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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하숙 11

하숙 11

낯선 시간들이 지나갔다. 지금 하늘 모습으로 내 느낌이 묘하다. 학원을 파했다. 종석이
형은 이삿 짐 날러 주었던 보답을 받으려는지 의미있는 미소를 머금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들이 해야지?"
"하지요 뭐. 맥주 드실래요?"
"좋지. 내일 할일이 있는데 소주는 속이 불편하겠지."

맥주가 비싸니까 니가 그러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랴. 근데 내일 토요일이잖아. 무슨 할
일이 있을까?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별이 보이는 서울 하늘 아래 내 자취방이 있다. 아직 그 속에서
의 생활은 해보지 않았지만 낭만적일 것 같다. 주인 아저씨가 생각보다 나이가 적었다. 외모
상으로는 나만한 딸이 충분히 있을 것 같았는데 딸이라고는 이제 중학생이 하나 있고, 제일
빨리 낳은 자식은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아직 정리하지 않은 짐들로 방안은 어수선했다. 사가지고 온 맥주와 먹을 것들로 옥탑방 앞에
마당처럼 펼쳐진 옥상에서 집들이를 하기로 했다. 곰팡이 냄새가 나는 낡은 소파가 운치가 있다.

다리를 꼬고 허리를 핀 채 소파에 기대어 작은 나라의 왕자모습으로 앉아 종석이 형과 술을
마셨다. 바람이 살랑거리는 옥탑에서의 이야기가 멀리 번져 간다.

"야, 분위기 괜찮다."
"이사 잘 온 것 같아요?"
"그래. 여름밤에 앉아 쉬기 딱 좋은 분위기다."
"그렇지요?"
"한잔 해."
"그럽시다."

약간의 취기는 녀석에게 또 희한한 말들을 하게 했다. 높은 곳에 사니까 출세했다.
옥상이니까 유에프오 볼 수도 있겠다. 어린 왕자가 찾아 올 수도 있겠다. 달밤에 체조해도
아무도 뭐라 않겠다. 그리고 그녀가 보고 싶다. 그 그녀가 내 그녀는 아니었지만, 하숙집
그녀를 떠 올리게 했다.

"한번 생각해 봐라."
"뭘요?"
"분명 내 사랑했던 사람이 가까운 어딘가에 살고 있는데 잊혀져 간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냐?"
"누구 말하는 거에요?"
"주영이 말이야."
"그말이에요? 전혀 모순이 아닌데요. 여자야 딴 남자에게 시집가버리면 잊혀지는 것이지."
"그러니까 자네가 여자 친구가 없는거야. 그게 모순이라고 생각되어야 안 잊혀지지.
잊혀지지만 않으면 다시 만나게 되어있어."

뭔 말하는거야. 니가 철학자냐? 어려운 말하고 있어. 그리고 우리 그녀가 내게 자주
하던 말을 자네까지 하면 섭하지. 우리 그녀? 그거 어감이 괜찮다. 잊혀지지 않아도 다시
못보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 종석이라는 사람은 모르나 보다.

"그럼 죽은 사람도 안 잊혀 지면 다시 볼 수 있어요?"
"당연하쥐. 나중에 내 죽어서 만나면 되지. 잊혀지지만 않으면 돼. 그런 의미에서 한 잔 하자."
"그럽시다."

고등학교 때 수학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왠만하면 철학과는 가지마라. 굶기
쉽상이다. 철학? 술 먹으면 다 철학자 된다는 말씀. 물론 장난삼아 별 의미없이 한 말이지만,
내 앞의 종석이라는 사람의 모습을 보니까 새삼 그 말이 공감되어진다.

맥주로 시작한 집들이는 결국 소주로 끝을 마쳤다. 뭐 세상에다 대고 할 말이 저렇게
많았을까? 술에 못 이긴 종석이 형은 곰팡이 핀 낡은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날씨
따뜻하니까 저렇게 재워도 괜찮을 듯 싶다. 오늘 모기들 포식하겠다.

