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잠든 사이에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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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소꿉놀이 하자!”
“소..소끕놀이?”
인애의 말에 나는 주춤거리며 망설였다.또래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러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을 보며, 내심 그 무리에 끼고 싶었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반대도, 찬성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응!갑자기 하고 싶어졌어.”
망설이며 인애의 까만 피부를 바라보았다. 흑진주 같은 눈망울을 굴리며, 인애는 놀이터의 바닥에 주저 앉고는 까맣게 그을린 작은 손으로 흙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아..알았어.”
“내가 아빠할게. 박재하 네가 엄마해.”
“왜..왜 내가 엄마를 해? 엄마는 여자가 하는 거잖아.”
“이씨! 그냥해!”
“아..알았어.”
나는 흘러내리는 콧물을 훌쩍 거리며 인애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인애는 나를 보며 갑작스레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보인다.
“뭐해? 다녀오셨어요 라고 해야지!”
“다..다녀오셨어요.”
하라면 해야 했다. 절대 안하던 소꿉놀이에 갑자기 꽂힌 모양인지, 인애는 내 대사까지 모두 정해주며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이럴때는 그저 하란대로 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아.다녀왔어. 밥은 준비했어?”
인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넥타이를 푸는 시늉을 해 보였다.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몰라서 또 한번 머뭇거린 나는, 이내 조용히 대답을 했다.
“네..준비했어요.”
“....”
이번엔 뭐가 불만인 걸까. 인애는 또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준비했냐고 물어봐서 했다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아니 그보다...소꿉놀이가 원래부터 정해진 룰이나 대사가 있었던가?
“아 뭐가 준비해! 우리엄마는 늘 준비 안한단 말야!”
“그..그럼 준비 안했다고 해야해?”
“응! 그리고 나서 이 인간 왜이렇게 늦었어! 또 룸싸롱에서 기집애들 더듬다 왔지! 라고 해야해.”
“...룸싸롱이 뭔데?”
“몰라. 우리 엄마 아빠는 늘 그렇게 말해.”
어른들의 세계를 모르는 나니 그저 머리를 긁적거릴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엄마,아빠는 안그러는데..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했다.
“아이 여편내가! 내가 무슨 맨날 룸싸롱만 다니는 줄 알아? 그리고 그게 다 접대야!”
인애는 일부러 굵은 목소리를 흉내내 가며 열연을 펼쳤지만, 정작 대본없이 그녀의 기호에 맞는 애드립을 쳐야만 하는 나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아..알았어요.”
한참을 망설이다 한 내 대답에 인애는 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접대는 무슨 얼어죽을 접대!’라고 받아쳐야 한다고 내게 설명해 주던 인애는, 이윽고 금세 흥미를 잃었는지 들고 있던 플라스틱 그릇을 멀리 던져 버린다.
“에이! 재미없어! 너랑은 소꿉놀이 안해.”
“미..미안해 인자야.”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고 나는 그저 사과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인애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때, 축구공을 들고 있는 아이들 몇명이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야!서인자! 축구할 건데 할래?”
“축구?”
고무줄에 묶인 인애의 머리카락이 휙 하고 돌아간다. 그녀는 만면에 화색을 띄며 벌떡 하고 일어나 손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내었다.
“할래!할래!”
“그럼 같이가자.”
동네 꼬맹이들의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던 인애가 갑자기 고개를 휙 하고 내 쪽으로 돌렸다. 나는 아까 인애가 시켰던 그 자세 그대로 얌전히 쪼그려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야..재하도 데려가자.”
“재하?”
인애의 제안에 그들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축구를 할건지 안할건지의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은듯, 인애는 보채듯 그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많이 하면 재밌잖아! 재하도 같이 하자.”
“아..박재하는 축구 못해서 싫은데..”
“뭐가 못해! 재하도 잘해!”
인애가 덤벼들듯 말하자 녀석은 주춤주춤 물러나며 머리를 긁적거린다. 인애의 앞에 서면 모든 남자애들의 반응이 저렇게 하향 평준화 되는 것일까?
“아..알았어.깍두기 정도면 괜찮겠지.”
그의 말에 옆에 있던 몇몇의 아이들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나는 인애가 손짓하는 모습에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자자..빨리 하러가자. 빨리 안하면 형들한테 운동장 뺏길거야.”
한녀석이 들고 있던 축구공을 바닥에 던지고는 발로 툭툭 건들면서 어설프게 뛰기 시작했다. 뻘쭘한 분위기에 머리를 긁적거리던 나는, 이내 무언가에 이끌려 팔이 쭈욱 하고 뻗어졌다.
인애의 까맣게 그을린 피부. 그리고 유난히 하얬던 그녀의 손바닥이, 내 팔목을 꼭 쥐고 있었다.
-
“다시한번 생각해 봐라.”
“후회할 짓 하는거야 임마.”
“꼭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해야겠냐?”
“아..박재하 너의 삽질은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구나.”
경험에서 우러난 유부남 형들의 따뜻한(?) 덕담과,평생을 솔로로 사는 것이 꿈인 준혁이 형의 가슴 뭉클한(?)조언을 들으며 나는 빠알간 카펫이 깔린 복도에 어정쩡하게 섰다.
젠장..턱시도라니..나는 평생 정장 안입을줄만 알았었다.오죽하면 내 큰 고민이 ‘내가 유명한 작곡가가 되어 가요대상 작곡가 상을 타러 갈때는 정장을 어떻게 입지?’ 였을 정도니, 내가 지금 몸서리치게 불편해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결혼은 인륜지대사라 했는데....
나는 낯선 사람 한명없는 하객들을 둘러보았다.인애의 지인들이야 훤히 다 알고 있으니,결혼식이라기 보다 동네 모임 같았다. 어렸을때 인애만 축구시합에 껴주던 꼬맹이 시절 동네 친구 녀석들까지, 이제는 훌쩍 큰 어른이 되어 나와 인애를 보며 낄낄 거리기 바빴다.
“아이고..재하 아부지.좀 일어나요!”
맨 앞자리, 연신 머리를 뒤로 늘어뜨리며 잠에 빠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니 한숨이 푸욱 하고 나왔다. 아..아무리 아는 사람들끼리의 결혼이지만 긴장감이 없잖아 긴장감이! 한 쪽은 좀 울기라도 하던가! 이게 무슨 결혼이야! 동네 마을회관에서 돼지 잡는 거지...
하지만 그 반대편에 자리한 인애 어머니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것이, 어젯밤 인애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밤 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시며 화투판을 벌이셨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결혼 전에 정중하게 만나 내숭떨어야 하는 것이 사돈관계인데, 나와 인애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웃 사촌이었던 사람들이 사돈이 되었으니 그런 긴장감은 이미 쿨하게 버린지 오래였던 거다.
“꺼으으윽.”
“.....”
내 옆에서 걸쭉하게 들려오는 트름 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밀려드는 엄청난 술냄새가 내 얼굴을 더 창백하게 탈색시켰다.신부가 너무나 ‘아름답다’라는 말은 들어본적 있어도 신부가 ‘트름했다’라는 말은 들어본 역사가 없는 내 입가에는 긴 한숨이 걸렸다.
인애는 자신의 피부보다 더 하얀 면사포에 가려져 있었다. 단 한번도 본적없는 짙은 눈화장을 하고, 진한 볼터치를 한 그녀의 얼굴은 작고 예뻤지만, 신부 답지 않은 시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긴 속눈썹이 불편하다는 듯 연신 눈을 깜박거렸고, 자신의 허리를 타이트하게 조인 드레스의 허리부분을 자꾸만 잡아당기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야...서인애..너 어제 술마셨냐?”
“아..조금.”
“조금 먹은 술냄새가 아닌데..”
“그냥 조금 먹었어. 친구들이랑 ‘처녀파티’를 좀 하느라.”
“...........”
보..보통 남자들이 장가가기 전에 하는 ‘총각파티’라는 게 있는거 아니었니? 처..처녀 파티라니..일반적인 신부들은 내일 얼굴이 부으면 어쩌나 하면서 피부 맛사지를 하는것은 모르는 거니? 니가 날씬하니 망정이지..보통 신부들은 너처럼 결혼하기 전전날에 밤새 방송국에 있으면서 야식으로 보쌈을 쳐먹지 않는단 말이다! 몸매 관리하느라 저녁도 안먹는다고!
마음속에 계속 메아리치는 외침들은 그냥 속으로 삭혀야 했다. 국내 최초로 결혼식날에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에게 낭심을 걷어차이는 신랑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조금 억울한 것이, 결혼 전날 술을 마신 인애는 드레스를 입고도 날씬한 허리라인을 뽐내고 있는것에 비해, 결혼식이라고 한숨도 못잔 나는 턱시도를 입고도 노숙자 느낌이 충만하다는 것이었다.
“그럼..지금부터 신랑 박재하 군과, 신부 서인애양의 결혼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랑 입장.”
내 요청에 의해 사회를 떠맡게 된 준혁이 형도 어이가 없었는지 얼른 식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반주자의 고운 피아노 선율이 식장에 울려퍼졌고,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물론 나이스 타이밍으로 뒤에서 ‘꺼어억’하는 걸출한 트름소리를 듣고 넘어질 뻔 하긴 했지만 말이다.
보통은 이렇게 걸어나갈때 많은 생각을 한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도망치는게 마지막 기회야..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다고 했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20년지기 친구와 백년가약을 맺게 된 나로선 많은 생각이 교차할 수 밖에 없었다.
박재하와 서인애의 결혼.
우리를 잘 아는 친구들은 물론, 지인들도 까무러치게 놀라며 뻥치지 말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 대부분이었다.심지어 인애의 부모님은 배를 잡고 웃으시면서 ‘내 평생 이렇게 골때리는 유머는 처음이다’라는 반응을 보이시기 까지 하셨었다.
내 친구. 내 여자. 그리고 이제는 내 아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될 그녀의 얼굴은, 비록 숙취에 허덕대는 얼굴이었지만 아름다웠다. 어렸을때 까만 서인자의 모습은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하늘하늘한 몸매가 드러나는 인애의 드레스는 잠시나마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신부 입장.”
