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2
삶2
제 어머니는 무척 억척스런 분이란 얘기를 드렸죠?
국민학교 5학년 때, 어머니는 옥수수 심었던 뒷뜰을
직접 정리하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인부들을 사서
브로크를 쌓아, 방 두 칸을 늘렸습니다. 아버지가
가져다주는 생활비로는 살기 힘드셨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방에 하숙을 쳤습니다. 제가 다니던 국민
학교 선생님 두 분이 거기 사시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이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주신 K 선생님이
셨습니다. 그 분은 서울에서 대학을 갓 졸업하시고
제가 다니는 학교에 새로 부임하신 분이었습니다.
나이가 우선 젊어 그랬는지 다른 선생님과 달리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던 분으로 기억됩니다. 취미가 사진
촬영이어서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셨으며, 모든 학교
행사에는 항시 선생님이 사진을 직접 찍으셨습니다.
가끔 집에서도 저나 여동생을 찍어 주셨고, 그 사진은
아직도 몇 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매일 술
취해 밤늦게 들어오시거나 아니면 며칠 만에 한 번씩
들어오시는 저희 아버지와 달리, 퇴근 후에는 바로 집에
돌아오셔서, 어떤 때는 우리 집안일도 도와 주셨습니다.
저희 방 방문이 비틀어져 닫히지 않는 것도 고쳐주시고,
재래식 시골집이라 어두운 부엌에 전기불로 새로 달아
주셨습니다. 엄마가 그 선생님에 대해 무척 고마워 하셨죠.
그 선생님을 위해 반찬도 남 달리 해드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제가 커서 혹시 엄마와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는지 불순한
의심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한번 엄마에게 직접 물어보면 어떨지 모르겠네요. 많은
시간이 지난 옛 얘기이니까 혹시 그랬다면 솔직히 말씀하
실까요?
방학 때는 선생님 두 분 모두 집에 가시고, 뒷방은 둘 다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 동수네 집에 놀러
갔다가 동수 어머니가 편찮아 그냥 집에 돌아 온 적이
있었습니다. 집엔 여동생도 나갔는지 없었습니다. 물론
엄마야 일 때문에 나가셔서 집에 있을 리가 없는 시간이
었죠. 혼자 집에 있기 심심해 밖에 나가려는데, 뒷방
쪽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았습니다. 혹시 선생님이 방학
중인데 일찍 오셨나 싶어, 그 뒷마당을 통해 그쪽으로 가려
는데, 갑자기 선생님 방문이 열리면서 황급히 엄마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도 또 바로 뒤에 따라 나오시던 선생님도
저를 보고 깜짝 놀라시는 것 같았습니다. 쟁반을 들고 계시던
엄마는 제게 아무 말도 없이 엄마는 부엌으로 뛰어 가셨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학교에 일이 있어 와야 했다고 말씀하는데,
평소와는 좀 다르게 더듬거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심심했던 저는 선생님 책이라도 빌려 볼까 했지만, 그 순간
뭔가 어색한 분위기가 느껴져 바로 집을 나왔습니다. 같이 놀아
주지 않는다고 항시 불평하던 여동생도 그날따라 하루 종일
어디가 있었는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학교 들어가기 전이나 학교 다닐 때나,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노는 데에만 정신 팔렸던 제가 방에 앉아 책을 보기 시작한 게
그 선생님 덕이었습니다. 물론 제 학교 공부도 많이 도와 주셨
습니다. 학교 숙제를 빠뜨리지 않고 다해, 처음으로 숙자와 같이
애들 앞에 서서 담임선생님께 칭찬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으로 숙자 성적을 따라 가기 시작했고, 나중엔 제가 더 앞서기도
했습니다.
숙자라는 여자 애, 대단한 애였습니다. 어쩌면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머리 좋은 애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환경이 그걸
전혀 받쳐주질 못했죠. 저와 같은 중학교를 들어갔습니다(남녀공학).
성적이 좋은 한 반 남녀 합반이고 나머지 반은 남 녀반이 구분되었죠.
