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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욕망의게임 7부 (펀글)


▶욕망의 게임◀ 제7부 강가의 밀애 ①

여행은 이유야 어떻든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미지의 세
계에 대한 동경심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옆자리를 지켜 줄 일행이 있
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닌가. 박 대리의 경우는 금상첨화에 한 가지를 더
해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다. 낮에는 지점장의 신임을 얻었고 지금은 희망찬 미
래의 문을 활짝 열어 줄 오수미가 곁에 있지 않은가. 그것만이 아니다. 오수미
라는 여자는 누구나 한눈에 반할 만한 용모에 걸맞게 침대 매너는 더할 나위 없
었다. 이런 경우를 옛사람들은 님도 보고 뽕도 따고, 개울 치고 가재 잡고, 마당
쓸고 동전 줍기라고 했던가. 박 대리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더 이상
원이 없을 것 같은 기분으로 기차를 탔다.

오수미는 가벼운 옷차림에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창가에 앉았다. 박 대리는 일
상을 벗어난다는 기쁨과 오수미를 동반하고 여행을 떠난다는 설렘으로 오수미에
게 갖은 친절을 베풀었다. 오수미 역시 박 대리의 얼굴을 기대에 찬 눈빛으로 응
시하며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는 듯한 몸짓을 보여 누가 보더라도 사랑하는 한
쌍의 연인이 여행을 떠나는 중이라고 믿을 만했다.

부산발 경부선 새마을호가 영동이란 작은 군 소재지에 도착했을 때는 낮 동안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시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한밤중이었다.

「여기, 와본 적이 있어?」

가벼운 잠바에 청바지 차림인 박 대리가 오수미를 따라 내리며 물었다.

「대학 이학년 때 이곳에 사는 친구가 있어 며칠 묶은 적이 있어요.」

오수미는 표정 없이 대답하고 감개가 무량하다는 얼굴로 철로 건너편 역사를 쳐
다보았다.

「그때 퍽 인상이 깊었나 보군, 다시 찾을 정도로.」

박 대리는 기차가 수원역을 지날 때부터 계속 잠을 잤던 탓인지 몸이 개운치가
않았다.

「그렇다고 볼 수도 있죠.」

오수미는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라는 얼굴로 대답했다. 역사를 빠져 나오니
광장이 있었다. 도로에 접한 광장 끝자락에는 몇 대의 택시들이 문을 열고 손
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를 타야 해요.」
「멀미를 했어? 목소리가 안 좋은 것 같군.」

오수미의 음성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에요. 모처럼 기차를 탔더니 좀 피곤하군요.」

오수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제일 앞에 있는 택시를 향해 걸어갔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택시 앞에 서 있던 젊은 운전사가 피우고 있던 담배를 어깨 너머로 휙 던지며 물
었다. 불꽃이 밤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며 어둠 속으로 묻혔다.

「양산 송호리에 갈 수 있나요?」

오수미가 물었다.

「타십쇼. 거기까지는 만 팔천 원입니다.」

오수미는 운전사의 말을 듣고 뒷자리에 탔다. 그 뒤를 따라 택시에 오른 박 대
리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져 있는 거리를 지나 사거리에 도
착했다. 차가 신호등 앞에 멈추었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역 근처보다 번
화했다.

「얼마나 걸리지?」

시내를 빠져 나온 택시가 본격적으로 속력을 내기 시작할 때 박 대리가 물었다.

「넉넉잡아 이십오 분이면 도착합니다.」

오수미는 말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고, 운전사가 백미러를 통해 대답을 했다.

「송호리라는 데가 관광지인가?」

박 대리가 다시 오수미의 옆모습을 쳐다보며 물었다.

「강가에 있는 유원지입니다. 요즘은 여름철이라 사람들이 굉장히 많을 겁니다.
거기 솔밭이 볼 만하거든요.」

이번에도 운전사가 대답을 했다.

오수미는 직선으로 빛기둥을 쏘아대며 어둠 속을 질주하는 정면을 말없이 바라보
는가 하면, 옆으로 고개를 돌려 빠른 속도로 스쳐 가는 플라타너스를 쳐다보았다.

박 대리는 오수미가 대답을 하지 않자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자 운전사가 자기 옆에 있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박 대리는 쏜살같이 달려드는 바람의 무게를 느끼면서 담배를 피웠다. 가끔 마
을이 보였다. 여느 시골 풍경과 별로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문득 김희숙이 생각났다. 송호리에 도착하면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 은행에서는 평소와 다르게 행동을 하는 그녀에게 화가 났었지만 지금 생각
해 보니 그렇지가않았다. 모처럼 같이 밤을 보내자는 말이 끝나자마자 취소를 했
다는 점과 공교롭게도 일이 겹쳐 금요일까지 둘만의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점이
미안했기 때문이다.

오수미는 택시가 송호리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잔돈은 넣어 두세요.」

택시가 멀리 작은 호텔이 보이는 송호리 입구에 도착했을 때 만 원짜리 두 장을
건네며 오수미가 입을 열었다.

「호텔을 예약해 두었어요.」

오수미가 송호 유스 호스텔이란 간판이 붙어 있는 붉은색 건물을 향해 가며 혼잣
말처럼 말했다.

「난 아무런 준비도 못 했는데 미스 오는 준비를 철저히 했군. 이런 시골에 있
는 호텔에 예약까지 해두다니.」

호텔 앞에는 주차장이 있었다. 호텔 전용 주차장이 아니고, 유원지 전용 주차장
같았다.

