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잠든 사이에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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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우울한 내방에도 아침이 찾아왔다.
군대 시절부터, 아니...한참을 거슬러 내려가 어릴적 우리 어머니가 나를 깨워서 학교를 보냈던 시절부터 나는 잠귀가 어둡기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우리 엄마는 내 얼굴에 찬물을 뿌리기 까지 하셨으니까.그렇게 잠귀가 어두운 내가 번쩍 하고 눈을 뜬것은 내가 생각해도 박재하 인생의 한줄기 작은 기적이었다.
뚜두두두.
도어락이 잠기며 전자음이 들린다.그리고 이어지는 또각또각 하는 구두소리.그리고 내가 이렇게 선잠이 들고,또 금방 눈을 뜬 이유는 간단했다.
‘주인집에 말해야 할까?’
난 정말 몰랐다.붙어 있는 두 집이 이렇게 방음이 안될줄이야. 마치 내 옆에서 옆방여자가 있는것 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내 마음속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가 어제 집에 와서 무엇을 했는지 훤히 파악할수 있었다.
그녀는 샤워를 끝내고 TV를 시청했다.간간히 방청객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것으로 보아 쇼프로그램인듯 했다. 과자 봉지를 뜯는 소리가 난것으로 보아 저녁대신 간식으로 때운 모양이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그녀가 불을 끄는 소리는 12시가 넘어서야 들렸고, 벽에 귀를 가까이 대었을때는 그녀의 숨소리 마져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내 생애 그렇게 가슴이 뛰는 밤은 처음이었다.그렇다고 내가 여자 친구 한번 못사귀어 본 쑥맥도 아니다.뭐..물론...한명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몇개월이나 살던 이 집에 대해 알게된 새로운 사실(?)은 나를 잠못자게 만들었다.게다가 내 침대는 벽에 붙어 있었다. 조금만 귀를 벽에 가까이 하는 성의만 발휘하면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훤히 파악할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가 크게 방귀를 뀌거나 트름을 하거나 하면 그녀역시 옆방 자식 추접하구나..하면서 짜증을 낼것이다. 때문에 나는 소심하게도 숨소리 한번 크게 나지 않고 차렷자세로 취침해야 했다.온 신경은 벽너머의 그녀에게로 쏠린채로.
“후아아아아!내가 변태가 된 기분이야.”
그녀가 나간것을 알았으니,이제서야 나 혼자 있는 나만의 공간답게 크게 소리칠수 있었다.
“아윽..허리야.”
좌불안석.그 상태로 잠을 잤으니 관절들이 요동치는것은 당연했다.괜시리 일어나서 기지개를 펴보았다.마치 잘 짜맞춰진 드럼 플롯처럼 우두두둑! 척추에서 관절음의 향연이 울려퍼졌다.
방구석에 쳐박혀 있는 내 휴대폰에 시선이 갔다.밤새 단 한번도 울리지 않았던 휴대폰.푸하. 역시 나같은 궁상인생에겐 휴대폰은 그저 시계일 뿐이다. 터치 기능이 강화된 신제품?그건 그냥 터치되는 휴대폰일 뿐인거다.
‘아..맞다!’
불현듯 내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그래! 지금 내 휴대폰은 그냥 시계가 아닌거다. 누군가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는 소중한 수첩이자 메모지 였다.
‘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지하철의 그녀.다시금 머릿속이 환해지며 그녀의 표정이 영사기 돌리듯 떠오른다.너무나 맑았고,장난기가 담겨 있어 너무나 귀여웠던 그녀. 빡빡머리인 날 보고 스님이라 부르면서 너무나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었던 지하철의 그녀.
‘아..왜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을까?’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지금까지는 옆방에 있는 그녀때문에 머릿속에서 잠시 잊혀졌지만,그녀는 분명 내가 꿈에도 바라마지 않던 나의 이상형이었다.청순함과 귀여움,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섹시함이 공존하는 듯한 그런 얼굴.옷입는 스타일이며 밝아보이는 성격까지...마치 맞춤형 정장처럼 내 마음에 딱 맞춰지는 그녀. 여자에 한창 관심이 많을때도 만나보지 못했던 여인을 지하철에서 만난것이다.그것도...우리동네 근처에서 일을 하는 여성을.
경험보다 뛰어난 스승은 없지만, 문제는 그 경험이라는 스승은 꼭 실패를 해야만 알려준다는 흠이 있었다.나는 오늘 그 스승에게 가르침을 하사받은거다.그것은 바로...
-전화번호를 딸때는 이름을 물어보자-
에휴...이름은 무슨. 그때의 내 리액션은 내가 생각해도 한대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 한심한 것이었다. 이름을 물어봐? 그것은 지금 생각하니 후회되는 일일뿐, 당시에 나는 이름을 묻기는 커녕 덜덜 떨었고, 그런 나를 보다못한 그녀가 자신이 직접 번호를 찍어 줬었다.
휴.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일이다. 조심스레 휴대폰의 폴더를 열어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다.
-미녀^^-
핫..그녀가 직접 적어넣은 그녀의 저장명이었다. 미녀..미녀라..실제 자신의 이름을 써줬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지만 본인을 미녀라고 써준 그녀의 성격이 왠지 모르게 더 끌린다. 어리버리한 내 모습을 보고도 웃어주었고, 오히려 그 분위기를 주도 하기 까지 했으니까.밝은 그녀.한번의 첫인상이지만 마치 오랜시간 본것같은 강인한 각인을 그녀는 내게 세긴듯 했다.
나는 지금 막 일어난 그 상태 그대로 휴대폰을 들고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녀에게 전화를 할까? 시계를 보니 아침 아홉시. 어쩌면 지금 자고 있을수도 있었다.몇번이고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다가,나는 휴대폰에 있는 문자메세지 버튼을 눌렀다.
-저기...어제 뵜던...스님인데요..-
뭐냐...이런 전개는..스스로 스님이라니.다시쓰자.
-어제..전화번호를 여쭤봤던 사람인데..혹시 주무시나요?-
이 정도면 무난할까? 아침 아홉시에 주무시냐니...에효.이런 등신같은 질문이 어딨담.
하지만 별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뭐라고 이야기를 해보긴 해야겠지만 경험이 없으니 막막해졌다. 아휴...태어나서 28년동안 여자라곤 단 한명을 사귀어 봤을 뿐이니..그냥 내 초라하고 내성적이던 과거를 탓하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
띵동.
