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유희> - 6~10장
6장. 각성
“잡아 ……, 크윽!”
“크아악!”
대략 수백 명의 복면인이 한 명과 격투를 벌이고 있다. 아니 거의 일방적인 도살이라고나 할까? 이유모를 마성에 사로잡혀 폭주한 제갈지민이 외당당주라는 복면인을 죽이고 도망치자 곧바로 수많은 복면인들이 나타나 그를 공격했다.
처음에 그들은 그를 사로잡으려 했으나 제갈지민이 정상이 아니고 게다가 상상치 못할 괴력을 발휘하자 거침없이 살수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갈지민도 점차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 별로 소용이 없었다.
상처를 입더라도 실로 놀라운 속도로 다시 상처가 회복되는 것이다. 그래도 한계가 있는 것인지 점차 회복되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티가 나지 않았으나 점차 그의 괴력도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놈은 지쳤다. 밀어 붙여라!”
“절대 놓치지 마라!”
그는 서서히 복면인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결국 누군가의 일장을 맞고 그대로 천길절벽으로 떨어졌다. 사흘간의 대수색 끝에 그들은 제갈지민이 죽었다고 판단, 그대로 철수했다.
--------------------------------------------------------------------
“으음 ……, 이곳은?”
어두운 동굴 속, 한 사내가 눈을 떴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음에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고 흠짓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죽은 것이 아니었나? 시체조차 남지 않았을텐데 ……. 으윽!”
갑작스런 두통. 그리고 새로운 기억들이 물밀듯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수천년의 세월 동안 그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지식들이었다. 대략 반나절이 지난 뒤 그는 다시 눈을 떴다. 어느 새 그의 눈빛은 냉정함을 되찾고 있었다.
“이건 재미있군. 환생이라 ……, 그것도 다른 차원에서 …….”
제갈지민, 아니 뱀파이어 로드 블레이드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똑바로 앉았다.
‘유사인종도 몬스터도 없고 마법도 정령도 없다. 그 오만한 도마뱀이나 잘난 신들의 간섭도 없다. 솔직히 그 소림사나 무당파라는 놈들은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
“무림이라 ……. 나름대로 재미있는 세상이야. 그나저나 어디 …….”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그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가 다시 풀어졌다.
“심장에 써클도 없고, 마력도 미약하고 ……. 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겠군. 이곳에서 나이는 이제 십오 세니 시간은 충분하겠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선 이곳이 어딘지부터 알아봐야 겠군. 그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 …….”
순간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황급히 동굴 벽으로 다가가 세심하게 여기저기 살펴보던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피어났다.
“분명 본래는 자연적인 동굴이지만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이 있다. 혹시 이곳은 누군가의 거처인가? 하지만 생명반응은 느껴지지 않는데 …….”
잠시 망설이던 그는 이윽고 거침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동굴을 따라 걷던 그의 눈 앞에 석문이 나타났다. 석문 바로 위에는 중원의 글이 아닌 전혀 낯선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걸 본 그의 두 눈이 커졌다.
“저, 저건? 어째서 저 글이 이 곳 중원에 …….”
굳은 표정으로 잠시 글을 보던 그는 이윽고 한 손을 들어 오망성을 그렸다. 그러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걸 본 그는 자신이 잘못 보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설마 ……, 내가 처음이 아니란 말인가?’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얼굴에는 희미하게 당혹감과 희열이 자리잡고 있었다. 안은 그다지 크지 않은 석실이었는데 가운데에 석탁이 놓여있고 두루마기 하나와 옥합이 한 개 놓여있었다. 또한 석실 오른쪽에 작은 서가가 있었는데 대략 십여 권의 서책들이 꽃혀 있었다.
그는 석탁으로 다가가 두루마기부터 펼쳐보았다. 두루마기에 적힌 글 역시 중원의 언어가 아니었다. 석문 위에 적힌 것과 같은 글자 …….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연자가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나와 같은 세이렌 대륙 출신일 것이다. 내 이름은 …….>
‘역시 잘못 본 것이 아니었어! 틀림없는 세이렌 공용어야.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 이름은 카이렌 크레스트. ‘빛의 탑’의 전임 마스터였다.>
‘뭐? 그 미친 늙은이가 중원에?’
카이렌 크레스트.
