님께 죄송했지만, 인애가 하루종일 웃는 모습을 보여줬다는게 괜시리 뿌듯했다.
이상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인애다운 모습으로 떡볶이를 같이 먹고, 역시 인애다운 모습으로 소주까지 같이 마시고 돌아오는 길이지만 이렇게 인애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던 적은 처음이었다. 소주를 마시면서도 그녀의 길어진 속눈썹을 한참이나 바라본 내 자신이 웃기다.
인애는 술을 마시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의 일을 사과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지만, 그녀는 아예 잊어버린 일이라는 듯 선본남자가 너무 재수없었다면서 툴툴거리며 술잔을 기울였을 뿐이었다.그리고 더욱더 중요한것은, 왠지 모르지만 인애의 기분이 매우 좋아보였다는 점이었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단순히 예전처럼 인애와 웃으면서 술을 마시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 좋다기 보다, 그녀와 있다는 거 자체를 기분좋아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며 놀라고 있었다. 단순히 민낯을 고수하던 아이가 화장을 해서만은 아닐것이다.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한참을 생각하다보니, 어느덧 내 발걸음은 내가 사는 집에 다다라 있었다.
인애는 술을 마시면서 내게 넌지시 물었었다. 요즘 어떠냐고..그것이 비단 내가 하는 일만을 지칭하는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었다.그녀가 내게 물었던 단 한개의 질문 때문이었다.
-잘 되어 가냐?-
수정이와의 일을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잘 되어가고 있고, 얼마전에 키스도 했노라고 말하지 못했다.벙어리 마냥 입을 다물어 버린 내 모습을 인애는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술잔을 넘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포장마차를 나가기전에 인애가 했던 말은 나를 더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도대체 그 말은 무슨 뜻일까? 도대체...
그제서야 수정이의 생각이 번뜩 하고 떠올랐다. 오늘 하루 종일 연락도 없었던 그녀. 아니,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표현하는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캠코더의 존재를 알려 줬으니, 수정이와 염문진 사이에는 뭔가 변화가 있을 것이다.이제는 수정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모든것을 맡겨야 했다. 심호흡까지 크게 하고는 천천히 내가 사는 2층으로 발길을 옮겼다.
‘세상에 없는 사랑..’
인애가 했던 그 말을 조용히 곱씹으며 코너를 돌았다.센서에 의해 복도불이 켜지고 그 복도의 맨끝에 나란히 위치한 두 개의 집이 보였다.그리고...
“어어?”
순간 조금 마신 소주에 취한건가 하며 황급히 눈을 비볐다. 우리집 현관앞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슬픈 눈을 하고는, 잠겨있는 내 현관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모습을 확인했을때에, 나는 그녀의 눈에 가득고인 눈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정씨..”
내 말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늘상 그렇듯이 눈은 나를 향해 웃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모습이 너무나 슬퍼보였다.
“기다렸는데..이제..왔군요.”
나를 기다렸다라...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녀의 마음을 헤집어 놓은 가해자는 염문진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시리 고개가 숙여졌다. 내가 아니었다면..그녀는 그냥 모르고 지냈을 수도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에 술 있어요?”
내가 다가가자 처음으로 그녀가 물은 말이었다. 너무나 편한 평상복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눈은 벌겋게 부어 있었다. 어느정도 충격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왠지 그 모습을 확인하자 더욱더 죄책감이 들어오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게다가 그 질문을 하는 그녀에게서는 이미 술냄새가 나고 있었다.
“소주뿐인데 괜찮나요?”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는 내가 이상할 법도 한데..수정이는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퀴퀴한 남자냄새를 덮으려고 뿌려둔 방향제의 향이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찔렀다. 공교롭게도 수정이가 즐겨 마시는 헤이즐럿향의 싸구려 방향제였다.
“오빠방은 처음 와보네요.바로 옆집 사는데.”
“그러네요.”
전보다 훨씬 더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처음처럼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흘렀다. 다행히 얼마전에 방을 청소해서 그렇게 까지 더럽지는 않은게 천만 다행이었다.
“잠시만요.술 꺼낼게요.근데 안주가 마땅한게 없네요.”
“괜찮아요..그냥 술만 주셔도 돼요.”
술을 꺼내려 그녀쪽이 아닌 싱크대와 냉장고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사실 딱히 그 쪽을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맥주를 조금 먹어도 걸음을 비틀거릴 정도로 술이 약한 수정이가 어째서 소주를 찾는지 그 이유를 잘 알기 때문에 더욱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 이유 안물어봐요?오늘 점심먹자고 안한거...내가 갑자기 술마시자고 한거..”