상념속에 내 문자 메세지는 전송이 되었다. 액정에 적힌 미녀^^라는 글자가 왠지 모르게 내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답장이 바로 오진 않겠지만, 그녀가 내 휴대폰에 저장된 몇 안되는 인맥중 하나라는 것이 좋았다.
“크아!”
이제서야 잠이 몰려온다.밤새 긴장감 때문에 선잠을 잔 탓일 것이다. 옆방의 그녀는 지하철의 그녀와 약간 다른느낌으로 나를 설레게 했으니까. 절대 내가 변태인것을 포장하는게 아니다! 그냥...이런적이 처음이라 긴장이 되었던 거다. 그리고 그 긴장이 옆집 그녀가 집을 나섬으로써 풀리니 갑자기 졸음이 밀려오는 거고..마치 수련회를 갔다가 집에 오는 그 순간 똥이 마려운 이치랄까...아 이건 좀 아니구나.
나는 다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일이 없으니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되는것이다.그래..어쩌면 인애 말대로 나는 5분대기조가 맞을지도 모른다. 선두그룹에 있지 않으면 적당히 중간지점에서 자신의 위치에 만족해야 하는 부류들이 바로 음악혹은 방송계통이다.음향기사? 녹음이 있을때나 호출받는다. 그리고 적어도 내가 알기론 오늘은 녹음이 없었다.
‘휴우.’
아직도 문자를 보낸 내 휴대폰에서는 그 어떤 반응도 오질 않았다.졸음이 밀려 오는 그 상황에서 나는 일부러 휴대폰을 내 오른쪽 귀 옆에 놓아두었다.잠귀 어두운 나지만 그녀의 문자소리엔 꼭 깨리라!
굳은 결심을 한채로, 나는 빛이 야금야금 세어나오는 내방 침대에 누워 서서히 잠이 들었다.
“뭐?정말이냐?”
“아휴 형.좀 목소리좀 낮춰요.녹음실인데”
“뭐 어떠냐?녹음도 끝났구만.”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준혁이 형은 반색을 하며 낄낄거린다.그는 특유의 장난기 있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잠이 들었을때, 내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린 것이었다.정말 인애가 말한대로 5분대기조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나는 부리나케 뛰어 나가야만 했다. 급작스럽게 데모테잎을 녹음해야 한다는 준혁이 형의 호출때문이었다.
그는 늘 그렇듯이, 스포티하게 커트한 머리를 양껏 멋을 내고는 녹음실에 설렁설렁 나타났다. 하하.역시 나같은 뜨내기 음향기사와는 다른 여유로운 모습. 요새 한창 잘나가는 작곡가라서 일까?왠지모르게 전신에 여유가 넘쳐보였다.
내가 그래도 간간히 나마 이 일을 할수 있게 된것도 준혁이 형의 도움이 컸다. 인간적으로는 글쎄...나와는 달리 여자경험많고, 또 실제로 여자를 많이 꼬시는 사람이니 사람자체에 호감이 가진 않지만...그래도 이 바닥에 있는 나로써는 함께할수 밖에 없는 운명공동체랄까.
“그래서?전번을 딴거냐?박재하 니가?”
“어찌저찌해서 따긴했는데...모르겠어요.”
내가 고민끝에 그에게 털어놓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내 주변엔 그만큼 여자에 대해 정통한 인물이 없었으니까.혹자는 같은 여자인 인애에게 묻는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할지 모르겠지만...에휴..그 아이한테 묻느니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인 내 사촌에게 묻는게 낫다.
“음..그래?연락은 해봤어?”
“문자메세지요.”
“이그..임마.화끈하게 전화로 해야 먹히지.그걸 문자질하면 되냐?”
“그..그런가요.”
내가 머리를 긁적이자, 그는 마치 불쌍한 중생을 보는 듯한 눈으로 혀를 끌끌 하며 찼다.
“그래..어디서 뭘하는 아가씬데?”
“당연히 모르죠.”
“이런..찐따를 봤나.”
“전화해야 할까요?”
“음..글쎄.한번 해보는게 어떠냐?문자보다는 성의 있으니까.남자답게 나가 임마!”
“흠..알겠어요.아 참..형 그리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옆방에 이사온 여자 이야기를 꺼냈다.물론 가슴이 설렜느니 잠을 못잤느니 이런류의 대화가 아니었다. 사실 방음이 안된다는건, 나도 그쪽이 신경쓰여 함부로 티비소리나 음악소리를 켜지 못한다는 일이 되어버리니까.
“좋은 방법 없을까요?”
“야 좋구만 뭘 그러냐.”
“뭐가요?”
그는 데모녹음이 끝난 녹음실을 살짝 바라보더니 내게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냐? 젊은 여자가 옆방에 이사왔는데..알고보니 너희집이 방음이 제로에 가깝다...한 여자의 사생활을 통달하는거 아니냐?재밌겠구만 뭐.푸하하!”
아...진짜 이 형은 정말 진지함이라는게 없다.그저 여자라면 좋아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어떻게 작곡이라는 예술을 하는걸까?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야.뭐 그런 표정을 지어.솔직히 너도 들리니까 재밌지 않던?”
형의 질문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준혁이 형의 장난스런 눈길을 왠지 똑바로 보지 못할거 같았다.
하...인간은 역시 가증스런 동물이다.형의 말에 반박할 그 어떤 핑계거리도 생각나지 않는다.그러고보니 난 어제 그녀가 무얼했는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불편하다고 해놓고, 난 은근히 즐겼었을 지도 모른다.내 모든 의식은 옆방을 향해 있었다. 지하철의 그녀를 만난것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여태까지 그렇지 않던 내 삶에 여자가 가까이 있는것만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뭐...정 그러면 방음재 같은거라도 갖다가 설치해.음향기사가 그런거 못하는거 아닐테고.”
하..그게 우리집이면 모를까..원룸사는 주제에 방음재라니...아마 주인집 아줌마가 우리집에 온다면 놀라 자빠질 일일거다.내가 고개를 젓자마자, 준혁이 형은 흥미가 없다는듯 ‘헌팅녀’에 대한 주제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야야.그나저나 엉아 말대로 해.오늘 녹음도 빨리 끝났으니까.함 전화해 보던지.”
그는 오늘도 여자와 약속이 있다는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내 어깨를 툭 하고 쳐주었다.빳빳한 내 주머니 안에서 사각형의 감촉이 선명하게 전해진다. 전화기...역시 그녀에게 전화를 해야만 할까?
