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게임 6부 (펀글)
▶욕망의 게임◀ 제6부 더블데이트 ①
토요일이다.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이거나 자유업, 농업 등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는 토요일이라고 해서 별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관공서나 은행을 이용할
일이 있으면 토요일은 오전에 볼일을 봐야 한다는 것 정도의 관념이 필요할 뿐
이다. 그러나 직장인의 토요일은 기다려지는 날이다. 보기 싫은 상사와 반복되
는 업무, 지겨운 교통 지옥 등으로부터 벗어나 잠시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날이
기 때문이다.
한성은행 명동 지점은 은행 셔터를 올리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대리
급 이상 중견 행원들은 모두 출근을 한 상태였다. 그들은 소파에 앉아 자동 판
매기에서 빼온 커피를 홀짝이고 있거나, 자기 자리에 앉아 조간 신문을 뒤적이며
지점장이 출근하길 기다렸다. 오늘은 확대 간부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평소에는
매주 월요일에 회의를 했으나, 이번에는 토요일에 회의를 한다는 전달을 받은
직원들은 왜 토요일 그것도 은행 특성상 일주일 중 가장 바쁜 토요일에 회의를
여는지 각기 다른 추측을 하며 가끔 시계를 들여다봤다.
「지점장님 월요일에 출장 가십니까?」
개중에는 서무 담당 대리인 유 대리에게 토요일 회의를 개최하는 이유를 묻기도
했다.
「글쎄요. 그런 말씀은 없었습니다.」
유 대리는 월요일에 하는 회의를, 하루 당겨 토요일에 한다고 해서 잘못된 게
있느냐는 얼굴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사실 유 대리는 금융 업무가 아닌 직원
및 사옥 관리 등 일반 업무를 담당하기 때문에 토요일이라고 특별히 바쁠 이유도
없었다.
「자, 들어갑시다.」
유 대리는 담뱃불을 끄고 큰소리로 외쳤다. 오 분 후에는 지점장이 문을 열고
출근을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지점장실 안에는 여신을 담당하는 서 차장과 수신을 담당하는 황 차장이 소파에
앉아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 대화를 나누다가, 대리 및 과
장들이 들어오자 말을 끊고 일어섰다.
대리와 과장 들은 직사각형의 테이블 양쪽으로 도열해 앉았다. 상석인 지점장
의자 옆자리에는 각각 서 차장과 황 차장이 앉았다. 그들은 모두 다이어리를 테
이블 위에 얹어 놓았다. 어떤 과장은 아예 펴놓고 필기 도구를 들고 있기도 했다.
「빠진 사람 없지?」
선임 차장인 서 차장이 유 대리에게 물었다.
「네, 조부상을 당해 휴가 중인 예금계 윤 대리를 빼놓고는 모두 출근했습니다」
유 대리가 얼른 대답을 했다. 유 대리가 입을 다물자 지점장실 안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은 끊임없이 다양하게 흐르고 있었다.
상대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직원, 다이어리에 무엇인가 끄적이며 낙서를 하
는 직원, 하품을 하는 직원, 벽에 걸린 십 호짜리 산수화에 그려져 있는 오막살
이의 지붕을 억새로 했을까 아니면 짚으로 했을까 하며 엉뚱한 상상을 하는 직
원, 내일은 아내가 아무리 바가지를 긁어도 하루 종일 텔레비전이나 보고 낮잠이
나 즐겨야겠다는 직원 등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지점장을 기다렸다.
