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 완결
하숙 완결
"아무짓도 안했는데 왜 그렇게 놀래요?"
"아무짓도 안했으니까..."
"일찍 일어 났네요?"
"예."
"몸은 좀 어때요?"
"이제 낫았나 봐요. 어지럽지도 않고, 춥지도 않거든요."
"그래도 아직은 조심해야 될거에요. 이 베개 동엽씨가 받쳐 준거에요?"
"응."
"그럼 아까 베개 받쳐 주려고 그랬던 거였어요?"
"응, 맞아요. 그거야 그거."
"맞긴 뭘 맞아요. 딴 짓 하려고 그랬죠?"
"무슨 딴 짓이요?"
"혹시 키스하려고 그랬던 것 아닌가? 아니, 한 거 아닌가?"
이 여자가 혹시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저러는게 아닌가 싶다. 깨었으면서 잠든 척
일어 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역시 좋아는 하지만 연인까지는 어렵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심히 쪽팔린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좀 더 주무세요."
"왜, 내가 잠들면 또 입맞추려고?"
이 년이 진짜 알고 있었구만. 뽀얗게 웃는 얼굴이 좀 얄밉다. 이 방에 자기하고 나
둘 뿐인 것을 알고서 저렇게 놀릴까? 이제 다섯 시 갓 넘은 새벽인데 내가 열받아,
쪽팔림에 못이겨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근데 내가 덮칠 용기나 있나. 나? 당연히 못
덮치지. 덮칠 정도의 용기가 있으면 벌써 사랑한다 얘길 했지.
"아무짓도 안했다니까 진짜."
몸이 많이 좋아 졌지만 평상시의 몸은 아니었다. 다소 어지럽다. 내가 누웠던 자리로
가 삐친 척 이불을 덮고 돌아 누웠다.
"삐쳤어요?"
"몰라요."
"알았어요. 이제 안 놀릴게. 근데 진짜 아무짓도 안했어요?"
이게 진짜 아픈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쪽팔리게끔 왜 자꾸 뭇는거야. 차라리
하고나 들켰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래 했다 쳐라."
"진짜루?"
도대체 무슨 답을 듣고 싶은거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봐라 보았다. 창쪽에서 햇살이
비스듬이 들어 와 그녀 볼에 맺힌다. 허허, 진짜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날 보며 앉아
있는 그녀에게 고개를 흔들고 물었다.
"원하는 대답 해 줄테니까, 했다고 그러면 좋겠어요? 아무짓도 안했다고 말하면 좋겠어요?"
"피, 이제 진짜 아프지 않나 보네."
이게 또 말을 먹네.
"나영씨."
"왜요."
"나도 나영씨 많이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또한 나도 많이 헛갈려요."
"헛갈릴 것도 없나 보다. 약 먹어야죠. 죽 쑤어 올게요."
"아직 이른 시간인데."
"잠도 안 오는데 일찍 일어 나야죠."
그녀는 부엌으로 나갔다. 마음이 좀 후련하다. 아픈 몸이 좋아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그녀에게 표현한 것 같아서 후련하다. 근데 반응이 저렇냐.
그녀가 무릎을 팔로 감싼채 내 죽먹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다. 내가 무슨 구경거린가.
밖은 이제 완연한 아침의 모습으로 환하다. 나중에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면 많이 허전하겠다.
좀 더 아프면 좋겠는데. 꾀병인 척 들어 누울까? 그녀가 정성스레 날 돌 봐 주었는데 빨리
완쾌해야지. 그녀가 고마울 따름이다.
약을 먹고 잠시 누워 있었다. 그녀는 이리 저리 부산하게 부엌으로 욕실로 왔다 갔다 했다.
집에 갈 준비를 하나 보다. 세수를 하고 난 후의 그녀 얼굴이 유난히 뽀얗다.
"가려구요?"
"왜 자꾸 가라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아니 집에 가려구 부산하게 움직인 것 같아서요. 누가 가라고 그랬나."
"커피 한 잔 해야죠. 원두 커피 기계 한 번 이용해 볼까나."
"커피가 물기를 많이 먹었을텐데."
"괜찮아요."
"나는 믹스가 더 맛있더라. 나는 그냥 커피 마실래."
"누가 동엽씨 끓여 준댔어요. 동엽씨는 아직 커피 먹으면 안돼요."
"그럼 나는 뭘 먹어요."
"따뜻한 물이나 마셔요."
그녀가 한 손에는 자신의 커피가 담긴 컵을 들고 호호 거리면서 나에게 다른 손에 든
그냥 맹물이 담긴 컵을 건네 주었다. 아침까지 먹고 나니 이제 거의 정상을 찾은 느낌이다.
몸을 벽에 기대인채 앉았다. 그녀는 건너 편 벽에 앉았다. 방이 크지 않아 멀리 있는
느낌은 아니다. 아침에 그녀와 함께 커피, 아니 맹물 한 잔의 여유가 너무나 좋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출근 준비 하느라 바쁘겠지. 백수만이 느낄 수 있는 여유다. 회사
다닐 때 보다 하숙하던 때가 훨씬 그리운 이유는 바로 그녀와 같이 했던 아침 때문이었을
것이다.
"맛있어요?"
"응, 아침에 원두커피를 마시는 것이 참 좋네요. 저거 쳐박아 놓지 말고 자주 사용해요."
"알았어요."
"아, 좋다. 오랜만에 느끼는 상쾌한 아침이네요."
"나두요."
"이때 일어 난 적 있기나 해요?"
야이, 거의 없구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따지지 좀 말아요."
"옛날 기억들이 떠 오르네요. 별로 옛날도 아니구나. 동엽씨가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가
육개월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래 전인 거 같아요."
"나두요."
그 사이 좀 많은 일들이 일어 났지.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가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으니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지.
"동엽씨 처음 왔던 날 기억해요?"
"그럼요. 내가 짐 나르는 데, 이것 저것 시키기만 하고 하나도 거들어 주지 않았잖아요."
"그때 말고 하숙집 구하러 왔을때요."
"그때요? 아, 그때 나영씨를 처음 보았구나. 그때는 나영씨가 말도 없이 다소곳이 방을
보여 주었잖아요. 아주 청순하고 가련해 보여서 기필코 이 하숙집에 방을 얻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나 청순하고 가련한 거 맞잖아요."
"작전이었지요. 이사하는 첫날 그 환상이 깨지더군요. 방을 얻었다구, 그러니까 이제
그물안에 들어 온 물고기다 이거지. 이삿짐 나르는 것은 하나도 안 도와주고, 옆에 와서
얼마나 쫑알 되던지. 나는 방 구하러 왔을 때 본 그 여자 동생이나 되는 줄 알았어요.
비데오도 있네. 옷장은 없어요? 이건 뭐에요? 저건 뭐에요? 거기 보단 여기 놓는게 나을텐데.
기타 등등, 에구 얼마나 말이 많던지."
"이제 한 식구라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랬지. 나도 동엽씨가 방 구하러 왔을 땐 양복 입고
깔끔한 모습이길래 무슨 재원이나 되는 줄 알았어요 근데 백수였을 줄이야. 겉 모습만
깔끔하면 뭐하냐. 이불을 깔 줄만 알고 갤 줄을 몰라요. 오디오 장식장에다 팬티를 말아
넣어 두지를 않나. 하숙생 중에서 동엽씨가 제일 안 씻었던 것 같어. 겉모습 깔끔했던
것도 나중에는 포기해 버리더군요. 처음 봤을 때는 좀 후한 점수를 주고 많이 기대를
했었는데. 내 팔자가 이러려니 했지요."
"아이, 백수 소리 하지 말라니까. 나도 작년까지는 그런데로 재원이었어요."
