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恐皇) 4부 <신들의 황혼> Part 6_40편
슈발츠는 에일리스트레이는 죽었지 않았느냐 하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사제들의 신성 마법은 진짜였다. 비록 소문과는 달리 다들 제대로 갖춰 입고 있다는 점은 불만이었지만(에일리스트레이 교단 사제의 [정복]은 나체다). 나체로 적과 맞서기보다는 갑옷을 입고 맞서는 편이 훨씬 더 나을테니.
" 벨드린, 이제 좀 상태가 나아 졌나? 걸을 수 있겠나? "
조금 나이먹은 인상의 여성 사제은 슈발츠를 향해 벨드린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흑요석 색의 비늘이 아닌, 드로우 특유의 검은 피부가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지금 슈발츠는 그 자신이 아니라, 벨드린이라는 드로우인 것이다. 이것도 [질문]의 일부인가 싶어 슈발츠는 적당히 어울려 주기로 했다.
" 아아, 괜찮소. "
아까부터 옆에 앉아 있었던 사제의 도움을 받아 일어선 슈발츠는 약간 어지러움을 느끼긴 했지만 다리에 힘을 주고 섰다. 늑골이 아직 다 붙지 않았는지 욱씬거려 왔고 머리속에서 징이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다 무시하고 붙임성 좋게 웃어 보여 주었다.
" 괜찮은가보군, 그럼 계속 가지. "
복잡한 언더다크의 동굴 사이를 누비는 동안, 슈발츠는 기본적인 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다섯명은 모종의 중요한 사명을 띄고 언더다크의 버려진 옛 에일리스트레이 성소를 찾아 가는 중이었다. 임무의 구체적인 내용은 가장 연장자 사제인 라우라 벨라돈(Larula Veladorn; 혼돈 선 드로우 여성 에일리스트레이의 클레릭 19/ 소드 댄서 5)만 알고 있었다. 쓰러진 벨드린(슈발츠)를 간호해 준 것은 비코니아 데버(viconia devir; 혼돈 선 드로우 여성 에일리스트레이의 클레릭 16/로그 4), 조금 어려보이는 인상의 여성 사제은 료나 라칸(Ryona Lakan; 혼돈 선 여성 드로우 에일리스트레이의 클레릭 12)이었다.
슈발츠에게 비아냥거리듯이 말하던 자는 살게라스 로타(Salgeras Rotar; 무질서 중간 드로우 남성 파이터 16)라고 했다. 슈발츠가 [들어 있는]당사자인 벨드린 역시 같은 교단의 투사로, 사제들의 호위역으로 따라 온 것이었다. 움버헐크의 몸통박치기를 당하고 쓰러지기 전까지 슈발츠는 지나치게 그 일에 열심이었던듯, 비코니아가 [몸좀 그만 던지라]고 불평하고 있었다.
" 너는 너무 죽음을 재촉하려는듯이 행동한다, 남자. "/비코니아
"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언젠가는 죽을거, 조금이라도 더 쓸모있게 죽으면 세상에 이로운 일 아니겠소. "/슈발츠
슈발츠가 넉살 좋게 대꾸하자, 비코니아는 더이상 아무말 하지 않고 힐링 포션을 건네어 주면서 아직 다 아물지 않은 갈빗대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 아야야야... "/슈발츠
" 기왕이면 오래오래 살아서 도움이 되는게 어떠한가? "/비코니아
반론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기 때문에, 슈발츠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언더다크는 원래부터 슈발츠의 고향이다. 그리고 슈발츠는 자유를 얻은 후부터 몆년이나 이곳에서 아무것도 없이 맨주먹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동료들까지 붙어 있다. 상처가 점점 회복되면서 컨디션을 되찾은 그는 거칠 것이 없었다.
파앗!... 퍼버벅!...
케에엑!!!...
