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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 <11부>

11부


“룰루룰루...”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무언가에 기뻐서 이렇게 설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아주 오래간 만이었다. 배고픈데 집에가서 밥을 먹는다거나, 혹은 피곤할때 얼른 집에가서 늘어지게 잘 생각을 하며 느끼는 설렘과는 그 종류가 달랐다. ‘무언가 좋은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감’이었다.

남녀관계..아니 사람관계란 참 단순한 것이 틀림없었다.겉보기에는 매우 어려워 보이지만, 하나의 실마리가 존재하면 그것의 매듭을 풀기란 너무나도 쉽고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용기를 내어 식사를 하자고 한 다음날 부터, 나와 수정이는 굉장히 가까워졌다.

그녀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는날도 있었다.태어나서 처음으로, 화장실갈때도 그녀의 연락을 놓칠까봐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들어갈 정도였다.문자메세지를 보내고 나서, 다시 그녀의 답장을 기다리며 설레여 했고, 답장이 오는 수신음이 울릴때의 그 묘한 떨림도 너무나 즐거웠다.

연락이 자주 이루어지니, 서로에 대해 알수 있는 기회는 조금씩 증가하고 있었다.수정이가 나에대한 호감을 내 비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어떤 의도든 그녀와 가까워진다면야 상관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무언가 목적지를 정한 여행자처럼 바빠지기 시작했다. 매일 일이 없는 날이면 집에서 멍때리기 바빴던 내가, 이제는 적극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창작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창작의 토대가 영감이라고 한다면, 나는 토대만큼은 충만한 상태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수정이를 생각할때의 설렘을 음악에 적용하니 쉴새없이 멜로디가 떠올랐다.분명..대중성은 없는 멜로디 일지는 모르지만 나에겐 무엇보다 가치있는 내 자식들이나 다름없었다.

‘아..수정이에게 이걸 선물해 볼까?’

내가 잘하는게 무얼까..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그나마 할줄 아는게 음악이라면, 이것을 통해서라도 수정이에게 어필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왔다.게다가 내가 처음으로 준혁이 형의 스탭이 되었던 시절, 그가 해줬던 이야기도 떠오른 것도 한몫했다.


-야야 박재하.넌 어찌된게 여자친구가 없냐?-

-푸우..여자를 꼬실 능력이 없어서요.-

-능력?뭘 말하는 건데 그게?-

-얼굴도 평범하고,키도 평범하고..그저 그렇잖아요.-

-야야 바보야. 그런 하드웨어적인 요소로 여자를 꼬시던 시대가 아니야.알아?여자를 꼬시는건 컨셉이 중요해.-

-컨셉이요?-

-그래,자신만을 위해 노래를 만들어 주는 남자..여자들은 이런거에 은근히 훅 간다. 좋은차에 딱 태워서 빵빵한 카 오디오로 니가 만든 창작물을 들려줘 봐..뻑 갈걸?-

-...전 좋은차가 없는데요.차가 꼭 필요한가요?-

-당연하지 임마.차로 여자를 백프로 꼬실수는 없지만..차가 큰 도움을 주거든.10번찍어야 할 나무를 5번만 찍어도 될수 있게 횟수를 줄여주는게 바로 차니까 말야.-


물론, 그가 말했던 두가지 요소중 ‘멋진 차’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긴 하지만 상관없었다.어차피 안되는것은 안되는 거니까. 대신 그녀를 위해서 꼭 노래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처음 수정이를 보았을때의 설렘, 그리고 존재 자체에서 느껴지는 두근거림을 모두 담을수만 있다면.

그동안 멍때리느라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컴퓨터 앞에 앉아, 내 방에 갖추어진 작은 음악장비들 몇개를 꺼내었다. 그 위에 쌓여있는 먼지를 후후 하고 불어내버리고는 음악 툴을 실행시켰다.해드폰을 쓰고 아주 오래간만에 처음의 열정으로 돌아가 이것저것을 만져보기 시작했다.

예전, 준혁이형이 작업을 할때 모습을 본적이 있었다.창작의 고통으로 인해 예민해 질대로 예민해져 있었던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동기’가 필요하다고 툴툴 거렸었다. 점점 더 창작에 대한 모티베이션이 돈과 명예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 슬프다는, 다소 그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말과 함께.

