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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 <12부>

12부

며칠이 지났다.

하루하루는 잠시 눈을 붙였을때 꾸는 단꿈마냥 순식간에 지나갔다.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이라고 종종 들었지만, 요새처럼 그 말을 실감하고 사는 기간은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하철에서 수정이의 모습을 처음 봤을때, 내가 그녀와 연락을 하고 지낼수 있을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전화번호를 받은 것도 순식간에 ‘얼떨결에’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점점 수정이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천길 동구 밖처럼 느껴지던 그녀와의 거리는 거북이 걸음이긴 하지만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이제는 간간히 그녀가 짬이 날때마다 문자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물론 내가 수정이처럼 직장인이 아니라 프리랜서 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진전은, 점심시간 마다 수정이와 만나서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개인당 식비를 던져주고는 ‘알아서 느그들끼리 밥먹어라’식의 회사정책에 수정이는 늘 불만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조그만 방에서 쪼그리고 앉아 라면이나 후르륵 거리며 그저 죽기 싫어서 음식을 섭취하는 시간이던 나의 점심시간은, 이제 달콤한 데이트의 시간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아아..미안해요.거래처에 메일보내야 할게 있어서 조금 늦게 나왔어요.”

“괜찮아요.”

나 때문에 뛰어온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그녀가 사뭇 귀여웠다. 아무렴 어떠랴. 그녀가 늦게오든 일찍오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매일같이 그녀를 볼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것이었고, 나아가 그녀와 가까워질수 있는 기회는 계속해서 제공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리라.

아주 맛있는 곳을 알고 있다며 그녀가 나를 끌고간 곳은 아담한 페밀리 레스토랑 이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체인점은 아니었지만, 분위기는 꽤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본사의 힘을 빌려야 하는 체인점이 아닌 이런 가게를 내는 것은 창업비용이 많이 들 텐데..하는 잡생각을 하며,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생전 처음 와보는 고급 식당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런데 자주와요?”

내 얼빠진 질문에 그녀는 살짝 미소지었다. 하기야 누가봐도 내 모습은 레스토랑 보다는 해장국집이 어울리는 걸쭉한 외모였으니까. 수정이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그와 동시에 좌우로 찰랑찰랑 흔들리는 윤기나는 머릿결이 내 눈속에서 아른거렸다.

“자주 오지는 않아요. 두 번정도 와봤는데 맛있는거 같아서요.립 안좋아해요?”

“립이 뭔데요?”

“아..음..이거요.”

그녀가 메뉴판을 뽑아 펼쳐보이며 사진속에 있는 고깃덩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말이 좋아 립이지 저거 그냥 뼈다귀 아닌가? 그냥 등갈비 스테이크라고 하면 될것을...하지만 나는 속마음과는 달리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설명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다음 녹음은 언제해요?”

레스토랑 초보인 나를 위해 친절하게 주문까지 도와준 수정이는, 점원이 사라지자 마자 내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무슨 이야기로 대화주제를 이끌어야 할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나로서는 너무나 반가운 질문이었다.

“아직 모르겠어요.사실 작곡가 형도 저처럼 일이 없을땐 그냥 백수거든요. 프로듀서가 노는데, 스탭이 일이 있을리도 없구요.”

“어머, 그럼 그 분이 부르기 전까지는 일을 안해요?”

“하려면 할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 형이 아닌 다른사람하고 일하는게 조금 찔려서요. 그 사람은 신경도 안쓰겠지만, 뭔가 예의에 어긋나는거 같기도 하구요.”

“아..”

그녀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반짝반짝 하는 핑크빛 입술.핑크빛 립스틱을 바른걸까? 아니면 그녀의 입술이 원래 저런 색깔인데 립 클로즈만 바른 걸까? 약간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녀의 입술만 바라보던 나는 수정이가 알아챌까봐 어색하게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럼 오빠는 작곡가 데뷔 안해요?”

“아.데뷔요. 아직은 데뷔할만한 곡을 만들지 못했어요.”

“왜요?있잖아요.”

“어떤거요?”

“당신이 잠든 사이에요.”

내 넋 나간 표정에 수정이는 쿡쿡 거리며 웃었다. 으어..너무나 귀여운 그 모습에 뭐라고 할 말을 잃고 말았지만, 끝내 내가 할수 있는 것은 수정이를 따라 해벌쭉 웃는 거 뿐이었다.

“그건 수정씨 거잖아요. 그래서 안되요.”

“정말요?”