"짤렸잖아요. 재원이 짤리나."
"짤리기 전에 자진해서 나온 거란 말이에요."
"그거나 거거나."
"나영씨 그거 알아요?"
"뭘요?"
"여자도 남잘 성희롱하면 벌금 문다는 거."
"무슨 말이에요?"
"속옷만 입고 있는 데 문 열고 들어 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죠? 그때마다 고소했으면 나 때돈
벌었을거야 아마."
"누가 속옷만 입고 자래요? 그리고 노크 안하고 들어 간 적은 한번도 없다 뭐."
"그게 노크에요? 일방적 통보지. 그게 노크였구나."
"그게 그렇게 억울했어요? 그러면 동엽씨도 나 속옷만 입고 있을 때 내 방 들어오지 그랬어요?"
"그게 여자 입에서 나올 소리에요?"
"같이 살면서 서로 조심했어야지. 내 잘못 만은 아닌 것 같은데."
"치. 그래도 그 때문에 많이 친해 졌어요. 그지."
"맞아요."
"하기야, 나영씨가 처음 봤을 때 느낀 그런 여자였다면 친해 지기 어려웠을거야. 말없이
다소곳하기만 하면 말 붙이기가 힘들거든요."
"동엽씨가 회사일에 바쁘고, 이해 타산 적인 재원이었다면 나도 편하게 대할 수 없었을
거에요."
"그래, 하숙할 때가 그립네요."
"동엽씨가 정이 많아 좋았어요. 처음엔 잘 몰랐는데, 백수라서 실망도 했는데 자꾸 정이
갔어요."
"아이씨, 자꾸 백수라 그러지 말라니까."
"알았어요. 그래도 동엽씨가 백수였기 때문에 편했어요. 내 처지가 버림 받기 쉬운
처지잖아요. 나는 내세울게 없었어요. 동엽씨가 어찌 보면 참 높아 보였어요. 그래서
그때마다 백수라 놀린거에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이게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좀 헷갈린다.
"나영씨가 어때서요."
"나 이제 고아잖아요. 아직 발령이 날지 미지수인 백수구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물려 받은
재산이 좀 있긴 하지만 내세울만한 것은 못돼요. 이런 날 좋아 해 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네요."
"무슨 말이 그래요. 그럼 나는요? 나는 그런 나영씨가 항상 높아 보여서 내 마음도
정의 내리지 못했었는데."
"동엽씬 좋은 사람이에요. 그 나이면 포기할 수도 있는데 자신의 꿈을 쫓고 있잖아요.
그것도 부모 힘 빌리지 않고 자신이 모은 돈으로 쫓고 있는 거잖아요. 나 보다는
훨씬 낫아요."
"아니라니까요. 난 미래가 불확실해요. 요즘 여자들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 좋아하지
않아요.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누가 좋아하겠어요. 나영씬 곧 발령날 거잖아요.
자신의 앞가림은 충분히 할 것이고. 외모도 준수하고, 좋아할 남자들 줄을 섰겠다."
"훗,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모두가 자신이 초라해 보이나 보네요. 아까 동엽씨
나에게 입맞춤 하려 할때 나 깨어 있었어요. 모른채 하려다 괜히 죄 짓는 것 같아서
눈을 뜬 것이에요."
"에?"
에구 쪽팔려라. 근데 눈 뜬게 죄지, 왜 모른 척 하려 했던게 죄냐.
"약간의 감정에 의해서 한 순간 어색해지지나 않을까 걱정되더군요. 동엽씨 내가 간호해
준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 난 사랑 같은 감정에 동정심이 포함되어서 그랬던 것이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거나 어색한 느낌이 들거에요."
말은 좀 어렵군. 나보다 들고 있는 컵에다 눈 길을 주는 그녀가 그녀의 말처럼 가엾긴
하다. 동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동정심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이제는 안다.
"아닌데, 나는 내 처지 때문에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랑이란 감정을 애써 부인하곤
했었는데..."
"흠... 처지 탓 하지 말아요."
"사회 생활 해 봐서 그런지 맘데로 안되네요. 나영씨."
"응."
또 반말이야 씨.
"나 그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 말고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 안하고 단지 그 사람만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힘들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동엽씨가 좋아요. 나도 내 처지가 어떻던 상관없이 나만 좋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조금 바란다면 우리 부모님 두분 따로 제사 모시는 것은
어렵더라도 결혼 기념일 같은 날을 잡아서 제사도 지내주는 그런 남자가 날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성공하면 충분히 그래 줄 수 있는데..."
"훗, 꼭 성공하세요. 아니 꼭 성공해야 돼요. 나는 내년에는 결혼 할 생각이란 말이에요.
우리가 만으로 27, 29이지. 실제로는 스무 여덟, 서른이잖아요."
"나는 누가 뭐래도 아직 이십대에요."
"알았어요. 근데 얘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렀다 그지."
"조금 그렇네요. 결혼 얘기가 왜 나왔지?"
"자신의 처지 얘기하면서 나온 것 같다."
"그렇네. 하여튼 우린 못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래요. 고마워요."
아침 햇살이 창을 타고 넘어 온다. 내 방이 환하다. 내 아픈 몸도 오후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겠다. 그녀의 수줍게 웃는 모습이 좋다. 아무래도 저 표정을 잊지 못할 것 같다.
ㅡ39편.
금요일이다. 오늘은 술한잔 할 것이다. 음, 편찮았던 몸이 정상으로 돌아 오고 난 뒤
학원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포기하고 시집이나 갈 것이라고 보이지 않았던 주영씨를
다시 학원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냥 반가웠다. 솔직히 나오나 안 나오나 나는 상관이 없다. 하여간 주영씨 새로 보게 된
기념으로 오늘 한잔 할 것이다.
우리 그녀랑, 나는 서로 좋아 하는 사이가 맞다. 근데 그녀가 내 여자 친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녀와 데이트한 적도 몇 번 없고, 남들처럼 사랑한다
말을 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요즘들어 어, 그녀에게 장가를 가고 싶다. 말이 좀 이상한가?
그럼 다시 말해서, 나 아팠을 때 그녀와 같이 했던 시간들이 너무 좋았다. 그녀와 같이
살고 싶다.
흠, 결혼은 현실이다. 감상적이어서는 견더내기 힘든 생활이 될 것이다. 사랑이란 감정이란
퇴색되기 쉬워도 현실은 항상 자신 앞에 있다. 생활이 힘들고 짜증나면 사랑했던 사람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내 지금 생활들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짜증이 많이 날 것이다.
하지만 어제 오늘 그녀와 같이 사는 상상을 하며 히죽 히죽 웃곤했다.
오랜만에 종석이 형이랑, 주영씨와 술자리를 같이 했다. 나를 왜 불렀을까? 둘이서만
이야기 하느라 바쁘다. 내가 그네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알까. 이런게 바로 왕따
당하는 기분이구나.
주영씨가 학원을 나오게 된 것은 종석이 형 때문이라는 것을 알겠다. 돈이 어디 있어서
그녀의 학원비를 대 주었을까. 둘이서 열심히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이상한 개떡 사랑철학에 주영씨가 다소 감격을 한다. 술이나 마시자. 그녀 생각이 난다.
벽에 부딪쳤다고 꿈을 포기해 버리는 네 모습이 참 안타까웠다. 나도 작가의 꿈을 버리고
다시 직장 구해서 장가나 가버린다고 그러면 저 녀석이 학원비 대 줄까. 술이나 마시자.
그녀 생각이 난다. 그녀도 혼자 있으면 외로울텐데...
하여간 저 둘이서 주고 받는 말들 때문에 아니꼬아서 술을 제법 마셨다. 그녀 생각이 난다.