하지만 지금의 나는 충분한 동기부여가 된 상태였다.수정이에게 어울릴만한 멜로디와 리듬을 찾는 것은 매우 까다로웠지만, 반대로 매우 즐거웠다. 지금 이 설레임 그대로, 나는 거침없이 마스터 키보드를 찍어 조합했다. 장비가 많을수록 좋겠지만, 튠이 발라진 화려한 음악보다는 내 진심이 묻어난 음악을 전하고 싶었다.

순식간에 한소절이 만들어졌다.재생을 시키니 피아노 선율이 내 해드폰을 가득 매워왔다. 피아노 소리 하나로 이뤄진 그것은 매우 수수했지만, 그녀를 생각하며 만들어나가니 음악만으로도 설레여지기 시작했다.

덜컥!

내가 만든 선율을 감상하고 있을 그 때에, 듣기싫은 소리 하나가 해드폰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황급히 해드폰을 벗은 나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1시. 평소보다 조금 늦었지만 그 녀석이 오는 소리가 틀림없다.

예상대로 쾅!하는 현관문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여지없이 성큼성큼 어딘가로 다가갔다. 매번 감청을 하던 해드폰을 쓸 겨를이 없어진 나는, 살금살금 벽쪽으로 다가가 귀를 대었다. 지이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정도 지점이구나.. 눈으로 다시금 벽의 위치를 확인하며, 단 한번 들렀을 뿐인 수정이의 방 내부를 상상하기 시작했다.어디쯤일까. 녀석이 카메라를 설치한 그 지점은, 수정이의 방 어디에 해당되는 걸까.

누군가를 위한 창작으로 순수해졌던 마음이, 불청객 하나로 인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아 버렸다.녀석은 또 그것을 돌려보며 확인하고 있겠지.하지만 오늘은 그때와 달리 재생되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진 않았다. 빨리 감아서 확인하고 있는걸까? 녀석이 꼼지락 거리는 소리가 한참이나 들려오더니, 이윽고 다시 덜그럭 하는 소리가 나며 캠코더가 제 위치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두 귀에 모든것을 집중하고 있던 내 머리가 갸웃거려졌다. 녀석은 생각보다 빨리 수정이의 집을 나서고 있었다.늘상 자신의 변태행위를 확인하고 나가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녀석은 또다시 쾅!하고 문을 닫아 버리고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다.

-여보세요..난데..너 회사냐?-

용기를 내어 살금살금 현관쪽으로 다가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빼꼼히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이제는 익숙해 지기까지 한 녀석의 뒷모습이 보였고, 그는 전화로 누군가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씨발 그래서 어제 뭐한거냐고..엉! 말대답말고 똑바로 대답해!”

입에 걸레를 물고 사는 자식이었다. 수정이에게 전화를 건 것일까? 내 예상은 단순하지만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 녀석은 수정이의 집에 들어가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확인을 했고, 그 집을 나오자마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 것이니까.

그가 계단으로 사라지자, 나는 복도로 나가 난간너머로 밑을 바라보았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더니, 이윽고 그 좋은 차에 올라타 또한번 세게 차문을 닫았다.

‘저런 자식에게..’

내 스스로 난 사람이라 말할수 없지만, 난 적어도 저런 자식에게 지면서 열등감을 폭발시키고 싶지 않았다. 짜증이 밀려왔다. 순간적으로 집중해서 수정이에게 선물할 곡의 전반적인 멜로디 라인을 잡아두긴 했지만, 마무리가 되기도 전에 저런 자식이 내 기분을 잡쳐 놨다는 것은 절대로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나도 모르게, 그의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 사라질때까지 그것을 노려보고 있었다.

띵동.

주머니에서 문자가 수신되는 음성이 들려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외부 액정에 써있는 세글자.

‘수정이?’

묘한 타이밍이었다. 저 자식이 전화를 끊자마자 문자를 보낸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궁금증을 해소하려 나는 재빨리 폴더를 열어 메세지를 확인했다.

-재하오빠..오늘 제가 술 사고 싶은데...괜찮나요?-






“야..니가 전에 말해줬던 차 넘버 있지?”

“차넘버?아아..그거요.”

고개를 끄덕인 준혁이 형이 길게 연기를 뿜으며 말을 이었다.

“그 자식 신상명세를 알아봤는데...그 놈 그거 가관이더라.”

“네?”