통상적으로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식장안으로 울려퍼지는 훈훈함이 연출되어야 하나, 그것과는 반대로 예식장 안의 하객들은 연신 킥킥 거리기 바빴다. 심지어 멘트를 내뱉은 준혁이 형도 웃음을 참느라 마이크를 손으로 막고 고개를 숙여 버린다.
아...아직도 전날 우리 아버지와 술을 꺾으신 인애의 아버지는 딸과 함께 숙취로 비틀대고 계셨다. 딸을 사위에게 넘겨주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고, 그 딸은 보통 다소곳이 신랑의 손을 잡는 아주 일반적인 아름다운 모습따윈 내 머릿속에서 산산히 부숴지고 있었다.
인애의 손을 건내 받은 나는 표정관리를 하려 애를 써야 했다.인애의 아버지는 흡사 귀찮은 물건을 맞기듯이 내게 인애의 손을 건내주고는, 역시 위가 쓰린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가셨던 것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양가의 어른을 모시고...”
“끅!”
난데 없이 들려오는 신부의 딸꾹질 소리에, 주례를 담당하셨던 우리 둘의 고등학교 은사님께선 당황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응시했다.철면피 서인애도 이번만큼은 조금 찔렸던 모양인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아..내 아름다운 결혼식...이미 물건너 가버린 희망사항일 뿐이로구나.
-어우씨..진짜 죽겠다.-
조용히 들려오는 그녀의 중얼거림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진짜 죽겠는건 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와 버렸다.처음 드레스를 고르러 갔을때에, 잠시 시착을 해본 인애의 모습을 보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옷을 보고 나오자마자 뽀뽀를 해달라고 졸랐다가, 그녀의 악력에 목이 졸렸던 아름다운 기억마저도.
만감이 교차해 왔다. 결혼이라는 것을 꿈꿔본적은 있지만, 그 상상속의 결혼식에서 등장하는 신부의 자리에 인애가 있을거라고 상상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성인이 되어 진화라는 말까지 나올정도로 예뻐진 인애의 모습을 보고도, 그녀가 내 연인으로서, 그리고 반려자로서 내 옆에 서게 될 줄은 진심으로 몰랐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내 옆에서 어정쩡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인애의 모습이, 원래 거기에 딱 맞게 설계된 부품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잘려나간 스케치북의 귀퉁이를 딱 맞춰, 하나의 수채화를 완성시킨 듯한 기분이었다.
은사님까지 당혹스럽게 했던 결혼식은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물론 중간에 주례사를 듣던 인애가 꾸벅 하고 졸아서 넘어질 뻔한 것을 잡아당기는 헤프닝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녀가 마신 술의 양에 비해 엄청난 건수는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내빈에게 인사가 끝나고, 축가의 시간이 되자 하객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작곡가와 함께 일하는 덕분에, 요새 아주 잘 나가는 가수가 축가를 부르기 위해 우리둘의 앞에 섰기 때문이었다.걔중에 개념없는 하객-물론 인애의 친구였다-은 꽥꽥 거리는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있었다.
“두 분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리겠...습니다.”
싱긋 웃으며 인사를 하려던 그는 인애의 표정을 보고는 잠시 멈칫 하더니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래..이해한다. 네가 축가를 부르러 얼마나 다닌지는 모르겠다만, 아마 저런 속 거북한 신부의 표정은 너도 처음보는 거겠지.
조용히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그래도 역시 프로는 다른 모양인지, 그는 금세 감정을 잡고는 살짝 눈까지 잡아주는 쇼맨쉽을 발휘했다.
“Whenever I"m weary from the battles that rage in my head…”
아아.참으로 아름다운 노래였다.리차드 막스의 명곡. 평범한 선곡이지만 좋구나. 그래. 이런거로라도 기분을 내야한다! 인애 너도 여자라면, 아니 사람이라면 저 가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로맨틱해진 마음을 살포시 다 잡으며 가슴뭉클한 촉촉한 시선을 내게 보내주겠지?
“I lose my way but still you seem …..to understand.”
이번엔 노래를 부르던 그가 박자를 놓쳐 버렸다. 나 역시 인애의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푹 하고 내쉬며 밀려들어오는 창피함에 고개를 떨궈 버린다. 감미로운 이 팝을 들으며, 우리의 서인애는 드레스위의 배부분을 벅벅 긁고 있었다.그것도 신부가 끼는 하얀 장갑까지 벗어들고.
결혼식장에는 점점 쿡쿡 거리는 소리가 짙어지기 시작했고, 참을대로 참은 우리 아버지는 아예 팔짱을 끼고 주무시고 계신다.아아..한번뿐인 내 결혼식이..로맨틱 해야 하는 내 결혼식이...자꾸만 망가져서 정말...
미치겠다.
-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태어나서 외국이란곳을 처음 와보니 모든것이 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꼬부랑 글씨들과 한문들이 나를 약간 당황하게 했지만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끄어어어억.”
...바로 이것이었다.
“아 술이 안깨네..죽겠다.”
“결혼 전날 그렇게 술퍼먹는건 너밖에 없을거다.”
“그게 이 누나의 매력 아니겠니?”
말을 말자...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트렁크까지 챙겨들었다.두꺼운 화장을 지우고, 어느새 내가 늘 보아왔던 하얀 맨얼굴로 후드를 뒤집어 쓴 인애의 얼굴은 매우 지쳐있는 듯했다.
결혼이란 거 생각보다 엄청 힘든 것이었다.맨정신인 나도 힘들었으니, 반쯤 취해있는 인애는 아마 죽을 맛이었을 거다.그래도 그나마 결혼식장에서 막말 안한게 어디야..하면서 안심하는 내 모습이 사뭇 처량한 이유는 뭘까?
신혼여행지로 그녀가 선택한 곳은 일본이었다.보통들 동남아로 가는 마당에 무슨 일본이냐고 물었더니,자기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제 2외국어가 일본어라고 한마디로 일축해 버리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또 덜컥 찬성을 해 버린 거였다.
“와..근데 경치는 죽인다.”
“당연하지.오키나와는 일본 내에서도 로망이라고 불리는 관광지인데...”
그래..다 좋은데..그 로망이라는 관광지에서 술냄새 잔뜩 탑제한 거친 호흡을 몰아쉬는 너를 지금 주변 일본인들이 힐끔 거리면서 쳐다보는거 모르겠니? 하지만 인애는 그런것들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미리 예약한 호텔로 걸음을 향할 뿐이었다.
“아..들어가서 좀 쉬자. 아주 죽겠다.”
“엥?오늘은 관광안해?”
“관광은 무슨 얼어죽을..속이 뒤집어 지는구만. 너도 피곤하잖아. 곧 어둑어둑 해질거고..들어가서 자자.”
“응..?”
나에게 트렁크 두개를 맡겨 놓고는 가벼운 가방하나를 들고 털레털레 걸어가는 인애를 보며 나는 침을 꼴깍 하고 삼켜버렸다. 자..자자는 것은..지금 이..이게 말로만 듣던 그 첫날밤이란 말인가!
가슴이 콩닥 거렸다. 지금까지 살면서 지겹게 봐왔던 인애의 뒷모습이 비키니를 입은 섹시한 모델의 뒷태로 오버랩되는 괴현상까지 일어났다.암! 그래야지. 신혼여행의 꽃은 첫날밤이라고 늘 들었으니까 나도 꽃을 피워야 한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애는 미리 잡아두었던,바다가 보이는 고급스런 호텔의 로비쪽으로 걸어들어갔다.뒤에서 트렁크 두개를 낑낑 거리며 끌고오는 나와 속도를 맞춰줄 생각은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를 쏼라쏼라 거리며 호텔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인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팅하는데 몇시간은 소요되었을 그 머리를 그대로 묶어버린 그녀의 턱선은, 인애가 뭐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부드럽게 움직이며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비록 지금은 숙취와 싸우고 있는 중이긴 했지만,화장을 지운 그녀의 얼굴은 두터운 신부화장을 했을때 보다 몇 배는 더 빛나보였다.
하하하.우스웠다. 인애에게 예쁘다는 형용사를 사용한것도 우스운데, 나는 지금 그녀와 평생을 약속하고 신혼여행에 와있는 것이다. 그 누가 상상했을까? 평생을 함께 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것이 친구로서가 아닌 부부로서 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얼떨떨한 기분이 들어왔다.
“우와아..”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호텔은 커녕 모텔..아니, 여인숙도 가본적 없는 나로서는 호텔의 스위트룸을 처음 봤을때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넓직한 방에는 안락한 더블베드가 자리했고, 볕이 들어오는 창가로는 하얀 거품이 일어나는 파도가 석양의 붉은빛에 물들어 와인색깔을 띄우는 것 역시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인애는 흡사 녹아내리는 젤리처럼 그대로 침대위로 허물어져 버렸다. 그리고는 급속도로 그녀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인애가 입고 있던 후드자켓이 공중으로 붕 하고 날아가 바닥에 쳐박혀 버렸다.
긴 자취생활에서 형성된,실로 자연스러운 동작이 아닐수 없었다.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곤충이 허물벗는 모습을 고속으로 돌려 보여주는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저기..인애야.”
“...왜에...”
“안씻어?”
“귀찮아.”
어..어라?이게 아닌데. 내 상상속에서는 그래도 첫날밤이라 하면, 신랑 신부가 거품샤워를 마친후 촉촉한 물기를 서로 공유하며 뜨겁게 껴안는 것인데...내 생각따윈 전혀 생각안하고 있을 인애는, 안에 민소매 티셔츠 한장을 입었을 뿐인지 엎드린 채로 하얀어깨를 드러내고 있었다.
‘응?’
