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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 <7부>

7부


흔히들 술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 ‘술냄새만 맡아도 취한다’라는 표현을 쓰지만, 항상 그것은 과장된 표현이라 믿었던 나였다. 음향 제작과 출신이니 의학적으로 설명은 할수 없겠지만, 알콜이라는 것이 액체의 형태로 섭취해서 몸안에 스며들어야만 알콜섭취의 작용을 하는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부로 그 생각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내가 마신술은 수정이에게 가기전 인애와 마셨던 술조금,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답답해서 들이킨 반병이 전부였지만, 나는 그보다 몇배이상 마신 사람처럼 취해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것도, 인애가 내 입속에 내뱉는 술기운 가득한 호흡을 공유한것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입술은 부드러웠다.태어났을때부터 봐왔고, 다섯살때부터 붙어다녔으니 20년이상 내 친구로 머물러 있던 그녀지만 그 입술을 이렇게 느낀적은 처음이었다.그 전에 인애의 입술이란 그저 신체의 일부분, 얼굴의 일부분으로서의 입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인애의 살갖과 내 살갖이 닿자 나는 그만 파르르 하고 떨어버렸다.그저 프랜드쉽의 일환으로 포옹을 한적은 있었지만 당시의 그것은 그저 프리허그보다 더 별다른 사심없는 우정의 확인이었다.게다가 지금처럼 살결을 맞대고 있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인애는 보라색의 레이스로 중요한 부분만을 감춘 모습으로 내 목을 끌어안고 있었고, 나는 웃통을 벗은 상태에서 어설프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 있었다.

“하아..”

술기운 섞인 그녀의 호흡이 내 입술을 향해 부딪혔다가, 밀려났다를 반복했다.흡사 부드러운 푸딩에 입을 맞추는 것과 같은 느낌마져 들었다.인애는 살포시 내 아랫입술을 핥으며, 도톰한 자신의 입술로 쪽 하고 빨아당겼다가 다시 머금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앞에 있는것이 미지의 여인이 아닌, 내가 살아있는 동안 늘 함께해 왔던 친우라는 사실이 점점 내 머릿속에서, 기억속에서 흐릿해 지려 하고 있었다.20년 이상의 기억이 지워지는것은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그녀는 누워있는 내 몸위로 천천히 올라탔고, 샴푸냄새를 머금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목으로 늘어뜨려지며 나를 간지럽혔다.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은 사람처럼,나는 스르르 그녀의 허리를 두팔로 끌어 안았다.그녀의 몸이 내 몸에 밀착하며 부드러운 여성의 몸의 질감이 내 온몸에 전달되기 시작했다.느껴졌다. 이성이라고 하는 녀석이 내 머릿속을 이탈하는 것이. 작용 반작용의 법칙과도 같을지도 몰랐다. 공기로 차있던 풍선의 주둥이를 놓아버린 것처럼, 이성의 줄을 놓아버리니 어디론가 푸르르 하고 빠르게 내달리는 것 같았다.

쪽..쪽..

그녀의 입술과 내 입술이 연신 부딪히며 방안에는 우리가 나누는 키스의 촉촉한 음색들로 가득찼다. 눈을 뜰수 없었다. 여기서 눈을 떠버리면,그렇게 서로의 눈동자를 보아 버린다면 심한 죄책감이 들어버릴것 같아서였다.아니, 더 내 자신에게 솔직해 지자면 그녀와 나누는 이 행위가 멈출까 두려운것도 있었다.

내 손이 그녀의 등을 살며시 쓰다듬었다.도자기의 표면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럽고, 또 왜인지 모르지만 뜨거웠다.그녀에게 입술을 맡긴 채로 손을 더 내려 보았다.까칠까칠한 레이스의 감촉 밑으로 부드러운 그녀의 엉덩이 감촉이 손바닥에 전달되어 왔다.서로 하반신이 맞닿은 상태이니 인애는 내 상태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것 같았다. 차가워진 내 손은 조금씩 그녀의 도톰한 허벅지를 살며시 꼬집고 있었다.

그때와는 느낌이 달랐다.그저 이성적 호기심때문에 만진것이 하필이면 20년지기 친구였다..라는 얼마전의 상황과는 달랐다. 그때는 인애라는것을 인지하기 전에 성적 불만이 표출된 경우였으니까. 지금은 인애란것을 인지하고도 내 이성을 스스로 붙잡지 못한 거였다.

