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잠든 사이에 <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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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세상이 핑핑 돌았다. 목구멍으로 알딸딸한 액체가 넘어갈수록 맥박수도 호흡수도 증가하는것처럼 느껴졌다. 시끄러운 주변의 소리들이 들리지 않았다.
“젠장..”
참으려해도 욕이 나왔다.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가혹했다. 내가 사랑에 빠진 여자가 남자친구가 있어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숨소리마저 환하게 들리는 옆집에 살고 있는데 나는 그녀가 다른사람과 사랑을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게 가혹했다. 더욱더 힘든것은 내가 그것을 훌훌 털고 모른척 하거나, 혹은 다른집으로 이사를 갈 용기따윈 없다는거다.
“이 한심한 궁상아.”
내 앞에는 인애가 앉아 있었다. 서울에서 나와 술을 마셔줄 친구라곤 인애밖에 없으니까.안그래도 말주변이 없는 나는 횡설수설하며, 그것도 소주를 입안에 콸콸 들이부어 가며 수정이와의 일을 그녀에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물론,방음이 안되는 옆방에 살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왜인지 나도 모르지만 그냥 나만 알고 가고싶은 그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지하철에서 한눈에 반해 전화번호를 땄지만 결국 그녀는 남친이 있었다...라는 스토리만 들려주었다.
인애는 바쁜 업무가 끝나고 달려와 주었다.여전히 이쁜 이마가 다 보이게 머리를 위로 틀어 묶은채로, 화장기가 없는 맨 얼굴로 동성친구이상의 털털함을 탑제한채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 이제 어떡하냐..”
한숨을 푹 쉬어 버렸다. 인애 앞이라 창피해서 꾹꾹 참고 있었지만 가슴속으로는 백번도 더 울었다. 그녀를 생각하며 가슴설레여 했던 나날들이 생각하니 불에 데인듯 아팠다. 인애는 한숨을 담배연기와 섞어 푸우하고 뱉어내었다.
“뭘 어떡해.잊어야지.”
무심하게 소주잔을 비우는 그녀의 모습이 원망스럽다.잊어? 그건 어느정도 시작이라도 해본 애들이 하는 말이다. 나는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접어야만 했다. 해드폰으로 똑똑히 느낄수 있었다. 수정이가 남자친구를 너무 좋아하는것 같다는 그 느낌. 내 앞에서는 날 스님이라 놀리며 밝은 모습만 보여주었던 그녀가, 그 남자친구 앞에서는 애교도 떨고 토라지기도 하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거다.
“자신없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소리에 인애의 동작이 뚝하고 멎었다. 하얀 피부와 볼. 그리고 핑크빛 입술이 실룩 거리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 건가? 일순간 인애의 표정은 딱딱해지고 있었다.
“이런 등신아!”
평소같았으면 겁을 집어먹고 뒤로 자빠졌을지도 모를 인애의 우렁찬 사자후에도 나는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시끌시끌한 호프집에 쩌렁쩌렁 울려퍼진 인애의 앙칼진 사운드는 주변의 시선을 계속해서 우리쪽으로 끌어 당기고 있었다.
“야..왜 화를내냐..”
술김에도 기가 죽는건 어쩔수 없는 모양인지, 내 말의 톤은 한참밑으로 내려갔다.인애는 소주를 자신의 잔에 콸콸 따른후 - 그 와중에 전혀 넘치지 않고 딱 잔의 만땅을 채우는 스킬을 발휘- 안주하나 없이 바로 입으로 털어넣었다.
“야 박재하 바보멍청아. 그여자는 너 신경도 안써 알아?왜 혼자 끙끙 앓아?그 여자한테 니 마음을 표현이라도 해봤어?”
“하면뭐해.임자가 있잖아”
“만약에..임자가 없었더라면 넌 어떻게 했을건데?엉?”
인애는 흡사 골목길에서 껌씹는 누님같은 포스로 나를 다그쳤다. 뭐라고 말하려던 나는 그만 수그러들고 말았다. 애초에 수정이가 남자친구가 있을거라는 생각은 안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에게 전화한통 못하고 덜덜떠는 연애 부적격자의 모습을 보였던 거다.
하..맞다. 달라질건 없었다.인애의 말은 메스처럼 내 가슴을 팍팍 도려내고 있었지만 나는 반박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수정씨가 임자가 있거나 없거나, 혹은 내 옆집에 살거나 안살거나 그녀를 향한 내 행동은 달라질게 없었을 거다.
“야..너..열두살때 일 기억하냐?”
인애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뜨끔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벌써 그녀의 앞에 있던 소주병은 반이상 비워져 있는 상태였다.
“기..기억하지..”
기억안날리가 있으랴. 바야흐로 초등학교..아니 당시 국민학교 시절 내가 어느 친구의 시계를 훔쳤다는 누명을 썼던 일이 있었다.나는 결백한데도 불구하고 다들 범인으로 몰아붙이는 기세에 밀려 제대로 해명도 못하고 쩔쩔 매었었던 기억. 그때..나를 구해준건 인애였다.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했다.인애는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화가나서 십수명의 아이들 앞에서 증거를 대보라며 바득바득 우겼고, 곧 녀석의 집 서랍에서 시계가 온전한 모습으로 출몰함으로써 내 누명은 씻은듯이 사라졌었다.뭐..덧붙이자면 인애의 등살에 밀린 아이들이 하나둘씩 와서 내게 사과하는 훈훈한 마무리까지 연출되었었다.
“그래.그때와 뭐가 달라? 그 대상이 초딩이냐 아니면 그 여자냐 그 차이지..왜 니 생각, 니 마음 말도 못하고 중도에 포기해 버려? 니가 그러고도 남자냐?”
나는 꿀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왜인지 모르지만 인애는 나보다 더 화가 나있는것만 같았다. 얼굴이 벌게져 가며 나를 노려보는 그녀의 앞에서 내 마음은 숙연해져 버렸다. 맞다..첫눈에 반해버린..그런 사랑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작아지기만 할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자..문제 하나 낸다.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인애의 질문의 의도쯤은 알고 있었다.그녀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내 빈잔에 콸콸 술을 따라주었다.나는 그녀가 건낸 소주잔을 가만히 응시했다. 맞다. 지금 수정씨에게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면..나는 16년전 초딩시절에서 전혀 발전이 없는 그런 놈이 되어버릴것이다. 인애의 말이 옳았다.나는 도전자체를 두려워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크읏..”
인애가 준 잔을 단숨에 비우자 목이 쓰리다.쓴맛에 정신이 확하고 드는것만 같았다.그녀는 알수없는 눈빛으로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알았으면 어서가봐.”
“지금?”
“왜?알콜이 부족해?”
“그건아니지만..넌 어떡해?”
왠지 모르게 인애의 눈망울이 조금더 촉촉해 진거 같았다.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듯 술병을 가리켰다.
“천하의 서인애가 요정도 술로 되겠냐?말이라도 하고와.여기서 계속 마시고 있을테니까.”
나는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내 시선을 느끼고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휘휘 저으며 어서 가라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고마워.”
“...얼른가 시끄러우니까.”
“금방올게.기다려.”
나는 재빨리 호프집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나갔다.쌀쌀한 초가을의 바람.내 빡빡머리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얼어붙는것처럼 시원하다. 달리면서 시계를 바라보았다.일곱시가 조금 넘은 시간..분명히 그녀는 회사에 있을거 같았다.아니, 있을것이다.
‘할수있어..말할수 있어..’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고,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다지만 나는 ‘성소설’이라는 나만의 학설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소심하다! 다만 결단을 하느냐,아니면 나처럼 바보같이 늘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느냐의 차이일뿐.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알콜이라는 연료가 들어가자 내 심장은 폭주기관차 처럼 어디론가 내달린다.저질 체력이라 힘들어서가 아니다.남자친구가 있는 여자에게 고백하러 가려니 차일까봐 조마조마해서도 아니었다.단 한가지,계속해서 달리는 내 심장의 목적지가 수정이라는 사실 자체가 나를 설레게 할 뿐이었다.
