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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 10

하숙 10


술 기운으로 깜박 졸았으나 옅은 잠이었다. 잠에서 깨고 나니 속이 쓰렸다.
깜깜한 내 방의 모습이 그 동안 이 공간에서의 거억들을 아련하게 떠 오르게 한다.
내일은 나도 다른 하숙집을 구해야 하는구나.
아직 그 일로 그녀와 많은 말 오고 가지는 않았지만 이 하숙집을 떠나야 된다는 것은
정해 진 것 같다. 속이 쓰린 관계로 화장실 좀 갔다 와야 겠다. 시간은 새벽 두시를
넘어 섰다. 오늘은 글이나 써 볼까? 일단 화장실 갔다 와서 생각하자. 마루로 나왔다.
불이 꺼진 마루위로 뚜렷하게 그어진 불 빛. 주인 아줌마의 조금 열린 방문 틈 사이로
나오는 불 빛이다. 그녀가 불을 꺼지 않고 나갔나 보다. 불 꺼줄까? 그러지 뭐.

아낙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방 문을 살며시 열어 보았다. 그녀가 자기 방으로
돌아 가지 않고 아직 주인 아줌마의 방에 있었다. 어머님이 쓰시던 물건들을 정리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그리고 한쪽에 앉아서 그녀가 조용히 울고 있었다. 모른 척
조금 지켜 보았다. 아직 잊기가 힘들겠지. 참 가여워 보인다. 아직 출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따져 보면 지금 고아다. 저런 그녀를 두고 하숙집을 옮겨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하지만 내가 떠나고 싶어서 떠나나? 그녀가 나가라고
하니까 떠나는 것이지.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내 방으로 돌아 왔다.
뭔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 방에 들어와 누웠다. 한참 생각을 해
보니까 화장실 가려고 나갔다가 화장실을 안가고 들어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 다시 나가야지.

"동엽씨 아직 안 잤어요?"

그녀가 주인 아줌마의 방을 나오다가 나를 봤다. 주방의 불이 켜졌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을
흘린 모습은 아니다. 아까 흐느끼던 모습은 감추어져 있었다.

"자다가 일어 났어요."
"왜요?"
"속이 쓰려서요. 배도 좀 고프고. 나영씨는 왜 안 잤어요?"
"그냥."
아까 우는 모습 봤는데 말 하지 말아야 겠다. 그녀가 주방 식탁에 앉았다.
"안 잘거에요?"
"잠이 안 오네요."
"잠 안 와요? 나도 안 오는데."
"그럼 여기 앉으세요. 배 고프면 라면 하나 끓여 드릴까요?"
"새벽에 라면 먹으면 얼굴 부어요. 그리고 쫓아 낸다고 친절해 할 필요 없어요."
"기분 나쁜 듯이 얘기 하네. 그럼 커피나 한 잔 할래요?"

그럼 기분 좋겠냐. 쫓겨 나는 기분인데.

"에이. 그럼 한 잔 주세요."

내가 식탁에 앉자 마자 그녀는 일어 서 버렸다. 새벽에 그녀와 커피 타임도 가져 본다.
헤, 아쉬운 로멘틱이다. 그녀가 커피를 끓여 내 옆에 앉았다. 하숙집 실내는 조용했다.
바깥이 조용한 만큼 실내에서 들리는 그녀의 말소리는 뚜렷하게 감정까지 들린다.

"동엽씨."

나긋하게 부르는 음성이다.

"왜요?"

별 시원찮게 대답하는 음성이다.

"하숙집 옮기게 된 것 미안해요."
"그것보다 딴 놈들은 다 알고 있었는데 나만 몰랐던 것이 좀 화가 났어요."
"애들 한테도 그제 말했어요. 동엽씨에게도 어제 말하려고 했었는데 미안하고 또 그런 말
할 용기가 잘 서지 않았어요."
"언제까지 방 구해서 나가면 되나요?"
"너무 그렇게 따지 듯 묻지 마세요. 그러면 내가 슬퍼져요."