내 대답이 기뻤던 걸까? 해맑게 웃는 그녀를 보니 새삼 뿌듯함이 느껴졌다. 수정이는 노랫말이 있으면 더 좋을거 같다고 했지만 사실 내 생각은 반대였다. 내가 만든 선율은 가사를 붙여 수식하기 위한 곡이 아니었으니까. 이미 수정이는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겠지만, 구태여 노랫말로 확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그것을 듣고 기쁘다면 나는 그걸로 족했다.

처음 봤던 그 모습보다 훨씬 명랑해진 그녀는 내 앞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주로 답답한 회사생활이 주된 태마였지만, 수정이의 목소리로 들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이 너무 달콤하게 느껴졌다. 염문진이라는 녀석은 만나지 않는걸까? 내가 알기론 한동안 만나지 않았을 텐데...마음속에서 자꾸만 고개를 드는 궁금증을 참기란 너무나 힘이 들었지만, 그녀에게 그것을 물어 기분을 잡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전 오빠가 부러워요. 직장생활은 너무 꽉 막힌 새장같아서..”

“제가 왜요?”

“자유롭잖아요. 말그대로 프리 하니까.”

“그렇진 않아요. 직장생활이 새장같을순 있지만, 새장은 적어도 위험으로 부터 보호는 해주잖아요.”

“피..그래도 답답한건 어쩔수 없어요.”

나도 그렇지만, 그녀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대학을 나오자 마자 바로 취업을 하여 일을 해왔으니, 한창 놀고 싶은 나이에 그곳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할 법도 했다.사실 일이 없으면 밥도 굶는게 프리랜서라지만, 수정이에 비해 자유롭다는 사실은 부정할수 없는 것이었다.

“그럴땐 한강같은데 가서 맥주한잔 하면 풀리는데.”

“한강이요?”

허걱. 그냥 혼잣말로 한 말인데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잠시 당황해 버린 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네. 제가 자주쓰는 방법이에요. 사실 여긴 한강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잖아요. 한강 둑방에 앉아서 맥주한잔 하고 오면, 좀 춥긴 해도 기분은 후련하거든요.”

“흠...”

그녀는 턱을 괸채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한강처럼 가까운 곳도 가볼 여유가 없었던 걸까? 데이트 코스이기도 한데...

“가면..어떤게 있는데요?”

“글쎄요.기껏해야 공짜 야경이겠죠. 사실 높은 건물에서 보는 것보다, 고수부지에 앉아서 보는 야경도 멋있어요. 다리나 건물에 불이 쫙 들어오는 거 보는 재미도 쏠쏠하구요. 뭐, 그 건물 사람들은 야근을 하고 있어서 불을 켜고 있겠지만... 사실 밖에서 보면 굉장히 예쁘거든요.”

“제가 야근하는 것도,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경치가 될수 있는 거네요.”

하..사실 그렇게 철학적인 의미를 갖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내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그녀의 눈웃음에 따라 웃고 있을 그때에, 주문한 음식들이 테이블위로 세팅되기 시작했다.

음..일단 냄새는 나쁘지 않았다. 촌스럽게 킁킁 거릴수 없어서 괜히 심호흡 하는 척 하면서 녀석들의 첫인상을 가만히 파악했다. 흔히들 등갈비 라고 부르는 그 뼈에 살코기들이 노릇노릇하게 익혀져 나와 수정이 쪽으로 하나씩 놓여졌다.응? 그런데 저건 뭐지?

작은 사발 하나에 물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그것 역시 나와 수정이쪽에 각각 한개씩 놓여졌다. 투명한 물 위에는 레몬조각 하나가 띄워져 있었다. 레몬차인가? 식전에 마시는 에피타이져 같은 걸까? 살짝 고개를 갸웃한 나는 수정이쪽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숙녀답게 테이블위에 있는 작은 손수건을 치마위로 덮고 있었을 뿐이었다. 음..분명 물은 먼저 줬으니..저건 식전에 마시는 레몬차가 틀림없는 모양이다. 뭐..차 치고는 꽤 사발이 크긴 하지만, 식당에서 주는 물이 마시는 용도 외에 다른게 있을리가 없잖아?

빨대가 없는게 조금 의아했지만, 아 이것이 문화충격인가 보다 하고 넘겨버린 나는 망설임없이 그것을 양손으로 잡아 들고는 그대로 내 입가로 가져갔다. 수정이의 고개가 갸웃 거려진다는 것을 느낀 그순간, 나는 이미 그것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에...”

윽..이게 뭐야..레몬차 치고는 너무 밍밍한 그 맛에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수정이의 입가가 씰룩 하고 움직였다. 그것을 목으로 넘긴 내가 찝찝한 표정을 지며 입맛을 다시자, 수정이는 양손으로 자신을 입가를 가리고는 들썩 거리기 시작했다.