“후우..후우..”
모공에서 땀이 삐질삐질 날때까지 달려보니 정신이 드는것도 같았다. 택배박스 위에 붙여진 수취인을 보고 지금까지 혼이 달아난 것처럼 멍해져 있던 내가, 심장이 조여올듯한 압박을 받으니 살아있다는 현실감에 눈이 번쩍 뜨여졌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녹음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시계로써의 기능을 200프로 발휘하는 내 휴대폰위에 적힌 수정씨라는 세글자.난 망설임없이 버튼을 눌렀다.
나만 있는 경험일까?사소한 전화연결음에 입술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쿵쾅거리는 경험이 말이다.1년같은 1분은 나를 계속 초조하게 만들었다.
-여보세요?-
떨면 안된다.이제야 알거 같다.내가 해드폰으로 들었던 목소리와 똑같았다.옆집여자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때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수정씨.”
-어머..스님!-
아픈건 다 나았을까?아니, 그런건 묻지 못하겠다.아직 내가 당신의 옆집에 산다고 밝힐 자신이 없다.너무나 밝은 그녀의 목소리. 왜일까?처음엔 밝은 그녀의 태도가 좋았지만...그것이 특별한 사람이 아닌 다른 모든사람들에게 통용되는 그녀만의 화법일거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말이다.
“회사..신가요?”
-네.회사에요.무슨일이에요?-
“수정씨 회사 앞이에요.”
-에에?-
그녀는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어쩌면 내가 귀찮을지도 모르겠다. 일을 방해하는 빡빡머리 바보로 볼지도 모른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심호흡을 하고나니 이상하게 차분해진다.심장이 터져서 말도 못하고 덜덜 떨줄만 알았는데 오히려 내 톤은 안정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잠깐 볼수 있을까요?”
왠일인지 그녀는 한번에 답해주지 않았다.괜찮았다.마음을 비우니 참을만한 딜레이였다. 이윽고 천천히 수화기에서 천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요.회사 앞이시죠?금방 나갈게요-
“아..”
뭐라고 답을 하려는 찰나 전화는 끊어졌다. 그래.이제 떠나가는것을 보며 혼자 포기하는게 아닌 차이는것을 맛볼 차례다. 적어도..후회는 없게 말이다.
그때 그녀를 만났던 곳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작은 가로등이 비추는 조그마한 골목길.그녀의 회사 건물이 눈에 보였다. 나는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손으로 빡빡 닦아내었다.
인애가 했던말을 되새겨 보았다.인애가 나보다 더 남자다운(?)여성이기 때문에 그런말을 한것이 아닐것이다. 중요한것을 늘 놓치고 뒤늦게 후회함이 반복되었던 내 삶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신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했다.저편에서 건물의 문이 달빛에 반짝이는것이 보였다.원래 그 유리문이 영롱할 정도로 깨끗해서가 아니다.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
나도 모르게 또한번 넋을 잃었다.카키색의 클래식정장을 입은 그녀의 하얀 피부는 멀리서도 나를 멈칫거리게 만들었다.그와 대조되는 까만 머릿결은 단정하게 그녀의 어깨위로 내려와 있었다. 무릎밑으로 내려온 다소 점잖은 스커트지만, 드문드문 보이는 그녀의 하얀 종아리는 반짝반짝 빛나는 듯했다.
“앗!스님~~”
그녀는 나를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반짝이는 입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게 너무나 예뻤다.가식적인 웃음이 아니라는듯 그녀는 눈으로도 웃고 있었다.아주 이쁜 초승달처럼.
“안녕하세요 수정씨.”
“넵~수정씨라고 하니까 어색하네요.”
그녀는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밤공기가 추운지 살짝 어깨를 움츠리는 그녀.따뜻한 커피라도 사왔어야 했나?아..이런 바보가..
“그냥..보고싶어서요.”
“어엇?술마셨나요?”
“네..쬐금..”
“스님이 술마셔도 되요?”
그녀는 쿡쿡 거리며 웃었다.귀여웠다.스님이라는 단어..재미도 없는데 계속 그걸로 웃는 그녀가 귀여웠다.나를 보고 웃어주는것에 대해 조금씩 희망이 생기는 내 마음이 두렵다.그래선..안되는데.
“죄송해요..따뜻한 커피도 사오지 못했는데..”
“아니에요.제가 뽑아올걸 그랬나봐요.우리회사 자판기 커피 맛있는데.”
“아..음..”
그녀는 발랄하게 이야기 하다가 내가 머뭇거리는것을 보고 동그랗게 눈을 떴다.아픈게 다 나은건지 밝은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한층 안심되었지만, 여전히 고백하는데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은 내 찐따스러움을 한탄하고 있었다.
“저기..수정씨.”
“네.”
“남자친구..있으신가요?”
그녀는 뜬금없이 들려온,그것도 살며시 떨리기 까지 하는 내 질문에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당황해서 일까?아니면 그런 표정조차 예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에대한 미안함 때문일까.
“네.있어요.”
바람소리가 내 귓바퀴를 한번 돌고 다시 나가는게 느껴진다.예상했던 대답..아니, 확실했던 대답. 사형을 당할것을 아는 사형수라 한들, 사형집행일에 덤덤할수 있을까?내 대답은 노(No)였다. 그대로 안면까지 얼어붙은 나를 보며,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잠자코 기다려주는 듯했다.
“그..그렇군요.”
내가 말이 없자 수정이도 말이 없었다.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어디서 부터..그냥 좋아한다는 말? 아니면...지하철에서 처음 봤을때부터 사랑했다는 말?
“좋아했어요..진짜 많이.”
나도 모르게 시무룩해져 버렸다.그녀의 하얀피부가 달빛보다 시리다.나는 거짓말을 해버린거다.좋아했어요가 아니라 지금도 난 그녀를 좋아한다.
“미안해요 재하오빠.갑작스러워서 조금은 놀랬지만..미안해요.”
“한가지만 물어도 될까요?”
“네.얼마든지요.”
“저에게 전화번호를 주신건..단순히 제가 착해보여서 였나요?”
어려운 질문이었을까? 그녀의 표정이 약간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그런 내 모습을 보고 ‘스님’이라는 농담따윈 하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늘 웃는 그녀가 나때문에 웃음기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을 갖는 내 모습이 너무 미웠다.
“아니요. 왠지 모르게..거절할수가 없어서요.”
그녀의 치마자락이 살짝 바람에 펄럭였다.동시에 까만 머리결도...지금 이순간에도 수정이를 아름답게만 보는 내가 싫었지만 어쩔수 없었다.반짝이는 입술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내가 벽 너머로 훔쳐들었던 ‘미지의 여인’ 그 목소리 그대로일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순간에는 너무나 다르게 느껴지는 음색이었다.
“그 말..전하려고 왔어요.일 방해해서 미안해요.”
눈물이 날것같아 등을 돌려버렸다.내가 그녀라면 무슨말을 했을까? 연락정도는 해도 된다는 값싼 동정을 선사했을까? 아닐것이다.누군가가 날 짝사랑해줬던 경험따윈 없지만, 내가 만약 수정이라면 나역시 아무런 말도 못할거 같았다.
“자주 연락..할게요.”
끝내 나는 그 침묵이 두려워 또 먼저 말을 하고 말았다.와락 안아 버리는 불경을 저지를까봐 그녀의 얼굴은 바라보지 못한채로.
“알겠어요.조심히가세요 오빠...그리고 미안해요.”
“네에..”
미안할게 뭐가 있을까? 만약 남자친구가 없는데 내가 대쉬해서 거절한 것이라면야 예의상 나올수 있는 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적어도 내가 듣기에는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는것 같았다. 미안해야만 할것은 멋대로 둘 사이에 끼어들려고 했던 나다.