결국 본론은 너네 둘이서 좋아한다는 거 아니냐. 서론만 졸라 길었던 것 같다.
일년만 더해 보고 그래도 안될 것 같다고 생각이 들면 깨끗이 포기하고 너 갈길을 가라.
그러면 나도 깨끗이 널 잊겠다. 참말로 내 잊을 수 있는지 두고 볼겨.
나도 그래 볼까? 일년 뒤 그때 내 모양이 이대로라면 내 깨끗이 당신을 잊겠오. 그러니
그때까지 딴 놈한테 시집갈 생각 마시오. 졸라 유치하다 진짜.
"종석씨 집에 가야지."
잠시 비몽사몽 했었다. 종석이랑 주영이랑 그네 둘이서 이야기 하는 틈을 타 테이블에
기대어 잠시 졸았었다. 고개를 들었다.
"아, 이제 집에 가는 거에요?"
"응, 주영이 집에 데려다 주려면 이제 일어나야 겠다."
"아, 우리집은 여기서 가까운데."
"우리집은 여기서 좀 멀거든요. 동엽씨."
여자 목소리다. 아, 이건 주영씨가 하는 말이구나.
"오늘 같이 있어 주어서 고마웠다. 나, 상금 탄 걸로 한 턱 내는 거 오늘 한 것으로 쳐라."
"집에 가는 겁니까? 그럼 가야지요 뭐."
"술을 좀 먹은 거 같은데, 집에 혼자 갈 수 있겠어?"
데려다 주지도 않을 거면서 묻기는 왜 묻냐.
"못 가겠어요. 좀 데려다 줘요."
난처해 하는 두 년,놈을 보았다.
"주영이만 없으면 내 데려다 주겠는데, 미안하지만 혼자서 가라."
그러길래 말 함부로 뱉지 말라니까.
"잘들 가세요. 전 혼자 가겠습니다. 주영씨 다음 주에 봐요."
"네. 잘 가세요."
그래 너네 둘이 가라. 주영씨는 인사말로도 데려다 준다는 말을 안하는 구나. 섧다.
술을 좀 먹었나 보다. 괜히 용기가 생기고, 또 기분이 좋다. 나영씨가 생각이 나서
또한 설레인다. 야이씨, 텔레비젼은 끄고 자야 될 것 아닌가.
"아저씨. 아저씨!."
"예?"
뭘 그리 놀라나. 급히 일어나는 아저씨를 보았다.
"텔레비젼은 끄고 주무세요."
"아, 예."
"그럼 나는 올라 갑니다. 똑바로 하세요."
"아, 예."
"삑."
언제 우리집에 엘레베이터가 있었냐.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수위 새끼는 티비 끄고
자라고 했다고 진짜 티비만 끄고 그대로 또 자 버린다. 지금 몇시나 된겨? 이제 열두시거만
벌써 자냐. 쩝. 근데 우리 집에 수위가 있었나?
"누구세요?"
아이, 열쇠가 왜이리 안 맞는겨. 안에 누가 있네.
"그러는 댁은 누구세요?"
"네?"
"열쇠가 안 맞아서 그러는데 문 좀 열어주세요."
"동엽씨에요?"
"아, 나영씨구나. 하하, 오늘 많이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문을 조금 열고 그녀가 고개를 내 밀었다.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안녕."
"술 드신 거에요?"
"나는 먹기 싫었는데, 종석이랑 주영이랑 자꾸 먹게 만들잖아요."
"그 사람들이 누군데요?"
"있어요. 나보다 못생긴 놈하고, 나영씨보다 못생긴 년하고,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나저나 나영씬 여기 왠일이에요? 나 보고 싶어서 왔구나. 고마워요."
목이 말랐다. 그래서 눈을 떴다. 어제 내가 술을 많이 마시긴 마셨나 보다. 내가 어제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을까? 창밖으로 아침해가 떠 있다. 술을 먹어서 그런지 창밖
풍경이 참 이채롭다. 창도 졸라 큰 거 같다. 목이 마르다. 돌돌 몸을 굴렀다. 어랏! 왜
푹 꺼지는겨.
"아얏!"
이건 또 뭐야. 왜 내 밑에 사람이 있는겨.
"누구시래요?"
"지금 뭐 하는 거에요?"
"에? 물먹으려고. 근데 왜 나영씨가 여기 있는 거에요?"
"이런. 그나저나 좀 비켜 주세요. 무거워요. 설마 이상한 맘 먹고 덮친 것은 아니죠?"
모습을 보니까 좀 그렇다. 앞으로 떨어 졌으면 참 절묘했을 것 같다. 아쉽게 옆으로
구른게 다리만 덮쳤지만. 하여간 심장이 쿵쾅 쿵쾅 뛴다. 급히 뒤로 물러나 놀란 표정으로
벽에 기댔다. 방안 풍경이 낯이 익지만 분명 내 방은 아니다.
"여기가 어디에요?"
"제 오피스텔이잖아요."
"제가 여기 왜 있는데요?"
"생각 안나요?"
"당연히."
"내가 어제 얼마나 난처 했는 줄 알아요?"
"나영씨 그런 차림으로 자요?"
"이게 어때서요?"
"나는 그 긴치마 입고 자는 줄 알았지."
나이 생각을 좀 하지. 오부 리본 달린 흰색 꽃돼지 면 바지와 삐에로가 연상되는 팔없는
이상한 티가 절묘하게 우스운 잠옷이다.
"더워서 그걸 어떻게 입고 자요. 지금 그 이야기 할 때가 아니잖아요."
"내가 술 먹고 여기로 찾아 왔던 가요?"
"응."
"왜 그랬지? 헤헤, 보고 싶기는 했지만 많이 실례를 범했네요."
"알면 다행이네요."
"근데요. 제가 무슨 실수는 안했지요?"
"말을 좀 많이 했던 것을 빼놓고는..."
"나 침대에서 재우고 나영씨는 바닥에서 잔거에요?"
"으응."
"아, 미안하네. 물 좀 주세요."
그녀가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물을 떠다 주었다.
"나 시집 못가면 책임 지세요."
그거 참 듣기 좋은 말이네. 아, 시원하다. 여기로 왜 왔을까? 그 참 신기하네. 에고,
집에 가야겠다.
"나영씨. 미안하구요. 저 집에 갈랍니다."
"지금이요? 이제 여섯신데. 지금 나가다 사람들 눈에 띄이면 어쩔려구. 나 다른데 시집
못가게 만들려구 그러지?"
"에? 지금 몇신데요?"
"이제 여섯시에요. 수위는 벌써 깨어서 문을 지키고 있을텐데. 참 어제 수위가 암말 않던가요?"
"그걸 내가 어떻게 기억해요. 아침 먹여 줄래요?"
"참내. 그럼 어제 했던 말이 전부 술기운으로 했던 말이라 이거죠? 괜히 재웠네."
"내가 어제 무슨 말 했는데요?"
"아니에요. 지금 간단하게 아침 밥 먹을래요?"
"차려 주면 고맙죠. 속이 쓰리네요. 어제 내가 술먹고 찾아 왔을 때 겁나지 않던가요?"
"전혀요. 이상하게 별로, 다른 사람이라면 당장 신고를 했을텐데 같이 살아 봐서 그런지
동엽씨는 전혀 부담이 안되네요."
"욕실이 이쪽이죠? 좀 씻어도 될까요?"
"그러세요. 동엽씨, 발 좀 깨끗이 씻고 다녀요."
어, 시원타. 샤워기 틀어 놓고 소변을 했다. 좀 부끄럽다. 세수를 하고 그녀 몰래 그녀
칫솔로 이빨도 닦았다. 수건이 어디 있는겨. 벽에 걸려 있는 장식대의 문을 열어 보았다.
