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게임 4부 (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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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4부 애욕의 트라이앵글 ⓛ
김희숙은 지하도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박 대리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
았다. 이윽고 박 대리는 보이지 않고 수많은 행인들이 쌍쌍으로 혹은 삼삼오오로
즐겁게 대화를 하며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만 보였다.
더러운 자식!
그녀는 박 대리 대신 낯모르는 행인들 등뒤에 한마디 내뱉고 나서 돌아섰다. 갑
자기 서울 바닥에 홀로 서 있는 듯한 외로움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왔다.
공중 전화가 보였다. 이십대 초반의 사내가 수화기를 붙잡고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쳤다. 갈 곳이 없었다. 그냥 집으로 들어가면 밤이 새도록
울어 버릴 것 같은 참담한 기분이 가슴을 메우고 있었다. 공중 전화 앞을 몇 발
자국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아냐, 내가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뒤돌아섰다. 한참 동안 공중 전화를 쳐다보았다.
고스톱을 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항상 여섯시까지만 치자고 약속하지. 그러나
일어설 때는 약속이나 한 듯 빨라야 열한시야.
박 대리의 말이 생각났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시간에 은행에 전화를 걸면
현 과장은 퇴근했어야 했다.
그래, 내가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녀는 전화를 걸어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자기 위안이었다. 한
편으로는 이 년이 넘게 뜨겁게 사랑을 불태웠던 박 대리에 대한 애증 때문이기도
했다.
공중 전화 부스에는 조금 전에 전화를 걸던 사내가 여전히 깔깔거리며 통화를 하
고 있었다.
「그래, 걘 내가 먹었다니까. 못 믿겠으면 걔 사타구니 안쪽에 콩알만한 점이 있
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라고. 그럼, 맞아. 걘 그걸 만져 주면 되게 좋아한다니까,
깔깔깔.」
김희숙은 사내의 통화 내용을 엿들으면서 뒤돌아섰다. 내가 왜 이런 전화를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자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비참했다. 하지만 확인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현 과장이 없다는 말을 들었으
면 하는 바람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건 절실함이기도 했다. 만약 이 시간에 현
과장이 숙직실에 있다면 그건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이자, 배신이었다.
사내가 침을 찍 내갈기며 사라지자 그녀는 공중 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번
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가볍게 떨렸다. 유리창 밖으로 빗물이 떨어졌다. 저녁나절
부터 비가 올 조짐이더니 기어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자 기분이 축축
해지면서 박 대리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깊어졌다.
현 과장님은 자리에 없을 거야. 지금쯤 방배동 어디에선가 찬호 씨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녀는 비슷한 말을 수없이 되뇌이며 조용히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네. 한성은행 명동 지점 안상록입니다.」
지불 계장 안상록이었다. 아직 마감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서히 절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현 과장은 오늘 시재 당번이었다. 안상록이 퇴근을 하지 않
았다면, 금고문이 닫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고 현 과장이 남아 있다는 말과 연
결된다.
아냐, 금고 키를 다른 책임자한테 맡기고 나갈 수도 있잖아.
그녀는 마른침을 힘겹게 삼키고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현 과장을 찾았다.
「댁입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이럴 수가!
김희숙은 허탈감과 분노로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과장님 저 안에 계신데 바꿔 드려요?」
안상록의 음성이 계속 흘러나왔지만 김희숙은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수화기를 내려놓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아니에요, 혹시 안 계장님 아니세요?」
김희숙의 눈이 갑자기 번쩍거렸다. 그 눈빛이 하늘까지 통했는지 빗줄기가 굵어
지기 시작했다. 은빛 철사 토막 같은 빗줄기가 유리벽을 착착 휘갈기다 방울이
되어 아래로 떨어졌다.
「네. 안상록입니다만, 누구세요?」
「제 목소리 모르겠어요?」
김희숙은 가슴이 벌벌 떨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 대상으로 평소 자기에게 연정 어린 눈빛을 자주 보냈던 안상록이 적당했다.
「아, 미스 김! 김희숙 씨 맞죠?」
안상록의 음성이 갑자기 줄어들었다. 옆에 누군가 있는 모양이었다.
「네, 저예요」
「근데, 이 시간에 웬일입니까? 현 과장님을 찾는 이유는 또 뭐고요?」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필요가 없네요. 마감 끝났어요?」
김희숙은 빗줄기를 바라보며 건조한 음성을 수화기 속에 집어 넣었다.
「벌써 끝냈습니다. 숙직실에서 소주 한잔 하다가 화장실 다녀 오는 길입니다.