결국 나는 등을 돌리고 발길을 옮겨 버렸다.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던 수많은 질문들은 단 하나도 던지지 못한채로 말이다. 어째서 우리동네에 회사가 있고, 내 옆집에 사는 그녀가 내 눈에 처음 들어온 곳이 지하철 이었는지 그것역시 묻지 못했다. 그냥 남자친구가 있다는 한마디. 내 옆에 사는 여자가 동명이인의 윤수정이 아닌, 지하철에서 처음보고 사랑에 빠졌던 윤수정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확인사살 당했을 뿐이다.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가슴에선 뜨겁게 눈물이 내렸지만, 신기하게도 너무나 후련했다. 내 마음을 그녀에게 전했다는 것 자체가 뿌듯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옆방그녀가 그저 동명이인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부숴져 버리니, 오히려 오래 묵혀둔 숙제를 한것처럼 시원하기 까지했다. 마음 한구석이 쓰린건..어쩔수 없겠지만.
‘집에 들어가서..술이나 실컷 마셔야 겠다.’
멀리 편의점 하나가 보였다.간만에 감정에 젖어서 술을 마셔볼것 같았다.그래..난 그냥 이런 궁상이 어울리는 인간일지도 모른다.비록 인애처럼 술을 잘 마시진 않...
잠깐..인애?
불현듯 머리에서 띵!하고 줄이하나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멍해져서는 집근처까지 와버린거다. 인애는 분명 기다린다고 했는데.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인애의 주사중에 ‘무차별 폭력’과 ‘폭언 및 가혹행위’도 포함되어 있는것을 잘 알기에 나는 숨이 턱에 찰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저 멀리 술집이 보였다. 계속해서 술을 주문하며 천천히 변신의 단계를 밟아갈 인애가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그녀는 술을 마시면 ‘민폐의 아이콘’이었다. 예전에는 인애가 술에 취해 비틀비틀 걸어가는것을 보고, 그녀의 곱상한 외모때문에 접근했던 두명의 취객아저씨들이 인애에게 낭심을 걷어차인 사건은 길이길이 회자될만한 무서운 사건이자 이 시대 취객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사건으로 남아있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조마조마 하는 마음으로 술집문을 열고 들어갔다. 열심히 고개를 휘젓고 그녀를 찾았다. 수정이를 만나는 바람에 머리속이 하얗게 탈색되어 버린 탓인지..아까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 기억이 안났기 때문이었다.
‘으헉..’
이윽고 내 시선이 어느 한곳에서 머물렀다. 어떤 여자 하나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는 자리가 한자리 있었기 때문이었다.직원들도 본능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감지한 것인지 그녀를 감히 깨우지 못하고 테이블 주변에 얼쩡거리기만 했다.손님들 중에는 인애를 보며 킥킥 거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쪽팔려...
그래도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술먹자고 한 내 어두운 목소리에 한달음에 달려왔고, 또 내가 수정이에게 가는 시간까지도 흔쾌히 기다려 주었으니까.
“아휴..손님 일행이세요?”
내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자 직원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마치 저런 진상은 처음본다는 듯한 그들의 시선에 나는 굽신거리기 바빴다.
“여기 얼마죠?”
다년간..아니 이십여년간 인애의 친구자리를 역임하고 있는 나는 능숙하게 일을 처리할수 있었다.그녀를 부축하고 계산을 하면 발광을 하는 그녀덕에 제대로 된 계산을 할수 없다는건 잘 알기 때문이다.
“어휴..뭘 혼자..그것도 그 짧은 시간에..”
걸어갔다 왔으니 왕복 40분정도는 걸렸지만, 테이블위의 술병들은 40분사이에 해치워질 양이 결코 아니었다.게다가 안주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나는 능숙하게..너무나도 능숙하게 인애의 가방을 팔에 끼고는 그녀의 얇은 자켓을 팔에 걸었다.그리고 엎드려 있는 인애의 허리를 잡고 천천히 흔들었다.
“인애야.가자.”
나는 인애를 깨운후 내가 생각해도 실로 엄청난 스피드로 휙 하고 뒤로 빠졌다.그와 동시에 인애의 팔이 내가 서있던 자리로 부웅!하는 파공음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저것이 바로 내가 이름붙인..그녀만의 필살기인 취중펀치였다.
좌중들의 시선은 내게 쏠려 있었다.쿡쿡 거리는 인물들도 있었고, 그녀를 다루는데 익숙한 내 모습을 보며 신기해 하는 이들도 있었다.나는 마음속으로 정확히 10을 센후 다시금 인애의 양팔을 봉쇄하듯 끌어 안았다.
“뭐야아아~~”
“집에가자 인애야.”
“우이씨!어라?박재하네?으히히히히?”
위험했다. 머릿속에서 위험경보가 울려퍼졌다.단시간에 빠르게 알콜을 넘긴탓에 인애의 취기는 현재 위험상태였다.나는 황급히 테이블을 발로 밀어냄과 동시에 군대에서 배운 무릎앉아 자세를 취하며 잡고있던 그녀의 양팔을 어깨위로 쭈욱 하고 끌어올렸다. 숙련된 경험으로 인하여 인애는 내 등판위로 정확하게 안착했다.
“오오오!”
마치 숙련된 조교의 집총각개 16개 동작의 부드러운 흐름을 감상하는 신교대 훈련병들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몇몇 손님들이 눈에 띄자 나는 창피해 져서는 종종 걸음으로 가게를 나서고 말았다.
“꺄하하하하!”
역시나 인애는 내 등위에서 발버둥을 치며 즐거워 했다.이 염병할 술집은 왜 2층에 있는 걸까.나는 부실한 하체로 비틀거리며 겨우겨우 비상구를 통해 내려갈수 있었다.물론 그 와중에 인애는 내 삭발머리를 찰싹찰싹 때리며 웃기에 바빴지만 말이다.
“재하야아아아~”
남들이 보면 귀여운 여성의 애교라 생각할지 모르는 음색이었으나 내겐 저승사자의 손짓과도 같은 섬찟한 음성이었다.등에는 왠 키 큰 여인네하나, 그리고 양팔에 여자 자켓과 가방을 끼고 걸어가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흠칫 놀라고 슬금슬금 비켜났다.뭐..아무래도 지금 시간은 절대 이런 취객수송의 현장이 목격될 만한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귀여운 우리재하야아아~”
그녀는 내게 반응이 없자 급기야 내 볼에 자신의 볼을 비벼대며 꺄르르 거리기 시작했다.술기운 덕에 뜨거워진, 인애의 보드라운 볼이 마구마구 비벼지는것은 뭐 기분나쁜일이 아니겠지만 일단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니 죽을 맛이었다.
“이.인애야 잠깐만..좀 걷게 가만히좀 있어.”
하지만 그녀가 내 말을 들을리 만무했다.여자치곤 큰 키인데다가 내 위에서 발버둥을 치니 제대로 엎고 갈수가 없었다.게다가 인간의 허용 데시벨을 초과하는 그녀의 우렁찬 목소리때문에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술냄새가 섞인 인애의 호흡이 내 얼굴에 와서 부딪힌다. 그래도 여자인지라 내 목을 목도리처럼 감싼 그녀의 머리칼에서 향긋한 샴푸내음이 코를 간지럽혔다. 담배냄새, 알콜냄새가 섞여있지만 역하거나 추하지 않았다.나는 손에 힘을주어 인애의 허벅지를 내 등쪽으로 단단하게 고정했다.
그녀를 업고 가다보니 예전생각이 났다. 여자애들과 공기놀이나 고무줄을 하는대신 사내아이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던 인애가 발목을 삐끗했던 그날. 나는 인애의 책가방을 들고 그녀를 집까지 부축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와 상황은 물론 많이 달랐다.그때는 코를 찔찔 흘리던 어린애들이었고,지금은 둘다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으로써 있는 것이니까.그때 부축해주던 새까만 인자가 아닌, 하얀볼에 성숙한 몸을 가진 다 큰 처녀 서인애로 바뀌어 있다는게 다를 뿐이다.