물가에 매복해 있던 사후아긴 습격자들을 발견하고 처리한 후,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슈발츠는 그대로 물 속으로 걸어가 머리부터 흠뻑 물을 뒤집어 썼다. 사후아긴들이 날린 볼트가 옆구리에 박혀 있던 것을 뽑아낸 후 피와 함게 상처를 씻어 내는 동안, 비코니아가 다가와서 마법을 걸어 주었다.
" 휴... 고맙소. "/슈발츠
" 날 꼬시려 들지 말고, 임무에 집중해라. "/비코니아
" 살게라스는? "/슈발츠
" 그래서 그놈에게 치유마법을 베풀지 않는 거다. "/비코니아
아무래도 살게라스는 비코니아에게 단단히 찍힌 성 싶었다. 그무렵 그 친구는 노골적으로 료나에게 수작질을 걸고 있었는데, 료나가 건 [치유 마법]에 비명에 가까운 신음 소리를 흘리는 그를 보며 슈발츠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 오늘은 여기서 쉬어 가야 겠군. 물도 가깝고... "/라우라
" 저 바위 위쪽이 좋겠군요. "/슈발츠
야영지로 높은 바위 위를 선호하는 이유는 물가로 모여드는 포식자 때문이다. 언더다크엔 신선한 물 위치에 따라 도시가 생겼다 사라질 정도 신선한 물이 부족하고, 누구나 물을 원하기 때문에 수원지는 강력한 포식자들의 사냥터다. 24시간 내내 자지 않을 수 있다면야 모르지만 쉬어야 할 경우엔 물과 최대한 가까우면서도 눈에 뜨이지 않는 곳이 좋은 것이다.
바위틈과 천정 사이의 종유석을 몆개 쳐내서 널찍하게 자리를 만든 후, 귀하신 몸인 사제들부터 먼저 침낭을 깔고 쉬기 시작했다. 그리고 슈발츠는 살게라스보다 앞서 불침번을 섰다.
언더다크의 공기는 눅눅하고 탁하다. 가끔은 탁한 정도를 넘어서서 독성까지 띄고 있다. 물은 물론이고 먹을것 자체가 귀하고, 사방이 유사 인간류를 먹잇감으로 보아 마지않는 적대적인 포식자 투성이다.
그럼에도 드로우는 언더다크에 산다. 물론 자신들이 원해서 정착했던 것은 아니다. 쫒겨 온 것이다. 고대의 크라운 전쟁(엘프들간의 세계 대전)동안 셀다린의 배신자인 롤스를 섬기며 금기시 되는 마법들을 사용했던 드로우들은 태양을 보면 약해지도록 저주받았고, 그 저주 때문에 결국 전쟁에서도 패배했다.
전쟁에서 패한 드로우들을 받아 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태양을 보면 고통스러워하게 되는 저주 때문에 지상에서 정착하는 것도 무리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저주를 건 지상 엘프들을 저주하며, 태양과 종족의 적을 피해 지하로 지하로 쫒겨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언더다크에서의 험한 생활을 시작한 드로우들은 결국 소위 [상층부]언더다크에서의 주요한 종족이 되었다. 세력을 키운 드로우들은 언젠가는 지상을 [수복]할 꿈을 꾸고 있지만, 그 소망은 요원하다. 엘프들의 시대가 가고, 그들이 세계의 패권을 넘긴 인간들은 그 숫자 자체가 엘프나 드로우들과 달랐다. 아무리 드로우들이 표독을 떨어도, 단순히 숫자 비율로만 따져도 드로우 하나에 수백명이 넘는 인간이 대응할 수 있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에일리스트레이는 그런 드로우들에게 지상을 꿈꾸게 해 주는 여신이다. 피와 칼을 통한 정복이 아니라, 선의로 맺어진 인간-엘프 동맹처럼 드로우도 인간과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꿈꾸는 여신이다. 슈발츠는 그 에일리스트레이파 드로우들의 꿈을 이루어 준 적이 있었다. 비록 그가 통치하는 내해의 섬들에 한한 일일 뿐이지만, 춤추는 여신을 신앙하는 드로우들은 인간과도, 아니 고대로부터의 원수나 다름없는 엘프들과도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에일리스트레이 여신이 [죽었다(적어도 기도에 답하지 않는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 그리고 지상 엘프들 중의 많은 숫자가 피부 색이 변하며 셀다린으로 부터 [용서받았을] 때, 슈발츠는 아직 신들간의 사정을 잘 알지는 못했다. 여신인 와우킨을 포섭하고 난 후로 롤스와 에일리스트레이간의 싸움(모녀간의 목숨을 건 전쟁)이 있었고, 그 결과로 에일리스트레이가 죽었다는 사실만 들었을 뿐, 저간의 복잡한 정황은 아직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에일리스트레이 교단의 일을 하도록 [던져진 것이니, 그에게 던져진 [질문]이라는 것도 그 일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좀 더 깊숙한 속사정을 알 기회가 생길 가능성도 있었다.