새벽 한 시가 넘었다. 정리 되지 않은 내 옥탑방을 안식처로 꾸며야 했다. 방은 하숙방보다
훨씬 넓다. 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대충 짐들을 배치해도 무리가 따르지 않았다. 창 아래에
글쓰기 위한 컴퓨터와 밥상을 놓은 것 외엔 아무렇게나 짐들을 배치했다. 두 시간 가까이
흐르자 내 방이 안식처로 변했다.

날 찾아 온 손님인데 밖에 재워 둘 수 없어 종석이 형을 깨우러 방을 나왔다. 벌써
모기에게 많이 뜯겼는지 종석이 형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연신 가려운 곳을 긁고 있다.

"형 들어가서 자요."
"괜찮아. 괜찮아. 잘 할 수 있어."
"예?"
"잘 할 수 있다니까."
"들어가서 자라니까."
"괜찮아. 괜찮아. 살다보면 그럴때도 있는거야."

정신 없이 내뱉는 말이지만 괜찮다고 그러는데 굳이 깨워서 방에 재울 필요 있나 싶다.
그럼 나는 들어가서 잘테니 형은 거기서 잘 주무세요.

"형 그럼 거기서 주무세요."
"응. 그래. 괜찮아. 괜찮아."

내일 딴 말하기만 해 봐라. 먹던 술병이나 음식들을 대충 치워 놓고 방으로 들어왔다.

십자 창문 사이로 밤 하늘 빛이 분위기 있게 들어 온다. 좋다. 무언가 그리운 것이 있다면
그걸 회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풍경이다. 그래서 전에 살던 방이 그립다. 그녀는 아직은 내
살던 그 곳에서 잠이 들었겠지. 그녀가 아직 내가 아는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

"크러렁!"

언제 들어온겨? 아침에 코 고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옆에 종석이 형이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가 배에 말고 자고 있었다. 거지가 되어도 어디가서 얼어 죽지는 않을 것
같다. 밝아 진 내 방이 낯설다.

문 쪽을 쳐다 보았다. 밖에 아무도 없지만 왠지 노크소리가 들릴 것도 같다. 괜히 문을
열어 보았다. 낡은 주방이 보인다. 주방 식탁에 그녀가 앉아 있던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
이다. 사용한지 오래 되었는지 주방의 싱크대가 더러워 보였다. 먹을 것도 하나 없다.
다시 자자.

종석이 형이 감고 있던 이불을 빼앗아 잠을 다시 청했다. 그리고 배가 고파 도저히 계속
잠을 잘 수 없을 때까지 잤다. 깨어 보니 오늘 해는 이미 많이 기울어져 있다. 베개도
없이 목을 긁으며 종석이 형은 여전히 잠에서 깰 생각을 안한다. 옥상위의 옥탑방. 종석이
잘도 잔다. 꼬로록 꼬로록. 배 고롱이 울어대도 종석이 잘도 잔다.

"형 일어나요."
"괜찮다니까."
"뭐가 괜찮아요. 일어나서 집에 가야 할 것 아니에요."
"응?"

그가 눈을 떴다. 주위를 살피더니 목을 긁는다. 신기한 곳에라도 온 모양이다. 두리번 거린다.

"정신 차려요."
"여기가 어디야?"
"내 방이요."
"몇시냐?"
"세시 쯤 되었네요."
"날 샌거야. 밝다."
"오후 세시오."
"뭐야? 나 세시에 약속 있는데 큰일났다."
"아직 세시 될려면 십여분 남았어요."
"나 지금 바로 가야겠다."
"안 씻어요?"
"지금 씻는게 문제냐. 그녀가 뭐라 그러겠는데."
"누구요?"
"주영이 말이야."
"오늘 만나기로 했어요?"
"응. 나 갈게."

종석이 형은 허겁지겁 옷차림을 매만지더니 간다는 말만 남기고 횅하니 내 방을 떠나 버렸다.
나쁜놈. 어제 그리움이 뭐 어쩌고 저쩌고 할 때는 꼭 다시 못 볼 사람마냥 말하더니 오늘
약속이 있었어. 에라이 나쁜노마. 혹시 길거리를 걷는데 사람들이 자넬 쳐다보면 머리
모양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머리나 빗고 가지. 아무래도 오늘 주영씨에게 모진 말 들을
것도 같다. 자네 나간 모양새라면 설사 자네 부인이라도 딴사람에게 시집가고 싶겠다.