마법역사상 처음으로 9서클에 도달한 대마도사였으며, 크레이지 메이지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유는 그가 글자 그대로 마법에 미친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백마법은 물론이고, 정령마법, 심지어 당시 금기시 되어 있던 흑마법까지 익혀 한데 대륙의 공적으로 낙인찍힌 적이 있었으나 당시 드래곤 로드였던 골드드래곤 아킬레오스의 중재로 단지 마탑에서 파문당하는 것으로 무마될 수 있었다.
그 뒤 그는 10서클의 마법에 도전한다며 어디론가 은거해 버렸으며 이후 그의 소식을 들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전혀 다른 차원인 이곳 중원에서 그의 이름을 듣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사라진 뒤 벌써 삼천년이 지났는데 ……. 그러나 이 동굴은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 잘해야 5, 6백 년 정도야.’
<나는 친우인 아킬레오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마법에 도전했다. 바로 차원이동마법이다. 무려 오십 년간의 긴 연구 끝에 결국에는 이곳으로 넘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곳의 인간들은 나를 배척했다.>
<나의 마법과 외모는 이들에게 낯선 것이었다. 그들은 나를 경계했으며 두려워했다. 또한 경멸했다. 마치 세이렌의 인간들이 몬스터를 대하듯이 ……. 그래서 나는 이들이 절대적 척도로 삼고 있는 ‘무공’이라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이곳의 무림인들 중 소위 ‘백도인’이라 불리는 자들은 내 마법을 사술이라고, 나를 오랑캐라고 비하했으나 그들이 ‘흑도’라고 부르는 자들 중 상당수는 내게 동조했다. 나는 그들 중 내 명을 충실히 따를 추종자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즉 나만의 세력을 만든 것이다.>
<어느 정도 세력이 커지자 더 이상 숨기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때 맞춰 내가 의제로 삼은 흑도의 후기지수 하나가 죽었다. 그것을 빌미로 나는 ‘환영문’을 정식으로 세상에 노출시켰다. 그의 죽음은 개인적으로 유감이지만 결과적으로 내게 명분을 가져다주었다.>
<전쟁을 치루면서 나는 의외로 흑백간의 갈등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고 또한 내가 무공을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나는 전쟁을 끝내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어느 새 환영문은 천하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내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나는 실패를 인정했고 그래서 조용히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내게 천하는 중요하지 않다. 환영문이 이겨 마도천하를 이루건 무림맹이 이겨 정도천하를 이루건 나와는 관심 밖이다. 그러나 무공에는 확실히 흥미가 있었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무공과 마법을 동시에 익힐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흑마법과 연금술까지 총동원하여 나름대로 연구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마나 서클도 없고 단전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자에게 전한다. 서가를 보면 내가 창안한 내공심법이 있다. 그것을 익힌다면 마법과 무공을 모두 익히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1써클에서 9써클까지의 흑백마법서와 정령소환술, 연금술에 관한 서책도 있다. 한마디로 내가 가진 모든 마법지식을 전부 서책으로 남겨 두었다.>
<옥합에 있는 것은 과거 내가 세이렌 대륙에 있을 때 운좋게 손에 넣은 레드 드래곤의 드래곤 하트다. 마법이든 무공이든 그대에게 분명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해 남겨둔다.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난다. 고향인 세이렌으로 가게 될 지, 아니면 또 다른 차원으로 가게 될 지는 나도 모르겠다.>
<만약을 위해 비급의 마지막에 내가 사용한 차원이동 마법진을 남긴다. 그러나 한 가지 충고하건데 그대가 최소한 9서클에 이르거나 여기 표현으로 소위 현경의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 절대 마법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경고한다.>
<그대가 얻은 힘으로 이곳 무림을 지키든, 무림정복을 노리든 그대의 의지대로 하라. 혹 주신이 허락한다면 다시 만나기를 ……. - 카이렌 크레프트>
“놀랍군. 천하제일마로 알려진 환영신군이 카이렌이었다니 …….”
두루마기를 석탁에 다시 내려놓으며 그는 나직이 감탄했다.
‘아무래도 차원을 넘어오면서 시간의 오차가 생긴 것 같다. 그곳의 삼천년이 이곳은 오백년이란 건가?’
그는 서책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법의 방식이 기존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래도 마법에 무공을 접목시키느라고 다소 변화를 준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카이렌의 내공심법이 자신의 육체에 꼭 맞는다는 점이다. 마치 자신을 위해 만든 무공 같았다.