그 중에서 현 과장 옆에 앉은 박 대리는 지점장이 오늘 회의를 주제한 까닭을
열심히 추리하고 있었다. 가장 심증이 가는 것은 어쩌면 오늘 계 이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지점장이 장영달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박 대리는 만약 지점장이 자기를 대출 담당으로 옮겨 준다면, 지점장의 인맥이
됐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서열상 현 과장을 건너뛰고 자기가 대출 담당
으로 갈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리고 선임 과장인 김 과장은 어떤 업무를
담당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모든 단체가 그렇겠지만 은행도 서열을 중요시한다. 일반 회사와 다른 게 있다면
은행은 순환 근무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지점에서 적게는 이 년 정도
근무하면 다른 지점으로 전근을 가게 된다. 이때 처음 맡게 되는 일반적인 업무
는 예금 파트이다. 그 다음에 당좌, 대출 순으로 옮기게 되고, 대출 담당으로
근무를 하다 보면 다른 지점으로 전근 갈 시기가 된다. 물론 차장 진급을 앞둔
고참 과장 같은 경우는 예외가 된다.
박 대리가 우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임 과장인 김 과장이 예금 담당으
로 옮겨질 확률은 희박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같은 여신 파트인 당좌계로 옮
겨진다는 것인데, 김 과장이 당좌를 보다가 대출로 옮겨진 시기는 일월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계 이동을 할 확률은 적었다. 그러나 박 대리는 오늘 지점장이
서열을 무시하고 계 이동을 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대출을 담당하는
것 자체는 관심거리가 아니었으나, 지점장이 김 사장의 뜻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
이는가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다들 일찍 나왔군.」
드디어 지점장 허영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직원들은 일제히 기립하여 인사를 했다.
「다들 앉으라고, 앉아.」
지점장은 자기 책상으로 가서 파일을 들고 와 테이블 상석에 앉았다.
「오늘도 무진장 덥군. 에어컨은 아홉시가 되야 가동하나?」
지점장은 파일을 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네. 요즘 에너지 절약 관계로 아침 아홉시부터 저녁 일곱시까지만 가동합니다.」
유 대리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이런 날은 특별히 틀면 안 되나?」
지점장은 파일 안에 있는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그 중 한 장을 빼서 테이블 위에
놓으며 다시 물었다.
「건물 전체를 틀어야 하기 때문에 힘듭니다.」
유 대리의 말은 이 건물이 한성은행 사옥이 아니고, 임대 빌딩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어쩔 수 없지. 담배 피우고 싶은 사람은 피우라고. 그렇게 경직된 표정으로
앉아 있을 필요가 없어. 경직된 얼굴에서는 경직된 사고를 배출하게 되어 있거
든. 에, 가만있자.」
지점장은 고개를 들었다. 직원들의 얼굴을 한바퀴 둘러본 다음에 헛기침을 했다.
「에, 김 과장.」
지점장은 제일 먼저 김 과장을 불렀다.
「네.」
김 과장이 긴장한 얼굴로 지점장을 쳐다보았다.
「이 자리에서 할말은 아니지만, 성일실업 말일세.」
「네, 말씀하십시오.」
「성일실업을 이쯤에서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그저께 본점에 들어가서 사정을
해봤지만, 도저히 이빨도 안 들어가더라고.」
「담보는 충분합니다만…….」
김 과장이 말꼬리를 흐리며 담당 차장인 서 차장을 쳐다보았다.
「지점장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성일측에서 동해에 짓고 있는 성일비치타운
의 감정가를 상향 평가해서 재신청을 하겠답니다.」
서 차장이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내 말은 가지고 있기만 했지, 우리한테 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가 알기로는 성일에서 국제에 사인을 보내고 있다는데, 서 차장, 알고 있습니까?」
지점장이 말투를 존대어로 바꾸면서 약간 언성을 높였다.
「국제요?」
서 차장 대신 김 과장의 음성이 높아졌다.
