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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게임 8부 (펀글)- 여기까지 밖에...



▶욕망의 게임◀ 제8부 달콤한 미끼 ①

은행 업무라는 게 정확성과 신속성을 요구하지만 업무는 지극히 단순하다. 더구
나 십여 년 이상 근무를 하게 되면 지점 전체에서 일어나는 업무를 손금 보듯이
훤하게 알 수 있다. 책임자급이라 부르는 지점장이나 대리가 아니더라도 계장 정
도만 되면 은행 전반 업무에 대해서 언제든지 계 이동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대외적인 업무는 본점이라는 거대한 집단에서
일괄 처리하고, 전국에 산재한 지점에서는 단순한 여수신과 관련된 업무만을 수
행하기 때문이다.

월요일 아침, 박 대리는 일층이 아닌 이층으로 출근을 했다. 책상 서랍에 있는
개인 비품들을 챙겨 놓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김 과장 밑에 있는 대부계 염 계장
이 기다렸다는 듯이 김 과장의 비품이 담긴 박스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박 대리는 김 과장이 작성한 인수 인계서에 도장을 찍고, 특히 중요한 불량 거
래선에 대한 브리핑을 들으며 중요한 것은 그때그때 메모를 했다.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같이 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차나 한잔 하지.」

점심을 먹고 나서 김 과장이 할말이 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죠.」

박 대리가 대답을 하고 대출계 앞을 지날 때였다.

「박 대리님, 전화 왔습니다.」

미스 한이었다. 미스 한이 박 대리 책상에 있는 전화를 받고 있다가 수화기를 막
고 박 대리를 불렀다.

「저예요.」

오수미였다.

「그래, 나야.」

순간 박 대리는 긴장이 되었다. 오수미가 전화를 했다는 것은 김 사장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김 사장님이 내일쯤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어디서!」

박 대리는 김 사장이 또다른 자금을 예치시키려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 생
각이 앞서자 오전 내내 김 과장에게 불량 거래선에 대한 브리핑을 듣느라 스트레
스가 쌓여 있던 기분이 활짝 개는 것 같았다. 대부를 담당하다 보면 제일 골칫거
리가 바로 불량 거래선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예금계에서 실적 때문에 스트레
스받을 때가 훨씬 양호한 편이다. 그렇지만 은행 업무는 아무래도 예금 쪽보다
는 대부 쪽이 양지인 것은 확실하다.

「댁으로 세시쯤 찾아오시랍니다.」
「다른 은행의 만기 건이 있는가?」
「국제은행 발행 CD 오십억 원이 내일 만기라고 그러시더군요.」
「뭐라고 오십억!」

박 대리는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지점장이 십억을 보고 흥분하던 모습이
빠르게 스쳐 가며 그 다섯 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다.

「네. 저번처럼 절 곤혹스럽게 만들지 말고 지점장님하고 같이 방문하도록 하세요.」

오수미가 친절하게 말했다.

「미스 오한테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땐 십 퍼센트도 믿지 못했거든. 그래서 혼
자 방문했던 거야. 이번에는 당연히 지점장님을 모시고 가야지. 미스 오도 같이
있을 거지?」

박 대리는 미스 오가 전해 주는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고마움을 느끼며 떨리는
음성으로 반문했다.

「저한테 미안해 하실 것 없어요. 벌써 이해를 했으니까. 그리고 내일 전 못 가
요. 요즘 구상하고 있는 게 있어 장소를 물색하러 다니는데 내일 거기에 가기로
했거든요.」
「장사를 하려고?」
「호호! 박 대리님이 절 책임져 줄 입장도 못 되시잖아요. 그러니 어떡해요. 저
도 무언가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책임 못 질 이유도 없지. 미스 오가 장사를 하면 적극 밀어 줄게.」

박 대리는 기분이 좋아서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해버렸다.

「어머! 정말이세요?」

오수미가 놀라는 음성으로 반문했다.

「속아만 살았나. 인간 박찬호도 말을 헤프게 하지 않는다는 것 잘알고 있잖아」

박 대리는 지금 기분 같아서는 까짓 것 돈 몇천만 원 대출 못 해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왜 제가 모르겠어요. 고마워요, 전 박 대리님만 믿겠어요.」
「고마워할 것 없어. 오히려 내가 고맙지.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참, 천만 원은
내 통장에 넣어 둘게. 필요하면 전화해.」

박 대리는 말을 하고 나서야 당장은 돈이 필요 없다는 오수미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손님 끌겠군.

박 대리가 오수미의 서늘한 눈매를 상상하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오수미는
곧 연락하겠노라며 전화를 끊었다.

「무슨 전환데 그렇게 깜박 죽어?」

빈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김 과장이 싱글벙글하는 박 대리에게 물었다.

「하하하, 그런 게 있습니다, 과장님.」

박 대리는 참으려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대부계로 온 첫날 지점장에게 깜
짝 놀랄 만한 선물을 안겨 줄 것을 생각해 보니 저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이었다.

「이 사람이, 갑자기 날아가는 새 그것을 보았나. 나도 같이 즐거워하면 안 되나?」

김 과장이 여전히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내일이면 아시게 될 겁니다. 참! 먼저 지하 커피 숍에 가 계시죠. 금방 따라
내려갈 테니까요.」
「너무 혼자 독주하지 말라고. 먼저 밥 먹은 놈이 먼저 배가 고픈 법이니까.」

김 과장은 가시 돋친 말을 남겨 두고 밖으로 나갔다.

「죄송합니다. 아직 확정적이지 않은 일이라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박 대리는 김 과장과 다르게 기분좋게 응수하고서 차장을 찾았다. 서 차장은 아
래층에서 황 차장하고 담소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점장님께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박 대리의 말에 두 차장은 하던 말을 멈추고 동시에 쳐다봤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 차장에게는 전에 한 말이 있었고, 서 차장은 담당 차장이었기 때문에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김 사장님 쪽에서 전화했었는데 오십억을 예치하겠답니다.」
「김 사장이라면 장 선생이 말한 그 어르신네!」
「뭐라고, 오십억씩이나!」

황 차장과 서 차장이 동시에 말했다.

「네. 내일 오후 세시에 일산 댁으로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방금 받았습니다.」
「알겠네. 내 지금 지점장님께 보고를 하겠네.」

황 차장이 벌떡 일어섰다. 그는 지점장이 가지고 있는 핸드폰 번호를 바쁘게 눌렀다.

「네, 네, 그렇습니다. 방금 박 대리한테 보고를 받았습니다.」
「네, 오후 세시랍니다.」

황 차장은 만족해 하며 서 차장과 박 대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다른 말은 없었나?」

서 차장이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없었습니다. 내일 방문해 보면 알겠죠. 일단 오십억을 예치한 다는 것은 틀림
없습니다.」
「수고했네.」

박 대리가 서 차장에게 말을 끝내자마자 황 차장이 박 대리의 등을 두드리며 격
려를 했다.