“흡..”

나도 모르게 놀라 헛숨을 삼켰다.입안에선 연신 그녀의 혀가 나를 옭아메고 있었고, 내 손이 그녀의 허벅지와 엉덩이 깊은 곳을 쓰다듬을 그때에 너무나 촉촉하게 젖어 있는 그녀의 속옷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탄과 같았다.파르르 떨리던 내 몸이 경직되었고, 긴장감으로 인해 심장은 마구마구 뛰었다.인애를 상대로 이렇게 심장이 뛰는것은 어찌보면 처음이었다.하지만 그것을 알아채기도 전에, 내 몸은 살짝 비틀어지며 그녀를 침대위로 떨어뜨렸고, 그와 동시에 나는 그녀의 몸위로 올라타 있었다.

“하아..하아..”

뭔가 모를 몽롱한 그녀의 눈빛을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서로의 타액으로 인해 번들거리는 그녀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하니 뭔가 뜨거운것이 전신을 휘감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내 손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브라안으로 허가없이 침투했다.

“흑..흐응.”

흥분으로 인해 딱딱해진 그녀의 가슴감촉이 싫지 않았다.손바닥은 탐욕을 머금고 그것을 주물러대었고 그로 인해 그녀의 속옷은 점점 위로 올라가 버린다.

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까닭이었을까.나는 또 덮치듯 그녀의 입술을 깨물어 버렸다.이렇게..이렇게 눈이라도 감고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죄의식따위는 없을지 모른다는 내 얄팍하고도 비겁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손이 내 바지춤으로 향했다.더듬더듬하는 손길이 마치 내 바지의 후크를 찾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그녀의 긴 손가락이 무언가를 더듬거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은 해방감이 느껴졌다.그녀가 팔을 뻗어 내 바지를 밑으로 내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발버둥을 치며 맹목적으로 인애를 끌어안았다.어느덧 내 발목까지 내려간 내 바지와 속옷은 내가 몇번 허공에 발을 튕기니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져 나가 버렸다.동시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내 하반신은 그녀의 푹신한 허벅지를 지긋이 누르는 형상이 되어버렸다.

위험했다.분명 둘다 평소의 박재하와 서인애가 아니었다.저 멀리 가슴속깊은 곳에서 부터 울려지는 경고음은 분명 둘다 들었을 터이지만, 확실한 것은 둘다 지금 그것을 무시하려 애를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손을 뻗어 그녀의 팬티를 끌어당겼다.서로에게 이성적인 느낌을 제로로 두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지금은 열렬하게 키스를 하며 서로를 벗겨내고 있었다.인애는 살짝 엉덩이를 들어 주었고, 그녀의 보라색 팬티는 한가닥 끈처럼 돌돌 말려 인애의 발목까지 내려와 버렸다.

“쪽..”

참을수 없어 그녀의 하얀 가슴을 입안 가득 물었다.인애의 목이 활처럼 뒤로 휘어지며 깊은 신음성을 뿌린다.입안에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을 연신 혀로 굴리며 만끽해보았다.손으로는 그녀의 두 허벅지를 감싸쥐었다. 서로 각자의 친구의 몸이 너무나 뜨거운 것을 느끼는 그 순간 우리는 그저 남자와 여자일 뿐이었다.

그녀를 느끼고 싶다는 열망에 몸을 밑으로 내렸다.하얀 배를 지나자 거뭇거뭇한 그녀의 풀숲이 보였다.두툼한 살덩이 두개가 겹쳐져 촉촉한 액체를 머금고 있는것이 보이자, 나는 참을수 없어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흑..아아..”

시큼하지 않고 달콤했다.이걸로 마른목을 축일수 있을것 같다는 엉뚱한 상상마저 들었다.내 혀는 그녀의 은밀한 그곳을 정성스레 핥았다.인애의 허벅지가 내 두 귀를 조여왔고, 그녀의 신음소리는 마치 그녀가 먼곳에 있는 것처럼 희미해졌다.

“흑..으으응..으응..”

벽하나를 두고 들었던 신음소리와, 내가 행위의 주체가 되어 느끼는 신음소리는 분명 격이 달랐다.이 순간만큼은 수정이의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그것이 그녀에 대한 대리만족 이라는 다소 비겁한 이유가 된다 하더라도..원인이야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내가 품고 있는 여자는 서인애였다.

