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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당신이 잠든 사이에 <14부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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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잠들어 있던 그녀의 이야기.


“어휴...저게 여자냐..진짜..”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어본 말이 아마 저것일 것이다.분명 어렸을때는 생물학적인 관점으로 봐도 나는 ‘여자’로 보이지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늘 그랬다. 새카맣게 타버린 얼굴로 또래의 사내녀석들과 어울려 놀고, 계집애들과 말싸움을 한 것보다 남자 아이들과 주먹다짐을 한 횟수가 더 많았었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다소곳함’과 ‘여성스러움’과는 담을 쌓은 여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사내자식으로 태어난 내 소꿉친구 재하는 나와 너무나 달랐다. 또래 아이들이 놀려도 한번도 덤벼들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나약한 아이.꼴에 감수성은 더럽게 예민해서 만화책을 보고도 질질짜는 아이가 박재하 였다.

“또 재하를 때렸어?이그 이놈의 기집애야 내가 너때문에 재하 엄마한테 창피해서!”

그 날도 엄마에게 심한 꾸중을 들었다.자꾸만 집에 가자고 보챈 것뿐인데, 더 놀고 싶은 마음을 방해받은거 같아 재하를 마구 때렸더니 그는 또 훌쩍 거리면서 쪼르르 지 엄마한테 이른 모양이다. 치..치사한 놈!

나의 유년기는 그렇게 지나갔다. 덕분에 여자친구들은 한명도 없고, 나와 친하다는 녀석들은 죄다 남자녀석들이었다.걔중에는 자라나면서 사내놈들 특유의 2차성징을 겪으며 내 속옷을 잡아당기는 장난을 치는 간 큰 놈도 여럿 존재했지만 그 장난을 치는 녀석들의 대부분은 내게 흠씬 두들겨 맞고 사과하기 일쑤였다.

어라? 그런데 재하녀석이 그것을 보며 웃는다. 늘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던 그 녀석이 다른 남자가 내게 맞는 것을 보며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옆집에 사니 늘 붙어다니는 녀석인데...왜 저 웃는 모습이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넌 뭐가 되고 싶냐?”

“나?”

“여기 너 말고 또있냐?”

“나는..작곡가.”

“풉!야..나 쫌 웃어도 되냐?으캬캬캬!”

“...서인자 너 진짜...”

교복을 입고 같은 버스를 탔을때에, 나는 녀석의 꿈을 듣고는 버스 안이라는 것을 잊고 미친듯이 웃고 말았다.나보다 키도 작아서 꼬맹이처럼 느껴지는 녀석이 작곡가라니! 작곡가라 하면 헨델이나 모짜르트 같은 거장들의 모습만 상상했던 당시의 나로서는, 박재하가 곱슬곱슬한 머리에 레이스 달린 화이트 셔츠를 입고 피아노를 치는 상상밖에 들지 않았던 거였다.그냥 짜식이 어디서 또 작곡가의 삶을 다룬 만화책을 보며 심하게 감명을 먹었구나 하는 생각에 웃어 넘겨 버렸었다.

그런데 고등학교로 왔을때는 그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재하는 꾸준히 피아노 학원을 다니며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연습을 했다. 중고 통기타를 샀다면서 좋아 죽는 표정으로 늘상 나와 함께 먹는 분식집 떡볶이도 마다하고 집으로 내빼어 버렸을때는, 아 이녀석이 진심이구나 하는 것을 느껴 버린 것이었다.


‘엥?’

엄마가 교복을 제대로 다려주지 않아 쭈글쭈글한 그것을 입고 짜증이 잔뜩 뻗쳤던 어느날에, 나는 책상 한구석에서 뭔가를 꼼지락 거리면서 적는 재하의 모습을 발견했다. 왜인지 머릿속에 가득했던 짜증들이 한켠으로 살짝 밀려나 버렸고,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에 살금살금 녀석의 뒤로 가 그것을 훔쳐보았다.

-유미에게-

안녕?나 재하야. 매일 보는데 안녕이라고 하니까 웃기다,하하하.

...뭐야. 연애편지였어? 순간 터져나오는 웃음을 있는대로 눌러 참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유미라..유미라면 꽤 인기가 있는 우리반 10번 유미? 얼굴이 하얗고, 머리가 긴 아이. 치마 밑으로 다리도 가늘고 예뻐서 늘 남자애들이 힐끔힐끔 바라보는 그 퀸카?