지금이 과거라면, 과거를 바꾸어야 하는 것인가?... 만약 여신을 살릴 수 있다면, 살려야 하는 것인가?
주변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바위 아래로부터 흐르는 물소리 뿐, 슈발츠의 상념은 깊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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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게라스를 마지막으로 여섯시간의 휴식이 끝난 후, 다시 두시간 동안 사제들의 기도와 명상이 이어졌다. 마법사가 주문책을 보고 주문을 [공부]하는 것 처럼, 사제들도 원하는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명상과 기도가 꼭 필요하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때가 정말로 진정한 무방비 상태이기에, 슈발츠나 살게라스 같은 호위병이 필요한 것이다.
신성한 의식을 위해 피워진 향 냄새 속에서 슈발츠와 살게라스는 서로 갑옷을 걸치는 것을 도와준 후, 각자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어 매복해서 사제들을 지켰다. 그리고 명상이 끝난 후, 침낭과 기타 야영한 흔적을 지우고 자리를 떴다.
슈발츠는 그동안 새로운 몸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드래곤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은 없지만, 드로우들은 지하 생활에 꽤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진화되어 왔다. 벨드린은 굉장히 민첩한 몸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한편으로는 드로우답지 않은 강철 같은 건강의 소유자였다. 언제나 가장 먼저 불침번을 서고, 일행보다 앞서 나가서 위험을 찾아 제압하는 일들을 하는 동안, 미덥지 않은 눈길을 보내던 여사제들의 시선도 누그러들었다.
언더다크는 상층-중층-하층으로 나뉘는데, 하층으로 갈수록 무시무시한 것들이 산다. 여사제 일행이 방문을 원하는 장소는 하층에서도 깊숙한 곳이었다. 때문에 점점 더 전투가 어려워지고 격렬해져 갔다.
" 휴우... "
일행은 무시무시한 아라크노이드 톨 마우서 세마리를 맞아 싸워서 두마리를 죽이고 한마리를 도망치게 만든 직후에, 다시 연속으로 한 무리의 쿠오 토아 순찰대의 습격을 받고 격전을 치르었다. 연속 전투가 끝난 직후에, 일행의 가장 선봉에 서 있었던 슈발츠는 피와 끈적한 점액을 씻지도 못하고 주저앉았다. 살게라스는 그가 쿠오 토아들의 공격을 미리 경고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 시작과 동시에 마비되는 독이 발린 볼트에 맞아 저만치에 쓰려져 있었고, 료나가 그에게 마비 해제 주문을 거는 중이었다.
일행의 지휘자인 라우라의 주변도 피바다였고, 오랜만에 그녀의 은의 바스타드 소드도 끈적한 피와 점액에 흠뻑 적셔져 그것을 닦아내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또한 슈발츠의 담당인 비코니아는, 그녀 자신도 쿠오 토아 세마리를 상대로 심한 악전 고투를 치른 후라 그와 서로 등을 맞대고 주저앉아서 가쁜 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 이런 식으로 가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겠는데. "/슈발츠
" 그래도 가야 한다, 남자. "/비코니아
" 목적지가 머지 않았다. "/라우라
설왕설래하는동안, 료나가 간신히 마비에서 풀려나 일어난 살게라스를 끌다시피 데리고 왔다.