이런 씨, 니가 슬픈 것만 따지냐. 나도 나가는 것이 슬퍼.

"이번 달 말까지는 나가야 되겠죠?"
"네. 언니가 칠월 초순 경에 형부랑 한국에 오는데 그때까지 하숙생들 비우려구요."
"집 팔거에요?"
"네. 집 팔면 반은 언니 몫이고 반은 내 몫이겠죠."
"아, 그렇게 되는구나. 그럼 나영씨는 어디서 살 건데요?"
"뭐 오피스텔이나 작은 전셋집 하나 구해야 되겠네요."
"계속 하숙 칠 생각은 없어요?"
"제가 그걸 계속 할 수 있을까요?"
"힘들겠구나. 참, 발령은 났어요?"
"아직이요. 그래도 내년엔 자리가 날 것으로 믿어요."
"나영씨?"
"왜요."
"나 이 하숙집 나가게 되면 아무래도 잊혀 지겠죠?"
"그 대답하기 전에 나는 잊혀 질까요?"

그녀가 커피잔을 세운 채 날 빤히 쳐다 본다. 씨, 내가 먼저 물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시간이 흘러 봐야 알지."
"그럼 저도 시간이 흘러 봐야 알겠지요. 그 대답 밖에는 못하나? 동엽씬 아무래도 중매로
결혼하는 수 밖에 없겠다."

요즘 한 동안 안 놀린다 했더니 기어이 또 놀리는 구나. 너도 뭐 내 맘 아프게 하는 걸로
봐서 빨리 가긴 힘들 것 같다.

"나도 맘만 먹으면 연애 할 수 있어요. 결혼 누가 빨리 하나 두고 봅시다."
"좋을데로 하세요."

내 표정이 우스운가? 아주 비장스럽게 말했는데 그녀는 피식 웃는 모습을 보였다. 좀
못마땅했지만 아까 흐느끼던 표정 보다는 보기 좋다.

"내 지금 처지 때문에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분명 나 좋아하는 사람 어디
있을거에요."
"훗훗.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래요 분명 있을 거에요."

어랏? 따져야 되는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니까 할 말이 없어진다. 미소 짓는 저 표정을
잊을 수가 있을까? 오 개월 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데 헤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많이 아쉽다.

"나중에 집을 대충 어디 쯤 구할 거에요?"
"왜요, 놀러 오게요?"
"그것보다 궁금하잖아요."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멀리 안 갈거에요. 나중에 학교 발령이 나면 그 근처로
다시 이사할까도 생각 중이에요. 기회되면 가르쳐 드릴게요. 동엽씨는 어디 하숙집을
구할 건데요?"
"오늘 구해 봐야지요. 이번에는 되도록 학원 근처에서 구할까 싶네요."
"좋은 하숙집 구하세요. 참, 잠깐만요."

그녀가 자기 방으로 급히 들어 갔다가 하얀 봉투를 하나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내게 주었다.

"이게 뭐에요?"
"이번 달 하숙비에요."
"이걸 왜? 나는 월초에 들어 와서 이번 한 달 다 살고 나가는 것인데."
"그래도 자의로 나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받으세요."

이러면 미안한데. 그리고 이 돈이 꼭 그녀와 내 관계가 하숙집 주인과 하숙생이라는
아주 계산적이고 단순한 관계일 뿐이라고 판을 박는 느낌이다.

"이 돈 받기 싫은데요."
"왜요. 하숙 그만 두면서 제일 미안했던 사람이 동엽씨에요. 받으세요."
"싫어요. 돈이라는게 좀 삭막해 보이지 않아요?"
"뭐가요? 받으세요."
"다 살고 나가는데 왜 내가 이 돈을 받아요?"

돈을 받기 싫었다. 받으면 안된다는 필이 팍 왔다.

"내 성의라니까요. 돈이라고 생각지 말고 받으면 되잖아요."
"싫어요. 동정심인가요?"
"뭐에요? 싫으면 관둬요. 동엽씬 그러니까 여자 친구가 없는거에요."