지하 다방은 은행만큼은 아니지만 에어컨 시설이 꽤 잘 되어 있었다. 김 과장
은 커다란 수족관 옆에 앉아 팔뚝만한 비단잉어가 유영하고 있는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일인데 그러나?」

김 과장이 다시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전에 십억을 예치한 분이 다시 오십억을 예치하겠다고 연락이 왔는데,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고 내일 가봐야 압니다.」

박 대리는 더 이상 숨길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오십억씩이나? 박 대리 알고 보니 굉장한 파워가 있었군.」

김 과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러운 얼굴로 박 대리를 쳐다보다가 이내 표정을
바꾸고 다시 입을 열었다.

「오전에는 장소가 그래서 말을 못 한 게 있네.」
「뭡니까? 말씀하십시오.」

박 대리도 들떠 있던 감정을 추스리고 김 과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성일실업 말일세.」
「성일실업이 문제가 있습니까?」

박 대리는 김 과장이 대뜸 성일실업을 거론하자 순간 긴장이 되었다.

「문제라고까지는 할 거 없고, 음…….」

박 대리는 김 과장이 뜸을 들이자 커피를 홀짝이며 성일실업의 김 부장에게 두
번이나 접대를 받았던 기억이 났다. 그 뒤에 오수미를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났
다. 취해 있었지만 취기가 싹 가시도록 신선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었다. 김 부
장으로 인하여 그렇게 아름다운 미인을 소개받았고, 나아가서는 김 사장까지 인
연이 닿게 만들어 준 것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느껴야 할 사람이었다. 그러한 성
일실업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김 과장의 말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박 대리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성일실업의 사
업 계획서나 총괄 대장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은 사실이 있네.」

김 과장은 박 대리 앞으로 고개를 숙이며 음성을 낮추었다.

「안 좋은 겁니까?」

박 대리는 김 과장의 음성이 갑자기 낮아지자 직감적으로 골칫거리를 이야기하
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좋다면 안 좋은 것이고, 좋다면 좋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 판단으로는 그
렇게 환영할 일은 아닌 것 같네.」
「부도설이라도 있습니까?」

박 대리는 자신의 직감이 현실로 확인되는 것 같아 양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건 아니고, 성일실업에서는 동해에 있는 비치타운 부지에 이십만 평 규모의
대단위 위락장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네. 그리고 그 자금을 만들기 위해 우
리 은행에 근저당 설정이 되어 있는 성일리조트와 성일비치타운 등 전 계열사의
자산의 감정가를 재평가 작업 중이야.」
「조금 전에 대출 현황을 확인해 보니 아무리 상향 평가를 하더라도 그 정도 자
금을 차입할 여유는 없는 것 같던데요. 이, 삼십억 정도 추가 대출을 한다면 몰
라도 이십만 평 규모에 위락 시설을 건설하려면 못 들어도 천억 이상의 자금이
필요할 게 아닙니까?」

박 대리는 부도설이 아니란 점에 일단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무모하리만큼 엄
청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성일실업의 의도에 대해서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성일실업 때문에 스트레스 꽤나 받을 것 같자 몸조심을 해야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아직 사업 계획서가 들어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십 년 계획으로 단계적
으로 추진할 거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네. 십 년 계획으로 한다지만 적지 않은
금액을 신청할 것은 뻔한 일이니까 박 대리도 나처럼 성일실업에 관한 건은 신경
곤두세우고 처리해야 할 거야. 그리고 유비 통신인지 모르지만 성일실업이 재경
원의 고위급과 줄을 댔다는 말도 들었네.」
「재경원이라고요?」
「음성 낮춰, 확실한 정보는 아니니까. 그리고 박 대리나 나나 지점장이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겠지만, 괜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될지 모르니까
몸조심하는 게 좋을걸세.」

김 과장은 할말 다 했다는 얼굴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긴 지점장님이 이번에 임원 승진이 안 되면 옷을 벗을 각오로 뛰니까 재경
원의 말이라면 껌벅 죽겠죠.」

박 대리는 비로소 김 과장이 말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역시 박 대리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라고. 아, 막말로
얘기해서 지점장은 재경원 입김으로 임원 승진은 될 거 아냐. 그 다음에는 짤려
봤자 설마 한성은행 임원 출신이 밥이야 못 먹겠어. 군소 증권회사나 신용금고
사장 자리 하나 못 얻겠냐 이 말이야. 하지만 실무자인 박 대리는 꼼짝없이 당
하고 쪽박 신세 되는 거지 뭐, 안 그런가?」

김 과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박 대리를 쳐다봤다. 그가 대출을 담당하다 후
배에게 자리를 내주고, 아래층 당좌계로 내려가는 수치까지 당하면서 박 대리에
게 친절을 가장한 정보를 주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지점장과 박 대리의 라
인을 차단하려는 음모였다. 김 과장이 알고 있는 정보는 성일실업은 재경원의
윗선인 청와대의 고위층과 끈을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
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했던 것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박 대리는 재경원쯤이
야, 일개 은행 대리가 눈치 볼 일도 없고 성일실업 대출 건에 관하여 사사건건
트집을 잡을 게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지점장이 청와대와 연결된 대출 건
이라고 박 대리에게 흘려 주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점장과 틈새가 벌어
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계산이었다.

「말씀 고맙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자리 한번 마련하죠.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박 대리는 김 과장이 짓는 회심의 미소를 선의적으로 생각했다. 그 동안 김 과
장하고 거리를 두었던 것은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사람은 겪어 봐야
그 속을 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박 대리는 김 과장하고 일층 로비에서 헤어져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으로 올
라가자마자 대출 계장인 염 계장의 화가 난 목소리가 입구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도대체 그게 말이나 됩니까? 분명히 오전에 입금시키기로 어제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까. 뭐라고요? 오늘은 힘들고 모레쯤에나 입금이 된다고요?」

염 계장은 오랫동안 말다툼을 했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있었다. 박 대리는
연체 독촉을 하는 염 계장의 거친 음성을 들으며 수화기를 들고 김희숙 자리의
전화 번호를 눌렀다.

「감사합니다. 한성은행 명동 지점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김희숙의 음성은 다소곳하게 들려 왔다.

「나야!」
「…….」

김희숙은 대답이 없었다.

「왜 말을 안 해, 지금 바빠?」
「전 할말이 없어요.」

김희숙의 음성은 얼음처럼 차갑게 흘러나왔다. 박 대리의 가슴이 서늘할 정도였다.

「아직도 화났니? 내가 서울 와서 해명을 한다고 했잖아.」
「좋아요. 그럼, 저녁에 신촌에서 봐요. 아니, 그럴 것 없어요. 제가 밖에 나가
서 전화를 걸겠어요. 그때 말해 줘요.」

김희숙은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이 여자 봐라. 언제부터 이렇게 일방적으로 전화 끊는 법을 배웠지. 그건 그렇고
뭐가 그렇게 골이 난 거야. 꼬리를 밟았나?

