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 그리고 무지개(6)
정희 누님의 조금 다른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그 동안 미국을 오갔던 그녀인지라
특별하게 신경 쓰지 않은 석두에게도 다시 새해가 찾아 왔다.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마음….
1월 2일이 되어 새해 아침도 되고 했으니 식사하러 오라는 말에 꽃을 한 아름 사서 초인종을 눌렀다.
‘ 네! 나가요! ‘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 문이 열리기에 그녀에게 꽃다발을 주며 안으려 하자 그녀가 막으며
거실 쪽을 보고 눈짓을 하기에 얼른 자세를 가다듬고 들어 가니…
김선주 그녀도 와 있었다. 정희 누님이 자신뿐만 아니라 그녀도 초대한 것일 것이다.
[ 호호… 내가 동생으로 생각하는 두 사람이 다 모였네? ]
서로 인사를 나누는 그들을 보고 정희씨가 웃는다.
의외의 장소에서 그녀를 보니 반가웠고 정희 누님이 있어도 닫힌 공간에 그녀와 함께 있으니
기분이 남다르며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들과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외투를 벗은 그녀의 몸매를 밖이 아닌 집 안에서 보니 기분이 묘해지면서
정희 누님보다 조금 키가 작은 그녀가 아담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누님 집인데…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면서 정희 누님에게 따뜻하게 대답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떡국을 먹었다.
그녀가 화장실을 간 사이….
[ 아니, 왜 김선주씨를? ]
그가 소곤대며 묻자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눈길을 하고 손으로 그의 물건을 꽉 잡는다.
[ 호호… 왜? 그럼 안돼? ]
[ 안 된다기 보다는… ]
그러면서 그녀의 앉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다가 화장실 문소리가 나기에 얼른 손을 떼었다.
[ 김선생은… 올해 재혼해야지? ]
[ 아직 생각 없어요! ]
[ 그래도 여자 혼자 살기 쉬운가? 아직 나이도 한창 때인데…. 참, 후배님도 장가 가야겠고? ]
[ 누님은! 저도 아직 별 생각 없어요! ]
[ 하긴 중이 제 머리 못 깎으니….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앉아 있는 게… 은근히 잘 어울리네? ]
[ 누님은! ]
[ 언니도! ]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말이 나왔고 머쓱해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붉힌다.
[ 말 나온 김에… 두 사람 한 번 진지하게 사귀어 봐라~! 내가 보기엔 천생 연분인 것 같은데?
서로 상처 있는 사람들인데 보듬어 주며 살면 좋잖아! ]
석두는 정희 누님이 자신과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것을 들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누님이 나를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한참 동안이나 중간에서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말을 건네던 그녀가 거실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두 사람 앞에 놓는다.
[ 이거… 티켓인데… 나 혼자 보기도 뭐하고… 두 사람 가서 같이 봐! ]
[ 누님이 친구분하고 가시면 될 것을! ]
[ 그러게요! 그렇게 하세요! ]
[ 요즘은 뮤지컬도 재미가 없어서…. 차라리 집에 있는 게 편해. 그러니 두 사람 가서 봐.
만일 안 보기만 해 봐라? 내 성의 무시했다고 가만 안 둘 테니! ]
그녀의 집에 좀 더 머무르다 나오자 그가 그녀에게 티켓을 건네니 그녀도 사양한다.
옥신각신하다… 정희의 성의도 있고 하니 같이 보기로 했다.
며칠 뒤…
편안한 캐쥬얼 차림의 그녀도 멋있다.
그녀와 같이 뮤지컬을 보고 나오자 아직 이른 시간이라 석두는 그녀에게 식사를 사 주겠다며
데리고 갔고 식사를 하고는 커피숍에 들렀다.
[ 누님도 참 별나죠? ]
[ 네! 호호…그런데 언니가 사장님한테 너무 잘해 주시는 거 같아요! ]
[ 네… 맞아요! 별 볼 일 없는 나한테 왜 그리 잘해 주시는지… ]
그 말을 하고 난 석두는 자신의 말을 되새겨 보며 속으로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 하긴… 잠자리에서는 별을 보게 해 주지만! 흐흐… ‘
[ 무슨 말씀을….. 근데… 정말 재혼할 생각은 없으세요? ]
그녀가 커피를 입에 대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아직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거죠. ]
[ 저도 사실 마찬가지인데…! ]
[ 그렇죠? 아무 생각 없이 하루 하루 살아 가는 거죠…뭐 특별한 거 있겠어요? ]
[ 호호… 사장님, 슈퍼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던데요? 너무 열심히 사셔서 탈나지 않을까 걱정되던데…]
[ 하하…그거야 입에 풀칠하려고 그런 거죠! ]
[ 어머! 그 풀칠… 되게 비싼가 봐요? 사장님 한 입 풀칠하려고 그렇게 큰 슈퍼를 운영하시니! ]
[ 네? 하하…. ]
[ 호호호…. ]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나와 서로가 웃다가 눈이 마주치고…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지만 처음보다는 한결 편안한 공기가 감돈다.
[ 그런데… 언니 미국 가신다고 매장 짐 정리하시던데…. 아세요? ]
[ 네? 미국을 가다뇨? ] 그의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
[ 미국에 가서 몇 년간 계셔야 한다고 매장 일 그만두고 짐 챙기셨는데… 모르셨어요? ]
[ 몰랐어요. 아무 말이 없기에… ]
[ 이상하다? 가장 먼저 사장님한테 알렸을 텐데… ]
정희 누님이 미국을 가다니!