씨, 또 놀렸다. 그리고 조금 화가 난 어투다.

"무슨! 거기서 그 말이 왜 나와요?"

나도 되받아쳤다.

"내가 이 돈 드리는 것이 동정심으로 보였나요? 제 처지가 지금 누구 동정할 처지로 보여요?"

어쭈. 조금 더 화난 목소리다. 무섭다. 내가 뭘 잘 못한 것이여? 내 맘을 조금만 알아 봐라.
그런 말 못할 거다.

"그럼 그 말은 안 들은 것으로 하세요. 내가 그 돈을 받으면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중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뭔데요?"
"하여튼 내 마음 속에 있는 누군가에게 내가 초라한 존재 밖에는 안 될 것 같아서 받기
싫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영씨하고 고작 하숙비로 연관되어진 존재만은 아니고 싶다 뭐
이런 뜻이라는 겁니다."

그녀가 내 모습을 찬찬히 바라 본다.

"훗. 그래요?"

그녀가 한번 피식 웃고는 돈 봉투를 들고 일어 선다. 폼새가 방에 들어 갈 모양이다.

"자게요?"
"네. 동엽씨 좋은 꿈 꾸세요."

그녀가 그냥 방에 들어가 버렸다. 많이 삐쳤나? 받을 걸 그랬나? 내가 아무리 지금 백수지만
그 정도의 돈 때문에 내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다 이거야. 저 돈을 받았으면 서글펐을
것이다. 야, 이 나영. 솔직히 너 보면서 이 하숙집에 계속 있고 싶은데, 그래서 꼭 쫓겨
나가는 기분인데, 돈까지 받았다면 진짜 쫓겨 난 것 아니냐. 그녀가 날 한 번 더 섭하게
했다. 삐쳤으면 안되는데. 좋은 기분으로 헤어져야 하는데... 컵은 씻어 놓고 가야 할
것 아냐. 컵을 씻어 놓고 방으로 들어 왔다. 뭔가 꺼림찍 하다.

우쒸, 또 화장실 못 갔다. 갔다 올까? 이제 배도 쓰리지 않다. 그냥 자자.



26편



노크 소리를 듣지 않고 눈을 떴다. 시간은 열시를 넘긴 오전이다. 그녀가 오늘은 날
깨우지 않았다. 주방으로 나갔더니 그녀가 식탁에 앉아 생활 정보지를 살펴 보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내 밥과 그녀의 밥이 차려져 있다. 이상하게 그 모습이 슬퍼 보인다. 오늘은
서둘러 하숙집을 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 동엽씨, 생각보다 일찍 일어 났네요."
"네."

그녀가 생활 정보지를 내려 놓고 싱크대 앞으로 갔다. 그리고 렌지의 불을 켰다. 나 이
하숙집 떠날 때 많이 속상해 하려고 작정을 했나 보다. 아침에 나 일어나는 것에 맞추어
이렇게 밥 차려 주는 하숙집을 또 구할 수 있을까?

속이 아직 쓰린 관계로 밥 맛이 별로 없었지만 성의를 다해서 공기를 다 비웠다. 그녀는
아직 반도 비우지 못했다. 멀뚱히 나를 바라 본다. 그런 그녀에게 아무 말 하지 않고 내가
먹은 밥 공기를 싱크대에 갖다 놓고 방으로 들어 왔다. 나갈 준비를 하고 나왔다. 그릇이
치워진 식탁에 그녀가 여전히 앉아 있다.

"오늘은 일찍 나가네요?"
"하숙집 구해야 지요."
"오늘 바로 구하게요?"
"오늘 바로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서둘러 구해야지요. 전 다른 하숙생들 보다
짐도 많은데."
"섭하게 왜 그래요?"
"뭘요?"
"구하면 알려 주세요."
"그러지요. 나 나갑니다."
"동엽씨 혹시 갖고 싶은 것 있어요?"
"그건 왜요?"
"되묻지 말고 갖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 봐요."
"일억이요."
"네?"
"돈 일억이요. 작은 집이나 하나 사서 하숙집 옮겨 다닐 필요 없게요."