" 계속 여기 앉아있으면 싸움을 피할 수가 없어요. 어서 움직이죠. "
보통은 전투 후에 뒷정리+루팅을 해야 정상이지만, 목적지가 머지 않은데다 전투가 벌어진 장소에 또 다른 몬스터들이 꾀여들 여지가 높았기 때문에, 슈발츠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로부터 물을 한번 뒤집어 써서 대충 응급처치를 끝내고 다시 라우라가 지시하는 방향의 선두에 섰다. 그것은 아래로 향하는 좁고,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갱도였다.
" 물 냄새가 나는군, "
슈발츠가 혼잣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의 눈앞에 수면이 드러났다. 갱도는 침수되어 있었다. 뒤따르던 라우라는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하나의 마법 롯드를 꺼내어 슈발츠에게 수중호흡 주문을 걸어 주고 그들 자신에게도 주문을 걸기 시작했다.
물은 맑고 얼음처럼 차가웠다. 시야를 가리는 것은 없었지만 지독하게 어두워서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암흑시야를 가지고 있는 드로우조차 뚫어보기 힘들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어둠 그 자체), 슈발츠는 동굴 벽을 더듬더듬 더듬어 가며 전진해야 했다. 한참을 동굴 벽을 더듬어 나아가다가,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면서 탁 트인 곳으로 나왔다. 그는 빛의 근원을 알아보기 위해 곧바로 표면으로 헤엄쳐 올랐다.
" 달... 인가? "
거대한 지하 호 한가운데 빛을 내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로 보나 달이었다. 달의 모습을 한 빛을 내는 환영이겠지만. 그 [달 ]주변으로 무너진 신전의 유적이 펼쳐진 작은 육지가 있었기 때문에, 슈발츠는 거기로 헤엄쳐 올라갔다. 다른 일행들도 곧 따라 올라왔다.
" 이곳은 대체 뭐하는 장소요? "/슈발츠
" 여신의 처음의 성역 중 하나. 잃어버린 우리의 위대한 성소다. "/라우라
그제사 슈발츠는 목에 걸고 있는 은 펜던트가 희미한 빛을 내면서 달의 환상에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여신의 가호 없이는 여기로 올 수 없다. 여신의 축복이 깃든 물은 사악한 자들을 얼리고, 달의 환상은 불신자들에게 죽음의 하얀 서리를 뿌릴 것이다. "
자신은 여신을 신앙하지는 않으니, 불신자지 않은가? 슈발츠는 문득 뒷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속으로 뜨끔해 있는 동안, 라우라는 자신의 배낭에서 비단에 포장되어 있는 하나의 크게 휘어 있는 칼 한자루를 꺼내었다. 그것은 중간부터 부러진 상태였지만, 슈발츠가 지금껏 본 가장 강력한 마법검들에 못지 않은 예기와 마력을 흘려내고 있었다.
" 달 아래 춤추는 여신의 이름으로... Dondekman... Dondekman... Dondekman... "
검을 달의 환영 아래 있는 제단 위에 올려둔 후, 라우라를 비롯한 여사제 세명은 동시에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살게라스도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슈발츠도 타이밍 맞춰 함게 경건하게 무릎을 꿇었다.
" Avrakatavra... Avrakatavra... Avrakatavra!... "
여사제들의 기도소리가 점점 강해짐에 따라, 제단위에 올려진 칼날이 눈부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인가 따로 빛나던 그것들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고, 기도가 끝났을 때 그것은 하나의 완전한 칼이 되어 있었다. 초승달 같이 굽은 날을 가진 그 칼을, 라우라는 두손으로 공손히 받쳐 들고 다시 비단으로 포장한 후, 제단에 공손히 예를 올리는 것으로 의식을 마쳤다.