「이러고 있으니까 만날 국제를 따라잡지 못하지. 자세한 건 이따가 실무자들과
이야기하기로 하고……. 에, 내가 이 말을 이 자리에서 하는 뜻은 여기 있습니
다. 내 업무가 아니라고 모두 강 건너 불 구경하 듯 팔짱만 끼고 있지 말고 여러
분 모두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수집하라 이겁니다.」
직원들이 낮게 탄성을 내지르면서 서로를 쳐다보며 술렁거렸다. 성우실업 건은
대출을 담당하고 있지 않더라도 연관되지 않은 계가 없었다. 당좌계는 당좌 거래
를 하고 있기 때문에 대출계 이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예금계는
비록 질권이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삼십억 정도가 예치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늘 갑자기 회의를 소집한 이유도 바로 국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는 국제와 경쟁 상태를 소극적인 자세로 임해 왔지만, 이제부터는 전화
통만 붙잡고 있지말고 발로 뛰어야 합니다. 반드시 국제를 이긴다는 신념을 가
지고 금년 안에는 반드시 팔백고지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게 이 지점장의 결심입
니다.」
지점장의 말은 선전 포고나 다름없었다. 지점장실 안에 있는 모든 직원들이 명
동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도 국제는 하늘이었다. 그뿐인가. 몇 년 전에 근무
했던 직원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면 그때도 국제 타도를 외쳤다며 쓴웃음을 짓기
가 일쑤였다. 한마디로 국제라는 견고한 대리석 기둥으로 세워진 누각을 헐어 버
릴 영웅이 나타나기 전에는 바다가 육지라면이었다.
지점장의 말은 계속됐다.
「그렇다고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동대문 지
점은 경쟁 점포인 유한은행과 구백억이나 차이가 났었으나, 단 삼 개월 만에 정
상을 탈환하였습니다. 그 여파로 유한은행 동대문 지점장이 지방으로 좌천되었
다는 사실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동대문 지점에서 유한을 이긴 비
결은 특별한 게 없습니다. 직원들이 밤낮으로 뛰어서 신용금고나 마을금고를 이
용하고 있는 시장 상인들을 끌어 온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우리 지점이 동대
문 지점과 다르다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천재와 바보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처럼, 조금만 관념을 바꾸면 동대문 지점과 환경이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연고나 지역이 아니라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신념입니다.」
지점장은 말을 멈추고 직원들을 한 명 한 명 뜯어봤다. 직원들은 지점장의 시선
이 마주치면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시선이 비켜 가면 곤혹스러운 표정
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중에는 박 대리가 며칠 전 십억을 유치한 것을 가
지고 지점장이 들떠서 환상에 젖었나, 하고 생각을 하는 직원도 있었다.
「따라서, 일대 혁신을 하지 않는 이상 국제를 따라잡기 힘들다는 점은 여러분
께서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는 두 차장을 축으로 비상 체제에
돌입한다는 생각으로 근무해 주시길 바랍니다. 만약 금년 안에 국제를 무너뜨리
지 못한다면 여기 있는 지점장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에게도
엄청난 불이익이 안겨질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기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지점장은 파일을 덮으며 회의를 끝냈다.
「박 대리는 잠깐 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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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6부 더블데이트 ②
지점장이 업무 변경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자, 실망한 박 대리가 힘없이 지점
장실을 나가려고 하는데 황 차장이 불렀다. 직원들이 모두 나간 지점장실에는 지
점장을 비롯한 서 차장, 황 차장, 박 대리가 응접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앉았다.
「자, 다들 담배 피우라고.」
지점장이 탁상용 담배 케이스를 열어서 중앙으로 밀었다.
「저번에 김 사장 대리인이 전한 대출 건 말일세.」
서 차장이 입을 열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박 대리는 지점장이 이미 서 차장에게 지시를 해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여자에 대해서 갖고 있는 정보는 있나?」
이번에는 지점장이 물었다.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박 대리는 오수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오후에 만나 본 다음에 보고를 해도
늦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음.」
지점장은 소파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이내 눈을 뜨고 뒷목을 탁탁 치고 나서 다
시 입을 열었다.