내 옆구리에 만보기가 달려있다면 벌써 만을 찍고 다시 0이 되었을만큼, 나는 녹음실 주위를 한참이나 서성이고 나서야 전화기 폴더를 열수 있었다. 역시나 뭐든지 해본놈이나 하는거다.경험이 없으니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하고, 심장은 계속해서 뛰기만 했다.
뭐라고 해야할까.어떻게 말하는게 가장 자연스러울까. 머릿속에서 수많은 상념이 교차한다.
-여보세요?-
다짐하고 다짐했건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또다시 동상이 되어버린다.
“아..,네..그..저기..수고 많으십니다..”
...무슨 서비스 센터에 전화했냐...한심한 내 자신을 향해 질책을 할때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예쁜 목소리였다. 왠일인지 낯이 익긴 했지만 여자 목소리가 솔직히 거기서 거기 아닌가 뭐..목소리만 들으면 인애도 굉장히 이쁜 편일거다.
“안녕하세요.저는 그때에..그..”
-죄송한데 조금 바쁘거든요?누구세요?-
“그때..전화번호를 여쭤 봤었는데요..저기..기억을 하실라나 그게..”
순간 전화기 저편으로는 정적이 흘렀다.그녀가 끊어버린게 아닐까하는 마음에 계속 액정을 확인했다. 젠장..연습을 해도 정작 나오는건 찐따 멘트라니.
-아..혹시 그 스님이에요?-
전화기 넘어로 쿡쿡 거리며 웃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아..귀엽다.아직 날 스님이라 기억하고 있다니! 그녀가 기억을 한다면야 스님이 되건 목사님이 되건 아무런 상관없다. 그저 그녀의 기억중에 단편이라도 내가 있다는 것이 중요할뿐.
“아..네! 안녕하세요?”
-네 스님.-
그녀는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내가 말을 건냈다.한결 편안했다. 그녀가 내성적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무슨일로 거셨어요?-
아..나는 또다른 난관에 가로막혀 버렸다. 일단 걸긴 걸었는데, 건목적을 모르겠다.내가 왜걸었지?그래.침착하자.나는 남자라고.
“저기..문자도 보냈었는데..”
-어머,정말요? 몰랐네요-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아..진짜 천사구나. 나는 그틈을 타서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오늘...시간 있으신가요?”
-네?-
돌아오는것은 황당하다는 듯한 그녀의 대답. 너무 앞서 나간걸까?괜시리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고 손과 발은 차가워 지기 시작한다.와..내가 원래 이런 폐쇄적인 성격이던가? 아니다. 약간 나서기 싫어하는것은 있지만 이렇게 대인공포증 초기증세까지 발전한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그야말로 이건...내 성격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음..그게..잠깐 뵙고싶어서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잠깐 보고싶다고 하는것이 이렇게 힘든 말일줄은 나도 정말 몰랐던 것이었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찰나의 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진다.
-오늘은 너무 바쁘네요.-
아...나는 맥이 탁하고 풀려버렸다.거절을 돌려 이야기한 걸까?나를 별로 보고싶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왠지 힘이 빠졌다.
“그러시군요...”
내 목소리에서는 감추지 못한 실망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언제 시간나냐고..그렇게 물어봐야 할까?
-혹시 잠깐이라도 괜찮으세요?-
나는 그만 전화기를 놓칠뻔했다. 기대치가 없었던 상태에서 그녀가 내뱉은 말은 나에게 있어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시간을..날위해 시간을 내준다는 거야?
“물론입니다!잠깐이라도 괜찮습니다.”
-음..한 십분정도 밖에 안될텐데..혹시 성원빌딩이라고 아세요? 그때 봤었던 골목길 쪽으로 올라가면 있는데..-
“아..네.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따 거기서 잠시 뵈요.제가 그 건물에서 일하거든요-
아...겨우 진정한 내 가슴이 계속해서 뛴다.그녀가..그녀가 허락을 해준 것이다.비록 잠시지만...나에게도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목소리가 떨렸다.
“저.저기요!”
-네?-
“성함을 알수 있을까요?”
전화기 너머로 뭐가 재밌는지 쿡쿡 거리며 웃는 그녀의 귀여운 목소리가 들린다.직장 동료와 같이 있는걸까?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간간히 들려왔다.그녀가 왜 웃는지 아무런 감을 잡지 못하고 있을 즈음, 전화기 너머로 다시금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수정이..윤수정이에요.-
녹음실의 뒷정리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자연스레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지금 이 상태라면 불후의 명곡이 될 악상마져 쉽게 떠오를 것도 같았다.
‘수정..수정이..이름도 너무 이쁘다.’
흔한 이름일수도 있지만, 지금 내게는 그 어떤 수식어 보다도 아름다운 이름이 되어 있었다.나는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들고는, 통화목록을 눌러 다시한번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다.
-수정씨-
장난스럽게 미녀라고 입력했던 그녀의 저장명은 수정씨로 바뀌어 있었다.그리고 분명히 수정씨라고 바뀐 그 글자가 내 통화목록안에 띄워져 있다.
그녀는 여덟시쯤 시간이 있다고 했다. 그때에 잠시 시간을 내는것을 보니 일이 바쁘거나 혹은 일이 끝난뒤 약속이 있는 모양이었다.상세한 시간을 이야기 하진 못했지만, 회사 앞에서 전화를 하기로 했기에 문제될것은 없었다.
-박재하씨요?이름 멋있네요.스님이름 치고는요.하하-
그녀에게 있어서 내 케릭터는 그냥 어리버리한 스님인가 보다.아무렴 어떠랴.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 상대와 만나는데...그딴건 중요한게 아니었다.
연습실 한가운데 놓인 거울에 수없이 내모습을 비춰 보았다.이럴줄 알았으면 옷을 더 신경써서 입고 오는건데..후회가 밀려왔다.집에 잠시 들를까?했지만 그정도의 시간은 없었다. 별수 없이 괜시리 티셔츠를 툭툭 털며 거울앞에서 궁상섞인 내 모습에 한숨만 픽픽 쉴 뿐이었다.
늘 그렇듯이 녹음실을 잠군 나는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어둑어둑한 하늘.이제는 제법 쌀쌀한 날씨다.하지만 왜 이렇게 다리가 떨리지?떨릴 정도의 날씨는 아닌데 말이다.
연습실과 우리동네는 가까웠다. 뭐..그게 내가 지금있는 이 집을 선택한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성원빌딩은 바로 우리동네에 있었다.