그건 그렇고 배가 고프다. 차려 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렇지만 하루만에 바로 불편함을
느끼게 될줄이야. 오늘은 밖에 나가 사먹고 내일부터는 직접 해 먹어 보기도 하자.
그녀에게 전화도 해 볼까? 왜 망설여지지 근데.

일요일은 자취 생활을 위한 설레임과 준비로 바쁘게 지나갔다. 백수면서 아직 목돈이 남아
있던 관계로 쇼핑을 했다. 베개를 아주 푹신한 걸로 하나 샀다. 작은 전기 밥솥도 사고,
토스트기도 샀다. 원두 커피 기계도 사고 전기 포트도 샀다. 수저 세트를 예쁜 것으로
하나 샀다. 신혼 부부용인가 보다. 숟가락 젓가락 남,녀 용으로 색을 맞추어 있다. 밥
그릇도 사고 국그릇도 사고 냄비도 샀다. 휴대용 가스렌지도 하나 샀지요. 도마와 칼도 샀다.
옥상에 나와 고기 구워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솥뚜껑도 샀다. 솥뚜껑 산김에 삽겹살도
한근을 샀다. 오늘 하루 옥상을 오르내린 게 수십번은 되는 듯 하다. 물건 하나 사서
정리하다 보면 또 살것이 생기고 했기 때문이다. 식용유, 간장, 된장, 김치, 쌀, 식빵,
쨈, 햄, 달걀, 라면. 등등 먹을 것 산 것을 끝으로 내 자취 생활의 준비는 끝이 났다.
새롭게 시작이다. 아자!

일요일 저녁 어두워 지는 하늘을 친구 삼아 옥상에서 나홀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어제 먹고 남았던 소주도 있었다. 정말 좋다. 소파가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낡아서 신경 쓸 필요 없는 편안함까지 주는 소파도 정말 맘에 든다. 고기까지 맛있네.

혼자서 고기 한 근을 다 구워 먹고 움직이가 불편해서 소파에 기대어 하늘을 보았다.
등따시고 배부르고 또한 편하다. 나영씨 나 오늘 기분 좋오. 그러니까 당신 생각이
나는구료. 그녀에게는 내일 연락해야 겠다.

아침에 먹을 밥을 위해 쌀을 씻었다. 힘들지 않았다. 반찬도 햄이랑 달걀 구워서 김치하고
먹으면 된다. 오늘은 피곤했다. 아직 배는 꺼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일찍
잠들 수가 있었다.

자취 생활이 무리 없이 흐르는 듯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가 왔다. 쌀로 밥해
먹는 것은 삼일을 가지 못했다. 전기 밥솥 괜히 샀다. 아침에 토스트기에서 빵을 구워
먹었다. 저녁은 학원을 마치고 음식점에서 사먹고 왔다. 간혹 라면을 끓여 먹었다.
토스트도 오래 가지 못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라면으로 대신했다. 라면도 오래가지
못했다. 어제부터 아침에는 컵라면을 끓여 먹는다. 학원 갈 무렵 배가 고프면 라면을
끓여 먹고. 저녁은 계속 밖에서 사먹고 들어오고 있다. 주방에 가스렌지와 냄비하나를
제외하고는 쓸모 없는 물건이 되어 공간만 차지하고 복지부동이다. 남아 있는 간장이랑
식용유가 아깝다. 어제 컵라면 한 박스와 커피 믹스 한 박스를 사왔다. 원두 커피 기계?
딱 두번 사용해 봤다.

오늘 아침은 아예 굶었다. 그래도 어제 저녁 사먹고 들어 온 것이 갈비탕 곱배기라 배는
별로 고픈 줄 모르겠다. 갈비탕도 단골 되면 곱배기가 가능해요. 아침은 그래도 운치가
있다. 오늘 같이 일찍 일어난 일요일 아침이면 더욱 그렇다. 커피 한잔을 들고 낡은
런닝에 추리닝만 걸치고 아직 덥지 않은 아침 태양아래 나 만의 옥상에서 낡은 소파에
앉아 먼 하늘을 쳐다 보는 것은 여전히 내 자취 생활을 탁하지 않게 해주고 있다.