이것은? 같이 살면서도 처음 본 것 같다. 그녀의 브라자와 빤스. 허허, 여기는 그녀만의
욕실이구나. 예전 하숙할때랑은 틀리지 참. 예전의 복수를 해 줄까 하다가 참았다. 그
옆에 놓여 진 수건 하나를 꺼내서 닦았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그런데로 잘 생겨 보인다.
식탁에는 밥이 없었다. 그녀와 마주하며 앉았다.
"아니 이건 빵이잖습니까."
"쌀이 없더라구요."
"요즘 밥 안해 먹어요?"
"나, 요리 학원 다시 나가요. 거기서 먹고 와요."
"아침에는 빵 먹고?"
"네."
"그래도 한국 사람이 밥을 먹어야지."
"차려 주는데로 먹어요. 굶기지 않는 걸 고맙게 생각을 해야지."
빵 두조각을 우유랑 같이 먹었다. 속이 좀 느끼하지만 쓰림은 좀 가셨다. 그나저나 내가
어제 무슨 말을 많이 했을까 궁금하다. 술먹으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막 꺼내
놓는다고 하는데...
"내가 어제 무슨 말을 많이 했어요?"
"음, 왜요? 술먹고 한 말이라 본심이 아니라 그럴려구요?"
"그게 아니라, 취중 진담인데 했던 말을 물리려고 그러는게 아니라. 혹 실수를 했나
싶어서요."
"다른말은 별로 안했어요."
"혹시 내가 나영씨를 좋아한다거나, 사...사랑한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던가요?"
"했어요."
"에?"
"나 사랑한다고 말하던데요."
갑자기 얼굴이 팍 붉어져 왔다. 그 말을 했다면 수도 없이 했을거 같다. 큰일이다.
원래 내 마음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 말한 것은 아니지만 계속 떠벌렸다면 문제
될 수가 있다. 쪽팔리잖아. 근데 내가 그 말 했다는데 그녀는 참 덤덤하게 대답을 한다.
자기도 나처럼 긴가 민가 했다면서...
"아, 그건..."
"그런데로 듣기 좋던데요."
"호...혹시 제가 몇 번이나 그런말 하던가요?"
"딱 한번이요."
어랏. 생각보다 적게 말했네. 다행이다. 그녀를 보며 씩 웃어 주었다.
"음, 솔직히 내가 나영씨를 그 사...사랑하는 게 맞긴 맞죠."
"흠. 나도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어요."
그녀가 뽀얀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해 주었다. 나는 기억에 없는데...
"진짜루? 나는 들은 기억이 없는데. 한 번더 대답해 줄수는 없는지?"
"싫은데요."
"그럼 뭐."
"동엽씨 장가 가고 싶어요?"
"왜요?"
"흠, 어제 그게 설마 프로포즈는 아니겠죠?"
"에?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했다고 그게 무슨 프로포즈에요?"
"그 말은 한 번 했지만 결혼 합시다,라는 말을 잠들 때 까지 계속 했어요. 수십 번이
뭐야. 아마 백번도 넘었을거야. 내가 나중엔 하도 지쳐서 알았어요, 그랬다니까요.
결혼이 뭐 졸라서 하는 것인가?"
"안녕히 계세요."
졸라 쪽팔려서 도망치듯 오피스텔을 빠져 나왔다.
종석이 형에게 처음으로 고마움을 느끼는 바이다.
"어머니, 댁의 아드님이 뭐 잘 났어요?"
"니가 어때서."
"지금 어머니가 반대하고 그러실 처지가 아니에요. 어머니 아들은 백수라니까요."
"니가 왜 백수야."
"백수 맞아요. 그녀는 선생님이라니까요. 고등학교 선생님. 그녀의 부모님이 계셨다면 내가
퇴짜 당하고 있을거에요."
"근데 부모님 다 돌아가셨다는게 좀..."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 그사람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어요. 조금만 돌려 생각해 보면
그런말 나오지 않으실거에요."
"그래도. 영 안내킨다. 네 형은 장가갈때 속을 안 썩이더만 너는 왜 그렇냐. 그러고
보니 여자가 나이도 좀 많다."
"우리집에 은주도 시집안가고 있잖아요. 걔하고 나이가 같은데. 어머니가 은주한테
그렇게 말하실수 있겠어요?"
"그래도. 일단 아버지하고 얘기 해 보자."
"어머니!"
"왜, 내 아들아."
"나 사고 쳤단 말입니다. 빨리 장가 가야 돼요."
"뭐!"
사고는 무슨.
강사가 영 못 미더웠었는데 작가를 한 명 소개 시켜 주었어요. 같이 작업한 시나리오가
있는데 공모전에 당선이 되었지요. 예전에 종석이 형이 공모했던 것과는 차원이 틀리죠.
그녀는 올 봄에 진짜 발령이 났었어요. 내가 그랬지요. 꿈 꾸는 것에 희망이 좀 보이길래.
그녀가 첫 월급 타서 한 턱 내는 자리에서 내 말했지요.
"내가 올 겨울에는 방송국에 공채를 내 볼 생각인데요."
"그래서요?"
"나영씨가 그때까지 시집 안갔으면 좋겠어요."
"왜요?"
"내가 요즘은 그런데로 자신감이 생겼거든요."
"그거하고 나 시집 가지 말라는 말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나영씨가 올해 시집 간다면서요. 내가 공채만 통과하면...어,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시집을 안가고 있으면 나도 어..."
"무슨 말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나영씨하고 같이 살고 싶다 이거지요."
"그게 자신감 생겨서 하는 말이에요?"
"그럼요. 그러니까 딴 남자한테 시집 안가고 있으면..."
"나 동엽씨 그건 싫어요. 내가 동엽씨 말고 딴 남자 사귀는 걸로 보여요?"
"그건 아니지만."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런 모진말을 할 수가 있냐."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내가 나영씨 남편이 되고 싶다 이거지요."
"나는 올해 넘기기 싫어요."
그래서 그녀는 내일 결혼을 합니다. 가을 바람이 시원하지요.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추석때 집에 내려 가지를 못했어요. 추석때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간단하게 차례를
지냈지요. 집엔 가족들이 많지만 그녀옆에는 나뿐이더라구요. 그때 그냥 둘이서 합의봤어요.
전에부터 집에 사귀는 사람이 있다 말은 해 놓았지만 우리 어머님이 반대를 하시더라구요.
뭘 믿고 반대를 할까 참 우리 엄마 배짱이 놀랍더군요. 그래서 사고 쳤다고 말했지요.
사고는 무슨, 아직 제대로 키스한번 못해 봤는데, 그녀에게는 비밀입니다. 좀 황당했을
거에요. 부모님께 얘기 해 본다는 말만 하고 고향 내려갔다가 올라 와서는 한달안에
결혼하라는 말을 통보 했으니까요. 시월 십칠일입니다. 나는 부조금 안 낼거에요. 하여튼
부조금 안들고 식장 오는 사람들 내 두고 볼겨. 아직 내가 기반이 닦여 지지 않아 다소
불안하지만 그녀가 책임진대요. 서로 힘을 합하면 더 나은 미래가 올 수 있다 그러네요.
나보고 긍정적으로 살래요. 자신감 가지고 말이지요.
전화나 해볼까?
"나에요."
"왜요?"
"뭐해요?"
"그냥 언니랑 이야기 하고 있어요."
"결혼 축하해요."
"동엽씨도요."
"그럼 내일 봅시다."
"그럽시다."
"아, 참. 행복합시다."
"그럽시다."
"아, 그리고 또. 사랑합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진짜 내일 봅시다."
"그럽시다."