그녀의 애액이 더욱더 많이 분비되는게 입술을 통해 느껴져 왔다.코를 간지럽히는 체모들을 아랑곳않고 나는 연신그녀의 보짓살을 물었다가,핥았다가를 쉴새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흑..흐윽..”

그녀의 두 허벅지가 파르르 하고 떨렸다.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니 두 눈은 살포시 감겨져 있었다.이렇게 여성스러운 모습은 그녀를 알고 지냈던 과거의 모든 시간 동안 처음보는 것이었다.평소에는 매워서 무섭게만 보이던 그녀의 손가락은 가냘프다는 느낌마져 자아내며 내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재빨리 몸을 끌어올려 그녀와 눈높이를 맟추어 몸을 포갰다.기다렸다는 듯 인애는 내 입술을 집어 삼켰다.그녀의 다리는 벌어졌고, 그 사이로 내 하반신이 포개어졌다.잔뜩 단단해진 내 하반신이 그녀의 여린 살점과 맞 부벼지는 순간, 촉촉한 감촉이 들어오며 인애의 신음은 더욱 커졌다.

“흑..! 흐응..”

보지 못하니 알순 없지만,내 귀두 부분이 인애의 그곳에 살짝 걸쳐져 있는 듯했다.골반에 조금만 힘을 준다면 하나가 되는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일순간, 그 찰나의 순간에 내가 갈등하며 망설이고 있을 그때에 인애의 다리가 내 허리를 휘감고는 자신의 몸쪽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흑!”

“허억..”

온몸의 피가 한지점으로 쏠리는것 같았다.일순간에 잔뜩 발기된 내 자지가 인애의 촉촉한 질벽을 긁으며 파고 들었다.내 등을 움켜쥔 인애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고, 연신 얽혀있던 우리둘의 혀는 움직이지 못하고 경직되었다.

나로서는 너무나 오랜만에 느끼는 여성의 몸의 감촉이었다.그 대상이 인애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한적이 없었지만, 그런 생각들을 싹 달아나게 할정도로 그녀의 몸은 어떤 마력이 있는 듯했다.

“흑..흐응..흑..”

입술을 떼고 그녀를 끌어안았다.동시에 천천히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니 내 귓가로 그녀의 신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내 가슴에 의해 짓뭉게진 인애의 가슴의 풍만한 느낌이 몸에 전달되었다.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좋은것은 너무나 촉촉하고 부드럽고..쫄깃하기 까지한 그녀의 몸 안의 감촉이었다.

삐그덕..삐그덕..

침대가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마치 타악기를 현주하듯 내 동작에 맟춰 나는 소리가 더더욱 야하게 들렸다.그녀의 도톰한 허벅지위로 내 아랫배가 쉴새없이 부딪혔다.마치 파도가 방파제를 두드리는 것처럼 찰싹 하는 소리는 액체를 머금어 더욱 질척하게 들렸다.

“흑..흐응..아아..아아..”

인애는 이성을 잃은 듯했다.그녀의 몸에서 힘이 들어갈때마다 내 자지를 조여오는 질벽의 압박은 참을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반사적으로 허리가 움직여졌고,내 몸은 폭격을 하듯 그녀의 몸을 두드렸다.등뒤로 쉴새없이 땀이 흘렀고 나와 마찰하고 있는 그녀의 몸역시 땀으로 젖었다.흔들리는 가슴을 움켜쥐니, 앞머리가 땀에 젖어 이마에 약간 붙어 있는 인애의 얼굴이 보였다.평소에 장난기 많고, 또 머슴아 같은 그런 무표정한 눈빛이 아닌, 간절하고 애처로운 듯한 그녀의 눈망울이 숨히 막힐듯 예뻤다.

인애의 가냘픈 허리 밑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내 목을 손으로 감고 있던 그녀는 내 의도를 알아차린건지 내쪽으로 몸을 당기며 상체를 들어올렸다. 친구라 몰랐던,너무나도 몰랐던 그녀의 날렵한 허리가 내 팔에 감기고, 우린 서로 마주 보며 앉은 자세로 자연스레 바뀌었다.