「그럼, 김 사장의 출국 날짜가 언제쯤인지도 모르고 있겠군.」
「다음주 월요일쯤에는 대략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 대리가 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말일세…….」
서 차장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김 사장이 단순히 천만 원 신용 대출 건만으로 끝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국제에 정보통이 있어서 알아봤더니, 김 사장은 그쪽에서 매달 0.2퍼센트
를 리베이트로 받았다는 거야. 물론 지점장님 말씀대로, 김 사장이 자네의 정직
성을 높이 사서 우리 쪽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많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나?」
일십억 원의 0.15퍼센트를 매달 추가 금리로 받았다면 일 년이면 일천팔백만 원
이었다.
서 차장이 은밀한 대화를 나누듯이 허리를 숙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전, 그 점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치 금액이 늘어나면
그 어떤 조건을 제시하리라는 것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박 대리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추가 예치? 그렇다면 더 들어올 금액이 있단 말인가?」
서 차장이 지점장을 쳐다보았다.
「박 대리 말로는 김 사장이 타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CD가 만기되는 대로 우리
한테 예치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답니다.」
지점장이 무어라고 말을 하려는데 황 차장이 나섰다.
「그렇군. 알겠네.」
서 차장은 그때서야 의문점이 풀렸다는 얼굴로 허리를 폈다.
「그러고 보니, 장 선생이 하던 말이 생각나는군요.」
황 차장이 지점장에게 말했다.
「무언가?」
지점장은 담배를 비벼 끄며 황 차장을 쳐다보았다.
「왜, 거 있잖습니까? 박 대리가 대출을 담당했으면 좋겠다는 말이요.」
「아, 그랬었지. 그게 그 말이군. 박 대리에게 창구를 통일한다는 말도 그런 뜻
으로 한 말이겠군.」
지점장은 기억이 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박 대
리는 속으로 숨을 들이마시며 지점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서 차장, 김 사장의 대리인이 한 말인데, 박 대리가 대출을 담당했으면 하는
뜻을 비추더군.」
「예치를 하는 대신 조건부 대출을 할 셈이군요.」
서 차장은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김 과장에겐 어떤 업무를 맡기면 좋겠나?」
박 대리는 드디어 기다렸던 말이 지점장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이상스럽게도 마
음이 평온해졌다. 몇 년 전에 헤어진 친구를 다시 만나기 전에는 무척이나 할말
이 많은 것 같아 마구 설레었으나, 막상 만나고 보니 별로 할말이 없는 바로 그
런 기분이었다.
「글쎄요.」
서 차장은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황 차장 생각은 어때?」
지점장이 이번에는 황 차장에게 의견을 물었다.
「김 과장에게 당좌를 맡기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군, 당좌 천 과장은 박 대리가 있던 예금 쪽으로 옮기고.」
지점장은 서열이나 관례 같은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의 팔백고지를 무너뜨리고 싶을 뿐이었다.
「좋아. 그렇게 결정하도록 하고, 월요일에 이동하는 것으로 하게. 그럼, 황 차
장과 박 대리는 그만 나가보게.」
지점장은 간단하게 결정을 하고 나서 김 사장에게 대출해 줄 일천만 원을 어떻
게 마련해야 할지를 서 차장과 협의하기로 했다.
박 대리는 뿌듯한 가슴을 안고 지점장실에서 나왔다.
「김 사장한테 연락이 오면 같이 한번 방문하자고.」
황 차장이 자기 자리로 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박 대리는 간단하게 대답을 하고 자리에 앉아 행내 전화로 김희숙 자리의 번호를
눌렀다.
「감사합니다. 한성은행 명동 지점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이내 김희숙이 전화를 드는 게 보였다.
「나야.」
박 대리는 옆자리에 있는 현 과장을 슬쩍 쳐다보며 밖에 전화를 거는 투로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김희숙은 창구 너머에 앉아 있는 손님을 쳐다보고 있었다.
「듣고만 있어. 세시쯤 을지로에 있는 자이언트에서 만나.」
박 대리는 저녁에 오수미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밤차를 타고 일 박 이
일로 여행을 떠나면 월요일까지 김희숙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 그전에 김희숙을
만나고 싶었다.
