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잠든 사이에 <1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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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부
“남자가 그런것도 못타서 어떡해요?”
나를 보며 핀잔을 주면서도,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애써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겁이 많기로는 세계무대에서도 경쟁자가 없을 내게 롤러코스터를 태우다니 그녀는 분명 동물 조련쪽으로 나가면 아마 업계 탑이 될것이 분명했다.
놀이공원에서 파는 토끼귀가 달린 머리띠를 하고서 그녀는 신이나서 돌아다녔다.소풍때 와보고 이런 놀이동산에 온적이 아예 없는 나로서는 곤욕이나 다름없지만, 너무나 신나하는 그녀때문에 아무런 말도 할수 없었다.
알고 있다.
수정이에게 있어서 내가 애인이 되는 날은 오늘까지라는 것을. 얼굴은 나를 향해 있지만 눈빛은 나를 보고 있지 않는 그녀를 보면 느낄수 있었다.너무나 신이나서 내 손을 꼭 쥐고 걷고 있지만, 그녀가 꿈꾸는 남자는 내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내 모습에 다른사람을 투영하며 그녀는 걷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마치 오랫동안 그녀와 사랑을 해왔던 사람처럼 철저하게 연기를 하며 걷고 있었다.
세상에는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게 있다. 돌아가는 시계바늘을 내 손으로 멈출수 있겠지만 시간이 흐르는 자연적인 섭리는 내가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수정이의 마음이 흐르는 방향이 내 쪽이 아닌 다른 쪽이라는 것도, 그 물살을 인위적으로 내 쪽으로 돌릴수 없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나 바보같은 일이었다. 나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흘러가는 조그만 시냇물이었고, 수정이라는 바다를 동경한 나머지 목적지를 잊은 힘없는 물줄기 였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오늘 단 하루는 내가 바로 그 바다가 되는 날이었다. 오늘이...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이다.
“그렇게 무서웠어요?”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는 나를 보며 수정이는 하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그녀의 치마와 윤기나는 검은 머리칼도 따라 웃는 듯했다.
“아침부터 놀이기구 타자고 할 줄은 몰랐다구요.”
“에이.그래도 평일날 와서 안기다리고 타잖아요.그게 어딘데..”
“이런걸 기다려서 탄다구요?전 사양하고 싶은데..”
그녀는 쿡쿡 거리며 웃었다. 큰 맘먹고 회사에 휴가를 냈다고 했다. 그 간에 왜 내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업무가 워낙 많아 쉬고 난 다음날에 밀린 업무를 하는게 두려워서 라고 했다. 그만큼 일에 치여있는 수정이가 안쓰러웠다. 일이라는거 하나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 텐데, 그녀는 오늘 마음의 정리까지 해야하는 숙제도 안고 있는 것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해 질때까지 내 몸안에 있는 공포세포들을 잔뜩 자극하고 나서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특별한 곳도 아닌 서울 시내였다. 놀이공원에서 실컷 소리를 질러 목이 아프다며 베시시 웃는 수정이의 모습에 아무말 없이 웃어 주었다.
약간은 차가운 손의 감촉. 수정이의 손은 차갑지만 부드러웠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와 수정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노점상에 파는 머리핀을 구경하기도 했고, 화장품 가게에 들어가 이것저것을 살피기도 했다.
별거 아닌데, 아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단편일 뿐인데 너무나 좋아하는 수정이의 모습을 보니 왠지 우울했다. 예상을 하고 나온 것이지만, 그녀가 하고 싶었던 것들이 이렇게 소박한 것들인 이유를 알 수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울어서 미안해요.나는..-
그날 밤 그녀는 끝내 눈물을 보인 이유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멍하니 방 안에 남은 나를 뒤로 하고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 그녀를 붙잡지도 않았다. 그렇게 우울했던 그날 밤이 지나 날이 밝았을때, 수정이는 내게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이었다. 하고 싶은게 너무 많다고. 오늘은 그냥 하고 싶은것만 하고 싶다고 말이다.
“저는 헤이즐럿 주세요. 오빠는?”
“오렌지 쥬스요.”
한참을 걷다가 그녀가 나를 이끈 곳은 분위기 있는 작은 커피숍이었다. 음료를 주문하고 나자 수정이는 친구들과 예전에 자주 이곳에 와서 수다를 떨었었다며 빙긋 웃었다.
“으와..노는 것도 참 힘든거 같아요..그쵸?”
“그러게요. 근데 수정씨 되게 신나 보이던데요?”
“오빠가 옆에 있어서 그랬나봐요.”
며칠전이었다면 내 심장을 계속해서 울리게 했을 그 말에도 나는 그저 그녀를 보며 덤덤하게 웃었다.
“우리 참..신기하지 않나요?”
“뭐가요?”
“지하철에서 처음 봤잖아요. 물론 일방적으로 오빠가 나를 본거지만.”
“맞아요.그랬었죠.”
그 때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외근을 다녀오는 ‘지하철의 천사’를 따라서, 넋이 나가 그녀의 뒤를 미행했던 생각에 나도 모르게 쑥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많은 일이 있었다. 그녀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 안절부절 하기도 했었고, 옆방 그녀가 수정이라는 사실을 알았을때는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그녀의 숨결 하나하나, 잠이 들었을때 뒤척이는 소리 하나하나를 벽너머로 훔쳐 들으며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 사랑에 빠졌다는 착각속에서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기사도에 젖었던 며칠전의 일까지도 모두 방금 겪은 것처럼 생생했다.
만질수도 없을것 같았던 신비로운 존재와의 키스, 그리고 반쯤 취한 상태로 이루어진 어제의 일들은 분명 내게 있어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큰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원래대로라면, 나는 집을 뛰쳐나가 만세라도 불러야 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어제의 일이 갖는 의미는 그것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수정씨.”
“네?”
“누군가를 정말 좋아해 본 적이 있어요?”
내 질문에 수정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주문했던 것이 나왔는지,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수정이는 차가워진 손을 녹이려는 듯 양손으로 커피잔을 살짝 감싸쥐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에, 아직 벗겨지지 않은 네번째 손가락의 반지가 찻잔에 부딪혀 팅 하고 소리가 났다.
“정말로..좋아했던 적...물론 있지요.오빠는요?”
심각해질 질문이 아닌데 심각해져 버린다. 내 앞에 있는 오렌지쥬스를 바라보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있어요. 늘 모르고 있었지만...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더군요. 그게 좋은건지 모르고, 좋아하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진짜 바보같더라구요 나는.”
수정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의미없이 헤이즐럿을 티스푼으로 천천히 젓는 그녀의 표정은, 고개를 숙여 앞머리가 내려온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하루종일 웃던 그녀와 내 사이에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아침에 만나 이렇게 네온사인이 반짝일 어두운 시간까지 함께 있으면서 처음으로 생긴 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긴 정적에 끝에 수정이는 살짝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오빠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까요?”
“...”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수정이의 표정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반대로 수정이 역시 나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다시 찻잔쪽으로 묻어 버렸다. 미안한 걸까. 내가 자신의 속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양심에 찔리는 것일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를 미안하게 하려고 말을 꺼낸게 아니니까. 오히려, 반대로 나에대한 것을 툴툴 털어버리라고 꺼냈던 말이라는게 옳았다.