내가 고개를 갸웃하니, 그는 서류봉투 하나를 내게 툭 하고 던졌다.그것을 개봉해 안에 있는 몇 장의 종이를 본 내 눈이 놀라움으로 커진것은 말할것도 없었다.

“이름이 염문진이. 성이 참 특이하더만. 니가 말한대로 잘나가는 벤쳐기업 사장 아들이야. 말만 벤쳐지..코스닥 상장까지 한 알짜배기더라고.”

“그..근데 차 번호 하나로 이런게 조회가 되요?”

어리바리한 질문이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냥 준혁이 형이 인맥이 두텁다는 이유 하나로 차 번호와 차종을 불러주며 부탁을 했을 뿐인데 이런 디테일한 정보가 되돌아 올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 얼빵한 표정에도,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엉아가 그런거 알아보는거야 쉽지. 요새같이 이름 석자면 똥구녕 주름숫자까지 조사할수 있는 시대에...그냥 아는 동생들 시켜서 알아봤어.”

그 ‘아는 동생들’이라는 사람들의 정체가 심하게 궁금했지만,나는 그가 또 무슨말을 해줄지 궁금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내민 종이에는 그의 기본적인 신상명세를 비롯해서 어디서 살고 있는지만이 나와있을 뿐이었다.

“근데 뭐가 가관이라는 거에요?”

내 질문에 그는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담배연기가 역한건지, 아니면 그 가관이라는 녀석의 사생활이 더러워서인지 이유는 알수 없었다.

“윤수정말고 여자가 또 있어.”

“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되물어 버렸다. 그는 작업실 쇼파에 몸을 묻으며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야. 윤수정 하나가 아니고, 또 있더라. 그 여자는 무슨 단란주점 나가는 업소여자 같은데..그 여자에게도 오피스텔을 얻어 줬더만. 웃긴건 뭔지 아냐?니가 사는 오피스텔하고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세..세상에.”

형은 손가락을 살짝 꺾으며 뚝뚝 하는 관절소리를 내어 보이더니, 이윽고 앞에 있는 커피를 한모금 들이켰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수정이를 두고 양다리라니..화가 나기보다는 맥이 풀려 버렸다.하지만 준혁이 형이 다음에 내뱉은 말은 더더욱 충격이었다.

“그 자식..변태가 확실한 놈 같다. 뭐하는 놈인지 궁금해서 밀착취재를 시켜봤거든? 하..근데 그 새끼 말이다..그 단란 나가는 아가씨 집에도 캠코더를 설치 한거 같더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런말을 태연히 하는 준혁이 형이 미울정도로 머리가 탈색되는 상실감이 들어왔다.그 자식이 또라이 짓을 한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그런 자식을 사랑하는 수정이에 대한 열등감이었다.

“야..너 기절했냐?왜 입만 쩍벌리고 있어 임마.”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허탈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수정이에 대한 사랑이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된 애정결핍 환자인줄 알았던 내 생각은 오히려 그녀석을 과대평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훔쳐보고 집착하며 폭언하기라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돈많은 변태새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변태새끼가 쳐놓은 그물에 수정이가 걸려 있는 것이다.

“녀석은 분명 캠코더 세개를 두 여자의 집에 돌리고 있는 걸꺼야.”

“세개라뇨?또 한명이 있나요?”

내 질문에 준혁이 형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건들며 말을 이었다.

“야이 좌슥아. 머리로 생각을 좀 해봐라. 그런 변태새끼들이 캠코더에 녹화된 영상을 한번보고 지우고 나서 다시 찍겠냐? 그런 새끼들 특징이 뭔줄알아?그런걸 다 고스란히 컴퓨터에 남겨둔다는 거야. 근데 생각을 해봐라. 그걸 다시 집으로 가져가면 수정이네 집을 감시할 것이 없어지니까 나중에 또 설치하러 다시오는 번거로움이 생길꺼 아냐?그래서 세개를 돌린다는 거야.”

그제서야 아 하는 탄성이 들었다.준혁이 형의 추리는 일리가 있었다.수정이의 방에 설치된 것이 A이고, 그 단란주점 다니다는 여자의 집에 있는 캠코더가 B라면, C라는 또다른 캠코더를 갖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야 A에 찍힌 것을 집으로 가져와 본인의 컴퓨터에 옮길 것이고, A를 회수하는 과정에서 C를 A의 위치에 놓아둘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찾아와 설치하는 번거로움이 없을 뿐더러, 쉴틈없이 수정이를 감시할수 있을 테니까.