“좋아, 익혀주지. 그리고 이곳에 나만의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겠어. 두 번 다시 과거처럼 그렇게 모든 것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두 눈이 굳은 의지로 불타올랐다.
7장. 돌아온 제갈지민
백의를 입은 한 청년이 길을 걷고 있었다. 사내는 객잔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시장하군. 제대로 된 식사는 4년만인가?”
그는 거침없이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점소이가 재빨리 그에게 다가왔다.
“어서 옵시오. 이쪽으로 …….”
사내가 점소이가 안내하는 대로 1층 자리에 앉자 점소이가 입을 열었다.
“저희 만전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희 집에서 자신하는 요리로써는 …….”
그 뒤로 반 시진이나 점소이의 장광연설이 이어졌다. 짜증도 내지 않고 묵묵히 듣고 있던 사내는 점소이의 말이 끝나자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가 말한 요리 전부 가져오게.”
“예? 전부요?”
“아, 그리고 죽엽청 한병.”
말과 함께 점소이에게 금원보 하나를 던져주자 그의 두 눈이 커졌다. 남은 잔돈은 가지라고 하자 점소이의 행동이 빨라졌다. 요리를 전부 가져온다고 해도 최소한 반은 남을 것 같았다. 그런 점소이를 보며 사내는 피식 웃었다.
‘세가가 코 앞인데 굳이 돈을 아낄 필요는 없겠지.’
두 말 할 것 없이 이 사내는 바로 제갈지민이었다. 드래곤 하트 덕분에 무려 삼갑자의 내공을 지니게 된 그는 그가 혼원심법이라 명명한 무공을 8성까지 익힌 상태였다. (비록 드래곤 하트를 반의 반도 채 녹이지 못한 상태였지만) 마법 또한 6서클 유저에 다달해 있었는데 전생의 흑마법에 대한 지식이 확실히 많은 도움이 됐다.
동굴에는 비단 마법서나 비급 등만 아니라 환영신군이 환영문을 떠날 때 들고 나왔는지 약간의 보석도 있었다. 덕분에 돈도 부족하지 않았다. 세가를 지척에 두고 그가 일부러 주루에 들린 이유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날 납치한 자들도 세가에서도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겠지. 이대로 무작정 집으로 가는 것보다 잠시 강호정세를 알아보는 것이 …….’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요리가 나왔다. 음식을 먹으면서 그는 피식 웃었다.
‘인간의 몸을 지니니 이런 장점도 있군.’
보통 뱀파이어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오직 피만 섭취할 뿐 ……. 로드라 할지라도 다만 습관적으로 먹을 뿐 맛이나 냄새를 느낄 수 없다. 허나 제갈지민은 영혼은 뱀파이어 로드의 것이나 육체는 인간의 몸, 당연히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생각보다 괜찮은 음식이었다. 막 술 한 잔을 들이키는 데 기이한 냄새가 났다. 한창 식사 중에 까닭모를 악취가 풍기니 자연 그의 안색이 가볍게 찌뿌려졌다. 허나 내색 않고 냄새가 난 곳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얼굴이 묘해졌다.
“설마 네 놈 혼자 이 많은 음식을 다 먹을 생각은 아니겠지? 음식을 남기면 벌 받는다. 마침 이 거지가 한가하니 기꺼이 수고해주마.”
누덕누덕 기운 옷에 땟구정물이 흐르고 손톱 역시 때가 끼어 새까맸다. 기이한 악취는 바로 그에게서 나고 있었다. 대략 4, 50세 쯤 됐을까? 어쨌든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멋대로 한 뒤에 제갈지민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대로 맞은편에 앉아 거침없이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제갈지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이 거지의 허리로 향했다. 과연 허리에는 일곱 개의 매듭이 있었다.
‘일곱 개이면 이곳 분타주인가 ……. 운이 좋군.’
“저는 제갈세가의 제갈지민이라고 합니다. 혹시 선배님께서는 개방의 고수이십니까?”
“내 허리를 확인했으면서 시치미 ……. 응? 낯익은 얼굴이다 했더니 ……. 사천성에 있어야 할 네가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제갈지민이 일어나 공손히 포권하며 자기소개를 하자 무심결에 대꾸하던 거지가 문득 뭔가 떠올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알기로 제갈지민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 그의 말에 제갈지민의 두 눈이 또 한 번 빛났다.