아무말 못하고 나를 바라 보는 그녀를 뒤로 하고 하숙집을 나왔다. 괜히 심술이 나서
그녀에게 투정을 부린 것 같다.

학원 근처는 하숙 치는 곳이 없었다. 하숙방을 구하려고 여러 군데 돌아 다녔지만
마땅하지가 않았다. 꼭 하숙이어야 하나? 어짜피 내 생활 패턴이 하숙 밥 얻어 먹기
힘들 것 같았다. 자취도 고려해 보자. 이리 저리 돌아다닌 끝에 학원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맘에 드는 방을 찾을 수 있었다. 내 예전부터 꿈꾸어 왔던 그런 방이다.
삼층 가정집의 옥탑방. 신기하게 십자 나무 창살로 된 창이 있었다. 방으로 들어 가는
입구는 작은 입식 주방이었는데 요즘은 보기 드문 백열등 조명이 있었다.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옥탑방이라 그런지 벽지가 새어 들어온 비들에 의해 번져 있다. 주인
아저씨가 새로 도배를 해 준다 했지만 거절했다. 맘에 든다.

"보증금 삼백만원에 월 이십만원이라구요? 좀 비싼데..."
"보증금 백만원 정도는 빼 줄수 있어."
"언제쯤 이사 올 수 있나요?"
"도배할 필요 없다면 내일 당장도 올 수 있지 뭐. 어짜피 비어 있는 방인데."
"그럼 계약 할게요. 내일 이사 와도 된다고 했죠?"
"그래. 오늘 선수금으로 십만원 걸어."
"그러지요."

생각보다 쉽게 그리고 빨리 방을 구했다. 하숙이 아닌 자취생활도 해 보는구나. 기쁘다.
변화는 삶의 활력소다. 옥상에서 바라 보는 서울 하늘이 참 좁아 보인다. 이 정도 하늘
아래서 성공 못하겠냐.

어랏! 학원 갈 시간이 다 되었네. 아저씨 내일 봐요. 아저씨 혹시 시집 안간 나만한 딸
없나요? 내일 은근 슬쩍 물어 봐야 겠다. 옥상에 굴러 다니는 폐가구들이 보인다.
뜯어 졌지만 그런데로 앉을 만한 소파가 두개 보였다. 이 옥상에서 저거 깔고 여자랑 마주
앉아 차 한잔 들이키면 참 분위기 있겠다. 딸이 있어야 하는데...

종석이 형에게 집들이 거하게 해 준다는 조건을 붙이고 내일 이삿짐 옮기는 것 도와 달라고
했다. 물론 긍정의 답을 받았다. 나쁜놈. 집들이 할 때는 소주는 안 먹는다고?

짐 정리 할 것은 별로 없지만 부피가 큰 가전 제품이 몇개 있다. 오디오 세트는 분리해야
하고, 컴퓨터도 선을 뽑아 정리해야 한다. 집에 빨리 가자.

하숙집에 들어 서니 그녀가 내 오전에 집 나갈때 본 모습으로 식탁에 앉아 있다. 그녀의
밥과 내 밥이 놓여 있다. 또 그 모양이 슬퍼 보인다.

"동엽씨 왔어요?"
"네."
"씻고 식사하러 바로 오세요."
"알았어요."

방으로 들어 왔다. 정들었던 방이다. 내일이면 잊혀져 가겠지. 너무 성급하게 방을 구했나?
하지만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 어수선한 느낌들은 빨리 지워야 한다. 대충 옷을 갈아 입고는
밖으로 나왔다. 내 방 보다는 낯익지 않지만, 그려 나 별로 안 씻는다. 욕실의 느낌도 포근
했다. 이것도 잊혀 지겠구만.