“모르겠어요. 하지만..꼭 알아줬음 좋겠네요.”
“그렇군요..”
말 끝을 흐린 수정이가 애써 미소를 지어주었다. 내 대답을 듣고도 여전히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수정이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하..우습다. 가장 안쓰러운 것은 염문진의 모습을 내게 투영시켜 데이트를 했던 수정이가 아닌 바로 나인데... 그녀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는 내가 웃겼다.
잘 알고 있다. 수정이는 그를 떠날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밤이 되어서야 알아채 버린 것이었다. 캠코더가 아닌 그 어떤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수정이는 그를 떠날수 없는 여자였다. 지금 그가 어떤 놈이건 간에, 자신이 사랑했던 그의 예전모습을 버릴 자신이 없는 것이다.
더욱더 신랄하게 말하자면, 수정이는 혼자서 자신을 꾸려갈 자신이 없다고 보는게 맞을수도 있었다.그녀의 삶은 염문진이라는 사내에게 의존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수정이는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그런 능력있는 사내를 만날 확률이 낮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인애처럼 강한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느끼고 있었다. 오늘의 데이트는 그를 뿌리칠 자신이 없는 수정이가 나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는 자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 역시 자신의 의도를 들켰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고마웠어요..오늘 정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테이블 사이에 흐르는 적막이 숨이 막힐 정도로 어색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의 의미는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서로가 각자 다른 이유로 마지막 자리임을 밝히지 못하고 있는 탓에, 그 적막은 그 어떤 것보다 숨이 막히게 나를 조여매 왔다.
우웅..우웅..
한참이나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의 자리에서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수정이의 턱이 내 쪽을 살짝 가리켰다.그녀와의 마지막 자리. 정말 받고 싶지 않았지만 휴대폰은 쉴새없이 울리고 있었다.
“괜찮아요..받으세요.”
“아.미안해요.”
애써 싱긋 웃어주는 그녀를 뒤로하고 수화기를 꺼내 들었다. 이제 밤인데 갑자기 누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걸까 하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나는 폴더에 표시된 발신자 정보를 보고 한참이나 굳어져 버렸다.
-인애-
왜일까. 왜 이제와서 그녀의 전화에 설레이는 걸까.내 표정을 본 수정이는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시간은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박재하씨 맞죠? 여기에요!”
평소에 타지 않는 택시까지 타고 여의도까지 한번에 달려나갔다. 이 시간쯤 되니 한산했던 여의도 거리엔 하나 둘씩 포장마차가 자리를 펴고 있었고, 다른 점포를 두 세개나 뒤지고 나서야 수염이 아무렇게나 나있는 한 사내를 발견할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유..이거 미안합니다. 인애씨가 오늘따라...”
저번에 시디를 돌릴때 보았던 인애의 프로그램의 담당 프로듀서였다. 역시나 방송국 직원으로 보이는 몇몇이 나를 보며 살짝 인사했고, 테이블 위로는 날씬한 여자 한명이 머리를 박고 있었다.
“많이..취했나 보네요.”
“아..죄송합니다. 우린 서작가 집이 어딘지도 모르는데..자꾸만 재하야 재하야 하고 부르더라구요. 그래서 전화부에서 찾아서 전화드린건데..아이고 이거 죄송해서..”
회의할때는 일에 쩔어 수심이 가득했던 그가 사람좋게 웃으며 몇번이고 내게 인사를 했다. 인애의 프로그램은 팀웍이 좋다더니..이렇게 자주 술을 마시는 구나. 아마도 청취율 조사가 끝나고 나서 자축하는 자리였을 수도 있다. 그녀는 매년 이 즈음이 되면 늘 예민해져 있고, 청취율 조사가 끝나면 다시금 밝은 성격으로 돌아온 다는 것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뭐야! 시끄러!우이씨..박재하 불러와!”
포장마차의 플라스틱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인애의 주정이 시작되었다. 다른 직원들은 인애의 등을 다독이며 그녀를 달래주려 했지만, 이윽고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인애의 손에 질겁을 하고는 뒤로 넘어져 버렸다. 취하면 늘 똑같은 그녀의 모습을, 몰래 술을 마시며 어른행세를 했던 고등학교 때부터 보아온 나인데 이상하게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은 웃고 있었다.
“저기 근데..”
누가봐도 아 이사람 PD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방송일에 찌든 인상의 남자가 내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말을 하려는지 계속해서 머뭇머뭇 거렸다. 내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살짝 웃으며 물었다.
“혹시 서작가 남자친구세요?”
그의 질문에 약속이라도 한듯 포장마차에 있던 방송국 직원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음..나는 이렇게 시선 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머리를 긁적거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남자친구 입니다.”
“에에?서작가가 남..남자친구가 있다구요?”
음..이게 그렇게 경천동지할 일이던가? 나야 뭐 막 말을 시작할때부터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니 틀린말을 한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그들은 다른의미의 남자친구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모두들 멍하니 취해서 퍼져버린 인애와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흠흠..여튼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말려도 자꾸 마시는 바람에...저희는 2차를 갈까 하는데..서작가가 많이 취해서..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네. 제가 알아서 집에 바래다 줄게요.”
“감사합니다. 저흰 그럼 먼저..”
술자리는 나 오기전에 이미 파장이었던 모양이었다. 술마신 사람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좋은 일이 있어서 마신거겠지...뭐 그러니까 2차를 가겠지만 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도 술 잘마시는 인애가 1차에 퍼져버린 것은 약간의 골칫거리일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녀의 남자친구라는 말에 직원들은 한두명씩 꾸벅 내게 인사를 하며 포장마차를 빠져나갔다.걔중에는 쿡쿡 거리며 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멍하니 인애를 바라보았다.
술도 잘마시는 아이가 이렇게 취했을 정도면 얼마나 마신걸까? 그리고 나를 그렇게 찾았다니...그 말에 내심 인애가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다.
테이블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는 인애의 두 볼은 홍시처럼 빨갛다. 역시나 선을 보기 위해서 웨이브 펌을 한것도 결국 귀찮아 졌는지 머리끈으로 질끈 동여맨 모습에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어 미소지어진다. 날씨가 쌀쌀해 졌음에도 불구하고 청바지에 얇은 긴팔티 한장을 입고 있는 그녀의 어깨가 많이 추워보였다.
“우으응!”
옷에 걸친 자켓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니 아예 침대에서 이불을 덮은 사람마냥 아주 안락한 표정을 짓는 인애의 모습에, 그녀를 데려가야 하나? 하는 것이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앞에 앉아 버렸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너무나도 하얗고 예뻤다. 살포시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늘 나와 함께 하던 어릴적 친구의 모습에서 많이 멀어져 있는 듯했다. 늘상 씩씩 하다고만 생각했던 아이.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여린 여자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늦게 깨달아 버린거 같아 인애에게 미안해졌다.