그녀와 헤어지고 그녀의 집으로 찾아 가니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국 가서 몇 년 살다니? ]
[ 김선생한테 이야기 들었구나! 뮤지컬은 재미있게 봤어? ]
[ 엉뚱한 말씀 마시고요!]
[ 말 그대로야…. 사실 남편이 미국 총괄본부장으로 발령이 지난 달에 났어! 그래서…가는 거야! ]
[ 그런데… 왜 제게 말 안 하셨어요? ]
[ 말하면… 달라질 거 있겠어? 또 자기 마음만 괜히 뒤숭숭하지…. ]
그녀의 말을 들으니 이미 오래 전에 확정되었고 일주일 후면 떠난단다.
또 한 사람이 떠나 가는구나…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을 위해 주고 아낌없는 사랑을 준 여자인데…
그녀를 생각하면 우울해진다.
금방 하늘에서 눈이 내릴 것만 같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 나 죽으로 가는 거 아니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
그녀의 희망대로 3일간 그녀와 같이 강원도 바닷가로 여행을 간 석두가 아직도 굳어 있자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녀가 달래 준다.
[ 누님 가고 나면… 나 어떻게 살아요? ]
[ 그럼 나 없을 때는 어떻게 살았어? 처음 우리가 만나기 전에도 씩씩하게 잘도 살더구만!
나가도 일년에 몇 번 왔다 갔다 할 거니까 그 때 보면 되잖아? ]
[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나…아직 누님 투자금도 일부밖에 만들지 못했는데… ]
[ 그런 걱정도 하고 있었어? 그거 해 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 그거라도 있어야 나도
나중에 들어 오면 자기 만날 핑계라도 생기지! 그리고 결국 내 재산 묻어 두는 건데…]
[ 하여튼… 누님은 나쁜 사람이요! ]
[ 맞아! 그런 것 같다! 나도 나가고 싶지 않은데…. 사정이 그러니 어떡해? ]
[ 알았어요! 누님 먼 곳에 보내면서 괜히 누님 우울하게 만들었나 보네요 ]
[ 알았으면 3일 동안 나와 같이 있고 날…사랑해 줘! ]
그녀와 같이 눈이 쌓여 있는 백사장을 거닐며 푸른 겨울 바다를 본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순백의 설원에 두 사람의 발자국만이 남겨진다.
강원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 온 그녀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말한다.
[ 전화 번호 바꾸지 않을 거지? ]
[ 그럼요! 누님한테 언제 연락 올 지 모르는데 어떻게 바꿔요! ]
[ 호호… 알았어! 내 들어 오면 연락 할게… 그리고…. 우리 강원도에 가기 전에 김선생을 만났어! ]
[ 김선주씨를? ]
[ 응! 조금씩 물어 보니까… 김선생…사실은 자기한테 관심을 좀 가지고 있더라! ]
[ 하하…또 그 이야기네! ]
[ 말은 안 했지만 자기를 남자로 생각하는 것 같애! 내가 보기에 두 사람 서로 외롭고 힘든데…
보기에도 잘 어울리고 서로 합치면 참 잘 살 것 같아! ]
[ 또 쓸데없는 말씀 하시네! ]
[ 쓸데 없는 말 아냐! 자기 두고 떠나면서 걱정 돼! 전에 모텔에 혼자 박혀서 지내던 것을 생각하면
무지 걱정 돼… 덩치는 큰 남자가 마음은 여려서…그러니까 김선생한테 연락해서 만나 봐! ]
[ 만나서 뭐하게요? ]
[ 호호… 뭐하긴? 남자하고 여자하고 만나서 뭐하겠어? 농담이고….
김선생 태도를 보니 자기가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서면 마음을 열 것 같더라…. ]
[ 김선주씨를 만나라 하고… 누님은 여자가 아니우? ]
[ 아니긴… 나도 여자야! 내가 사랑하던 남자를 왜 다른 여자한테 주고 싶겠어? ]
[ …. ]
[ 알았어? 몰랐어? ]
[ 알았어요…. ]
[ 피~! 속으로는 자기도 좋으면서… ]
그녀가 곱게 눈을 흘긴다.
그녀가 떠나가니 마치 서울이 비어 있는 듯 허전했다.
물론 그녀는 살던 아파트를 전세 주고 대부분을 남겨 두고 짐 몇 개만 챙겨 가 후에 돌아 오겠지만
당장은 그녀가 없는 서울이 허전했다.
예전에 영란이가 있을 때는 영란이가… 정희 누님이 있는 때는 그녀가 버팀목이 되어 주었는데…!
두 여자가 떠난 간 후엔 모든 것이 예전의 혼자로 다시 돌아 왔다.
다시 열심히 일하는 것 외에는 별 할 일이 없어 슈퍼 일에 매달리고
월말이 되면 꼬박 꼬박 정희 누님의 통장에 이익의 반을 입금시켰다.
‘ 어라 보자! ‘
그 동안 자신의 슈퍼와 동업한 슈퍼에서 나온 수익을 계산하니 제법 되었다.
‘ 이 정도이면 대출 끼고 슈퍼 하나는 열 수 있겠는데…하나 더 열어 볼까? ‘
그저 의지할 것은 이제 일과 돈 밖에 없었다.
매장 임대시세가 어느 정도 하는지 조금 알아 보니 그리 비싸지는 않았다.
임대 보증금 내고… 월세는 벌어서 내면 되는데…문제는 인테리어와 상품 초도비이다.
원래의 슈퍼에서 4km 지점에 아파트로 둘러 싸인 적당한 슈퍼 자리를 찾아 내었고
이것 저것 조사해 본 그는 마침내 계약을 치르고 대출을 내어 인테리어에 들어 갔다.