「저녁에 만나요.」
「왜?」
「미스 성하고 같이 어디 좀 가기로 했어요.」
「저녁에 시간이 없는데. 그러지 말고 세시에 만나지.」
박 대리는 김희숙의 목소리에 냉기가 스며 있는 것을 느꼈다. 아직 화가 안 풀
렸나, 하는 생각을 하다 이내 지워 버렸다. 그녀의 성격상 며칠씩 화를 내지 않
는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럼, 할 수 없죠, 뭐. 끊겠어요.」
박 대리는 김희숙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자 화가 났다. 지금까지는 그런 적이
없었다. 또 설령 선약이 있더라도 그 약속을 취소하고 자기를 만났었다. 그러
던 그녀가 신촌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을 가지고 며칠씩이나 화를 내는 것은 있
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희숙은 전화를 끊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돌아다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박 대리가 어떤 표정으로 자기 뒤통수를 보고 있을지 궁
금했다.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거나 약속 시간을 미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화가 난 얼굴로 자기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럴수록 박 대리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십만 원짜리 수표 이십 장으로 주세요.」
그때 손님이 왔다. 그녀는 일어서서 출금 전표와 통장이 담긴 접시를 꺼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 미스 오! 전화 기다렸어.」
공교롭게도 박 대리는 오수미의 전화를 받고 있었는데, 얼굴 하나 가득 미소를
담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김희숙은 전표에 담당 도장을 꽉 찍었다.
흥, 양다리 걸치자는 수작이군. 낮에는 날 만나고, 저녁에는 그 여자를 만나서
뭘 하자는 수작이야.
김희숙은 단말기에 전표를 찍고 통장을 정리하고 수표를 내주면서 내내 박 대리
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어쩔 줄 몰랐다.
이러다가 사고 내지.
토요일이라 손님은 계속 밀려들었다. 그녀는 이런 기분으로 일을 하다가는 금
전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선은 머리 속에 꽉차 있는 박 대리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몇 번이나 오수미를 만나 왔
을까? 오수미와는 언제부터 만나 왔을까? 오늘처럼 낮에는 자기를 만나고, 밤에
는 오수미를 만나는 일을 언제부터 했을까? 박 대리와 얼굴을 알 수 없는 오수미
에 대한 생각은 끝이 없었다.
김희숙이 말하는 금전 사고는 신입 행원들이 가끔 일으키는 창구 사고로, 돈을
더 내주거나 덜 내주는 경우를 말한다. 극도로 긴장했을 때나 반대로 아주 한가
할 때 금전 사고가 나는데, 돈을 더 내주었을 때를 은행 용어로 과불(過拂)이라
고 한다. 과불을 하는 경로는 여러 경우가 있는데, 그 중에서 쉽게 찾을 수 있
는 경우가 9로 나누어지는 금액이 부족한 경우이다. 사십오만 원이 부족하거나
이백칠십만 원, 일백팔십만 원 등이 부족한 경우는, 모두 9로 나누어진다. 사십
오만 원이 부족한 경우는 오만 원을 찾으러 왔는데 오십만 원을 내주었고, 이백
칠십만 원이 부족한 경우는 삼십만 원을 찾으러 왔는데 삼백만 원을 내주었을 경
우다. 그래서 이백칠십만원이 부족한 경우는 무조건 삼십만 원짜리 전표를 찾는다.
그 다음에는 창구 직원이 그 손님이 돈을 찾으러 왔을 때의 상황을 가만히 생각
해 보면 대부분 원인을 찾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객이 잡아떼면 그만이
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그날 거래된 전표 중에 삼십만 원짜리 전표가 단 한
장이면 어떤 예금주에게 과불을 했는지 확실해진다. 이때 신규 통장 원장에 기재
된 예금주의 전화 번호를 찾아 전화로 확인을 하는데, 예금주가 그런 일이 없고
자기는 정확한 금액을 찾아갔다고 하면, 은행의 공신력 때문에 꼼짝없이 창구
직원이 변상해야 한다.