인애는 여자경험이 딱 한번있는 나보다 훨씬 능숙했다.어떻게 해야 상대가 자극받을수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아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무릎을 세워 침대를 지탱하고는, 천천히 허리를 위아래로 흔들어 주었다.귀두에서부터 뿌리끝까지 그녀의 몸을 따라 촉촉히 젖은 조갯살 사이로 왕복을 거듭했다.나도 모르게 인애의 가슴골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그녀는 나를 도닥여주는듯 어깨를 어루만져 주며 천천히 동작에 힘을 실었다.

“흑..흐윽..흐응..으응..”

아까보다 훨씬 야하고 또 질퍽했다.인애의 몸이 이렇게 뜨거운줄 몰랐고,물론 알 기회도 없었었다. 우리가 반쯤 취했다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었다.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를 인지하지 못할정도로 인사불성이 되어 이뤄진 섹스가 아니라는 점이었다.첫 시작은 그랬을지 모르나, 이제 둘다 서로가 누군지 알고 있을 정도로 쾌감이 취기를 몰아내었을 테니까.

“나..나..더이상..윽..”

“흑..흐응..아앙..”

내 간절한 외침에 아랑곳않고 인애는 계속해서 몸을 들썩였다.뜨거운 사정의 기운이 아랫배에서부터 올라왔다.나도 모르게 그녀를 꽉 움켜쥐듯 안아버렸다. 잠시후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왔다.너무도 힘차게, 나는 그녀의 몸안으로 뜨거운 액체를 쏟아붓고 있었다.

“하아..하아아..”

나를 껴안은 그녀의 숨소리가 조금씩 고요해 진다.내가 사정하는 것을 알아챘는지 인애는 더이상 허리를 움직이지 않고 나를 끌어 안을 뿐이었다.서로 결합되어 있는 그 상태로 우린 어정쩡하게 그렇게 몇분이나 안고만 있었다.

내게 안긴 인애의 몸이 뒤로 조금 처지는게 느껴졌다.힘이 빠져서 일까?나는 망설이다가 몸을 구부려 그녀를 다시 침대로 눕혀주었다.자연스럽게 힘이 빠진 내 자지가 그녀의 몸안에서 쑥 하고 빠져나왔고, 내 사정의 흔적들은 인애의 조갯살 사이로 조금씩 흘러나왔다.

아무런 말도 할수 없었다.불과 몇분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입술을 탐했던 우리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몸을 포개고 있을 뿐이었다.용기를 내어 인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이 조금씩 촉촉해 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퍼졌다.

“재하야...”





나는 꿈을 꾸었다.

지금 살고 있는 서울의 도심이 아닌, 내가 태어나고 자란 외곽 도시의 모습들이 등장했다.심심찮게 논밭도 찾아 볼수 있었고,학교 근처에는 불량식품을 파는 문방구들의 늘어선 모습들까지.

인애는 동네 어귀에 있는 문방구 앞에 앉아 울고 있었다.동네 남자아이들과 구슬치기를 하다가 모두 잃은게 분해서 우는것이 틀림없었다.그것을 증명하듯 인애가 껴안고 있는 네모난 구슬통은 텅텅 비어 있었으니까.

“왜 울어?”

내 질문에도 열살먹은 꼬맹이인 인애는 답을 하지 않았다. 분해서인지 꺽꺽 거리는 소리마져 내며, 내가 오니까 그녀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울지마.응?”

“나쁜 놈들이..흑..내 구슬..흑..”

꼬맹이인 나역시 연신 머리를 긁적였다. 동네 꼬맹이들끼리 싸움이 나도 항상 나를 보호해줬던 인애가 울고 있으니, 매번 보호받던 처지인 내가 꺼낼수 있는 말이란 거의 없었다. 나는 인중에 묻은 코를 소매로 쓰윽 닦아내고는 인애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인자야 울지마.내 구슬 줄게.응?”

“흑..싫어! 내꺼 따간 애들거 받을거야!내꺼!으아아앙!”

나는 그저 머리를 긁적거리며 주머니속으로 손을 넣어 꼼지락 대었다.꼬깃꼬깃 접힌 동그란 딱지들이 손에 잡혀서 끄집혀 나왔다.그 중에는 평소에 인애가 탐을 내던, 보통구슬보다 약간 큰 초록색 구슬도 섞여 있었다.

“그럼 이거 줄게 울지마라.응?”

“그게 뭐야?”