손을 뻗어 인애의 볼을 살짝 만져보았다.술을 마셔서 따뜻해진 그녀의 볼은 예전처럼 부드럽기 그지 없었다. 차가운 내 손이 닿자 한껏 얼굴을 찡그리는 인애의 모습이 귀엽다고 느낄때쯤, 나는 이미 미친놈처럼 쿡쿡 거리며 웃고 있었다.
잠시 망설여졌다. 그녀를 어디로 바래다 줘야 할까? 인애가 살고 있는 집은 잘 알고 있지만 여기서 조금 먼 곳이었다. 조금 거리가 있지만 도보로 갈 수 있는 우리집이 훨씬 편할거 같았다. 게다가 저번에 내가 저질렀던 실수를 만회하기에는 오늘이 딱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인애야.”
어차피 대답이 돌아올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아마 내가 오기전에는 계속 웃으면서 주위 사람들을 당황시켰을 것이고, 그것이 일정 시간이 지나 소강상태가 되면 이렇게 순식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숙면을 취하는 것이 인애의 술버릇이니까.
나는 쪼그려 앉은채로 꼼지락 거리며 인애가 앉아있는 의자와 테이블 사이로 몸을 끼워 넣었다. 인애가 자신의 팔을 베고 자고 있으니, 차라리 업기 편할거 같았다. 요새들어 두번이나 인애를 업고 가는 구나 하는 쓸대없는 생각을 하며, 엎드려 있는 그녀의 왼팔과 목사이의 공간으로 슬며시 내 머리를 집어 넣으며 일어났다. 역시나 경험의 힘은 무서운 것인지, 그녀는 내 자켓을 어깨에 걸친채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등에 넙죽 업히는 형상이 되어 있었다.
곱슬곱슬해진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목을 감싸듯 늘어뜨려졌다.어깨쪽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인애의 볼이 닿았다. 약간은 통통한 볼살이 내 어깨에 닿아 일그러져 우스꽝 스런 얼굴을 하고 있겠지? 하하하. 심술궂게 보이는 그 얼굴 사진을 찍고 싶은데 그렇게 못하니 조금 아쉬웠다.
“어이구..여자친구가 취했나봐?”
“하하..그러게요.수고하세요.”
너무나 안정적인 자세로 그녀를 업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꼼장어를 꺼내던 포장마차 아줌마가 씨익 하고 웃어주었다.
“근데 그 처자는 올때마다 고함지르더라.”
“.....면목 없습니다.”
한쪽 팔에 인애의 가방을 끼워 넣고 그녀의 허벅지를 양 손으로 단단하게 움켜쥐었다.한발자국 ,두발자국. 힘이 많지 않은 나 인데 인애의 몸에서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지나가며 나를 바라보는 것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어느덧 내 머리는 기억속의 어느 한 부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진짜 두고보자! 저 기지배들 내가 내일 강냉이를 다 털어 버릴거야!”
“어휴..좀 가만히 있어..업기 힘들단 말야..”
“억울하단 말이야! 너같으면 가만히 있을 수 있어?”
교복을 입은 내가 역시 교복을 입은 인애를 업고 가는 것이 이상했는지, 모두들 우리를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물론 인애는 치마가 아닌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인애는 고등학교때부터 지기 싫어하는 아이였다. 학원에서 다른 학교 여자아이들이 텃세를 부렸다고 혼자서 대걸레를 들고 여섯명과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전해듣고 헐레벌떡 뛰어오니, 인애는 발목을 삐끗해서 퉁퉁 부어 있는 상태였다.
“어휴..너도 좀 성질좀 죽여라..”
낑낑대며 그녀를 업고는 한발한발 비틀거리는 내 발걸음에도 인애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불평을 터트렸다.
“근데 그 여자애들은 어떻게 됐어?”
“몰라. 다 비명지르면서 도망가는거 쫒아가다가 자빠져서 이렇게 된거거든.”
“........”
다행히 유혈사태까지로는 번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 성격과는 너무나 상반된 인애의 성격이 한편으로는 부러웠지만, 이렇게 발목까지 부어서 걷지도 못하는 것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도 들어왔다.
늘상 그랬다. 인애의 엄마와 우리엄마는 만날 때마다 자식들의 성격을 서로 바꿨으면 좋겠다고 푸념을 하곤 하셨었다. 나는 늘 당당하고 자신있는 인애의 모습을 동경했고, 때로는 그녀의 친구라는 것이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다.
“야! 너 왜이렇게 비틀거려!”
“너..진짜 쥰내 무겁단 말야..으헉!”
그대로 내 목을 팔로 조르는 인애의 힘에 나는 헛바람을 집어 삼키며 발버둥을 쳤다.
“악..놔..놔봐..컥!”
“무거워 안무거워? 말해봐”
“아..안무거..가..가벼어...컥!”
장난 하나는 잔인하게 잘치는 아이였다. 내 등에 업혀서 목을 조르는 그녀의 팔힘에 하체 부실의 상징인 나는 그대로 보도블럭위로 고꾸라져 버렸다. 깔깔 거리는 그녀의 웃음소리. 주변 사람들이 바라보는 통에 창피해서 얼굴이 붉게 물든 나는, 뭐가 웃기다고 배까지 잡고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느새 어리바리하게 웃고 있었다.
예전생각에 피식 하고 웃으니 벌써 부터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보이기 시작했다.그러고 보니 내가 인애를 업은건 처음이 아니구나. 교복을 입고 있던 시절에도, 난 이렇게 그녀를 업고 걸었던 적이 있었던 거였다.
“미안해 인애야.”
조용한 골목길에 내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내 운동화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고, 쎄근거리는 인애의 호흡역시 규칙적으로 내 귓가에 와 부딪혔다.
“바보 같이 몰라서 미안해.내가 가는 길이 맞는 건줄 알았어. 아니..정확히 말하자면 너처럼 이쁘고 당당한 아이가 나를 좋아할리 없다고만 생각했어.”
대답을 듣기위해 꺼낸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그녀가 취해 있고 잠들어 있을때에서야 속마음을 끄집어 내는 내 저렴한 용기가 싫었지만, 지금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았다. 별이 보이지 않는 서울의 까만 밤하늘사이로 달이 고개를 내밀었다.
“나..수정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었어. 진짜 이렇게 사랑해 본 적 없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빠져있었어. 근데 아니더라. 자기 남자친구의 추악한 면을 다 알아 버리고 나서도, 수정이는 그 사람을 놓지 못했는데 그걸 보고도 내가 가슴이 아프지 않더라. 덤덤하니까 이상했어.”
이마로 부터 땀이 송글송글 베어 나왔다. 인애의 몸을 살짝 추켜올려 허벅지 부분에 내 두손을 깍지껴서 고정시키고는, 나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서서히 내가 사는 원룸의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정말 몰랐어.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알고 싶다는 거였을 뿐이라는거..준혁이 형이 그 말을 했을땐 몰랐는데 그게 맞는 말이더라. 그리고..그걸 느끼고 나서야 알아 버린거 같아. 내 마음이 향하고 있는 진짜가 누군지...”
속이 후련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 규칙적인 인애의 호흡소리를 느끼면서 나는 그것에 맞춰 꿈을 꾸듯 걷고 있었다. 줄곧 업고 온 탓에 팔이 떨어질 만큼 아플 법도 한데 근육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맨날 니가 내 옆에 있어서...정말 몰랐나보다.”