저와 같이었던 그녀는 중학교 성적이 저보다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중학교를 졸업 못했습니다. 다른 학교로 전학간다고 얘기
들었는데 그때 학교를 그만 둔 모양입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제가 대학 일학년 때였습니다. 서울 시내
버스에서 만났습니다. 광화문에서 정릉으로 가는 버스, 번호는
기억나지 않는 그 시내 버스에서 저는 승객, 그녀는 버스 차장이
었습니다. 버스를 타면서 차장이 낯이 익다고 생각은 했지만,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내리는 데 차장이 제게 버스표를
돌려주더군요. 뭔가 착각한 것이 아닌가하여 받지 않으려 했는데
굳이 버스를 제게 돌려주고 버스는 떠났습니다. 떠나는 버스 문에
난 창을 통해 그녀 얼굴을 보며, 그녀가 바로 숙자라는 것을 기억
해냈습니다. 그리고 한 동안 그녀 생각을 하며 무척 가슴 아파했
습니다. 참으로 똑똑한 아이였는데, 나보다 더 클 수 있던 애였는데,
예전엔 아무리 공부해도 그녀만 못해 억울해 하던 애였는데.....
그녀를 또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또 10년 이상 흘러서였습니다.
학교 선생님을 집에 하숙 시킨 것은, 자식만은 제대로 공부 시키고
싶었지만 천방지축 나대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짜낸 고육책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바람은, 정말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제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공부를 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은 동화책은 물론이고 만화책까지 이용하여
(당시는 만화를 교육상 나쁘다고 못 보게 했습니다.) 책을 읽는 재미를
제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처음엔 학교 교무실에 꼽혀 있던 동화책부터
시작해서(선생님의 배려로 빌려 올 수 있었음), 나중엔 선생님이 저를
위해 집에서 가져오신 한국 문학전집, 세계 문학전집까지 국민학교
학생이던 제가 거의 다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에는 들여다
보지 않던 교과서도 한 번씩 더 읽게 되었고, 그러면서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던 제가 5학년 2학기 때부터는 상위권에
들더니, 그 후로는 일등을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봐야 학생 수도 몇이 안 되는 촌구석 초등학교 일등이 뭐 대단한
것이냐고 하시겠지만, 제게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중학교
들어가기 위해서 입학시험을 치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좋다는 중학교에 제가 전체 수석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건 저뿐 아니라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죠. 그때부터 저는
하루 아침 졸지에 그 동네 수재가 되었습니다. 물론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은 꼴이라고 놀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은
저를 진정으로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 때부터는 그들의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도, 아니 그보다는 그렇게 기뻐하시는 엄마를 다시는
실망 시키고 싶지 않아 스스로 애를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3년 후 같은 지역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였고, 그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
했습니다. 그리고 졸업 하는 바로 그 해에, 모교 개교 이래 처음으로
S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재작년 제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현 교장선생님을 동창회 일로 찾아뵌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졸업한
후 35여 년간 S대에 입학한 학생이 10명이 넘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알기에도 저 이후 의대에 입학한 후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가 잘난 사람이란 헛소리로 얘기가 흘러 버렸네요. 그러나 아시죠?
제가 잘났다는 얘기가 아니고, 이 모든 것이 엄마의 저에 대한 기대와
열성 덕분이었다는 얘기를 하려는 의도라는 것을.
자식에 대한 기대와 열성은 어느 부모나 다 갖고 계시겠죠. 하지만 제
엄마는 그 이상이었습니다. 엄마는 저를 위해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주시고.......
자식에 대한 끔찍한 열성 말고도 엄마는 행동뿐 아니라 행색까지도
깔끔한 분이셨습니다. 엄마는 나이도 어린데 사람 됨됨이가 바르다고
동네 어르신들의 칭찬을 많이 받으셨습니다(엄마는 나이 17에 저를
낳았습니다. 앞에서 홀로 먹고 살길 없던 전쟁 중에 나이든 아버지와
결혼할 수 밖에없었다는 얘기를 제가 했죠?) 어르신 말씀이 맞는 말씀
이셨습니다. 엄마는 그런 칭찬을 들을만 했습니다. 제 가족만의 비밀을
제외하면 엄마는 가장 완벽한 한국이 여성이셨습니다(우리 가족의 비밀;
솔직히 말해 이제 제게 죄의식은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남이 이해 못할
삶을 살아온 제가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도 엄마는 그 동네 다른 아줌마들과는 차림새가 달랐습니다.
옷을 다른 아줌마들보다 잘 입었다는 의미가 아니죠. 같은 집안 일, 같은
농사일을 하고도, 장이 설 때면 장에 나가 행상까지 해야 했어도..... 남보다
더 많은 일을 하셨어도 엄마의 얼굴과 손은 다른 아줌마보다 훨씬
곱고 차림도 깔끔했습니다.