인애는 손바닥으로 눈가의 눈물을 쓰윽 훔쳐 내더니 나를 바라보았다.내가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그것을 집어 들며 인애의 눈높이에 맞춰주자, 그녀의 눈은 금세 동그랗게 변했다.

“니가 갖고 싶어 하던 거잖아.대신 이걸로 구슬치기 하면 안돼.알았지?”

“정말 주는거야?”

“응...근데 이걸로 구슬치기 하지마..알았지?”

“응!알았어.”

인애는 언제 그랬냐는듯 금방 신이나서는 구슬을 받아들고 히죽 거리며 웃었다.유달리 까만 피부속에서 더 돋보이는 앙증맞은 하얀 치아들이 보였다.나는 얼른 인애의 팔을 잡고 끌어 올렸다.

“이따가 소독차 온데. 그거 보러가자.”

“정말?”

“응.아까 우리아빠가 하는 말 들었어.곧 올거야.”

“응!”

인애의 손을잡고, 소독차가 자주오는 동네 어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매일 밖에서 놀아서 흙먼지가 가득한 옷자락이 펄럭였다. 내 손을 잡은 인애의 반대편 손에는, 내가 주었던 초록색 구슬이 꼭 쥐여져 있었다.





덜컥.철커덕.

철문이 닫히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었다.힘겨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니 너무나 익숙한 정경이 내눈에 들어왔다. 하얀색 벽지가 발라진 천장과 불이꺼진 형광등.그리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의 햇빛들.

목이타고 갈증이 들었다.눈을 비비니 조금 시야가 환해지는것도 같았다. 몸을 살짝 일으키려는데 몸이 썰렁한것이 뭔가 허전했다.이불을 살짝 들춰 안을 확인하니, 나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는 알몸이었다.

“아..!”

나는 그제서야 어제밤의 일을 떠올릴수 있었다.잔뜩 술에 취해 있었던 인애를 업고 내 방까지 왔던 기억.그리고...

‘헉!’

순식간에 확 하고 잠이 달아났다.옆으로 돌아 누워있는 자세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듯 움직여 지지 않았다.분명 꿈이 아니었다.어젯밤 나와 사랑을 나눴던 사람은 다름아닌 어릴적부터 나와 함께였던 인애였다.

눈앞이 캄캄해졌다.심장이 두근 거리며 관자놀이에서 맥이 뛰는 울림이 귀를 통해 전달되었다.그렇다면..지금 내 옆에 인애가 있다는 걸까?

몸을 돌려 반대쪽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약 옆에 인애가 자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도망쳐야 할까?아니면 용서를 빌어야 할까? 오만가지 상념들이 머릿속에서 얽히고설키기를 반복했다.

꿀꺽.

마른침이 목을 넘어갔다.소심하게도 살짝 옆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손에 무언가가 잡힌다면 그것은 인애겠지. 하지만 뒤로 손을 계속해서 뻗어도 느껴지는것은 허공뿐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몸을 틀었다.밤새 옆으로 누워 잠을 잤는지 허리에서는 두두둑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없다..’

용기를 내어 옆을 보았지만, 내 옆자리는 비어있었다.뭐..원래부터 늘 비어있던 침대공간중의 한 부분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분명 어제만 해도 누군가가 있었을 자리일테니까 말이다.

‘그러면...?’

나는 벌떡하고 몸을 일으켰다.그렇다면 나를 잠에서 깨웠던 덜컹 하는 소리는 우리집 문이 닫히는 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였다.

알몸인 것도 잊고는 현관쪽으로 달려나가 문을 열었다.내 몸을 얼릴듯이 차갑게 불어오는 가을바람.햇살 덕분에 눈을 뜨기도 쉽지 않았지만 문틈사이로 고개를 내민 내 눈에는 텅빈 복도만 들어올 뿐이었다.

끼이이익.

힘없이 현관문을 닫았다. 싱크대 위에는 내가 어제 마시다가 내려놓았던 소주 반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방안에 조금 남아있는 담배냄새. 분명했다.인애가 어제 나와 함께 였다는 것은 꿈이 아니었다.