「사실은 박 대리님과 첫날 밤을 보냈을 때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곳에 같이 오
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오수미는 박 대리를 쳐다보지 않고 말을 하며 프런트로 갔다. 호텔이라지만 프런
트에는 유니폼을 입지 않은 종업원이 서 있었다.

「어제 서울에서 예약을 했을 텐데.」
「그렇습니까? 아, 김지회 씨 맞습니까?」

청바지에 와이셔츠를 받쳐입은 종업원이 휘갈겨 쓴 노트를 펼쳐 보고 물었다.

「네, 김지회란 이름으로 예약했어요.」

박 대리는 오수미가 가명으로 예약을 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오수미가 아
무리 아름답고 김 사장의 매개체 역할을 충실히 한다지만 근본은 호스티스에 불
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에 장래 지점장, 아니 이대로 운만 지속
되면 임원이 될지도 모르는 박찬호가 호스티스 오수미와 외진 호텔에서 잠을 잤
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509호실입니다. 키는 여기 있고, 필요하신 게 있으면 9번을 누르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박 대리는 오수미 대신 키를 받았다. 박 대리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오수미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오수미가 안겨 들며 입술을 찾았다. 그들은 한참이나 서로를
탐닉했다. 박 대리가 오수미의 옷을 벗기려고 하자 그녀는 옷을 갈아 입는다며
품안에서 빠져 나갔다.

박 대리는 오수미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강 쪽으로 나 있는 창문을 열었다. 소
나무 향기가 진하게 풍겨 왔다.

「바람에 솔 향기가 섞여 있는 것 같은데.」
「저기 검게 서 있는 나무들이 모두 소나무예요.」

박 대리 곁으로 와서 솔밭을 가리키는 오수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낮에 보면 멋있겠군.」

박 대리는 옆에 서 있는 오수미의 허리를 껴안았다. 오수미는 살짝 몸을 비틀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배고파요. 우리 저녁부터 먹어요. 이 근처에 민물 매운탕을 하는 집이 많아요.」

오수미는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좋지. 매운탕 말하니까 소주 생각이 나는데!」

박 대리는 급할 게 없었다. 소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고, 내일 아침 늦게까지 오
수미를 껴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남성이 부풀어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식당은 호텔 근처에 있었다. 식당으로 들어가 매운탕과 소주를 주문한 박 대리
는 밖으로 나왔다. 김희숙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낮에 은행에서 전화를 했을
때 저녁이면 시간이 난다고 했으니 이 시간쯤이면 집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
호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번호를 잘못 눌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번이나 다시 했으나 허사였다.

뭐야? 열시가 다 돼가는데 이 시간까지 어딜 쏘다니는 거야.

박 대리는 저녁을 먹은 후 전화를 해서 한마디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식당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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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7부 강가의 밀애 ②

그 시간에 김희숙은 안상록과 함께 나이트 클럽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전, 이런 데 처음 와봐요.」

김희숙은 무대에서 색소폰 주자가 연주하는, 흐느끼는 듯한 블루스 음악에 맞춰
안상록에게 몸을 맡긴 채 속삭였다.

「춤을 잘 추시는 것 같은데요?」

안상록이 김희숙의 허리를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며 부드럽게 대꾸했다.

「잘 추긴요. 안 계장님이 리드를 잘하시는 탓이겠죠.」

김희숙은 안상록을 만나는 순간 오늘만큼은 지난 몇 년 동안 늘 가슴속에 간직
했던 박 대리로부터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 결심을 하기 전에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막상 결심을 하는 순간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흡사 오랫동안 손목이 무겁도록 차고 다니던 팔찌를 벗어 버린 것 같은 시원
함, 단것만 먹으면 시리던 어금니가 어느 순간 설탕 가루를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느낌, 바로 그것이었다.

「정말 애인 없으세요?」

안상록이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호호. 오늘 몇 번이나 묻는 거예요? 말했잖아요. 애인은커녕 남자 친구도 없다
고요.」

김희숙의 귀에는 안상록의 말이 귀엽게 들렸다. 주말에 온 가족이 놀러 간다는
말을 들은 아이가 엄마에게 우리 일요일에 놀러 가는 거야, 하고 몇 번이나 묻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럼, 사랑을 해본 적도 없었겠네요?」

안상록은 단순한 느낌인지 모르지만 김희숙의 입김이 뜨겁게 와 닿은 것 같아
이상하게 흥분이 되었다.

「안 계장님은요?」

김희숙이 오늘은 생각하지 말자고 결심한 박 대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반문했다.

「있었습니다.」
「언제요?」
「대학교 사학년 때 삼학년 여학생을 무진장 사랑했었습니다.」
「호호, 그래서요? 아직도 그 여자를 만나고 있나요?」
「아닙니다.」

안상록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왜요? 헤어졌나요?」

김희숙이 웃고 있는 안상록의 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그럼, 혹시…….」
「죽은 것도 아닙니다.」
「그럼요.」
「그 여잔 삼학년 때 결혼을 했습니다.」
「저런, 여자가 안 계장님을 차버렸군요.」
「제가 챈 것도 아닙니다.」
「그럼, 안 계장님이 그 여잘 찼나요?」
「아뇨.」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군요. 사랑하던 여자가 결혼을 했는데 차지도 않고, 차
이지도 않았다니.」

김희숙이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하. 짝사랑을 했거든요.」

안상록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김희숙의 어깨를 가볍게 안으로 당겼다.