오늘로 하숙집을 떠나 온지 16일이 지났다. 그 동안 학원 생활은 심한 변화가 없었다.
그녀에게 연락한다 하는 것이 미루다 보니 오늘까지 연락을 하지 못했다. 커피와 잘
어울리는 담배를 찾지 못했다. 담배 사러 가는 김에 그녀에게 연락을 해 보자.

담배를 한 보루 사고 나서 근처 공중 전화에서 하숙집으로 전화를 걸어 봤다.
결번이랜다. 뭐야 이거. 쩝. 잃어 버렸다. 나영씨를 말이다.



28편



결번이라는 말을 듣고 문득 느낀 그녀를 잃어 버렸다는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하숙집을
떠나와 지금까지 그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연락을 미루었을까.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 이렇게 급하게 집이 비워 질 줄은
몰랐다고 자책해 보지만 많은 아쉬움
이 밀려 온다. 불과 보름이 지났다. 그런데 그녀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집으로 오는 내내 그녀의 얼굴이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이리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일까. 내 자취방에 들어 와서도 계속 그녀 생각 뿐이다. 가슴 한 구석이 뻥 뚤려 어디
론가 달아난 느낌이다. 십자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따라 담배가 녹고 있다. 많은 것들이
희미해져 가고 있다. 연기처럼 말이다. 쉽게 떠올지던 그녀의 얼굴마저 잘 그려지지 않는다.
내가 묵었던 하숙방, 주인 아줌마, 하숙집 학생들, 존재했다는 것은 뚜렷이 기억되나
모습은 그려지지 않는다. 으앙, 진짜 잃어 버려 잊혀지는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다음날 학원을 가기 전에 하숙집을 찾아가 보았다. 빈 집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 마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전화국에 전화 번호 추적을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어디로 간 걸까?
분명 서울 어딘가일텐데... 서울이 우리 고향 크기만 되어도 내 도시 전체를 그녀 찾아
돌아 다녀 볼 수 있을텐데, 서울은 그러기에는 너무 크다. 신문에다 광고를 내어 볼까?
별 생각을 다해 보지만 잃어 버린 느낌이다. 내가, 아니 그녀가 조금만 젊었어도 잃어
버렸다는 느낌이 이처럼 많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혼자로 지내기에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없이 잊혀지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경험했었는가. 생각없는 시간따라
사춘기적 첫사랑 소녀의 얼굴은 온데 간데 없고, 대학 들어 가 설레였던 어떤 아가씨의
모습도 그려지지 않는다. 그녀도 그렇게 잊혀 질 것만 같다.

학원을 파하고 종석이 형을 만났었다. 뭐 그리움이니 어쩌고 하더니 요즘 주영씨랑 잘
만나나 보다. 내 얼굴 표정보다는 확연히 밝다.

"오늘은 한 잔 하러 안가냐?"
"그럴 기분 아니에요."
"그녀가 시집을 안 가려나 봐."
"누구요?"
"주영이지 누구긴."
"요즘 만나요?"
"아니."
"그때 집들이 했을 때, 약속이 있다면서 나갔잖아요."
"아, 그때는 멀리서 보고 왔지. 다행히 맘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더라."
"네?"
"내가 어찌해서 주영이가 선보는 시간하고 약속 장소를 알아 냈었잖아."
"그럼 선보는 것 미행하러 갔던 거에요?"
"응."

이건 완전 또라이 아닌가? 하지만 마음 한 편으로 측은한 미소와 함께 이 녀석
생각보다 순정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랬어요?"
"보고는 싶는데, 내 처지가 그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알거든. 멀리서 보고 왔지."

불쌍한 놈.

"형이 근처에 있던 것을 눈치 채지 못하던가요?"
"나가면서 나에게 인사하고 갔어."
하기야 그때 자네 머리 모양은 사람들 시선을 끌고도 남았겠지.
"형도 선이나 보지 그랬어요?"
"지금 내 처지가 선 볼 처지냐. 그리고 난 연애해서 사랑하는 사람한테 장가 갈거다."
"그러면 주영씨에게 좀 적극적으로 나서 보세요."
"내가 말했잖아. 주영이가 나와 같은 처지가 힘들어서 자기 꿈을 접었는데 내가
접근해서 부담스럽게 하기가 싫어."