“풉..푸힛..푸하하하하!”

응? 내가 뭘 잘못한 건가? 가만히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나를 보며 수정이는 눈물까지 흘리며 웃기 시작했다. 주변사람들을 의식해 소리를 죽이고 있었지만, 정말 지상 최고로 웃긴 장면을 본 사람마냥 그녀는 숨도 못쉬고 괴로워 하며 웃었다.

“왜..왜웃어요?”

이란 나도 모르게 같이 웃는 리액션을 치기는 했지만 그녀가 웃는 이유는 도무지 알수 없었다. 그녀는 눈물까지 나는 모양인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가를 살짝 훔쳐내며 어깨를 들썩 거렸다.

“아..오빠 그걸 마시면..풉! 어떡해요..하하하하!”

“마시는 거 아닌가요?”

“아..배아퍼..그거..립을 손으로 들고 먹을때 소스가 묻어서..크큭! 손씻으라고 주는 물인데..아하하하!”

“허..헉..”

주변에서도 킥킥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내 얼굴은 삽시간에 후끈 달아 올랐다.한참이나 멍한 표정으로 내가 마신 레몬티..아니, 손씻는 물과 배를 잡고 웃는 수정이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본 나는, 그만 같이 피식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아..쪽팔려. 뭐라도 말을 해야 할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중 하나를 끄집어 내어 뱉어 버렸다.

“오늘 일끝나고...저랑 한강 가실래요?”





“흐으음..”

사뭇 긴장감이 흘렀다.빠라밤~빠라밤~ 유명한 외화인 미션임파서블의 주제가가 깔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침을 꿀꺽 하고 삼키며 준혁이 형을 바라보았다. 그는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몸을 낮추며 눈 앞에 보이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 집이란 말이지. 그 염..뭐시기의 세컨드가 사는 곳. 음..수정이가 세컨드려나?그건 모르겠고 여튼.”

그가 가리킨 건물은 내가 사는 건물과 비슷한 규모의 원룸 건물이었다. 준혁이 형은 이 좁은 차안에서 담배를 피워물고는, 괴로워 하는 내 모습엔 아랑곳 하지않고 말을 이었다.

“그동안 이 엉아의 정보력으로 녀석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 결과, 그 새끼는 주로 저 여자 집에서 머문다. 물론 여자가 일을 나가는 6시쯤엔 지 집으로 기어 들어가는거 같더군.”

“6시요?”

“응.수정이네 집에 들러야 할테니, 저 여자집에 있는 캠코더는 시간이 널널한 밤에 회수할 확률이 높겠지.그리고 대략 오전 11시에서 1시사이에 수정이 집에 있는 캠을 회수하여 지네 집에 들렸다가 다시 저 여자 집으로 출근...하..개새끼 참 바쁘게 사는 놈일세.”

“근데 말이죠. 그 수정이네 집에서 찍은 동영상이나, 저 여자 집에서 찍은 동영상을 컴퓨터에 넣어 파일로 보관하지 않을까요?”

“당연한거 아니냐?뭐..정말 소장가치 있는 므흣한 장면만 편집해서 두겠지.그걸 왜물어?”

“그럼..말하자면 수정이와 저 업소 여자의 치부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거잖아요. 수정이가 헤어지자고 해도, 그걸로 협박할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뭐.”

흡사 옆집 개가 짖는다는 식의 시큰둥한 그의 반응에 내 미간을 양껏 찡그려 졌다.그는 태연하게 필터만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꺼 버렸다.

“아니..그렇게 태연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뭐 어쩌라구 임마. 여기까지 도와주는게 어딘데..그건 니가 알아서해 짜샤. 내가 지금 너 청춘사업 도와주려고 이 짓하는거 같냐? 니가 하도 얼빠져서는 일도 제대로 안하니 해결책을 주려는거 뿐이야 임마.”

하기사 도움을 받는 처지에 AS까지 요청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딱히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한 나는 그저 머리만 긁적이며 자동차의 전면유리 밖으로 보이는 오피스텔의 현관을 응시할 뿐이었다.

“오오.나온다 나와.저 여자다.”

그의 말과 동시에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있던 형과 나는 물론이고, 뒷좌석에 있던 준혁이 형의 아는 동생(?)도 잽싸게 넙죽 하고 엎드렸다. 사실 뭐 녀석의 눈에 걸린다 해도 큰일나는 것은 없지만, 적어도 얼굴을 들켜 좋을 것은 없었다.엄연히 따지면야 이것은 가택침입에 해당하는 범죄였으니까.