내 생각은 틀리지 않은 모양인지. 박재하 그 놈은 창가에 앉아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유미의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가, 다시금 편지를 끄적거리는 일련의 행위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아. 말리고 싶었다. 박재하가 유미에게 대쉬해서 성공할 확률은 금붕어에게 미분적분을 가르쳐서 백점맞게 할 확률보다 낮을 것이 분명했다.나는 나도 모르게 잔뜩 일그러지는 얼굴을 애써 진정시키고는 그가 써내려가는 편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널 처음 본 순간 진짜 천사가 있는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했어.
근데 용기가 나지 않더라.니가 날 좋아해줄 리가 없으니까.
고백을 너무나 하고 싶었는데..그러지 못했거든.
진짜 잘생긴 아이들도 줄줄히 너에게 차이는데...니가 날 바라나 봐줄까..


아으으으! 닭살! 심하게 브라우스의 양 팔 부분을 비벼대는 내 존재를 느끼지도 못한채 녀석은 몇번이고 편지에 줄을 좍좍 그어가며 갈등하고 있었다. 저렇게 저렴한 문장력과 손발이 오그라드는 편지로 유미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하는 거야 지금? 저 등신은 생각이 있는거야? 가만..내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거지?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이미 내 손은 재하의 책상속으로 뻗쳐져 그의 편지를 낚아 채고 있었다. 안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탈색되어 버린 재하의 얼굴이 내 눈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야!박재하 너 쟤 좋아하지?응?”

“야..야..그..그만 둬!”

“야야!유미야! 박재하가..”

내 목소리에 의해 유미의 하얀 얼굴이 천천히 돌아가더니 나와 재하쪽을 향했다. 쉬는 시간이라 떠들썩한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 지며 우리쪽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박재하가 너 좋아한대!너를 처음본 순간...”

“야!하지말라고!”

나도 모르게 놀라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녀석은 정말 화가난 표정으로 내 손에 들려있는 편지를 확하고 채가더니, 이윽고 화가 잔뜩 난 걸음걸이로 교실을 나가 버린다. 순식간에 싸해진 분위기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웃한 유미가 다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교실역시 다시금 시끌시끌해 지기 시작했지만, 나는 얼어붙은 것처럼 재하가 사라진 교실의 뒷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심하게 구겨져 있는 내 브라우스가 창피해지기 시작해서 괜시리 손으로 몇번이고 잡아 당겼다. 눈 앞으로 보이는 교실의 뒷문이 뿌얘지기 시작했다. 나쁜놈...장난을 친건 난데..괜히 재하 그녀석이 너무나 미웠다.




“저..정말이야?”

“응..정말이야.”

잘하는 것일까. 유미는 내 말에 재하가 다시 보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잔뜩 늘어놓은 내 거짓말에 양심이 찔렸지만 저렇게 재하가 끙끙 앓는 모습을 보니 참을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고백하기 위해 재하가 매일 피아노 연습을 하는 거라는 내 뻥에 꿈벅 속아넘어가 버린 유미는, 나의 지고지순한 노력끝에 재하와 사귀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야..야..인자..아니 인애야 너 왜그래..응?”

한결 쌀쌀 맞아진 내 표정을 보고 재하는 어쩔줄 몰라 하면서 쩔쩔 매기 시작했다. 나쁜놈. 속으로는 웃고 싶으면서. 그렇게 예쁜 유미의 남자친구가 되었으니 지금쯤 벌거 벗고 춤이라도 추고 싶겠지? 연신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히죽히죽 웃는 그의 모습을 보니 심하게 짜증이 밀려왔다.

“됐어! 저리가라고!따라오지마!”

그렇게 또 재하에게 큰 소리를 질러버렸다. 집이 같은 방향이니 나를 따라오고 싶어서 오는게 아닐텐데...내 말에 우뚝 멈춰선 채 진짜로 따라오지 못하는 재하의 모습에 짜증이 솟구쳤다. 나쁜놈! 바보! 등신! 속으로 수없이 많은 욕을 하는 내 눈가에는 어느덧 조금씩 이슬이 고여 있었다.