「이런 엉터리! 호호호.」

김희숙은 안상록의 얼굴이 와닿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얼굴이 불처럼 뜨거웠다.

「제가 얼마나 미스 김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김희숙은 안상록의 음성이 얼굴 뒤에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무대의 색소폰 연
주자는 연주가 끝나자마자 영화 음악 <남과 여>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슴으로 느껴지는 안상록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밀착된
몸을 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저를 사랑한다고요?」

김희숙은 평소에 자기를 쳐다보는 안상록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진작
에 느끼고 있었지만 짐짓 모른체 했었다.

「물론입니다.」
「호호, 언제부터요?」

김희숙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안상록으로 부터 느낄 수
있는 남자의 체취는 박 대리의 그것과 또 달랐다. 박 대리의 알몸에서 느꼈던
체취는 일상적이었으나, 와이셔츠를 통해 풍겨 나오는 안상록의 체취는 신선했다.

「명동 지점으로 발령을 받고 첫 출근을 했을 때부터요.」

안상록은 자기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김희숙의 얼굴을 그윽한 표정으로 내려
다보았다.

「부담이 되네요.」

김희숙은 안상록의 시선을 피했다. 안상록의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촉촉히 스며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상록의 손길이 자기 알몸에 닿았던 적이 있었기
에 야릇한 흥분까지 동반되었다.

「왜 그런 말을 합니까?」
「저는 안 계장님의 사랑을 받을 조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죠.안 계장님이 생
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순수한 여자가 아니에요.」

김희숙은 말을 끝내고 나자 우울했다. 불현듯 박 대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합니까?」

보통 때에 여자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면 겸손의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지난번 퇴근 후에 현 과장을 찾던 김희숙의 음성을 기억하고 있는 안상록은 반문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하게 전화만 했다면 업무상이나 그 밖의 개인적인 일
로 직장의 상사를 찾을 수도 있겠으나, 버팔로에서 엉망으로 취하기까지 했으므
로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현 과장의 인
격이나 조용한 성격의 김희숙이 불륜의 관계를 맺을 리는 없을 것이다.

「전 항상 제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거든요.」

김희숙은 가만히 안상록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안상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제 내가 있는 한 매일 매일이 자신으로 차 있을 겁니
다. 장담해도 좋아요.」

김희숙의 말을 들은 안상록은 그러면 그렇지, 김희숙처럼 조용한 성격의 여자가
그럴 리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유쾌해졌다.

「우리 그만 나가요.」

김희숙은 더 이상 안상록의 말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계속 있다가는 또 어
떤 말을 들을지도 몰랐다. 왠지 거부감 없이 들려 오는 안상록의 말이 그대로 가
슴속으로 전해지는 것 같아, 이대로 있다가는 그냥 고개를 끄덕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거리로 나왔을 때 안상록이 친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저 혼자 가겠어요. 그리고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김희숙은 웃으면서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가시는 모습이라도 지켜보겠습니다.」

안상록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악수를 하고 나서 택시를 잡기 위해 차도 가까이 갔
다. 거리에는 취객들이 비틀거리면서 택시를 잡기 위해 차도 깊숙이까지 들어가
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김희숙은 택시가 정차할 때마다 뛰어가서 그녀의 집 방향을 외치는 안상록의 뒷
모습을 쓸쓸히 바라보았다.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늘을 쳐다
보았다. 어둠이 짙게 스민 하늘에 박 대리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문득 오
수미란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나
하고는 상관이 없는 여자라는 생각에서였다.

「타시죠.」

안상록이 택시 앞에서 뒷문을 열어 놓고 크게 소리쳤다.

「고마워요.」

김희숙은 뛰어가서 택시에 올라타며 인사를 했다.

「고맙긴요. 오히려 제가 댁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택시가 출발하였을 때 안상록은 손을 들어 보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김희숙
은 그가 베푼 친절을 생각해서라도 당연히 뒤를 돌아다보고 싶었다. 그러나 의식
적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을 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안상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차량들의
불빛이 뒤를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김희숙은 갑자기 서글퍼졌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찍어 내며 창밖으로 시
선을 돌렸다. 상가들은 대부분 굳게 셔터를 내리고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
었다.

내가 왜 이렇게 감상에 빠져 있지?

김희숙은 운전사가 백 미러를 통해 자기 모습을 흘긋흘긋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안 순간 거칠게 외면하며 중얼거렸다. 박 대리를 잊어야 한다고 수만 번 외쳤지
만 그와 헤어질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박 대리가 먼저 이별을 예고하면 어떡하
나 하고 두려움이 생겼다. 그렇다고 박 대리에 대한 화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
다. 그를 향한 분노는 쇠라도 녹일 듯이 타오르고 있으면서, 그 반대쪽에서는 박
대리에 대한 그리움이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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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7부 강가의 밀애 ③

호텔과 인접한 솔밭에는 야영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백 년은 넘었음직한 노
송들이 가득 우거진 솔밭 사이에는 밤이 늦었는데도 잠들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
다. 기타를 치며 합창을 하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고스톱을 치는 패들, 불고기
판을 가운데 두고 고기를 구워 먹는 가족 등, 밤이 깊었는데도 솔밭은 시장 바
닥 같았다.