B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A에 녹화된 영상을 컴퓨터에 옮기고 나면 그것은 다시 B를 옮길때 생기는 딜레이를 맥굴 용도로 쓰일것이 뻔했다. 게다가 수정이는 밤에 오고, 업소에 나가는 그 여자는 밤에 나갈테니 완벽한 로테이션이 가능할 터였다.

사뭇 놀라웠다.기대를 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의 정보가 도출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새삼스레 준혁이 형이 대단하게 느껴졌다.늘상 음악을 할때를 제외하고는 가볍고 안하무인인 사람인줄만 알았는데,그가 나를 위해 이런 범죄에 가까운 뒷조사를 해주었다는게 고마웠다.물론 형이 직접 움직이진 않았지만.

“야..뭐야..재수없게 감동한 듯한 표정짓지마.”

“고마워요 형..진심으로.”

“착각은 하지마라. 니가 수정이랑 잘되었으면 해서 하는 일이 아냐.”

“무슨소리에요?”

“그냥 그 자식이 싫었을 뿐이고, 널 말리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에 협조를 택했을 뿐이야. 넌 내 하나뿐인 스텝이니까. 그리고..너도 경험이라는게 중요할 테니까 돕는거 뿐이라고.”

무슨 경험을 말하는 걸까?왜 내가 수정이와 잘되는게 싫다는 거지?고개가 갸웃거려졌지만 그것을 구태여 그에게 캐묻지는 않았다.원래 직설적인 사람이지만, 묘하게도 수수께끼 같은 말을 뱉는것도 상당히 즐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

하나를 피운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한개의 담배를 피워문 그가 내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그 염문진인지 염통인지 하는 새끼를 엿먹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벙찐 얼굴로 그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는 애초에 기대도 안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푸욱 하고 한숨을 쉬었다.

“...너한테 그걸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뭐..뭔데 그래요.”

“잘 생각해봐. 캠은 세 개다. 내 추리가 빗나갔다 하더라도, 캠코더가 두개라는 점은 일단 확실한 거지.여기까지 접수됐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피식 웃었다. 그의 입가로 담배연기가 뭉실뭉실 피어 올랐다.그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방법은 딱 하나. 그 두 개를 우리가 바꿔치기 한 후 수정이에게 캠코더의 존재를 인식시켜 주는 거다.”






몇 분이고 멍해져 있었다.

아까 준혁이형에게 들은 그 자식에 대한 충격적인 이야기 때문이었다.다양한 인격들이 조화를 이뤄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라지만, 내가 느낀것은 문화충격 이상의 쇼킹이었다.

종종 인터넷에서 커플들끼리 찍은 셀프카메라가 유출되는 것을 보며, 나는 그것을 그저 즐기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안쓰러운 생각을 한 적 있었다. 어째서 그런것을 찍는걸까? 남자는 그렇다 치고, 여자는 왜 그것을 허락한 걸까?

그런 단편적인 부분조차 이해할수 없던 나에게, 그녀의 남자친구가 벌이는 행각은 이해할수 없다는 차원을 넘어 정신이상으로 비춰졌다. 수정이는 집에서 카메라가 설치된 것도 모른채 아무렇지 않게 옷을 갈아입거나 샤워를 할 것이며, 그는 수정이가 어떤 티비프로를 보는 것까지 세세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감시’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것을 정정해야만 했다. 감시가 아니라, 훔쳐보기라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성향을 가진 녀석이었다는 것을.

나와 다르다 해서 변태로 치부할 자격은 없지만, 두 여자를 주물럭 대며 카메라를 드리우는 행위는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수정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강요했던 녀석의 내면은 추악하고 더러운 성적유희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느끼고 있을 수정이가 불쌍하고 애처로웠다.

날은 어두워졌고, 수정이와 약속했던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또 바보처럼 한참이나 먼저 호프집에 와서 기다리게 된 나는 연신 창밖을 바라보며 그녀의 모습을 찾기 바빴다.

염문진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욕설을 내뱉었고, 그가 전화를 끊은지 얼마되지 않아 수정이에게 갑작스레 만나자는 문자가 온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가 욕을 내뱉은 대상은 수정이일까 아니면 다른여자일까 하는 의문이 계속해서 고개를 쳐들었다.

“밖에 재밌는거 있어요?”