고개를 숙인채로 앞을보니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 하나가 높은 구두를 신고 밖을 나서고 있었다.여자 보는 눈에 있어서는 일관성이 있는 녀석이구만. 수정이와 꽤나 비슷하게 생긴 미인이었다. 다만 수정이에 비해 너무 야한여자의 냄새가 심하게 나서 얼굴이 찡그려질 뿐.얼굴이 하얗고 눈이 예쁜 것은 비슷했지만, 그녀의 눈은 순수해 보이는 수정이의 눈에 비해서 살짝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 조금 야하게 느껴졌다.뭐..두터운 화장도 한몫 하겠지만 말이다.

자세를 낮춘 내 시야에 이제는 익숙하기 까지한 녀석의 얼굴이 들어왔다.하..저 자식 너무나 당당하게도 여자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있었다.준혁이 형의 말대로라면,이미 대낮에 저 여자와 침대에서 뒹군 영상이 고스란히 여자의 집에 설치된 캠코더에 남아있을 터였다.녀석이 저것을 교체용 캠코더로 교체하는 시간은 내일이거나, 혹은 저 업소녀가 한창 일을하는 새벽일테니 말이다.

“야 춘배야.”

“네 형님.”

준혁이 형의 나즈막한 목소리에 뒤에있던 남자가 잽싸게 대답했다.음..춘배라..왠지 험상궂은 인상하고 백퍼센트의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이름이었다.하지만 내가 속으로 촌스러운 그의 이름에 대한 고찰을 하고 있을때에도, 그는 진지하게 준혁이 형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근데 왜 작곡가가 저런 조폭상의 사내를 동생으로 데리고 다니는 거지?

“카메라 위치 저번에 파악했지?”

“네 형님. 반대편 건물 옥상에서 봤는데..옷장위에 있었습니다.”

준혁이 형은 흡사 전속부관에게 명령을 내리는 4성장군 처럼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춘배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니가 저 캠코더에 찍히지 않는거다.뭔지 알지?”

“알고 있습니다 형님.”

“그래그래 춘배야. 상식적으로다가 생각해서, 카메라는 분명 침실쪽을 향해 있을 거다. 사실 엑기스는 침실이니까. 무슨뜻인지 접수됐지?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들어가서 옷장위에 있는 캠코더를 샥! 하고 쌔벼오면 된다.오케이?”

“맡겨 주십쇼 형님.”

“문은 따고 들어갈수 있지?”

그의 질문에 우리의 춘배씨는 순박하게 웃으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걱정마십쇼 형님. 한때 이 바닥에서는 만능키로 불렸습니다. 저 정도 문따는 거야 콧구멍 후비는 것보다 쉽죠.”

“오오 춘배야.너의 믿음직 스러운 모습에 이 형은 안심이 된다.자..어서 출동.”

“10분안에 오겠습니다 형님.담배 한대 태우고 계시면 후딱 제가...”

“알았으니까 얼른 가.임마...”

“넵!”

도대체 작곡가에게 왜 이런 동생이 있는건지 도무지 알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나는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는 잽싸게 차 문을 열고 오피스텔의 입구쪽으로 뛰어 들어갔다.내가 직접 하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두근두근 떨리고 식은땀이 솟아 나왔다.

“춘배..아니지..재하야.”

“네?”

“죄책감 안느껴지냐?”

“죄책감은요. 저 자식은 몰카를 찍는 파렴치한 놈이라구요.”

“아니,지금 이 일 말고..인애씨 말야.”

그의 입에서 인애의 이야기가 나오자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며칠전에 그렇게 꽐라가 되었었는데..인애씨에게 고맙다는 말이라도 했냐?”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문이 막혔다.애써 마음한구석에 숨겨두고는 괜찮을거야 하며 스스로 위안하던 부분이 준혁이 형에 의해 확 들춰지는 느낌이 들어 괜시리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이제는 면역이 되어버렸는지, 좁은 차안에서 그가 피우는 담배 냄새가 역하지 않았다.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사람이라는 게 실수를 한번 해봐야 아..내가 이렇게 했어야 하는 구나 하고 알아채는 법이거든. 니 마음 가는데로 행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사람 관계라는건 니 마음만 있는게 아냐.”

무슨말일까..뭔가 상징적인 의미가 숨어 있는것 같은 느낌에 곰곰히 그의 말을 곱씹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여태까지의 니 일상을 생각해봐. 인애씨가 없었던 적이 있었는지.”