그러나 솔밭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강가는 조용했다. 수심이 얕은 듯 여울져 흐
르는 강물이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박 대리는 오수미가 말없이 강물
만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며, 자갈 하나를 강심으로 던졌다. 출렁이던 강물에 은
빛 점들이 수없이 퍼져 갔다.

「있죠.」

박 대리가 다시 강심으로 돌을 던지려고 팔을 들어올렸을 때 오수미가 입을 열었
다.

「음.」

박 대리는 돌을 던지고 나서 오수미를 쳐다보았다.

「친구의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갑자기 무슨 친구 아버지야?」
「친구 아버지의 육신이 이 강물에 뿌려졌거든요.」

한참 동안이나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강물을 응시하고 있던 오수미는 편안하게
다리를 뻗었다.

「그 친구하고 친했나 보지?」

박 대리는 감상에 젖어 친구 부친의 이야기를 꺼내는 오수미를 흘끗 쳐다보고 다
시 돌을 들었다.

「우린 형제 이상으로 친했죠. 친구 아버지도 저에게 아버지처럼 대해 줬고요.」
「하긴 여기 와서 며칠씩 묵을 정도였다면 상당히 가깝게 지냈겠군.」

박 대리는 좀더 힘있게 돌을 던졌다. 이번에는 큰 돌이어서 멀리 나가지 못하고
가깝게 떨어지면서 물장구를 쳤다. 물방울이 튀어 오자 박 대리는 얼굴을 닦았
다. 그러나 오수미는 꼼짝하지 않고 그냥 수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친구의 아버지가 왜 돌아가셨는지 아세요?」
「병으로 돌아가셨나?」

박 대리는 오수미를 쳐다보지 않고 던지기 좋은 돌을 찾아 자갈밭을 더듬거렸다.

「어떤 분의 대출 보증을 섰는데, 그분이 파산을 하게 되자 대신 대출금을 갚고
울화병이 생겨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대출 보증?」

던지려고 잡던 돌을 멈칫하고 박 대리는 오수미를 쳐다보았다. 직업 의식 때문이
었다.

「네.」

오수미는 짤막하게 대답을 하고 담배를 꺼냈다.

「바보 같은 짓을 했군. 부자간에도 보증은 서주지 않는 법이야.」
「바보 같은 짓이라고요?」

오수미는 담뱃불을 붙이다 말고 획 고개를 돌렸다.

「왜 갑자기 과민 반응을 일으켜? 미스 오의 아버지가 보증을 섰던 것도 아닌데
말이야.」

박 대리는 오수미가 뜻하지 않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자, 왜 그러느냐는 듯한 얼
굴로 쳐다보았다.

「아니에요.」

오수미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시 눈을 뜨고 박 대리를 쳐
다보았다.

「친구의 아버님이 제겐 아버지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잠시 흥분했었나 봐요.」

오수미는 손가락 깊숙이 꽂힌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다가 이내 훅 내뿜었다. 달
빛에 담배 연기가 파란색으로 피어 올랐다.

「이해해. 하지만 너무 예민하게 반응을 하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여기 와서 이렇게 앉아 저 강물을 보고 있노라니 감정이 좀 격해졌
나 봐요.」

오수미는 말을 끊고 담배를 피웠다. 박 대리는 오수미의 입에서 빠져 나와 허공
으로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들고 있던 돌을 힘껏
강심으로 던졌다.

「박 대리님은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죠?」

박 대리가 던진 돌이 강심에 첨벙 떨어지는 소리의 여운이 가시자마자 오수미가
물었다.

「대출금을 강제로 회수하면서 사사로운 감정을 갖고 일을 할 수는 없지. 은행
행규를 지키는 게 우선이잖아.」

박 대리는 그 동안 연체 대출을 강제 회수하면서 단 한 번도 채무자의 입장을 생
각해 본 적이 없었다. 행원 때는 대리의 명령에 충실하느라 얼굴에 철판을 깔았
고, 대리 때는 책임감 때문에 담당 계장을 닦달하거나 스스로 나서서 부실 채권
정리에 최선을 다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채무자의 얼굴은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은행원이 안면을 몰수하고 부실 채권 방지에 악착같이
매달리는 건 아니다. 더러는 방 한 칸 없이 길거리에 나서게 된 채무자를 보면
모르는 척 손실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겠죠. 제가 은행원이라도 그럴 거예요. 하지만 친구네는 정말 사정이 딱했
어요.」
「얼마나 딱했는데 그래?」
「친구의 어머니는 신장병에 걸려서 투석기 신세를 지고 있었고, 친구 아버지
는 조그만 점포를 경영하며 겨우겨우 어머니 약값과 친구와 친구 동생 학비를 대
고 있었어요. 그러다 은행으로부터 경매가 들어왔대요. 친구 아버지는 사정을 했
죠. 보증을 한 이상 친구 분의 채무는 인수하겠으니 장사만은 하게 해달라고요.

「그런 경우가 많지. 그러나 은행으로선 어쩔 수가 없어. 일일이 사정을 봐주다
간 은행 말아 먹고 말지.」
「박 대리님도 그래요? 채무자가 아무리 어려운 사정이라도?」
「나라고 별수 있어? 먹고살려면 눈 딱 감고 강제 집행을 해야지. 그렇기 때문
에 절대로 보증을 서주면 안 돼. 미스 오도 나중에 누가 보증을 서달라고 하면
차라리 돈 몇 푼 집어 주는 게 났지, 보증은 서지 말라고.」
「전, 박 대리님은 안 그러는 줄 알았어요.」

오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픈 표정으로 억지웃음을 지었다.