젊고 예쁜 처와 착하고 똑똑한 자식이(저와 동생은 칭찬, 과분하게
받았습니다. 남다르게 군 것도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있으면서도,
나가 따로 도는 아버지를 동네 사람들은 많이 욕했습니다. 아버지가
미군 부대를 다녀도 제가 중학교를 들어가면서는 거의 생활비를 집에
가져 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때 이미 딴 살림을 차리셨던 것이죠.
그건 제가 고 1때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초등학교 때보다 제가 중학교 들어가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가 집
안이 가장 어려웠고, 당연히 엄마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이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리 힘드셔도 엄마는 매일 자기 전엔 나와 여동생을 꼭 씻겨 재웠
습니다. 마당 앞 펌프 물을 받아 제가 먼저 씻고 나면 여동생은 아랫
도리까지 벗겨 뒷물을 시켰습니다. 여자는 거기가 깨끗해야 한다고
찬물이 싫어 우는 동생을 타이르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씻겼
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둘을 먼저 방에 들여보내고, 엄마도 치마를
겉어 올리고 거기 쭈그리고 앉아 아래를 씻곤 하셨습니다. 저는 괜히
시간 끌며, 동생 씻기는 것과 엄마 씻는 모습을 훔쳐보기도 했습니다.
동생의 애기 같은 보지야 몰래 보고 싶어 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때 말고도 볼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애는 이상하게도
어려서부터 제 앞에서 발가벗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밤엔 밖에 있는
변소를 가지 못해 방에 갖다 놓은 요강을 썼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긴
엄마도 요강을 간혹 쓰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생에 비해서는 그 횟수가
훨씬 적었죠.
그런데 여동생은 다 커서도 제 앞에서 잘 벗었습니다, 어떤 때는 철렁
거리는 젖통이 다 내놓고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심지어
때로는 아랫도리를 홀랑 벗어 보지 털까지 내놓고는 오빠 이불 속까지
파고드는 경우가 있어, 도대체 얘는 선천적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인지, 아니면 오빠가 남자임을 모르는 것 아닌지 당시는 알 수가 없었
습니다. 후에 와서야 그런 행동이 모두 자기 딴에는 계획된 의식적인
도발이었다는 것을, 직접 여동생 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만..........
저희 집은 동네 맨 끝으로 뒤로는 산으로 통하는 길 밖에 없어, 밤에
다른 사람이 저희 집 앞을 지나는 경우는 거의 없어 주변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뒷방에 선생님들을 하숙
하면서는 그럴 수 없었을 겁니다. 그때부터는 부엌에 대야에 물을 받아
여동생과 엄마가 뒷물을 하였습니다. 그 부엌은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고, 또 밤이면 컴컴하여 불을 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때는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이었으나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가던
시절이었습니다. 동네 친구들이 어디선가 주어온 미군 잡지 속의 벗은
여자를 보고 킥킥거리며, 또 무용담처럼 애들이 훔쳐보았다는 어른들의
몸 장난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또래 친구들이 전하는 그 얘기들이 허황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군의 자지가 크다고는 하지만, 결코 어른 팔뚝만 하지는
않고, 그 큰 자지로 여자 보지에 박아도 여자가 피를 철철 흘리지는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죠. 또 그런 짓은 미군이나 부대 앞 양갈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엄마 아버지도 그 짓을 하고, 또 친구들 부모님도 그
짓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박는 짓’의 결과로 나뿐 아니라
너희들도 태어난 것이란 것을 설명하다가, 우리는 결국 치고받고 싸움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가 조숙했던 건 공부 말고도 선생님으로 부터 받은(실은 훔쳐본)
또 다른 덕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안 계실 때도 저는 선생님 방에 들어가, 이 책 저책 뒤져도
선생님은 별 말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보고 싶은 책 꺼내 보라고
권하셨던 거죠. 그런데 선생님이 그런 종류의 책도 가지고 계신 줄은 전
정말 몰랐습니다. 우연히 열어본 서랍 아래쪽엔 노란 서류 봉투가 있었고
그 안에 많은 사진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진이 일본 남녀의 사진이었고
일부가 미국 년-놈들의 사진이었습니다만, 드물게 미군과 일본 여자 어쩌면
한국여자로 보이는 사진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흑백사진이었지만, 지금
처럼 칼라 사진이 아니고 흑백 사진에 채색을 한 사진들도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처음으로 적나라하게 들어난 그것도 잔뜩 꼴려있는 커다란 자지와 번질번질한
보지를 사진으로 보는 것은 어린 나이의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남자 자지가
여자의 보지에 들어가 있는 사진을 보고 이게 친구들이 말하는 ‘박는 짓’이란
것을 바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혹시
다른 사진도 있지 않을까 찾았습니다. 제가 찾았던 다른 사진이란....... 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 당시 그런 생각을 했는지를. 전 그 사진 중에 어쩐지 엄마
사진이 있을 지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사진의 일부는 선생님이 직접
찍으신 사진이 분명했습니다. 학교 조회시간에 운동장에서 훈시 하시는 교장
선생님 사진이 거기 같이 있었거든요. 그 사진과 몇 장의 음란 사진이 새로
인화하여 종이 질이 달랐습니다. 엄마의 모습이 혹시 있지 않을까, 엄마도 이렇게
발가벗고 보지를 다 내놓고 사진을 찍었을까? 그 생각에 가슴은 마구 뛰면서, 또
제 자지는 잔뜩 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엄마 알몸이 있었으면 엄마에
대해 분노했겠죠? 아니면 불행하게도---엄마 사진이 없어 실망도 했습니다. 그런
사진은 없었습니다.