‘ 이제 세 번째 매장이다! ‘
그의 가슴은 다시 처음 슈퍼를 열 때와 같이 벅찬 감격으로 솟아 올랐고
이제 세 개 정도의 슈퍼이기에 좀 더 좋은 상품을 입하하기도 쉬워졌다.
1개월 정도 걸려 인테리어와 상품 입하를 하고 오픈 준비를 하니 벌써 3월이 가까워져 왔다.
‘ 벌써 또 봄이 되었나? ‘
작년 이 맘 때는 영란과 결혼할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있었는데…
세 번째 매장 오픈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나자 갑자기 맥이 빠진다.
‘ 그 동안 매장 오픈 준비한다고 거기에 매달렸다가 그것이 끝이 나니 그런 거야! ‘
매장 오픈 하기 전에 조금 쉬고 싶은 마음에 지방을 다녀 온 석두는 서울로 진입하니
저 넓은 서울 하늘 아래, 자신이 마음 붙이고 지낼 사람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서글퍼지면서 문득 김선주, 그녀가 생각난다.
물론 친척이 있긴 하지만….별로 왕래도 없어 우선 생각나는 사람이 그녀였다.
그녀와 공식적인 연결 관계는 없지만 그래서 현재 자신이 가장 가깝다고 느끼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녀 외에 누가 있겠는가!
또한 누님이 떠나갈 때 만나보라고 신신당부 했는데…
정희 누님의 당부가 아니었더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연락한 지도 오래 되어 이제야 다시 연락하기도 좀 뭐한 기분이다.
그러다가 차의 트렁크에 들어 있는 작설차가 생각난다. 야생이라 향도 맛도 좋다.
주문을 하고 일단 어느 정도 양을 실어 온 것인데…
생각난 김에 의류 매장으로 향해 도착하니 정희 누님의 손 때가 묻은 매장이라 그녀가 그리워지면서
또한 안에 있을 김선주, 그녀로 인해 가슴이 두근거린다.
[ 안녕하세요! ]
[ 누구? 어머! 장사장님 아니세요? ]
[ 네!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사장님은 그 동안 더 아름다워지셨네요! ]
[ 어머! 호호호…. 그렇지 않아도 언니를 보고 싶었는데… 사장님을 보니 마치 언니를 본 듯 하네요! ]
반갑게 맞아 주는 매장 주인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며 가지고 온 작설차를 내밀었다.
[ 이거 지방에 가서 가져온 건데 나눠 드세요! ]
[ 어머! 이런 것까지…. ]
그의 말 소리가 들리자 다른 직원들도 다가 와 반겼고 김선주 그녀도 2층에서 내려와 그를 반겨준다.
[ 어머! 사장님! ]
[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
그가 반갑게 인사하자 걱정과 달리 그녀도 웃으며 그를 대하였고 옆에 있던 매장 주인이 한 마디 한다.
[ 그러고 보니… 장사장님이 나 보러 온 게 아니고 김선생 보러 오셨구나? 맞죠? ]
[ 아…아뇨! ]
[ 호호… 남자가 수줍어 하기는… 김선생하고 나가서 데이트나 하고 오세요! ]
[ 어머! 언니는! ]
[ 아니에요. 여기서 차만 마시면 되는데…. ]
[ 여기서 있는 것 하고 둘이 오붓하게 있는 것하고 같나? 잠시 나갔다 와요! ]
그녀가 김선주의 등을 떠 밀자 그녀는 석두의 뒤를 따라 나가고…
그 모습을 보던 매장 주인이 혼자 중얼거린다.
‘ 언니가 두 사람 맺어지는 게 어떠냐고 하길래 그냥 지나쳤는데… 지금 보니 잘 어울리네!
하긴… 두 사람 다 힘든 사람들이니 서로 의지하고 살면 좋을 것 같다!
그나저나 저렇게 힘있어 보이는 남자가 위에서 눌러 주면 얼마나 좋을까? 오머…! ‘
[ 조금 살이 빠지신 것 같네요? ]
[ 그래요? 별로 모르겠는데… 잘 지내셨어요? ]
[ 네… 저야 늘 매장에 있으니… 사장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수척해지신 게 바쁘셨나 봐요… ]
[ 약간 바쁘긴 바빴죠. 매장 하나 더 연다고 그거 준비 좀 하고요! ]
[ 어머! 그러세요? 새로 매장을 여신다고요? ]
[ 네! 00 에 매장 오픈 준비를 다 하고 이제 며칠 있으면 오픈해요! ]
[ 축하 드려요! 사장님 대단하시다! 거긴 저희 집에서 가까우니 앞으로는 거기 이용해야 하겠네요! ]
[ 그 주변에 사세요? ]
[ 어머! 전에 슈퍼에 있을 때 어디 사느냐고 물어 봐 놓으시고는! ]
[ 아차차! 그렇죠… 그러고 보니 거기서 가깝네요! ]
[ 네. 앞으로 많이 이용할 테니 싸게 잘해 주세요! ]
[ 하하… 선주씨한테라면 그저도 드리죠! ]
그 말을 하고 조금 어감이 이상해 머리를 긁적이자 그녀가 웃는다.
[ 정말… 공짜로 주실 거에요? 호호… ! ]
[ 네! 드리죠! ]
정말, 그녀라면 공짜로 줘도 전혀 아깝지 않을 것이다.