고백 아닌 고백이 끝이 났다. 정말 한심하게도 옆에 있을때는 소중함을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는 그 실수를 나는 똑같이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인애가 내 삶의 일부분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기에 그냥 거쳐가 버리는 실수를 한것이었다.
어찌보면 난 수정이와도 비슷했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사람을 눈 앞에 있는 새로운 사람에게 비춰 버리는 큰 실수. 수정이도 나도, 같이 자고 나서야 그것을 깨달아 버린 것이었다. 내 안에서는 커질대로 커진 인애의 모습을 끝없이 부정했던 이유도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난 너란 친구를 잃기가 싫었어. 넌 나와 다르잖아. 씩씩하고..당당하고...사람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으니까.”
내 가슴위로 땀방울이 굴러 떨어지는 느낌이 선명하게 들었다. 어느덧 내 발걸음은 1층 현관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아닌 인애가 취해 있는 취중고백이 끝이나니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며 후련해졌다.
‘무신경 해지기 까지는..시간이 걸리겠지만..’
어쩔수 없이 우리집에 가려면 그녀의 집 문이 보이게 된다. 그리고 얇은 벽 너머로는 그녀의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다른곳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행여나 내가 무엇을 하는 소리가 옆방에 들릴까 노심초사 하고 싶지도 않았다.물론 그렇게 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
그래서는 안되는데 나는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내 어깨 맨살위로 무언가가 떨어지는 감촉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또르르 하고 내 티셔츠 앞섬으로 굴러떨어지는 그것은, 땀보다 더 따뜻한 온도의 물방울이었다.
-야 박재하! 너 쟤 좋아하지?-
-야..야..그만둬!-
-푸히힛!줘봐 줘봐! 그거 연애편지냐?응?-
-아 서인애 진짜 하지마!-
-야 유미야! 박재하가 너 좋아한대! 너를 처음 본 순간..-
-아 진짜 하지 말라니까!-
덜컹 거리는 소리.
이제는 익숙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
고등학교때 짝사랑에 빠진 나를 놀려대는 인애의 꿈을 꾸던 나는 귀를 파고드는 소음에 살며시 눈을 떴다.
무언가 따스한 기운이 옆구리를 통해 전달되어 온다.살며시 손으로 더듬으니 너무나 부드러운 살결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규칙적으로 내 가슴팍에 와서 부딪히는 숨결의 느낌이 싫지 않았다.
인애는 그렇게 내 품에 꼭 안겨 잠이 들어 있었다. 이불로 가려져 있었지만, 하얀 어깨 부분은 그대로 노출되어 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잠이 덜깬 눈으로 그녀를 살짝 내 쪽으로 잡아당기니, 하얀 쇄골과 젖무덤이 내 몸에 맞닿아져 일그려졌다.
“천천히..으이쌰! 어어 조심해. 이런거는 기스난다고..”
문밖으로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레 인애를 바라보니 세상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다. 그녀가 깨면 곤란한데...괜시리 평소에는 잘 내지도 않는 짜증이 들어왔다.
“자 다음에 냉장고 간다..조심조심!”
무슨 소리일까. 잠결에 들으니 뭔지 더더욱 분간이 가지 않았다.확실한 것은, 두 명이상의 남자가 무언가를 나르고 있는 소리라는 점?
“여기서 뭐해? 일하는 사람들 방해되게..”
순간 눈이 확 하고 떠졌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젊은남자의 소리는 내가 너무나 또렷하게 기억하는 한 남자의 목소리 였으니까.
“그냥..옆집사는 사람한테 이사간다는 말도 하지 못해서..”
“야..그딴말 해서 뭐해. 그냥 이리와. 방해되잖아.여기 복도도 좁아.”
“으..응.”
이윽고 들려오는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에, 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가만히 숨소리도 내지 않고 천장만 응시했다. 이사...이사구나. 이미 나를 불러내었을 때는 떠날 준비를 완료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갑자기 떠날 결심을 한 것일까.
“으음..”
전날처럼 술이 아닌 잠에 취한 인애가 뒤척거리며 내 품으로 안겨왔다.내 몸에 둘러진 그녀의 손이 낯설지만 싫지 않았다. 아주 짧은 요 며칠 사이에 모든 것은 크게 변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자자..이게 마지막 입니다.”
밖에서 또 한번 인부의 목소리가 들리고, 옆집의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무언가를 운반하는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 끝 저 편으로 멀어져가는 느낌이 나자, 나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인애에게 해주었던 팔베게를 빼내었다.
인애의 체온에 길들여져 있던 내 맨몸에 삽시간에 닭살이 돋았다.체온이 떨어진 내 양팔을 쓱쓱 비비며 구석에 있는 속옷을 입었다. 옷걸이에 아무렇게나 걸려있는 트레이닝 복까지 입고는, 나는 인애가 아직 깨어있지 않을 것을 재차 확인하며 조용히 현관문을 열었다.
눈을 찌르는 햇살에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이마를 가렸다.이불 속에만 있다 나와서 몸은 쌀쌀했지만, 너무나 화창한 날씨였다. 조금 망설이던 나는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가, 복도에 있는 난간에 붙어서서 건물의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트드드드..
이삿짐 센터의 트럭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린다. 내가 수정이의 방에서 보았던 연두색 빛깔의 가구들이 차곡차곡 실려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눈을 돌리니 그녀가 있었다. 익숙한 넘버의 번호판, 고급 승용차의 운전석에 타면서 얼른 타라고 재촉하는 염문진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화사한 하얀 치마를 입은 수정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어버렸다. 수정이의 눈망울이 일순간 떨리는 가 싶더니, 그녀는 처음 전화번호를 물어보던 나를 보며 웃었던 그 미소 그대로 조금씩 미소짓기 시작했다.
‘잘가요.’
‘미안해요.’
우리는 서로 그렇게 입으로 말하고 있었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평소의 나라면 펑펑 울었을 텐데...나는 진심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를 향해 꾸벅 하고 인사를 한 그녀는 자동차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둘 사이에 무슨일이 생겼건...결국 그녀의 자리는 그의 옆자리였는지도 몰랐다. 오히려,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끼이이익.
매끈하게 미끄러지며 그녀가 탄 은빛 자동차가 골목으로 사라져갔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는 그녀. 바보같이 자신을 좋아했던 내 모습에 대한 마지막 배려일까? 수정이는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내 얼굴은 침대위에 있는 인애를 향했다. 내가 문을 열어 추웠는지 이불을 뒤집어쓰며 뒤척이는 그녀의 모습에 자연스레 미소가 걸렸다.
내 몸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늘상 집에 있을때 마다 입는 옷이라서 인지 주머니에 있는 천원짜리 지폐 몇장이 손에 잡혔다.나는 살짝 현관문을 닫았다. 이제 곧 인애가 일어나서 배가 고프다고 할테지. 이걸로 인애가 좋아하는 라면이라 사러 가야겠다.
인애가...아직 단꿈을 꾸며 잠든 사이에 말이다.