좀 바보군. 아니 많이 바보군. 저런 놈이 아직 있었군.

"표정이 그런데로 밝네요?"
"요즘 그녀에게서 간혹 전화가 와. 날 잊지 않고 있다는 증거지. 잊지 않고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 하하."
"그러다 진짜 시집 가버리면요?"
"그러면, 음... 모르겠다. 그녀가 행복해 하면 되지 뭐. 근데 요즘 말하는 걸로 봐서
다시 학원을 다닐 것도 같아. 꿈이라는 것이 어렵다고 쉽게 포기되어 지는 것이 아니거든."
"종석씨."
"왜."
"나중에 주영씨 시집가면 내 술한잔 살게요."
"그게 무슨 말이냐."
"바보군요."

지금 내가 자네 걱정 할 때가 아니지만 하는 것 보니까 많이 걱정 된다.

"사랑은 바보처럼 하는 거야. 기교 부리면 안되지. 묵묵히 마음만 주면 되지 암."

자네는 차라리 철학관 운영하는 것이 출세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이 시점에 저런 우던한 놈이 있을 줄이야. 나중에 주영씨 딴 남자한테 시집가면 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술 한잔 사리다.

삼 일동안 밤마다 그녀 얼굴 그려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졸업하고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학교 동기들의 얼굴들도 잘 그려지는데 그녀의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잘 그려지지 않는다면 생각도 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내 마음 떠오르는 생각들로
사람을 만든다면 나영이를 열도 더 만들 수 있겠지만 그녀의 기억만 생생하게 떠
오를 뿐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오늘 창문을 들어오는 희미한 밤바람 따라 내 마음을 정리 했다. 곁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잃어 버렸다고 생각하니까 그녀가 너무나 보고 싶다. 아무래도 나는
오래전부터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맘을 품고 있었나 보다. 그랬다면 좀 더 잘해
주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도 그녀를 잃어 버린 느낌 만큼 아쉽다. 그녀는 나
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내가 왜 감정이 생겨야 하나? 그녀와 같이 살면서 이런
쪼잔한 생각을 했었나 보다. 이 쪼잔한 생각으로 내 마음을 알리지도 못한 채 사랑한
사람을 잃어 버린 나는 바보다. 잠이 안온다.

참으로 오랜만에 시한편을 적었다. 나도 따지고 보면 글 쓰는 사람이니까 시 쓴것이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유치한 시다. 종석이 형 닮아 가나 보다.
그렇지만 지금 심정으론 이 시 느낌이 좋다. 어짜피 나만 볼 신데 유치하면 어떠냐.
제목만 적어 보자. 나이 서른 쯤에는 단 하나의 이유로 많은 것들을 잊어 갈 것이다.

오늘 밤은 그리움이 주책없이 밀려 와 잠이 쉽게 들지 않을 것 같다. 방 안이 덥다.
낮동안 바로 햇빛을 받은 천정이 아직 식지 않았다. 옥상 바닥이 따뜻했다. 내가 앉은
소파보다 더 낡은 소파를 마주하고 앉았다. 좁다고 생각했던 이 옥상위의 서울 하늘이
오늘은 너무나 넓어 보인다.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달빛이 웃고 있다. 거기에
그녀가 걸려 있다.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지만 느낌이 거기에 있었다.

금요일 저녁이다. 학원을 파하고 종석이 형의 개떡 사랑 철학을 잠시 듣고 거리로 나섰다가
참으로 크게 웃었다. 그 웃는 내 얼굴 표정이 너무나 아름다웠을 것이다. 내 못 봤지만
그랬을 것이다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해가 다 기울어 어두운 저녁인데 선글라스는 왜 끼고 있냐? 내 어제 그렇게 자네 생각을
했었는데 모자쓰고 선글라스 꼈다고 못 알아 볼 것 같냐. 여긴 왜 왔을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날 분명히 본 것 같은데 왜 돌아서서 가냐. 졸라 뛰어 쫓아갔다. 그리고
반갑게 등을 쳤다.

"나영씨!"
"저, 알아 봤어요?"

잃어 버렸던 것을 찾았다.