소주한병과 밑반찬 몇개를 테이블위에 올려놓았을때 들려온 수정이의 질문에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거기다가 대놓고 내가 그 일들의 원흉이게 때문이란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냥..사정이 있는거 같아서요.”
“그런가요 ...”
수정이의 빈잔에 술잔을 따라주었다. 늘상 정장을 입고 있는 모습만 보았었는데, 오늘은 집에서 입는 편안한 복장이었다. 면트레이닝 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화장기 없는 초췌한 얼굴까지도.
그녀는 내가 따라준 술을 조금 맛보더니 이윽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이미 소주를 한잔 하고 온나도 그녀를 혼자 마시게 둘 수 없어 한잔을 비웠다.
상황이 묘했다.예전이라면 절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에도 그것에 두근거리거나 떨리지 않는게 이상했다. 그녀를 슬프게한 간접적인 장본인이기 때문일까? 수정이 특유의 향기와 특유의 샴푸냄새가 손을 뻗으면 잡을수 있을만큼 가까이, 그것도 내 방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있음에도 예전처럼 미친듯이 긴장하지 않는 내가 이상했다.
내 침대를 등받이 삼아 기대어 앉아 한잔의 소주를 마신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색한 적막이 흐르고, 목이 바싹바싹 말라갈 때쯔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남자친구와..헤어졌어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그토록 바라던 일이니 만세를 불러야 할까?아니면 울먹이는 그녀를 달래줘야 할까. 좀처럼 감이 서지 않아 고개를 숙여 버렸다.
“나 몰래..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는거 같았어요. 그리고..내 방에..”
수정이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키스를 하고, 손을 잡은 남자라 해도 차마 캠코더가 있었다는 말은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된 캠코더에 다른 여자와의 정사장면이 찍혀 있다는 것은 더더욱 입에 담을수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미안해요..재하오빠 앞에서 이런말 하는거 예의가 아닌거 알아요..미안해요..”
이윽고 내 앞에서는 그녀는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참을수 없었는지 무릎을 세우고 두 팔로 감싸안으며, 그 사이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당황해 버렸다. 내 앞에서 여자가 우는 장면이 여태까지 살면서 몇번이나 있었던가?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나에겐 무슨말을 해줄 자격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태연하게 위로의 말을 해줄정도의 뻔뻔함 역시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정이에게 티슈를 건냈다. 분명 내가 오기전에도 많이 울었을텐데, 계속해서 휴지를 적실 정도로 우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어깨좀 빌려주세요.”
한참 후에 그녀가 꺼낸 말에, 나는 군말없이 그녀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가슴이 쓰렸다. 이유는 알수 없었지만 수정이가 우는 모습은 내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품안가득 수정이의 작은 몸이 들어와 안겼다.내 방에 오기전 혼자 술을 좀 마셨는지, 향기와 술냄새가 섞여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종일 잔뜩 비를 맞고 떨고 있는 강아지 처럼,내 품에서 몇번이고 조금씩 몸을 들썩이는 수정이가 안쓰러웠다.
“무슨일인지는 묻지 않을게요.울지 말아요.”
거기까지가 내 양심이 허락하는 최대치의 위로였다.뺨을 때린 놈이 위로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웃긴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한참이나 수정이를 끌어안고 있을때에, 비로소 내 품안에서 점점 움직임이 잦아드는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안해요.이런모습 보여서..”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거 따위는, 수정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그러니 내 앞에서 우는 것을 미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뇨..그냥..이렇게 라도 안을수 있으니까 전 상관없어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수정이의 하얀 얼굴이 천천히 위로 들어올려졌다.촉촉히 젖은 두 눈이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반짝 하고 빛이 났다. 무언가 결심을 한 듯한 수정이의 표정에 나 역시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좋아하나요?”
너무나 쉬운 질문이었다. 누가 들어도 답이 뻔한 난이도 제로의 문제지만 나는 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늘 나와 일정량의 거리를 두던 수정이가 그 거리를 반이상 줄여줬음에도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그녀의 손이 내 목을 끌어안는가 싶더니 아주 약한 힘으로 나를 잡아당겼다.수정이의 맨얼굴 감촉이 볼을 통해 전달되어 왔다.자연스레 눈이 감기고 알콜섞인 호흡이 내 입안으로 들어와 부딪혔다.
한강에서 나눴던 충동적인 키스와는 너무 달랐다. 그때와는 달리 격렬하게 나를 끌어안는 그녀는 평소의 잘 웃는 수정이와 완전히 다른 여자 같았다.