그건 맞는 말이었다. 군대를 간 2년을 제외하곤 인애는 항상 내 곁에 있었다. 내가 집에서 궁상맞게 찌그러져 있으면 늘 나를 불러내어 술을 사주던 아이도 인애였고, 내가 밥을 쫄쫄 굶을때에 몰래 내 지갑에 돈을 넣어줬던 아이도 인애였다.

“하지만 요 근래를 봐라. 너 인애씨한테 연락온지 한참 되었지?”

머리가 띵하며 한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얼마전 내가 술에 취해서 무의식중에 인애를 불러내었던 것을 제외하면 도무지 왕래가 없었던 것이다.

“남녀가 친구사이로 오래 있을수는 있지만, 그 사이에 애정이 생겨버리면 절대 오래 지속될수 없는거지.”

“애정이라니요?”

화들짝 놀라 되묻는 나에게 그는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마치 불장난을 하다 들킨 아이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내 쪽에 그는 더이상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인애가 나를 좋아하는 걸까?하는 의문에 수없이 많은 부정과 의심을 하며 자문자답했던 내 모습을 그는 훤히 들여다보는 듯했다.

내 정신이 그로기 상태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을 그 즈음에, 형은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라이트를 켜니 해맑은 표정으로 캠코더를 들고 나오는 춘배씨의 모습이 보였다.

“자..출발하자.이제 윤수정씨 집에 있는 놈이랑 요걸 바꿔치기 해야 하니까.”





-오늘은 7시에 끝날거 같아요^^-

마지막으로 그녀의 문자를 확인하고는 폴더를 닫았다. 약속대로 7시에 나온 나는 그녀의 회사 빌딩 앞을 서성거리며 그녀를 기다렸다.

답이 뭘까.준혁이 형이 인애의 이야기를 꺼내니 마음속이 무거워져 왔다.손바닥 보듯 훤할줄 알았던 20년지기 친구의 속마음은, 남과 여라는 개념으로 바뀌니 천길 물속보다 읽기 어려운 난제로 바뀌어 있었다.

술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보내버렸던 하룻밤. 그리고 그녀가 보여줬던 반응들은 나를 좋아한다고 믿기에 충분할수 있었지만 어째서?라는 부가 질문이 생겨나면 여전히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남자같고 털털한 인애가, 코흘리게 시절부터 함께 했던 나를 좋아한다고? 그렇다면 언제부터?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어려운 추가 질문들만 생성될 뿐이었다.

수정이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아무생각없이 눌러본 통화목록은 수정이의 이름으로 가득차 있었다. 한참이나 뒷 페이지로 넘기고 나서야 인애 라는 두글자가 보였다. 그것도 수신목록이 아닌 발신 목록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아무버튼이나 눌러 버렸다. 선뜻 인애에게 전화를 걸어 뭐하냐고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듯 아무 생각없이 눌렀던 인애의 번호가, 마치 예전 수정이의 번호처럼 누르기 어려운 번호가 되어 있었다.

‘응?이건..’

잘못해서 휴대폰 카메라의 사진첩 버튼을 누른 내 눈이 살짝 커졌다. 어두 컴컴한 조명속에 찍힌 한 여자의 얼굴이 저장되어 있었다. 매우 가까이에서 찍어 화면을 얼굴이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녀의 볼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일그러져 있었다.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인애가 술에취해 우리집에서 뻗어 버렸을적에, 내가 장난을 치며 찍었던 그녀의 굴욕사진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의 양 볼이 내 손에 의해 짓눌러져 입술이 삐죽하고 나온 채로 눈을 감고 있는 그 모습. 버튼을 눌러 다음사진을 누르니 이번에는 미간사이를 위로 잡아 당겨 더욱 우스꽝 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얼굴이 미소로 번져 버렸다.

“뭘 그리 유심히 봐요?”

“헉!”

앞이 아닌 뒤에서 들려오는 수정이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서둘러 휴대폰의 폴더를 덮었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뒤를 돌아보니 눈웃음을 지은채로 나를 바라보는 수정이의 모습이 보였다.

“하하.왜 그렇게 놀래요?”

“아휴..깜짝 놀랐잖아요.”

“흠..뭘보고 있었는지 궁금한데..”

수정이는 다소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장난기 어린 그녀의 표정에 나는 괜시리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여전히 나를 보며 쿡쿡 거리고 웃는 그녀의 모습. 아직까지 점심에 있었던 손씻는 물 시음사건이 머리속에 맴도는 모양이다.뭐..별수 있나. 수정이가 웃는다면야...뭐 그까짓 적응 안되는 레스토랑에서 얼마든지 망가질수 있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한강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으니까. 내가 늘 가는 지름길로 가면 지상야경을 구경할 수 있는 고수부지가 나왔다.내가 답답할때마다 늘 가는 것을 보고 인애는 ‘궁상부지’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말이다.