장난기 섞인 누군가의 목소리.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수정이가 살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어라고 인사라도 건내야 하는데..나는 졸린 젖소마냥 눈을 꿈벅거리며 얼빵하게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고 말았다.

날씨가 조금 추워진 탓일까?그녀는 약간은 철이른 코트를 입고 있었다.화려한 색깔이 아닌 남색의 코트가 하얀 그녀의 얼굴과 잘 어우러져 너무나 예뻐 보였다.

“어라?아직 술 안시켰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메뉴판을 꺼내어 눈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거니까 비싼거 먹어도 되요.음..젤 맛있는 안주가 뭐지..”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내게 말을 하더니, 이윽고 메뉴를 보며 한참이나 고민하기 시작했다.집중할때에 나오는 버릇인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하고 두드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하지만 마음이 이상했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녀는 지금 펑펑 울고 싶을지 모른다.남자친구에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테고, 그것을 술로라도 풀고 싶을 심정일 것이다. 내가 제 3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는 그것을 모두 숨기고 애써 웃어주는 것만 같았다.

“맥주 괜찮죠?”

“괜찮아요.”

“전 소주는 못먹거든요.”

수정은 살짝 웃으며 벨을 눌렀고, 종업원이 오자 이것저것을 주문하기 시작했다.단순히 자신이 쏠테니 두고보라고 한 그녀는 비싸보이는 안주 몇개를 주문했다. 역시 여자는 안주를 많이 먹는구나...그녀도 친구들과 있을때는 안주를 잔뜩 시키고 수다를 떨겠지..하는 생각이 드니 괜시리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왜 술을 마시자고 했어요?”

“음? 그냥요..왜요? 뭐 이상한가요?”

“아뇨..갑작스러워서..”

내 말에 그녀는 머리결을 뒤로 잡아 넘기며 살짝 웃었다. 하얀 목선이 드러나자 숨이 턱 하고 막혔지만, 이내 내색하지 않고 수정이를 바라보았다.

“에이..갑작스럽긴..보통 친구들하고 약속잡을때 오늘 마실래?이렇게 급약속을 잡잖아요.똑같은 거죠.”

“저는..수정씨한테 갑자기 연락이 올 정도의 사이가 아니었잖아요.”

내 말에 그녀의 눈망울이 살짝 커진다.당황한 듯한 그녀의 눈빛에 나는 허둥지둥 다음말을 내뱉었다.

“아..시..싫다는게 아니에요. 그냥..감격스럽고 새삼스러워서 그래요. 나랑 술마셔 준다는거..”

그제서야 그녀는 뭐가 웃긴지 입을 가리고 킥킥 거렸다.왠지 애써 웃음짓는거 같아 슬펐지만, 나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웃고 있었다.

“재하 오빠는 처음 봤을때 스님이미지 하고 늘 똑같은거 같아요.”

“에? 무슨뜻이에요?”

“글쎄요.”

장난스러운 그녀의 표정에 나는 괜시리 미간을 찡그려 보았다. 빡빡머리가 인상을 쓴게 우스꽝스러운 모양인지, 그녀는 귀엽게 미소짓는다.

이런저런 일상적인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여자와 대화를 많이 나눈적 없었던 나는 그저 일이 어땠어요?하는 단순한 질문밖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수정이는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웹디자인 업무가 아닌 업무도 시키는 상사를 이야기 하며 열을 올리기도 했고, 자신이 참여한 제품디자인이 호평을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그녀의 말에 맞장구만 쳐주고 있을 사이에, 어느덧 맥주피쳐와 안주들이 나왔다.

“자아 건배에~”

“잘 마실게요.”

“뭘 잘마셔요. 저번에 맛있는 파스타 사줬으니..제가 사야죠.”

내가 뭐라고 하려는 찰나, 수정이는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가 조금씩 들이키기 시작했다. 맥주가 써서 인상을 찡그리는 모습이 사뭇 귀여웠다. 계속 설레여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나는 단숨에 눈앞에 있는 잔을 벌컥벌컥 비워 버렸다.

“근데..남자친구는 언제 만나요?”

어떤 안주를 먹을까 즐거운 고민을 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짐이 느껴졌다.실수한걸까? 너무 이상한 방법으로 그녀의 마음을 떠보려 한것 같아 괜시리 뜨끔했다.

“그냥..오늘은 그런 이야기 하지 말아요.”