‘맙소사..’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꿈일지도 모른다는 것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지만, 그것이 무너지니 덜컥 겁이 들어왔다. 인애의 매서운 주먹에 맞을까봐가 아니었다. 어제 몸을 섞은 사람이 인애라는거 사실 자체가 내게는 엄청난 큰 일이었다. 평생을 같이한 이란성 쌍둥이와 몸을 섞은 것과 동급으로 느껴질 정도의 큰 일이자, 해서는 안될 타부와도 같은 일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나에게는 그랬다.

침대에 털썩 하고 주저 앉았다. 빡빡민 머리털사이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마음속은 가면 갈수록 초조해졌다.

어째서일까.인애는 어째서 나를 깨우지 않고 나가버린 것일까.평소의 그녀라면 이해할수 없는 행동이었다.나를 깨워서 죽어라 두드려 패고도 남았을 것이 내가 아는 서인애의 성격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날 깨우지 않았다. 이미 김이 빠져 버렸을, 내가 어제 먹고 남긴 소주가 반쯤 차있는 소주병안에는 인애가 자주 피우는 담배의 꽁초가 들어가 있었다. 인애는 나보다 먼저 일어났고, 나보다 먼저 상황파악을 했을 것이다.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붙잡고, 습관처럼 담배를 피우며 골아 떨어진 나를 바라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찼다.나에게 일언반구 하지 않은 인애의 심중이 너무나 궁금했다.나는 얼른 몸을 돌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는 어느덧 오후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치약을 칫솔에 묻히고, 급하게 이를 닦았다. 최대한 빨리 인애를 찾아가 사과를 해야만 할거 같았다.용서를 구해야 했다. 어제 내 모습은 친구로서 보여줄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사랑에 아파하는 나에게 조언을 해준 인애를, 마치 대리만족 하려는 것처럼 범해버린 내 모습이 치욕스러웠다.아마 그녀의 성격상 실컷 욕을 할지 몰라도, 그것을 다 감수하고라도 그녀를 찾아가야만 했다.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중입니다...-

급히 준비를 하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오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받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와중에 현관의 한쪽 구석에 놓인 옆집의 택배박스가 눈에 보였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래. 늘 이 시간에는 수정이가 없었지. 어제..나와 인애가 잠들때까지 들어오지 않았었지만.

나는 얼른 고개를 휘저어 머릿속에 들어오는 수정이의 생각을 지워버렸다.지금은 인애에 대한 사과가 먼저였다.이대로..이대로 20년지기 친구의 우정을 잃는것은 안그래도 가진것 없는 나에겐 크나큰 손실일 테니까.

“죄..죄송합니다.”

복도를 뛰어가다가 그만 계단으로 올라오는 사내와 부딪혀 나는 난간쪽으로 부딪히고 말았다. 그는 짜증이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보다 키가 10센티는 족히 커보이는 훤칠한 젊은 남성이었다. 머리에 왁스를 발라 한껏 멋을내고, 딱봐도 비싸보이는 옷을 걸친 그 남자의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에 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급하게 가는 바람에..죄송합니다.”

“거참..앞좀 보고 다니쇼.”

“네..죄송합니다.제가 급한일이 있어서..”

나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는 급히 뛰어나갔다.가만..근데 우리 건물에 저렇게 젊고 멋진 녀석이 살았나? 그딴건 중요한게 아니다.얼른..얼른 그녀가 일하는 방송국으로 가야만 했다.

“택시!택시!”

대로변으로 뛰어나오자 마자 급하게 택시를 잡았다.평소에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 고급교통 수단이지만 지금은 달랐다.내가 인애에게 사과를 하는 시간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그녀로서는 나에대한 배신감이 클테지.그녀에게는 내가 취해 있는 막역한 친구를 욕정때문에 덮쳐버린 더러운 녀석으로 인식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사과를 해야만 했다.인애를 잃을순 없었으니까.

헉헉거리며 행선지를 말하자 기사는 빠르게 택시를 출발시켰다.여기서는 기본요금을 조금 넘길정도의 짧은 거리였다.인애가 밤샘작업을 하고 우리집에서 눈을 붙였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때문이었다.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벌써 네번째. 인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방송일을 하니 평소에도 방송중에는 종종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지금 인애는 방송중이 아니었다. 출근을 했다 치더라도 지금의 시간은 회의를 하거나, 혹은 혼자서 글을 끄적이거나 하는 시간이었다.아니,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아까 문소리가 났었으니 그녀는 지금 막 도착했을 지도 몰랐다.