그녀와 나란히 앉아 아마 이 하숙집에서는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저녁식사를 했다. 마지막
이라서 천천히 먹었다.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기도 했다. 그녀는 여전히 공주처럼 밥을
먹고 있다. 괜한 미소가 맺힌다. 오늘 내 하숙집을 구한다고 했으나 그녀는 그에 대한 말이
없었다. 이 하숙집 와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와 보조를 맞추어 식사를 끝냈다.

"동엽씨."
"왜요."
"동엽씨가 저번에 나 옷 사준 적 있잖아요."
"네. 있어요."
"나도 동엽씨 옷이나 한 벌 맞추어 드릴까요?"
"왜요?"
"뭐가 왜요에요. 어짜피 동엽씨 드릴려고 했던 돈이 굳었으니까, 그 돈으로 옷이나 한 벌
맞추어 드릴려구요."
"나영씨?"
"응."

내가 너보다 두살 많아 임마. 왜 반말이여.

"돈 얘기 자꾸 하지 마요. 그러니까 나영씨가 남자 친구가 없는거에요."
"갑자기 그건 무슨 말?"

무슨 말이냐구? 그냥 좋아서 옷 한 벌 사준다고 그랬으면 내 즐거운 맘으로 받았을
거다. 내 그 돈 받으면 진짜 쫓겨나는 기분이 들 것 같다고 누누히 말했는데. 아니다
말은 안했구나. 하여튼 별로 달갑지 않다.

"그냥 나영씨 요긴한데 쓰세요."
"그러지 말고 내일 같이 옷이나 사러 가요."

내일 이사해야 돼.

"됐어요."

그녀가 삐쳤나? 침울한 모습을 짓는다.

"그럼 목사이즈 하고 허리 사이즈 말해봐요."
"목 둘레는 삼십육센티 정도 되구요. 허리는 31인치에요."

내가 왜 친절하게 대답했을까? 그녀의 표정이 좀 무서워서.

"무슨 색깔 좋아해요?"
"짙은 색이요."
"범위가 너무 넓다."
"좋아하는 색 없어요."
"알았어요."
"참, 할 말이 있는데."
"무슨 말이요?"
"아닙니다. 나 이제 들어 갈래요."
"후식으로 커피 한 잔 할래요?"
"됐습니다."

그녀가 좀 무안해 하며 밥그릇을 만지작 거렸다. 내가 좀 쌀쌀하지?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내 속이 지금 상해 있오. 좀 답답하기도 하고.

방으로 들어 와 가전 제품부터 정리를 했다. 오디오에다 누가 빤스 구겨 넣어 놓은겨?
내가 그랬구나. 티비 밑에다 양말은 왜 받쳐 놓았을까? 이해가 안되네. 천원짜리도 한 장
주웠다. 이황 선생님의 얼굴이 많이 상해 계셨다. 죄송합니다. VTR을 만지작 거리다
그녀와의 좋은 기억이 떠 올랐다. 좋은 기억이 떠 올랐는데 눈가가 뜨거워졌다. 왜 뜨거워 진겨?

가전 제품들을 모두 한 쪽으로 모았다. 내일은 박스를 좀 구해야 겠다. 나머지는 뭐 챙길 것도
없다. 옷하고 이불 뿐인데 저것들은 내일 챙겨도 시간 충분하겠다. 짐들이 한 쪽으로 치워진
내 방의 표정은 왠지 어둡다. 이불을 깔고 누웠다. 천정에 하숙집 주인 아줌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좀 원망 스럽다. 그녀를 혼자 두고 뭐가 급해 돌아 가시다니. 덩달아 나까지
쫓겨나게 만들고 말이야. 하숙집 주인 아줌마가 웃으신다. 그 옆에 나와 아웅다웅하던
그녀의 밝은 모습도 그려진다. 내 지금 힘든 시기에 좋은 미소를 주었던 모습들이다. 하하,
허전하다. 허전한 웃음을 머금고 잠이 들었다.

"쾅,쾅!"