끝입니다.
"아무짓도 안했는데 왜 그렇게 놀래요?"
"아무짓도 안했으니까..."
"일찍 일어 났네요?"
"예."
"몸은 좀 어때요?"
"이제 낫았나 봐요. 어지럽지도 않고, 춥지도 않거든요."
"그래도 아직은 조심해야 될거에요. 이 베개 동엽씨가 받쳐 준거에요?"
"응."
"그럼 아까 베개 받쳐 주려고 그랬던 거였어요?"
"응, 맞아요. 그거야 그거."
"맞긴 뭘 맞아요. 딴 짓 하려고 그랬죠?"
"무슨 딴 짓이요?"
"혹시 키스하려고 그랬던 것 아닌가? 아니, 한 거 아닌가?"
이 여자가 혹시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저러는게 아닌가 싶다. 깨었으면서 잠든 척
일어 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역시 좋아는 하지만 연인까지는 어렵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심히 쪽팔린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좀 더 주무세요."
"왜, 내가 잠들면 또 입맞추려고?"
이 년이 진짜 알고 있었구만. 뽀얗게 웃는 얼굴이 좀 얄밉다. 이 방에 자기하고 나
둘 뿐인 것을 알고서 저렇게 놀릴까? 이제 다섯 시 갓 넘은 새벽인데 내가 열받아,
쪽팔림에 못이겨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근데 내가 덮칠 용기나 있나. 나? 당연히 못
덮치지. 덮칠 정도의 용기가 있으면 벌써 사랑한다 얘길 했지.
"아무짓도 안했다니까 진짜."
몸이 많이 좋아 졌지만 평상시의 몸은 아니었다. 다소 어지럽다. 내가 누웠던 자리로
가 삐친 척 이불을 덮고 돌아 누웠다.
"삐쳤어요?"
"몰라요."
"알았어요. 이제 안 놀릴게. 근데 진짜 아무짓도 안했어요?"
이게 진짜 아픈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쪽팔리게끔 왜 자꾸 뭇는거야. 차라리
하고나 들켰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래 했다 쳐라."
"진짜루?"
도대체 무슨 답을 듣고 싶은거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봐라 보았다. 창쪽에서 햇살이
비스듬이 들어 와 그녀 볼에 맺힌다. 허허, 진짜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날 보며 앉아
있는 그녀에게 고개를 흔들고 물었다.
"원하는 대답 해 줄테니까, 했다고 그러면 좋겠어요? 아무짓도 안했다고 말하면 좋겠어요?"
"피, 이제 진짜 아프지 않나 보네."
이게 또 말을 먹네.
"나영씨."
"왜요."
"나도 나영씨 많이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또한 나도 많이 헛갈려요."
"헛갈릴 것도 없나 보다. 약 먹어야죠. 죽 쑤어 올게요."
"아직 이른 시간인데."
"잠도 안 오는데 일찍 일어 나야죠."
그녀는 부엌으로 나갔다. 마음이 좀 후련하다. 아픈 몸이 좋아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그녀에게 표현한 것 같아서 후련하다. 근데 반응이 저렇냐.
그녀가 무릎을 팔로 감싼채 내 죽먹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다. 내가 무슨 구경거린가.
밖은 이제 완연한 아침의 모습으로 환하다. 나중에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면 많이 허전하겠다.
좀 더 아프면 좋겠는데. 꾀병인 척 들어 누울까? 그녀가 정성스레 날 돌 봐 주었는데 빨리
완쾌해야지. 그녀가 고마울 따름이다.
약을 먹고 잠시 누워 있었다. 그녀는 이리 저리 부산하게 부엌으로 욕실로 왔다 갔다 했다.
집에 갈 준비를 하나 보다. 세수를 하고 난 후의 그녀 얼굴이 유난히 뽀얗다.
"가려구요?"
"왜 자꾸 가라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아니 집에 가려구 부산하게 움직인 것 같아서요. 누가 가라고 그랬나."
"커피 한 잔 해야죠. 원두 커피 기계 한 번 이용해 볼까나."
"커피가 물기를 많이 먹었을텐데."
"괜찮아요."
"나는 믹스가 더 맛있더라. 나는 그냥 커피 마실래."
"누가 동엽씨 끓여 준댔어요. 동엽씨는 아직 커피 먹으면 안돼요."
"그럼 나는 뭘 먹어요."
"따뜻한 물이나 마셔요."
그녀가 한 손에는 자신의 커피가 담긴 컵을 들고 호호 거리면서 나에게 다른 손에 든
그냥 맹물이 담긴 컵을 건네 주었다. 아침까지 먹고 나니 이제 거의 정상을 찾은 느낌이다.
몸을 벽에 기대인채 앉았다. 그녀는 건너 편 벽에 앉았다. 방이 크지 않아 멀리 있는
느낌은 아니다. 아침에 그녀와 함께 커피, 아니 맹물 한 잔의 여유가 너무나 좋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출근 준비 하느라 바쁘겠지. 백수만이 느낄 수 있는 여유다. 회사
다닐 때 보다 하숙하던 때가 훨씬 그리운 이유는 바로 그녀와 같이 했던 아침 때문이었을
것이다.
"맛있어요?"
"응, 아침에 원두커피를 마시는 것이 참 좋네요. 저거 쳐박아 놓지 말고 자주 사용해요."
"알았어요."
"아, 좋다. 오랜만에 느끼는 상쾌한 아침이네요."
"나두요."
"이때 일어 난 적 있기나 해요?"
야이, 거의 없구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따지지 좀 말아요."
"옛날 기억들이 떠 오르네요. 별로 옛날도 아니구나. 동엽씨가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가
육개월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래 전인 거 같아요."
"나두요."
그 사이 좀 많은 일들이 일어 났지.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가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으니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지.
"동엽씨 처음 왔던 날 기억해요?"
"그럼요. 내가 짐 나르는 데, 이것 저것 시키기만 하고 하나도 거들어 주지 않았잖아요."
"그때 말고 하숙집 구하러 왔을때요."
"그때요? 아, 그때 나영씨를 처음 보았구나. 그때는 나영씨가 말도 없이 다소곳이 방을
보여 주었잖아요. 아주 청순하고 가련해 보여서 기필코 이 하숙집에 방을 얻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나 청순하고 가련한 거 맞잖아요."
"작전이었지요. 이사하는 첫날 그 환상이 깨지더군요. 방을 얻었다구, 그러니까 이제
그물안에 들어 온 물고기다 이거지. 이삿짐 나르는 것은 하나도 안 도와주고, 옆에 와서
얼마나 쫑알 되던지. 나는 방 구하러 왔을 때 본 그 여자 동생이나 되는 줄 알았어요.
비데오도 있네. 옷장은 없어요? 이건 뭐에요? 저건 뭐에요? 거기 보단 여기 놓는게 나을텐데.
기타 등등, 에구 얼마나 말이 많던지."
"이제 한 식구라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랬지. 나도 동엽씨가 방 구하러 왔을 땐 양복 입고
깔끔한 모습이길래 무슨 재원이나 되는 줄 알았어요 근데 백수였을 줄이야. 겉 모습만
깔끔하면 뭐하냐. 이불을 깔 줄만 알고 갤 줄을 몰라요. 오디오 장식장에다 팬티를 말아
넣어 두지를 않나. 하숙생 중에서 동엽씨가 제일 안 씻었던 것 같어. 겉모습 깔끔했던
것도 나중에는 포기해 버리더군요. 처음 봤을 때는 좀 후한 점수를 주고 많이 기대를
했었는데. 내 팔자가 이러려니 했지요."
"아이, 백수 소리 하지 말라니까. 나도 작년까지는 그런데로 재원이었어요."