“남자가 그런것도 못타서 어떡해요?”
나를 보며 핀잔을 주면서도,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애써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겁이 많기로는 세계무대에서도 경쟁자가 없을 내게 롤러코스터를 태우다니 그녀는 분명 동물 조련쪽으로 나가면 아마 업계 탑이 될것이 분명했다.
놀이공원에서 파는 토끼귀가 달린 머리띠를 하고서 그녀는 신이나서 돌아다녔다.소풍때 와보고 이런 놀이동산에 온적이 아예 없는 나로서는 곤욕이나 다름없지만, 너무나 신나하는 그녀때문에 아무런 말도 할수 없었다.
알고 있다.
수정이에게 있어서 내가 애인이 되는 날은 오늘까지라는 것을. 얼굴은 나를 향해 있지만 눈빛은 나를 보고 있지 않는 그녀를 보면 느낄수 있었다.너무나 신이나서 내 손을 꼭 쥐고 걷고 있지만, 그녀가 꿈꾸는 남자는 내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내 모습에 다른사람을 투영하며 그녀는 걷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마치 오랫동안 그녀와 사랑을 해왔던 사람처럼 철저하게 연기를 하며 걷고 있었다.
세상에는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게 있다. 돌아가는 시계바늘을 내 손으로 멈출수 있겠지만 시간이 흐르는 자연적인 섭리는 내가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수정이의 마음이 흐르는 방향이 내 쪽이 아닌 다른 쪽이라는 것도, 그 물살을 인위적으로 내 쪽으로 돌릴수 없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나 바보같은 일이었다. 나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흘러가는 조그만 시냇물이었고, 수정이라는 바다를 동경한 나머지 목적지를 잊은 힘없는 물줄기 였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오늘 단 하루는 내가 바로 그 바다가 되는 날이었다. 오늘이...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이다.
“그렇게 무서웠어요?”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는 나를 보며 수정이는 하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그녀의 치마와 윤기나는 검은 머리칼도 따라 웃는 듯했다.
“아침부터 놀이기구 타자고 할 줄은 몰랐다구요.”
“에이.그래도 평일날 와서 안기다리고 타잖아요.그게 어딘데..”
“이런걸 기다려서 탄다구요?전 사양하고 싶은데..”
그녀는 쿡쿡 거리며 웃었다. 큰 맘먹고 회사에 휴가를 냈다고 했다. 그 간에 왜 내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업무가 워낙 많아 쉬고 난 다음날에 밀린 업무를 하는게 두려워서 라고 했다. 그만큼 일에 치여있는 수정이가 안쓰러웠다. 일이라는거 하나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 텐데, 그녀는 오늘 마음의 정리까지 해야하는 숙제도 안고 있는 것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해 질때까지 내 몸안에 있는 공포세포들을 잔뜩 자극하고 나서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특별한 곳도 아닌 서울 시내였다. 놀이공원에서 실컷 소리를 질러 목이 아프다며 베시시 웃는 수정이의 모습에 아무말 없이 웃어 주었다.
약간은 차가운 손의 감촉. 수정이의 손은 차갑지만 부드러웠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와 수정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노점상에 파는 머리핀을 구경하기도 했고, 화장품 가게에 들어가 이것저것을 살피기도 했다.
별거 아닌데, 아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단편일 뿐인데 너무나 좋아하는 수정이의 모습을 보니 왠지 우울했다. 예상을 하고 나온 것이지만, 그녀가 하고 싶었던 것들이 이렇게 소박한 것들인 이유를 알 수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울어서 미안해요.나는..-
그날 밤 그녀는 끝내 눈물을 보인 이유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멍하니 방 안에 남은 나를 뒤로 하고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 그녀를 붙잡지도 않았다. 그렇게 우울했던 그날 밤이 지나 날이 밝았을때, 수정이는 내게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이었다. 하고 싶은게 너무 많다고. 오늘은 그냥 하고 싶은것만 하고 싶다고 말이다.
“저는 헤이즐럿 주세요. 오빠는?”
“오렌지 쥬스요.”
한참을 걷다가 그녀가 나를 이끈 곳은 분위기 있는 작은 커피숍이었다. 음료를 주문하고 나자 수정이는 친구들과 예전에 자주 이곳에 와서 수다를 떨었었다며 빙긋 웃었다.
“으와..노는 것도 참 힘든거 같아요..그쵸?”
“그러게요. 근데 수정씨 되게 신나 보이던데요?”
“오빠가 옆에 있어서 그랬나봐요.”
며칠전이었다면 내 심장을 계속해서 울리게 했을 그 말에도 나는 그저 그녀를 보며 덤덤하게 웃었다.
“우리 참..신기하지 않나요?”
“뭐가요?”
“지하철에서 처음 봤잖아요. 물론 일방적으로 오빠가 나를 본거지만.”
“맞아요.그랬었죠.”
그 때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외근을 다녀오는 ‘지하철의 천사’를 따라서, 넋이 나가 그녀의 뒤를 미행했던 생각에 나도 모르게 쑥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많은 일이 있었다. 그녀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 안절부절 하기도 했었고, 옆방 그녀가 수정이라는 사실을 알았을때는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그녀의 숨결 하나하나, 잠이 들었을때 뒤척이는 소리 하나하나를 벽너머로 훔쳐 들으며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 사랑에 빠졌다는 착각속에서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기사도에 젖었던 며칠전의 일까지도 모두 방금 겪은 것처럼 생생했다.
만질수도 없을것 같았던 신비로운 존재와의 키스, 그리고 반쯤 취한 상태로 이루어진 어제의 일들은 분명 내게 있어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큰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원래대로라면, 나는 집을 뛰쳐나가 만세라도 불러야 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어제의 일이 갖는 의미는 그것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수정씨.”
“네?”
“누군가를 정말 좋아해 본 적이 있어요?”
내 질문에 수정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주문했던 것이 나왔는지,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수정이는 차가워진 손을 녹이려는 듯 양손으로 커피잔을 살짝 감싸쥐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에, 아직 벗겨지지 않은 네번째 손가락의 반지가 찻잔에 부딪혀 팅 하고 소리가 났다.
“정말로..좋아했던 적...물론 있지요.오빠는요?”
심각해질 질문이 아닌데 심각해져 버린다. 내 앞에 있는 오렌지쥬스를 바라보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있어요. 늘 모르고 있었지만...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더군요. 그게 좋은건지 모르고, 좋아하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진짜 바보같더라구요 나는.”
수정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의미없이 헤이즐럿을 티스푼으로 천천히 젓는 그녀의 표정은, 고개를 숙여 앞머리가 내려온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하루종일 웃던 그녀와 내 사이에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아침에 만나 이렇게 네온사인이 반짝일 어두운 시간까지 함께 있으면서 처음으로 생긴 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긴 정적에 끝에 수정이는 살짝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오빠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까요?”
“...”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수정이의 표정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반대로 수정이 역시 나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다시 찻잔쪽으로 묻어 버렸다. 미안한 걸까. 내가 자신의 속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양심에 찔리는 것일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를 미안하게 하려고 말을 꺼낸게 아니니까. 오히려, 반대로 나에대한 것을 툴툴 털어버리라고 꺼냈던 말이라는게 옳았다.