“혹시 전에 제가 선배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아니,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없다. 네 얼굴을 아는 것은 네 초상화를 봤기 때문이고 ……. 아!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군. 이곳 분타를 맡고 있는 오통달이다.”
“조금 전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인지 …….”
“모르겠다?”
말과 함께 갑자기 오통달의 우수가 뻗어왔다. 절정의 금나수법이었다. 제갈지민은 반사적으로 뒤로 몸을 튕기듯 물러났다. 그리고 당혹한 듯 외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해마다 열리는 오룡지회도 모른단 말이냐? 벌써 3년째이거늘 ……. 네 놈은 대체 누구냐?”
“무슨 말씀입니까? 오룡지회라니 처음 듣습니다.”
“이미 세 번이나 참가한 놈이 모른다니 ……. 그것이 바로 네가 가짜라는 증거다!”
‘이게 대체 무슨 ……, 설마 가짜?’
계속 그의 공격을 피하다 보니 어느 새 밖으로 나와있었다. 오통달의 손속 또한 매서워져 있었다. 순간 그의 손모양이 바뀌었다. 금나술에서 장법으로 ……. 오통달의 기합과 함께 반사적으로 지민의 우수가 휘둘러졌다.
“비룡제천!”
“천망회회!”
폭음과 함께 오통달은 서너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고 제갈지민은 대여섯 걸음을 물러난 뒤 자리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렀다. 사실 전력을 다하면 동수를 이루는 것도 가능했지만 일부로 칠성 공력만 사용한 것이다.
“강룡십팔장 ……. 과연 개방의 성명절기답게 대단하군요.”
“유운보법에 천애유룡수 ……. 분명 제갈세가의 독문절기인데? 이게 어찌된 거냐?”
반신반의하는 그에게 제갈지민이 일어나며 무언가를 던졌다. 처음에는 암기인가 하고 경계하던 그는 살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잠자코 물건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 틀림없이 …….”
“세가의 소가주임을 증명하는 신패입니다. 명색이 개방의 분타주라면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실 수 있겠죠?”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민과 신패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가까이 다가와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아무래도 저희 사이에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할 듯 싶군요.”
“내 생각도 그러하다. 우선 사과하마. 내가 오해했다.”
“아닙니다. 게다가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군요.”
“그런 것 같다. 따라오너라.”
8장. 재회, 그러나 …….
오대세가 중 하나인 제갈세가. 세가를 내려다보며 감상에 젖는 백의사내가 있었다. 그는 지금 세가에서 다소 떨어진 언덕 위에 서 있었다.
‘4년만인가? 드디어 ……, 돌아왔다!’
사내, 제갈지민은 지금 복잡한 심정이었다. 전생에서의 기억 때문이었다. 죽을 때는 인간을 저주하며 결코 다시 태어나도 인간이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막상 환생하여 인간으로 살아보니 지난 십 오 년간의 추억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 정체도 모르는 놈들에게 내 것을 뺏길 수는 없겠지?’
그는 오통달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
<역시 4년전 네가 납치당한 뒤부터 이야기해야 겠지? 그건 혈겸각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당시 우리 개방이 제갈세가의 부탁을 받아 조사한 일이기에 잘 알지. 사실 그 점은 조금 이상한 것이 ……, 혈겸각이 비록 중원삼대살수조직 중 하나지만 오대세가 중 하나인 제갈세가를 건드렸다는 건 말이 안되거든.>
<결국 누군가 배후가 있다는 말인데 ……. 게다가 의외로 너무 쉽게 꼬리를 잡혔어. 마치 자신들이 범인임을 천하에 광고하듯이 말이야. 그 뒤 놈들의 분타나 본거지 등을 알아내는 일도 생각보다 너무 쉬웠고 …….>
<당시 제갈세가보다 오히려 북리세가가 앞장서서 혈겸각을 쓸어버렸지. 어쨌든 명색이 오대세가의 수뇌 아니냐. 그래서 오대세가 모두 나서게 됐고 그렇게 혈겸각은 멸문했다. 당시에 워낙 일이 전격적으로 벌어지는 바람에 누가 막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지.>
<그리고 한편 네 생사를 알아보는데 총력을 기울였는데 ……, 석 달 쯤 뒤에 네가 제 발로 제갈세가에 나타난 거다. 다소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틀림없는 본인이라고 제갈세가주 부부가 증언했다. 다름 아닌 부모가 맞다고 해서 그렇게 진짜임을 인정받았지.>