"짤렸잖아요. 재원이 짤리나."
"짤리기 전에 자진해서 나온 거란 말이에요."
"그거나 거거나."
"나영씨 그거 알아요?"
"뭘요?"
"여자도 남잘 성희롱하면 벌금 문다는 거."
"무슨 말이에요?"
"속옷만 입고 있는 데 문 열고 들어 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죠? 그때마다 고소했으면 나 때돈
벌었을거야 아마."
"누가 속옷만 입고 자래요? 그리고 노크 안하고 들어 간 적은 한번도 없다 뭐."
"그게 노크에요? 일방적 통보지. 그게 노크였구나."
"그게 그렇게 억울했어요? 그러면 동엽씨도 나 속옷만 입고 있을 때 내 방 들어오지 그랬어요?"
"그게 여자 입에서 나올 소리에요?"
"같이 살면서 서로 조심했어야지. 내 잘못 만은 아닌 것 같은데."
"치. 그래도 그 때문에 많이 친해 졌어요. 그지."
"맞아요."
"하기야, 나영씨가 처음 봤을 때 느낀 그런 여자였다면 친해 지기 어려웠을거야. 말없이
다소곳하기만 하면 말 붙이기가 힘들거든요."
"동엽씨가 회사일에 바쁘고, 이해 타산 적인 재원이었다면 나도 편하게 대할 수 없었을
거에요."
"그래, 하숙할 때가 그립네요."
"동엽씨가 정이 많아 좋았어요. 처음엔 잘 몰랐는데, 백수라서 실망도 했는데 자꾸 정이
갔어요."
"아이씨, 자꾸 백수라 그러지 말라니까."
"알았어요. 그래도 동엽씨가 백수였기 때문에 편했어요. 내 처지가 버림 받기 쉬운
처지잖아요. 나는 내세울게 없었어요. 동엽씨가 어찌 보면 참 높아 보였어요. 그래서
그때마다 백수라 놀린거에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이게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좀 헷갈린다.
"나영씨가 어때서요."
"나 이제 고아잖아요. 아직 발령이 날지 미지수인 백수구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물려 받은
재산이 좀 있긴 하지만 내세울만한 것은 못돼요. 이런 날 좋아 해 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네요."
"무슨 말이 그래요. 그럼 나는요? 나는 그런 나영씨가 항상 높아 보여서 내 마음도
정의 내리지 못했었는데."
"동엽씬 좋은 사람이에요. 그 나이면 포기할 수도 있는데 자신의 꿈을 쫓고 있잖아요.
그것도 부모 힘 빌리지 않고 자신이 모은 돈으로 쫓고 있는 거잖아요. 나 보다는
훨씬 낫아요."
"아니라니까요. 난 미래가 불확실해요. 요즘 여자들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 좋아하지
않아요.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누가 좋아하겠어요. 나영씬 곧 발령날 거잖아요.
자신의 앞가림은 충분히 할 것이고. 외모도 준수하고, 좋아할 남자들 줄을 섰겠다."
"훗,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모두가 자신이 초라해 보이나 보네요. 아까 동엽씨
나에게 입맞춤 하려 할때 나 깨어 있었어요. 모른채 하려다 괜히 죄 짓는 것 같아서
눈을 뜬 것이에요."
"에?"
에구 쪽팔려라. 근데 눈 뜬게 죄지, 왜 모른 척 하려 했던게 죄냐.
"약간의 감정에 의해서 한 순간 어색해지지나 않을까 걱정되더군요. 동엽씨 내가 간호해
준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 난 사랑 같은 감정에 동정심이 포함되어서 그랬던 것이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거나 어색한 느낌이 들거에요."
말은 좀 어렵군. 나보다 들고 있는 컵에다 눈 길을 주는 그녀가 그녀의 말처럼 가엾긴
하다. 동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동정심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이제는 안다.
"아닌데, 나는 내 처지 때문에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랑이란 감정을 애써 부인하곤
했었는데..."
"흠... 처지 탓 하지 말아요."
"사회 생활 해 봐서 그런지 맘데로 안되네요. 나영씨."
"응."
또 반말이야 씨.
"나 그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 말고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 안하고 단지 그 사람만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힘들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동엽씨가 좋아요. 나도 내 처지가 어떻던 상관없이 나만 좋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조금 바란다면 우리 부모님 두분 따로 제사 모시는 것은
어렵더라도 결혼 기념일 같은 날을 잡아서 제사도 지내주는 그런 남자가 날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성공하면 충분히 그래 줄 수 있는데..."
"훗, 꼭 성공하세요. 아니 꼭 성공해야 돼요. 나는 내년에는 결혼 할 생각이란 말이에요.
우리가 만으로 27, 29이지. 실제로는 스무 여덟, 서른이잖아요."
"나는 누가 뭐래도 아직 이십대에요."
"알았어요. 근데 얘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렀다 그지."
"조금 그렇네요. 결혼 얘기가 왜 나왔지?"
"자신의 처지 얘기하면서 나온 것 같다."
"그렇네. 하여튼 우린 못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래요. 고마워요."
아침 햇살이 창을 타고 넘어 온다. 내 방이 환하다. 내 아픈 몸도 오후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겠다. 그녀의 수줍게 웃는 모습이 좋다. 아무래도 저 표정을 잊지 못할 것 같다.
ㅡ39편.
금요일이다. 오늘은 술한잔 할 것이다. 음, 편찮았던 몸이 정상으로 돌아 오고 난 뒤
학원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포기하고 시집이나 갈 것이라고 보이지 않았던 주영씨를
다시 학원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냥 반가웠다. 솔직히 나오나 안 나오나 나는 상관이 없다. 하여간 주영씨 새로 보게 된
기념으로 오늘 한잔 할 것이다.
우리 그녀랑, 나는 서로 좋아 하는 사이가 맞다. 근데 그녀가 내 여자 친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녀와 데이트한 적도 몇 번 없고, 남들처럼 사랑한다
말을 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요즘들어 어, 그녀에게 장가를 가고 싶다. 말이 좀 이상한가?
그럼 다시 말해서, 나 아팠을 때 그녀와 같이 했던 시간들이 너무 좋았다. 그녀와 같이
살고 싶다.
흠, 결혼은 현실이다. 감상적이어서는 견더내기 힘든 생활이 될 것이다. 사랑이란 감정이란
퇴색되기 쉬워도 현실은 항상 자신 앞에 있다. 생활이 힘들고 짜증나면 사랑했던 사람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내 지금 생활들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짜증이 많이 날 것이다.
하지만 어제 오늘 그녀와 같이 사는 상상을 하며 히죽 히죽 웃곤했다.
오랜만에 종석이 형이랑, 주영씨와 술자리를 같이 했다. 나를 왜 불렀을까? 둘이서만
이야기 하느라 바쁘다. 내가 그네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알까. 이런게 바로 왕따
당하는 기분이구나.
주영씨가 학원을 나오게 된 것은 종석이 형 때문이라는 것을 알겠다. 돈이 어디 있어서
그녀의 학원비를 대 주었을까. 둘이서 열심히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이상한 개떡 사랑철학에 주영씨가 다소 감격을 한다. 술이나 마시자. 그녀 생각이 난다.
벽에 부딪쳤다고 꿈을 포기해 버리는 네 모습이 참 안타까웠다. 나도 작가의 꿈을 버리고
다시 직장 구해서 장가나 가버린다고 그러면 저 녀석이 학원비 대 줄까. 술이나 마시자.
그녀 생각이 난다. 그녀도 혼자 있으면 외로울텐데...
하여간 저 둘이서 주고 받는 말들 때문에 아니꼬아서 술을 제법 마셨다. 그녀 생각이 난다.