아..나도 모르게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뒤늦게 애써 웃었지만, 분위기는 살짝 어색해져 버렸다. 내 예상이 맞구나...아까 그 자식이 전화한 것은 수정이었던 모양이었다.

“스님은 오늘 뭐했어요?”

간만에 스님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으로 봐선, 빠르게 화제를 전환하고 싶은 모양이었다.아차..내가 먼저 말을 꺼낸다는 것을 깜박한 것이었다.

“음..간만에..곡을 썼어요.”

“오와와아!”

아...원래 이 대사를 할때에는 예술적 감각이 충만한 고독한 창작자의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성격은 어디가지 않는 모양인지 수정이의 탄성 한방에 나는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정말요?들어보고 싶은데.”

“들려드려요?아..그리고..수정씨를..생각하면서 쓰긴했어요.”

그녀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 나를 빤히 보는 시선은 피하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난 저런 시선에 약한데...

“네..듣고 싶어요.”

왜인지 모르게 차분해진 그녀의 표정에 가슴이 뛰었다. 미리 그 곡을 넣어둔 아이팟을 꺼내 그녀에게 이어폰을 건냈다. 수정이는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대었고, 나는 긴장된 마음을 억누르며 그것을 플레이시켰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키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시끄러운 호프집의 소음들이 들리지 않을 만큼 난 그녀의 눈빛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었다. 수정이는 살짝 놀랍다는 듯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조용히 웃었다.

‘어라..’

나도 모르게 눈을 비비고 수정이를 바라보았다.내가 만든 음악을 듣고 있는 수정이의 모습이 순간 인애와 겹쳐보였기 때문이었다. 사소한 데자뷰라고 느꼈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인애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장소는 달랐다. 호프집이라기 보다는 곱창등등이 안주로 나오는 선술집 이었었다. 맥주가 아닌 소주를 마시며 내가 만든 첫 자작곡을 듣던 인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개나 줘 임마!’라고 내게 면박을 줬었지..나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정말..이게 절 위해서 만든 건가요?”

상념에 젖어있던 내가 고개를 들자, 눈빛이 촉촉해져 있는 수정이가 내게 묻고 있었다.반짝이는 그녀의 입술을 보며 나는 그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좋아요...누군가가 노래를 부른다면 더 좋겠지만..연주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그녀가 내게 지어주는 미소는 아까같은 미소와 조금 달라보였다. 두근두근 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도 똑똑히 전달되었다.수정이는 여전히 귀에서 이어폰을 빼지 못한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목이..있어요?”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물론 내가 생각해둔 제목이 있긴 했지만, 그것을 수정이가 어떤 뉘앙스로 받아들이느냐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수정이의 눈빛을 잠시 응시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그녀의 눈빛이 예상대로 살짝 놀란 표정이 되어 나를 향했다. 그럴만도 했다.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는 제목이 저런 것이니..아마 속으론 많은 생각을 하겠지. 하지만 그 제목을 짓는 대는 몇초도 걸리지 않았다.말그대로 수정이가 잠든 사이에, 나는 많은 상상과 꿈과 설레임속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묘하게도 인애와 함께 방안에 있던 날까지 포함되며 떠오른 곡의 제목이 그것이었다.

“고마워요..”

“별거..아닌걸요.마스터 키보드로만..그냥 한거라..편곡도 되지 않았어요.”

“마스터 키보드가 뭐에요?”

“아..그러니까 신디사이져랑 똑같은 건반같은 건데..직접 누르면 소리가 안나와요.컴퓨터에 연결해서 시퀀싱을 하거나 여러 음악작업할때 쓰이는 건데..아..말이 너무 어렵죠?그러니까 그게..신디사이저에서 음원만 제거한 모델이 마스터 키보드라고 보시면 되는데..그게..아 이 말도 어렵나..”

“풋..”

내가 허둥지둥 대는 사이에, 그녀는 날 보더니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수정이는 계속해서 쿡쿡 거리며, 머리를 긁적이는 내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요..충분히 이해했다구요.”

“아아.미안해요.음악이야기가 나와서.”

“뭐가 미안해요? 저한테 주는 선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말하는 건데..너무 고마워요. 나도 갖고 다니면서 듣고 싶을 정도에요.”

그녀의 웃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가 하는 말에서 진심이 묻어 나오자 나도 모르게 얼빠진 미소가 흘러나왔다. 되감기 화살표 버튼을 눌러, 트랙을 다시 재생시키는 그녀의 모습에 신이났다.