키스는 갈수록 격렬해졌다. 서로의 알콜기운을 공유한 탓인지 머리가 띵해지며 더더욱 취하는것 같았다. 수정이가 갖고 있는 달콤함은 치명적인 독처럼 내 온몸을 잠식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손은 그녀의 허리를 더듬고 있었다.
“음..으음..”
그녀의 혀가 내 입안을 계속해서 훑어 나갔다. 이렇게 적극적인 여자인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찔해졌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마냥 그녀를 밀어붙였고 그녀는 내게 밀리는 그 순간에도 자연스럽게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침대를 등지고 있는 수정이의 허리가 활처럼 휘며 침대를 타고 올라갔다.자연히 그녀의 몸과 1미리의 오차도 없이 붙어있던 내 몸이 따라 올라가며, 금세 침대위에서 뒹구는 형상이 되어 버렸다.
입김이 뜨겁다.입술이 떨어지며 내 눈에 들어온 그녀의 눈에는 알수 없는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주 잠시 서로를 바라보는 그 찰나의 사이에, 수정이는 무언의 표정으로 내게 허락의 뜻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시금 키스가 시작되었다.너무나 목말라 있던 사람들처럼 서로의 입술과 혀를 갈망했다. 예전에 망설이며 멈춰있던 내 손은 거침없이 그녀의 티셔츠 안으로 들어가 속옷위의 가슴을 주물렀다. 생각보다 글래머라는 느낌을 느낄틈도 없이 내 손에 가득 들어오는 육질감에 이성과 명분이라는 단어는 내 머릿속에서 분리되어 버렸다.
“하아..하아..”
둘다 어느정도 취해 있다는게 옳았다.아이러니 하게도 서로 키스를 하면 할수록 취하고 있는것만 같았다.누가 먼저 이 스킨쉽을 이끌었는지,그리고 어쩌다 이런 전개가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머리속에서 아득해져 갔다.
수정이의 몸은 뜨거웠다.감히 만져볼 생각, 갖고 싶다는 생각 한번 해본적없던 그녀의 몸은 부드럽기 그지 없었다. 뭐가 그리 급한걸까.나는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수정이의 브라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손안가득 만져지는 부드러운 살덩이를 계속해서 주물럭 거렸다. 키스를 하고 있는 내 입안에서 점점 거세지는 그녀의 숨결은 나를 더욱 앞으로 나아가게 보채는 듯했다.
용기를 낸 것인지, 이번에는 수정이의 손이 움직이며 내 티셔츠를 끌어 올렸다.그 순간마져 아까워 그녀의 입술에서 입을 떼지 못하며 나는 정신없이 옷을 벗어나갔다.이미 그녀의 티셔츠는 속옷과 함께 훤히 올라가 버린 상태였고, 내 몸이 알몸이 되는 동시에 내 손에 의해 수정이의 바지는 팬티와 함께 밑으로 끌어당겨졌다.
“하아..하아..”
눈으로 보고도 밑을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반신을 훤히 드러낸 그녀의 하얀 다리와 허벅지.그리고 위로 말려 올라가 얇은 허리와 통통한 가슴을 보여주는 모습은 순백색의 화면을 보는 착각마져 불러 일으켰다. 붉게 상기된 그녀의 표정은, 쉴새없이 안아달라고 하는 무언의 어리광으로 보여 참을수가 없었다.
내 몸이 그녀와 포게어졌다. 꿈결의 끝자락이 아닐까 하는 몽롱한 착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알몸인채로 그녀를 힘껏 껴안아 살결의 감촉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눈앞의 상대가 수정이라는 사실은 수십번 상기해도 믿어지지 않는 신기루만 같았다.
“흑..흑..”
부드럽게 만지는 내 손길에 수정이의 감겨진 두 눈이 파르르 떨린다.손을 뻗어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감촉이 손가락사이에 찡 하고 전해져왔다.
깜짝 놀라버렸다. 부드러운 키스.그리고 몸을 어루만진 정도뿐인데 그녀의 다리사이는 뜨거운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손가락으로 닫혀있는 꽃잎사이를 조심스레 열어보았다.젖어있는 자신이 부끄러운지 수정이는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흑!”