-글을 잘쓰는 여자를 만나고 싶어.내가 재주가 없으니까..내가 만든 멜로디에 노랫말을 입혀줄 여자였으면 좋겠어. 반쪽짜리 노래가 하나의 노래가 될수 있게 해줄 수 있는...그런 여자가 있었으면 좋겠어.-

남자새끼가 무슨 낙옆떨어지는 거 보면서 질질짜는 여중생 마냥 독백하는 듯한 일기를 써 갈겨 놓은게 웃기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가슴 한 쪽이 이상했다. 엄마가 재하네 집에 떡을 주고 오라는 말에 오긴 했는데, 그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대신 재하의 책상위에 놓인 일기장을 발견해 버린 것이다.

없다. 아무리 뒤져봐도 나에대한 말이 없다. 나쁜놈. 엉금엉금 기어 다닐때부터 나랑 친구였던 자식이 내 이야기 하나 안쓰다니. 대신 유미를 찬양하는 일색의 글이 가득했고, 그녀에게 차였을때는 세상 다 산 놈마냥 자기 비판을 해대는 일기가 한참이나 이어지더니, 어제 작성한 듯 보이는 마지막 일기에는 저런 희망사항이 적혀있는 것이었다.

쳇...어렵구만 어려워. 니 주제를 알고 희망사항을 적던가 해! 유미처럼 얼굴이 하얘야 하고, 걔 처럼 날씬해야 하고..거기다가 글도 잘써야 한다고?응? 야야. 꿈깨라 박재하. 그 여자가 너를 좋아한다는 보장이 있기라도 한거냐? 하여간 꼭 평균이하의 애들이 눈은 겁나게 높아. 그래서 아직도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반열에 못들고 있는거야! 쳇!

나 조차도 의미를 알 수 없는, 기승전결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욕설을 잔뜩 늘어놓고 나서야 나는 쿵쿵 거리는 발걸음으로 그의 빈 집을 나와 버렸다. 하지만, 그 일기를 본 이후에 나는 어느새 문예창작과를 지망하는 학생이 되어 있었고, 그가 군대를 들어갈 때쯤엔 방송 아카데미에서 방송작법을 배워 라디오 작가로 데뷔하고 말았다.




“푸히히히히!”

“....”

“푸흐흐흐허하하하!”

“..우..웃지마라 서인애.”

“아이고..배야..그 찐따스런 모습은 뭐냐?응?응?”

휴가를 나온 그의 모습을 보고 오랜만에 배가 찢어지도록 웃어버렸다. 내 성격과는 조금도 맞지 않는 방송작가의 일에 찌들어 살면서, 이렇게 웃어본 적은 이 근래들어 정말 오래간 만이었다. 시커멓게 탄 피부에 옆머리를 하얗게 파먹은 재하의 어리버리한 얼굴은 나를 웃겨주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그렇게 웃겨?”

재하의 경고따윈 무시하고 시원하게 웃어제끼니, 그는 또 소심하게도 나를 보며 불안에 떨고 있었다. 암..웃기고 말고..군대에서 휴가나오면 늠름해 진다더니 그거 다 뻥이잖아! 100일만에 사람이 이렇게 삭아도 되는거야?으하하핫!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나보다 항상 손가락 한마디 이상 키가 작았던 재하는 어느새 내 키를 넘어설 만큼 자라있었다. 군대에서 하도 갈굼을 당해 쪼그라 들줄 알았는데...제식훈련을 하면서 굽었던 척추뼈가 펴지기라도 한건가? 밥 사준다고 불러내 실컷 놀려대긴 했지만, 내 옆에 붙어서 툴툴 거리며 걷는 재하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늠름해 보여서 가슴이 뛰었다.




“아아악!따가워!”

“아휴..언니 가만히 좀 있어봐요.이게 다 피부에 좋은 거라니까!”

“야이 기지배야!진짜 따갑단 말이야!너 염산부었냐?”

“헉..언니 말 좀 곱게해요..”

아아..여자가 되기란 쉽지 않았다. 하얀 얼굴을 만드는 것은 그나마 쉬웠지만, 생얼로도 고운 피부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실로 엄청난 인내심이 요구되는 것이었다.각질제거는 시원할줄 알았는데 왜이리 따가운 것이며, 무슨 놈의 크림을 계속해서 쳐바르는 것인가! 20년이상 무관리로 살아온 나에게는 그것은 정말 참을수 없는 귀찮음이었다.

“언니 근데 갑자기 왜 그래요?남친이라도 생긴거야?”

“시..시끄러.침튀어 이 년아.”