박 대리는 투덜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염 계장은 여전히 수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염 계장, 뭔데 그래? 리스트 이리 가져와 봐.」
「좋아요. 그럼 내일 중에 분명히 입금시켜야 합니다. 알았어요?」

염 계장은 전화를 끊고 전산 리스트를 박 대리에게 가져왔다.

「뭔데 그래. 신용 대출 건이야?」

박 대리는 전산 리스트를 펼쳤다. 붉은 글씨로 입금시키기로 한 날짜를, 리스트
가 붉게 도배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적어 놓았다. 채무자가 그만큼 약속을 어겼
다는 증거였다.

「아내가 남편 모르게 사용한 카드 대금인데, 연체액이 오백만 원이 넘습니다.
이것 보세요. 15일, 17일, 18일, 이 여자가 사람을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입금
언제 시킬 것이냐고 물으면 꼭 하루씩 미루기만 하니 사람 환장하겠습니다.」

염 계장이 분통이 터진다는 얼굴로 리스트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치며 설명을
했다.

「남편은 뭘 하는 사람이야?」

박 대리는 염 계장이 화가 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채무자가 가
장 골칫거리였다. 입금시키겠다는 정확한 날짜를 지정해 주지 않고, 그날그날 모
면을 하듯 대책 없이 연장만 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국제은행 대리랍니다.」

염 계장은 그 말을 하면서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웃었다.

「뭐라고? 국제은행 대리라면 같은 은행원 아냐? 은행원 부인이면 누구보다 사정
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왜 이렇게 속을 썩이나?」

박 대리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언젠가 김 과장이 박
대리의 친척 대출 연체와 관련하여 추궁하듯 질책을 하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
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행밥을 먹은 사람이 그래, 친척의 신용도도 파악하지
못했단 말입니까? 박 대리는 그때 그 말을 듣고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
었다. 한편으론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같은 직장 동료로서 좀더 완곡하게
말을 해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은행으로 연락해 보지.」

박 대리가 김 과장이 했던 말을 되새기며 차갑게 지시했다.

「저도 그 생각을 골백번 더 했습니다. 한데 그 여자가 만약 자기 남편한테 알
리면 당장 이혼당한다고 눈물로 호소를 해서…….」

염 계장이 남편한테 연락을 하라면 못 할 것도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꼬리
를 흐렸다.

「그럼, 다시 한 번 기회를 줘보지 그래.」

박 대리는 생각 같아서는 자기 생각을 밀고 나가고 싶었지만 대부계 출근 첫날이
고 해서 그 정도에서 그쳤다.

「저예요.」

염 계장이 자기 자리로 가기 위해 등을 돌렸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김희숙이었
다. 행내에서는 말을 못 하니까 공중 전화를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나야.」

박 대리는 염 계장을 의식하고 음성을 높였다. 미스 한이 카드 사용 전산 리스
트를 가져왔다. 그녀의 책상 앞에는 이십대 회사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박 대리님, 글쎄 자기는 사용을 안 했다는 거지 뭐예요.」
「그래? 차액이 얼만데 그래.」
「전 강남에 있는 술집에서 맥주 한 잔도 마신 적이 없습니다. 근데 거길 보세
요. 불야성인지, 황금성인지 모르지만 좌우지간 그 술집에서 팔십만 원어치나 퍼
마신 걸로 나와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은행 전산 착오라고요.」

미스 한의 앞에 앉아 있는 회사원이 일어서면서 거칠게 항의를 했다.

「염 계장!」

박 대리는 수화기를 막고 염 계장을 불렀다. 그 동안 김희숙에게는 잠깐 기다
리라고 말한 것은 물론이었다.

「저 친구 카드 깡했는가 알아봐!」

염 계장은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회사원을 자기 자리로
오라고 손짓하며 담배부터 꺼냈다. 박 대리는 염 계장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
지만, 저 친구 오늘 스트레스 꽤나 받겠군, 하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박 대리님, 오늘 부임 첫날이니까 술 한잔 사주시는 거죠?」

미스 한이 자기 자리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한쪽 눈을 깜박거렸다.

「미스 한도 술 마시나?」

박 대리는 빨리 미스 한이 자리로 돌아가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되
지는 않았다.

「그만 전화 끊을까요?」

김희숙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좋아, 오늘내일 중에 시간 한번 마련해 보자고. 염 계장하고 좋은 자리 물색해
봐.」

박 대리는 손짓으로 미스 한을 물리치고 수화기를 감싸쥐었다.

「요즘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좋아요. 용건만 말하겠어요. 요즘 만나는 여자하고 어떤 관계예요?」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던 중이었는지 김희숙의 음성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여자를 만난다니?」

박 대리는 오수미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버틸 때까지 버터야겠다고 생각했다.

「흥, 만나는 여자가 없다는 말이죠?」

김희숙은 길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지 음성이 소음 속에 파묻혀 잘 들리지 않았
다. 하지만 매우 화가 났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가 있었다.

「요즘 거래처 개척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뛰는 사람 보고 여잘 만나고 다닌
다니, 도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야?」
「호호, 바쁘시겠죠. 오수미란 여자가 보통은 넘나 보네요. 박 대리님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게 만들 정도로 말이에요.」

박 대리는 김희숙의 입에서 오수미란 이름 석 자가 나오자 순간 자잘하게 들려
오던 소음이 뚝 멈추는 것 같았다. 이 여자, 소머즈인가. 오수미를 어떻게 알았지.

「아니, 그 여잘 자기가 어떻게 알고 있어?」

박 대리는 너무 흥분한 끝에 희숙이란 이름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참느라 침을
꿀꺽 삼키고 되물었다.

「됐어요. 제가 어떻게 알았는가는 관심 두지 마시고 그 여자하고 잘해 보세요.
전화 끊겠어요.」
「어어, 이봐!」

박 대리는 재수없게 됐다는 말을 목 안으로 삼키며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애인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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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8부 달콤한 미끼 ②

어느 틈에 염 계장이 책상 앞에 와 있었다.

「애인은 무슨 얼어 죽을 애인이야. 그건 그렇고 어떻게 됐어?」

박 대리는 염 계장 자리 앞에 앉아 있는 회사원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과는 다르
게 풀이 죽어 있는 상태였다.

「박 대리님 생각처럼 강남역 근처에서 깡을 한 모양입니다.」
「그럴 줄 알았지. 얼마나 했는데?」
「한도가 다 차버렸습니다.」
「그래? 카드 유효 기간은 언제까지이고?」
「내년 팔월 말까지입니다.」
「강제 회수해. 카드 깡하다 들키면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라고.」

박 대리는 짤막하게 지시를 하고 서류철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거기에도 역시
염 계장이 가지고 있는 서류와 금액 차이는 있지만 연체 대출에 관한 건이 철해
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박 대리는 염 계장이 자리로 돌아가자 서류를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아무리 생
각해도 김희숙이 오수미를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여자 혹시 킬리만자로 호텔에 갔었던 것까지 모조리 알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럴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대리는 안심을 하면서도 문득 짚이는 게
있었다. 언젠가 신촌 고흐에서 둘이 만나고 있을 때 오수미로부터 호출이 왔었
던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김희숙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 나하고 일하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고 물었지? 젠장 그때 내가 나도 모
르게 오수미란 이름을 입 밖으로 내놓았던 게 분명해. 골치 아프게 됐군. 이 일
을 어떻게 처리한담.