「어허, 그런 표정으로 날 보지 마. 난 내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야.」

박 대리는 슬픈 표정을 짓는 오수미를 보고 괜한 말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과장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하긴, 박 대리님은 직장에서 일 잘한다고 소문난 분이시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요. 하지만 박 대리님!」

오수미는 박 대리의 손을 잡았다.

「왜?」

박 대리는 오수미가 잡은 손을 마주 잡으며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어둠 때문
에 확인을 할 수는 없었으나 눈동자 안에 자기 모습이 들어 있을 것을 상상하니
껴안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팔을 잡아당겨 끌어안으려고 했으나 오수미가
가슴을 밀어내며 다시 이름을 불렀다.

「뭔데 그래? 말을 해봐.」
「은행에서 일하면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어지나 보죠?」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은행원이라고 인간이 아닌가? 다 똑같은 인간인 이상
감정은 있지. 하지만 미스 오의 친구네 집과 같은 경우는 부지기수야.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 사정을 다 봐줄 수는 없잖아, 안 그래?」

박 대리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역시 은행원이기 전에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
다. 그가 채무자의 급박한 상황에 아랑곳없이 부실 채권 정리에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은행 내에 이렇다 할 기반이 없으므로 맡은 업무
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은행원으로 살아 남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래서 때로는 강제 집행을 당하고 거리로 쫓겨나야 할 채무자들을 볼 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기도 했지만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일 수 없는 이유는 시골
에서 고생하고 있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박 대리의 부모는 삼천여 평의 과수원을 생업의 수단으로 의지하며, 손톱이 뭉
그러지도록 일을 해서 장남인 박 대리를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며, 아직도 다섯 명
의 자녀가 더 남아 있었다. 박 대리는 자연스럽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남은 형
제들의 교육을 책임져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 형편 때문에 은행원 생활을 십 년
넘게 했지만 자기 재산을 모으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전 은행원이 아니어서 그런지 몰라도 차마 그럴 순 없을 것 같아
요. 그만 일어서죠. 강바람이라 그런지 처음엔 몰랐는데 춥네요.」

오수미는 더 이상 할말이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잠바를 벗어 줄까?」

박 대리는 일어서서 잠바를 벗었다.

「아니에요, 됐어요. 호텔이 바로 저긴데요, 뭘.」

오수미는 박 대리가 잠바를 입혀 주려고 해도 한사코 거절했다.

「오늘 이상한 것 같아.」

박 대리는 오수미가 평소 같지 않게 우울한 표정을 자주 짓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돌아가신 친구 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래요.」

오수미는 그렇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 친구하고 우정이 깊었었나 보군. 그래, 그 친구 아버지는 결국 점포를 내놓
았겠군.」

박 대리는 오수미를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친구 이야기를 끄집어 냈다.

「점포를 닫은 것만으로 끝난 게 아니에요.」
「그럼?」

박 대리는 말을 끄집어내긴 했지만 이내 관심을 잃었다. 건성으로 반문을 하며
호텔 근처에 가 김희숙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시간까지 안 들어가고 도대체 뭘 하는 거야? 그리고 낮에 안 계장하고 하는
짓은 또 뭐고?

박 대리는 김희숙이 지불계 창구 안에서 안상록의 잔등을 치는 등 연인 행세를
하는 게 영 못마땅했었으나 그냥 넘어갔었다. 직원들끼리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밤이 늦도록 밤거리를 쏘다니거나 어느 곳에서 친구들
과 어울려 술을 마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단단히 혼내 주어야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계속 투석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그 일로 친구 아버님
은 허구한 날 술만 퍼마시다가 반년도 안 되어 아내의 뒤를 따라갔죠. 문제는 거
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또 어떻게 됐는데?」

박 대리는 김희숙 생각에 빠져 있다가 현실로 돌아와서 역시 건성으로 반문했다.
솔밭 안은 이제 조용했다. 불이 꺼진 텐트들이 많았다. 불이 켜진 텐트는 안에
서 투영되는 불빛으로 파랑, 노랑, 빨강 등의 빛무덤처럼 보였다.

「대학에 합격했지만 가정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지자 진학을 못 했지요. 그리고
취직 자리를 찾고 있던 친구의 남동생은 아버지를 이 강에다 뿌리고 보증을 서게
했던 사람을 찾아갔어요.」

오수미는 천천히 걸으면서 옛일을 회상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찾아가서 어떻게 했는데?」

멀리 주차장이 보였다. 박 대리는 오수미 먼저 호텔에 들여보낸 뒤 전화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칼로 찔렀어요. 죽여 버리겠다고 말예요.」
「뭐라고? 살인을 했단 말이야?」

박 대리는 순간 섬뜩했다. 아무리 남의 일이라지만 은행에 보증을 섰던 일 때문
에 집안이 풍비박산되고 살인에까지 연결됐다는 말을 들으니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다행히 살인은 아니에요. 하지만 살인 미수란 죄명을 쓰고 지금도 교도소에 있
어요.」
「친구는?」
「친구는 대학교 이학년이었는데, 친구라고 별수 있었겠어요? 동생까지 그 지경
이 되자 고학으로 공부를 하던 친구는 스님이 되겠다며 산으로 올라갔어요.」

오수미는 길고 긴 터널을 걸어온 듯한 기분으로 이야기를 끝내고 박 대리를 쳐다
보았다.