사진을 보고 생긴 여러 궁금한 점을 선생님께 직접 물어 볼까도 생각했었지만,
어쩐지 그럴 성질의 문제가 아닐 것 같아 차마 직접 질문하지는 못했습니다. 학교
교무실에 있는 과학백과사전에 나온 남녀 해부도도 열심히 찾아 봤고, 또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여 저는 몰래, 더 열심히 선생님 책장을 뒤졌고, 그리고
결국 남녀 관계를 설명하는 책자를 몇 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
그중 어떤 책은 마치 학술서적처럼 도식화된 남녀 성기를 그려 놓고 알기 어려운
설명을 해 놓은 책도 있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 책 역시, 그 당시 엄한 검열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그것도 일종의 포르노였던 것 같습니다. 그 책 뒷부분
에는 남녀 교접 자세까지 그림으로 설명 되어 있었으니까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으나 몇 번을 반복해서 읽다보니 제 또래보다 훨씬 앞서 비교적
정확한 성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남자 여자가 자지 보지를 서로 박는 것이
피를 철철 흘려야 하는 고통스러운 행위가 아니라, 남자여자 모두에게 무지무지
재미나는 일이라는 것을 등사기로 야한 그림과 글자가 프린트된 작은 책자를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쨌건 저는 이 음란한 사진들과 서적들에 의해 어느 정도
정신적 충격은 받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대견스러울 만큼 잘 극복하고, 또
이 사건을 통해 섹스라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또 섹스에 대해
보통 사람들 보다 훨씬 더 개방적일 수 있게 되었던 같습니다. 핑계가 될지 몰라도
그렇지 않았다면, 복잡했던 제 삶은 무척 피곤했을 겁니다........
또 딴 데로 얘기가 많이 흘러 버렸네요.
성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과 여자를 생각하거나 또 직접 여자 성기를 볼 때 자지가
단단해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엄마와 여동생이 뒷물 하는 것을 좁은
부엌에 같이 있으면서 들여다 볼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그러고 싶기는 했지만,
이제 엄마와 여동생이 아니 엄마가 이제 보지를 씻을 시간이란 생각만으로도 제
자지가 단단해진 것을 엄마에게 들키기 부끄러웠던 것이죠. 그래서 저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방에서도 들리는 철퍽철퍽 하는 물소리는 항상
제 가슴을 방망이질 시켰습니다. 더 자극적인 것은 엄마가 쭈그리고 앉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보지를 닦을 때 나는 질걱거리는 작은 물소리였습니다. 그 묘한
소리에 제 자지는 예외 없이 잔뜩 꼴리곤 했습니다. 아무리 추워도 저는 부엌에서
방으로 들어가며, 방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방 불을 켜지만 않으면 불이 켜진
부엌보다 당연히 어두웠고, 그러면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척하며, 큰 티를 내지 않고
흘긋흘긋 엄마를 훔쳐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사실, 방안에서 낮은 부엌
바닥에 대야를 깔고 쭈그리고 앉은 엄마의 사타구니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위치적
으로 이미 불가능한 일이였죠.