“고마워 인애야.”
내 중얼거림에 인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기만 했다.진심으로 그녀에게 고마웠다.내가 수정이를 그냥 잊고 살수는 절대로 없겠지만,적어도 내 마음을 용기있게 표현한건 순전 인애의 덕분이었다.
몸에서 땀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겨우겨우 내가 사는 건물까지 그녀를 질질끌고 오다시피 해서 업고 올수 있었다.
복도에 들어서니 복도등이 켜지며 구석에 나란히 있는 내 집과 수정이의 집이 보였다.갑자기 우울해졌다.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나는 자격이 없다는게.
“얌마..어디가 임마..어엉!”
아까만해도 재하야~하면서 내 볼을 떡주무르듯 주무르던 인애는 제 2의 주사상태로 돌입한듯 보였다. 수정이의 집 현관을 보고 멍해져 있던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힘을주어 그녀를 내 등위로 다시금 끌어 올렸다.
“너어~임마..모텔은 안돼 짜샤..이왕갈꺼면 임마...오만원짜리로 가 임마..”
“...”
이 자식...그다지 클린한 사생활을 갖고 있진 않구나..
나는 애써 옆집..그러니까 수정이의 집을 보지 않으려 애를 쓰며 등을 최대한 굽히고는 한손으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고개를 숙인탓에 얼굴에 송글송글 맺혔던 땀방울이 후두두둑 바닥으로 떨어져 점을 그렸다.
휴..이 아이는 단기간에 우리집에서 많이 자는구나.뭐..이 와중에도 옆방여인..아니, 수정이가 회사에 있다는게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마져 드는건 왜일까?
“으아아아~”
나름 총각냄새 안나게 하려고 무던히 방향제를 분사했던 내 방에 알콜의 향기,정확히 말하자면 알콜 섭취한 여인의 향기가 확 하고 퍼져나갔다.
“휴우..”
이제는 꽤나 쌀살해진 날씨이지만, 온몸에 땀은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인애는 침대에 눕히자마자 대굴대굴 구르며 불을 뿜는 용마냥 술냄새를 뿜어대고 있었다.그녀가 많이 취해있음을 확인한 나는 얼른 땀때문에 몸에 찰싹 달라붙은 티셔츠를 벗어버렸다.
몸을 돌리고는 물을 마시려 냉장고 문을 열었다.무의식적으로 물병에 손을 뻗으려는데,무언가 퍼런 것이 하나 보인다.
‘소주..’
그러고보니 예전에 작곡가 형이 놀러오면서 사왔던 술이었다. 뭐..술을 혼자서 마실정도로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니 당시에 남아있던 한병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거겠지.
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쥐었다.뚜껑을 잡고 돌리니 뚜두둑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신선한 알콜향이 확 하고 올라왔다.나는 망설임없이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크으으으으..”
분명히 소주는 냉장고에 고이고이 넣어져 있어 차가운데, 무언가 뜨끈한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인애야..취하고 싶은건 난데 왜 니가 취해버렸니?너는..너처럼 씩씩한 아이는 사랑때문에 아파하지 않을텐데..
알딸딸한 기분을 벗삼아 다시한번 소주병을 입에다 가져다 대었다.먹는순간 잠들어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나는 냉장고 문을 발로 닫아 버리고는 다시금 소주병을 내 입으로 털어넣었다.
“으허어어어!”
술기운이 갑작스럽게 목뒤로 타고오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어왔다.한껏 인상을 찡그리며 소주병을 들어보니 벌써 반이 조금 안되게 소주병이 비워져 있었다.
나는 싱크대위에 그것을 올려두고는,실금실금 올라오는 뱃속의 뜨거운 기운을 느끼며 나와 수정이사이를 가로막고 선 얇은 벽을 응시했다. 해드폰 하나면 모두다 들을수 있고,그녀의 숨소리조차 느낄수 있지만, 정작 오늘이후로 그녀는 더더욱 잡을수 없는 그 어딘가로 달아나고 있는것만 같았다.저 하얀벽..나는 또 이렇게 말하고 얼마나 더 귀를 기울이며 그녀의 행적을 쫒을까? 하얀색의 벽지.그리고 하얀색 얼굴.까만 머리결과 까만눈동자..그리고 붉은 입술..에엥?
그제서야 나는 인애가 몸을 벌떡 일으켜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술기운 때문에 나는 쿨럭하고 헛기침을 했고,인애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양손을 교차시켜 자신의 티셔츠를 잡아쥐었다.그리고..
“야..야!”
말려야 하는데 말만 나가고 손이 나가지 않는다.인애는 어느덧 티셔츠를 훌렁 벗어버리고는 휙하고 옆으로 던져버렸다.하지만 내 시선은 던져진 티셔츠를 따라가지 않았다.보라색의 레이스가 달린 브레지어에 감춰진 그녀의 하얀 가슴이 살짝 떨리는 광경만을 멍하게 지켜볼뿐.
“야..야..너..끅!”
술을 갑자기 들이켰는데 깜짝 놀라니 딸꾹질이 튀어나왔다.내 만류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건지 인애는 무심하게도 손을 아래로 내리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무언가를 꼼지락 대었다.
딸칵
여기서 말려야 한다! 하지만 뇌에서 명령하는 속도는 내 본능이 몸을 지배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듯했다.그녀는 한참이나 꼼지락대더니, 이윽고 청바지마저 천천히 그녀의 다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말리려고 두어걸음,그제서야 다가갔지만 나는 우뚝 하고 멈춰서고 말았다.말리러 갔다가 더욱더 감상할 포인트를 잡은 형상이 되어버렸다.
“뭐해?빨리 도와줘봐!”
으으.위험했다.인애의 풀린눈이 위험신호를 삐삐 하고 알리고 있었다.흡사 군대시절 오분대기조 호출 사이렌을 들은것보다 더 긴장되었다.
나도 모르게 손이 스으으 내려가 발목에 걸린 인애의 바지를 잡아버렸다.눈앞으로 길게 뻗은 인애의 하얀 다리와 약간 도톰한 허벅지.그리고 브라의 색깔과 똑같은 삼각형의 천조각이 절묘하게 내 시선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녀가 몇번 몸을 비틀자 청바지는 쑤욱 하고 그녀의 발목을 떠나버린다.고개를 숙이던 인애가 갑자기 훽 하고 얼굴을 들었다.찔끔하고 있을때에 그녀는 하얀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왜..왜..”
“뭐해?”
“응?”
“얌전한척 하지 말고 임마..그럴거면 모텔에 왜 왔어?”
“야..나 재하야..여기 모텔아니..헉!”
더워서 웃통을 벗은 내 상체위로 까칠한 이불의 감촉이 느껴져온다.갑자기 인애가 내 손을 잡고 확 하고 끌어당기는 바람에 나는 침대위로 푹 하고 넘어겼기 때문이었다.소주병을 열었을때와 또다른 느낌의 알콜내음이 확하고 내 입술을 덮친다.
“우.웁..”
머릿속이 창백해졌다.눈앞에 보이는건 반쯤 풀려버린탓에 뇌쇄적으로 변해버린 20년지기 친구의 눈빛이었다.그녀는 내 목을 끌어 안더니 슬금슬금 내 위로 올라탔다.겁에 질린 내 눈망울이 쪼르르 밑으로 내려가니 하얗게 곡선을 그리는 인애의 허리라인이 보인다.
“이..인애.웁..”
부드러웠다.무언가가 나를 촉촉하게 감싸는 미지의 느낌.그리고 술냄새..
소주를 마시지 말었어야 했나...하는 생각이 아련히 뇌리를 떠나가고 있었다.불길처럼 뜨거운 그 무언가가 훅 하고 전신을 휘감는다.20년이상 친구로 지냈던 인애의 입술.그녀는 뱀처럼 나를 조여오고 있었다.