신기하게 더이상 설레지 않았다. 인간이란 첫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그런 자극이 계속되면 결국 그 강도에 적응하여 무덤덤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처음에 그녀와 같이 걸을때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던 내가, 이제는 제법 걸음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사고 하나를 그녀에게 건냈다.날씨가 추운데 차가운 맥주를 건낸 탓에 그녀는 쌀쌀한듯 어깨를 움츠렸지만, 이윽고 눈앞에 보이는 잔잔한 야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름 멋있죠? 좀 익숙한 경치긴 하지만.”

어두운 수면위로 반짝이는 야경이 투영되었고, 그 모습은 다시 수정이의 눈망울에 담겼다.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 아무말없이 그녀를 보며 맥주를 홀짝이던 나는 잠자코 그녀의 옆에 있어 주었다.

수정이는 많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사실 나도 그랬었다.한강이란 그저 늘상 있는 것이니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여겼지만, 뭔가 가슴에 앙금이 있을때 찾으면 가슴을 조금이나마 확 트이게 해주는 마력을 지는 묘한 공간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괜히 한강을 찾는게 아닌 것이다.

“멋있네요. 그동안 너무 모르고 지냈어요. 이렇게 가까운 곳에 두고도, 마음을 둘 곳을 멀리서 찾은거 같아요.”

꿈을 꾸는 소녀같은 그녀의 떨리는 눈이 나를 향했다.음..이럴땐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하지? 그렇죠..하고 맞장구를 쳐야 할까?

“오빠는 여기 자주 오나요?”

“요 며칠 오지 못했지만..한때는 자주 왔죠. 답답한 일이 있을때에 저기 있는 포장마차를 찾기도 하고.”

“답답한 일이라면?”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와의 거리는 조금 가까워져 있었다. 맥주를 마셔서 살짝 알콜냄새가 나는 그녀의 호흡이 볼에 부딪힐 정도로 가까웠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마음속에 있는것을 다 털어놓기엔 내 용기가 너무 부족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게 힘들어서요.”

차가운 강바람.살짝 빨개진 그녀의 코와 야경때문에 더욱 빛나 보이는 그녀의 입술이 시야에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몽롱한 그녀의 두 눈을 보니 심장이 쿵쾅쿵쾅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정이의 두 눈이 살짝 감기는 순간, 귀에서 까지 맥박이 뛰는 소리가 들려오며 내 머리속은 하얗게 탈색되고 있었다.

부드러웠다. 어설프게 다가간 내 입술은 살짝 그녀의 입술위로 포개졌다.분명히 누가봐도 충동적인 키스였지만 그녀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살짝 내 입술을 감싸오기 시작하자 키스의 당위성 따위는 머리속에서 증발해 버렸다.. 어찌 해야 할까. 어정쩡한 자세로 눈을 감던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가슴이 뛰었다.눈을 뜬 용기따윈 나지 않았다.내 입안으로 파고드는 그녀의 부드러운 혀가 내 입안을 훑어버렸다.수정이의 고개가 살짝 좌측으로 기울어졌고, 나는 어설프게 한발자국 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며 힘을주어 수정이를 끌어 안았다.

손에 땀이 베어 나왔다. 가냘픈 허리에 손을 댄것 만으로도 찌릿하고 전기가 돌았다. 달콤하다는 표현 외엔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수정이의 입술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용기를 내어 허리를 잡은 손을 조금씩 위로 올렸다.

거기까지가 내가 갖고 있는 최대치의 용기였다.불룩 튀어나온 브라우스의 가슴부분 까지 이르렀을때 내 손은 망설이고 있었다.그녀의 팔이 내 목을 감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부분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음..”

그녀의 몸이 꿈틀했다. 거부의 반응일까? 무서워져서 황급히 손을 떼었다.그리고 내가 손을 뗀 그 순간, 내 입술을 물고 있던 그녀의 입술이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부끄러운듯 고개를 떨구고 애꿎은 내 신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와 나는 붙어 있는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내 심장뛰는 소리가 그녀에게 들리는 것도 전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닐거 같았다.

“저기..나는..”

목을 조르는 듯한 어색한 분위기에 입을 열었지만 도통 다음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 목을 감쌌던 그녀의 팔이 스르르 풀리고 있었다.마주선 우리의 두 발이 닿아있을 정도로 너무나 가까운 거리. 고개를 숙인탓에 앞머리에 가려진 그녀의 고운 이마와 콧날 만이 보이고 있었다. 설렘과 아쉬움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그때에,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그만 들어가요.”