「흠, 보증 한 번 잘못 서서 완전히 피박살났군.」
「박 대리님은 제 이야기를 듣고 느낀 것 없어요? 같은 은행원으로 말이에요.」
「도의적인 책임은 느끼지.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그 은행원도 자기 할 일을 다한 셈이니까 뭐라고 할 것까지는 없겠지.」
「역시 박 대리님다운 대답이군요. 하긴 그렇게 일에 충실하니까 김 사장님도
박 대리님을 좋아하시는 거겠죠.」
「아니, 김 사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

박 대리는 갑자기 생기가 도는 듯했다. 만약 그렇다면 일천억을 예치하는 건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었다.

「네, 언뜻 들은 것 같아요.」

오수미는 그렇게도 좋으냐는 듯이 쳐다보며 웃었다.

「고마워 정말. 미스 오가 날 좋게 말했으니 김 사장님도 그렇게 말한 거겠지.」

박 대리는 오수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박 대리님과 제가 남남인가요, 뭐?」

오수미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그건 나도 알고 있지. 하지만 미스 오가 아니면 김 사장의 김자도 몰랐을 거
야. 그러고 보니 미스 오는 내 행운의 여신이야, 행운의 여신.」
「그게 아니고 박 대리님이 운이 좋았던 거예요. 만약 박 대리님이 저를 만나
지 못했다면 제가 어떻게 김 사장님을 소개해 주었겠어요, 안 그래요?」

주차장 안으로 들어서던 오수미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아무튼 미스 오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고마워.
참, 그리고 먼저 방에 가 있어. 나 전화 좀 걸고 갈게.」
「왜요? 방에 있는 전화로 하지.」
「아냐, 금방 하고 갈게.」

박 대리는 오수미의 등을 떠밀었다. 오수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엘
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갔다. 박 대리는 공중 전화 부스 앞에서 우선 담배를 피웠다.

내년이면 결혼을 할 여자가 겁도 없이 밤거리를 방황해!

박 대리는 힘을 주어 전화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신호음만 이어질 뿐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계를 봤다. 시계 바늘은 한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이 들었나?

다시 전화 번호를 눌렀다.

이 여자가 얼마나 마셨길래 전화벨 소리도 못 들어?

박 대리는 할 수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내일 아침에 통화가 되면 그냥 두
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박 대리를 화나게 만드는 사람은 서울에 있는 김희숙뿐이 아니고, 송호 유스 호
스텔 객실 안에도 있었다.

「죄송해요. 강바람이 너무 차가웠나 봐요. 갑자기 그것이 와서.」

박 대리가 객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오수미의 알몸을 만지기는커녕 얌전히 잠을
자야 할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박 대리는 기가 막혔다. 여행을, 그것도 남자와 여행을 떠나면서 생리를 동반하
고 여행 준비를 했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전 원래 불규칙하거든요. 더군다나 강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어서 그런지 손님이 갑자기 찾아왔지 뭐예요.」

오수미가 비음이 섞인 음성으로 속삭이며 곱게 흘겨봤다. 오수미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할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잠이 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냉
장고 문을 열었다. 생수 한 병이 달랑 들어 있을 뿐이었다. 프런트에 전화를 해
서 맥주를 가져오게 했다.

「죄송해요. 화났어요?」

오수미가 맥주잔을 받으며 물었다.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좋은 기분은 아니군. 잔뜩 기대를 하고 왔는데 말이야.」

박 대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맥주를 마셨다.

「그 기분 이해해요. 하지만 어떡해요. 생리를 멈추게 하는 약이 있는 것도 아
니잖아요. 정 심기가 불편하면 손으로 해드릴까요?」

오수미는 박 대리 앞에 앉아 있다가 옆 의자로 옮겨 앉았다.

「그럴 것까지는 없어. 앞으로 기회는 많잖아.」

박 대리는 화가 슬며시 가라앉았다. 오수미의 정성에 감동을 했기 때문이다. 오
수미는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 시트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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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7부 강가의 밀애 ④

이튿날 박 대리와 오수미는 송호리에서 십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영국사란 절에
갔다. 택시는 절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서 정차를 했다. 거기서부터는 이십 도 정
도 경사진 비탈길이었다.

「전에는 주차장이 없었는데.」

오수미는 옛일을 회상하듯 혼자 중얼거리며 박 대리의 팔짱을 꼈다.

「큰 절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 앞에 있는 은행나무는 오백 년이 넘었대요.」
「친구를 무척 좋아했었나 보군.」

박 대리는 행방을 모르는 친구를 그리워하며 친구와 같이 왔던 산사를 찾아 그
리움을 달래는 오수미의 우정에 감탄했다.

「어젯밤에 말했잖아요. 친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냈다고요.」

오수미는 억새풀 하나를 쭉 뽑아서 빙빙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애잔함이 잔잔하게 깔려 있었다.

「참, 천만 원 있죠!」

본격적인 산길로 들어서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을 오르던 오수미가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그래. 언제쯤 필요한 거야? 지점장님은 필요할 때 주라고 하시던데.」
「당장은 필요 없어요. 우선 박 대리님이 보관을 해주셨으면 해요.」
「그 돈은 김 사장님한테 전달되어야 하는 돈인 줄 알았는데?」

박 대리는 자신의 짐작이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수미를 슬쩍 떠보았다.