괜시리 후배에게 핀잔을 주었다.남자친구? 솔직히 몇명 사귀긴 했지만 귀찮다.연애라 불리우는 일련의 감정싸움이 귀찮은게 아니라...상대 남자에게 서인애라는 여자를 파악시켜야 하는 그 시간이 귀찮았다. 어떤남자를 만나도 즐겁지 않았고, 신나지 않았다. 근데 왜...피부좋은 여자가 좋다는 찌질이 박재하의 말에 내가 지금 이 생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에잇..내가 미쳤나봐 라고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그 사이 재하는 내 직장이 있는 여의도로 이사를 왔다. 방송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약간 작은 오피스텔이었다. 밤샘 녹음이 있다는 녀석의 말에 회의가 끝나자마자 녀석의 집으로 가보았다. 현관에 버튼식 개폐장치가 있다는 것을 신기해 하며 나에게 정보를 주고 말았던 너의 촌스러움이 불러낸 결과이다! 으흐흐흐.

삑삑삑삑삑.뚜드드드.

컥..다..단순한 놈. 아직도 집 전화번호를 비밀번호로 쓰다니. 이 녀석은 분명 돈을 좀 만지는 놈이었다면 피사기율 100퍼센트에 달하는 멍청한 인간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자고로 옛말에 비번 관리는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고 했거늘..으흐흐.

“으헉..”

문을 열었던 나는 숨이 턱 막히는게 느껴졌다. 이게 사람사는 집이란 말이야?

옷가지들은 침대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고, 방안에는 먼지들이 서로 뒹굴며 사랑을 나누기에 바쁘다. 겉보기에는 깔끔한 건물안에 이런 뉴욕 할렘가 스타일의 방이 존재해도 되는 것인가.안그래도 밤새 회의를 하고, 편성국장에게 불려가 싫은소리 잔뜩 들어서 피곤함으로 가득 한데, 그 광경을 보니 100배는 더 피곤해 지는 것만 같았다.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싹싹 문대기 시작했다. 내 방청소도 안하는 내가 지금 박재하의 방을 닦아주고 있다는게 웃기면서도, 욕을 하면서도 구석구석 닦아대는 내 모습이 웃겼다. 한쪽에 딸랑 하나가 남아 있는 라면. 휴지통을 열어보니 라면봉지만 수북하게 쌓여 거북함을 자아냈다. 지가 무슨 세상에 이런일이에 나오는 할아버지도 아니고, 삼시 세끼를 라면만 처먹을 셈이던가? 괜시리 화가 나기도 하고, 그가 안쓰럽기도 했다.

-워..원래 음향기사는 일없을땐 보릿고개란 말이야..-

얼마전 버스카드도 충전을 못해서 빌빌 거리는 그를 보며 내가 한심해 하자, 그가 늘어놓은 변명이었다.바보 같은 놈. 좋은 노래를 만들어서 데뷔하면 되잖아! 내게 들려줬던 첫 노래 정말 좋았단 말이야. 그냥..칭찬해 주기 쑥쓰러워서 개나 주라고 했던건데 그걸 진짜로 지워버리다니...너도 준혁이라는 사람처럼 좋은 노래 쓸 수 있잖아. 너도 돈과 명성을 얻으면서, 좋은 차를 타며 좋은 것만 먹을 자격이 있잖아.

괜시리 눈물이 났다. 바보 같은 그 녀석은 억울하지도 않나보다. 억울해 하긴 커녕 아마 그 준혁이라는 사람이 시키는 일은 넵!이라고 대답하면서 넙죽넙죽 하겠지. 당장 내일 먹을것이 라면밖에 없는데도...또 감수성에 젖어서 꿈이나 꾸면서 살겠지.바보 같은 놈!

검은색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레를 내팽겨치고는 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내 들었다. 5만원 가량의 현금이 내 지갑에 꼬깃고깃 들어가 있는 것이 보였다.재하가 자주 입는 자켓에 망설임 없이 그것을 찔러 넣었다. 하다못해 중국집 자장면이라도 시켜먹어라..라면이 뭐니 라면이!

-언니! 재하 오빠라는 사람 혹시 모자쓰고 약간 마른 사람 맞아요?-

오늘 재하에게 소개시켜주기로 한 슬기의 문자 메세지에 나는 그렇다고 답을 해 주었다.짜식..꼴에 소개팅이라고 모자까지 쓰고 멋을 내고 나갔구나. 슬기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왜 재하에게 그녀를 소개시켜 준 걸까? 내 마음이지만 나도 모를 일이었다. 재하의 이상형을 훤히 알고 있으니 그럴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괜시리 불안해 하는 내가 웃기다. 에이 열받아! 나도 간만에 라면이나 먹어야 겠다.