세상이 핑핑 돌았다. 목구멍으로 알딸딸한 액체가 넘어갈수록 맥박수도 호흡수도 증가하는것처럼 느껴졌다. 시끄러운 주변의 소리들이 들리지 않았다.
“젠장..”
참으려해도 욕이 나왔다.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가혹했다. 내가 사랑에 빠진 여자가 남자친구가 있어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숨소리마저 환하게 들리는 옆집에 살고 있는데 나는 그녀가 다른사람과 사랑을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게 가혹했다. 더욱더 힘든것은 내가 그것을 훌훌 털고 모른척 하거나, 혹은 다른집으로 이사를 갈 용기따윈 없다는거다.
“이 한심한 궁상아.”
내 앞에는 인애가 앉아 있었다. 서울에서 나와 술을 마셔줄 친구라곤 인애밖에 없으니까.안그래도 말주변이 없는 나는 횡설수설하며, 그것도 소주를 입안에 콸콸 들이부어 가며 수정이와의 일을 그녀에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물론,방음이 안되는 옆방에 살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왜인지 나도 모르지만 그냥 나만 알고 가고싶은 그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지하철에서 한눈에 반해 전화번호를 땄지만 결국 그녀는 남친이 있었다...라는 스토리만 들려주었다.
인애는 바쁜 업무가 끝나고 달려와 주었다.여전히 이쁜 이마가 다 보이게 머리를 위로 틀어 묶은채로, 화장기가 없는 맨 얼굴로 동성친구이상의 털털함을 탑제한채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 이제 어떡하냐..”
한숨을 푹 쉬어 버렸다. 인애 앞이라 창피해서 꾹꾹 참고 있었지만 가슴속으로는 백번도 더 울었다. 그녀를 생각하며 가슴설레여 했던 나날들이 생각하니 불에 데인듯 아팠다. 인애는 한숨을 담배연기와 섞어 푸우하고 뱉어내었다.
“뭘 어떡해.잊어야지.”
무심하게 소주잔을 비우는 그녀의 모습이 원망스럽다.잊어? 그건 어느정도 시작이라도 해본 애들이 하는 말이다. 나는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접어야만 했다. 해드폰으로 똑똑히 느낄수 있었다. 수정이가 남자친구를 너무 좋아하는것 같다는 그 느낌. 내 앞에서는 날 스님이라 놀리며 밝은 모습만 보여주었던 그녀가, 그 남자친구 앞에서는 애교도 떨고 토라지기도 하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거다.
“자신없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소리에 인애의 동작이 뚝하고 멎었다. 하얀 피부와 볼. 그리고 핑크빛 입술이 실룩 거리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 건가? 일순간 인애의 표정은 딱딱해지고 있었다.
“이런 등신아!”
평소같았으면 겁을 집어먹고 뒤로 자빠졌을지도 모를 인애의 우렁찬 사자후에도 나는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시끌시끌한 호프집에 쩌렁쩌렁 울려퍼진 인애의 앙칼진 사운드는 주변의 시선을 계속해서 우리쪽으로 끌어 당기고 있었다.
“야..왜 화를내냐..”
술김에도 기가 죽는건 어쩔수 없는 모양인지, 내 말의 톤은 한참밑으로 내려갔다.인애는 소주를 자신의 잔에 콸콸 따른후 - 그 와중에 전혀 넘치지 않고 딱 잔의 만땅을 채우는 스킬을 발휘- 안주하나 없이 바로 입으로 털어넣었다.
“야 박재하 바보멍청아. 그여자는 너 신경도 안써 알아?왜 혼자 끙끙 앓아?그 여자한테 니 마음을 표현이라도 해봤어?”
“하면뭐해.임자가 있잖아”
“만약에..임자가 없었더라면 넌 어떻게 했을건데?엉?”
인애는 흡사 골목길에서 껌씹는 누님같은 포스로 나를 다그쳤다. 뭐라고 말하려던 나는 그만 수그러들고 말았다. 애초에 수정이가 남자친구가 있을거라는 생각은 안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에게 전화한통 못하고 덜덜떠는 연애 부적격자의 모습을 보였던 거다.
하..맞다. 달라질건 없었다.인애의 말은 메스처럼 내 가슴을 팍팍 도려내고 있었지만 나는 반박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수정씨가 임자가 있거나 없거나, 혹은 내 옆집에 살거나 안살거나 그녀를 향한 내 행동은 달라질게 없었을 거다.
“야..너..열두살때 일 기억하냐?”
인애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뜨끔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벌써 그녀의 앞에 있던 소주병은 반이상 비워져 있는 상태였다.
“기..기억하지..”
기억안날리가 있으랴. 바야흐로 초등학교..아니 당시 국민학교 시절 내가 어느 친구의 시계를 훔쳤다는 누명을 썼던 일이 있었다.나는 결백한데도 불구하고 다들 범인으로 몰아붙이는 기세에 밀려 제대로 해명도 못하고 쩔쩔 매었었던 기억. 그때..나를 구해준건 인애였다.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했다.인애는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화가나서 십수명의 아이들 앞에서 증거를 대보라며 바득바득 우겼고, 곧 녀석의 집 서랍에서 시계가 온전한 모습으로 출몰함으로써 내 누명은 씻은듯이 사라졌었다.뭐..덧붙이자면 인애의 등살에 밀린 아이들이 하나둘씩 와서 내게 사과하는 훈훈한 마무리까지 연출되었었다.
“그래.그때와 뭐가 달라? 그 대상이 초딩이냐 아니면 그 여자냐 그 차이지..왜 니 생각, 니 마음 말도 못하고 중도에 포기해 버려? 니가 그러고도 남자냐?”
나는 꿀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왜인지 모르지만 인애는 나보다 더 화가 나있는것만 같았다. 얼굴이 벌게져 가며 나를 노려보는 그녀의 앞에서 내 마음은 숙연해져 버렸다. 맞다..첫눈에 반해버린..그런 사랑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작아지기만 할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자..문제 하나 낸다.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인애의 질문의 의도쯤은 알고 있었다.그녀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내 빈잔에 콸콸 술을 따라주었다.나는 그녀가 건낸 소주잔을 가만히 응시했다. 맞다. 지금 수정씨에게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면..나는 16년전 초딩시절에서 전혀 발전이 없는 그런 놈이 되어버릴것이다. 인애의 말이 옳았다.나는 도전자체를 두려워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크읏..”
인애가 준 잔을 단숨에 비우자 목이 쓰리다.쓴맛에 정신이 확하고 드는것만 같았다.그녀는 알수없는 눈빛으로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알았으면 어서가봐.”
“지금?”
“왜?알콜이 부족해?”
“그건아니지만..넌 어떡해?”
왠지 모르게 인애의 눈망울이 조금더 촉촉해 진거 같았다.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듯 술병을 가리켰다.
“천하의 서인애가 요정도 술로 되겠냐?말이라도 하고와.여기서 계속 마시고 있을테니까.”
나는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내 시선을 느끼고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휘휘 저으며 어서 가라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고마워.”
“...얼른가 시끄러우니까.”
“금방올게.기다려.”
나는 재빨리 호프집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나갔다.쌀쌀한 초가을의 바람.내 빡빡머리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얼어붙는것처럼 시원하다. 달리면서 시계를 바라보았다.일곱시가 조금 넘은 시간..분명히 그녀는 회사에 있을거 같았다.아니, 있을것이다.
‘할수있어..말할수 있어..’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고,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다지만 나는 ‘성소설’이라는 나만의 학설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소심하다! 다만 결단을 하느냐,아니면 나처럼 바보같이 늘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느냐의 차이일뿐.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알콜이라는 연료가 들어가자 내 심장은 폭주기관차 처럼 어디론가 내달린다.저질 체력이라 힘들어서가 아니다.남자친구가 있는 여자에게 고백하러 가려니 차일까봐 조마조마해서도 아니었다.단 한가지,계속해서 달리는 내 심장의 목적지가 수정이라는 사실 자체가 나를 설레게 할 뿐이었다.