아..이제서야 수긍이갔다.내가 그때 그녀..수정씨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며 사시나무떨듯 떨었던 그 길이 바로 성원빌딩 가는 길이었다. 뭐..이런저런 사무실이 모여있는 건물이니..그녀도 그냥 평범한 회사원인 모양이다.
오피스레이디라. 왠지 멋있다. 그래서 그렇게 깔끔한 옷을 입고 있었구나. 그럼 집은 어디일까? 그때 분명히 지하철에서 만났었으니...이 근처는 아닐 것이다.
후우우우.
누가 봐도 찐따스럽게도, 나는 별것아니라면 아닌 이 상황에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내 모습을 바보같다고 한다면 당신은 사랑을 안해본 사람이리라! 비록 그녀에게 대해서는 윤수정이라는 이름 석자 밖에 알지 못하지만, 그녀가 내게 보여준 임펙트는 사랑을 키워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아...”
나는 촌스럽게 앗! 하고 소리칠 뻔한것을 꾹 참아내었다.빌딩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연신 휴대폰 액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숨이 막힌다. 첫인상속 완벽했던 그녀의 자태는 하루가 지난다 한들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긴 머리는 오늘도 깔끔하게 묶어 올려, 갸름한 얼굴선을 보여주고 있었다. 너무나 작고 귀여운 얼굴. 그리고 청순미까지 묻어나는 그녀의 클래식 정장까지도. 시선이 그녀의 신체 부위 하나하나에 머물때마다 내 심장박동 수는 점점 더 빨라진다.
“저..저기..”
하하.마치 선풍기앞에서 말하는것처럼 내 목소리는 심히 찐따스럽게 떨리고 있었다.밑을 향해 있던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들어올려지며 나를 향했다.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그녀의 입술. 그녀가 금새 장난기 있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나를 보고 웃는다.
“와!스님이다!”
저번에 그 소개팅녀..슬기라고 했던가? 그 여자가 나에게 스님이라고 했으면 아마 얼굴이 돌아갈정도로 죽통을 후려줄 용의가 있지만, 그녀가 내게 장난스럽게 하는 말은 계속 듣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안녕하세요.수..수정씨.”
“왜이렇게 늦었어요?”
그녀는 갑자기 미간을 찡그리며 화났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순간 멍해진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그녀는 장난이었다는 듯이 살짝 웃어주었다.
녹는다. 어쩜 사람이 이렇게 이쁠수가 있을까? 수정이의 눈동자에 비친 나를 보는게 너무나 좋고 황홀하다. 알게 된지 하루밖에 안된..그것도 길거리 어리바리 헌팅남을 상대로 저렇게 밝은 성격이라니...
“그러고 보니 또..까먹었네요 이름.”
“저요?아..박재하입니다.”
“저는 윤수정이에요.아까 이야기 했지만.”
아..무슨 말이라도 해야할거 같았다.이 상황이 뭐란 말인가.헌팅은 내가 했는데 말은 그녀가 하고 있다.이것은 심히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라 할수 있었다.
-나이나 직업같은건 알아야 하지 않겠냐?사는곳이라던가.호구조사는 해야지-
준혁이 형의 조언아닌 조언이 떠올랐다. 내가 재미있는듯 빤히 나를 바라보는 그녀.나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음..어떨것 같은데요?”
아 씨...저건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너무 낮춰 부르면 거짓말인거 같고, 그렇다고 적당히 부르자니 그 나이보다 어릴수 있으니까. 기대감으로 가득한 그녀의 눈망울. 너무나 입맞추고 싶은 그녀의 입술이 나를 향한다.
“스물..넷정도?”
“우와아!”
그녀는 손뼉을 짝 하고 치며 놀랍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음..어리게 봐줘서 고맙다는 걸까?일단 기분이 상하지 않은걸로 봐선 그것보다 나이가 있지는 않은거 같다.
“어떻게 알았어요?”
“저..정말 스물넷이에요?”
“네.스님은요?”
“전..여덟입니다.”
“와..그렇게 안믿겨지는데.”
“저..정말요?”
“네.생각보다 어리네요.”
“.............”
내 멍한 표정에 그녀는 살짝 입을 가린채로 쿡쿡 거린다.나는 멍하니 그녀의 웃는 모습만 바라봤다. 그 미소 한방에..머릿속에 생각해두었던 수많은 대사들은 흡사 비맞은 거품처럼 스르르 녹아들어 버린다.
“농담이에요.충분히 어려보여요.그치만 저보다 오빠네요 그쵸?”
나는 멋적게 그녀를 따라웃었다. 준혁이 형의 조언도 생각나지 않았다.그랬다. 내가 여기 나올때부터 너무나 궁금했던 그 질문. 그것을 물어봐야 했다.
“저에게...전화번호를 주신 이유가 뭔가요?”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신기했어요.수정씨 같은 미인이 제가 요구한다고 해서 전화번호를 주는게...너무 신기했어요.잠깐이지만 오늘 만나주는 것도 그렇고.”
그녀의 앞에서 이렇게 길게 말한적 있었던가?하지만 내 말은 진심이었다.바보같은 자기비하일지도 모르지만, 나와는 너무나 차이가 많이 나는 그녀니까.
그런 그녀가 웃는다. 내 가슴이 과다 박동으로 빵구나는 것을 보고싶은 건지...그녀는 그렇게 계속 나를 보며 웃더니 말을 이었다.
“재밌어 보였어요.순수해 보였구요. 그게 다에요.”
아...내가 다시 그녀를 보았을때 그녀는 살짝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이렇게 빨리..들어가야 하는 건가?일하다 잠깐 나왔다지만..아직..물어보고 싶은게 너무 많았다.
“이제 들어가봐야 겠네요.미안해요.재하 오빠라고 했죠?너무 착한분 같아서..거절하기 싫었어요.”
그녀는 살짝 몸을 돌려 건물쪽을 향했다.신기루를 쫒는 사람처럼 내 시선이 그녀의 하얀 목에 이르렀을때,그녀는 살짝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일찍 가게 되서 미안해요.다음에 또 연락해요.재하오빠.”
그녀는 내게 확인사살을 날려버렸다. 재하 오빠라는 말을 하는 그 순간 살짝 눈웃음이 들어가는 그녀의 하얀 얼굴.나는 마치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그대로 멈춰서 버렸다.천천히 건물쪽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 이게 꿈이라도 좋았다. 사늘해진 밤바람이 내 옷자락을 펄럭일 정도로 불어왔지만, 그녀를 보는 내 가슴은 너무나 뜨거웠다.