샤워 전 갈아입을 옷을 찾으려 트렁크 안을 뒤적거리던 나는 간이 향수병같이 생긴 작은 스프레이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 검지 손가락 만한 그것은 검은색의 불투명한 병이었고, 표면에는 힘차게 갈기를 휘날리는 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야야.이거 챙겨라.-
-이게 뭔데요?-
-뜨거운 첫날 밤을 위한 준비물이라고나 할까.그녀의 대한 예의라고나 할까.-
-...뭔데요.-
-그냥 임마 샤워하고 나서 고추에 싹싹 뿌려. 아마 깜짝 놀랄 거다.이 엉아가 주는 선물이야 임마.-
-고..고추에 이걸 왜 뿌리는 데요?-
-너의 원만한 결혼생활을 위해서지.-
그러고보니 결혼전날에 준혁이 형이 건내주며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근데 도대체 이걸 왜 내 거시기에 뿌려야 하지? 아무리 물어봐도 그냥 ‘뿌려보면 안다’라고 딱 잘라버린 준혁이 형 때문에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도 그것을 챙겨온 것이었다.
“크으으응...”
순간 정체를 알수 없는 고추 스프레이(?)와 옷을 들고 욕실로 가려던 내 귓가에 너무나 익숙한, 허나 호텔에 도착하고 10분안에 듣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그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쩝...음냐...”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간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뒤로 돌아누운 인애는 시원하게 코를 골며 입맛까지 쩝쩝 다시고 있었다. 가슴부분이 살짝 패인 하얀 민소매 티셔츠의 헐렁한 틈바구니 사이로 뽀얗게 뭉그러진 그녀의 적당한 볼륨이 내 시선에 가득 들어왔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현재 상태는 애로티시즘을 느끼기엔 너무나 거리가 먼 듯했다.
가만히 누워 인애가 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늘상 힘든 방송국일에 찌들어 우리집에서 신세를 질 때에도 늘 이렇게 곤히 잠들어 있었지..거기에 술까지 마시면 속옷에 손을 넣어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자곤 했던 인애의 모습에 왠지 모를 측은한과 흐뭇함이 뒤섞여 몰려들었다.
쩝...그건 그렇다 쳐도 뭔가 아쉬웠다.아무리 우리가 강산이 두 번 바뀔 세월동안 친구로 지내왔지만, 짧은 연애기간을 갖고 결혼까지 했는데 첫날밤을 치룰수 없다는 것에 아쉬움이 몰려 들었다.
무엇에 이끌리듯 고개를 내려 그녀의 살짝 마른 입술에 입을 맞췄다.삽시간에 미간을 구기며 뒤돌아 눕는 그 모습이 예뻐서 웃음이 나왔다.
얇은 이불을 꺼내어 덮어주고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일어났다. 결혼식이라는 일련의 과정들은 너무나 피곤했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고 뿌듯했다. 잠들어 있는 인애의 모습을 하루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나는 얌전하게 자는 그녀의 모습에,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신혼여행 첫날밤부터 곤히 골아 떨어지신 인애씨를 뒤로하고, 잠이 오지 않았던 나는 밖으로 나왔다. 일본어라고는 야한 동영상에 나오는, 그 누구라도 다 안다는 그 말밖에 하지 않는 내가 인애없이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지만, 가만히 호텔방에 있기에는 약간 좀이 쑤시기도 했고 무료하기도 했다.
내가 간 곳은 호텔에 있는 조그마한 바(bar)였다.노곤하게 샤워를 하고, 샤워후에 로맨틱한 첫날밤을 보내는 것 대신에 선택한 대안치고는 약간은 초라했지만 별 수 없었다.너무 피곤하면 오히려 잠이 안오는 나로서는, 술이라도 마셔야 그녀의 옆에서 잠을 청할수 있을것 같았다.
“아..음...이거...디스...오케이?”
다행히 바에서 마시고 싶은 술을 시키는 것 정도는 바디랭귀지와 국제 공용어 옹알이로 해결되는 아주 손쉬운 것인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쌉싸름한 소주를 마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나는 생맥주 사진을 가리키며 연신 갖고 오라는 수신호를 해보였고, 바텐더는 곧 하얀 거품이 일어나는 생맥주 한 잔을 테이블위에 올려주었다.
“크하아!”
이럴줄 알았으면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오는 건데. 결혼식을 해서 욱신거리기 까지 하는 내 몸은 맥주 한 잔에 뻥하고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맥주...맥주라. 문득 몇 개월 전의 그 날이 떠올랐다.소주를 마시지 못하는 수정이와 처음으로 술자리를 가졌던 그 날. 그녀에게 자작곡을 선물했고, 온종일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와 함께 집에 왔던 그 날 말이다. 수정이는 지금쯤 뭘하고 있을까?
인애는 소주, 수정이는 맥주. 좋아하는 술에서부터 인애와 수정이는 반대말 이라 규정지어도 좋을 만큼 서로 극명하게 다른 여성들이었다.이사를 갔던 그 날이후로 단 한번도 연락이 없었던 수정이의 모습이 이제와 새삼스레 궁금한 내 마음이 조금은 웃겼다. 그때 타이트 하게 붙잡았다면 내 것을 만들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하는 회한과는 솔직히 거리가 멀었다.한 치의 망설임없이 인애를 택한 것은 나였고, 그녀 역시 내가 아닌 자신에게 몹쓸짓을 했던 그 녀석을 선택한 것이다.결국엔 서로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갈 길을 걷고 있는...아주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다.
맥주맛이 달았다.일본의 맥주는 기가 막히다고, 소주 예찬론자 인애마져도 인정했던 것은 역시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닌 것이었다. 피곤함 때문에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내 뱃속으로 꾸역꾸역 맥주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한국 분?”
얼마나 지났을까. 일본어가 아닌 아주 낯익은 억양의 말투가 내 옆에서 울리고 있음을 인지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약간은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곱게 웃는 눈웃음이 나를 향해 있는 한 여자가, 풍성한 머리결을 반대쪽 어깨로 넘기며 내게 묻고 있었다.
“에...?”
나도 모르게 얼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풍성한 가슴이 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민소매 티셔츠를 입어, 그녀의 동그라한 가슴의 파장선은 내 눈앞에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그래도 바닷바람이 차가워서 일까? 예의상 니트로 되어 있는 얇은 가디건을 걸쳤지만 그 부위에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맞군요?한국사람.”
여자...그제서야 여자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음을 인지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똑한 콧날 밑으로 미소를 짓는 그녀는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서구적 미인이었다. 결혼을 하고도 여자 앞에서는 말문이 막히는 그 버릇이 어디가지 않은 모양인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연신 상황파악을 하기에 바빴다.
“한국말 할 줄 몰라요?”
“아...아뇨.”
“풉!”
뭐가 재밌는지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뭐지? 이 여자는 어째서 내 옆에 자연스레 앉아 술을 주문하는 거야? 그것도 헐렁한 티셔츠의 앞섬이 내려가며 계곡까지 은근히 보여주면서...
“절 아세요?”
“아뇨.왠지 한국분같아서...불쾌하시면 일어날까요?”
“아..아뇨 그게 아니고..”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되는데 나는 거세게 손사레까지 치면서 그녀의 말을 거부했다. 씨익 웃는 그녀의 가냘픈 허리가 꽉 조여진 가디건의 단추때문에 도드라져 보였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평생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던 역사가 없는 나로서는, 도무지 파악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여행 오셨어요?”
“아...네.”
신혼여행이요...라는 말은 딱 잘라먹고 입안으로 꿀꺽 삼켰다.이...이게 남자의 본능인건가? 알 수 없는 죄책감에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그때에, 그녀가 은근슬쩍 내 옆으로 조금씩 다가오는 듯했다.
“귀엽네요?”
“네?”
나는 궁지에 몰린 강아지처럼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내 얼굴 가까이 붙는 그녀를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조금만 눈망울을 내리면 테이블위에 얹혀진 그녀의 가슴이 보일 것 같아서였다.
“혼자왔나 봐요?나도 혼자 왔는데...”
“아..그..그러시군요.”
제 와이프는 호텔에서 자고 있는데요...라는 말 역시 또 한번 꿀꺽 삼킨다.내가 도대체 왜이러지? 그리고 이 여자는 왜 갑자기 내게 와서 이러는 거지? 내 옆머리 턱선을 타고 정체불명의 땀 한줄기가 흘러내린다.
“저는 수진이라고 해요. 이 호텔에 머물어요?”
“아..저는 박재하입니다.......근데 질문이 뭐였죠?”
내 얼빠진 되물음에 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씨익 웃었다.왠지 모르게 색기가 흐르는 미소인것 같아 삐질삐질 땀이 나왔다.
“이 호텔에 머무냐고 물었어요.”
“아...아 예. 여기서 머물고 있어요.”
“어머. 나둔데...재밌는 우연이군요?”
당연히 호텔에 있는 바니까 그 호텔 투숙객이 오는것은 당연한 것일텐데...수진이라 밝힌 그녀는 요염한 미소까지 띄우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뭐..뭐야 이거..좀 무섭잖아.
“내 방은...301호인데...제 방에서 한잔 하지 않을래요?”
“네에?”
나도 모르게 수직상승하는 억양때문에 바에 있던 인원들은 잠시 내 얼굴을 응시했다가 도로 자신들의 파트너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지나치게 놀라는 내 모습에 그녀는 쿡쿡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이 여행 마지막 날인데...그 쪽에 관심이 있어서 그래요. 30분정도만 기다릴 거니까...와서 노크해 줘요. 알았죠?”
“아..아니..그게..”
왜 말을 못해! 나는 유부남이라고...호텔방에는 오늘 백년가약을 약속한 와이프가 있다고 왜 말을 못하는 거냐! 라는 질책은 사라지고, 대신에 내 시선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요염하게 바를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었다.
벌컥벌컥.
상황정리가 되지 않아 눈앞에 반쯤 남아있는 생맥주를 원샷으로 넘겨 버렸다. 이..이거 미국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장면 아닌가? 나 몇호실에 있어요 하면서, 글래머의 미녀가 주인공에게 넌지시 귀띔해 주는 장면. 그리고 그 날에 불같은 하루밤을...헉!