<그의 말로는 ……, 자기를 납치한 자들이 자신을 실혼인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기회를 봐서 기지를 발휘해 도망쳤다고 했다. 그리고 추격자들을 따돌리지 못해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깨어나 보니 어떤 구렁이를 깔고 누워 있었다는군.>
<즉 자신은 운좋게 구렁이 위로 떨어졌기에 그놈이 완충 역할을 해서 살았고, 구렁이는 자신이 떨어진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거야. 거기에 구렁이의 내단이 극양지기를 지니고 있어서 자신의 고질병을 고쳤다고 했어. 원래 무공을 쓸 수 없는 몸이라며?>
<문제는 그가 자신을 납치한 자들이 마검문이라고 증언한거야. 즉 혈겸각의 배후가 그들이라는 거지. 우리 개방에서 다시 조사에 들어갔어.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전에 그렇게 파헤쳐도 아무 것도 없던 마검문에서 갖가지 증거들이 나왔다는 거야. 물론 마검문은 전면 부인하며 음모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오대세가에 의해 마검문 역시 멸문됐어.>
<어쨌든 그가 돌아온 뒤 얼마 안 있어 제갈유경이 혼인했다. 상대는 물론 그녀의 정혼자였던 북리세가의 소가주 북리천이지. 그렇게 제갈지민과 북리천이 처음으로 만났지. 두 사람은 첫 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해.>
<그 뒤로 두 사람은 개인적인 만남을 자주 가졌는데 실로 우연히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현상과 그들이 만나는 일이 벌어졌지. 그 자리에서 제갈지민의 제의로 오대세가의 소가주끼리 정기적인 모임을 갖기로 했지. 그게 바로 오룡지회다.>
‘오룡지회라 ……. 내가 만약 나를 납치한 신비조직, 그들이라면 …….’
그들은 이미 가짜를 만들어 자신의 역할을 대행하게 했다. 그렇다면 오대세가의 소가주 중 가짜가 한 명 더 있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다섯 명 모두 가짜일 수도 있겠지. 어쨌든 그건 차차 알아보면 되고, 우선 집안청소부터 한다.’
소가주들만 아니다. 아니 오대세가 뿐만 아니라 구파일방에도 그들의 간세들이 암약할 지도모르는 일이다. 그럴수록 먼저 세가부터 확실히 정리해야 했다.
‘분명 교라고 했다. 어쩌면 환영문의 후예일지도 ……. 그러나 너희는 나를 건드린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는 준비해 둔 아행복으로 갈아입고 복면을 썼다. 그리고 세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첫 목표는 바로 그의 아버지, 제갈세가주의 거처였다.
‘무려 4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여지껏 나를 못 알아볼 수는 없다. 설마 …….’
내심 아니기를 빌지만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각오를 다지며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움직였다. 처소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한참 서류작업 중인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다니 우선 칭찬해주지.”
4년만에 만나는 아버지의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고개도 들지 않고 태연히 입을 여는 그를 보며 제갈지민은 만감이 교차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책상을 정리하더니 고개를 들고 자신의 처소에 침입한 침입자를 쳐다보았다.
“다소 무례한 방법으로 방문했지만 어쨌든 본가를 방문한 손님이니 인사를 해야겠지. 그래, 원하는 게 뭔가?”
“가주에게 몇 가지 여쭈어 볼 것이 있소.”
“물어 보게.”
“아드님이신 제갈공자의 어깨에 세 개의 작은 점이 삼태성 모양으로 찍혀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 어느 쪽 어깨인지 아시오?”
“잘못 안 모양이군. 내 아들의 어깨에 점 같은 것은 없네.”
“아드님의 열 살 때의 생일선물로 무엇을 선물했는지 기억하시오?”
“내가 직접 만든 목검이었지. 박달나무로 만든 것이었어.”
“ ……, 다행이군요. 무사하셨으니 …….”
변성으로 이야기하던 복면인의 음성이 바뀌었다. 낯익은 음성에 제갈가주가 흠짓하는 순간, 그는 쓰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드러난 얼굴을 본 제갈가주의 두 눈이 잠깐 커졌다가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 역시 그랬던가 …….”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세상에 자식도 몰라보는 아비가 있다더냐?”
“보아하니 굳이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이래 뵈도 명색이 오대세가의 두뇌를 자처하는 제갈세가의 가주다. 그런 수작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그런데도 혈겸각과 마검문을 치신 겁니까?”