" 크레센트 블레이드가 다시 하나로 합쳐졌으니, 약속된 승리에 한걸음 더 가까워졌도다. "
마지막으로 조용히 내뱉은 라우라의 말에 슈발츠는 그 칼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크레센트 블레이드. 슈발츠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신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명한 이유는, 그 칼이 바로 다름아닌 에일리스트레이 여신 자신을 죽인 칼이기 때문이다. 여신을 죽인 칼을 복원하는 여신의 사제라니?... 슈발츠는 뭔가 심각하게 이상한 느낌에 휩싸였다.
" 칼의 정기는 롤스의 시선을 끌 것이니, 이제 가려져야만 한다. "
비단으로 칼을 감싼 라우라가 주문을 영창하자, 칼에서 나오던 분명한 에너지의 파동이 잦아들었다. 그것을 다시 배낭 속에 집어넣고 호수를 통해 비밀 신전을 나왔을 때, 슈발츠는 (어느 정도 까지는 예측하고 있었지만) 한 무리의 드라이더들을 대동한 드로우 무리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미줄 문양이 세심하게 상감된 드로우 아다만틴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롤스의 여사제들이었다.
" 조금... 많군. "
조금 많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 압도적인 전력차였다. 여섯명의 롤스 고위 사제, 수십의 드라이더와 드로우 전사들의 석궁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으니.
별로 말은 필요 없을 듯 보였다. 서로가 노리는 것이 무언지는 뻔했으니. 하지만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일행의 대표자끼리 설왕설래를 하려는 찰나, 드로우 무리의 뒤쪽에서부터 소란이 일어났다.
" 무슨 일이?... "
우르르르!...
크아악!!
드로우들이 많이 모여 [소란]을 떤 덕분에, 지하 수맥 근처에 둥지를 트고 있던 보라 벌레를 깨운 것이었다. 지하도 바다와 비슷해서 같은 종이라도 더 깊은 곳일수록 더 거대한 포식자가 생겨나는 경향이 있다. 보라 벌레도 이 법칙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언더다크의 상층부 정도라면 그럭저럭 집채만한 크기 정도이지만, 하층부 깊은 곳의 보라 벌레는 수십미터를 가볍게 뛰어넘는 사이즈로 그야말로 괴물. 그 거대한 환수에게 있어 일반적인 드로우는 맛난 영양 간식에 지나지 않는다.
우르르르르!...
크아악!...
으악!...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와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피떡이 되도록 짓이겨진 드로우 전사와 클레릭들, 드라이더들이 허공을 날다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보라 벌레는 드로우 집단 한가운데서 몸통과 꼬리를 이용해 몸부림을 친 후 머리를 들어 올렸는데, 집단의 전열을 흐트러트린 후 맘에 드는 먹이부터 집어삼키려는 수작이었다. 멍하니 보고 있다간 같이 먹이가 될 판이라, 슈발츠는 바로 뒤에 서 있던 다른 여사제들의 손을 붙잡고 끌어당겨 가까운 동굴 통로로 이끌었다. 그제사 그녀들도 정신을 차렸는지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일행의 등 뒤로부터 동굴 통로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점점 급박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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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현실 세계에서의 심해와 언더다크는 공통적인 점이 많습니다.
첫째, 아래로 내려갈수록 환경이 가혹합니다.
둘째,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강력하고 사악한 포식자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개체수 자체는 극단적으로 줄어듦니다.
세째, 아래로 내려갈수록,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가 튀어나올 확률이 더 높습니다.
아득한 과거로부터 살아남은 괴물, 몰락한 초고대 문명의 잔재(위험한 마법과 난마법), 그리고 적당한 보호 없이는 진입조차 힘들 정도로 가혹한 환경으로 인해, 심층부 언더다크는 탐험의 난이도로만 치면 어비스 이상입니다.
P.S 무질서 선 관련 수정했습니다 크흙.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