“모르겠어요. 하지만..꼭 알아줬음 좋겠네요.”
“그렇군요..”
말 끝을 흐린 수정이가 애써 미소를 지어주었다. 내 대답을 듣고도 여전히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수정이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하..우습다. 가장 안쓰러운 것은 염문진의 모습을 내게 투영시켜 데이트를 했던 수정이가 아닌 바로 나인데... 그녀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는 내가 웃겼다.
잘 알고 있다. 수정이는 그를 떠날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밤이 되어서야 알아채 버린 것이었다. 캠코더가 아닌 그 어떤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수정이는 그를 떠날수 없는 여자였다. 지금 그가 어떤 놈이건 간에, 자신이 사랑했던 그의 예전모습을 버릴 자신이 없는 것이다.
더욱더 신랄하게 말하자면, 수정이는 혼자서 자신을 꾸려갈 자신이 없다고 보는게 맞을수도 있었다.그녀의 삶은 염문진이라는 사내에게 의존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수정이는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그런 능력있는 사내를 만날 확률이 낮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인애처럼 강한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느끼고 있었다. 오늘의 데이트는 그를 뿌리칠 자신이 없는 수정이가 나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는 자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 역시 자신의 의도를 들켰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고마웠어요..오늘 정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테이블 사이에 흐르는 적막이 숨이 막힐 정도로 어색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의 의미는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서로가 각자 다른 이유로 마지막 자리임을 밝히지 못하고 있는 탓에, 그 적막은 그 어떤 것보다 숨이 막히게 나를 조여매 왔다.
우웅..우웅..
한참이나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의 자리에서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수정이의 턱이 내 쪽을 살짝 가리켰다.그녀와의 마지막 자리. 정말 받고 싶지 않았지만 휴대폰은 쉴새없이 울리고 있었다.
“괜찮아요..받으세요.”
“아.미안해요.”
애써 싱긋 웃어주는 그녀를 뒤로하고 수화기를 꺼내 들었다. 이제 밤인데 갑자기 누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걸까 하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나는 폴더에 표시된 발신자 정보를 보고 한참이나 굳어져 버렸다.
-인애-
왜일까. 왜 이제와서 그녀의 전화에 설레이는 걸까.내 표정을 본 수정이는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시간은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박재하씨 맞죠? 여기에요!”
평소에 타지 않는 택시까지 타고 여의도까지 한번에 달려나갔다. 이 시간쯤 되니 한산했던 여의도 거리엔 하나 둘씩 포장마차가 자리를 펴고 있었고, 다른 점포를 두 세개나 뒤지고 나서야 수염이 아무렇게나 나있는 한 사내를 발견할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유..이거 미안합니다. 인애씨가 오늘따라...”
저번에 시디를 돌릴때 보았던 인애의 프로그램의 담당 프로듀서였다. 역시나 방송국 직원으로 보이는 몇몇이 나를 보며 살짝 인사했고, 테이블 위로는 날씬한 여자 한명이 머리를 박고 있었다.
“많이..취했나 보네요.”
“아..죄송합니다. 우린 서작가 집이 어딘지도 모르는데..자꾸만 재하야 재하야 하고 부르더라구요. 그래서 전화부에서 찾아서 전화드린건데..아이고 이거 죄송해서..”
회의할때는 일에 쩔어 수심이 가득했던 그가 사람좋게 웃으며 몇번이고 내게 인사를 했다. 인애의 프로그램은 팀웍이 좋다더니..이렇게 자주 술을 마시는 구나. 아마도 청취율 조사가 끝나고 나서 자축하는 자리였을 수도 있다. 그녀는 매년 이 즈음이 되면 늘 예민해져 있고, 청취율 조사가 끝나면 다시금 밝은 성격으로 돌아온 다는 것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뭐야! 시끄러!우이씨..박재하 불러와!”
포장마차의 플라스틱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인애의 주정이 시작되었다. 다른 직원들은 인애의 등을 다독이며 그녀를 달래주려 했지만, 이윽고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인애의 손에 질겁을 하고는 뒤로 넘어져 버렸다. 취하면 늘 똑같은 그녀의 모습을, 몰래 술을 마시며 어른행세를 했던 고등학교 때부터 보아온 나인데 이상하게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은 웃고 있었다.
“저기 근데..”
누가봐도 아 이사람 PD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방송일에 찌든 인상의 남자가 내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말을 하려는지 계속해서 머뭇머뭇 거렸다. 내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살짝 웃으며 물었다.
“혹시 서작가 남자친구세요?”
그의 질문에 약속이라도 한듯 포장마차에 있던 방송국 직원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음..나는 이렇게 시선 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머리를 긁적거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남자친구 입니다.”
“에에?서작가가 남..남자친구가 있다구요?”
음..이게 그렇게 경천동지할 일이던가? 나야 뭐 막 말을 시작할때부터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니 틀린말을 한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그들은 다른의미의 남자친구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모두들 멍하니 취해서 퍼져버린 인애와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흠흠..여튼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말려도 자꾸 마시는 바람에...저희는 2차를 갈까 하는데..서작가가 많이 취해서..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네. 제가 알아서 집에 바래다 줄게요.”
“감사합니다. 저흰 그럼 먼저..”
술자리는 나 오기전에 이미 파장이었던 모양이었다. 술마신 사람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좋은 일이 있어서 마신거겠지...뭐 그러니까 2차를 가겠지만 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도 술 잘마시는 인애가 1차에 퍼져버린 것은 약간의 골칫거리일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녀의 남자친구라는 말에 직원들은 한두명씩 꾸벅 내게 인사를 하며 포장마차를 빠져나갔다.걔중에는 쿡쿡 거리며 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멍하니 인애를 바라보았다.
술도 잘마시는 아이가 이렇게 취했을 정도면 얼마나 마신걸까? 그리고 나를 그렇게 찾았다니...그 말에 내심 인애가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다.
테이블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는 인애의 두 볼은 홍시처럼 빨갛다. 역시나 선을 보기 위해서 웨이브 펌을 한것도 결국 귀찮아 졌는지 머리끈으로 질끈 동여맨 모습에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어 미소지어진다. 날씨가 쌀쌀해 졌음에도 불구하고 청바지에 얇은 긴팔티 한장을 입고 있는 그녀의 어깨가 많이 추워보였다.
“우으응!”
옷에 걸친 자켓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니 아예 침대에서 이불을 덮은 사람마냥 아주 안락한 표정을 짓는 인애의 모습에, 그녀를 데려가야 하나? 하는 것이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앞에 앉아 버렸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너무나도 하얗고 예뻤다. 살포시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늘 나와 함께 하던 어릴적 친구의 모습에서 많이 멀어져 있는 듯했다. 늘상 씩씩 하다고만 생각했던 아이.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여린 여자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늦게 깨달아 버린거 같아 인애에게 미안해졌다.