심장이 쿵쿵 하고 뛰었다. 준혁이 형이라면 이게 왠 떡이냐!하면서 우샤인 볼트의 속력으로 그녀의 방까지 뛰어 갔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이런일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인지라 얼떨떨 하기만 하다. 분명 인애는 내 방에서 자고 있는데...어째서 평생 받아보지 않았던 제의를 신혼여행지에서 받는 거지? 그것도 저런 미인에게!
아주 고전적인 방법으로 볼까지 꼬집는 내 모습을 보며, 돌아이를 보듯 바라보는 바텐더의 눈길에 괜시리 머쓱해졌다.
“아..아리가또!”
술값을 바위에 올려두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장실로 가서 맥주의 흔적을 내려보내던 나는 급하게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 틀림없다! 이것은 분명 평생 연애도 제대로 못하고, 20년이상 잡혀살았던 여자에게 장가를 드는 내 모습이 딱해서 신이주신 단 한번의 기회인거다! 그래서 로맨틱함의 최절정인 첫날밤에 넉다운이 된 신부를 두고 이 곳에 와서 맥주를 마시도록 결심하게 한 것이 틀림없어!’
분명 맥주를 연거푸 마셔서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그래!눈이 맞는 것도 아니고...잠깐 호텔방에 가서 술 한잔 하는 거잖아?게다가 그녀는 오늘이 마지막 이라 했으니 정말로 오늘만 지나면 쿨하게 끝나는 그런 것일수도?
생전 안하던 지저분한 합리화를 잔뜩 등에 지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술집의 문을 나섰다.반짝반짝 빛나는 호텔의 바닥면을 미끌어지듯 성큼성큼 걸었다. 그래! 서인애! 이건 너의 불찰인 거다! 신혼여행 와서 코를 곤 너의 치명적인 불...허억!
엘레베이터가 있는 프론트로 걸어가며 인애에게 들리지 않는 선전포고를 하던 나는 그대로 헛숨을 집어 삼키며 돌려던 코너로 도로 숨어버렸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이...이게 어찌 된 일이지? 어째서 저 수진이라는 여자가 프론트에...그것도 인애와 함께 서있는 거냐!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빼꼼히 눈만 내밀어 코너 밖의 정경을 살폈다.어느새 잠에서 깬 인애는 잔뜩 부은 얼굴을 큰 선글라스로 가리고는, 수진이라는 여자가 하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흡사 고 2일진 언니에게 보고를 하는 1학년 짱의 모습을 풍기는 것만 같았다.
“흠...그러니까...니가 호텔방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이거지?”
“네 언니. 그냥 넘어온것 같던데요?”
“아놔...이 새끼를 진짜...”
죽음의 공포가 온몸을 엄습했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뭔가 이상했어! 단 두 세마디 나누고 나서 자신의 호텔방으로 오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점점 풀려오는 다리를 힘껏 꼬집으며 그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오키나와에 가기로 했을 때부터 너한테 전화걸어서 준비하라고 했는데... 이 인간이 첫날부터 바를 줄은 몰랐다.”
“언니랑 같이 잔거 아니에요?”
“아니.나만 잤지. 문 소리가 나서 일어나 보니까 이 자식이 어딜 나가데? 내가 그래서 급하게 너한테 전화한거 아니냐.”
이제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잔인한 서인애는 미리 끄나풀을 신혼여행지에 심어뒀던 거다! 아..정확히 말하자면 신혼여행지에 있는 지인을 첩자로 고용한 것이겠지만...
하얗게 질린 내 얼굴위로 비오듯 땀이 쏟아졌다.손을 꺾으며 뿌드득 하는 뼛소리를 내는 인애의 주먹이 오늘따라 흡사 바위처럼 크게 느껴지며 윗니 아랫니가 서로 딱딱하고 부딪히고 있었다.
“근데...언니.”
“왜.”
“근데 그 분 진짜 언니 신랑 맞아요?”
“응. 그건 왜 묻냐?”
“아니 저는 언니 눈이 높은줄 알았는데...”
그녀의 말에 인애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 모습에 확 하고 쫄아드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닌 모양인지, 수진이라 밝힌 그녀도 살짝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박수진 너 많이 컸다...”
“아..어..언니 죄송해요..”
“뭐 됐어. 여튼 30분내로 오라고 했으니 그 인간이 니 방으로 가겠지. 내 방으로 안오고 니 방으로 가면 내가 급습할 테니까 시간좀 끌고 있어.”
“네 언니!”
수진은 충성스러운 부하의 표정을 지어보이며 인애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아아...난 오늘 죽음의 문턱에서 유턴한 거로구나! 술기운에 그녀의 방까지 좋다고 따라갔으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었다.
“근데 형부가 제 방으로 오면 어쩌시게요?”
“뭘 어째. 일단 아이만 낳고 거세시켜 버릴거야.”
“.....”
나는 믿는다. 분명 신은 존재한다는 것을. 교회도 절도 다니지 않는 나는 이름모를 신에게 연신 감사를 드리면서, 후들후들 거리는 다리를 꼭 쥐고 있었다.
-
-박재하! 서랍에 보면 대본있거든? 그거 점심시간 내로 가져와. 급해!-
이 칠칠이 서인애...속으로 연신 꿍시렁 거리면서도 나는 이미 방송국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지가 오라면 와야 하는 종인거냐! 라고 말을 하고 있었지만, 몸은 분주하게 옷을 갈아입고 시계까지 바라보는 완벽한 언행불일치를 행하고 있는 내 모습에 한숨이 푸욱 하고 나왔다.
그녀와 나의 신방은 여의도에 위치하게 되었다.이제 막 신인작곡가로 대뷔해서, 저작권 협회의 맨 끝자락에 이름을 올린 나도 여의도에 있는 준혁이 형의 작업실을 같이 쓰게 되었으니 어찌보면 일석이조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재하씨. 그 노래 진짜1년전에 써두었던 거 맞아? 조금만 다듬으니까 진짜 괜찮던데?왜 그런 노래를 꼭꼭 숨겨두고 있었던 거야?-
내 곡을 산 신인가수의 기획사에서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팔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수십번 고민하고, 결국은 작곡가로서의 데뷔곡이 된 노래는 내가 수정이를 위해 썼었던 ‘당신이 잠든 사이에’였다.
작사는 내가 하지 않았는데...기가 막히게도 사랑고백하는 노랫말이 붙여져, 그것은 요새 가장 주목받는 신인의 타이틀 곡으로 팔려버렸다.절대 팔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내가 그 노래를 팔았던 이유가 뭘까? 어찌보면 수정이의 모습이 완벽하게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는 무형의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대본이 들어있는 서류봉투를 들고 터덜터덜 길을 나섰다.점심시간까지라고 했으니 걸어가도 충분할 것만 같았다. 서울에서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산 대부분의 기간이 이 근처였으니 걸리는 시간은 눈감고도 측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좁디 좁은 골목과 몇 개의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면, 인애가 몇년째 일을 하고 있는 그 방송국 앞으로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응?’
트레이닝 복을 입고 쫄레쫄레 걸어가던 내 발걸음이 저절로 뚝 하고 멈춰 서졌다. 너무나 익숙한 오르막길과, 그 골목의 끝에 위치한 작은 건물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대로였다. 물론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왠지 내 기억속 아련한 곳에서는 몇년전으로 인식하고 있는 그 건물의 변함없는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살던 그 방. 짧지만 많은 일들이 있었던 아련한 기억들의 고향인 그 곳을 두 눈 가득 담아보았다.
여전히 나란히 붙어있는, 예전에는 나의 집과 수정이의 집이었던 208호와 209호의 모습들이 보였다. 수정이의 남자친구였던 그 남자의 차 미등을 뚫어져라 바라봤던,당시 내가 몸을 숨겼었던 그 전봇대의 모습도 . 그리고 인애를 업고 한발 한발 걸음을 내딛었던 작은 언덕길 까지도.
나를 멍하니 젖게 한 상념속에서, 수정이의 모습이 환상처럼 나타나 내 앞에 선다.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조용한 골목길 그 집앞에서, 그녀는 긴 생머리를 옆으로 넘기며 친절해 보이는 눈웃음을 짓고 내 앞에서 있었다.
‘행복 한가요?’
상념속의 그녀는 그렇게 묻고 있는 듯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만, 그녀의 작은 입술은 내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이의 모습은 내게 알 수 없는 미소만을 가득 보인채로 그렇게 내 앞에 투영되었다.
사람은 행복을 위해 사는게 아니에요. 불행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뛰는 것 뿐이야...하지만,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해요 라고, 모습이 보이지 않는 허상속의 그녀에게 난 몇번이고 되뇌이고 있었다.
그렇게 수정이의 환상은 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마지막 이사를 하는 날에 내게 눈으로 물었던 그 모습처럼.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수없이 삼키며 내 머리 속 공간에서 완벽하게 사라져 갔다. 예전이라면 몇 번이고 꺼내고 들추었을 그 추억을 꾹꾹 묻어두며 몸을 돌렸다.
애초부터 수정이는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처음에 수정이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인애와는 다른여자’였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점점 크게 자리를 잡는 인애라는 틀을, 친구라는 선으로 규정하고 두려워 했다. 그래서 은연중에 수정이를 ‘인애와의 반대말의 조합’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그것을 사랑하는 척 바보짓을 해왔던 거였다. 인애가 내 맘속에 있던 것이..죄악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그렇게 나는, 수정이도 인애도 잠든 사이에 이율배반적인 상반된 꿈속에서 걷고 있었다.꿈이 깨었을 때는 현실이 보였고, 그 현실의 끝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수정이가 아닌 인애의 웃는 얼굴이었다.
입안가득 미소를 띄우며 걸음을 재촉했다. 저 멀리 인애가 있는 방송국의 건물이 보였다. 초겨울이지만 따뜻한 날씨에, 걷고 있는 내 걸음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오늘은 인애와 함께 점심을 먹어야 겠다. 고급스런 식당, 정체를 알 수 없는 손씻는 물과 립이 나오는 그런 곳 말고 그녀와 내가 좋아하는 감자탕을 말이다.
오늘따라, 인애의 하얀 얼굴과 미소가 너무나 보고싶었다.