박 대리는 오수미에게 어느 정도 사랑 비슷한 감정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
다. 그러나 그녀를 결혼 상대자로 생각해 본 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그녀는
김 사장과의 중요한 연결 고리로 남아 있으면 족했다. 그러나 김희숙은 틀렸다.
김희숙은 미래를 약속한 결혼 상대자였다. 물론 미모나 섹스 파트너로서는 김희
숙은 오수미의 발끝도 따라잡지 못한다는 흠이 있긴했다. 그렇지만 늙은 시부
모를 봉양하고 시동생들을 키워야 하는 맏며느리로서는 김희숙이 오수미보다 훨
씬 나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의 직업이 은행원이면 그 이상 좋은 맞벌이
부부의 조건은 찾기 힘들 것이고, 내성적이기는 하나 그녀 역시 고향이 시골이라
서 그곳 환경을 잘 이해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병은 자랑하랬다. 괜히 지체할 것 없지. 박 대리는 행내 전화로 김희숙 책상의
번호를 눌렀다. 단 한 시간이라도 빨리 오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게 좋다는 생
각에서였다.

「감사합니다. 한성은행 명동 지점입니다.」
「나야.」
「…….」

김희숙은 대답이 없었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박 대리는 앞에 앉아 있는 염 계장과 미스 한을 의식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여자, 자기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하고 그런 관계는 아냐. 이번 예금 유치
건에 도움을 주고 있는 여자라고.」
「그래서 둘이 여행까지 떠났나요?」

김희숙이 웃기지 말라는 듯이 조롱하는 음성으로 반문했다.

「여행은 무슨 여행이야. 말 나온 김에 얘기하겠는데, 너야말로 지난 토요일에
도대체 어딜 그렇게 쏘다녔어? 열두시가 넘어도 전화를 받지 않고 말이야.」
「뭐라고요?」

김희숙의 음성이 한풀 꺾이는 것 같았다. 박 대리는 이때다 하고 공격의 수위를
늦추지 않았다.

「내가 집 근처에서 한시까지 기다렸다고. 통 전화를 받아야지. 그래서 그 다음
날 아침에 전화를 했던 거고.」
「그랬어요!」

박 대리는 김희숙이 속아넘어간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이것 봐라, 외박을 했어!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면서 간사한 게 인간이란 말이 실감나는 듯했다.

「하여튼 퇴근 후에 신촌 고흐에서 보자고.」

박 대리는 자기가 대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도 모르는 외박을 해! 가만, 이 여자, 이거 요즘 한눈 팔고 있는 거 아니야.

박 대리가 김희숙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흥분에 떨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 왔
다. 지점장실에서 황차장이 거는 전화였다.

박 대리가 지점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지점장은 막 혈압약을 입에 넣고
물을 마시고 있었다.

「날씨가 더우면 혈압이 더 올라가. 아침 운동을 빠뜨리지 않고 해도 소용이 없
으니, 이거야 원, 빨리 가을이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뒷목을 툭툭 치면서 지점장은 서 있는 박 대리에게 눈짓으로 앉으라고 했다.

「혈압에는 양약보다 한약이 안 좋습니까?」

황 차장 정면에 앉아 있는 서 차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약이라면 진절머리가 나. 한약은 가리는 음식이 많아서 은퇴한 후에나 해당
사항 있는 약이라고.」
「하긴, 한약을 드시려면 상극인 술부터 시작해서 콜레스테롤이 다량으로 함유
되어 있는 음식을 끊으셔야죠.」

이번에는 황 차장이 대꾸를 했다.

「틀린 말이 아냐. 종로 지점장 쓰러진 거 봐. 그 사람이 하루아침에 병원에서
입도 달싹하지 못할 줄 누가 알았겠어.」

지점장이 탁상용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냈다.

「맞습니다. 종로 지점장님이 지점장님하고 입행 동기시죠?」

서 차장이 조심스럽게 담뱃불을 붙여 주며 물었다.

「그 친구가 우리 입행 동기 중에서 젤 잘 나갔지. 차기 은행장 감으로 점찍힐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한데 지금은 뭔가, 은행장은커녕 밝은 햇빛 아래 걸어다
니기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그런 거 보면 뭐니 뭐니 해도 건강만큼 소중한 건
없어. 그러니 박 대리도 젊다고 큰소리 치지 말고 건강에 각별하게 신경을 써야
돼. 알았지?」

지점장이 자기를 겨냥하고 건강을 당부하자 박 대리는 고개를 구십 도로 숙여
보이고 알겠다며 인사를 했다.

「에, 그건 그렇고, 김 사장이 오십억을 예치하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지점장은 박 대리가 예뻐 죽겠다는 얼굴로 쳐다보며 싱글벙글거렸다.

「네. 내일 오후 세시에 일산에 있는 댁으로 방문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허허허, 이렇게 경사스러울 수가. 요즘 난 박 대리 때문에 하루 세끼 챙겨 먹
을 기운이 난다니까. 그래, 그건 어느 은행 만기 건인가? 설마 국제은행 건은 아
니겠지?」

지점장은 은근히 그렇게 되길 기대하면서 긴장되는 얼굴로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이번 건도 같은 은행이랍니다.」
「같은 은행이라면?」

지점장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서 차장을 쳐다보았다.

「명동 지점 건이란 말이지?」

서 차장이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이번 달에 드디어 마의 팔백고지를 점령하게 되겠군요.」

황 차장이 조심스럽게 자기 의견을 말했다.

「그렇지! 아이쿠, 혈압이야.」

지점장은 서 차장의 말을 듣는 순간 뒷머리를 붙잡으며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지점장님!」
「괜찮으십니까, 지점장님?」
「지점장님, 물 좀 떠올까요?」

서 차장, 황 차장, 박 대리 순으로 깜짝 놀라며 한마디씩 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 망할 놈의 국제만 이길 수 있다면 종로 지점장과 똑같은
신세가 된다고 해도 괜찮다고. 하하하, 정말일세. 난 괜찮아.」

지점장이 아이처럼 웃으며 서 차장의 어깨를 툭툭 쳤다.

「지점장님, 너무 과로하시는 거 아닙니까?」

황 차장이 지점장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그리고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옛말에도 말이 씨가 된단 말이 있지 않습
니까? 하긴 지점장님은 워낙 건강 체질이시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 사람, 이 지점장을 우습게 알고 있군. 말이 그렇단 거지 내가 그깟 일로 쓰
러질 것 같나? 안 그런가, 박 대리?」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박 대리는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점장의 혈압이 위험 수위에 도달하지 않았
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럼 내일 일찌감치 출발해서 점심은 일산에서 먹는 것으로 하지. 그
리고 말일세, 만약 이번 달에 그 마의 팔백고진가 하는 두 번 다시 듣기도 싫은
그 팔백선을 깨뜨리면 직원 단합 대회 겸 야유회 한번 가도록 하지.」

지점장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며 좌우를 돌아다보았다.