“내가 꼭..멋지게 편곡을 해서 다시 드릴게요.”

“정말요?”

“네..정말로요.”

“건배 한번 더해요!어라? 원샷 한거에요?”

그녀의 가냘픈 손이 무거워 보이는 피쳐를 향했고, 이윽고 내 잔에 조금씩 맥주가 채워졌다.나도 모르게 멍하니, 반지가 끼워져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향했다가 다시금 그녀의 얼굴로 다다랐다. 내 잔이 넘치지 않게 집중하는 듯 입술을 삐죽 내민 그녀의 얼굴을 나는 또 멍하니 바라보고 말았다.

“건배해요.”

자신의 잔을 들어 내게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멋적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한모금 마셨을 뿐인데 약간 붉게 물들기 까지한 그녀의 얼굴이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고마워요..좋은 선물 줘서..내 기분..풀어줘서..”





또각..또각..

높은 구두를 신은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불규칙 적으로 내 귓가를 때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수정이와 가깝게 붙어서 걷는 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가 쓰는 향수냄새, 샴푸냄새가 나를 어지럽게 했다.

“미안해요..술이 약해서..”

수정이는 민망한듯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도 역시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녀는 술이 많이 약한듯 했다. 배가 부르다는 이유로 피쳐에 남아있는 맥주는 내가 싹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수정이는 조금 어지러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수정이가 계속해서 기분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너무나 멀게 느껴졌던 그녀와의 거리는 사뭇 가까워져 있었다. 걸음걸이가 불안하니, 나는 그녀의 옆에 딱 붙어 걸을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것이었다. 감히 어깨에 손을 올린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못했지만, 내 팔은 어설프게 그녀의 등 부위를 향해 올라가 있었다.물론 직접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터치한 것이 아닌, 허공에 떠있는 어정쩡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오빠가 옆집 살아서 다행이에요.”

“왜요?”

“자동적으로 바래다 주게 되잖아요.”

“옆집이 아니더라도 바래다 줬을 거에요.”

“와아.진짜요?재하오빠 매너남이네요.”

“그야..이쁜사람은..혼자 보내기 불안하니까..요.”

수정이가 기분좋게 웃었다. 베시시 웃는 모습이 나를 유혹하는 것만 같아서 심장이 요동쳤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뒤에는 알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우리집 건물 복도에 들어서자, 나는 일부러 발소리를 죽이며 그녀를 따라갔다. 따라간다기 보다 우리집이 그녀의 옆에 있어서 이긴 하지만.

“고마워요 오빠.”

“뭐가요?술은 수정씨가 샀잖아요.”

“그래도..”

집앞에서, 그녀가 머뭇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나를 보는 그녀의 촉촉한 눈빛에 나는 그만 얼어붙어 버렸다.

“있잖아요..만약에..만약에요..”

나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수정이는 내 눈을 바라보지 않고,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남자친구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적극적일수 있나요?”

누구에게도 들은적 없고, 누구에게도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배운적 없는 그 질문에 나는 당황해 버렸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천천히 나를 향하는 그녀의 눈빛. 위험했다.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진지하게 드는 적은 처음이었다.

“...네.”

다가가야 할까? 아니면 끌어 안아야 할까?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다음 행동에 대해 명령을 내리고 있었지만 내 몸은 지휘체계를 거부하고 있었다.

“들어가볼게요. 잘자요 재하오빠.”

결국 망설임의 시간이 바보같이 흐르고 나서야 그녀는 몸을 돌렸다.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아니, 하지 않았다.그녀의 현관이 열린 지금, 내가 이야기를 하면 그녀가 또 남자친구에게 심한 말을 들을 빌미가 제공되는 것일 테니까.

수정이는 미소를 지어주었다.문이 닫히는 그 찰나의 시점에서 살짝 손을 흔드는 그녀.내 눈은 반사적으로 수정이의 집 안으로 향했다. 그 짧은 순간에 내가 귀를 대고 느꼈던 벽부분에 해당되는 부분을 부지런히 찾았다.

‘서랍장..’

문이 서서히 닫혀갔다. 내 시선이 최종적으로 머문곳은 윗면에 인형이 잔뜩 올려져 있는 연두색 서랍장이었다. 틀림없었다.저 작고 아기자기한 인형들 사이에, 더럽고 추악한 감시의 눈이 숨겨져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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