창구 직원이 변상을 하게 되는 경우 은행에서는 단 한푼도 도움을 주지 않는
다. 아무리 금액이 많더라도 과불한 직원이 전액 변상하는 게 상례다. 그럴 수밖
에 없는 것은 사고의 다발성도 있겠지만, 경각심을 키워 주기 위해서이다.
「어머,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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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6부 더블데이트 ③
김희숙이 버릇처럼 현금 뭉치를 접시에 담아 뱅크대 밖으로 밀고, 다음 전표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을 때 놀란 음성이 들려 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같은
건물에 있는 해운 회사에 근무하는 미스 백이란 아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
기를 보고 있었다.
「왜?」
「이건 백만 원이잖아요.」
「뭐라고?」
김희숙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른 일어서서 미스 백이 가져온 출금 전표를 확
인했다. 출금액은 일십만 원정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단말기에 전산으
로 인자된 금액도 ₩100,000이었다.
「미안해, 정말.」
김희숙은 행여 옆자리의 미스 성이 들을까 봐 모기 소리만하게 말하며 얼른 돈
뭉치를 받았다.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졌다.
「고마워, 하마터면…….」
김희숙은 빨개진 얼굴로 십만 원을 내주었다.
「아니에요. 근데 언니, 어디 아픈 것 같다.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미스 백이 걱정스럽게 묻고 나서 까닥 인사를 하고 옆으로 비켜 서자, 뒤에 서
있는 오십대의 남자가 통장과 출금 전표를 내밀었다.
휴, 다음에 스타킹이라도 한 세트 사주어야지.
김희숙은 미스 백에게 한없이 고마움을 느꼈다. 동시에 이 모든 것이 박 대리 때
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제 박 대리하고는 끝장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김희숙은 마감 시간이 되자 다른 날보다 빨리 마감을 시작했다. 혹시 금전 사고
가 났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다행히 입출은 정확했다. 일계표를 만
들고 남은 현금을 가지고 지불계에 인계를 하기 위해 일어섰다. 현 과장 옆에 서
있는 박 대리는 무엇이 즐거운지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흥!
김희숙은 박 대리에게 비웃음을 던지며 지불계 창구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약속 있습니까?」
지불 계장 안상록이 제일 먼저 일계표를 들고 온 김희숙을 쳐다보며 물었다.
「약속 없으면, 데이트 신청 하시려고요?」
김희숙이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저야 미스 김이 원하신다면 항상 준비가 돼 있죠. 마감하자마자 일계표를 들고
오길래 묻는 말입니다.」
안상록이 나쁘지 않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술 한잔 사주실래요?」
「하하하. 또 여관 가고 싶습니까?」
안상록은 의미 있는 눈짓을 해보였다.
「아이, 그 말 안 하기로 했잖아요.」
김희숙은 애교를 부리는 신입 여행원 같은 표정으로 안상록의 등을 쳤다.
「내 말은 지금 한 말이 진심이냐는 뜻입니다.」
안상록이 웃음을 거두며 물었다.
「어머, 저 아직 노처녀 아니에요. 이제 겨우 스물다섯이라고요.」
김희숙은 말을 끝내고 슬쩍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박 대리는 이쪽을 보고 있었다.
볼 테면 보라지.
김희숙은 안상록에게 더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때요? 오늘은 말짱하게 술 마실 테니 한잔 사주실래요?」
「좋죠. 이열치열이라고, 이런 날 한잔 걸치고 따뜻한 햇볕 속을거니는 것도 괜
찮죠.」
안상록은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관에서 같이 하룻밤을 보
낸 이후로 데이트 신청을 하고 싶어 입이 간질간질 하던 중이었다. 선뜻 입이 떨
어지지 않았던 것은 김희숙의 반나체를 보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만약 데이트 신
청을 하게 되면 오해를 할 여지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아요. 그럼, 끝나고 어디서 만날까요.」
김희숙은 박 대리가 그렇게 나가면 자기라고 당하고 있을 수만 없다고 생각했다.