그녀의 다리사이로 내 몸을 묻었다.잔뜩 성이난 불기둥이 그녀의 하반신과 마찰되었다.눈앞에 보이는 그녀의 하얀 가슴사이에 입을 맞추었고, 그와 동시에 무언가 뜨겁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어오며 자연스럽게 나는 그녀의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엔 나에게 문자하나 보내도 떨려서 잠을 못자던 상대와 남녀가 할수 있는 가장 가까운 스킨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늘 정장만 입어서 알수 없었던 그녀의 가슴과 허리와 도톰한 허벅지를 모두 머리에 세겨 넣겠다는 듯 허겁지겁 내 눈으로 집어 넣었다.
“흑..흐응..흑..”
벽 너머로 들었던 그녀의 신음소리와 달랐다.같은 목소리지만 묘하게 뉘앙스가 달랐다.내가 점점 더 그녀의 안으로 깊게 진입하고 있을 그때에, 감겨있던 수정이의 두 눈이 떠지며 내 눈과 마주쳤다.
“흐응..흑..”
왠지 모르지만 눈물이 났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너무나 좋아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눈물이 나오는게 이상했다. 그녀에게 눈물을 보여주기 싫어 입을 맞춰 버렸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내 입안에 막혀 헛돌기 시작했다.
내 허리는 조금씩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부드러운 점액이 내 귀두부분부터 뿌리까지 감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확실히 부드러웠다. 약간은 통통한 수정이의 허벅지에 부딪혀서 그런지, 자꾸만 살끼리의 마찰음이 야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내가 벽너머로 들었던 그 모든 행위들이 지금 내가 주체가 되어 이뤄지고 있었다.다만, 그녀석처럼 내가 욕설과 협박,윽박지름을 하지 않는것 뿐이다.
“오빠..흑..흐응..아앙..”
내 목을 끌어안은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자세한번 바꾸지 않고 수정이의 몸을 느끼는데만 열중했다. 중간중간 그녀가 몸을 비틀때마다 그녀의 몸안에 있는 빳빳한 고기덩어리에 지속적으로 자극이 오고 있었다.
너무도 야했다. 벽 너머로 둘의 정사장면을 듣고서도 그녀를 실제로 보고서 그런생각을 한적이 없었다. 티셔츠와 속옷이 말려 올라가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는 가슴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야했다.표정도 야했고 우리가 취하는 포즈도 야했다. 자꾸만 그녀가 야하게 느껴지는 내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하지만 내 몸은 점점 정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내 목을 부여잡고 누군가를 불러대는 수정이의 목소리도 내 움직임에 비례하여 고조되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뜨거운 느낌이 올라오려 하는 그때, 나는 수정이의 감은 두 눈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보고야 말았다.
“하아..하아..”
결국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버렸다.좁은 그녀의 입구를 빠져나오자 마자 하얀 정액이 수정이의 허벅지 위로 쏟아져 나왔다.그녀가 흘린 물과 내가 토해낸 정액들이 하얀 허벅지를 통해 타고 내려갔다.
“흑..흑,.”
몸을 비트며 얼굴을 감싸는 그녀의 모습에 그만 허물어져 버렸다.흠뻑 젖어버린 몸을 가리며 그녀는 베개사이로 얼굴을 묻어 버렸다. 옆으로 누워도 아름다운 곡선은 망가지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은 알수 없는 그 무언가로 인해 계속해서 처참히 구겨지고 있었다.
“흑..흑...”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하얀색 물감을 쉴새없이 짜넣는 것만 같은 공허함과 상실감이 몰려들었다.
“미안해요..흑..미안..미안해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조금씩 흐르던 그녀의 눈물이 흐느낌으로 바뀌고, 이제는 그녀가 엉엉 울고 있었다.쉴새 없이 나에게 사과를 하며 자신의 몸을 이불로 가리는 그녀의 모습에 넋이 나가버렸다.
그녀가 왜 우는지, 무엇 때문에 서럽게 울면서 내게 알수 없는 사과를 하는지 어렴풋이 느껴질수록 내 가슴은 조금씩 찢어지고 있었다.추악해 보이기 까지 하는 내 알몸을 몸을 움츠려 가렸다.나는 너무나 한심하게도 이제서야 깨닫고 있었다. 수정이에게 오늘 어떤일이 일어 났는지,그리고 그녀는 지금 어떤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진실과 진심이라는 존재는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내 가슴을 찢어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없는 사랑 찾으려 애쓰지 말고, 지금 너에게 맞는 사람을 찾아.-
마지막에, 인애가 포장마차를 나서며 내게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서야 깨달은 내가 병신같았다. 점점 깊어가는 밤. 내 조그만 방은 계속해서 흐느끼는 수정이의 목소리만 조용히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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