「네. 서무계 유 대리한테 지시를 해놓겠습니다.」

서 차장이 대답했다.

「그리고 말입니다, 이번에는 그쪽에서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염두에 두어야 하
지 않을까요?」

서 차장이 표정을 바꾸고 진지한 얼굴로 지점장에게 다시 물었다. 서 차장이 하
는 말은 은행 내부 거래에서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조건부 대출을 뜻하고 있는 것
이었다. 조건부 대출이란 거액의 예금주가 돈을 예치하는 조건으로, 담보력이 부
족하거나 또는 담보력은 충분하나 은행과 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거래선에게
동일한 금액을 대출해 주는 것을 말한다. 예금을 유치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와
비슷한 방법을 속칭 꺾기라고 한다. 꺾기란 거래선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조
건으로 일정액 이상을 다시 예치하는 경우를 말한다. 전자와 후자 모두 정상적
인 거래 방법은 아닌 데도 불구하고 그 관행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은행 간에 알
게 모르게 벌어지는 과당 경쟁 때문이다.

「그럴 테지. 내 생각도 이번에는 대출 건하고 연결되기 쉬울 거야. 하지만 한
도야 충분히 늘릴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지점장도 일상적인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서 차장의 말대로 오십억이란 거금을
예치하면서 단순하게 정상 금리만 생각하는 고액 거래선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
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러한 고객이 있다 하더라도 은행 쪽에서 스스로 알
아서 리베이트를 챙겨 주지 않았다가는 가만히 앉아서 뒤통수 얻어맞기 십상이었다.

「대출 한도야 본점에서 충분히 딸 수 있다지만 담보력이…….」
「글쎄, 박 대리 생각은 어떤가?」

서 차장의 말에 지점장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제 생각은 내일 김 사장을 만나 봐야 확실한 대책이 나오겠지만 담보 때문에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박 대리는 오수미가 말한 김 사장의 천억설을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
에는 몰라도 아직까지 담보력이 없는 거래선에게 대출을 해달라고 요구하지는 않
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긴 김 사장이란 분이 오십억 이상 예치 하신다니까 아직까지는 담보력이 부
족한 업체를 찍어 주진 않을 확률이 크다고 봅니다.」

황 차장이 자기도 회의에 참석해 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한 얼굴로 끼여
들었다.

「그렇겠지. 내 생각도 그런 것 같아. 안 그런가, 서 차장?」

지점장이 이번에는 황 차장 의견에 동조를 하며 서 차장에게 물었다.

「저야 아직 김 사장을 만나 보지 않아서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이 지점장도 못 만나 봤어. 하지만 저번에 십억을 본인이 아닌 대리인을 시켜
가지고 온 배짱을 보면 대충은 짐작이 가.」

지점장은 책임질 수 없는 말에 꼬리를 내리는 서 차장을 빈정거렸다.

「그건 그렇습니다.」

서 차장은 이내 수긍을 했다. 지점장 앞에서 꾸물거려 봐야 인사 고가가 좋게 나
올 리 없었다. 그렇다면 대충 예스를 하는 게 몸에 보신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김 사장님의 대리인인
장 선생이 말씀하신 천만 원 건 말입니다.」

오수미에게 주기로 한 천만 원은 지점장이 기분좋은 지금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
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참! 그거 어떤 여자한테 주기로 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연락이 왔나?」
「네. 그쪽 통장으로 송금해 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언제까지?」
「네. 오늘 중으로 송금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인 것 같습니다.」
「음……. 서 차장, 내 말대로 준비해 뒀나?」

지점장은 서 차장에게 천만 원을 만들어 놓으라고 지시를 해놓았었다. 당장 대출
나갈 돈이 없었기 때문에 커미션을 받을 구멍이 없었다. 그렇다면 기존의 거래선
들에게 얼마씩 갹출을 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갹출 이유야 만들기 나름이
었다. 직원들 야유회 가는 데 동참하자는 뜻을 전달하거나 단합 대회, 로비 자금
등 이유는 만들기 나름이었다. 그러한 자금은 모아서 지점의 비자금으로 사용했
다. 사용처의 대부분은 김 사장 건처럼 예금 예치 자금으로 사용하거나 기타 비
용으로 사용하는 게 통례였다.

「네, 준비했습니다. 성일실업에서 선뜻 협조를 해주었습니다.」
「전액을 다!」

지점장이 뜻밖이라는 얼굴로 반문을 했다. 그러나 정작 더 놀란 사람은 박 대리
였다. 그렇지 않아도 전임 김 과장으로부터 성일실업을 경계하라는 충고를 들었
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부실 거래처는 막판에 가서 로비 자금을 물 쓰듯 하는 경
향이 있었다. 성일실업 같은 경우는 당장 부도가 난다는 정보는 없지만 동해에
대단위 위락 시설을 건설하기 위한 자금 신청을 준비하고 있는 회사였다. 그런
회사가 로비 자금을 함부로 풀어놓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십중팔
구 무리하게 대출을 요구하거나 은행의 고위급과 면담을 요청하려는 이유 등 주
는 돈보다 받는 이익이 엄청나게 클 때이다.

「네. 솔직히 약간 얼굴이 뜨겁긴 했습니다.」
「그 회사 보기완 다르게 내실 있는 회사로군. 알았네. 다음에 변 사장 만나면
인사라도 하면 되겠지.」

지점장은 서 차장에게 의미 있는 미소를 던지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흔히 부부 싸움을 칼로 물 베기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연인의 싸움은 무엇에
비유할까? 연인의 싸움은 말 한마디만 뒤엎으면 끝이 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출세하기 위하여 그 고생을 했다란 말을, 너 때문에 내가 그 고생을 했다고 바
꾸는 순간, 진한 감동이 밀려오면서 사랑은 결속된다.