군대 시절부터, 아니...한참을 거슬러 내려가 어릴적 우리 어머니가 나를 깨워서 학교를 보냈던 시절부터 나는 잠귀가 어둡기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우리 엄마는 내 얼굴에 찬물을 뿌리기 까지 하셨으니까.그렇게 잠귀가 어두운 내가 번쩍 하고 눈을 뜬것은 내가 생각해도 박재하 인생의 한줄기 작은 기적이었다.
뚜두두두.
도어락이 잠기며 전자음이 들린다.그리고 이어지는 또각또각 하는 구두소리.그리고 내가 이렇게 선잠이 들고,또 금방 눈을 뜬 이유는 간단했다.
‘주인집에 말해야 할까?’
난 정말 몰랐다.붙어 있는 두 집이 이렇게 방음이 안될줄이야. 마치 내 옆에서 옆방여자가 있는것 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내 마음속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가 어제 집에 와서 무엇을 했는지 훤히 파악할수 있었다.
그녀는 샤워를 끝내고 TV를 시청했다.간간히 방청객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것으로 보아 쇼프로그램인듯 했다. 과자 봉지를 뜯는 소리가 난것으로 보아 저녁대신 간식으로 때운 모양이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그녀가 불을 끄는 소리는 12시가 넘어서야 들렸고, 벽에 귀를 가까이 대었을때는 그녀의 숨소리 마져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내 생애 그렇게 가슴이 뛰는 밤은 처음이었다.그렇다고 내가 여자 친구 한번 못사귀어 본 쑥맥도 아니다.뭐..물론...한명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몇개월이나 살던 이 집에 대해 알게된 새로운 사실(?)은 나를 잠못자게 만들었다.게다가 내 침대는 벽에 붙어 있었다. 조금만 귀를 벽에 가까이 하는 성의만 발휘하면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훤히 파악할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가 크게 방귀를 뀌거나 트름을 하거나 하면 그녀역시 옆방 자식 추접하구나..하면서 짜증을 낼것이다. 때문에 나는 소심하게도 숨소리 한번 크게 나지 않고 차렷자세로 취침해야 했다.온 신경은 벽너머의 그녀에게로 쏠린채로.
“후아아아아!내가 변태가 된 기분이야.”
그녀가 나간것을 알았으니,이제서야 나 혼자 있는 나만의 공간답게 크게 소리칠수 있었다.
“아윽..허리야.”
좌불안석.그 상태로 잠을 잤으니 관절들이 요동치는것은 당연했다.괜시리 일어나서 기지개를 펴보았다.마치 잘 짜맞춰진 드럼 플롯처럼 우두두둑! 척추에서 관절음의 향연이 울려퍼졌다.
방구석에 쳐박혀 있는 내 휴대폰에 시선이 갔다.밤새 단 한번도 울리지 않았던 휴대폰.푸하. 역시 나같은 궁상인생에겐 휴대폰은 그저 시계일 뿐이다. 터치 기능이 강화된 신제품?그건 그냥 터치되는 휴대폰일 뿐인거다.
‘아..맞다!’
불현듯 내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그래! 지금 내 휴대폰은 그냥 시계가 아닌거다. 누군가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는 소중한 수첩이자 메모지 였다.
‘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지하철의 그녀.다시금 머릿속이 환해지며 그녀의 표정이 영사기 돌리듯 떠오른다.너무나 맑았고,장난기가 담겨 있어 너무나 귀여웠던 그녀. 빡빡머리인 날 보고 스님이라 부르면서 너무나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었던 지하철의 그녀.
‘아..왜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을까?’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지금까지는 옆방에 있는 그녀때문에 머릿속에서 잠시 잊혀졌지만,그녀는 분명 내가 꿈에도 바라마지 않던 나의 이상형이었다.청순함과 귀여움,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섹시함이 공존하는 듯한 그런 얼굴.옷입는 스타일이며 밝아보이는 성격까지...마치 맞춤형 정장처럼 내 마음에 딱 맞춰지는 그녀. 여자에 한창 관심이 많을때도 만나보지 못했던 여인을 지하철에서 만난것이다.그것도...우리동네 근처에서 일을 하는 여성을.
경험보다 뛰어난 스승은 없지만, 문제는 그 경험이라는 스승은 꼭 실패를 해야만 알려준다는 흠이 있었다.나는 오늘 그 스승에게 가르침을 하사받은거다.그것은 바로...
-전화번호를 딸때는 이름을 물어보자-
에휴...이름은 무슨. 그때의 내 리액션은 내가 생각해도 한대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 한심한 것이었다. 이름을 물어봐? 그것은 지금 생각하니 후회되는 일일뿐, 당시에 나는 이름을 묻기는 커녕 덜덜 떨었고, 그런 나를 보다못한 그녀가 자신이 직접 번호를 찍어 줬었다.
휴.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일이다. 조심스레 휴대폰의 폴더를 열어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다.
-미녀^^-
핫..그녀가 직접 적어넣은 그녀의 저장명이었다. 미녀..미녀라..실제 자신의 이름을 써줬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지만 본인을 미녀라고 써준 그녀의 성격이 왠지 모르게 더 끌린다. 어리버리한 내 모습을 보고도 웃어주었고, 오히려 그 분위기를 주도 하기 까지 했으니까.밝은 그녀.한번의 첫인상이지만 마치 오랜시간 본것같은 강인한 각인을 그녀는 내게 세긴듯 했다.
나는 지금 막 일어난 그 상태 그대로 휴대폰을 들고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녀에게 전화를 할까? 시계를 보니 아침 아홉시. 어쩌면 지금 자고 있을수도 있었다.몇번이고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다가,나는 휴대폰에 있는 문자메세지 버튼을 눌렀다.
-저기...어제 뵜던...스님인데요..-
뭐냐...이런 전개는..스스로 스님이라니.다시쓰자.
-어제..전화번호를 여쭤봤던 사람인데..혹시 주무시나요?-
이 정도면 무난할까? 아침 아홉시에 주무시냐니...에효.이런 등신같은 질문이 어딨담.
하지만 별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뭐라고 이야기를 해보긴 해야겠지만 경험이 없으니 막막해졌다. 아휴...태어나서 28년동안 여자라곤 단 한명을 사귀어 봤을 뿐이니..그냥 내 초라하고 내성적이던 과거를 탓하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
띵동.