여자가 ‘여자로서’ 남자의 앞에서 있는데, 그 남자가 자신을 여자로 봐주지 않을 경우처럼 슬픈것이 없다. 우리 방송국에 나이가 꽤 많은 여자피디가 했던 말이기도 했다. 결혼 20년차인 그녀는, 남편 앞에서 옷을 훌렁 벗어도 남편이 눈길 한번 주지 않는것을 보고 슬픔을 느꼈다고 했다. 당시에는 그저 ‘당신이 할망구니까 그렇지..’하면서 콧방귀를 뀌었는데..그게 아니었던 거였다.

재하는 깜짝 놀라는 듯 했지만 내가 예상했던 행동까지는 취하지 않았다.뜬금없이 샤워하겠다고 용기내어 윗옷을 벗었는데, 그냥 깜짝 놀라 버리고 휙 뒤를 도는 재하의 반응이 왠지 싫었다. 내심 눈에서 하트가 뿅뿅하고 튀어나올줄 알았는데..그건 정말 천만의 말씀이었던 모양이었다.

원래 나와 재하의 사이가 그랬지만, 그때는 멋모르는 아기 때였고 지금은 알거 다 아는 성인인데도 그때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는 재하의 모습에 맥이 빠졌다.그리고 기껏 씻고 나왔더니 뭐? ‘머리 묶는게 이쁘다’고?

“지랄하구 있네.”




그 날은 정말이지 실컷 취해버렸다.왠만해서는 회식이 없는 우리팀이 간만에 뭉쳐서 소주를 달린것이 화근이었다.아니지, 정확히 말하자면 맥주에 소주를 섞은 것이 엄청난 화근이었을지도.

몽롱한 정신에 비틀비틀 재하의 집으로 찾아간 모양이었다. 재하의 집 오피스텔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다만, 내 술기운이 조금씩 조금씩 깨어가는 그때엔, 내 몸에 이상한 반응이 오고 있었다.

‘헉!’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는 어느새 재하의 옆에 누워 속옷만 입은 상태였고, 그는 벌게진 얼굴로 내 브레지어를 살짝 올려 내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이..이 자식이! 평소 같았으면 강한 킥을 복부에 꽂아 주었을텐데, 이상하게 내 몸은 굳어버린 듯 움직여 지지가 않는다. 재하의 표정을..봐 버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의 옆에서 ‘친구’라는 이름하에 숨을 쉬며 살아오는 동안, 나를 향해서 그가 그런 눈빛을 보냈던 것은 정말 처음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늘상 친구라는 틀 안으로 딱 잘라 선을 긋던 그 어리버리한 녀석이, 내 몸을 어루만지며 흥분에 가득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싫다. 이런것에 좋다는 느낌을 받는 내 자신이 싫었다.당당하게, 하고싶은 말은 늘 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깨어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안다면 금세 그만둬 버리겠지 하는 마음이 드는게 싫었다.어느새 그는 내 하반신을 어루만지고 있었고, 나는 입가로 세어나오는 신음소리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내어 버렸다.

유미와 겨우겨우 사귀고, 또 차이고 나서 쭈욱 여자친구가 없었던 녀석과 달리 나는 몇몇의 남자와 사귀었었다. 그에게는 이야기 하기 싫지만 아마 성적인 경험역시 내가 더 많을테지. 누구든 쉽게 싫증을 냈지만..대부분 끝까지 갔으니까 말이다.

재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사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이들이 본능적으로 헉헉대는 더러운 숨결로 느껴지지 않았다.고문이었다. 자꾸만 몸도 마음도 재하의 손길에 반응하는 내 모습과 싸우는 것은 정말 심한 고문이었다. 친구라는 선에서 한정지어진 경계선은 넘을때 달콤하지만, 결국엔 다시 뒤로 돌릴수 없을테니까.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눈을 뜨고야 말았다. 야한꿈을 꿨다는...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그는 울먹이고 있었다.

꼴에 남자라고 우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은듯 하지만, 내 앞에서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는 울기 직전의 여자아이처럼 떨리고 있었다.조금은 허탈했다. 녀석이...좋아하는 여자가 있었구나.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수정이라고 하는 여자에게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나도 모르게 눈앞에 있는 소주를 기계적으로 내 목안으로 밀어넣었다. 그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그 말. 그 말을 하면서 세상 다 산 녀석처럼 침울해 하는 재하의 모습은, 유미에게 차였던 날의 재하보다 백배는 더 슬퍼 보인다.