-인애야. 지금 너희 방송국 정문에 다왔어. 이거 보는대로 좀 나와줄래?기다릴게-

결국 내가 보낼수 있는것은 짦은 문자메세지 뿐이었다.기사에게 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지만, 나는 인애가 있는 방송국으로 들어갈수 없었다.연예인이거나, 혹은 방송국에 상주하는 직원이 아니면 들어갈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약간은 한적한 정문. 삼삼오오 모여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는지 없는지 목을빼고 구경하는 여고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급하게 나온 까닭에 내 모습은 형편없었다.크게 당황을 한 상태여서 그런지, 안절부절 못하는 내모습은 흡사 금단현상을 겪는 마약중독자 같기도 했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몇번 쓱쓱 비비고는 고개를 쭉 빼어 방송국의 출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아..!’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 멀리서 낯익은 실루엣이 내 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어제 입은 복장 그대로.수수한 청바지에 가디건을 걸친 모습 그대로 인애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앞머리까지 뒤로 넘겨 묶은 머리카락. 평소와는 달리 한층 상기된 얼굴이 나를 향한채로 그녀는 조금씩 나에게 다가왔다.

“이..인애야!”

그녀를 불렀지만 인애는 대답하지 않았다.평소와는 다른 무표정한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아니, 무표정하다기 보다는 잔뜩 헬쓱해진 얼굴 같기도 했다.

“왜..전화 안받았어?”

“바빠서..무슨일이야?”

인애는 내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땅쪽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는 담장에 기댄채로 서있을 뿐이었다.어째서일까?평소라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내 꿀밤을 때렸을 그녀가 나를 어색해 하고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할때부터 같이 자라왔던 우리 사이에 이런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미안해.잘못했어.”

“...”

소심하게 흘러나온 내 말에 인애는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지금까지 살면서 인애에게 백번은 더 사과했을 것이다.그때마다 인애는 내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는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나를 혼내곤 했었다.

“너..잃기 싫어.그냥 아무말 안할게.내가..너무 취했었나봐.미안해..나는 사실...”

더이상 말을 이을수 없었다.인애가 잔뜩 화가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황해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인애의 두 눈 가득 무언가가 고이기 시작했다. 어렸을때 이후로 술에 취하지 않은 이상 절대로 볼수 없던 그녀의 눈물이 화장기 없는 하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짜악!

왼쪽 볼이 얼얼 해졌다.깜짝 놀라 볼을 부여잡고 인애를 바라보았다.얼얼한 감촉에 정신이 확 하고 들어왔다.어째서..어째서?

“왜..왜그래..”

우리의 옆에 있던 여고생무리들이 깜짝 놀라 우리를 보며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인애는 입을 꼭 다문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그녀의 눈에 담긴 것은 분노와 실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와 우정을 쌓으며 단 한번도 본적없는 성격의 것들이었다.

“뭐?미안하다고?”

“다..당연하잖아..너한테 그런짓을 했으니..난..”

“이 나쁜 놈아!”

그녀가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인애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안하다고? 너무 취해서 그랬고, 날 잃기 싫다고?겨우 그딴말하려고 날 찾아왔어?”

“인애야..”

“당장 사라져! 이 나쁜 자식아! 너같은 놈을...”

인애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바라볼 뿐이었다.어째서..왜...내가 잘못을 해서 맞는건 당연하지만..왜..인애 너도 우는거야?왜..

“꼴도 보기 싫으니까..말걸지마.”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로 다시금 방송국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욱신욱신 거리는 왼쪽볼로 차가운 바람이 와서 나를 한번 더 때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채로, 그녀가 사라진 건물쪽을 보며 망연자실해 있을 뿐이었다.





하루종일 걷는것만 같았다.

인애가 있는 방송국에서 되돌아 온것은 대낮이나 다름없었지만, 지금은 뉘엿뉘엿 어둠이 찾아들고 있었다.

계속 걸은 것이다. 그냥 목적지도,행선지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발길이 닿는대로 나는 계속해서 걷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걸을 힘이 나질 않았다.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허기짐을 느낄 틈도 없었다.머리속에서는 수정이와 인애가 교대로 등장하며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어째서..’