신촌의 여관 골목에 있는 초원파크의 한 방에서 박 대리 품에 안겨 있는 김희숙
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그녀는 박 대리가 오수미를 만나야 했던 이유가 내년
일월에 있을 정기 승진 때 박 대리의 과장 승진이란 등식과 연결이 되자, 가슴속
에 알맹이로 쌓여 자칫 콘크리트처럼 굳어 버릴 듯한 오해가 아이스크림처럼 녹
아 버렸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마터면 이렇게 유능한 신랑감을 다른 여자의
남편으로 쳐다보고 있기만 할 신세로 전락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박 대리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통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럼, 그 여자한테 뭐라도 보답을 해주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잘되는 것은, 내가 잘되는 것보다 백배 났다. 김희숙은 오수미
와 박 대리 사이에 쳐져 있던 불륜의 장막을 깔끔하게 지워 버렸다. 오히려 한
번 만나 자기와 박대리와의 관계를 밝히면서 저녁이라도 대접을 해주어야 할 고
마운 사람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하지만 내가 그쪽에다 시간을 내달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잖아.」

박 대리는 김희숙과 오수미가 만나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업 파
트너와 결혼 파트너가 다르긴 하지만 오수미가 자기에게 보내고 있는 호감의 눈
빛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하긴 그러네요. 그렇지만 주는 떡만 받아먹을 순 없잖아요. 이쪽에서 하다못해
김칫국이라도 살 줄 알아야지.」

김희숙은 박 대리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모처럼 행복했다. 이렇게 발끝까지 편해
질 수 있는 행복감을 사소한 오해 때문에 영원히 잃어버릴 뻔했다는 생각이 들
자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안상록이 생각났다. 안상록도 편안함을 주는 보기 드문
남자였다. 우선 여관에서 일어났던 사고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그 자
체만으로도 심성이 고운 남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언제 어느 때라도
전화만 걸면 달려오는 자기를 향한 헌신적인 사랑의 무게가 무겁게 와닿기도 했다.

「참! 대부계 미스 한 있죠?」

같은 직장에 근무하게 되면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에도 직장 이야기가 주된 화제
일 수밖에 없다.

「미스 한은 왜?」

박 대리는 엎드려 담배를 찾아 불을 붙이고 옆으로 누워 있는 김희숙을 쳐다보았다.

「걔, 남자 관계가 되게 복잡해 보이지 않아요?」

김희숙은 탈의실에서 거리낌없이 웃옷을 갈아입던 미스 한 얼굴이 떠올랐다.

「난 모르지. 오늘 반나절밖에 안 지켜봤는데 남자 관계가 복잡한지, 복잡하지
않은지를 볼 줄 안다면 광화문 네거리에다 거적 깔고 앉아 있게.」

박 대리는 낮에 미스 한이 술 한잔 사달라는 말과 함께 윙크를 하던 얼굴이 떠올
랐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무심히 받아들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심상치 않
은 모습으로 생각되었다.

「며칠 전 탈의실에 앉아 있었는데, 아 맞아요, 자기 때문에 화가 나서 탈의실
에 멍청하게 앉아 있었던 날이니까 지난 토요일이네요.」
「그 이야기는 안 하기로 했잖아. 미스 한이 그날 희숙이 보는 앞에서 스트립
쇼라도 했단 말이야?」
「남자들은 모두 이렇게 엉큼하다니까.」

김희숙이 갑자기 박 대리의 옆구리를 힘껏 꼬집었다.

「아얏! 갑자기 그렇게 아프게 꼬집으면 어떻게 해.」
「쉿! 옆방에서 듣겠어요. 제가 꼬집은 게 아니고 하느님이 한 눈 팔지 말라고
벌을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딴생각 눈꼽만치도 하지 말고 제 말 순수하게 경청
하세요.」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나? 사람 점점 궁금해지는데.」
「궁금해 하실 것까지는 없고요. 글쎄, 제가 보고 있는 앞에서 란제리까지 홀딱
벗고 옷을 갈아입질 않겠어요. 거기까지만 하면 아직 어린애니까 그런 대로 넘어
가 줄 수 있어요. 한데 가슴을 이렇게 흔들면서 폼을 잡지 않겠어요. 내 참 기
가 막혀서. 전 솔직히 무안해서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니까요.」

김희숙은 자기 가슴을 아래에서 위쪽으로 흔들어 보이며 실감나게 말했다.

「미스 한이 가슴을 이렇게 흔들었단 말이지?」

박 대리가 장난스럽게 김희숙의 가슴을 흔들어 보였다.

「왜 이러세요, 징그럽게. 어머, 저 눈 좀 봐. 미스 한이 이 앞에서 있다면 까무
러치겠네.」
「우리 또 한 번 까무러쳐 볼까?」

박 대리는 이상하게 김희숙의 말에 흥분 되었다. 왼손으로 쥐고 있던 담배를 오
른손으로 옮겨 잡으며 김희숙을 껴안았다.

「가만있어 봐요. 지금부터가 중요한 말이니까요.」

김희숙은 박 대리의 가슴을 떠다밀고 다시 입을 열었다.

「글쎄, 고 여우 같은 게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자기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묻
질 않겠어요. 그래서 왜 묻냐고 하니까 뭐, 박 대리님이 좋다나 어쨌다나 그러는
거예요. 하니까 같은 대부계 근무한다고 한눈 팔지 말아요. 만약 내 눈에 들키
는 날은 정말 끝장인 줄 아세요, 알았죠?」

김희숙은 그때서야 박 대리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미스 한이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니 뜻밖인걸. 그렇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군.」
「좋아요. 그럼, 나도 영계 찾아 나설 테니 둘이서 누가 먼저 날갯죽지를 펴나
내기해 보자고요.」

김희숙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박 대리의 가슴을 쓰다듬는 손의 감촉이 점점 뜨
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해요.」

김희숙은 박 대리의 담배를 빼앗아 머리 위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 박 대리
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박 대리의 숨소리가 행복의 무게로 다가와서 가슴에 차
곡차곡 쌓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난 이사람을 너무 사랑하고 있어. 이러다 미칠지도 몰라.

김희숙은 시간이 이대로 정지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영혼을
저당잡혀 이 시간을 영원히 사버릴 수 있다면 기꺼이 영혼을 내맡기고 박 대리
품안에서 정지해 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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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8부 달콤한 미끼 ①

박 대리는 두 번째 가는 낯익은 길 위로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서 차장은 가끔 가다 아직 멀었느냐는 말로 긴장을 식혔다. 박 대리는 그
때마다 웃는 얼굴로 다 와가는 중이라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잠깐 차를 세우게. 그리고 생수를 작은 것으로 한 병 사다 줘.」

지점장이 점심 식사 후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박 대리가 처음 벌말에 갈 때
콜라를 사먹었던 슈퍼마켓 앞이었다.

「아직 멀었나?」

박 대리가 자동차의 시동을 걸 때 서 차장이 또 물었다.

「다 와갑니다. 아스팔트가 끝나고 비포장 도로로 접어들면 금방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박 대리는 그가 알고 있는 김 사장의 괴팍한 성격에 대해서 말해 주었
다. 지점장에게 사전 지식을 심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김 사장님이 박 대리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는 의도도 나름대로
의 판단 기준이 있을 수 있겠군.」

지점장은 가든에서 뜯은 옻닭의 뒷맛을 음미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혈압에
는 닭고기가 상극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굳이 옻닭을 점심 메뉴로 선택한 이
유는 앞으로 만나게 될 김 사장을 대비해서 그가 술을 권할지도 모른다는 상황
을 가정하고 속을 든든히 채워 둔 것이었다. 이 짓도 그러고 보면 쉬운 게 아니
야.