「그 돈은 제 돈이에요.」

오수미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돈이 미스 오 거야?」

박 대리는 오수미가 그 돈을 받아야 할 이유를 말해 줄 것 같아 침을 삼키며 그
녀를 쳐다보았다.

「그 많은 돈, 하긴 김 사장님한테는 시쳇말로 껌값에 불과하지만 내게는 거금
이나 마찬가지인 그 돈을 왜 내가 받아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말씀이죠
?」
「내가 은행밥을 십 년 넘게 먹으면서 느낀 돈에 대한 철학이 뭔지 알아? 가진
자는 더 가지려고 눈이 빨갛게 되어 날뛰고, 못 가진 자는 평생 가질 수 없다는
것이야.」
「알 만해요. 저도 공감을 하니까요. 그 돈은 김 사장님하고 저와의 비즈니스로
생각하시면 돼요. 그 이상은 아시려고 하지 마세요.」

오수미는 공과 사가 뚜렷한 여자였다. 알몸이 되어 박 대리의 품에 안길 때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했지만, 김 사장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찬바람이 나도록 냉정
하게 줄을 그었다.

「언젠가 내게 말해 주겠지?」

박 대리는 다시 한 번 오수미가 점점 알 수 없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 대리님에게는 꼭 말씀을 드리겠어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제 말대로만 하세요, 아셨죠?」
「오케이.」

박 대리는 오수미의 음성이 여전히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이제 내가 그 돈을 박 대리님에게 맡겨도 되겠죠?」
「글쎄.」
「왜요? 부담이 되세요?」
「돈을 보관하는 게 은행의 업무인데 부담이 될 거야 없지. 하지만 당장 필요
없다고 해도 미스 오의 통장에 넣어 두는 게 안 좋겠어? 내가 통장을 하나 만들
어 줄까?」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언제 필요할지 모르는 돈이니까요. 우선 박 대
리님 통장에 넣어 두세요. 필요하면 제가 연락을 할게요.」

미스 오는 말을 끝내고 다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지. 그럼, 필요할 땐 언제든지 전화해.」

박 대리는 미스 오가 자기를 그만큼 믿는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는 선선하게 대답을 하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폭포 좀 보세요.」

오수미는 금방 말투를 바꾸었다. 조금 전에 한 말투가 특진을 신청한 환자에게
말하는 정중하고도 거절할 수 없는 의사의 말투였다면, 지금은 한 남자의 여자
로 사랑이 깃들여 있는 따뜻한 음성이었다.

오수미가 손짓하는 왼쪽을 보니 계곡에 붙어 있는 거대한 암벽 사이로 폭포가
있었다. 삼단으로 되어 있는 암벽이었다.

「바위가 여자의 속살처럼 부드럽군. 마치 여자가 누워서…….」
「그만! 여긴 신성한 사찰이 있는 곳이에요.」

오수미가 손가락으로 박 대리의 입을 막으며 눈을 흘겼다.

「알았어. 그만할게.」

박 대리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을 모아 두는 인공소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등에 흐르던 땀이 한꺼번에 씻겨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물은 수정처럼 맑았
다. 올려다보니 바위의 굴곡은 부드러웠고, 꼭대기에 있는 암벽은 여자가 누워서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폭포를 지나서 에스 자로 된 급경사를 넘어서자 작은 분지가 보였다. 영국사는
분지 끝의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절이라기보다는 규모가 작은 암자 같았다.
그 앞에는 오수미가 말한 대로 둘레가 오 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거대한 은행
나무가 서 있었다.

「가을에는 이 은행나무에서 은행을 열 가마니나 딴대요. 굉장하죠?」

오수미가 설명을 해주었다.

「그렇군.」

안내판에는 은행나무를 심은 시기가 오백 년이 넘었다고 적혀 있었다. 굳이 안
내판을 보지 않아도 나무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가지가 땅에 닿아서 다시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었다. 어미의 품에서 빠져 나온 가지가 다시 뿌리를 내리고 분
가를 해서 자라는 은행나무는 젊어보였다.

오수미는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경건한 얼굴로 삼배를 하고 엎드려 합장을 하였
다. 박 대리는 오수미가 대웅전에 있는 동안 절 주위를 돌아다녔다. 뒤뜰은 대밭
이었다. 그 오른쪽에 산신각이 있는 게 신기해 보였다. 박 대리는 절 주변을 거
닐다가 요사채 벽에 붙어 있는 공중 전화 부스를 보았다. 김희숙이 생각났다.

「여보세요?」

어젯밤과 다르게 이내 김희숙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낮잠을 잤는지 목소리가 잠
겨 있었다.

「나야.」

박 대리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데도 김희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박 대리는 김희숙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왠지 수화기 안에서 찬바람이 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제는 밤늦도록 어딜 쏘다녔어?」
「찬호씬 집에도 안 들어가고 뭘 했어요?」

김희숙의 음성에는 날이 서 있었다. 박 대리는 공격을 하려다 공격을 받은 느낌
이었다.

「아침에 집에 전화를 해도 안 받더군요. 내친김에 고향에도 전화를 해봤어요.」

김희숙의 음성은 건조했다. 예전과 같지 않았다. 문득 이 여자가 지금 오수미와
같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말할 입장이 못 돼. 만나서 납득이 갈 만큼 자세하게 이야기해 줄게.
그건 그렇고 어제는 열두시 넘도록 도대체 어딜 쏘다녔어? 왜 전화를 안 받은 거야?」

박 대리는 잠시 뜸들였다가 그럴듯하게 둘러대면서 되받아쳤다.