[ 호호…아니에요! 오랜만에 뵙는데 잘 되셨다니 저도 기분 좋으네요! 저도 별로 변한 거 없죠? ]
[ 아뇨. 좀 변하셨는데요! ]
[ 변하다뇨? 어디가요? ]
[ 안 뵙는 동안 더 아름답고 예뻐지셨네요! ]
[ 어머! 사장님은! ]
그녀가 그 귀여운 얼굴에 홍조를 띄며 수줍어 한다. 참 예쁜 여자다.
[ 선주씨! ]
[ 네? ]
[ 슈퍼 연다고 바빠 선주씨한테 연락도 못해 미안해요. 앞으로… 가끔 전화 드려도 되죠? ]
[ …. 네! ]
그녀의 시원스런 답을 들으니 밖의 봄 기운이 석두의 가슴을 파고 든다.
[ 석두냐? 애비다. 큰 집 조카가 결혼한다는데… 너도 올 거냐? ]
전화기에 울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조심스럽다. 행여 이혼한 아들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봐….
[ 누구?… 큰 집에 조카면…미영이요? ]
[ 응! 곧 결혼한다고 청첩장이 왔더구나! ]
[ 아버지는 가실 거죠? ]
[ 당연히 가 봐야지! 너는 어떻게 할 거냐… ]
[ 가 보긴 가 봐야죠…. ]
[ 그럼… 네가 알아서 해라! ]
영란과 이혼할 때 몸져 누우셨던 부모님이었는데 석두보다 나이도 훨씬 적은 미영이가 결혼한다니
아버지,어머니도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닐 텐데 사람의 도리가 있으니 가 보시는 것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참 같은 하늘 아래 있어도 큰 집하고는 별로 왕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장남이라며 전답을 팔아 큰 아들에게 주어 일찍부터 서울로 올라와 기반을 잡은 큰 아버지는
자신의 부모님과 달리 제법 사는 형편이며 집안도 넉넉한 편이다.
큰 아버지는 잘 먹고 잘 살아서인지 나이는 아버지보다 많은데 얼굴 주름은 더 적다.
그렇지만 큰 아버지가 원래 가슴이 넓은 위인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자
못 배우고 없이 살고 있는 동생인 석두의 아버지를 은근히 무시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그것을 보고 자란 석두가 서울에 올라 와서도 왕래를 자주 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 나이도 있고 아버지 체면도 있으니 마냥 남마냥 그렇게 있을 수는 없다.
‘ 가긴…가야겠지…! ‘
벌써 미영이가 그렇게 컸나 보다! 꼬마 같은 애였는데….
지난 번 자신의 결혼식 때에는 큰 아버지 혼자만 달랑 오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볼 기회가 없었다.
호텔에서 치러진 결혼식은 사는 집안답게 화려하게 치뤄졌지만
석두는 한 쪽에서 주름진 얼굴을 하고 앉아 계신 부모님을 보니 너무 안되어 보이신다.
부모님은 조카의 결혼식을 보고, 또 이혼한 아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결혼식이 끝나자 큰 아버지가 집에 가자고 하신다.
[ 동생 내외도 왔고 석두도 오랜만에 봤는데 집에 가자! ]
큰 집에 들어가니 제법 큰 단독 주택에 넓은 마당이다. 늘 석두에게 초라한 맘을 들게 한 마당이다.
기르는 개가 살이 피둥피둥 쪄 있고 먹고 있는 사료를 보니 석두가 아는 사료이다.
‘ 저 사료는 내가 먹는 밥값보다 더 비싼데…. ! ‘
집에 들어가 앉자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고 큰 아버지 내외와 부모님, 그리고 사촌 형님 내외,
또한 다른 친척분들도 함께 모였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 중… 석두에게 친근하게 대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있다면… 사촌 형수님 정도일까….
몇 번 보지는 않았지만 괜찮은 미모에 마음씨도 고운 편에 속하고 사촌형님과 중매를 하여
결혼했다고 하는데 넉넉한 집안에서 구김살 없이 성장해서인지 성격도 활달하면서
그나마 석두와 부모님에게 편견을 갖지 않고 대해 주는 편이다.
[ 석두도 재혼해야 되지 않냐? ]
큰 아버지가 툭 던지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여졌고 아버지, 어머니의 눈도 그를 향하신다.
[ 가긴 가야겠죠…. ]
[ 가야지… 요즘은 뭐해? ]
[ 슈퍼마켓 해요… ]
[ 슈퍼마켓? 남자가 좀스럽게 슈퍼마켓은…. 내가 일자리 하나 알아봐 줄까? ]
[ 고맙지만 됐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계획이…. ]
[ 쯧쯧… 슈퍼마켓에 무슨 계획이… 동생도 아들 때문에 참 고민이 많겠구만! ]
혀를 차던 큰 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마치 내 자식은 문제 없는데 자네 자식은 이혼이나 하고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자 순간 석두의 가슴에서 뭔가 치밀어 오른다.
[ 아버지! 언제 내려 가실 거에요?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
[ 아니다! 난 열차 타고 내려 가면 된다.]
아버지를 보니 그 동안 자신이 슈퍼마켓만 매달렸지 부모님에게 뭐 변변한 것 하나 해 드리지 못한 것을
깨닫고는 조금 모시고 싶지만 며느리도 없는데 이혼한 자신을 봐야 한숨만 더 나오시겠냐 싶다.
답답한 마음에 작은 방으로 들어가 하릴 없이 책장에 꽂힌 앨범을 펼쳐 건성으로 구경하는데
보다 보니 사촌 형님과 형수님이 찍은 사진들이다. 여긴 서재인데…
가만히 들여다 보니 사촌 형님도 멋있고 형수님도 미인 축에 속한다.