상념속에 내 문자 메세지는 전송이 되었다. 액정에 적힌 미녀^^라는 글자가 왠지 모르게 내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답장이 바로 오진 않겠지만, 그녀가 내 휴대폰에 저장된 몇 안되는 인맥중 하나라는 것이 좋았다.
“크아!”
이제서야 잠이 몰려온다.밤새 긴장감 때문에 선잠을 잔 탓일 것이다. 옆방의 그녀는 지하철의 그녀와 약간 다른느낌으로 나를 설레게 했으니까. 절대 내가 변태인것을 포장하는게 아니다! 그냥...이런적이 처음이라 긴장이 되었던 거다. 그리고 그 긴장이 옆집 그녀가 집을 나섬으로써 풀리니 갑자기 졸음이 밀려오는 거고..마치 수련회를 갔다가 집에 오는 그 순간 똥이 마려운 이치랄까...아 이건 좀 아니구나.
나는 다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일이 없으니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되는것이다.그래..어쩌면 인애 말대로 나는 5분대기조가 맞을지도 모른다. 선두그룹에 있지 않으면 적당히 중간지점에서 자신의 위치에 만족해야 하는 부류들이 바로 음악혹은 방송계통이다.음향기사? 녹음이 있을때나 호출받는다. 그리고 적어도 내가 알기론 오늘은 녹음이 없었다.
‘휴우.’
아직도 문자를 보낸 내 휴대폰에서는 그 어떤 반응도 오질 않았다.졸음이 밀려 오는 그 상황에서 나는 일부러 휴대폰을 내 오른쪽 귀 옆에 놓아두었다.잠귀 어두운 나지만 그녀의 문자소리엔 꼭 깨리라!
굳은 결심을 한채로, 나는 빛이 야금야금 세어나오는 내방 침대에 누워 서서히 잠이 들었다.
“뭐?정말이냐?”
“아휴 형.좀 목소리좀 낮춰요.녹음실인데”
“뭐 어떠냐?녹음도 끝났구만.”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준혁이 형은 반색을 하며 낄낄거린다.그는 특유의 장난기 있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잠이 들었을때, 내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린 것이었다.정말 인애가 말한대로 5분대기조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나는 부리나케 뛰어 나가야만 했다. 급작스럽게 데모테잎을 녹음해야 한다는 준혁이 형의 호출때문이었다.
그는 늘 그렇듯이, 스포티하게 커트한 머리를 양껏 멋을 내고는 녹음실에 설렁설렁 나타났다. 하하.역시 나같은 뜨내기 음향기사와는 다른 여유로운 모습. 요새 한창 잘나가는 작곡가라서 일까?왠지모르게 전신에 여유가 넘쳐보였다.
내가 그래도 간간히 나마 이 일을 할수 있게 된것도 준혁이 형의 도움이 컸다. 인간적으로는 글쎄...나와는 달리 여자경험많고, 또 실제로 여자를 많이 꼬시는 사람이니 사람자체에 호감이 가진 않지만...그래도 이 바닥에 있는 나로써는 함께할수 밖에 없는 운명공동체랄까.
“그래서?전번을 딴거냐?박재하 니가?”
“어찌저찌해서 따긴했는데...모르겠어요.”
내가 고민끝에 그에게 털어놓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내 주변엔 그만큼 여자에 대해 정통한 인물이 없었으니까.혹자는 같은 여자인 인애에게 묻는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할지 모르겠지만...에휴..그 아이한테 묻느니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인 내 사촌에게 묻는게 낫다.
“음..그래?연락은 해봤어?”
“문자메세지요.”
“이그..임마.화끈하게 전화로 해야 먹히지.그걸 문자질하면 되냐?”
“그..그런가요.”
내가 머리를 긁적이자, 그는 마치 불쌍한 중생을 보는 듯한 눈으로 혀를 끌끌 하며 찼다.
“그래..어디서 뭘하는 아가씬데?”
“당연히 모르죠.”
“이런..찐따를 봤나.”
“전화해야 할까요?”
“음..글쎄.한번 해보는게 어떠냐?문자보다는 성의 있으니까.남자답게 나가 임마!”
“흠..알겠어요.아 참..형 그리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옆방에 이사온 여자 이야기를 꺼냈다.물론 가슴이 설렜느니 잠을 못잤느니 이런류의 대화가 아니었다. 사실 방음이 안된다는건, 나도 그쪽이 신경쓰여 함부로 티비소리나 음악소리를 켜지 못한다는 일이 되어버리니까.
“좋은 방법 없을까요?”
“야 좋구만 뭘 그러냐.”
“뭐가요?”
그는 데모녹음이 끝난 녹음실을 살짝 바라보더니 내게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냐? 젊은 여자가 옆방에 이사왔는데..알고보니 너희집이 방음이 제로에 가깝다...한 여자의 사생활을 통달하는거 아니냐?재밌겠구만 뭐.푸하하!”
아...진짜 이 형은 정말 진지함이라는게 없다.그저 여자라면 좋아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어떻게 작곡이라는 예술을 하는걸까?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야.뭐 그런 표정을 지어.솔직히 너도 들리니까 재밌지 않던?”
형의 질문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준혁이 형의 장난스런 눈길을 왠지 똑바로 보지 못할거 같았다.
하...인간은 역시 가증스런 동물이다.형의 말에 반박할 그 어떤 핑계거리도 생각나지 않는다.그러고보니 난 어제 그녀가 무얼했는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불편하다고 해놓고, 난 은근히 즐겼었을 지도 모른다.내 모든 의식은 옆방을 향해 있었다. 지하철의 그녀를 만난것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여태까지 그렇지 않던 내 삶에 여자가 가까이 있는것만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뭐...정 그러면 방음재 같은거라도 갖다가 설치해.음향기사가 그런거 못하는거 아닐테고.”
하..그게 우리집이면 모를까..원룸사는 주제에 방음재라니...아마 주인집 아줌마가 우리집에 온다면 놀라 자빠질 일일거다.내가 고개를 젓자마자, 준혁이 형은 흥미가 없다는듯 ‘헌팅녀’에 대한 주제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야야.그나저나 엉아 말대로 해.오늘 녹음도 빨리 끝났으니까.함 전화해 보던지.”
그는 오늘도 여자와 약속이 있다는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내 어깨를 툭 하고 쳐주었다.빳빳한 내 주머니 안에서 사각형의 감촉이 선명하게 전해진다. 전화기...역시 그녀에게 전화를 해야만 할까?