“후우..후우..”
모공에서 땀이 삐질삐질 날때까지 달려보니 정신이 드는것도 같았다. 택배박스 위에 붙여진 수취인을 보고 지금까지 혼이 달아난 것처럼 멍해져 있던 내가, 심장이 조여올듯한 압박을 받으니 살아있다는 현실감에 눈이 번쩍 뜨여졌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녹음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시계로써의 기능을 200프로 발휘하는 내 휴대폰위에 적힌 수정씨라는 세글자.난 망설임없이 버튼을 눌렀다.
나만 있는 경험일까?사소한 전화연결음에 입술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쿵쾅거리는 경험이 말이다.1년같은 1분은 나를 계속 초조하게 만들었다.
-여보세요?-
떨면 안된다.이제야 알거 같다.내가 해드폰으로 들었던 목소리와 똑같았다.옆집여자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때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수정씨.”
-어머..스님!-
아픈건 다 나았을까?아니, 그런건 묻지 못하겠다.아직 내가 당신의 옆집에 산다고 밝힐 자신이 없다.너무나 밝은 그녀의 목소리. 왜일까?처음엔 밝은 그녀의 태도가 좋았지만...그것이 특별한 사람이 아닌 다른 모든사람들에게 통용되는 그녀만의 화법일거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말이다.
“회사..신가요?”
-네.회사에요.무슨일이에요?-
“수정씨 회사 앞이에요.”
-에에?-
그녀는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어쩌면 내가 귀찮을지도 모르겠다. 일을 방해하는 빡빡머리 바보로 볼지도 모른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심호흡을 하고나니 이상하게 차분해진다.심장이 터져서 말도 못하고 덜덜 떨줄만 알았는데 오히려 내 톤은 안정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잠깐 볼수 있을까요?”
왠일인지 그녀는 한번에 답해주지 않았다.괜찮았다.마음을 비우니 참을만한 딜레이였다. 이윽고 천천히 수화기에서 천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요.회사 앞이시죠?금방 나갈게요-
“아..”
뭐라고 답을 하려는 찰나 전화는 끊어졌다. 그래.이제 떠나가는것을 보며 혼자 포기하는게 아닌 차이는것을 맛볼 차례다. 적어도..후회는 없게 말이다.
그때 그녀를 만났던 곳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작은 가로등이 비추는 조그마한 골목길.그녀의 회사 건물이 눈에 보였다. 나는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손으로 빡빡 닦아내었다.
인애가 했던말을 되새겨 보았다.인애가 나보다 더 남자다운(?)여성이기 때문에 그런말을 한것이 아닐것이다. 중요한것을 늘 놓치고 뒤늦게 후회함이 반복되었던 내 삶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신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했다.저편에서 건물의 문이 달빛에 반짝이는것이 보였다.원래 그 유리문이 영롱할 정도로 깨끗해서가 아니다.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
나도 모르게 또한번 넋을 잃었다.카키색의 클래식정장을 입은 그녀의 하얀 피부는 멀리서도 나를 멈칫거리게 만들었다.그와 대조되는 까만 머릿결은 단정하게 그녀의 어깨위로 내려와 있었다. 무릎밑으로 내려온 다소 점잖은 스커트지만, 드문드문 보이는 그녀의 하얀 종아리는 반짝반짝 빛나는 듯했다.
“앗!스님~~”
그녀는 나를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반짝이는 입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게 너무나 예뻤다.가식적인 웃음이 아니라는듯 그녀는 눈으로도 웃고 있었다.아주 이쁜 초승달처럼.
“안녕하세요 수정씨.”
“넵~수정씨라고 하니까 어색하네요.”
그녀는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밤공기가 추운지 살짝 어깨를 움츠리는 그녀.따뜻한 커피라도 사왔어야 했나?아..이런 바보가..
“그냥..보고싶어서요.”
“어엇?술마셨나요?”
“네..쬐금..”
“스님이 술마셔도 되요?”
그녀는 쿡쿡 거리며 웃었다.귀여웠다.스님이라는 단어..재미도 없는데 계속 그걸로 웃는 그녀가 귀여웠다.나를 보고 웃어주는것에 대해 조금씩 희망이 생기는 내 마음이 두렵다.그래선..안되는데.
“죄송해요..따뜻한 커피도 사오지 못했는데..”
“아니에요.제가 뽑아올걸 그랬나봐요.우리회사 자판기 커피 맛있는데.”
“아..음..”
그녀는 발랄하게 이야기 하다가 내가 머뭇거리는것을 보고 동그랗게 눈을 떴다.아픈게 다 나은건지 밝은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한층 안심되었지만, 여전히 고백하는데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은 내 찐따스러움을 한탄하고 있었다.
“저기..수정씨.”
“네.”
“남자친구..있으신가요?”
그녀는 뜬금없이 들려온,그것도 살며시 떨리기 까지 하는 내 질문에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당황해서 일까?아니면 그런 표정조차 예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에대한 미안함 때문일까.
“네.있어요.”
바람소리가 내 귓바퀴를 한번 돌고 다시 나가는게 느껴진다.예상했던 대답..아니, 확실했던 대답. 사형을 당할것을 아는 사형수라 한들, 사형집행일에 덤덤할수 있을까?내 대답은 노(No)였다. 그대로 안면까지 얼어붙은 나를 보며,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잠자코 기다려주는 듯했다.
“그..그렇군요.”
내가 말이 없자 수정이도 말이 없었다.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어디서 부터..그냥 좋아한다는 말? 아니면...지하철에서 처음 봤을때부터 사랑했다는 말?
“좋아했어요..진짜 많이.”
나도 모르게 시무룩해져 버렸다.그녀의 하얀피부가 달빛보다 시리다.나는 거짓말을 해버린거다.좋아했어요가 아니라 지금도 난 그녀를 좋아한다.
“미안해요 재하오빠.갑작스러워서 조금은 놀랬지만..미안해요.”
“한가지만 물어도 될까요?”
“네.얼마든지요.”
“저에게 전화번호를 주신건..단순히 제가 착해보여서 였나요?”
어려운 질문이었을까? 그녀의 표정이 약간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그런 내 모습을 보고 ‘스님’이라는 농담따윈 하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늘 웃는 그녀가 나때문에 웃음기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을 갖는 내 모습이 너무 미웠다.
“아니요. 왠지 모르게..거절할수가 없어서요.”
그녀의 치마자락이 살짝 바람에 펄럭였다.동시에 까만 머리결도...지금 이순간에도 수정이를 아름답게만 보는 내가 싫었지만 어쩔수 없었다.반짝이는 입술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내가 벽 너머로 훔쳐들었던 ‘미지의 여인’ 그 목소리 그대로일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순간에는 너무나 다르게 느껴지는 음색이었다.
“그 말..전하려고 왔어요.일 방해해서 미안해요.”
눈물이 날것같아 등을 돌려버렸다.내가 그녀라면 무슨말을 했을까? 연락정도는 해도 된다는 값싼 동정을 선사했을까? 아닐것이다.누군가가 날 짝사랑해줬던 경험따윈 없지만, 내가 만약 수정이라면 나역시 아무런 말도 못할거 같았다.
“자주 연락..할게요.”
끝내 나는 그 침묵이 두려워 또 먼저 말을 하고 말았다.와락 안아 버리는 불경을 저지를까봐 그녀의 얼굴은 바라보지 못한채로.
“알겠어요.조심히가세요 오빠...그리고 미안해요.”
“네에..”
미안할게 뭐가 있을까? 만약 남자친구가 없는데 내가 대쉬해서 거절한 것이라면야 예의상 나올수 있는 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적어도 내가 듣기에는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는것 같았다. 미안해야만 할것은 멋대로 둘 사이에 끼어들려고 했던 나다.