맘에 없는 말을 해버렸다. 그렇게 좋으면 가서 잡고 고백이라도 하라고. 우스운 일이다. 내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을 재하에게 하면서 나는 강한 여자인척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그렇게 해봐야 재하가 상처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은근히 그가 많이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내 어줍잖은 질투심이 싫었다.

한 잔..두 잔...

들어가는 술의 양은 점점 더 늘었다.눈물이 나올것 같은데 억지로 참기위해 술을 들이켰다. 지금쯤 그는 차일걸 예상하고 그리고 가서 수정이라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겠지? 아마 수정이라는 아이는 매우 여성스러운 아이일 것이다. 재하가 좋아하는 하얀 피부와 반짝이는 눈망울을 지닌 전형적인 ‘천사’의 모습일 거다. 나는 되고 싶어도 그렇게 될 수가 없는..그런 ‘천상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얌전한 아이겠지.


정신이 들었을 때는 그의 집이었다.잔뜩 침울해진 얼굴로 나를 침대위에 내려놓고는, 벌컥벌컥 소주를 들이키는 재하의 모습을 보니 짜증이 밀려왔다. 내 모습을 감추고 감췄던 그간의 시간들이 억울해졌다. 그래선 안되는 거였는데...나는 그렇게 유혹을 하면 그가 날 여자로 봐주겠지 하는 착각을 하고 만 것이었다.

좋았다. 그냥 사귀는 사람끼리는 다 한다길래 했었던 섹스가, 처음으로 좋다는 느낌이 들었던 그 날이었다.상상속으로만 생각하고는 내가 미쳤나봐! 라며 머리를 흔들었던 생각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늘 어리바리하고 소심했던 재하가 그 날만큼은 늠름한 남자로 보였다. 뭐에 홀린듯 나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그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와락하고 껴안으면 내 심장이 뛰는 것을 들킬까봐 무서웠다. 알리고 싶었다. 나는 지금 연기를 하는게 아니야. 박재하. 너 인줄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거야. 말해주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이 등신같은 놈아.

“재하야...”

그가 나를 바라봐 주겠지..하는 바보 같은 마음의 결과일지도 몰랐다. 그와 내가 절정의 순간을 함께 공유하고 난 후에, 꿈에서 깬 것처럼 화들짝 놀라는 그를 향해 나는 입을 열어 그의 이름을 부르고 만 것이었다.




“오우! 서작가! 진짜 나이스한 섭외였어. 다음주 청취율 진짜 기대되는데?”

나에게 하는 칭찬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을 빼앗지 못하니 일이라도 잘해야지.’하는 비아냥 으로 들리기 까지 했다. 내 마음은 처참히 부숴지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결국 10여년 만에 용기내어 한 내 고백은 사과로 되돌아 왔다. 재하는 방송국까지 와서 나를 불러내고는, 구태여 지워져 버린 친구라는 선을 다시 힘주어 긋고 있었다. 분필인줄 알고 지웠는데, 알고보니 그의 마음에 자리잡은 경계선은 분필이 아닌 유성펜이었던 모양이었다.

화가 났다.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나 싫고 미웠다. 잠시나마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여성스러운 척 행세를 했던 내 자신이 미웠다. 다시금 방송국으로 CD들을 들고 찾아왔을때도, 정말 때려주고 싶을만큼 미웠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집안에 수북히 쌓인 라면을 먹고, 여전히 꿈을 꾸며 살면서 기가 죽어 있는 듯한 그의 모습을 보니 안쓰럽다. 명색이 음향제작이라는 학문을 배운 엔지니어이자 미래의 작곡가가, 이렇게 CD나 돌리러 다니는 모습에 괜시리 마음이 짠했다.

그래. 어쩌면..나는 그가 좋아하는 타입으로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가 원하는 것이 친구라면, 그렇게 해서 계속 박재하의 옆에 있는 서인애가 된다면 겸허하게 그것을 수용해야만 했다.설령, 수정이와 잘해보라는 그 말이 마음에 없는 거짓말이라 할 지라도.




“수정이가 있잖아...내 옆방에서...끅! 남자친구랑..끅! 자고 있더라...”