내 옆구리에 만보기가 달려있다면 벌써 만을 찍고 다시 0이 되었을만큼, 나는 녹음실 주위를 한참이나 서성이고 나서야 전화기 폴더를 열수 있었다. 역시나 뭐든지 해본놈이나 하는거다.경험이 없으니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하고, 심장은 계속해서 뛰기만 했다.
뭐라고 해야할까.어떻게 말하는게 가장 자연스러울까. 머릿속에서 수많은 상념이 교차한다.
-여보세요?-
다짐하고 다짐했건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또다시 동상이 되어버린다.
“아..,네..그..저기..수고 많으십니다..”
...무슨 서비스 센터에 전화했냐...한심한 내 자신을 향해 질책을 할때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예쁜 목소리였다. 왠일인지 낯이 익긴 했지만 여자 목소리가 솔직히 거기서 거기 아닌가 뭐..목소리만 들으면 인애도 굉장히 이쁜 편일거다.
“안녕하세요.저는 그때에..그..”
-죄송한데 조금 바쁘거든요?누구세요?-
“그때..전화번호를 여쭤 봤었는데요..저기..기억을 하실라나 그게..”
순간 전화기 저편으로는 정적이 흘렀다.그녀가 끊어버린게 아닐까하는 마음에 계속 액정을 확인했다. 젠장..연습을 해도 정작 나오는건 찐따 멘트라니.
-아..혹시 그 스님이에요?-
전화기 넘어로 쿡쿡 거리며 웃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아..귀엽다.아직 날 스님이라 기억하고 있다니! 그녀가 기억을 한다면야 스님이 되건 목사님이 되건 아무런 상관없다. 그저 그녀의 기억중에 단편이라도 내가 있다는 것이 중요할뿐.
“아..네! 안녕하세요?”
-네 스님.-
그녀는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내가 말을 건냈다.한결 편안했다. 그녀가 내성적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무슨일로 거셨어요?-
아..나는 또다른 난관에 가로막혀 버렸다. 일단 걸긴 걸었는데, 건목적을 모르겠다.내가 왜걸었지?그래.침착하자.나는 남자라고.
“저기..문자도 보냈었는데..”
-어머,정말요? 몰랐네요-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아..진짜 천사구나. 나는 그틈을 타서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오늘...시간 있으신가요?”
-네?-
돌아오는것은 황당하다는 듯한 그녀의 대답. 너무 앞서 나간걸까?괜시리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고 손과 발은 차가워 지기 시작한다.와..내가 원래 이런 폐쇄적인 성격이던가? 아니다. 약간 나서기 싫어하는것은 있지만 이렇게 대인공포증 초기증세까지 발전한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그야말로 이건...내 성격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음..그게..잠깐 뵙고싶어서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잠깐 보고싶다고 하는것이 이렇게 힘든 말일줄은 나도 정말 몰랐던 것이었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찰나의 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진다.
-오늘은 너무 바쁘네요.-
아...나는 맥이 탁하고 풀려버렸다.거절을 돌려 이야기한 걸까?나를 별로 보고싶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왠지 힘이 빠졌다.
“그러시군요...”
내 목소리에서는 감추지 못한 실망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언제 시간나냐고..그렇게 물어봐야 할까?
-혹시 잠깐이라도 괜찮으세요?-
나는 그만 전화기를 놓칠뻔했다. 기대치가 없었던 상태에서 그녀가 내뱉은 말은 나에게 있어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시간을..날위해 시간을 내준다는 거야?
“물론입니다!잠깐이라도 괜찮습니다.”
-음..한 십분정도 밖에 안될텐데..혹시 성원빌딩이라고 아세요? 그때 봤었던 골목길 쪽으로 올라가면 있는데..-
“아..네.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따 거기서 잠시 뵈요.제가 그 건물에서 일하거든요-
아...겨우 진정한 내 가슴이 계속해서 뛴다.그녀가..그녀가 허락을 해준 것이다.비록 잠시지만...나에게도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목소리가 떨렸다.
“저.저기요!”
-네?-
“성함을 알수 있을까요?”
전화기 너머로 뭐가 재밌는지 쿡쿡 거리며 웃는 그녀의 귀여운 목소리가 들린다.직장 동료와 같이 있는걸까?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간간히 들려왔다.그녀가 왜 웃는지 아무런 감을 잡지 못하고 있을 즈음, 전화기 너머로 다시금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수정이..윤수정이에요.-
녹음실의 뒷정리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자연스레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지금 이 상태라면 불후의 명곡이 될 악상마져 쉽게 떠오를 것도 같았다.
‘수정..수정이..이름도 너무 이쁘다.’
흔한 이름일수도 있지만, 지금 내게는 그 어떤 수식어 보다도 아름다운 이름이 되어 있었다.나는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들고는, 통화목록을 눌러 다시한번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다.
-수정씨-
장난스럽게 미녀라고 입력했던 그녀의 저장명은 수정씨로 바뀌어 있었다.그리고 분명히 수정씨라고 바뀐 그 글자가 내 통화목록안에 띄워져 있다.
그녀는 여덟시쯤 시간이 있다고 했다. 그때에 잠시 시간을 내는것을 보니 일이 바쁘거나 혹은 일이 끝난뒤 약속이 있는 모양이었다.상세한 시간을 이야기 하진 못했지만, 회사 앞에서 전화를 하기로 했기에 문제될것은 없었다.
-박재하씨요?이름 멋있네요.스님이름 치고는요.하하-
그녀에게 있어서 내 케릭터는 그냥 어리버리한 스님인가 보다.아무렴 어떠랴.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 상대와 만나는데...그딴건 중요한게 아니었다.
연습실 한가운데 놓인 거울에 수없이 내모습을 비춰 보았다.이럴줄 알았으면 옷을 더 신경써서 입고 오는건데..후회가 밀려왔다.집에 잠시 들를까?했지만 그정도의 시간은 없었다. 별수 없이 괜시리 티셔츠를 툭툭 털며 거울앞에서 궁상섞인 내 모습에 한숨만 픽픽 쉴 뿐이었다.
늘 그렇듯이 녹음실을 잠군 나는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어둑어둑한 하늘.이제는 제법 쌀쌀한 날씨다.하지만 왜 이렇게 다리가 떨리지?떨릴 정도의 날씨는 아닌데 말이다.
연습실과 우리동네는 가까웠다. 뭐..그게 내가 지금있는 이 집을 선택한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성원빌딩은 바로 우리동네에 있었다.