“소꿉놀이 하자!”
“소..소끕놀이?”
인애의 말에 나는 주춤거리며 망설였다.또래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러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을 보며, 내심 그 무리에 끼고 싶었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반대도, 찬성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응!갑자기 하고 싶어졌어.”
망설이며 인애의 까만 피부를 바라보았다. 흑진주 같은 눈망울을 굴리며, 인애는 놀이터의 바닥에 주저 앉고는 까맣게 그을린 작은 손으로 흙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아..알았어.”
“내가 아빠할게. 박재하 네가 엄마해.”
“왜..왜 내가 엄마를 해? 엄마는 여자가 하는 거잖아.”
“이씨! 그냥해!”
“아..알았어.”
나는 흘러내리는 콧물을 훌쩍 거리며 인애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인애는 나를 보며 갑작스레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보인다.
“뭐해? 다녀오셨어요 라고 해야지!”
“다..다녀오셨어요.”
하라면 해야 했다. 절대 안하던 소꿉놀이에 갑자기 꽂힌 모양인지, 인애는 내 대사까지 모두 정해주며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이럴때는 그저 하란대로 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아.다녀왔어. 밥은 준비했어?”
인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넥타이를 푸는 시늉을 해 보였다.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몰라서 또 한번 머뭇거린 나는, 이내 조용히 대답을 했다.
“네..준비했어요.”
“....”
이번엔 뭐가 불만인 걸까. 인애는 또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준비했냐고 물어봐서 했다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아니 그보다...소꿉놀이가 원래부터 정해진 룰이나 대사가 있었던가?
“아 뭐가 준비해! 우리엄마는 늘 준비 안한단 말야!”
“그..그럼 준비 안했다고 해야해?”
“응! 그리고 나서 이 인간 왜이렇게 늦었어! 또 룸싸롱에서 기집애들 더듬다 왔지! 라고 해야해.”
“...룸싸롱이 뭔데?”
“몰라. 우리 엄마 아빠는 늘 그렇게 말해.”
어른들의 세계를 모르는 나니 그저 머리를 긁적거릴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엄마,아빠는 안그러는데..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했다.
“아이 여편내가! 내가 무슨 맨날 룸싸롱만 다니는 줄 알아? 그리고 그게 다 접대야!”
인애는 일부러 굵은 목소리를 흉내내 가며 열연을 펼쳤지만, 정작 대본없이 그녀의 기호에 맞는 애드립을 쳐야만 하는 나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아..알았어요.”
한참을 망설이다 한 내 대답에 인애는 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접대는 무슨 얼어죽을 접대!’라고 받아쳐야 한다고 내게 설명해 주던 인애는, 이윽고 금세 흥미를 잃었는지 들고 있던 플라스틱 그릇을 멀리 던져 버린다.
“에이! 재미없어! 너랑은 소꿉놀이 안해.”
“미..미안해 인자야.”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고 나는 그저 사과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인애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때, 축구공을 들고 있는 아이들 몇명이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야!서인자! 축구할 건데 할래?”
“축구?”
고무줄에 묶인 인애의 머리카락이 휙 하고 돌아간다. 그녀는 만면에 화색을 띄며 벌떡 하고 일어나 손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내었다.
“할래!할래!”
“그럼 같이가자.”
동네 꼬맹이들의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던 인애가 갑자기 고개를 휙 하고 내 쪽으로 돌렸다. 나는 아까 인애가 시켰던 그 자세 그대로 얌전히 쪼그려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야..재하도 데려가자.”
“재하?”
인애의 제안에 그들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축구를 할건지 안할건지의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은듯, 인애는 보채듯 그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많이 하면 재밌잖아! 재하도 같이 하자.”
“아..박재하는 축구 못해서 싫은데..”
“뭐가 못해! 재하도 잘해!”
인애가 덤벼들듯 말하자 녀석은 주춤주춤 물러나며 머리를 긁적거린다. 인애의 앞에 서면 모든 남자애들의 반응이 저렇게 하향 평준화 되는 것일까?
“아..알았어.깍두기 정도면 괜찮겠지.”
그의 말에 옆에 있던 몇몇의 아이들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나는 인애가 손짓하는 모습에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자자..빨리 하러가자. 빨리 안하면 형들한테 운동장 뺏길거야.”
한녀석이 들고 있던 축구공을 바닥에 던지고는 발로 툭툭 건들면서 어설프게 뛰기 시작했다. 뻘쭘한 분위기에 머리를 긁적거리던 나는, 이내 무언가에 이끌려 팔이 쭈욱 하고 뻗어졌다.
인애의 까맣게 그을린 피부. 그리고 유난히 하얬던 그녀의 손바닥이, 내 팔목을 꼭 쥐고 있었다.
-
“다시한번 생각해 봐라.”
“후회할 짓 하는거야 임마.”
“꼭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해야겠냐?”
“아..박재하 너의 삽질은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구나.”
경험에서 우러난 유부남 형들의 따뜻한(?) 덕담과,평생을 솔로로 사는 것이 꿈인 준혁이 형의 가슴 뭉클한(?)조언을 들으며 나는 빠알간 카펫이 깔린 복도에 어정쩡하게 섰다.
젠장..턱시도라니..나는 평생 정장 안입을줄만 알았었다.오죽하면 내 큰 고민이 ‘내가 유명한 작곡가가 되어 가요대상 작곡가 상을 타러 갈때는 정장을 어떻게 입지?’ 였을 정도니, 내가 지금 몸서리치게 불편해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결혼은 인륜지대사라 했는데....
나는 낯선 사람 한명없는 하객들을 둘러보았다.인애의 지인들이야 훤히 다 알고 있으니,결혼식이라기 보다 동네 모임 같았다. 어렸을때 인애만 축구시합에 껴주던 꼬맹이 시절 동네 친구 녀석들까지, 이제는 훌쩍 큰 어른이 되어 나와 인애를 보며 낄낄 거리기 바빴다.
“아이고..재하 아부지.좀 일어나요!”
맨 앞자리, 연신 머리를 뒤로 늘어뜨리며 잠에 빠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니 한숨이 푸욱 하고 나왔다. 아..아무리 아는 사람들끼리의 결혼이지만 긴장감이 없잖아 긴장감이! 한 쪽은 좀 울기라도 하던가! 이게 무슨 결혼이야! 동네 마을회관에서 돼지 잡는 거지...
하지만 그 반대편에 자리한 인애 어머니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것이, 어젯밤 인애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밤 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시며 화투판을 벌이셨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결혼 전에 정중하게 만나 내숭떨어야 하는 것이 사돈관계인데, 나와 인애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웃 사촌이었던 사람들이 사돈이 되었으니 그런 긴장감은 이미 쿨하게 버린지 오래였던 거다.
“꺼으으윽.”
“.....”
내 옆에서 걸쭉하게 들려오는 트름 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밀려드는 엄청난 술냄새가 내 얼굴을 더 창백하게 탈색시켰다.신부가 너무나 ‘아름답다’라는 말은 들어본적 있어도 신부가 ‘트름했다’라는 말은 들어본 역사가 없는 내 입가에는 긴 한숨이 걸렸다.
인애는 자신의 피부보다 더 하얀 면사포에 가려져 있었다. 단 한번도 본적없는 짙은 눈화장을 하고, 진한 볼터치를 한 그녀의 얼굴은 작고 예뻤지만, 신부 답지 않은 시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긴 속눈썹이 불편하다는 듯 연신 눈을 깜박거렸고, 자신의 허리를 타이트하게 조인 드레스의 허리부분을 자꾸만 잡아당기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야...서인애..너 어제 술마셨냐?”
“아..조금.”
“조금 먹은 술냄새가 아닌데..”
“그냥 조금 먹었어. 친구들이랑 ‘처녀파티’를 좀 하느라.”
“...........”
보..보통 남자들이 장가가기 전에 하는 ‘총각파티’라는 게 있는거 아니었니? 처..처녀 파티라니..일반적인 신부들은 내일 얼굴이 부으면 어쩌나 하면서 피부 맛사지를 하는것은 모르는 거니? 니가 날씬하니 망정이지..보통 신부들은 너처럼 결혼하기 전전날에 밤새 방송국에 있으면서 야식으로 보쌈을 쳐먹지 않는단 말이다! 몸매 관리하느라 저녁도 안먹는다고!
마음속에 계속 메아리치는 외침들은 그냥 속으로 삭혀야 했다. 국내 최초로 결혼식날에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에게 낭심을 걷어차이는 신랑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조금 억울한 것이, 결혼 전날 술을 마신 인애는 드레스를 입고도 날씬한 허리라인을 뽐내고 있는것에 비해, 결혼식이라고 한숨도 못잔 나는 턱시도를 입고도 노숙자 느낌이 충만하다는 것이었다.
“그럼..지금부터 신랑 박재하 군과, 신부 서인애양의 결혼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랑 입장.”
내 요청에 의해 사회를 떠맡게 된 준혁이 형도 어이가 없었는지 얼른 식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반주자의 고운 피아노 선율이 식장에 울려퍼졌고,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물론 나이스 타이밍으로 뒤에서 ‘꺼어억’하는 걸출한 트름소리를 듣고 넘어질 뻔 하긴 했지만 말이다.
보통은 이렇게 걸어나갈때 많은 생각을 한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도망치는게 마지막 기회야..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다고 했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20년지기 친구와 백년가약을 맺게 된 나로선 많은 생각이 교차할 수 밖에 없었다.
박재하와 서인애의 결혼.
우리를 잘 아는 친구들은 물론, 지인들도 까무러치게 놀라며 뻥치지 말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 대부분이었다.심지어 인애의 부모님은 배를 잡고 웃으시면서 ‘내 평생 이렇게 골때리는 유머는 처음이다’라는 반응을 보이시기 까지 하셨었다.
내 친구. 내 여자. 그리고 이제는 내 아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될 그녀의 얼굴은, 비록 숙취에 허덕대는 얼굴이었지만 아름다웠다. 어렸을때 까만 서인자의 모습은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하늘하늘한 몸매가 드러나는 인애의 드레스는 잠시나마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신부 입장.”