결국 나는 등을 돌리고 발길을 옮겨 버렸다.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던 수많은 질문들은 단 하나도 던지지 못한채로 말이다. 어째서 우리동네에 회사가 있고, 내 옆집에 사는 그녀가 내 눈에 처음 들어온 곳이 지하철 이었는지 그것역시 묻지 못했다. 그냥 남자친구가 있다는 한마디. 내 옆에 사는 여자가 동명이인의 윤수정이 아닌, 지하철에서 처음보고 사랑에 빠졌던 윤수정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확인사살 당했을 뿐이다.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가슴에선 뜨겁게 눈물이 내렸지만, 신기하게도 너무나 후련했다. 내 마음을 그녀에게 전했다는 것 자체가 뿌듯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옆방그녀가 그저 동명이인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부숴져 버리니, 오히려 오래 묵혀둔 숙제를 한것처럼 시원하기 까지했다. 마음 한구석이 쓰린건..어쩔수 없겠지만.
‘집에 들어가서..술이나 실컷 마셔야 겠다.’
멀리 편의점 하나가 보였다.간만에 감정에 젖어서 술을 마셔볼것 같았다.그래..난 그냥 이런 궁상이 어울리는 인간일지도 모른다.비록 인애처럼 술을 잘 마시진 않...
잠깐..인애?
불현듯 머리에서 띵!하고 줄이하나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멍해져서는 집근처까지 와버린거다. 인애는 분명 기다린다고 했는데.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인애의 주사중에 ‘무차별 폭력’과 ‘폭언 및 가혹행위’도 포함되어 있는것을 잘 알기에 나는 숨이 턱에 찰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저 멀리 술집이 보였다. 계속해서 술을 주문하며 천천히 변신의 단계를 밟아갈 인애가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그녀는 술을 마시면 ‘민폐의 아이콘’이었다. 예전에는 인애가 술에 취해 비틀비틀 걸어가는것을 보고, 그녀의 곱상한 외모때문에 접근했던 두명의 취객아저씨들이 인애에게 낭심을 걷어차인 사건은 길이길이 회자될만한 무서운 사건이자 이 시대 취객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사건으로 남아있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조마조마 하는 마음으로 술집문을 열고 들어갔다. 열심히 고개를 휘젓고 그녀를 찾았다. 수정이를 만나는 바람에 머리속이 하얗게 탈색되어 버린 탓인지..아까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 기억이 안났기 때문이었다.
‘으헉..’
이윽고 내 시선이 어느 한곳에서 머물렀다. 어떤 여자 하나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는 자리가 한자리 있었기 때문이었다.직원들도 본능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감지한 것인지 그녀를 감히 깨우지 못하고 테이블 주변에 얼쩡거리기만 했다.손님들 중에는 인애를 보며 킥킥 거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쪽팔려...
그래도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술먹자고 한 내 어두운 목소리에 한달음에 달려왔고, 또 내가 수정이에게 가는 시간까지도 흔쾌히 기다려 주었으니까.
“아휴..손님 일행이세요?”
내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자 직원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마치 저런 진상은 처음본다는 듯한 그들의 시선에 나는 굽신거리기 바빴다.
“여기 얼마죠?”
다년간..아니 이십여년간 인애의 친구자리를 역임하고 있는 나는 능숙하게 일을 처리할수 있었다.그녀를 부축하고 계산을 하면 발광을 하는 그녀덕에 제대로 된 계산을 할수 없다는건 잘 알기 때문이다.
“어휴..뭘 혼자..그것도 그 짧은 시간에..”
걸어갔다 왔으니 왕복 40분정도는 걸렸지만, 테이블위의 술병들은 40분사이에 해치워질 양이 결코 아니었다.게다가 안주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나는 능숙하게..너무나도 능숙하게 인애의 가방을 팔에 끼고는 그녀의 얇은 자켓을 팔에 걸었다.그리고 엎드려 있는 인애의 허리를 잡고 천천히 흔들었다.
“인애야.가자.”
나는 인애를 깨운후 내가 생각해도 실로 엄청난 스피드로 휙 하고 뒤로 빠졌다.그와 동시에 인애의 팔이 내가 서있던 자리로 부웅!하는 파공음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저것이 바로 내가 이름붙인..그녀만의 필살기인 취중펀치였다.
좌중들의 시선은 내게 쏠려 있었다.쿡쿡 거리는 인물들도 있었고, 그녀를 다루는데 익숙한 내 모습을 보며 신기해 하는 이들도 있었다.나는 마음속으로 정확히 10을 센후 다시금 인애의 양팔을 봉쇄하듯 끌어 안았다.
“뭐야아아~~”
“집에가자 인애야.”
“우이씨!어라?박재하네?으히히히히?”
위험했다. 머릿속에서 위험경보가 울려퍼졌다.단시간에 빠르게 알콜을 넘긴탓에 인애의 취기는 현재 위험상태였다.나는 황급히 테이블을 발로 밀어냄과 동시에 군대에서 배운 무릎앉아 자세를 취하며 잡고있던 그녀의 양팔을 어깨위로 쭈욱 하고 끌어올렸다. 숙련된 경험으로 인하여 인애는 내 등판위로 정확하게 안착했다.
“오오오!”
마치 숙련된 조교의 집총각개 16개 동작의 부드러운 흐름을 감상하는 신교대 훈련병들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몇몇 손님들이 눈에 띄자 나는 창피해 져서는 종종 걸음으로 가게를 나서고 말았다.
“꺄하하하하!”
역시나 인애는 내 등위에서 발버둥을 치며 즐거워 했다.이 염병할 술집은 왜 2층에 있는 걸까.나는 부실한 하체로 비틀거리며 겨우겨우 비상구를 통해 내려갈수 있었다.물론 그 와중에 인애는 내 삭발머리를 찰싹찰싹 때리며 웃기에 바빴지만 말이다.
“재하야아아아~”
남들이 보면 귀여운 여성의 애교라 생각할지 모르는 음색이었으나 내겐 저승사자의 손짓과도 같은 섬찟한 음성이었다.등에는 왠 키 큰 여인네하나, 그리고 양팔에 여자 자켓과 가방을 끼고 걸어가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흠칫 놀라고 슬금슬금 비켜났다.뭐..아무래도 지금 시간은 절대 이런 취객수송의 현장이 목격될 만한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귀여운 우리재하야아아~”
그녀는 내게 반응이 없자 급기야 내 볼에 자신의 볼을 비벼대며 꺄르르 거리기 시작했다.술기운 덕에 뜨거워진, 인애의 보드라운 볼이 마구마구 비벼지는것은 뭐 기분나쁜일이 아니겠지만 일단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니 죽을 맛이었다.
“이.인애야 잠깐만..좀 걷게 가만히좀 있어.”
하지만 그녀가 내 말을 들을리 만무했다.여자치곤 큰 키인데다가 내 위에서 발버둥을 치니 제대로 엎고 갈수가 없었다.게다가 인간의 허용 데시벨을 초과하는 그녀의 우렁찬 목소리때문에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술냄새가 섞인 인애의 호흡이 내 얼굴에 와서 부딪힌다. 그래도 여자인지라 내 목을 목도리처럼 감싼 그녀의 머리칼에서 향긋한 샴푸내음이 코를 간지럽혔다. 담배냄새, 알콜냄새가 섞여있지만 역하거나 추하지 않았다.나는 손에 힘을주어 인애의 허벅지를 내 등쪽으로 단단하게 고정했다.
그녀를 업고 가다보니 예전생각이 났다. 여자애들과 공기놀이나 고무줄을 하는대신 사내아이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던 인애가 발목을 삐끗했던 그날. 나는 인애의 책가방을 들고 그녀를 집까지 부축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와 상황은 물론 많이 달랐다.그때는 코를 찔찔 흘리던 어린애들이었고,지금은 둘다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으로써 있는 것이니까.그때 부축해주던 새까만 인자가 아닌, 하얀볼에 성숙한 몸을 가진 다 큰 처녀 서인애로 바뀌어 있다는게 다를 뿐이다.