“그들이 단순히 이용당했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적을 방심케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오대세가를 건드린 데에 대한 본보기도 필요했지.”
“북리세가의 소가주는 어떻습니까?”
“나도 반신반의하는 중이다. 진짜일 수도 가짜일 수도 있겠지.”
“……, 그런 데도 큰 누님을 …….”
흥분한 탓인지 다소 제갈지민의 음성이 커졌으나 제갈가주의 화답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천하를 위해서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분명 네 탓이기도 하다.”
“그게 ……, 무슨 …….”
“이 애비가 모를 줄 알았더냐? 그 아이가 너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
“!!”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기회에 그 아이도 깨닫는 것이 있겠지. 가져가라.”
냉정한 음성으로 말하며 그가 품속에서 한 권의 서책을 꺼내 주었다. 제갈지민은 묵묵히 서책을 펼쳐서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흠짓하며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 이 정도란 말입니까?”
“대략 본가의 삼 할 정도는 된다. 보아하니 고질을 고친 것 같구나. 네 능력으로 가능하겠지?”
“집안청소 쯤은 문제없습니다.”
“좋다. 어디 소가주로써의 네 능력을 보여 봐라. 너도 이제 가문의 일에 본격적으로 나설 때가 되었지.”
9장. 혈교
제갈세가의 심처, 수많은 건물 등 중 하나. 이곳에도 역시 불이 켜져 있었다. 제갈세가의 총관인 백유청의 처소이다. 검, 금, 그리고 진법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여 삼절수사라는 외호로도 불리는 그는 지금 방안에 앉아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뭔가 ……, 불안하군.’
오후부터 그는 어쩐지 까닭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문제는 그 불안감의 근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삼십 년이 넘게 세가의 총관으로 일해 온 오랜 연록으로 그럭저럭 실수는 하지 않고 업무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밤이 되어 한가해지자 다시 그런 예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대체 뭔가 ……, 이 불길한 감정의 정체는? 오늘 뭔가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나?”
그는 다시 한 번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천천히 반추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특별히 눈에 거슬릴 만한 일은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했다. 그래서 더욱 초초함을 느꼈다.
‘묘한 일이군. 오공자님도 지금쯤 무사히 사천에 도착했을 터이고 …….’
뜻 모를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는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잠시 …….”
미처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난데없이 사방에서 그를 압박해오는 기운은 비록 미약하지만 분명 살기였다. 게다가 희미하게나마 혈향까지 느껴졌다.
“총관, 안에 있소?”
“예. 들어오시지요, 공자님.”
익숙한 음성에 그의 얼굴이 다소 풀렸다. 문이 열리고 제갈지민이 들어왔다. 일단 그에게 총관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 늦은 밤에 어인 일이신지 ……, 오룡지회 때문에 사천으로 떠나신 줄로만 알았습니다만 …….”
“총관에게 보여줄 것이 있소. 또 몇 가지 묻고 싶은 것도 있고 …….”
태연히 대꾸하는 그를 보며 백유청은 묘하게도 어색함을 느꼈다. 그는 조심스럽게 기세를 끌어올리며,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
“혹시 혈교라고 들어봤소?”
“……, 금시초문입니다만. 무슨 사교입니까?”
“환마신군, 즉 환영문의 후예들이 만든 문파라던데 …….”
“놀라운 일이군요. 오백년 전의 그 마세가 다시 부활했단 말입니까?”
“바로 그렇소. 게다가 4년전 본인의 납치 사건의 배후이기도 하오.”
“무슨 말씀이신지 ……, 그건 혈겸각과 마검문의 소행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소공자님의 증언이었습니다만 …….”
“그렇게 알려졌지. 게다가 누군가 그게 사실인 것처럼 교묘히 증거를 조작했고 ……. 왜 그랬지?”
어느 새 제갈지민의 얼굴은 싸늘하게 변해있었다. 이에 백총관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저를 의심하시다뇨. 소인은 진정 억울합니다! 삼십 년이 넘게 세가에 충성을 바쳐온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정말 대단한 연기로군, 위청천.”
뜻밖의 이름, 백총관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시 뒤 입을 연 그의 음성은 미약하게 끝부분이 떨리고 있었다.
“이미 ……, 알고 있었군.”
“네가 범한 한 가지 실수는 제갈세가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데리고 와라!”