통상적으로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식장안으로 울려퍼지는 훈훈함이 연출되어야 하나, 그것과는 반대로 예식장 안의 하객들은 연신 킥킥 거리기 바빴다. 심지어 멘트를 내뱉은 준혁이 형도 웃음을 참느라 마이크를 손으로 막고 고개를 숙여 버린다.
아...아직도 전날 우리 아버지와 술을 꺾으신 인애의 아버지는 딸과 함께 숙취로 비틀대고 계셨다. 딸을 사위에게 넘겨주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고, 그 딸은 보통 다소곳이 신랑의 손을 잡는 아주 일반적인 아름다운 모습따윈 내 머릿속에서 산산히 부숴지고 있었다.
인애의 손을 건내 받은 나는 표정관리를 하려 애를 써야 했다.인애의 아버지는 흡사 귀찮은 물건을 맞기듯이 내게 인애의 손을 건내주고는, 역시 위가 쓰린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가셨던 것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양가의 어른을 모시고...”
“끅!”
난데 없이 들려오는 신부의 딸꾹질 소리에, 주례를 담당하셨던 우리 둘의 고등학교 은사님께선 당황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응시했다.철면피 서인애도 이번만큼은 조금 찔렸던 모양인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아..내 아름다운 결혼식...이미 물건너 가버린 희망사항일 뿐이로구나.
-어우씨..진짜 죽겠다.-
조용히 들려오는 그녀의 중얼거림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진짜 죽겠는건 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와 버렸다.처음 드레스를 고르러 갔을때에, 잠시 시착을 해본 인애의 모습을 보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옷을 보고 나오자마자 뽀뽀를 해달라고 졸랐다가, 그녀의 악력에 목이 졸렸던 아름다운 기억마저도.
만감이 교차해 왔다. 결혼이라는 것을 꿈꿔본적은 있지만, 그 상상속의 결혼식에서 등장하는 신부의 자리에 인애가 있을거라고 상상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성인이 되어 진화라는 말까지 나올정도로 예뻐진 인애의 모습을 보고도, 그녀가 내 연인으로서, 그리고 반려자로서 내 옆에 서게 될 줄은 진심으로 몰랐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내 옆에서 어정쩡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인애의 모습이, 원래 거기에 딱 맞게 설계된 부품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잘려나간 스케치북의 귀퉁이를 딱 맞춰, 하나의 수채화를 완성시킨 듯한 기분이었다.
은사님까지 당혹스럽게 했던 결혼식은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물론 중간에 주례사를 듣던 인애가 꾸벅 하고 졸아서 넘어질 뻔한 것을 잡아당기는 헤프닝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녀가 마신 술의 양에 비해 엄청난 건수는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내빈에게 인사가 끝나고, 축가의 시간이 되자 하객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작곡가와 함께 일하는 덕분에, 요새 아주 잘 나가는 가수가 축가를 부르기 위해 우리둘의 앞에 섰기 때문이었다.걔중에 개념없는 하객-물론 인애의 친구였다-은 꽥꽥 거리는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있었다.
“두 분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리겠...습니다.”
싱긋 웃으며 인사를 하려던 그는 인애의 표정을 보고는 잠시 멈칫 하더니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래..이해한다. 네가 축가를 부르러 얼마나 다닌지는 모르겠다만, 아마 저런 속 거북한 신부의 표정은 너도 처음보는 거겠지.
조용히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그래도 역시 프로는 다른 모양인지, 그는 금세 감정을 잡고는 살짝 눈까지 잡아주는 쇼맨쉽을 발휘했다.
“Whenever I"m weary from the battles that rage in my head…”
아아.참으로 아름다운 노래였다.리차드 막스의 명곡. 평범한 선곡이지만 좋구나. 그래. 이런거로라도 기분을 내야한다! 인애 너도 여자라면, 아니 사람이라면 저 가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로맨틱해진 마음을 살포시 다 잡으며 가슴뭉클한 촉촉한 시선을 내게 보내주겠지?
“I lose my way but still you seem …..to understand.”
이번엔 노래를 부르던 그가 박자를 놓쳐 버렸다. 나 역시 인애의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푹 하고 내쉬며 밀려들어오는 창피함에 고개를 떨궈 버린다. 감미로운 이 팝을 들으며, 우리의 서인애는 드레스위의 배부분을 벅벅 긁고 있었다.그것도 신부가 끼는 하얀 장갑까지 벗어들고.
결혼식장에는 점점 쿡쿡 거리는 소리가 짙어지기 시작했고, 참을대로 참은 우리 아버지는 아예 팔짱을 끼고 주무시고 계신다.아아..한번뿐인 내 결혼식이..로맨틱 해야 하는 내 결혼식이...자꾸만 망가져서 정말...
미치겠다.
-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태어나서 외국이란곳을 처음 와보니 모든것이 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꼬부랑 글씨들과 한문들이 나를 약간 당황하게 했지만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끄어어어억.”
...바로 이것이었다.
“아 술이 안깨네..죽겠다.”
“결혼 전날 그렇게 술퍼먹는건 너밖에 없을거다.”
“그게 이 누나의 매력 아니겠니?”
말을 말자...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트렁크까지 챙겨들었다.두꺼운 화장을 지우고, 어느새 내가 늘 보아왔던 하얀 맨얼굴로 후드를 뒤집어 쓴 인애의 얼굴은 매우 지쳐있는 듯했다.
결혼이란 거 생각보다 엄청 힘든 것이었다.맨정신인 나도 힘들었으니, 반쯤 취해있는 인애는 아마 죽을 맛이었을 거다.그래도 그나마 결혼식장에서 막말 안한게 어디야..하면서 안심하는 내 모습이 사뭇 처량한 이유는 뭘까?
신혼여행지로 그녀가 선택한 곳은 일본이었다.보통들 동남아로 가는 마당에 무슨 일본이냐고 물었더니,자기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제 2외국어가 일본어라고 한마디로 일축해 버리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또 덜컥 찬성을 해 버린 거였다.
“와..근데 경치는 죽인다.”
“당연하지.오키나와는 일본 내에서도 로망이라고 불리는 관광지인데...”
그래..다 좋은데..그 로망이라는 관광지에서 술냄새 잔뜩 탑제한 거친 호흡을 몰아쉬는 너를 지금 주변 일본인들이 힐끔 거리면서 쳐다보는거 모르겠니? 하지만 인애는 그런것들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미리 예약한 호텔로 걸음을 향할 뿐이었다.
“아..들어가서 좀 쉬자. 아주 죽겠다.”
“엥?오늘은 관광안해?”
“관광은 무슨 얼어죽을..속이 뒤집어 지는구만. 너도 피곤하잖아. 곧 어둑어둑 해질거고..들어가서 자자.”
“응..?”
나에게 트렁크 두개를 맡겨 놓고는 가벼운 가방하나를 들고 털레털레 걸어가는 인애를 보며 나는 침을 꼴깍 하고 삼켜버렸다. 자..자자는 것은..지금 이..이게 말로만 듣던 그 첫날밤이란 말인가!
가슴이 콩닥 거렸다. 지금까지 살면서 지겹게 봐왔던 인애의 뒷모습이 비키니를 입은 섹시한 모델의 뒷태로 오버랩되는 괴현상까지 일어났다.암! 그래야지. 신혼여행의 꽃은 첫날밤이라고 늘 들었으니까 나도 꽃을 피워야 한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애는 미리 잡아두었던,바다가 보이는 고급스런 호텔의 로비쪽으로 걸어들어갔다.뒤에서 트렁크 두개를 낑낑 거리며 끌고오는 나와 속도를 맞춰줄 생각은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를 쏼라쏼라 거리며 호텔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인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팅하는데 몇시간은 소요되었을 그 머리를 그대로 묶어버린 그녀의 턱선은, 인애가 뭐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부드럽게 움직이며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비록 지금은 숙취와 싸우고 있는 중이긴 했지만,화장을 지운 그녀의 얼굴은 두터운 신부화장을 했을때 보다 몇 배는 더 빛나보였다.
하하하.우스웠다. 인애에게 예쁘다는 형용사를 사용한것도 우스운데, 나는 지금 그녀와 평생을 약속하고 신혼여행에 와있는 것이다. 그 누가 상상했을까? 평생을 함께 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것이 친구로서가 아닌 부부로서 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얼떨떨한 기분이 들어왔다.
“우와아..”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호텔은 커녕 모텔..아니, 여인숙도 가본적 없는 나로서는 호텔의 스위트룸을 처음 봤을때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넓직한 방에는 안락한 더블베드가 자리했고, 볕이 들어오는 창가로는 하얀 거품이 일어나는 파도가 석양의 붉은빛에 물들어 와인색깔을 띄우는 것 역시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인애는 흡사 녹아내리는 젤리처럼 그대로 침대위로 허물어져 버렸다. 그리고는 급속도로 그녀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인애가 입고 있던 후드자켓이 공중으로 붕 하고 날아가 바닥에 쳐박혀 버렸다.
긴 자취생활에서 형성된,실로 자연스러운 동작이 아닐수 없었다.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곤충이 허물벗는 모습을 고속으로 돌려 보여주는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저기..인애야.”
“...왜에...”
“안씻어?”
“귀찮아.”
어..어라?이게 아닌데. 내 상상속에서는 그래도 첫날밤이라 하면, 신랑 신부가 거품샤워를 마친후 촉촉한 물기를 서로 공유하며 뜨겁게 껴안는 것인데...내 생각따윈 전혀 생각안하고 있을 인애는, 안에 민소매 티셔츠 한장을 입었을 뿐인지 엎드린 채로 하얀어깨를 드러내고 있었다.
‘응?’