결국 본론은 너네 둘이서 좋아한다는 거 아니냐. 서론만 졸라 길었던 것 같다.
일년만 더해 보고 그래도 안될 것 같다고 생각이 들면 깨끗이 포기하고 너 갈길을 가라.
그러면 나도 깨끗이 널 잊겠다. 참말로 내 잊을 수 있는지 두고 볼겨.
나도 그래 볼까? 일년 뒤 그때 내 모양이 이대로라면 내 깨끗이 당신을 잊겠오. 그러니
그때까지 딴 놈한테 시집갈 생각 마시오. 졸라 유치하다 진짜.
"종석씨 집에 가야지."
잠시 비몽사몽 했었다. 종석이랑 주영이랑 그네 둘이서 이야기 하는 틈을 타 테이블에
기대어 잠시 졸았었다. 고개를 들었다.
"아, 이제 집에 가는 거에요?"
"응, 주영이 집에 데려다 주려면 이제 일어나야 겠다."
"아, 우리집은 여기서 가까운데."
"우리집은 여기서 좀 멀거든요. 동엽씨."
여자 목소리다. 아, 이건 주영씨가 하는 말이구나.
"오늘 같이 있어 주어서 고마웠다. 나, 상금 탄 걸로 한 턱 내는 거 오늘 한 것으로 쳐라."
"집에 가는 겁니까? 그럼 가야지요 뭐."
"술을 좀 먹은 거 같은데, 집에 혼자 갈 수 있겠어?"
데려다 주지도 않을 거면서 묻기는 왜 묻냐.
"못 가겠어요. 좀 데려다 줘요."
난처해 하는 두 년,놈을 보았다.
"주영이만 없으면 내 데려다 주겠는데, 미안하지만 혼자서 가라."
그러길래 말 함부로 뱉지 말라니까.
"잘들 가세요. 전 혼자 가겠습니다. 주영씨 다음 주에 봐요."
"네. 잘 가세요."
그래 너네 둘이 가라. 주영씨는 인사말로도 데려다 준다는 말을 안하는 구나. 섧다.
술을 좀 먹었나 보다. 괜히 용기가 생기고, 또 기분이 좋다. 나영씨가 생각이 나서
또한 설레인다. 야이씨, 텔레비젼은 끄고 자야 될 것 아닌가.
"아저씨. 아저씨!."
"예?"
뭘 그리 놀라나. 급히 일어나는 아저씨를 보았다.
"텔레비젼은 끄고 주무세요."
"아, 예."
"그럼 나는 올라 갑니다. 똑바로 하세요."
"아, 예."
"삑."
언제 우리집에 엘레베이터가 있었냐.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수위 새끼는 티비 끄고
자라고 했다고 진짜 티비만 끄고 그대로 또 자 버린다. 지금 몇시나 된겨? 이제 열두시거만
벌써 자냐. 쩝. 근데 우리 집에 수위가 있었나?
"누구세요?"
아이, 열쇠가 왜이리 안 맞는겨. 안에 누가 있네.
"그러는 댁은 누구세요?"
"네?"
"열쇠가 안 맞아서 그러는데 문 좀 열어주세요."
"동엽씨에요?"
"아, 나영씨구나. 하하, 오늘 많이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문을 조금 열고 그녀가 고개를 내 밀었다.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안녕."
"술 드신 거에요?"
"나는 먹기 싫었는데, 종석이랑 주영이랑 자꾸 먹게 만들잖아요."
"그 사람들이 누군데요?"
"있어요. 나보다 못생긴 놈하고, 나영씨보다 못생긴 년하고,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나저나 나영씬 여기 왠일이에요? 나 보고 싶어서 왔구나. 고마워요."
목이 말랐다. 그래서 눈을 떴다. 어제 내가 술을 많이 마시긴 마셨나 보다. 내가 어제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을까? 창밖으로 아침해가 떠 있다. 술을 먹어서 그런지 창밖
풍경이 참 이채롭다. 창도 졸라 큰 거 같다. 목이 마르다. 돌돌 몸을 굴렀다. 어랏! 왜
푹 꺼지는겨.
"아얏!"
이건 또 뭐야. 왜 내 밑에 사람이 있는겨.
"누구시래요?"
"지금 뭐 하는 거에요?"
"에? 물먹으려고. 근데 왜 나영씨가 여기 있는 거에요?"
"이런. 그나저나 좀 비켜 주세요. 무거워요. 설마 이상한 맘 먹고 덮친 것은 아니죠?"
모습을 보니까 좀 그렇다. 앞으로 떨어 졌으면 참 절묘했을 것 같다. 아쉽게 옆으로
구른게 다리만 덮쳤지만. 하여간 심장이 쿵쾅 쿵쾅 뛴다. 급히 뒤로 물러나 놀란 표정으로
벽에 기댔다. 방안 풍경이 낯이 익지만 분명 내 방은 아니다.
"여기가 어디에요?"
"제 오피스텔이잖아요."
"제가 여기 왜 있는데요?"
"생각 안나요?"
"당연히."
"내가 어제 얼마나 난처 했는 줄 알아요?"
"나영씨 그런 차림으로 자요?"
"이게 어때서요?"
"나는 그 긴치마 입고 자는 줄 알았지."
나이 생각을 좀 하지. 오부 리본 달린 흰색 꽃돼지 면 바지와 삐에로가 연상되는 팔없는
이상한 티가 절묘하게 우스운 잠옷이다.
"더워서 그걸 어떻게 입고 자요. 지금 그 이야기 할 때가 아니잖아요."
"내가 술 먹고 여기로 찾아 왔던 가요?"
"응."
"왜 그랬지? 헤헤, 보고 싶기는 했지만 많이 실례를 범했네요."
"알면 다행이네요."
"근데요. 제가 무슨 실수는 안했지요?"
"말을 좀 많이 했던 것을 빼놓고는..."
"나 침대에서 재우고 나영씨는 바닥에서 잔거에요?"
"으응."
"아, 미안하네. 물 좀 주세요."
그녀가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물을 떠다 주었다.
"나 시집 못가면 책임 지세요."
그거 참 듣기 좋은 말이네. 아, 시원하다. 여기로 왜 왔을까? 그 참 신기하네. 에고,
집에 가야겠다.
"나영씨. 미안하구요. 저 집에 갈랍니다."
"지금이요? 이제 여섯신데. 지금 나가다 사람들 눈에 띄이면 어쩔려구. 나 다른데 시집
못가게 만들려구 그러지?"
"에? 지금 몇신데요?"
"이제 여섯시에요. 수위는 벌써 깨어서 문을 지키고 있을텐데. 참 어제 수위가 암말 않던가요?"
"그걸 내가 어떻게 기억해요. 아침 먹여 줄래요?"
"참내. 그럼 어제 했던 말이 전부 술기운으로 했던 말이라 이거죠? 괜히 재웠네."
"내가 어제 무슨 말 했는데요?"
"아니에요. 지금 간단하게 아침 밥 먹을래요?"
"차려 주면 고맙죠. 속이 쓰리네요. 어제 내가 술먹고 찾아 왔을 때 겁나지 않던가요?"
"전혀요. 이상하게 별로, 다른 사람이라면 당장 신고를 했을텐데 같이 살아 봐서 그런지
동엽씨는 전혀 부담이 안되네요."
"욕실이 이쪽이죠? 좀 씻어도 될까요?"
"그러세요. 동엽씨, 발 좀 깨끗이 씻고 다녀요."
어, 시원타. 샤워기 틀어 놓고 소변을 했다. 좀 부끄럽다. 세수를 하고 그녀 몰래 그녀
칫솔로 이빨도 닦았다. 수건이 어디 있는겨. 벽에 걸려 있는 장식대의 문을 열어 보았다.