29편


선글라스를 내려 깔고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날 쳐다 보는게 무지 귀엽다. 많이 반가와
웃었는데 그 모습이 그녀에게는 낯익지 않은 모습이었나 보다. 그녀는 나처럼 웃지를 않았다.
잊혀 지는게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 꿈만 같다.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음."
그녀가 말하기를 머뭇거린다. 상관없다.
"너무 반갑다."
"진짜에요?"
"그럼요. 잊어 버리지나 않을까 얼마나 걱정했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갈 때는 말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가 놓고서는."
"네?"
"연락처라도 남겨 놓고 갔어야지 그냥 가면 어떡해요?"
"미안해요. 경향이 없어서."
"며칠동안 경향이 없어서 전화 한 번 없었어요?"
"죄송. 한다 하는 것이 늦어 버렸어요. 내가 어디로 이사한지 궁금했지요?"
"별로."

무안하게스리... 내가 이렇게 반가운 모습 보이면 자네도 좀 반가운 척 웃어봐라.
그녀는 별로 반가운 표정은 아니다.

"여기 근처에 일이 있었나 봐요?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될 줄 알았으면 덜 걱정했을건데."
"우연으로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우연같다.
"참 어디로 이사했던 거에요?"
"내가 이사한 것은 아나 보네."
"네. 집들이 안해요?"
"안해요. 동엽씨는 어디로 이사했어요?"
"여기서 멀지 않아요. 저 자취해요. 아무래도 하숙해서는 밥 먹을 시간 맞추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요."
"자취해요?"
"네."
"제대로 해요?"
"그럼요. 내 자취방 분위기 좋아요."
"대충 상상해 보니까, 음 엉망일 것 같네요."
"진짜 분위기 괜찮은데..."
"동엽씨를 모르는 사람에게나 그렇게 말하시고 여하튼 저도 만나게 되서 반갑네요."

그게 반가운 표정이냐? 꼭 말하는 투가 가 버릴 것 같다. 내 자취방 구경 시켜 주고 싶은데...

"가시게요?"
"네, 아직 울 언니가 한국에 있어요. 일찍 들어 가봐야 돼요."
"그럼 연락처라도 하나 주시고 가세요."
"아직 전화가 없어요. 음..."
"무슨 할 말 있어요?"
"동엽씨도 연락할 만 한 거 없죠?"
"네."
"기왕이면 통신장비 하나 구비해라. 휴대폰 시대에 어떻게 전화도 없냐."

반말인거 같다? 그래도 반갑기 때문에 참았다.

"나영씨도 없잖아요."
"나는 곧 내 방에 전화가 설치될 거에요. 동엽씨랑 비교하지 마세요."
"그래도 그냥 가 버리면 언제 다시 보나? 어디로 이사 간거에요?"
"연락할 맘은 있는거에요?"
"네."
"그런데 왜 이사할때는 간단 말도 없었고 어디로 이사갔단 연락이 없었을까?"
"그때는... 잘 몰라서 그랬어요."
"뭘 몰라서? 우리 집 전화번호 잊어 버렸어요?"
"그건 접어 둡시다. 에...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인데 일요일날 시간 되면 함 만납시다."
"어디서요?"
"시간은 되세요?"
"그럭저럭."
"우리도 이런 후진 동네서 만나지 말고 강남이나 종로 쪽 극장가나 대학로나 남들
자주 가는 곳에서 만납시다."
"나는 그런 곳에 자주 가요."
"그렇습니까? 그럼 어디서 만날까요?"
"음... 우리 영화나 보러 갈까요?"

허허, 나도 여자가 먼저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을 들어 보네.

"그럽시다. 무슨 영화 볼까요?"
"요즘 무슨 영화가 인기에요?"
"모르는데요."
"누가 백수 아니랄까봐."
"극장 가면 볼 영화 없겠어요? 한시쯤에 서울 극장에서 보실래요?"
"한시쯤 서울 극장이요? 이 번 일요일 말이지요?"
"네."
"그럼 그 때 봅시다. 안녕."

그녀가 깜찍한 인사를 하고는 등을 돌렸다. 참 쉽게 돌아서 버리네. 그래도 다시
만날건데 뭐. 어디로 이사한 지는 결국 가르쳐 주지 않고 가버리는 구나. 쩝.