방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직감했다. 마지막 노크 소리라는 것을, 그 소리가
오늘따라 크게 들린다. 뭔가에 급히 놀라는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 났다.

"왜요?"
"밥 먹어요."
"조금 있다 나갈게요."

그녀와 같이 하는 식사는 어제가 마지막이었다. 오늘 식탁엔 내 밥 뿐이다. 그녀는
하필이면 오늘 외출을 하려나 보다. 칫, 조금 더울텐데... 내가 사준 옷을 입고 어디
나갈 모양새다.

"나영씨 어디 가요?"
"오늘 좀 바빠요. 동사무소도 가봐야하고, 부동산 중개소에도 가봐야 하고, 음 그리고
또 살게 있네요."
"그래요?"
"동엽씨 같이 갈래요?"
"내가 왜 가요. 저도 오늘 바빠요."
"그럼 나중에 딴 말은 하지 말아요."

내가 뭐 자네하고 같이 못나가서 안달난 사람도 아니고 딴 말을 왜 하냐.

"알았어요. 내 밥 먹고 다 치워 놓을 테니까 나 신경쓰지 말고 나갔다 와요."
"그럼 갔다와서 봅시다."
"그럽시다."

그녀가 날 빤히 한 번 쳐다 봤다. 나도 쳐다 봤다. 오래 기억하려고... 그녀는 공주가
맞나 보다. 내가 눈싸움에서 졌다. 그녀가 외출을 하고 난 뒤 밥을 먹으면서 내가 오늘
이사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 것을 알았다. 왜 이러냐 이 화상아. 그녀가 일찍 올까?
나 이사나가기 전에는 들어 와야 할텐데.

술 먹는다고 참 일찌기도 전화를 했다. 종석이 형이 우리 하숙집 위치를 물어 보는 전화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왔다. 벌써 근처까지 왔댄다. 좀 일이 꼬인다.
종석이 형이 말한 위치로 가서 그를 데리고 하숙집으로 왔다.

"야, 하숙집 아담하다. 네 방은 어디야?"
"저기에요."
"그건 그렇고 뭐 먹을 것 없냐?"
"물이나 마셔요. 우리 하숙집 주인 아가씨 겁나요."
"하숙집 주인이 아가씨야? 그런데 하숙집을 왜 옮겨?"
"하숙 그만 둔다니까 옮기는 거죠."

그가 물 한컵 마시고는 내 방으로 갔다.

"문고리 고장 났는데."
"그것 때문에 고생 좀 했지요."

거기도 추억이 묻어 있었구나. 아쉬운 웃음이 나왔다. 나도 방으로 들어 갔다. 장년 둘이
있는데 짐 옮기는데 별로 시간이 걸릴 것 같지가 않다.

"차는 불렀냐?"
"아직이요."
"자세가 안되어 있구만. 빨리 불러."
"조금 있다 부르면 안될까요?"
"너 보기는 이래도 생각보다 시간 많이 걸린다. 학원 갈 시간까지 맞출려면 서둘러야 돼."
"그럼 뭐. 내 전화하고 올게요."
"그래. 난 대충 옷가지들 정리 해 줄게."
"고마워요."

이삿짐 용역 업체에 작은 트럭 하나를 주문했다. 금방 온단다. 이사 비수기에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바로 보내 준다고 한다. 잘못하면 그녀를 보지 못하고 갈 수도 있겠다. 방으로 들어 왔다.

"야, 이거 나주라."

종석이 형이 옷가지들을 정리 하다가 새빨간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다. 목에다 걸어 보며
의기 양양하게 그걸 자기 달랜다. 그녀가 준 넥타이다. 뭐여? 진짜 이단 옆차기 해 주고 싶다.
바로 가 그걸 빼었다. 하! 넥타이를 보니까 또 마음이 무겁다. 그녀는 지금 여기에 없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다. 그녀가 내 이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더 무거울
것 같다. 넥타이를 바지 호주머니에다 접어 넣었다.