그렇게 앨범을 건성으로 넘기며 반쯤이나 보았을까….
그 때 문이 열리며 사촌 형수님이 음료수를 가지고 들어 와 그에게 건넨다.
[ 늘…. 우리 집에 와 봐야 아버님이 저러시니…. ]
[ 괜찮아요! 제가 못나서 그렇죠! ]
[ 별 말씀을 다 하세요! 근데… 슈퍼 하시는 건 잘 되세요? ]
[ 그럭 저럭 되네요! ]
건성 건성 대답하면서 앨범을 넘기던 석두는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띄자 손을 멈췄다.
[ 어? ]
그가 약간 놀라면서 사진을 보자 사촌 형수님이 다가 와서는 그 사진을 본다.
[ 우리 앨범이네… 왜요? ]
형수님이 다른 여자 두 명과 찍은 사진인데….20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그렇지만 눈에 익은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분명 지금과는 조금 달랐지만 가운데에 서 있는 여자는 분명 정희 누님이었다.
[ 여기…. 이 여자…. 누구 닮은 것 같아서요…..]
[ 닮다니? 누구를 닮았어요? ]
[ 혹시… 이 여자 분 이름이…. 윤정희씨 아닌가요? ]
[ 어머! 삼촌이 정희 언니를 어떻게? ]
[ 맞아요? 그런데 언니라니? ]
[ 고등학교 선배 언니에요…또 같은 동네에 살았고… 근데 삼촌이 어떻게? ]
[ 네… 맞구나! 실은 이 분이 제 슈퍼마켓에 투자를 하셔서…. ]
[ 어머! 언니가 삼촌한테 투자를? 이 언니가 얼마나 까탈스러운데…. ]
[ 그래요? 제가 보기엔 성격이 시원시원하시던데…. ]
[ 언니가 변했나? 작년 매장에서 봤을 때도 그렇지 않던데… 삼촌 명함 하나 주세요! ]
[ 명함요?……. 여기요! ]
그가 명함을 건네자 사촌 형수님이 그것을 들여다 본다.
[ 갑자기 왠 명함을? ]
[ 호호… 언니가 투자한 슈퍼마켓이 어떤 곳인가 좀 보려고요! ]
밝고 명랑한 사촌 형수님과 이야기를 하니 마음이 조금 풀린다.
큰 집을 나와 부모님에게 따뜻한 겨울 옷을 사 드리고 역에 모셔다 드리면서
현금을 제법 찾아 아버지에게 드리니 네 사업하는데 애비가 되어 한 푼 보태주지 못해 미안한데
너나 쓰라고 하시는 것을 석두는 굳이 아버지 주머니에 넣어 드렸다.
큰집 일에 괜히 기분만 언짢아진 석두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선주에게 전화를 했다.
‘ 혹시 시간 되세요? ‘
‘ 네! 뭐 특별한 일이 없으니… ‘
‘ 그럼 같이 식사라도 하고 싶은데…. ‘
‘ …네! 나갈게요! ‘
큰집 일 때문에 더욱 그녀가 가슴에 와 닿는다.
그녀와 만나 영화를 보고 식사를 했다.
[ 오늘 사장님 때문에 재미 있는 시간 보냈네요! ]
[ 그랬으면 다행이에요! 저도 선주씨 때문에 즐거웠어요! ]
[ 영화 재미 있었죠? 참 오랜만에 영화 본 것 같아요! ]
[ 네! 근데 영화는 액션이 좀 좋지 않나요? ]
[ 어머! 치고 싸우는 그게 뭐가 좋다고! 영화는 그래도 잔잔한 사랑이야기가 좋잖아요! ]
[ 사랑이야기요? 그거… 재미 없어요! 영화는 뭐라 해도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죠! ]
[ 아니에요! 심금을 울리는 사랑이야기가…. ]
[ 어허… 액션이라니까요! ]
[ 호호…. ]
[ 하하…. ]
오랜만에 기분 좋게 그녀와 같이 웃으니 한층 그녀와 같이 가까워진 것 같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 줄 때 그녀가 한 마디 한다.
[ 사장님. 오늘 참 즐거웠어요! ]
웃으며 들어가는 그녀를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매장에서 박스 옮기는 것을 보고 있다가 자신도 몇 개 옮기는데 입구에서 조금 안면이 있는
사람이 서성이는 것이 보여 좀 더 주의해서 보자 사촌형수님이라 그 쪽으로 갔다.
[ 형수님이 여긴 어쩐 일로? ]
[ 어머! 삼촌! 여기가 삼촌이 운영하는 슈퍼마켓이에요? ]
[ 네! 그런데… 여긴….? ]
[ 저 번에 한 번 와 본다고 했잖아요! 잠시 구경 좀 할게요! ]
몇 분 동안 찬찬히 매장을 둘러 본 그녀를 데리고 근처 커피숍으로 갔다.
[ 삼촌, 순 엉터리다! ]
[ 엉터리? 뭐가요? ]
[ 저게 어떻게 슈퍼마켓이에요? 작은 마트 정도 되겠는데…. ]
[ 마트는 무슨… 슈퍼마켓이에요! ]
[ 난 슈퍼라 해서 조그마한 구멍 가게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돌아 보니 상품도 좋은 것으로만
갖다 놓았고 규모도 제법 커서 주부들이 좋아하게 만들어 놓으셨네요. 저 슈퍼에 정희 언니가
투자를 했어요? ]
[ 아뇨! 저건 제 것이고 윤정희씨가 투자한 것은 따로 있어요.]