허허, 나는 히죽 거리며 그녀의 멀어 지는 모습을 보며 섰고, 그녀는 자주 뒤를
돌아 보며 멀어져 갔다. 돌아설때는 쉽게 돌아서더니 가면서 왜 자꾸 뒤돌아 보는
것일까? 헤헤, 기분 좋다.

하마터면 잃어 버릴 뻔한 나영이를 다시 찾았다. 뭔가 그녀와는 인연이 있나 보다.
이렇게 길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가만 그녀가 예전에 울 학원 앞을 한 번 왔던 적이
있는 것 같다. 일부러 나 찾으러 왔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말하는 표정으로 봐서는
전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어찌됐던 만났다는 것이 중요했다.
짧은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혀 놓으니까 하숙집 그녀가 대학생처럼도 보인다.

잘 가시오,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가 내 모습을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 보고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 모습을 보니 좀 늙어 보이기도 한다. 진짜 늙어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 그녀의 모습에 비해서 말이다. 헐렁한 남방에 양복바지. 헝컬어진 머리가
내려와 내 눈에 비친다. 턱을 만져 보니 까칠하다. 대충 내 모습이 짐작이 간다. 나도
좀 젊어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삼층 옥상까지 단번에 올라갔다.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자취방이 유난히
밝아 보인다. 컵라면 하나 끓여 먹고 오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 신나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물론 노래 제목은 모른다.

노래 리듬 따라 고개를 흔들다 옷을 벗었다. 좀 추한 행동이지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떠리. 사각 팬티만을 남겨 놓은 채 욕실로 들어 갔다. 욕실 문이 방안에 있는데
발가 벗고 간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낯을 씻었다. 쉐이브 크림이 없는 관계로 비누 거품을 만들어 얼굴에 묻혔다. 들리는
음악소리 따라 면도를 했다. 영화에서 보니까 분위기 있게 음악 소리에 맞추어 면도
잘만 하던데, 나는 고개 끄덕이면서 면도하다가 피봤다. 좀 따끔거리는게 아팠다.
함부로 따라 할 것이 아닌가 보다. 하지만 내 웃는 얼굴을 바꿀 수는 없었다.

기분이 좋아서 물 한 바가지 뒤집어 썼다. 어제 갈아 입었는데 씨, 앞으로 사흘은
더 입을 수 있는 빤스를 다 버렸다. 물에 젖은 빤스를 벗어 변기 옆에다 패대기쳤다.
기분이 좋아서... 저건 나중에 눈에 띄면 빨지 뭐. 아이 부끄러버라. 다 벗어 버렸네.
거울 보며 포즈 몇번 취하다가 물 또 뒤집어 쓰고 머리도
감고 나왔다.

시원하다. 깨끗한 몸에 깨끗한 속옷을 입고 밖에 나갈때 입는 패션 추리닝을 입었다.
집에서 입는 저 추리닝은 좀 빨아야 겠다. 분위기 있게 담배를 물고 옥상으로 나가
내 소파에 앉았다. 담배 연기가 밤 하늘에 퍼져 간다. 오늘 그 잠시 봤다고 그녀 얼굴이
잘 그려진다. 서울 하늘이 다시 좁아 보였다. 그녀를 다시 만나는데 걸린 시간이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흠, 성공할 수 있다. 아자! 아자! 아이씨, 조용히 하면 될 거 아녀.

토요일은 일찍 일어나서 방청소를 했다. 신선한 느낌 때문이었으리라. 오랜만에
밥을 앉혔다. 그 또한 신선한 기분 때문이었으리라. 즉석 육개장을 사서 햄조각이랑
달걀이랑 넣어 찌개도 만들었다. 그리고 청소 되어진 깨끗한 내 방에서 나만의 조찬을
즐겼다.

옥상에 나가 정오가 가까워진 태양아래서 이단 옆차기 연습도 했다. 별 짓 다했는데도
시간은 빨리 가지 않았다. 심심하다. 약속 시간은 아직 스무네시간이 남았는데 지금부터
설레인다. 하숙하면서 자주 볼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 느낌이 좋다. 오후에는 미용실을
가 보자. 빨래도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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