말과 함께 누군가가 내동댕이쳐졌다. 심한 고초를 겪은 듯 전신이 성한 곳이 없는 사내였다. 사내는 은연중에 공포에 질려 있다가 백유청을 가르치며 발악하듯 외쳤다.
“바로 저자요! 모두 그가 시킨 일 ……, 큭!”
사내는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어느 새 그가 지공으로 사내의 사혈을 꽤뚫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제갈지민은 뜻밖에 태연했다. 순간 일단의 백의복면인이 나타나 백유청, 아니 위지천을 포위했다.
“스스로 인정하는군. 그를 죽여도 소용없다. 이미 그에게 얻을 정보는 모두 얻었다.”
“놀랍군. 분명 죽었다고 들었는데 ……, 네놈이 나타날 줄을 미처 몰랐다.”
“네 놈은 끝났다. 순순히 붙잡힌다면 한결 편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웃기지 마라, 애송이. 네 놈은 모른다, 본교의 위대함을 ……. 본교는 과거 환영문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냉소를 친 위지천은 그대로 검을 제갈지민에게 겨누었다. 순간 흥분한 백의복면인들(비영대)이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그러자 그가 한 손을 들어 그들을 만류했다.
“소공자, 그는 …….”
“그만. 좋아, 위지천. 그렇다면 네게 기회를 주지. 내 검을 한 번 받아봐라. 삼초식 안에 너를 제압하지 못하면 너를 그냥 보내 주겠다.”
뜻밖의 발언에 비영대는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위지천 역시 흠짓하더니 희미하게 득의의 미소를 띠었다.
“정말이냐?”
“남아일언 중천금! 명색이 세가의 소가주로써 허언은 하지 않는다.”
제갈지민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들었다. 서로가 검을 맞대는 상태에서 위지천은 내심 그의 호기를 비웃었다.
‘역시 아직 애송이로군. 무슨 기연이라도 만나 몸을 고친 모양인데 ……. 호기를 부린 것을 후회하게 해 주마.’
“오너라.”
“아니, 옛 정을 생각해서 선수는 양보하지.”
“좋아, 그러면 …….”
제갈지민이 양보했으나 위지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는 검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뭔가 번쩍하더니 어느 새 그의 검이 위지천의 왼팔을 자르고 있었다.
“이, 이것은 …….”
“이초다!”
미처 통증도 느낄 사이도 없이 다시 제갈지민의 매서운 검이 그에게 덮쳤다. 그는 가까스로 검을 막았지만 단번에 두 동강이 났고 기세에 밀려 그대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위지천에게서 한 움큼의 선혈이 토해졌다.
“쿨럭, 쿨럭! 말, 말도 ……, 최하 삼 갑자의 내공이라니 …….”
방금 전 제갈지민은 특별한 검법을 쓴 것이 아니었다. 일검은 그가 미처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검을 썼고 이검은 단순히 힘으로 찍어 누른 것이다. 비록 방심했다 하나 명색이 세가의 소가주였으니 뭔가 절세적인 검법이 나올 것이라고 대비하고 있던 위지천의 허를 찌른, 어떻게 보면 다소 도박에 가까운 무리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겉보기일뿐, 사실 제갈지민은 약간의 편법을 썼다. 쾌검을 쓸 때는 헤이스트를, 그리고 그 직후 스트랭스 마법을 가동했고 검을 마주치기 직전 그레비티 마법을 응용했다. 위지천이 그래비티를 깨닫지 못한 것은 검에만 살짝 응용한 탓이었다.
어쨌든 뜻밖의 패배에 그가 충격으로 혼란해 있는 사이 제갈지민은 재빨리 그의 혈도를 점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외쳤다.
“분명 삼초식이라고 했는데 너는 단 이검에 제압당했다. 약속은 약속이다. 끌고 가라. 내일 내가 직접 심문할 것이다.”
“존명!”
비영대는 공손히 그에게 인사한 뒤 꼼작도 못하고 있는 위지천을 데리고 장내를 떠났다. 그런 그를 보며 제갈지민의 얼굴이 다소 굳어졌다.
“이로써 본가에 스며든 간세는 모두 처단했지만 뜻밖에 철저한 자들이다. 기껏 놈들의 조직명과 놈들의 기원 밖에 알아내지 못했다. 저 놈에게는 뭔가 좀 나왔으면 좋겠군.”
그는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보았다. 밤하늘이 유달리 맑아 보였다.