[ 어머! 그…그래요? 삼촌 대단하다! 저게 순전히 삼촌 거란 말이에요? ]
[ 임대 건물인데요. 뭘…. 그리고 그냥 재미 붙일 게 일 밖에 없어서…. ]
[ 그래도 대단한 거에요. 두 슈퍼를 운영하시려면 얼마나 바쁘시겠어요! ]
[ 이번 주에 하나 더 오픈 하긴 해요! ]
[ 어머! 하나 더? 거기에도 정희 언니가 투자했어요? ]
[ 아니에요. 그건 또 제가 여는 거에요! ]
[ 삼촌. 정말 밉다! 이번 주에 새로 매장을 오픈 하면서 우리한테는 왜 연락을 안 하셨어요?
아버님이 좀 섭섭하게 대하긴 하시지만…저나 애 아빠한테는 연락하셔야 될 것 아니에요… ]
[ 죄송합니다! 그냥 조용히 오픈하려고 하다 보니… ]
[ 알았어요! 정희 언니가 투자한 슈퍼에도 가 볼 수 있어요? ]
[ 그럴까요? ]
그가 사촌 형수님과 함께 제2매장으로 가서 구경을 시켜 주고 다시 돌아 왔다.
[ 그럼 정희 언니가 투자하고 삼촌이 운영해서 이익금을 나눈단 말이에요? ]
[ 네. ]
[ 음…. 정희 언니가 투자했다면 삼촌을 엄청 믿었다는 거에요. 정희 언니 까다롭기로 유명하거든요!]
[ 그런가요? ]
[ 그럼요. 슈퍼를 돌아 보니 새삼 삼촌이 다시 보이네?! 호호 ]
[ 다시 보이긴요! 형님이 운영하는 회사에 비하면 이건 뭐 내 세우기도 힘든 건데….]
[ 그건 경우가 틀리잖아요. 그이야 시아버님이 사 놓으신 땅값이 올라 그것으로 회사 차렸지만
삼촌은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한 건데….저런 사업체를 가지고 있으면 집안 살림 맡길 사람도
필요하고 마음 놓고 일하시려면 재혼도 하셔야 할텐데…? ]
[ 하긴 해야죠… 아버지, 어머니 생각하면 하긴 해야겠죠. ]
[ 당연히 그래야죠. 그래…. 사귀는 사람은 있어요? ]
그 동안 왕래가 별로 없다가 만난 사촌 형수님이 묻자 뭐라 대답할 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 실은… 마음에 둔 사람은 있어요. ]
[ 어떤 여자에요? ]
[ 의류 매장에 다니는 여자에요 ]
[ 미혼 아가씨? ]
[ 아뇨. 그녀도 결혼한 지 일년 만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어 혼자 된 여자에요! ]
[ 네에~~! 어떻게 만나셨는데요? ]
[ 슈퍼에 취직하러 왔기에….그러다가 정희 누님이 의류 매장으로 데려가 저하고 연결시키려 했죠! ]
[ 그래요? 정희 언니가…. 근데 정희 언니를 누님으로 불러요? ]
[ 네! 학교도 같은 학교를 나와서인지 누님으로 부르라고 해서 그렇게 불렀는데요! ]
[ 어머! 정희 언니와 상당히 가깝게 지냈나 보다?! ]
사촌 형수님이 묘한 눈길로 바라보자 순간 얼굴이 약간 붉어진 석두는 짐짓 표정을 바꾸었고
그녀 역시 본래의 눈길로 돌아 갔다.
세 번째, 제3의 매장이 오픈을 하였다.
김선주씨와 의류 매장의 사람들이 와 축하를 해 주어 무엇보다 반가웠고 사촌형수님도 오셨다.
[ 저 여자에요? ]
오픈 하는 동안 석두가 유달리 챙겨 준 김선주를 가리키며 사촌 형수님이 묻자
석두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면 고개를 끄덕인다.
[ 참해 보이네요! 전에 그 영란인가… 그 여자보다는 훨씬 나아 보이는데…! ]
[ 그…그런가요? ]
[ 네! 얼굴도 귀엽고 몸매도 참 이쁜걸요! 저 여자하고 결혼하면 삼촌 대개 좋겠다! 호호 ]
[ 형수님은! ]
[ 호호… 삼촌 얼굴 붉히는 것 좀 봐! 남자들… 몸매 이쁜 여자 좋아하잖아요~! ]
[ 하하… 몸매야 어디 형수님 따라 오겠어요? ]
[ 어머! 삼촌도 아시긴 아시네?! 호호… ]
아닌 게 아니라 몸매와 얼굴로 따진다면 형수님도 정희 누님에게 빠지지는 않는다.
오픈식이 끝나고 장사가 시작되어 바빠졌고 오픈이라 그런지 발 디딜 틈 없이 손님이 가득찼다.
언제 사촌 형수님이 갔는지도 모르게 바빴다.
제3매장도 생각한 대로 장사가 잘 되니 더 바랄 것이 없는 정도였고
오픈 며칠 동안 선주에게는 전화만 하고 만나지는 못했다.
이제 며칠이 되어 매장이 안정되었고 좀 한가하다 싶어 선주에게 전화를 하려는데…
사촌형수님한테서 전화가 왔고 그녀를 커피숍에서 만났다.
[ 장사 잘되죠? ]
[ 네…. 그럭 저럭…. ]
[ 잘 될 것 같더라구요. 그 여자분하고도 잘 되세요? ]
[ 며칠 동안 바빠서 만나지는 못했어요! ]
[ 정희 언니하고 이야기 해 보니 그 여자… 참 괜찮다고 하더라구요! ]
그 말을 듣고 있던 석두의 눈이 둥그렇게 떠진다.