손을 뻗어 인애의 볼을 살짝 만져보았다.술을 마셔서 따뜻해진 그녀의 볼은 예전처럼 부드럽기 그지 없었다. 차가운 내 손이 닿자 한껏 얼굴을 찡그리는 인애의 모습이 귀엽다고 느낄때쯤, 나는 이미 미친놈처럼 쿡쿡 거리며 웃고 있었다.
잠시 망설여졌다. 그녀를 어디로 바래다 줘야 할까? 인애가 살고 있는 집은 잘 알고 있지만 여기서 조금 먼 곳이었다. 조금 거리가 있지만 도보로 갈 수 있는 우리집이 훨씬 편할거 같았다. 게다가 저번에 내가 저질렀던 실수를 만회하기에는 오늘이 딱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인애야.”
어차피 대답이 돌아올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아마 내가 오기전에는 계속 웃으면서 주위 사람들을 당황시켰을 것이고, 그것이 일정 시간이 지나 소강상태가 되면 이렇게 순식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숙면을 취하는 것이 인애의 술버릇이니까.
나는 쪼그려 앉은채로 꼼지락 거리며 인애가 앉아있는 의자와 테이블 사이로 몸을 끼워 넣었다. 인애가 자신의 팔을 베고 자고 있으니, 차라리 업기 편할거 같았다. 요새들어 두번이나 인애를 업고 가는 구나 하는 쓸대없는 생각을 하며, 엎드려 있는 그녀의 왼팔과 목사이의 공간으로 슬며시 내 머리를 집어 넣으며 일어났다. 역시나 경험의 힘은 무서운 것인지, 그녀는 내 자켓을 어깨에 걸친채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등에 넙죽 업히는 형상이 되어 있었다.
곱슬곱슬해진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목을 감싸듯 늘어뜨려졌다.어깨쪽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인애의 볼이 닿았다. 약간은 통통한 볼살이 내 어깨에 닿아 일그러져 우스꽝 스런 얼굴을 하고 있겠지? 하하하. 심술궂게 보이는 그 얼굴 사진을 찍고 싶은데 그렇게 못하니 조금 아쉬웠다.
“어이구..여자친구가 취했나봐?”
“하하..그러게요.수고하세요.”
너무나 안정적인 자세로 그녀를 업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꼼장어를 꺼내던 포장마차 아줌마가 씨익 하고 웃어주었다.
“근데 그 처자는 올때마다 고함지르더라.”
“.....면목 없습니다.”
한쪽 팔에 인애의 가방을 끼워 넣고 그녀의 허벅지를 양 손으로 단단하게 움켜쥐었다.한발자국 ,두발자국. 힘이 많지 않은 나 인데 인애의 몸에서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지나가며 나를 바라보는 것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어느덧 내 머리는 기억속의 어느 한 부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진짜 두고보자! 저 기지배들 내가 내일 강냉이를 다 털어 버릴거야!”
“어휴..좀 가만히 있어..업기 힘들단 말야..”
“억울하단 말이야! 너같으면 가만히 있을 수 있어?”
교복을 입은 내가 역시 교복을 입은 인애를 업고 가는 것이 이상했는지, 모두들 우리를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물론 인애는 치마가 아닌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인애는 고등학교때부터 지기 싫어하는 아이였다. 학원에서 다른 학교 여자아이들이 텃세를 부렸다고 혼자서 대걸레를 들고 여섯명과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전해듣고 헐레벌떡 뛰어오니, 인애는 발목을 삐끗해서 퉁퉁 부어 있는 상태였다.
“어휴..너도 좀 성질좀 죽여라..”
낑낑대며 그녀를 업고는 한발한발 비틀거리는 내 발걸음에도 인애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불평을 터트렸다.
“근데 그 여자애들은 어떻게 됐어?”
“몰라. 다 비명지르면서 도망가는거 쫒아가다가 자빠져서 이렇게 된거거든.”
“........”
다행히 유혈사태까지로는 번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 성격과는 너무나 상반된 인애의 성격이 한편으로는 부러웠지만, 이렇게 발목까지 부어서 걷지도 못하는 것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도 들어왔다.
늘상 그랬다. 인애의 엄마와 우리엄마는 만날 때마다 자식들의 성격을 서로 바꿨으면 좋겠다고 푸념을 하곤 하셨었다. 나는 늘 당당하고 자신있는 인애의 모습을 동경했고, 때로는 그녀의 친구라는 것이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다.
“야! 너 왜이렇게 비틀거려!”
“너..진짜 쥰내 무겁단 말야..으헉!”
그대로 내 목을 팔로 조르는 인애의 힘에 나는 헛바람을 집어 삼키며 발버둥을 쳤다.
“악..놔..놔봐..컥!”
“무거워 안무거워? 말해봐”
“아..안무거..가..가벼어...컥!”
장난 하나는 잔인하게 잘치는 아이였다. 내 등에 업혀서 목을 조르는 그녀의 팔힘에 하체 부실의 상징인 나는 그대로 보도블럭위로 고꾸라져 버렸다. 깔깔 거리는 그녀의 웃음소리. 주변 사람들이 바라보는 통에 창피해서 얼굴이 붉게 물든 나는, 뭐가 웃기다고 배까지 잡고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느새 어리바리하게 웃고 있었다.
예전생각에 피식 하고 웃으니 벌써 부터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보이기 시작했다.그러고 보니 내가 인애를 업은건 처음이 아니구나. 교복을 입고 있던 시절에도, 난 이렇게 그녀를 업고 걸었던 적이 있었던 거였다.
“미안해 인애야.”
조용한 골목길에 내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내 운동화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고, 쎄근거리는 인애의 호흡역시 규칙적으로 내 귓가에 와 부딪혔다.
“바보 같이 몰라서 미안해.내가 가는 길이 맞는 건줄 알았어. 아니..정확히 말하자면 너처럼 이쁘고 당당한 아이가 나를 좋아할리 없다고만 생각했어.”
대답을 듣기위해 꺼낸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그녀가 취해 있고 잠들어 있을때에서야 속마음을 끄집어 내는 내 저렴한 용기가 싫었지만, 지금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았다. 별이 보이지 않는 서울의 까만 밤하늘사이로 달이 고개를 내밀었다.
“나..수정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었어. 진짜 이렇게 사랑해 본 적 없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빠져있었어. 근데 아니더라. 자기 남자친구의 추악한 면을 다 알아 버리고 나서도, 수정이는 그 사람을 놓지 못했는데 그걸 보고도 내가 가슴이 아프지 않더라. 덤덤하니까 이상했어.”
이마로 부터 땀이 송글송글 베어 나왔다. 인애의 몸을 살짝 추켜올려 허벅지 부분에 내 두손을 깍지껴서 고정시키고는, 나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서서히 내가 사는 원룸의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정말 몰랐어.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알고 싶다는 거였을 뿐이라는거..준혁이 형이 그 말을 했을땐 몰랐는데 그게 맞는 말이더라. 그리고..그걸 느끼고 나서야 알아 버린거 같아. 내 마음이 향하고 있는 진짜가 누군지...”
속이 후련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 규칙적인 인애의 호흡소리를 느끼면서 나는 그것에 맞춰 꿈을 꾸듯 걷고 있었다. 줄곧 업고 온 탓에 팔이 떨어질 만큼 아플 법도 한데 근육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맨날 니가 내 옆에 있어서...정말 몰랐나보다.”