뒷물을 끝내면 엄마는 치마를 내리고 대야의 물을 밖에 내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부엌 불을 끄고 방에 올라오십니다. 치마를 내려 몸을 가리고 있지만, 엄마의 아랫도리는
벌거벗은 상태이란 것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여동생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
주고 그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았습니다. 저는 방 한구석에서 다른 짓을 하는
척하면서도 결코 엄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얼굴의 물을 다 닦고 나면 엄마는
간혹 치마를 들치고 그 수건으로 젖은 자신의 음부를 닦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돌아서 있어, 정면으로 엄마의 보지를 볼 수는 없었지만 운이 좋으면 스치듯이 엄마의
검은 보지를 볼 수도 있었습니다. 또 치마를 걸친 채 잘 때 입는 몸빼 바지를 입고
나서야 치마를 벗을 때는 훔쳐 볼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간혹 방바닥에 먼저 앉아
속 비치는 헐렁한 반바지(치마 속에 입는 옷인데 정확한 이름을 모르겠네요.)를 입을
때면, 치마를 겉어 올린 상태로 맨 엉덩이로 방바닥에 앉았기 때문에 바지를 올리려면
엉덩이를 들어야 했고, 이때 엄마의 흰 엉덩이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엄마의 흰
엉덩이보다 더 아래 골짜기 사이에 숨어 있는 부분을 훔쳐보려 먼저 자리에 누워보기도
했으나, 제대로 성공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자지는 그때까지도 어김없이 꼴려있었죠.
그러나 엄마의 아랫도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그 무렵, 선생님이 숨겨 놓았던
사진을 발견한 이후 부터였지, 그 이전에는 매일 자기 전에 엄마의 젖을 만지며
자지가 섰어도 엄마에 대해 성적인 욕망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한 쪽 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주사를 많이 맞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결핵에 스트렙토마이신이란 약을 썼는데, 이 약은 이독성, 쉽게
말해 청각 신경에 부작용이 있어 심하면 귀가 멀게도 합니다. 어렸을 때 저는 결핵을
앓았습니다. 지금 가물가물 하지만, 엄마는 한 손에는 여동생 손을 잡고, 저는 업혀서
보건소를 다닌 기억이 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기침을 많이 했고, 항시 마르고 약했던 것 같습니다. 영양 부족이
결핵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엄마는 어린 여동생보다 큰 아이, 저에게 엄마 젖을 먹이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동생을 낳고 몇 년이 지난 다음 아무리 젊은 엄마였기만 젖이
제대로 나왔겠습니까?
안타까운 엄마 마음에 그래도 나오지 않는 젖이라도 물려 보려 했고, 그것이 제가
커서까지(지금까지도...ㅎ ㅎ) 엄마 젖을 물고 빨고 만지는 버릇을 갖게 한 듯합니다.
결핵의 흔적은 지금도 가슴 X-ray 촬영을 하면 남아 있습니다. 청력도 한 쪽이 떨어지긴
했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어서, 군대도 갔다 왔습니다. 만약 사병으로 입대했으면
면제 혹은 방위가 되었을지 모르나 대학 입학하면서, 군의관 입대를 위해 입영 연기
신청을 했고 졸업 후 군의관은 사병보다 신체검사 기준이 까다롭지 않아 현역 중위로
임관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병으로 면제 받는 것보다, 장교로 3년 근무하길
잘 한 것 같습니다. 말 많은 요즘 세상에 거리낄 게 없으니까요.
엄마가 가운데서 자면, 엄마는 여동생 쪽으로 눕는 경우보다는 저를 보고 누우셨습니다.
그것이 단순히 잠 습관일 수도 있지만, 항시 저에 대한 걱정이 앞서 그러셨던 것으로
저는 믿고 있습니다. 간혹 엄마 등 뒤에서 여동생이 손을 뻗쳐 엄마 가슴을 더듬으면,
귀찮다고 뿌리친 적도 있었지만 제가 밤새엄마 젖을 조물락거려도 엄마는 그것을 싫다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엄마의 가슴에서 여동생이 손이 부딛치게 되면 사실 좀
난처하더군요. 3살 차이가 어렸을 때는 큰 차이 아닙니까? 그런데 3살이나 많은 오빠가
엄마 젖을 만지는 것을 여동생에게 들키다니....... 그래도 성격이 무던해서 그런지 제
여동생은 저를 탓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고등학생이 되어 제 방에서 같이 자던
그때, 그녀가 말하기 전까지는 동생은 제가 엄마 젖을 만지고 잤다는 것을 모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그녀는 알고 있엇습니다. 아니 그 이상, 그 이상의
비밀까지도 모든 것을 그녀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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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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