돌아오는 길은 둘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단순히 키스를 했다는 이유때문이 아니었다. 너무나 충동적으로 일어난 일이었고, 아직까지는 키스를 할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나란히 걸으며 수정이의 손등과 내 손등이 스쳐갈때에 느껴지는 아른한 설레임은 어쩔수가 없었다.

수정이도 꽤나 의식을 하는 듯했다.손등이 미묘하게 스치는 빈도는 집이 가까워져 올수록 점차 늘어났다. 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도 그녀도 은근히 그것에 신경을 쓰고 있음이 분명했다.

수정이의 손가락이 살짝 위로 들어올려지며 내 손등을 훑었다.깜짝 놀라지 않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내가 그렇게 과민반응을 보이면 모처럼 용기를 낸 그녀의 행동은 민망함으로 바뀌어 버릴테니까. 이번엔 내가 용기를 내어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짜릿했다.

그저 손이 닿았다는 단순한 감촉이 이렇게 뿌듯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단순한 촉각이라기 보다 전율에 가까운 감촉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용기를 쥔 나는 더욱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우리집 현관까지 다다랐을때엔,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가방에서 우웅하고 휴대폰의 진동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수정이도 분명 알고 있음에도 받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은채로 집앞에서 멈춰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머리속으로 무언가가 스쳐갔다. 내가 수정이를 만나러 오는 동안, 준혁이 형은 수정이 방에 있는 캠코더를 바꿔치기 했을 것이었다. 내가 넌지시 인형이 있는 옷장위에 있을거라고 말해주었으니까, 아마 그 춘배란 동생은 오늘 여러번 수고를 해야 했을 것이다.

“나 들어가 볼게요.”

오늘도 어색한 정적이 흐르니 수정이는 애써 웃으며 내게 말했다. 잡아야 했다.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래야만 내가 카메라의 존재를 인식시켜 줄수 있기 때문이었다. 잡았던 손을 떼고는 천천히 도어락을 누르는 그녀. 나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때 마셨던..헤이즐럿..줄수 있나요?”

“네?”

“커피가..마시고 싶어서..”

그녀의 큰 눈망울이 나를 빤히 응시했다. 커피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하지만 내 얄팍한 두뇌속에 떠오른 핑계는 그것 뿐이었다.

“정리 안해서 창피한데..”

“괜찮아요. 제 방은 훨씬 더러운걸요 뭐.”

“치..전 더럽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에요.”

토라진 듯한 그녀의 표정에 어리바리하게 웃고 말았다. 수정이는 그런 나를 보며 미소를 띄우더니, 이내 놓았던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꿀꺽.

긴장을 했는지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자연스럽게 들어가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빤히 서랍장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거다!’

보였다. 작은 토끼인형 두개 사이로, 은빛 캠코더의 몸통이 보이고 있었다.우리의 춘배씨가 발각되기 쉽게 배려해준것이 틀림없었다.

“오빠도 헤이즐럿 좋아해요?”

“아뇨 저는 자판기 커..아..좋아해요.”

나도 모르게 아무생각없이 나오는 실없는 발언에 입을 막아 버렸다. 온 신경이 저곳에 집중이 되어 있으니 당연한 결과리라.다행히 수정이는 내 헛소리를 듣지 못한듯, 냉온수기로 뜨거운 물을 찻잔에 따르고 있었다. 금세 고소한 커피향이 방안을 가득 매웠다.

“여자방치곤 지저분하죠?”

“아뇨..전혀.”

나는 손까지 설레설레 저으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지저분하긴 커녕 향기까지 감미로웠다. 단순히 옷가지 몇개가 방바닥에 떨어진게 지저분한 거라면, 내 방은 난지도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그녀가 날 마주보고 앉았지만 한참이나 서로 말이 없었다.아까 나눈 키스, 그리고 스르르 잡아버린 손 때문일까? 수정이는 왠지 어색해 하는 것만 같았다.반대로,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저 이야기를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인형 모으는게 취미인가 봐요?”

“네?”

고작 한다는 이야기가 그거라니...내 자신이 한심했지만 저렴한 아이큐에서는 이 말 밖에 도출되지 않았다.수정이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내 손가락이 가리킨 지점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아.저거요.그냥..귀여워서 하나씩 사모은게 꽤 되서..버리진 못하고 서랍장 위에 올려두었어요.”

“그..그렇군요.”