횡설수설하는 그의 모습을 한대 콱 쥐어박아 주고 싶었다. 기껏 전화해서 나오라고 하길래, 평소에 뿌리지 않는 향수까지 뿌리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던 내 모습이 저주 스러울 만큼 짜증이 났다.

“근데 있잖아 인애야아..수정이가..그 남자 너무 좋아하는거 같더라..진짜로.”

그는 술에 취해 연신 같은 소리만 반복하고 있었다. 정말 바보라 할지라도 그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훤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도망쳐 나온것이다. 자신이 사랑한다는 수정이란 여자가 다른남자와 찐한 스킨쉽을 하는것을 듣고는 뛰쳐나와 버린거다. 등신..그러길래 그걸 왜 들어. 마음이 다칠것을 뻔히 알면서...그걸 왜 훔쳐듣냔 말이야 바보야.

이윽고 그는 기절하듯 머리를 박고 말았다. 취하고 싶은건 난데..왜 니가 취하니? 술도 못먹는 주제에..

너무너무 밉다. 곤히 잠든 그 모습을 한대 세게 때려주고만 싶었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손을 뻗어 볼을 만지니, 술기운 때문에 뜨거워진 그의 거친 볼이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했다.

포기할수 있는 것은 빨리 포기해야 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 재하가 없었던 적은 없으니, 그를 아예 내 인생에서 배제 시킬 순 없을테니까. 다만 그가 원하는 것이 사랑이 아닌 우정이라면, 그렇게 해줘야만 앞으로도 박재하와 서인애사이의 인연이 지속된느 것일 테니까 말이다.

그의 휴대폰을 꺼내어 준혁이라는 사람의 번호를 찾았다. 그는 알수 없는 한숨을 푹 하고 내쉬더니 금방 온다고 하는 말을 남겼다. 가만히 잠들어 있는 재하의 모습을 보는 내 눈가가 괜시리 간질간질 해진다. 이러면 안되는데...재하는 내 씩씩한 모습을 좋아할텐데.

아직 늦지 않은 시간. 나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라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을 잔소리들을 묵묵히 들어준 나는, 재하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때 선보라고 했던거..볼게. 언제 어디로 가면 되는데?”





아우 재수없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제발 주제도 모르고 잘난척하는 부류가 나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역시나 그런 부류가 떡 하니 내 맞선상대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좋은 남자 만날거야!라는 일념하에 안하던 화장을 하고, 불편한 치마를 입고, 미용실에가서 파마까지 한 내 노력이 헛수고였다는 느낌에 짜증이 확 하고 몰려왔다.

“사실 그렇죠..방송일이라는게 돈도 안되고..고생하는거에 비해 박봉이지 않나요? 이제 안정적인 남편을 만나서 취미생활하고 그러실 나이인데..”

순간적으로 일어나서 포크로 녀석의 콧구멍을 찌르고 싶은것을 겨우겨우 참아내었다. 뭣이 어째? 방송일이라는게 돈도 안되고..?취미생활할 나이..?

그러는 너는 그렇게 잘난 놈이 왜 결혼을 못하고 선이나 보고 자빠졌냐? 생긴건 무슨 호떡같이 기름지게 생겨가지고...아오..서인애 성격 많이 죽었다. 너 내가 한 5년만 젊었어도 임마 바로 송장치뤘어!

그래..참아야 했다.내가 여기서 내숭을 떨지 않으면 엄마의 잔소리를 5박 6일동안 들어야 했다.그것은 정말 위험한 짓이다. 오랑우탄에게 핵폭탄 스위치를 닦으라고 시키는 것보다 더!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비우고 말았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녀석에게 마지막으로 새침한 표정 한번 지어주고는 밖으로 나와버렸다. 아이씨! 이 구두는 굽이 왜이렇게 높은거야!

‘재하와 있었다면 편했을 텐데..’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나는 너무 그를 잘 알고, 그 역시 나에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때로는 삐뚤어진 모습을 보여도, 그것마저도 포용해 줄 유일한 아이니까. 재하 앞에서는 내숭을 떨지 않아도 되고, 마음껏 담배를 피워도 되며, 하다못해 마음껏 욕을해도 싫은소리를 듣지 않으니까 말이다.

“야 서인애.”