고백 아닌 고백이 끝이 났다. 정말 한심하게도 옆에 있을때는 소중함을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는 그 실수를 나는 똑같이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인애가 내 삶의 일부분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기에 그냥 거쳐가 버리는 실수를 한것이었다.
어찌보면 난 수정이와도 비슷했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사람을 눈 앞에 있는 새로운 사람에게 비춰 버리는 큰 실수. 수정이도 나도, 같이 자고 나서야 그것을 깨달아 버린 것이었다. 내 안에서는 커질대로 커진 인애의 모습을 끝없이 부정했던 이유도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난 너란 친구를 잃기가 싫었어. 넌 나와 다르잖아. 씩씩하고..당당하고...사람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으니까.”
내 가슴위로 땀방울이 굴러 떨어지는 느낌이 선명하게 들었다. 어느덧 내 발걸음은 1층 현관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아닌 인애가 취해 있는 취중고백이 끝이나니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며 후련해졌다.
‘무신경 해지기 까지는..시간이 걸리겠지만..’
어쩔수 없이 우리집에 가려면 그녀의 집 문이 보이게 된다. 그리고 얇은 벽 너머로는 그녀의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다른곳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행여나 내가 무엇을 하는 소리가 옆방에 들릴까 노심초사 하고 싶지도 않았다.물론 그렇게 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
그래서는 안되는데 나는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내 어깨 맨살위로 무언가가 떨어지는 감촉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또르르 하고 내 티셔츠 앞섬으로 굴러떨어지는 그것은, 땀보다 더 따뜻한 온도의 물방울이었다.
-야 박재하! 너 쟤 좋아하지?-
-야..야..그만둬!-
-푸히힛!줘봐 줘봐! 그거 연애편지냐?응?-
-아 서인애 진짜 하지마!-
-야 유미야! 박재하가 너 좋아한대! 너를 처음 본 순간..-
-아 진짜 하지 말라니까!-
덜컹 거리는 소리.
이제는 익숙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
고등학교때 짝사랑에 빠진 나를 놀려대는 인애의 꿈을 꾸던 나는 귀를 파고드는 소음에 살며시 눈을 떴다.
무언가 따스한 기운이 옆구리를 통해 전달되어 온다.살며시 손으로 더듬으니 너무나 부드러운 살결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규칙적으로 내 가슴팍에 와서 부딪히는 숨결의 느낌이 싫지 않았다.
인애는 그렇게 내 품에 꼭 안겨 잠이 들어 있었다. 이불로 가려져 있었지만, 하얀 어깨 부분은 그대로 노출되어 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잠이 덜깬 눈으로 그녀를 살짝 내 쪽으로 잡아당기니, 하얀 쇄골과 젖무덤이 내 몸에 맞닿아져 일그려졌다.
“천천히..으이쌰! 어어 조심해. 이런거는 기스난다고..”
문밖으로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레 인애를 바라보니 세상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다. 그녀가 깨면 곤란한데...괜시리 평소에는 잘 내지도 않는 짜증이 들어왔다.
“자 다음에 냉장고 간다..조심조심!”
무슨 소리일까. 잠결에 들으니 뭔지 더더욱 분간이 가지 않았다.확실한 것은, 두 명이상의 남자가 무언가를 나르고 있는 소리라는 점?
“여기서 뭐해? 일하는 사람들 방해되게..”
순간 눈이 확 하고 떠졌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젊은남자의 소리는 내가 너무나 또렷하게 기억하는 한 남자의 목소리 였으니까.
“그냥..옆집사는 사람한테 이사간다는 말도 하지 못해서..”
“야..그딴말 해서 뭐해. 그냥 이리와. 방해되잖아.여기 복도도 좁아.”
“으..응.”
이윽고 들려오는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에, 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가만히 숨소리도 내지 않고 천장만 응시했다. 이사...이사구나. 이미 나를 불러내었을 때는 떠날 준비를 완료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갑자기 떠날 결심을 한 것일까.
“으음..”
전날처럼 술이 아닌 잠에 취한 인애가 뒤척거리며 내 품으로 안겨왔다.내 몸에 둘러진 그녀의 손이 낯설지만 싫지 않았다. 아주 짧은 요 며칠 사이에 모든 것은 크게 변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자자..이게 마지막 입니다.”
밖에서 또 한번 인부의 목소리가 들리고, 옆집의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무언가를 운반하는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 끝 저 편으로 멀어져가는 느낌이 나자, 나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인애에게 해주었던 팔베게를 빼내었다.
인애의 체온에 길들여져 있던 내 맨몸에 삽시간에 닭살이 돋았다.체온이 떨어진 내 양팔을 쓱쓱 비비며 구석에 있는 속옷을 입었다. 옷걸이에 아무렇게나 걸려있는 트레이닝 복까지 입고는, 나는 인애가 아직 깨어있지 않을 것을 재차 확인하며 조용히 현관문을 열었다.
눈을 찌르는 햇살에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이마를 가렸다.이불 속에만 있다 나와서 몸은 쌀쌀했지만, 너무나 화창한 날씨였다. 조금 망설이던 나는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가, 복도에 있는 난간에 붙어서서 건물의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트드드드..
이삿짐 센터의 트럭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린다. 내가 수정이의 방에서 보았던 연두색 빛깔의 가구들이 차곡차곡 실려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눈을 돌리니 그녀가 있었다. 익숙한 넘버의 번호판, 고급 승용차의 운전석에 타면서 얼른 타라고 재촉하는 염문진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화사한 하얀 치마를 입은 수정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어버렸다. 수정이의 눈망울이 일순간 떨리는 가 싶더니, 그녀는 처음 전화번호를 물어보던 나를 보며 웃었던 그 미소 그대로 조금씩 미소짓기 시작했다.
‘잘가요.’
‘미안해요.’
우리는 서로 그렇게 입으로 말하고 있었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평소의 나라면 펑펑 울었을 텐데...나는 진심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를 향해 꾸벅 하고 인사를 한 그녀는 자동차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둘 사이에 무슨일이 생겼건...결국 그녀의 자리는 그의 옆자리였는지도 몰랐다. 오히려,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끼이이익.
매끈하게 미끄러지며 그녀가 탄 은빛 자동차가 골목으로 사라져갔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는 그녀. 바보같이 자신을 좋아했던 내 모습에 대한 마지막 배려일까? 수정이는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내 얼굴은 침대위에 있는 인애를 향했다. 내가 문을 열어 추웠는지 이불을 뒤집어쓰며 뒤척이는 그녀의 모습에 자연스레 미소가 걸렸다.
내 몸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늘상 집에 있을때 마다 입는 옷이라서 인지 주머니에 있는 천원짜리 지폐 몇장이 손에 잡혔다.나는 살짝 현관문을 닫았다. 이제 곧 인애가 일어나서 배가 고프다고 할테지. 이걸로 인애가 좋아하는 라면이라 사러 가야겠다.
인애가...아직 단꿈을 꾸며 잠든 사이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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