「어디든 분위기 좋은 커피 숍에서 삐삐 치세요. 금고문 닫는 즉시 달려갈 테니까.」
「바로는 안 되고 여덟시쯤 삐삐 칠게요. 퇴근하고 곧장 미스 성 구두 사는 데
따라가기로 했거든요.」
「전 늦을수록 좋아요. 히히.」
「엉큼하게.」
김희숙은 눈을 하얗게 흘기며 안상록의 등을 다시 아프지 않게 때렸다. 이때에도
박 대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박 대리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는 것 같았다.
실컷 즐기라지.
김희숙은 자리로 돌아가면서 박 대리의 얼굴을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탈의실에서 기다릴게.」
그녀는 마감을 하고 있는 미스 성에게 귓속말을 하고 돌아섰다. 박 대리가 무
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김희숙은 휙 시선을 돌리고, 퇴근한다는
말도 하지 않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니 입행 이 년차의 미스 한이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부계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마감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처지였다. 대부분의
업무가 서류 정리이기 때문이다.
「오늘 데이트 있니?」
김희숙은 탈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비로소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유니폼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미스 한이 화장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네. 남자 친구하고 롯데 월드에 가기로 했거든요.」
미스 한의 음성은 물빛처럼 투명했다.
「좋겠다.」
김희숙은 자신이 갑자기 폭삭 늙어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그녀처럼 자
신만만하던 때가 있었나 싶기도 했다.
「애인이니?」
김희숙이 다시 물었다.
「애인이요? 애인은 아니고, 그렇고 그런 사이예요.」
「애인이면 애인이고 아니면 아니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뭐니?」
김희숙은 피식 웃었다.
「음, 어떨 땐 애인이고 어떨 땐 그냥 평범한 남자 친구니까, 그렇고 그런 사이
죠, 뭐.」
미스 한이 편하게 대답했다.
「그럼, 어떨 때가 애인이니? 어떨 때가 그냥 친구이고?」
김희숙은 미스 한의 말이 재미있었다. 평소에는 그냥 대부계에 앉아 아래위층을
오가며 심부름이나 하는 그저 평범한 여행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보통내기
가 아니었다.
「사랑할 때는 애인이고 그저 같이 있을 때는 친구이고, 그렇죠, 뭐.」
「하하하, 그럼 사랑할 때는 언제니?」
「그런 게 있어요, 그냥.」
미스 한은 미소를 지으며 유니폼을 벗었다. 이어서 란제리를 휙 벗었다. 그러자
엷은 브래지어 안으로 오똑한 젖꼭지가 보였다. 벗은 란제리를 털 때는 가슴이
파도를 타듯 흔들거렸다.
「란제리는 왜 벗니?」
김희숙은 같은 여자끼리라도 미스 한처럼 동료가 보는 앞에서 가슴을 내보이며
옷을 갈아입은 적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목욕탕에라도 온 듯 당당하게 옷을
벗는 미스 한이 버릇없어 보이면서도 은근히 부럽기도 했다.
「갑갑해요. 무엇보다 란제리를 입으면 옷이 몸에 딱 붙지 않아서 촌스러워 보이
잖아요.」
미스 한은 거리낌이 없었다. 양손으로 가슴을 위로 치켜 올리며 흔들더니, 브래
지어의 끈을 약간 조였다.
「언니는 그냥 집에 들어가실 거예요?」
미스 한이 배꼽이 보일 듯 말 듯한 짧은 셔츠를 입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얼굴로
물었다.
「미스 성하고 구두 사러 가기로 했어.」
김희숙은 힘없이 대답했다. 문득 박 대리를 만나기로 했다면 이처럼 기운 없이
대답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금방 들어가실 거예요?」
「아니, 아는 사람하고 저녁 먹기로 했어.」
「어머, 언니도 데이트하는구나! 그럼 그렇지. 언니 같은 미모와 그만한 몸매를
그냥 두는 남자들은 없을 테니까요. 참, 언니 가슴 크기가 얼마예요?」
「창피하게 별걸 다 묻는구나.」
김희숙은 눈을 흘기며 때리는 흉내를 했다.