바로 그때였다. 내 귀를 의심하게 하는, 너무나 익숙한 그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태어나서부터 한결같이 어리바리 하고 찌질한 외길인생을 살았던 한 남자가 나를 보며 어이 없다는 듯 피식 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창피했다.바보같이 이런모습을 저 녀석에게 보이고 있다니. 하지만 왜일까? 나는 그를 보고서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 즐거운 자리였다. 모두가 웃고 떠들고, 신이난 자리였다.

청취율 조사에서 동시간대 프로그램들에 비해 독보적인 성적을 거둔 우리팀에게,금일봉이 내리진 것은 분명 짜릿하고 신이나는 일이었다. 다행히 나와 성격들이 비슷한 인간들이 우리팀에 꽤 많이 존재하는 탓에, 우리는 혼연일체가 되어 다같이 포장마차로 직행한 것이었다.

마치 온몸을 옥죄고 있는 듯한 쇠사슬들을 풀어버린 느낌이었다. 음..더 정확한 비유를 하자면, 사우나에서 꾹꾹 참으며 땀을 빼다가 밖으로 나와 찬물속에 풍덩 하고 빠진 기분이랄까? 말로 표현못할 해방감에 나는 그만 한껏 기분이 업되어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서작가! 2차가야 하는데 그만 좀 마셔!”

동료들이 웃으며 하는 만류가 귀에 들어올리 없다. 기분이 좋은데 왜 안마셔? 아니지..기분이 좋긴 한데..왜 자꾸 마시지?

나도 모르게 횡설수설 하고 있었다.원래 술마시는데에 분명한 이유가 존재했던 나이지만, 단순히 기분이 좋아서 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횡설수설 거리며 담당피디에게 막말을 내뱉던 나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엉엉 울고 있었다.


내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기분에 눈을 떴을때에, 나는 내가 허공을 날아가는 줄 알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익숙한 빡빡머리의 정수리가 보이고, 내 허벅지를 단단히 받치고 걷는 재하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나는 그에게 업혀서 걷고 있었다. 술기운이 확 하고 올라와서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당최 분간이 서질 않았다. 뭐가 웃긴지 피식 거리면서 웃는 재하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목에 둘러진 내 팔에 더욱 힘을 주어 그를 껴안았다.

“미안해 인애야.”

그는 사과를 하고 있었다.왜 갑자기 내가 재하의 등에 업혀서, 그가 사는 오피스텔로 옮겨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저만치로 사라져 버렸다. 미안하다는 그의 한마디에 심장이 있는 부분이 따끔거리게 아파왔다.

“바보 같이 몰라서 미안해.내가 가는 길이 맞는 건줄 알았어. 아니..정확히 말하자면 너처럼 이쁘고 당당한 아이가 나를 좋아할리 없다고만 생각했어.”

왜? 니가 어때서? 나도 모르게 가슴속으로 그런말을 하고 있었다.고등학교때 다리를 다친 나를 업었을땐 비틀거려 불안하기 그지 없던 녀석의 등짝이..오늘따라 너무나 포근하게 느껴졌다.

“...내 마음이 향하고 있는 진짜가 누군지... 맨날 니가 내 옆에 있어서...정말 몰랐나보다”

울컥하고 눈물이 솟구쳤다. 바보 자식...이제와서 나 좋아하는 척 하지마. 안 속을거야. 또 다시 친구라는 선을 그어버릴 거잖아. 니가 말하는건 핑계에 불과한거 다 알고 있어...

하지만 시야가 뿌얘지며 촉촉히 젖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내 어깨위로 덮여진 따뜻한 자켓에서 나는 재하의 냄새가 싫지 않았다.속으면 안되는데...이 아이는 아직 수정이의 그늘에서 못나왔을 수도 있는데...그 말 한마디에 이렇게 무너져 버려, 그를 꼭 끌어안는 내 자신이 싫었다.

복도를 걷는 그의 걸음이 뚝 하고 멈추었다. 내 눈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눈물이 눈치없이 그의 목덜미로 또르르 떨어져 굴러 내려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집에 도착해서 불이 꺼지고, 서로 모르는 척 하고 있었던 우리가 서로를 뜨겁게 끌어 안을 그때까지도.

나는 재하의, 재하는 나의 그늘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재하라는 커다란 나무가 내가 가진 전부였었다. 물론 그는 맛있는 과실이 주렁주렁 달린 다른 쪽 나무를 동경했지만, 결국에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깨닫고 부둥켜 안고 있었다.

오랜시간 서로라는 존재를 부정해 왔지만, 결국 한나무처럼 이어지는 연리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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