"이건 미소가 준 것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넘보지 말아요."
"그럼 딴 거라도 죠."

이거 알고 봤더니 완전히 빈대잖아. 어제 오대오 장식장에서 찾아 낸 빤스를 던져 주었다.
험한 표정 짓지 마요. 그것도 빨고 나면 입을 만 할거에요.

이삿짐 트럭이 삼십분도 지나지 않아 집앞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하숙집에는 지금
아무도 없다. 바로 가기 힘들것 같다. 그래도 일단 짐들을 실었다. 종석이 형이 힘쓰는
일에는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 큰 텔레비젼을 혼자서 거뜬히 옮겼다. 짐을 차에 싣는데
걸린 시간은 이십분이나 될려나?

금방 끝마쳤다. 빈 공간이 되어 버린 내 방이 지금 울고 있다. 그래서 달래 주어야 했다.
빗자루로 얼굴을 쓸어 주고 걸레로 자국들을 닦아 주었다. 야, 깨끗하다. 밖에서는 나 빨리
나오라고 경적을 울리고 있다. 하숙집을 둘러 보았다. 아, 지금 바로 못가는데... 누구라도
와야 내 떠남을 알릴 것 아닌가.

"아저씨, 담배 한대 피세요. 별로 안 바쁘잖아요."

밖으로 나와 담배로 일단 시간을 지연 시켰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빨리 안 갈거에요?"
"아저씨 조금만 있다가 갑시다. 지금 점심시간이라서 차도 막힐텐데."
"그럼 담배 한가피 더 줘 봐요."

짐을 실은 트럭 앞에서 십분 정도 더 서 있었다. 때 마침 집하고 학교 밖에는 갈데가 없는
불쌍한 놈의 모습이 보였다. 약간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나를 본다.

"현철이 너 때 마침 잘 왔다."
"형 이사가요?"
"응."
"빨리 가네요."
"그렇게 되었다."
"어디로 가요?"
"그건 내 나중에 전화 할게. 그 보다 나영이 누나한테 내 말 못하고 떠난 것 미안하다고
전해 주라. 내 전화한다 그래."
"알았어요. 그래도 이렇게 급하게 떠나는 걸 보니까 허전하네요."
"그래 임마. 너도 다른 하숙집에서 잘 살아라."
"네. 형도 잘 사세요. 누나한테는 내 잘 이야기 해 줄게요. 근데 왜 말 못하고 떠나요?"
"그럴일이 있다 했잖아."
"잘 가세요."

저 녀석도 조금 그리워 지겠다. 지금 모습을 보니까 나도 많이 허전하다. 5개월 동안이지만
이 하숙집은 많은 것들과 정이 들게 만들었다. 안녕이다.

"아저씨, 이제 출발 합시다."
"그러지요. 집이 어딘지 잘 말씀해 주셔야 됩니다."
"알았어요. 출발."

드디어 하숙집과의 이별이다. 트럭이 담배 가게를 지날 때쯤 그녀를 스쳐 지나 갔다. 제법
속도가 있었고 내가 이사가는 줄은 모르기에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그녀의 한 손에는
옷가방이 들려 있다.

"아저씨 차 좀 세워 주세요."
"왜요?"
"잠깐만 세워봐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이름을 부를려고 했으나
그녀의 걸음걸이가 내 마음과는 다르게 가볍고 밝아 보였다. 왜 그런지 용기가 서지 않았다.
점점 멀어지는 그녀가 골목길로 사라져 버렸다. 훗.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 하지 뭐.

"아저씨 그냥 갑시다."

허허, 나 하숙집에서 쫓겨 났오. 햇살이 뜨겁게 내리고 있다. 낯선 도로의 배경들이 달아
오른다. 하지만 내 마음은 찹다. 내일부터는 아니 오늘 밤부터는 새로운 생활이다. 잘
살수 있다 아자.

"아자!"

운전 아저씨가 깜짝 놀라 경적을 울리더니 날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 본다. 종석이 형도.
그녀처럼 피식 웃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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