이것은? 같이 살면서도 처음 본 것 같다. 그녀의 브라자와 빤스. 허허, 여기는 그녀만의
욕실이구나. 예전 하숙할때랑은 틀리지 참. 예전의 복수를 해 줄까 하다가 참았다. 그
옆에 놓여 진 수건 하나를 꺼내서 닦았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그런데로 잘 생겨 보인다.
식탁에는 밥이 없었다. 그녀와 마주하며 앉았다.
"아니 이건 빵이잖습니까."
"쌀이 없더라구요."
"요즘 밥 안해 먹어요?"
"나, 요리 학원 다시 나가요. 거기서 먹고 와요."
"아침에는 빵 먹고?"
"네."
"그래도 한국 사람이 밥을 먹어야지."
"차려 주는데로 먹어요. 굶기지 않는 걸 고맙게 생각을 해야지."
빵 두조각을 우유랑 같이 먹었다. 속이 좀 느끼하지만 쓰림은 좀 가셨다. 그나저나 내가
어제 무슨 말을 많이 했을까 궁금하다. 술먹으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막 꺼내
놓는다고 하는데...
"내가 어제 무슨 말을 많이 했어요?"
"음, 왜요? 술먹고 한 말이라 본심이 아니라 그럴려구요?"
"그게 아니라, 취중 진담인데 했던 말을 물리려고 그러는게 아니라. 혹 실수를 했나
싶어서요."
"다른말은 별로 안했어요."
"혹시 내가 나영씨를 좋아한다거나, 사...사랑한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던가요?"
"했어요."
"에?"
"나 사랑한다고 말하던데요."
갑자기 얼굴이 팍 붉어져 왔다. 그 말을 했다면 수도 없이 했을거 같다. 큰일이다.
원래 내 마음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 말한 것은 아니지만 계속 떠벌렸다면 문제
될 수가 있다. 쪽팔리잖아. 근데 내가 그 말 했다는데 그녀는 참 덤덤하게 대답을 한다.
자기도 나처럼 긴가 민가 했다면서...
"아, 그건..."
"그런데로 듣기 좋던데요."
"호...혹시 제가 몇 번이나 그런말 하던가요?"
"딱 한번이요."
어랏. 생각보다 적게 말했네. 다행이다. 그녀를 보며 씩 웃어 주었다.
"음, 솔직히 내가 나영씨를 그 사...사랑하는 게 맞긴 맞죠."
"흠. 나도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어요."
그녀가 뽀얀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해 주었다. 나는 기억에 없는데...
"진짜루? 나는 들은 기억이 없는데. 한 번더 대답해 줄수는 없는지?"
"싫은데요."
"그럼 뭐."
"동엽씨 장가 가고 싶어요?"
"왜요?"
"흠, 어제 그게 설마 프로포즈는 아니겠죠?"
"에?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했다고 그게 무슨 프로포즈에요?"
"그 말은 한 번 했지만 결혼 합시다,라는 말을 잠들 때 까지 계속 했어요. 수십 번이
뭐야. 아마 백번도 넘었을거야. 내가 나중엔 하도 지쳐서 알았어요, 그랬다니까요.
결혼이 뭐 졸라서 하는 것인가?"
"안녕히 계세요."
졸라 쪽팔려서 도망치듯 오피스텔을 빠져 나왔다.
종석이 형에게 처음으로 고마움을 느끼는 바이다.
"어머니, 댁의 아드님이 뭐 잘 났어요?"
"니가 어때서."
"지금 어머니가 반대하고 그러실 처지가 아니에요. 어머니 아들은 백수라니까요."
"니가 왜 백수야."
"백수 맞아요. 그녀는 선생님이라니까요. 고등학교 선생님. 그녀의 부모님이 계셨다면 내가
퇴짜 당하고 있을거에요."
"근데 부모님 다 돌아가셨다는게 좀..."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 그사람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어요. 조금만 돌려 생각해 보면
그런말 나오지 않으실거에요."
"그래도. 영 안내킨다. 네 형은 장가갈때 속을 안 썩이더만 너는 왜 그렇냐. 그러고
보니 여자가 나이도 좀 많다."
"우리집에 은주도 시집안가고 있잖아요. 걔하고 나이가 같은데. 어머니가 은주한테
그렇게 말하실수 있겠어요?"
"그래도. 일단 아버지하고 얘기 해 보자."
"어머니!"
"왜, 내 아들아."
"나 사고 쳤단 말입니다. 빨리 장가 가야 돼요."
"뭐!"
사고는 무슨.
강사가 영 못 미더웠었는데 작가를 한 명 소개 시켜 주었어요. 같이 작업한 시나리오가
있는데 공모전에 당선이 되었지요. 예전에 종석이 형이 공모했던 것과는 차원이 틀리죠.
그녀는 올 봄에 진짜 발령이 났었어요. 내가 그랬지요. 꿈 꾸는 것에 희망이 좀 보이길래.
그녀가 첫 월급 타서 한 턱 내는 자리에서 내 말했지요.
"내가 올 겨울에는 방송국에 공채를 내 볼 생각인데요."
"그래서요?"
"나영씨가 그때까지 시집 안갔으면 좋겠어요."
"왜요?"
"내가 요즘은 그런데로 자신감이 생겼거든요."
"그거하고 나 시집 가지 말라는 말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나영씨가 올해 시집 간다면서요. 내가 공채만 통과하면...어,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시집을 안가고 있으면 나도 어..."
"무슨 말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나영씨하고 같이 살고 싶다 이거지요."
"그게 자신감 생겨서 하는 말이에요?"
"그럼요. 그러니까 딴 남자한테 시집 안가고 있으면..."
"나 동엽씨 그건 싫어요. 내가 동엽씨 말고 딴 남자 사귀는 걸로 보여요?"
"그건 아니지만."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런 모진말을 할 수가 있냐."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내가 나영씨 남편이 되고 싶다 이거지요."
"나는 올해 넘기기 싫어요."
그래서 그녀는 내일 결혼을 합니다. 가을 바람이 시원하지요.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추석때 집에 내려 가지를 못했어요. 추석때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간단하게 차례를
지냈지요. 집엔 가족들이 많지만 그녀옆에는 나뿐이더라구요. 그때 그냥 둘이서 합의봤어요.
전에부터 집에 사귀는 사람이 있다 말은 해 놓았지만 우리 어머님이 반대를 하시더라구요.
뭘 믿고 반대를 할까 참 우리 엄마 배짱이 놀랍더군요. 그래서 사고 쳤다고 말했지요.
사고는 무슨, 아직 제대로 키스한번 못해 봤는데, 그녀에게는 비밀입니다. 좀 황당했을
거에요. 부모님께 얘기 해 본다는 말만 하고 고향 내려갔다가 올라 와서는 한달안에
결혼하라는 말을 통보 했으니까요. 시월 십칠일입니다. 나는 부조금 안 낼거에요. 하여튼
부조금 안들고 식장 오는 사람들 내 두고 볼겨. 아직 내가 기반이 닦여 지지 않아 다소
불안하지만 그녀가 책임진대요. 서로 힘을 합하면 더 나은 미래가 올 수 있다 그러네요.
나보고 긍정적으로 살래요. 자신감 가지고 말이지요.
전화나 해볼까?
"나에요."
"왜요?"
"뭐해요?"
"그냥 언니랑 이야기 하고 있어요."
"결혼 축하해요."
"동엽씨도요."
"그럼 내일 봅시다."
"그럽시다."
"아, 참. 행복합시다."
"그럽시다."
"아, 그리고 또. 사랑합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진짜 내일 봅시다."
"그럽시다."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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