지점장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차 안에는 에어컨을 틀어 놨지만 언제부터인지 시
원하다는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창문을 열면 불볕 더위가 차 안을 찜통
으로 만든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런 날은 바람이 잘 통하는 등나무 그늘 아
래에서 조용히 독서를 한다거나 낮잠을 즐기는 게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였더라? 행원 시절에 처가가 있는 강릉에서 그런 오수를 즐긴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매미를 잡는다고 외사촌들과 산으로 갔고, 아내는 장인 장모와 함께 살
아가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처럼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나른
한 오수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점장이란 직책도 쉬운 직책은 아니었
다. 일요일이면 골프 치러 다녀야지, 퇴근 후에는 일주일 내내 술자리를 마련하
거나 거기에 참석해야지, 이래저래 밖에서 보기와 다르게 힘든 직업이었다. 또한
휴일이라고 집에서 쉴 틈이 없었다. 본점의 상무나 전무가 툭하면 등산 가자거
나 야구장 가자고 불러내서 밤 열두시가 다 돼서야 집으로 보내기 일쑤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 정도 뱃심이 있는 사람이니까 박 대리의 인격을 믿고 우
리 은행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서 차장은 한참 있다가 갑자기 지점장의 말이 생각났다는 얼굴로 대꾸를 했다.
그는 김 사장과의 일이 잘되어야 한다는 걱정 때문에 모처럼 규격화되고 도식적
인 은행을 떠나 푸른 산이 보이는 들판을 달리고 있다는 해방감조차 느끼지 못
하고 있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요즘 같은 무한 경쟁 시대에 살다 보면 그런 기인
(奇人)을 만날 수도 있지. 그건 그렇고 난 오후 두시에서 세시까지는 이놈의 혈
압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쉬고 싶네.」

지점장은 양복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냈다. 알약 두 알을 입 안에 털어넣고 슈퍼
마켓에서 사온 물병을 찾았다.

「오후에는 혈압이 더 상승됩니까?」

박 대리가 백 미러로 지점장을 쳐다보았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오전에는 혈압이 높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하다가 오후
에 높아지기 시작하거든. 김 사장은 혈압 걱정 안 하는가?」
「보시면 알겠지만 피부를 보면 마흔 살 전후로밖에 안 보입니다.」
「그렇겠지. 요즘이야 돈만 있으면 못 가질 게 뭐가 있겠나. 건강도 돈 주고 사
는 세상이 바로 요즘인데.」

지점장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 차장님, 다 왔습니다. 저쪽 느티나무 있는 동네가 김 사장님이 사시는 동네
입니다.」

박 대리는 비포장 도로로 접어들면서 열어 놓았던 창문을 올렸다. 그리고 정면
의 시야에서 오른쪽으로 비켜선 산 아래 동네 앞의 느티나무를 가리켰다.

「그래, 생각보다 작은 동네이군.」

지점장은 먼지가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없이 창문을 내렸다. 마을 앞에 턱 버티고
서 있는 느티나무가 없다면, 거기에 마을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작은 마을이
었다.

「김 사장님 댁도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박 대리가 보충 설명을 했다.

「요즈음은 돈 많은 사람들일수록 평범하게 살지 않습니까?」

서 차장이 실눈을 뜨고 마을을 째려 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해. 하지만 웬만큼의 티는 내놓고 사는 법이잖아. 그런데 이 마을은
너무 작아 보이는군.」

지점장이 미심쩍어 보이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리고 있을 때 승용차가
느티나무 아래에 도착했다.

「마을이 들어서 있는 전경은 딱 좋군.」

지점장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마을 전경을 훑어보았다.

「네. 제가 보기에도 저 뒷산이 알을 품고 있듯이 마을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
다.」

서 차장이 뒷산의 정상을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잘 보았네. 이런 모습을 보고 풍수에서 포란형이라고 하지.」

지점장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설명조로 말했다.

「그럼, 들어가 보실까요?」

박 대리는 시계를 봤다. 지금 골목으로 들어가면 정시에 김 사장 집 앞에 서 있
게 될 것 같았다.

「어험!」

지점장은 크게 헛기침을 하고 주머니에서 스프레이식으로 된 구취 제거용 약제를
꺼냈다.

「쉬익!」

박 대리는 지점장이 입 안에 약을 뿌리는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의 치밀성과 예의를 가지고 있는 한 얼마든지 출세할 여지가 있는 인물로 새
롭게 보였기 때문이다. 김 사장의 집 철문 앞에 도착한 일행은 모두 긴장된 얼굴
이었다. 박 대리는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지점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누르게.」

지점장이 짤막하게 지시했다. 박 대리는 초인종을 누르고 시계를 봤다. 오후 세
시 정각이었다. 이만하면 두 번째의 만남에도 좋은 이미지를 세웠다는 생각이 들
었다.

「안 계신가?」

박 대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초인종을 다시 눌렀다. 오수미가 나올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어 까치발을 하고 정원 안쪽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감나무 밑에
는 고가(高價)의 바둑판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집 안에서 나오고 있는 사람
은 예상치도 않은 장영달이었다. 그는 찌는 듯한 날씨인데도 넥타이를 하고 있
었다. 햇빛 속을 걸어오는 자세도 한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지점장 일행과의 만
남이 두 번째라면, 웬만한 사람이라면 속으로는 아무리 싫어할망정 생색내기로
웃는 표정이라도 지을 텐데 그게 아니었다. 대리석으로 빚어 놓은 듯한 직사각형
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는 무뚝뚝한 자세로 대문을 열고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장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장 선생님. 저번에 변변히 대접도 못 해드려서 죄송했습니다.」

박 대리가 뭐라고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 지점장과 서 차장이 앞을 다투어 장영
달의 손을 잡았다.

「어르신네께서는 강가에 계시겠다고 했습니다.」

장영달은 지점장과 서 차장이 잡은 손이 무색하리만큼 얼음장 같은 음성으로 입
을 열었다.

「강가에?」
「강가가 어딥니까?」

지점장과 서 차장은 무색하다는 표현 따위는 잊어버린 사람처럼 놀라는 얼굴로
장영달을 쳐다보았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장영달은 지점장 일행이 들어온 골목을 향해 몸을 틀었다.

「이 산 너머가 한강 하류입니다. 아마 거기서 낚시를 하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장영달의 뒤를 따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지점장에게 박
대리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하! 낚시를 하신다고?」

지점장이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산을 넘으면 한강 하류란 말인가?」

서 차장은 박 대리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발걸음은 어느
새 장영달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지점장님, 이럴 줄 알았다면 우리도 낚시 도구를 준비해 왔어야 하는 게 아닙
니까?」

서 차장이 골프장에서는 골프채를, 테니스장에서는 테니스채란 말을 들은 풍월
이 있어 지점장에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오늘은 낚시 약속을 한 게 아니니까, 오히려 그쪽에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

박 대리는 지점장하고 서 차장이 귓속말로 주고받는 대화를 뒤로하고 장영달을
따라붙었다.