「아니에요. 다른 애들은 작은 가슴이 좋다지만, 전 큰 가슴이 좋아요. 그래서
적금 타면 확대 수술을 해볼까 생각 중이거든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네 가슴이 얼마나 아담한데 확대 수술을 하니?」
「전요, 길 가다가도 가슴 큰 여자들을 보면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쳐다보곤
해요.」
「뭐든지 제 것이 좋은 거야. 수술은 왜 하니? 하고 나서 후회할 것을.」
김희숙은 말을 끝내고 눈을 감았다. 갑자기 피곤이 엄습해 왔다. 미스 성이 올
때까지 이십여 분 동안 잠깐 눈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언니!」
김희숙이 노곤한 잠속으로 빠져 들려는 순간 미스 한이 불렀다.
「왜 그러니?」
김희숙은 다시 잠을 청하려고 팔짱을 꼈다. 좀더 편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며 물
었다.
「박 대리님 나이가 몇 살이에요?」
「뭐?」
김희숙은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어머, 왜 그렇게 놀라세요.」
미스 한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내가 언제 놀랐다고 그러니? 네가 갑자기 엉뚱한 걸 물어서 그렇지.」
김희숙은 무안해지면서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언니, 혹시 박 대리님하고 애인 관계 아니에요?」
미스 한의 질문은 김희숙을 점점 궁지에 몰아넣었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김희숙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말했다.
「어머머, 미안해요, 언니. 하지만 언니가 갑자기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해본
말이에요. 화나셨다면 죄송해요. 사과드릴게요.」
김희숙은 미스 한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데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쿵덕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왜 갑자기 박 대리님 나이는 물어 보는 거니?」
김희숙은 이쯤에서 그만두면 미스 한이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머! 언니 눈에는 박 대리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신단 말이이요?」
「전혀?」
김희숙은 미스 한이 무얼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박 대리가 지점 내에서 차지하
고 있는 인기도를 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체 시치미를 떨었다.
「호호, 언니가 농담으로 그러신다는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박 대리님하
고 데이트 한번 해봤으면 소원이 없을 정도예요. 얼마나 멋있는 분이에요. 분위
기로 치면 완전히 끝내 주죠. 큰 키에다 맑고 깊은 눈, 짙은 눈썹하며, 웃으실
때는 얼마나 멋있다고요. 완전히 환상적 아니에요? 멋있잖아요. 게다가 총각이고
요.」
미스 한의 말은 뜻밖이었다. 김희숙은 그 말을 듣고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아무
리 같은 직원이라지만 연적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사람이 얼마나 소심한 줄 알아? 스트레스 팍팍 주는 성
격이야. 그러니까 나이 서른이 넘도록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지.」
김희숙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그런 김희숙을 미스 한
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김희숙은 다시 눈을 감았다
꼴에 여복은 있나 보지. 미스 한같이 새파란 애들도 좋아하는 것을 보니.
눈을 감고 있었으나 조금 전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미스 한의 나이 또래가 가
장 위험한 나이였다. 학교를 졸업한 첫해에는 온통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현실 세계를 징검다리 건너듯 걷다가, 이 년차가 되면 제법 나름대로의 자신을
갖고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오수미란 여자 한 명도 벅찬데, 미스 한까지?
김희숙은 기가 막혔다. 은근히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한편으로는 내가 뭐가 부족
해서 박 대리 같은 이중 인격자에게 매달리는가 생각하니 화가 나기도 했다.
그렇다고 박 대리와 이별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현재의 기분으로는 박 대리가
밉고 원망스러워서 화가 나긴 했지만, 이별을 선택하기에는 미스 한의 말처럼
너무 놓치기 아까운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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