샤워 전 갈아입을 옷을 찾으려 트렁크 안을 뒤적거리던 나는 간이 향수병같이 생긴 작은 스프레이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 검지 손가락 만한 그것은 검은색의 불투명한 병이었고, 표면에는 힘차게 갈기를 휘날리는 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야야.이거 챙겨라.-
-이게 뭔데요?-
-뜨거운 첫날 밤을 위한 준비물이라고나 할까.그녀의 대한 예의라고나 할까.-
-...뭔데요.-
-그냥 임마 샤워하고 나서 고추에 싹싹 뿌려. 아마 깜짝 놀랄 거다.이 엉아가 주는 선물이야 임마.-
-고..고추에 이걸 왜 뿌리는 데요?-
-너의 원만한 결혼생활을 위해서지.-
그러고보니 결혼전날에 준혁이 형이 건내주며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근데 도대체 이걸 왜 내 거시기에 뿌려야 하지? 아무리 물어봐도 그냥 ‘뿌려보면 안다’라고 딱 잘라버린 준혁이 형 때문에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도 그것을 챙겨온 것이었다.
“크으으응...”
순간 정체를 알수 없는 고추 스프레이(?)와 옷을 들고 욕실로 가려던 내 귓가에 너무나 익숙한, 허나 호텔에 도착하고 10분안에 듣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그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쩝...음냐...”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간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뒤로 돌아누운 인애는 시원하게 코를 골며 입맛까지 쩝쩝 다시고 있었다. 가슴부분이 살짝 패인 하얀 민소매 티셔츠의 헐렁한 틈바구니 사이로 뽀얗게 뭉그러진 그녀의 적당한 볼륨이 내 시선에 가득 들어왔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현재 상태는 애로티시즘을 느끼기엔 너무나 거리가 먼 듯했다.
가만히 누워 인애가 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늘상 힘든 방송국일에 찌들어 우리집에서 신세를 질 때에도 늘 이렇게 곤히 잠들어 있었지..거기에 술까지 마시면 속옷에 손을 넣어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자곤 했던 인애의 모습에 왠지 모를 측은한과 흐뭇함이 뒤섞여 몰려들었다.
쩝...그건 그렇다 쳐도 뭔가 아쉬웠다.아무리 우리가 강산이 두 번 바뀔 세월동안 친구로 지내왔지만, 짧은 연애기간을 갖고 결혼까지 했는데 첫날밤을 치룰수 없다는 것에 아쉬움이 몰려 들었다.
무엇에 이끌리듯 고개를 내려 그녀의 살짝 마른 입술에 입을 맞췄다.삽시간에 미간을 구기며 뒤돌아 눕는 그 모습이 예뻐서 웃음이 나왔다.
얇은 이불을 꺼내어 덮어주고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일어났다. 결혼식이라는 일련의 과정들은 너무나 피곤했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고 뿌듯했다. 잠들어 있는 인애의 모습을 하루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나는 얌전하게 자는 그녀의 모습에,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신혼여행 첫날밤부터 곤히 골아 떨어지신 인애씨를 뒤로하고, 잠이 오지 않았던 나는 밖으로 나왔다. 일본어라고는 야한 동영상에 나오는, 그 누구라도 다 안다는 그 말밖에 하지 않는 내가 인애없이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지만, 가만히 호텔방에 있기에는 약간 좀이 쑤시기도 했고 무료하기도 했다.
내가 간 곳은 호텔에 있는 조그마한 바(bar)였다.노곤하게 샤워를 하고, 샤워후에 로맨틱한 첫날밤을 보내는 것 대신에 선택한 대안치고는 약간은 초라했지만 별 수 없었다.너무 피곤하면 오히려 잠이 안오는 나로서는, 술이라도 마셔야 그녀의 옆에서 잠을 청할수 있을것 같았다.
“아..음...이거...디스...오케이?”
다행히 바에서 마시고 싶은 술을 시키는 것 정도는 바디랭귀지와 국제 공용어 옹알이로 해결되는 아주 손쉬운 것인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쌉싸름한 소주를 마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나는 생맥주 사진을 가리키며 연신 갖고 오라는 수신호를 해보였고, 바텐더는 곧 하얀 거품이 일어나는 생맥주 한 잔을 테이블위에 올려주었다.
“크하아!”
이럴줄 알았으면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오는 건데. 결혼식을 해서 욱신거리기 까지 하는 내 몸은 맥주 한 잔에 뻥하고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맥주...맥주라. 문득 몇 개월 전의 그 날이 떠올랐다.소주를 마시지 못하는 수정이와 처음으로 술자리를 가졌던 그 날. 그녀에게 자작곡을 선물했고, 온종일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와 함께 집에 왔던 그 날 말이다. 수정이는 지금쯤 뭘하고 있을까?
인애는 소주, 수정이는 맥주. 좋아하는 술에서부터 인애와 수정이는 반대말 이라 규정지어도 좋을 만큼 서로 극명하게 다른 여성들이었다.이사를 갔던 그 날이후로 단 한번도 연락이 없었던 수정이의 모습이 이제와 새삼스레 궁금한 내 마음이 조금은 웃겼다. 그때 타이트 하게 붙잡았다면 내 것을 만들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하는 회한과는 솔직히 거리가 멀었다.한 치의 망설임없이 인애를 택한 것은 나였고, 그녀 역시 내가 아닌 자신에게 몹쓸짓을 했던 그 녀석을 선택한 것이다.결국엔 서로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갈 길을 걷고 있는...아주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다.
맥주맛이 달았다.일본의 맥주는 기가 막히다고, 소주 예찬론자 인애마져도 인정했던 것은 역시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닌 것이었다. 피곤함 때문에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내 뱃속으로 꾸역꾸역 맥주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한국 분?”
얼마나 지났을까. 일본어가 아닌 아주 낯익은 억양의 말투가 내 옆에서 울리고 있음을 인지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약간은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곱게 웃는 눈웃음이 나를 향해 있는 한 여자가, 풍성한 머리결을 반대쪽 어깨로 넘기며 내게 묻고 있었다.
“에...?”
나도 모르게 얼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풍성한 가슴이 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민소매 티셔츠를 입어, 그녀의 동그라한 가슴의 파장선은 내 눈앞에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그래도 바닷바람이 차가워서 일까? 예의상 니트로 되어 있는 얇은 가디건을 걸쳤지만 그 부위에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맞군요?한국사람.”
여자...그제서야 여자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음을 인지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똑한 콧날 밑으로 미소를 짓는 그녀는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서구적 미인이었다. 결혼을 하고도 여자 앞에서는 말문이 막히는 그 버릇이 어디가지 않은 모양인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연신 상황파악을 하기에 바빴다.
“한국말 할 줄 몰라요?”
“아...아뇨.”
“풉!”
뭐가 재밌는지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뭐지? 이 여자는 어째서 내 옆에 자연스레 앉아 술을 주문하는 거야? 그것도 헐렁한 티셔츠의 앞섬이 내려가며 계곡까지 은근히 보여주면서...
“절 아세요?”
“아뇨.왠지 한국분같아서...불쾌하시면 일어날까요?”
“아..아뇨 그게 아니고..”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되는데 나는 거세게 손사레까지 치면서 그녀의 말을 거부했다. 씨익 웃는 그녀의 가냘픈 허리가 꽉 조여진 가디건의 단추때문에 도드라져 보였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평생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던 역사가 없는 나로서는, 도무지 파악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여행 오셨어요?”
“아...네.”
신혼여행이요...라는 말은 딱 잘라먹고 입안으로 꿀꺽 삼켰다.이...이게 남자의 본능인건가? 알 수 없는 죄책감에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그때에, 그녀가 은근슬쩍 내 옆으로 조금씩 다가오는 듯했다.
“귀엽네요?”
“네?”
나는 궁지에 몰린 강아지처럼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내 얼굴 가까이 붙는 그녀를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조금만 눈망울을 내리면 테이블위에 얹혀진 그녀의 가슴이 보일 것 같아서였다.
“혼자왔나 봐요?나도 혼자 왔는데...”
“아..그..그러시군요.”
제 와이프는 호텔에서 자고 있는데요...라는 말 역시 또 한번 꿀꺽 삼킨다.내가 도대체 왜이러지? 그리고 이 여자는 왜 갑자기 내게 와서 이러는 거지? 내 옆머리 턱선을 타고 정체불명의 땀 한줄기가 흘러내린다.
“저는 수진이라고 해요. 이 호텔에 머물어요?”
“아..저는 박재하입니다.......근데 질문이 뭐였죠?”
내 얼빠진 되물음에 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씨익 웃었다.왠지 모르게 색기가 흐르는 미소인것 같아 삐질삐질 땀이 나왔다.
“이 호텔에 머무냐고 물었어요.”
“아...아 예. 여기서 머물고 있어요.”
“어머. 나둔데...재밌는 우연이군요?”
당연히 호텔에 있는 바니까 그 호텔 투숙객이 오는것은 당연한 것일텐데...수진이라 밝힌 그녀는 요염한 미소까지 띄우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뭐..뭐야 이거..좀 무섭잖아.
“내 방은...301호인데...제 방에서 한잔 하지 않을래요?”
“네에?”
나도 모르게 수직상승하는 억양때문에 바에 있던 인원들은 잠시 내 얼굴을 응시했다가 도로 자신들의 파트너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지나치게 놀라는 내 모습에 그녀는 쿡쿡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이 여행 마지막 날인데...그 쪽에 관심이 있어서 그래요. 30분정도만 기다릴 거니까...와서 노크해 줘요. 알았죠?”
“아..아니..그게..”
왜 말을 못해! 나는 유부남이라고...호텔방에는 오늘 백년가약을 약속한 와이프가 있다고 왜 말을 못하는 거냐! 라는 질책은 사라지고, 대신에 내 시선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요염하게 바를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었다.
벌컥벌컥.
상황정리가 되지 않아 눈앞에 반쯤 남아있는 생맥주를 원샷으로 넘겨 버렸다. 이..이거 미국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장면 아닌가? 나 몇호실에 있어요 하면서, 글래머의 미녀가 주인공에게 넌지시 귀띔해 주는 장면. 그리고 그 날에 불같은 하루밤을...헉!