아..이제서야 수긍이갔다.내가 그때 그녀..수정씨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며 사시나무떨듯 떨었던 그 길이 바로 성원빌딩 가는 길이었다. 뭐..이런저런 사무실이 모여있는 건물이니..그녀도 그냥 평범한 회사원인 모양이다.
오피스레이디라. 왠지 멋있다. 그래서 그렇게 깔끔한 옷을 입고 있었구나. 그럼 집은 어디일까? 그때 분명히 지하철에서 만났었으니...이 근처는 아닐 것이다.
후우우우.
누가 봐도 찐따스럽게도, 나는 별것아니라면 아닌 이 상황에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내 모습을 바보같다고 한다면 당신은 사랑을 안해본 사람이리라! 비록 그녀에게 대해서는 윤수정이라는 이름 석자 밖에 알지 못하지만, 그녀가 내게 보여준 임펙트는 사랑을 키워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아...”
나는 촌스럽게 앗! 하고 소리칠 뻔한것을 꾹 참아내었다.빌딩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연신 휴대폰 액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숨이 막힌다. 첫인상속 완벽했던 그녀의 자태는 하루가 지난다 한들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긴 머리는 오늘도 깔끔하게 묶어 올려, 갸름한 얼굴선을 보여주고 있었다. 너무나 작고 귀여운 얼굴. 그리고 청순미까지 묻어나는 그녀의 클래식 정장까지도. 시선이 그녀의 신체 부위 하나하나에 머물때마다 내 심장박동 수는 점점 더 빨라진다.
“저..저기..”
하하.마치 선풍기앞에서 말하는것처럼 내 목소리는 심히 찐따스럽게 떨리고 있었다.밑을 향해 있던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들어올려지며 나를 향했다.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그녀의 입술. 그녀가 금새 장난기 있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나를 보고 웃는다.
“와!스님이다!”
저번에 그 소개팅녀..슬기라고 했던가? 그 여자가 나에게 스님이라고 했으면 아마 얼굴이 돌아갈정도로 죽통을 후려줄 용의가 있지만, 그녀가 내게 장난스럽게 하는 말은 계속 듣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안녕하세요.수..수정씨.”
“왜이렇게 늦었어요?”
그녀는 갑자기 미간을 찡그리며 화났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순간 멍해진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그녀는 장난이었다는 듯이 살짝 웃어주었다.
녹는다. 어쩜 사람이 이렇게 이쁠수가 있을까? 수정이의 눈동자에 비친 나를 보는게 너무나 좋고 황홀하다. 알게 된지 하루밖에 안된..그것도 길거리 어리바리 헌팅남을 상대로 저렇게 밝은 성격이라니...
“그러고 보니 또..까먹었네요 이름.”
“저요?아..박재하입니다.”
“저는 윤수정이에요.아까 이야기 했지만.”
아..무슨 말이라도 해야할거 같았다.이 상황이 뭐란 말인가.헌팅은 내가 했는데 말은 그녀가 하고 있다.이것은 심히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라 할수 있었다.
-나이나 직업같은건 알아야 하지 않겠냐?사는곳이라던가.호구조사는 해야지-
준혁이 형의 조언아닌 조언이 떠올랐다. 내가 재미있는듯 빤히 나를 바라보는 그녀.나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음..어떨것 같은데요?”
아 씨...저건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너무 낮춰 부르면 거짓말인거 같고, 그렇다고 적당히 부르자니 그 나이보다 어릴수 있으니까. 기대감으로 가득한 그녀의 눈망울. 너무나 입맞추고 싶은 그녀의 입술이 나를 향한다.
“스물..넷정도?”
“우와아!”
그녀는 손뼉을 짝 하고 치며 놀랍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음..어리게 봐줘서 고맙다는 걸까?일단 기분이 상하지 않은걸로 봐선 그것보다 나이가 있지는 않은거 같다.
“어떻게 알았어요?”
“저..정말 스물넷이에요?”
“네.스님은요?”
“전..여덟입니다.”
“와..그렇게 안믿겨지는데.”
“저..정말요?”
“네.생각보다 어리네요.”
“.............”
내 멍한 표정에 그녀는 살짝 입을 가린채로 쿡쿡 거린다.나는 멍하니 그녀의 웃는 모습만 바라봤다. 그 미소 한방에..머릿속에 생각해두었던 수많은 대사들은 흡사 비맞은 거품처럼 스르르 녹아들어 버린다.
“농담이에요.충분히 어려보여요.그치만 저보다 오빠네요 그쵸?”
나는 멋적게 그녀를 따라웃었다. 준혁이 형의 조언도 생각나지 않았다.그랬다. 내가 여기 나올때부터 너무나 궁금했던 그 질문. 그것을 물어봐야 했다.
“저에게...전화번호를 주신 이유가 뭔가요?”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신기했어요.수정씨 같은 미인이 제가 요구한다고 해서 전화번호를 주는게...너무 신기했어요.잠깐이지만 오늘 만나주는 것도 그렇고.”
그녀의 앞에서 이렇게 길게 말한적 있었던가?하지만 내 말은 진심이었다.바보같은 자기비하일지도 모르지만, 나와는 너무나 차이가 많이 나는 그녀니까.
그런 그녀가 웃는다. 내 가슴이 과다 박동으로 빵구나는 것을 보고싶은 건지...그녀는 그렇게 계속 나를 보며 웃더니 말을 이었다.
“재밌어 보였어요.순수해 보였구요. 그게 다에요.”
아...내가 다시 그녀를 보았을때 그녀는 살짝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이렇게 빨리..들어가야 하는 건가?일하다 잠깐 나왔다지만..아직..물어보고 싶은게 너무 많았다.
“이제 들어가봐야 겠네요.미안해요.재하 오빠라고 했죠?너무 착한분 같아서..거절하기 싫었어요.”
그녀는 살짝 몸을 돌려 건물쪽을 향했다.신기루를 쫒는 사람처럼 내 시선이 그녀의 하얀 목에 이르렀을때,그녀는 살짝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일찍 가게 되서 미안해요.다음에 또 연락해요.재하오빠.”
그녀는 내게 확인사살을 날려버렸다. 재하 오빠라는 말을 하는 그 순간 살짝 눈웃음이 들어가는 그녀의 하얀 얼굴.나는 마치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그대로 멈춰서 버렸다.천천히 건물쪽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 이게 꿈이라도 좋았다. 사늘해진 밤바람이 내 옷자락을 펄럭일 정도로 불어왔지만, 그녀를 보는 내 가슴은 너무나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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