「좋아요. 자세한 말을 듣고 싶군요. 그럼, 끊겠어요.」
「희숙아! 이봐!」

박 대리는 뒤에 서 있는 여고생이 피식 웃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급하게 김희
숙의 이름을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전화는 끊어진 뒤였다. 갑자기 머리
가 텅 빈 느낌이었다. 박 대리는 어젯밤과 다르게 자기가 지은 죄가 있어 화를
내지는 못하고, 김희숙이 왜 그러는지 서울 가는 즉시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수미는 여전히 대웅전에 앉아 있었다. 합장을 한 모습이 석고로 빚은 조각처
럼 아름다웠다. 김희숙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진 박 대리가 미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아름답다고 생각할 때였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친구를 지독하게 좋아했나 보군.

박 대리에게는 오수미가 친구 부모님의 명복을 빌다가 감정이 북받쳐 울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박 대리는 대웅전에서 내려와 천천히 뜰을 거닐었다. 법당에서
오수미가 참배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수미는 합장을 한 자세로 일어섰다. 고개를
숙여 반배를 한 번 한 후 뒷걸음으로 천천히 걸어 법당에서 나왔다.

「울고 있었나 보군.」

박 대리는 대웅전 앞뜰에 있는 적단풍나무를 보고 있다가 밖으로 나온 오수미를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오수미는 언제 내가 울었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눈물 자국을 말끔히
닦아 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박 대리도 오수미를 따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푸
르도록 시린 하늘에 뭉게구름 몇 점이 한가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쪽으로 가면 약수가 있을 거예요.」

오수미는 박 대리에게 일방적으로 말하고 요사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몇몇
의 관광객들이 약수를 마시기 위해 플라스틱 조롱박을 들고 서 있었다.

「물맛이 어때?」

박 대리는 오수미가 건네주는 바가지를 들고 앞으로 갔다. 오수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약수터 앞을 빠져 나와 요사채 옆에서 흐르는 작은 계곡으로 갔다.

「이제 내려가죠.」

오수미는 요사채 뒷산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다가 박 대리가 가까이 오자 뒤돌
아 서서 박 대리 앞으로 나섰다.

「기분이 안 좋은가 보지?」

박 대리는 대웅전 뜰을 지나쳐 은행나무가 있는 곳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워야겠
다는 생각을 하며 무심코 말했다.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나요?」

대웅전의 뜰을 받치고 있는 돌 축대 밑을 지날 때였다. 오수미가 획 돌아서며
말했다. 일순간 그녀의 눈에 시퍼런 불빛이 일렁거렸다.

「왜, 왜 그래?」

박 대리는 자기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오수미의 눈빛은 칼날 같아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심장을 두 동강 낼 것처럼 날카로웠다.

「아, 아니에요.」

오수미는 박 대리를 쳐다보던 눈길을 거두고 등을 돌렸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박 대리는 오수미의 갑작스런 변화를 이해할 수 없어 뛰는 걸음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 맘을 너무 몰라주시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화가 났나 봐요. 정말 죄송
해요. 박 대리님은 그저 놀러 왔을 뿐인데…….」

오수미의 말 중에 박 대리님은 놀러 왔다는 말은 입 속에 잠겨서 거의 들리지 않
았다.

「이해할 만해. 하지만 놀랐잖아.」

박 대리는 조금 전 오수미의 행동이 여전히 석연치 않으면서도 부드럽게 말했
다. 이유야 어떻든 오수미가 화를 내서 좋을 것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제 그만하세요. 제 친구의 가족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에 젖어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됐네요. 하지만 이제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아요. 우리 어서
내려가서 뭘 좀 먹어요. 갑자기 배가 고프네요.」

오수미는 박 대리의 팔짱을 꼈다. 그러다 어떤 생각에서인지 팔짱을 풀고 생긋
웃으며 걷기 시작했다.

「왜, 부끄러워?」

박 대리가 물었다.

「아니에요. 아직 절간인데 엄숙해야 할 장소인 것 같아서 그래요.」

오수미가 표정 없이 대답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박 대리는 오수미에게 말하는 게 아니고 스스로에게 말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섣불리 오수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려고 하지 말아야겠
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처럼 칼날 같은 성격이니까 김 사장 같은 거
물하고도 연결이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수미는 주차장이 있는 곳까지 내려올 동안 단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박 대리
도 적당하게 할말이 없어서 앞서거니뒤서거니 산을 내려왔다.

「뭘 좀 먹을까?」

박 대리는 주차장 근처에 있는 식당가를 손짓했다.

「절에서는 무지 배가 고팠었는데 지금은 별로군요. 우리 그러지 말고 영동 시
내로 나가서 먹으면 어때요.」
「그렇게 할까? 사실 난 이런 관광지에서 음식을 사먹는 성격이 아니거든.」
「잘됐네요. 그럼, 제가 택시를 부를 테니 여기서 잠깐 기다려 주세요.」

매표소 옆에 있는 공중 전화가 있는 곳으로 가는 오수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박 대리는 담배를 꺼냈다.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동전을
집어 넣고 잠깐 이쪽을 보는 모습은 잘 찍혀진 한 장의 스냅 사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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