곧바로 시선을 찻잔쪽으로 돌려 버리는 그녀. 아무래도 어설픈 작전은 실패인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캠코더의 존재를 인식시켜 주기는 커녕, 쓸대 없는 말로 분위기를 냉각시켜 버린 것 같았다.

조금 마신 맥주 탓일까. 수정이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머릿결 사이로 보이는 아찔한 목선과, 다소곳이 앉아있는 그녀의 하얀 다리가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다.그래..어설프게 했다간 나만 이상한놈 될 뿐이겠지.나는 뜨거운 헤이즐럿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해서 수정이를 보고 있다가는, 본연의 임무도 잊은채 불경한 생각만 해 버릴것 같아서 였다.

“가려구요?”

“네. 수정씨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그..그리고 생각해보니 저도 녹음실에 가봐야 할 것 같아서..”

“이 시간에요?”

수정이는 이해가 안된다는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횡설수설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말을 이었다.

“아..뭐 녹음때문은 아니고..그냥 그 형이 할말이 있다고 해서요.”

“아..”

수정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윽고 나를 보며 살짝 웃었다.자꾸만 캠코더 쪽으로 향하는 내 시선을 애써 추스리며 현관쪽으로 나왔다.

“그럼..지금 바로 그리로 가는 건가요?”

“네.수정씨랑 있느라 까먹고 있었어요.지금 가볼게요.”

무언가 할말이 있는 걸까.그녀는 앙증맞은 입술을 몇번 오물거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잘가요 오빠. 오늘 재밌었어요.”

“저두요.잘자요.”

서서히 문이 닫히기 시작했고, 수정이의 입꼬리가 좌우로 올라가며 나를 향해 웃었다. 마음속에 계속해서 피어오르는 아쉬움. 나는 우리집이 아닌 복도끝으로 걸어나갔다. 아무래도 오늘은 준혁이 형네 집에서 신세를 져야 할거 같았다. 분명..저 얇은 벽 너머로 그녀가 충격을 받고 슬퍼하는 모습들을 고스란히 내 귀로 들어야 할 테니까. 그것만은 너무나 도망치고 싶은 고역이었다.

-커피 잘마셨어요.그런데 인형 사이에 캠코더는 왜 놓아두신 거에요? 아무튼..전 일보러 다녀올게요.잘자요.-

한참이나 망설이다가,눈까지 꾹 감아버리며 전송버튼을 길게 눌렀다.메세지가 전송되는 그 짧은 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아마, 그녀에게 답장은 오지 않을 것이다.내 말을 듣고 분명 확인을 하고 있을 것이며, 그녀가 바보가 아닌이상 무엇이 찍혀 있는지 돌려볼 테니까.

우우웅..우우웅..

주머니에 느껴지는 진동에 화들짝 놀라 내 몸이 굳어 버렸다.설마..벌써 그것을 확인하고 수정이가 전화를 건 걸까?괜시리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엄마-

뭐야..괜히 긴장했잖아. 나는 안도의 한숨을 푹 하고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왜요?”

-이런 싸가지 없는 놈.애미가 전화했는데 왜요가 뭐냐 이 놈아!-

여전히 성깔있는 아줌마였다.

“너무 늦게 전화하시니까 그렇죠.”

-너..아직도 작곡한다고 남의 꽁무니 졸졸 따라다니는 거야?-

“꽁무니라니..스탭이라구요 스탭.”

-어이구 이놈아..인자좀 본받아라. 얼마나 좋으냐?방송국에서 일도 하고..여자가 그 정도면 출세지..내 인자 엄마보기 창피해 죽겄다!-

“아휴..엄마 방송작가 그렇게 대단한거 아니...됐어요 그만둬요.”

늘 있는 엄마의 잔소리였다.인애의 집과 우리집은 태초부터 붙어있었으니, 두 집안의 왕래가 잦은 것은 말할필요도 없을 것이다. 늘 인애 자랑을 하는 그녀의 어머니때문에 속상할때마다 우리 엄마는 늘 전화로 이렇게 날 갈구곤 했다.

-근데 거 뭐야..인애 지금 잘 준비하고 있다냐?-

“뭘 준비해요?”

엄마랑 통화를 하다보니 나는 오피스텔에서 꽤나 멀어져 있었다. 괜시리 수정이의 집 방향을 쓱 쳐다본 내 귓가로, 엄마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인자 며칠있다가 선본다잖아. 거 뭐야 유명한 회사 사장이라더만 몰랐어? 야!..이놈이 애미가 말하는데 쌩을까네...아무튼 인자한테 그 날 이쁘게 하고 나가라고 해..야! 이놈아 너 듣고 있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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