「장 선생님, 김 사장님께서는 언제부터 낚시를 하고 계셨습니까?」

박 대리는 김 사장이 오늘은 또 어떤 화두를 꺼내려고, 초면인 지점장을 낚시터
로 끌어내려는지 그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어르신께서는 박 선생님 일행이 오시는 즉시 낚시터로 안내하라는 지시만 하셨
습니다.」

장영달은 박 대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발밑에 무엇이 걸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시선을 일직선상에 두고 걸었다.

「꽤 덥군!」

지점장은 산기슭으로 올라서는 순간부터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다 중턱에 올라
왔을 때는 손수건을 짜야 할 정도로 땀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지점장님, 옷을 벗으시죠.」

서 차장이 옆에서 보다 못해 안쓰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까짓 더위쯤이야 만성이 돼버렸네. 그런데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우거졌는데도 왜 이렇게 땀이 나나?」
「바닥이 모래라 그렇습니다.」

서 차장이 아는 체했다.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그렇군. 이런 흙은 거름하고 배합해서 분재 화분에 사
용하면 딱 좋지.」

지점장은 손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열심히 닦으면서도 자기가 갖고 있는 일반 상
식을 전해 주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앞서 걷고 있는 장영달은 뒤에 선 지점
장이 필사의 힘을 다하여 산에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지를 걷듯
뚜벅뚜벅 올라갔다.

「바람이 꿀맛이군.」

산의 정상에 이르렀을 때 지점장이 말했다. 그러곤 벌써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
는 장영달을 슬쩍 쳐다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상쾌함이 밀
려왔다. 정상에 오른 등산객이 된 기분이 들었다.

「아, 저기 계시는군요.」

박 대리는 정상에 오르자마자 재빠르게 김 사장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둑 아래
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사람이 김 사장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분이라고?」

지점장은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도 박 대리가 가리킨 사람이 보이는데도 일부
러 박 대리가 있는 곳까지 와서 까치발을 세웠다.

「어서 가보자고.」

지점장은 한꺼번에 생땀이 날아가 버리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런 데다 서
울서 여기까지 달려온 목적물인 김 사장의 모습이 시야에 잡히자 한걸음이라도
빨리 뛰어가서 만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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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8부 달콤한 미끼 ③

지점장 일행과 헤어진 박 대리의 걸음은 휘청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대리의 자
격으로 지점장을 위시하여 차장들만 모인 술자리에 참석한 것이 처음이라는 것은
제쳐 두고 오늘의 히로인으로 연거푸 넘어오는 술잔을 거절하지 않았었다.

그래, 박찬호라고 만날 찬밥 신세만 되란 법은 없지. 이 박찬호도 한번 뜨는
거야. 박씨 가문에 인물 한번 되는 거라고, 하하하.

박 대리는 을지로 입구에 있는 은행 건물 광장의 은행나무에 기대어 거슴츠레한
눈으로 이십오 층의 빌딩을 쳐다보았다. 한성은행보다 한참 아래인 은행이었다.

「이봐, 오늘 지점장이 말했지. 지점장의 명예를 걸고 일월에는 과장으로 진급시
켜 주겠다고 말이야. 내 말 알아듣겠어, 앙!」

박 대리는 자기하고 상관도 없는 은행 건물에 소리를 치고 다시 비틀비틀 걸었
다. 을지로에서 명동으로 빠지는 골목이었다. 이미 편의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점포는 문을 닫은 늦은 시간이었다. 그 탓에 골목은 어두컴컴했다. 누군가 저 옆
에서 중얼거리며 오줌을 내갈기고 있었다.

하하! 저 사람도 내년이면 과장으로 진급할 대상자인가. 시골에서 지지리도 가난
한 집안에서 태어나 간신히 대학을 졸업하고 겨우 입성한 대 한성은행의 과장으
로 말이야. 박 대리는 오줌을 갈기고 있는 취객을 지나쳐 발걸음이 옮겨지는 데
로 걸었다. 하지만 나는 내일부터 너희들하고 틀려. 난 꿈이 있단 말야. 누구도
이루지 못할 야망이 이 인간 박찬호의 가슴속에서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단 말
씀이야. 박 대리는 걸음을 멈췄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찾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손이 흔들렸다. 그것뿐이 아니고 앞에 있는 땅까지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식들, 이제 박찬호가 어떤 놈이란 것을 알겠지. 담배를 피우며 다시 걸었다.
한 쌍의 남녀가 건물 모퉁이에서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 지금이 몇 신 줄 알아?」

여자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남자를 재촉했다.

「넌 제발 그 레퍼토리 좀 바꿔라, 응? 그 레퍼토리를 바꾸면 내일 금주령이라
도 내린다냐. 넌, 넌 말이야, 내가 집에 들어가지 말자면 만날 오늘만 날이냐고
대들더라. 그래, 난 오늘만 날이다, 어쩔래?」
「자기 취했어. 그럼, 나 혼자 가버릴 거야.」
「네가 날 취하게 만들었잖아. 넌 왜 남자의 마음을 그렇게도 몰라 나를 허구한
날 술독에다 헹구는 거야. 내가 술걸레라도 된단 말이냐?」
「내가 언제 자길 취하게 했다는 거야. 자기가 맥주하고 소주 짬봉해야 뒷끝이
좋다며 나까지 먹였으면서.」

박 대리는 그들이 다투고 있는 건물 모퉁이를 돌아섰다. 언뜻 들어보니 집에 들
어가자 말자, 하고 다투고 있는 듯했다. 흐흐, 저놈도 야망이 있구나. 하지만 너
무 작아. 겨우 한 계집을 보기 위해 날밤을 새우고 있어, 하하하. 그러고 보면
이 박찬호는 얼마나 멋있는 놈이냐. 현모양처 김희숙에다 껴안으면 녹아 버릴
듯한 나의 천사 오수미가 양쪽에서 턱 버티고 있으니 말이야. 술에 취해 발 가
는 대로 걷다 보니 길은 자연스럽게 지점 앞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시간에 은행에 들어갈 일은 없었다. 고개를 쳐들어 보니 숙직실 창문으로 불
빛이 보였다. 누군가가 밤이 늦도록 고스톱을 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비웃음이
튀어 나왔다. 그래, 얼마든지 따라고, 난 여기 서 있을 테니. 박 대리는 지점의
대리석 벽을 쓰다듬었다. 푹푹 찌는 낮 동안 뜨겁게 달아 올랐던 대리석 벽의
감촉이 미지근하게 다가왔다. 얼굴을 가만히 댔다. 얼굴에 와닿는 촉감은 뜨거
웠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과수원에서 뙤약볕에 농약을 치고 지금쯤 단
잠에 빠져 있을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두고 보십시오. 이 찬호가 멋지게 장
남의 역할을 해낼 테니.

생각은 그랬으나 한줌의 허무가 밀려왔다. 슬며시 등을 돌려 보도 위에 섰다. 발
걸음은 여전히 흔들렸다. 어디 가서 딱 한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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