10장. 가짜 vs 진짜
오대세가 중 하나인 제갈세가, 그 제갈세가의 정문으로 서너 명의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 중 선두에 선 사내는 백의를 입은 청년이었다. 대략 20대 초일까? 번듯한 외모며 현기넘치는 눈빛이 단연 군계일학처럼 돋보였다.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청년의 안색이 다소 굳었다.
‘건방진 놈! 분명 우리 오공자 사이의 권리는 동등하거늘 ……. 단지 먼저 입교했다는 이유 하나로 마치 상관이 된 것처럼 행동하다니 …….’
그의 뇌리에 패기만만한 또 한 명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교칙에 의하면 분명 오공자의 권한은 동등하다. 단지 먼저 들어오고 늦게 들어온 것에 따라 편의상 서열을 정했을 뿐, 그러나 그 서열이라는 것도 강제성은 없다.
그러나 이번 임무에서 공게롭게도 ‘그’가 책임자로 지정됐다. 그것을 기화로 ‘그’는 공공연히 청년을 수하처럼 부리려고 했다. 최근 교내에서 청년의 세력이 만만치 않게 성장하자 그것을 제어하기 위한 술수가 분명했다.
‘그러나 나도 쉽지는 않다. 내가 제갈세가에 있는 이상 곧 오대세가는 ……. 그리고 내가 마련한 비장의 패를 모르는 이상 네놈도 …….’
비록 ‘그’가 북리세가에 있다고 해도 제갈지민, 아니 그로 가장하고 있는 가짜가 미리 그의 곁에 심어둔 간세를 모르는 이상 결국 ‘그’도 별 수 없을 것이다. 설마 그자가 ‘그’를 배신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것이니까 …….
그런 생각을 하니 그의 얼굴에 절로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어쨌든 그가 세가의 정문에 다다르자 경비무사들이 재빨리 인사했다.
“소가주님!”
“돌아오셨습니까?”
“음, 별일 없겠지?”
“물론입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겉으로는 여유있게 웃으며 세가로 들어서는 그의 머리 속에는 상념이 끊이지 않았다.
‘오대세가답게 쉽지 않아. 4년을 투자했는데 겨우 삼 할이라니 ……. 그렇다고 성급하게 행동하면 자칫 내 정체가 발각될 수도 ……, 응?’
한참 걸어가던 그의 발걸음이 멎었다. 그의 앞을 한 사내가 가로막은 탓이다. 사내는 그를 보고 재빨리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갈세가의 총관, 백유청이었다. 사실 오랜 외유 끝에 돌아온 소가주를 총관이 맡는다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셨습니까?”
“백총관, 다녀왔소. 마중 나온 거요?”
“예. 그리고 ……, 가주께서 소가주가 오시는 대로 바로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제갈지민이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제갈가주가 자신을 부르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어차피 돌아온 이상 문안인사를 드리러 갈 텐데 굳이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상념을 접고 그는 총관에게 물어보았다.
“아버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서재에서 소가주님을 기다리십니다. 가시죠.”
백총관이 공손히 권하며 앞서가자 그는 보통 걸음으로 뒤따라갔다. 겉으로는 그저 평범한 모습이지만 은연중에 두 사람은 전음을 나누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본 공자를 부르는 거지, 위대주?>
<속하도 알지 못합니다, 오공자님. 세가 내에 특별한 일은 없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일은 아닐 겁니다.>
‘저 놈은 그렇게 말하지만 ……, 뭔가 이상하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뒤에 따라오는 자들에게 슬쩍 눈을 돌렸다. 눈치를 챈 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백총관은 잠자코 안내를 계속했다. 이윽고 서재에 도착하자 총관이 문에 대고 외쳤다.
“가주님,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총관, 민아 혼자만 들어오라고 하게.”
뜻밖의 지시에 총관이 다소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마 그도 예측을 못한 것 같았다. 뒤의 일행들도 다소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제갈지민은 뜻밖에 태연한 얼굴이었다.
<오공자님, 이건 …….>
<침착하게.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민아야, 뭘 하고 있느냐?”
다소 타이르는 듯한 어투, 그 말을 들은 제갈지민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뭔가 결심을 한 듯 한 걸음 내디뎠다.
<오공자님!>
<공자님, 어쩌실려고 …….>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선 나 먼저 들어갈테니 기다려라. 아직 우리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확증도 없고 따라서 우리는 그의 명을 거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