인애는 울었다.그것이 무슨 의미일까?인애가 날 좋아한 걸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그럴리가 없었다.내 앞에서는 흡사 가족의 앞에서 처럼 거침없는 그 아이가 날 좋아할 리가 없었다.얼마전에 인애는 나에게 소개팅을 시켜주기 까지 했었고, 서스럼 없이 내 앞에서 속옷만 입고 자기도 하는 아이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머리속에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다. 순간적으로 늘 아무렇지않게 머리를 내리고 다니던 인애가, 어느순간부터,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말을 한 이후부터 묶어 올리고 다녔던 것들이 생각났다.나는 또다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말이 안돼잖아.그럴만한 계기가 없었는데.’

지쳤다.몸과 마음도,그리고 내 생각도, 감각도.

텅 빈 골목길에 울리는 내 발자국소리가 너무나 처량했다. 내 자신이 바보 같았다. 결과적으로 수정이에게 남자친구가 있던 슬픔을 인애에게, 그것도 성욕으로 풀어버린것이나 다름없었다.한심했다. 내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한적은 없지만 적어도 이렇게 최악으로 느껴져 본적은 없었다.

내가 들어가는 순간 밝아지는 복도불이 달갑지 않았다.그냥 어두웠으면 좋겠는데,이게 마치 내 쓰린곳을 속속들이 비춰버리는것 같아서 괜시리 찔렸다.

복도 끝편에 나란히 있는 두개의 현관이 보였다.땀방울이 흘러내리며 몽롱한 기분마저 들어왔다.서로의 숨결조차 마음만 먹으면 들을수 있는 붙어 있는 두 개의 집이지만, 심적인 거리는 너무나도 먼 그녀와 나의 집이었다.그리고 어쩌면..소중한 친구 한명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는 집.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늦게까지 일을 하는 수정이는 아직 안왔을테지.하지만 오늘같은 날 까지 벽에 귀를 대고 그녀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아직까지 남아있는 인애의 향기때문에..그것에 너무나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불을 켜지 않았다.밝은것이 무서웠다. 실수를 저질러 버린 내 마음속 구석구석까지 비춰질까봐 무서웠다.

나는 벽에 기대어 주르륵 미끄러지듯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갈증이 났지만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긴 싫었다. 목마른 감각이 차라리 정신을 들게 해줘서 산뜻하기까지 한 기분이었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보니 저녁 일곱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땀에 젖은 옷을 입은 상태로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몸이 힘들정도로 걷고 또 걷고 나니 관절들과 종아리가 비명을 질러댔다.

‘8시...’

그러고보니, 인애가 연출부에 있는 라디오 방송이 7시부터 시작이었지..내 게으름 때문에 그 방송을 들어준 적이 별로 없었다.물론 인애역시 나에게 단 한번도 자신이 맡은 방송을 모니터링 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지 않은것도 있지만.

손을 뻗어 책상밑에 놓여있는 조그만 휴대용 라디오를 꺼내 들었다. 인애가 선물해준 것이지만 한번도 듣지 않았던 그 것. 아이팟이 있는데 굳이 라디오를 뭐하러 듣냐고 핀잔을 주었다가,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때리려고 했던 인애의 모습이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나와버렸다.

라디오에 딸린 조그마한 번들 이어폰을 귀에 꽂고는 살며시 전원버튼을 위로 올렸다.치이익 하는 주파수음이 들려왔다. 하루종일 걸은탓에 얼굴을 타고 몸으로 땀이 흘러내리는게 선명하게 느껴졌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휴대용으로 만들어져 작은 케릭터 그림이 붙어져 있는 인애의 선물. 나는 조그마한 휠을 돌려 주파수를 맞추어 보았다.

-벌써 1부 끝날 시간이 되었네요-

기억을 더듬어 인애가 알려줬던 주파수에 맞춰보니, 차분한 여자 DJ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두시간 편성된 방송이구나.나도 너무했네. 인애는 늘 내 일적인 근황에 대해 신경써 주었는데..난 시간도 많으면서 인애가 작가로 있는 방송조차 제대로 듣지 않다니.

라디오에서는 1부 정리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DJ가 하는 말들은 대부분 인애가 써준 것일까? 조심스레 귀를 기울였다.

-사랑과 우정에 관련된 이야기..1부는 조금 감성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진 시간들이 아니었나 싶네요. 1부 끝 곡으로 띄워드릴게요.다이나믹 듀오와 케로 원이 같이 부릅니다. Let"s Just Be 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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