심장이 쿵쿵 하고 뛰었다. 준혁이 형이라면 이게 왠 떡이냐!하면서 우샤인 볼트의 속력으로 그녀의 방까지 뛰어 갔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이런일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인지라 얼떨떨 하기만 하다. 분명 인애는 내 방에서 자고 있는데...어째서 평생 받아보지 않았던 제의를 신혼여행지에서 받는 거지? 그것도 저런 미인에게!
아주 고전적인 방법으로 볼까지 꼬집는 내 모습을 보며, 돌아이를 보듯 바라보는 바텐더의 눈길에 괜시리 머쓱해졌다.
“아..아리가또!”
술값을 바위에 올려두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장실로 가서 맥주의 흔적을 내려보내던 나는 급하게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 틀림없다! 이것은 분명 평생 연애도 제대로 못하고, 20년이상 잡혀살았던 여자에게 장가를 드는 내 모습이 딱해서 신이주신 단 한번의 기회인거다! 그래서 로맨틱함의 최절정인 첫날밤에 넉다운이 된 신부를 두고 이 곳에 와서 맥주를 마시도록 결심하게 한 것이 틀림없어!’
분명 맥주를 연거푸 마셔서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그래!눈이 맞는 것도 아니고...잠깐 호텔방에 가서 술 한잔 하는 거잖아?게다가 그녀는 오늘이 마지막 이라 했으니 정말로 오늘만 지나면 쿨하게 끝나는 그런 것일수도?
생전 안하던 지저분한 합리화를 잔뜩 등에 지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술집의 문을 나섰다.반짝반짝 빛나는 호텔의 바닥면을 미끌어지듯 성큼성큼 걸었다. 그래! 서인애! 이건 너의 불찰인 거다! 신혼여행 와서 코를 곤 너의 치명적인 불...허억!
엘레베이터가 있는 프론트로 걸어가며 인애에게 들리지 않는 선전포고를 하던 나는 그대로 헛숨을 집어 삼키며 돌려던 코너로 도로 숨어버렸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이...이게 어찌 된 일이지? 어째서 저 수진이라는 여자가 프론트에...그것도 인애와 함께 서있는 거냐!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빼꼼히 눈만 내밀어 코너 밖의 정경을 살폈다.어느새 잠에서 깬 인애는 잔뜩 부은 얼굴을 큰 선글라스로 가리고는, 수진이라는 여자가 하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흡사 고 2일진 언니에게 보고를 하는 1학년 짱의 모습을 풍기는 것만 같았다.
“흠...그러니까...니가 호텔방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이거지?”
“네 언니. 그냥 넘어온것 같던데요?”
“아놔...이 새끼를 진짜...”
죽음의 공포가 온몸을 엄습했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뭔가 이상했어! 단 두 세마디 나누고 나서 자신의 호텔방으로 오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점점 풀려오는 다리를 힘껏 꼬집으며 그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오키나와에 가기로 했을 때부터 너한테 전화걸어서 준비하라고 했는데... 이 인간이 첫날부터 바를 줄은 몰랐다.”
“언니랑 같이 잔거 아니에요?”
“아니.나만 잤지. 문 소리가 나서 일어나 보니까 이 자식이 어딜 나가데? 내가 그래서 급하게 너한테 전화한거 아니냐.”
이제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잔인한 서인애는 미리 끄나풀을 신혼여행지에 심어뒀던 거다! 아..정확히 말하자면 신혼여행지에 있는 지인을 첩자로 고용한 것이겠지만...
하얗게 질린 내 얼굴위로 비오듯 땀이 쏟아졌다.손을 꺾으며 뿌드득 하는 뼛소리를 내는 인애의 주먹이 오늘따라 흡사 바위처럼 크게 느껴지며 윗니 아랫니가 서로 딱딱하고 부딪히고 있었다.
“근데...언니.”
“왜.”
“근데 그 분 진짜 언니 신랑 맞아요?”
“응. 그건 왜 묻냐?”
“아니 저는 언니 눈이 높은줄 알았는데...”
그녀의 말에 인애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 모습에 확 하고 쫄아드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닌 모양인지, 수진이라 밝힌 그녀도 살짝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박수진 너 많이 컸다...”
“아..어..언니 죄송해요..”
“뭐 됐어. 여튼 30분내로 오라고 했으니 그 인간이 니 방으로 가겠지. 내 방으로 안오고 니 방으로 가면 내가 급습할 테니까 시간좀 끌고 있어.”
“네 언니!”
수진은 충성스러운 부하의 표정을 지어보이며 인애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아아...난 오늘 죽음의 문턱에서 유턴한 거로구나! 술기운에 그녀의 방까지 좋다고 따라갔으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었다.
“근데 형부가 제 방으로 오면 어쩌시게요?”
“뭘 어째. 일단 아이만 낳고 거세시켜 버릴거야.”
“.....”
나는 믿는다. 분명 신은 존재한다는 것을. 교회도 절도 다니지 않는 나는 이름모를 신에게 연신 감사를 드리면서, 후들후들 거리는 다리를 꼭 쥐고 있었다.
-
-박재하! 서랍에 보면 대본있거든? 그거 점심시간 내로 가져와. 급해!-
이 칠칠이 서인애...속으로 연신 꿍시렁 거리면서도 나는 이미 방송국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지가 오라면 와야 하는 종인거냐! 라고 말을 하고 있었지만, 몸은 분주하게 옷을 갈아입고 시계까지 바라보는 완벽한 언행불일치를 행하고 있는 내 모습에 한숨이 푸욱 하고 나왔다.
그녀와 나의 신방은 여의도에 위치하게 되었다.이제 막 신인작곡가로 대뷔해서, 저작권 협회의 맨 끝자락에 이름을 올린 나도 여의도에 있는 준혁이 형의 작업실을 같이 쓰게 되었으니 어찌보면 일석이조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재하씨. 그 노래 진짜1년전에 써두었던 거 맞아? 조금만 다듬으니까 진짜 괜찮던데?왜 그런 노래를 꼭꼭 숨겨두고 있었던 거야?-
내 곡을 산 신인가수의 기획사에서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팔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수십번 고민하고, 결국은 작곡가로서의 데뷔곡이 된 노래는 내가 수정이를 위해 썼었던 ‘당신이 잠든 사이에’였다.
작사는 내가 하지 않았는데...기가 막히게도 사랑고백하는 노랫말이 붙여져, 그것은 요새 가장 주목받는 신인의 타이틀 곡으로 팔려버렸다.절대 팔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내가 그 노래를 팔았던 이유가 뭘까? 어찌보면 수정이의 모습이 완벽하게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는 무형의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대본이 들어있는 서류봉투를 들고 터덜터덜 길을 나섰다.점심시간까지라고 했으니 걸어가도 충분할 것만 같았다. 서울에서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산 대부분의 기간이 이 근처였으니 걸리는 시간은 눈감고도 측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좁디 좁은 골목과 몇 개의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면, 인애가 몇년째 일을 하고 있는 그 방송국 앞으로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응?’
트레이닝 복을 입고 쫄레쫄레 걸어가던 내 발걸음이 저절로 뚝 하고 멈춰 서졌다. 너무나 익숙한 오르막길과, 그 골목의 끝에 위치한 작은 건물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대로였다. 물론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왠지 내 기억속 아련한 곳에서는 몇년전으로 인식하고 있는 그 건물의 변함없는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살던 그 방. 짧지만 많은 일들이 있었던 아련한 기억들의 고향인 그 곳을 두 눈 가득 담아보았다.
여전히 나란히 붙어있는, 예전에는 나의 집과 수정이의 집이었던 208호와 209호의 모습들이 보였다. 수정이의 남자친구였던 그 남자의 차 미등을 뚫어져라 바라봤던,당시 내가 몸을 숨겼었던 그 전봇대의 모습도 . 그리고 인애를 업고 한발 한발 걸음을 내딛었던 작은 언덕길 까지도.
나를 멍하니 젖게 한 상념속에서, 수정이의 모습이 환상처럼 나타나 내 앞에 선다.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조용한 골목길 그 집앞에서, 그녀는 긴 생머리를 옆으로 넘기며 친절해 보이는 눈웃음을 짓고 내 앞에서 있었다.
‘행복 한가요?’
상념속의 그녀는 그렇게 묻고 있는 듯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만, 그녀의 작은 입술은 내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이의 모습은 내게 알 수 없는 미소만을 가득 보인채로 그렇게 내 앞에 투영되었다.
사람은 행복을 위해 사는게 아니에요. 불행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뛰는 것 뿐이야...하지만,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해요 라고, 모습이 보이지 않는 허상속의 그녀에게 난 몇번이고 되뇌이고 있었다.
그렇게 수정이의 환상은 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마지막 이사를 하는 날에 내게 눈으로 물었던 그 모습처럼.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수없이 삼키며 내 머리 속 공간에서 완벽하게 사라져 갔다. 예전이라면 몇 번이고 꺼내고 들추었을 그 추억을 꾹꾹 묻어두며 몸을 돌렸다.
애초부터 수정이는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처음에 수정이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인애와는 다른여자’였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점점 크게 자리를 잡는 인애라는 틀을, 친구라는 선으로 규정하고 두려워 했다. 그래서 은연중에 수정이를 ‘인애와의 반대말의 조합’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그것을 사랑하는 척 바보짓을 해왔던 거였다. 인애가 내 맘속에 있던 것이..죄악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그렇게 나는, 수정이도 인애도 잠든 사이에 이율배반적인 상반된 꿈속에서 걷고 있었다.꿈이 깨었을 때는 현실이 보였고, 그 현실의 끝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수정이가 아닌 인애의 웃는 얼굴이었다.
입안가득 미소를 띄우며 걸음을 재촉했다. 저 멀리 인애가 있는 방송국의 건물이 보였다. 초겨울이지만 따뜻한 날씨에, 걷고 있는 내 걸음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오늘은 인애와 함께 점심을 먹어야 겠다. 고급스런 식당, 정체를 알 수 없는 손씻는 물과 립이 나오는 그런 곳 말고 그녀와 내가 좋아하는 감자탕을 말이다.
오늘따라, 인애의 하얀 얼굴과 미소가 너무나 보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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