[ 정희 누님하고 통화해 보셨어요? ]
[ 어머! 그럼 삼촌은 언니하고 친하면서 미국 전화 번호 모르세요? ]
[ 네…. ]
[ 어쩜…. 전 알고 계실 줄 알았죠… 전화 번호 가르쳐 드릴까요? ]
[ …. ]
[ 호호… 적어 드릴게요! ]
그녀가 메모지에 전화 번호를 적어 그에게 건네자 그는 그것을 접어 수첩에 넣고는
얼굴을 들자 사촌 형수님이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 본다.
어두운 커피숍의 조명에 그녀의 묘한 표정이 석두를 긴장하게 만든다.
[ 삼촌…. ]
[ 네? ]
[ 삼촌…. 정희 언니하고 아주 가깝게 지냈죠? ]
[ 물론 가깝게 지냈죠. 누님 동생하며 지냈으니 가깝다면 가까웠겠죠…. ]
[ 그보다 더….다 알고 있어요! ]
그녀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
[ 아…아니에요! ]
[ 아니긴요! 정희 언니와…. 남자와 여자로서 가깝게 지냈죠? ]
그녀의 집요한 질문이 계속되자 이미 사촌 형수님이 다 아는 것 같았다.
정희 누님과 통화하면서 만약 정희 누님이 말해 주었다면….
[ 어…어쩌다 보니 그…그렇게…. ]
석두는 체념하며 인정을 하자… 그녀가 놀라 입을 벌린다.
[ 어…머머! 저…정말요? 나…난 정희 언니가 삼촌 이야기할 때 너무 정이 담뿍 담겨 있는 것 같아
그냥 삼촌을 넘겨 짚어 본 것인데…. ]
[ 뭐…뭐라고요? ]
[ 서…설마 했는데…. 삼촌이 언니와 연인 관계였다니! 세…세상에 이런 일이! ]
한동안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던 사촌 형수님이 은근히 묻는다.
[ 정말, 정희 언니와 애인 관계였어요? ]
[ 그…그런 건 아닐 거에요. 그냥 누님이 동정심으로…. ]
[ 호호… 정희 언니가 어떤 사람인데 아무 남자와 애인이 되어 섹스 하겠어요!]
목이 타 물을 마시던 석두는 형수의 그 말에 물이 코로 들어가 콜록거렸다.
성격이 밝고 명랑한 건 알았지만…그래도 시동생인 자신에게 ‘섹스’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 삼촌 놀라시긴! 알 거 다 알면서 그런 말에 놀라요? ]
[ 그…그게! ]
[ 우리가 뭐 예전 세대인가요? 그러고 보면 삼촌은… 행동은 신세대인데 생각은 좀 구세대인 것 같애!]
[ 그…그런가요? ]
[ 네! 근데… 언제부터 관계를 가졌어요? 설마 그것 때문에 영란씨와 이혼한 건….? ]
[ 아니에요. 영란과 이혼하고…조금 다운되어 있는데…어쩌다 보니…누님이 동정심으로… ]
[ 호호… 알만 하네요! 그렇지만 정희 언니가 동정심으로 남자와 섹스 할 사람은 아니에요!
삼촌의 뭐가 마음에 들어 정희 언니가 애인이 되었을까? 궁금해지네… ]
사촌 형수님의 야릇한 눈빛을 접한 석두는 물만 벌컥벌컥 마신다.
[ 너무 걱정 마세요! 누구한테도 이 이야기는 하지 않을 테니 긴장하지 마세요! ]
[ 저…정말이죠? ]
[ 그럼요. 괜히 뭐 하러 이야기해요…그리고 남자들… 대개 그런 경험 가지고 있잖아요? ]
[ 글쎄요! ]
[ 근데 정희 언니하고 나이 차이가 제법 되는데… 괜찮았어요?]
[ 그…글쎄요! 그…그런 건 자…잘 모르겠던데…. ]
[ 호호… 하긴 남녀간 서로 좋아 섹스 하는데 몇 살 차이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정희 언니와는…. 재미 있었어요? ]
[ 혀…형수님도…참! ]
[ 호호… 아유~! 재미 있어라! ]
그녀가 가고 나자 석두는 오피스텔에 들어가 미국의 시간이 오전이 될 쯤 전화를 돌렸다.
‘ 여보세요? ‘
익숙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고도…보고 싶어진다.
‘ 누님! ‘
‘ 어머! 자기? ‘
‘ 네… 잘 계셨어요? ‘
‘ 응! 어떻게 지내? 내가 전화 못해 줘서 미안해…. ‘
‘ 왜 전화 안 주셨어요? ‘
‘ 김선생하고는 잘 되어 가? 내가 전화하면… 김선생하고 잘 안될까 봐…. 미안해! ‘
‘ 그래도 너무 하셨어요! ‘
‘ 아이구! 우리 또 덩치 큰 애기 투정이네! 근데 전화 번호는… 아 참! 혜영이한테 들었겠구나! ‘
‘ 혜영이라뇨? ‘
‘ 어머! 자긴 사촌 형수 이름이 어떻게 되는 지도 몰라? ‘
‘ 그…그렇네요! 맞아요! ‘
‘ 너무했다! 근데 자기 목소리 들으니 무지 보고 싶다! 매장 또 하나 냈다면서? ‘
‘ 네! 누님 가고 나니 할 게 그것밖에 없어서…. ‘
‘ 호호… 알만해! ‘
그녀와 제법 긴 시간을 통화하고 나서 사촌형수에게 잘못해서 둘의 관계가 탄로났다고 하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신경 쓸 거 없다면서 안심 시켜 준다.