“고마워 인애야.”
내 중얼거림에 인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기만 했다.진심으로 그녀에게 고마웠다.내가 수정이를 그냥 잊고 살수는 절대로 없겠지만,적어도 내 마음을 용기있게 표현한건 순전 인애의 덕분이었다.
몸에서 땀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겨우겨우 내가 사는 건물까지 그녀를 질질끌고 오다시피 해서 업고 올수 있었다.
복도에 들어서니 복도등이 켜지며 구석에 나란히 있는 내 집과 수정이의 집이 보였다.갑자기 우울해졌다.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나는 자격이 없다는게.
“얌마..어디가 임마..어엉!”
아까만해도 재하야~하면서 내 볼을 떡주무르듯 주무르던 인애는 제 2의 주사상태로 돌입한듯 보였다. 수정이의 집 현관을 보고 멍해져 있던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힘을주어 그녀를 내 등위로 다시금 끌어 올렸다.
“너어~임마..모텔은 안돼 짜샤..이왕갈꺼면 임마...오만원짜리로 가 임마..”
“...”
이 자식...그다지 클린한 사생활을 갖고 있진 않구나..
나는 애써 옆집..그러니까 수정이의 집을 보지 않으려 애를 쓰며 등을 최대한 굽히고는 한손으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고개를 숙인탓에 얼굴에 송글송글 맺혔던 땀방울이 후두두둑 바닥으로 떨어져 점을 그렸다.
휴..이 아이는 단기간에 우리집에서 많이 자는구나.뭐..이 와중에도 옆방여인..아니, 수정이가 회사에 있다는게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마져 드는건 왜일까?
“으아아아~”
나름 총각냄새 안나게 하려고 무던히 방향제를 분사했던 내 방에 알콜의 향기,정확히 말하자면 알콜 섭취한 여인의 향기가 확 하고 퍼져나갔다.
“휴우..”
이제는 꽤나 쌀살해진 날씨이지만, 온몸에 땀은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인애는 침대에 눕히자마자 대굴대굴 구르며 불을 뿜는 용마냥 술냄새를 뿜어대고 있었다.그녀가 많이 취해있음을 확인한 나는 얼른 땀때문에 몸에 찰싹 달라붙은 티셔츠를 벗어버렸다.
몸을 돌리고는 물을 마시려 냉장고 문을 열었다.무의식적으로 물병에 손을 뻗으려는데,무언가 퍼런 것이 하나 보인다.
‘소주..’
그러고보니 예전에 작곡가 형이 놀러오면서 사왔던 술이었다. 뭐..술을 혼자서 마실정도로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니 당시에 남아있던 한병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거겠지.
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쥐었다.뚜껑을 잡고 돌리니 뚜두둑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신선한 알콜향이 확 하고 올라왔다.나는 망설임없이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크으으으으..”
분명히 소주는 냉장고에 고이고이 넣어져 있어 차가운데, 무언가 뜨끈한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인애야..취하고 싶은건 난데 왜 니가 취해버렸니?너는..너처럼 씩씩한 아이는 사랑때문에 아파하지 않을텐데..
알딸딸한 기분을 벗삼아 다시한번 소주병을 입에다 가져다 대었다.먹는순간 잠들어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나는 냉장고 문을 발로 닫아 버리고는 다시금 소주병을 내 입으로 털어넣었다.
“으허어어어!”
술기운이 갑작스럽게 목뒤로 타고오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어왔다.한껏 인상을 찡그리며 소주병을 들어보니 벌써 반이 조금 안되게 소주병이 비워져 있었다.
나는 싱크대위에 그것을 올려두고는,실금실금 올라오는 뱃속의 뜨거운 기운을 느끼며 나와 수정이사이를 가로막고 선 얇은 벽을 응시했다. 해드폰 하나면 모두다 들을수 있고,그녀의 숨소리조차 느낄수 있지만, 정작 오늘이후로 그녀는 더더욱 잡을수 없는 그 어딘가로 달아나고 있는것만 같았다.저 하얀벽..나는 또 이렇게 말하고 얼마나 더 귀를 기울이며 그녀의 행적을 쫒을까? 하얀색의 벽지.그리고 하얀색 얼굴.까만 머리결과 까만눈동자..그리고 붉은 입술..에엥?
그제서야 나는 인애가 몸을 벌떡 일으켜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술기운 때문에 나는 쿨럭하고 헛기침을 했고,인애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양손을 교차시켜 자신의 티셔츠를 잡아쥐었다.그리고..
“야..야!”
말려야 하는데 말만 나가고 손이 나가지 않는다.인애는 어느덧 티셔츠를 훌렁 벗어버리고는 휙하고 옆으로 던져버렸다.하지만 내 시선은 던져진 티셔츠를 따라가지 않았다.보라색의 레이스가 달린 브레지어에 감춰진 그녀의 하얀 가슴이 살짝 떨리는 광경만을 멍하게 지켜볼뿐.
“야..야..너..끅!”
술을 갑자기 들이켰는데 깜짝 놀라니 딸꾹질이 튀어나왔다.내 만류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건지 인애는 무심하게도 손을 아래로 내리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무언가를 꼼지락 대었다.
딸칵
여기서 말려야 한다! 하지만 뇌에서 명령하는 속도는 내 본능이 몸을 지배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듯했다.그녀는 한참이나 꼼지락대더니, 이윽고 청바지마저 천천히 그녀의 다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말리려고 두어걸음,그제서야 다가갔지만 나는 우뚝 하고 멈춰서고 말았다.말리러 갔다가 더욱더 감상할 포인트를 잡은 형상이 되어버렸다.
“뭐해?빨리 도와줘봐!”
으으.위험했다.인애의 풀린눈이 위험신호를 삐삐 하고 알리고 있었다.흡사 군대시절 오분대기조 호출 사이렌을 들은것보다 더 긴장되었다.
나도 모르게 손이 스으으 내려가 발목에 걸린 인애의 바지를 잡아버렸다.눈앞으로 길게 뻗은 인애의 하얀 다리와 약간 도톰한 허벅지.그리고 브라의 색깔과 똑같은 삼각형의 천조각이 절묘하게 내 시선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녀가 몇번 몸을 비틀자 청바지는 쑤욱 하고 그녀의 발목을 떠나버린다.고개를 숙이던 인애가 갑자기 훽 하고 얼굴을 들었다.찔끔하고 있을때에 그녀는 하얀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왜..왜..”
“뭐해?”
“응?”
“얌전한척 하지 말고 임마..그럴거면 모텔에 왜 왔어?”
“야..나 재하야..여기 모텔아니..헉!”
더워서 웃통을 벗은 내 상체위로 까칠한 이불의 감촉이 느껴져온다.갑자기 인애가 내 손을 잡고 확 하고 끌어당기는 바람에 나는 침대위로 푹 하고 넘어겼기 때문이었다.소주병을 열었을때와 또다른 느낌의 알콜내음이 확하고 내 입술을 덮친다.
“우.웁..”
머릿속이 창백해졌다.눈앞에 보이는건 반쯤 풀려버린탓에 뇌쇄적으로 변해버린 20년지기 친구의 눈빛이었다.그녀는 내 목을 끌어 안더니 슬금슬금 내 위로 올라탔다.겁에 질린 내 눈망울이 쪼르르 밑으로 내려가니 하얗게 곡선을 그리는 인애의 허리라인이 보인다.
“이..인애.웁..”
부드러웠다.무언가가 나를 촉촉하게 감싸는 미지의 느낌.그리고 술냄새..
소주를 마시지 말었어야 했나...하는 생각이 아련히 뇌리를 떠나가고 있었다.불길처럼 뜨거운 그 무언가가 훅 하고 전신을 휘감는다.20년이상 친구로 지냈던 인애의 입술.그녀는 뱀처럼 나를 조여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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