그녀와 통화를 하고 나니 전화로 이야기 할 때보다 더 그리워지고 보고 싶어진다.
김선주와의 데이트를 가졌다.
아직 이른 봄이지만 이미 옷이 바뀌고 허리에 있는 벨트가 그녀 허리의 날씬함과 함께
풍만한 젖가슴의 볼륨과 엉덩이를 두드러지게 한다.
일찍 핀 개나리와 진달래가 앙상한 나무들 사이에서 그 자태를 뽐내고 있듯이
그녀의 귀여운 얼굴과 몸매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야외에서도 특별해 보인다.
물론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것이니까 당연하겠지만….
그녀와 웃고 이야기하고… 거니는 것이 좋았으며
무엇보다 이제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해 주는 그녀의 변화가 무척 반가웠다.
매장에서 일을 하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사촌 형수님의 전화가 왔다.
반찬을 좀 만들어 가져 왔다기에 그가 마중을 나가 반찬을 받고 식사를 대접하자
굳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구경하겠다고 하여 오피스텔에 들어 갔다.
[ 호호… 삼촌답지 않게 되게 깨끗하다! ]
[ 하하… 형수님도! 저다운 게 지저분한 건가요? ]
[ 호호…그런 건 아니지만…. 아늑하고 좋으네요! ]
여기 저기 둘러 본 그녀는 침대 가에 앉아서는 그가 주는 음료수를 마시다가 묻는다.
[ 요즘 그 여자와 잘 되어 가세요? ]
[ 그냥 그럭저럭…. ]
[ 그럭 저럭이 어느 정도에요? 섹스는… 했어요? ]
그녀 입에서 다시 ‘섹스’라는 말이 나오자 당황하는 석두였다.
[ 아~이~! 어서 말해 보세요! 정희 언니는 잘도 건드려 놓고 그 여자는 왜 뜸을 들여요? ]
눈을 흘기며 말하는 형수님을 보고 얼굴이 붉어지자 그녀가 다시 앞에 앉은 그의 무릎을 짚고 말한다.
[ 말해 보세요! 궁금하잖아요! ]
[ 아…아직! ]
[ 어머! 아직도 섹스를 하지 않았어요? 언니 말 들으니 만난 지 제법 지난 듯 하던데…. ]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섹스’라는 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벌써 몇 번째 듣는 이야기가 되자
그게 형수님의 성격인 것 같았고 그녀에게는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야 눈치가 있으니까 힘들지만 둘만 있으니 성격대로 말하는 것일 게다.
[ 여자는 말이에요! 싫어하는 사람이 아닐 경우 섹스를 하면 자연히 마음도 따라 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삼촌이 우유부단하게 멈칫거리지 말고 기회 봐서 안으세요! 그래야 진도가 빠르지… ]
그녀의 화끈한 말에 얼굴이 달아 오르면서도 한 편으로는 정희 누님과의 관계가 탄로날 염려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되었다.
[ 그…그래도 그녀 마음을 잘 모르겠는데… ]
[ 호호…너무 재지 말아요! 이거 저거 다 재고 여자한테 접근하면 이미 늦어요!
혹시 알아요? 그 여자도 삼촌하고 섹스하고 싶을지! ]
그녀와 민망스런 대화가 오고 가고 나니 이제 자신도 그녀에게 적응이 된다.
다시 형수님이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 근데… 삼촌. 정희 언니가 잘해 줬어요? ]
[ 자…잘해 주다뇨? ]
[ 아이~! 다 알면서! 정희 언니가 잠자리에서 삼촌한테 잘해 주었냐고요! ]
정말, 대책이 안 서는 형수님이다.
[ 뭐…그…그렇죠! ]
[ 호호… 정희 언니… 몸매 참 이쁘죠? 삼촌… 횡재한 줄 알아요! ]
그리고는 침대의 바닥을 손으로 쓸어 보며 다시 야릇한 표정으로 묻는다.
[ 여기서…. 정희 언니하고 섹스 했어요? ]
그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웃으면서 요염한 엉덩이를 흔들고 나간다.
4월 중순의 놀이 공원 벚꽃이 만발했다.
선주와 걷고 있는 위로 조명과 화려한 꽃 잎이 어우러져 환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그 환상 속을 거닐다가 잠시 멈춰 서서… 그녀의 팔을 잡아 자신의 팔짱를 끼게 하자
벚꽃보다 더 이쁘게 홍조를 띄며 그의 팔을 살며시 잡는다.
가끔씩 와 닿는 그녀의 부드러운 젖가슴의 감촉이 더 없이 좋았다.
벚꽃을 즐기려 나온 인파가 제법 많았고 연인도 많았는데
석두의 눈에는 그 중 단연코 허리에 벨트를 두르고 자신의 팔짱을 끼고 걷는 그녀가 최고였다.
[ 선주씨. 우리 사진 하나 찍을까요? ]
[ 네.. 사장님! ]
[ 그… 사장님이란 소리 그만 하세요! ]
[ 호호…그러면 어떻게 불러 드려요? ]
[ 글쎄요. 이름을 부르던가? ]
[ 석두씨? 호호… 이름이 조금… ]
[ 그럼…. 자기라고 부르시죠! ]
[ 어머! 사장님은! ]
그의 팔을 살짝 치고 눈을 흘기는 그녀가 누구보다 귀엽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녀와 같이 얼굴을 붙이고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자 뺨에 와 닿는 그녀의 뺨이 촉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