현 과장님도 숙직실에 계시고.」
「현 과장님하고 통화 안 해도 된다고 그랬잖아요. 안 계장님, 저 술 한잔 사주
실래요?」
「네?」
안상록의 놀라는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시간 없으세요?」
「시간이 없다니요! 철철 넘치는 게 시간인데. 당장 미친놈처럼 달려가죠. 거기
어딥니까?」
「음, 신촌 로터리에서 이대 쪽으로 가는…….」
김희숙은 말을 끊고 공중 전화 부스 밖을 내다보며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건너
편 이층에 버팔로란 카페가 보였다.
「로터리 어딥니까?」
안상록의 들뜬 음성이 빠르게 들려왔다.
「로터리에서 이대 가는 쪽으로 오른편 건물 이층에 버팔로란 카페가 보이네요.
거기서 기다릴게요.」
「알았습니다. 삼십 분 후면 미스 김 앞에 앉아 있을 겁니다. 그럼, 이따 봐요」
김희숙은 전화가 끊어졌어도 계속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뚜뚜 소리가 한참 동안
들려 왔지만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에 넋을 잃고 멍하니 내갈기는 빗줄기
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공중 전화 부스를 툭툭 쳤다. 고개를 돌리니 한 쌍의 데이트족이 우산을
쓰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남자가 어서 전화를 끊으라는 표정으로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김희숙은 밖으로 나왔다. 빗줄기가 뜨듯했다. 낮 동안 뜨겁게 달아 있던 아스팔
트가 식으면서 뿜어내는 수증기 때문이었다. 비를 맞으며 횡단 보도를 건넜다.
카페 버팔로가 있는 건물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
다. 어두운 계단 입구에서 손수건으로 대강 머리카락의 빗물을 훔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카페는 이중문으로 되어 있었다. 덧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공중 전화가 보였다.
그녀는 멈칫하다가 서둘러 카드를 집어 넣고 은행 전화 번호를 눌렀다. 아무래
도 안상록을 불러낸 것은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호음이 떨어지고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안상록의 음성이 아니었다. 그는 벌써 출발한 모양이었
다. 생각해 보니 안상록에게 전화를 건 지도 벌써 십 분 정도 경과한 뒤였다.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실내의 벽에는 커다란 마차 바퀴와 모조품인 듯한 맨체스터 소총이 붙어 있었고,
들소 머리 박제, 카우보이 모자 등이 적당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실내에는 모두
남녀가 쌍쌍이 앉아서 고개를 맞대거나 어깨를 마주하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걸로 한 잔 주세요.」
김희숙은 혼자 테이블에 앉아 있기가 민망해 스탠드 앞에 앉자마자 버팔로라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이 칵테일은 여자분이 들기에는 독할 텐데요. 원액 위스키입니다. 우리 가게의
상징이기도 하지요.」
비에 젖은 김희숙을 보고 종업원이 말했다.
「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
「하하하! 술이 꽤 센가 보군요. 하긴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엔 버팔로 한잔 마
시면 기분이 그만이지요.」
김희숙은 종업원이 칵테일을 만드는 동안 박 대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괜찮은 남
자였다. 오수미란 여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이름만 듣지 않았다면, 아
니 그녀로부터 오늘 저녁에 호출만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사랑을 나누고 있을
괜찮은 남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먼 타인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자, 다됐습니다. 천천히 음미하시며 드시죠. 스트레이트로 마시면 속에 불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종업원이 칵테일을 스탠드 위에 올려놓았다.
「고마워요.」
김희숙은 잔을 들어 입 안에 부어 버렸다. 냄새는 향긋한데 술이 식도로 넘어가
는 동안은 짜릿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어!」
「한 잔 더 주세요.」
김희숙은 놀라는 종업원의 얼굴을 보지 않고,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을
참으며 술잔을 탁하고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괜찮으세요?」
종업원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끄떡없어요. 한 잔 더 마시면 딱 좋을 것 같은데요.」
위장이 불붙은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러자니
눈물이 핑 돌았다. 박 대리에 대한 연민의 정이 화끈거리는 열기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혼자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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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4부 애욕의 트라이앵글 ②
종업원은 버팔로를 스트레이트로 마시고도 괜찮겠느냐는 표정이었다.
「조금 있으면 남자 친구가 올 거예요. 걱정 마시고 한 잔 더 주세요.」
「아, 그렇습니까?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 보죠?」
「아니에요. 아저씨 말처럼 이런 날 버팔로가 최고잖아요, 안 그래요?」
김희숙은 독한 술 기운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개 같은 자식!
박 대리 생각을 안 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생각이 났다. 좋은 의미로서가 아니었
다. 오늘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한 것을 보면, 그 언젠가 현 과장하고 의정부
에서 외박을 했다는 말도 오늘처럼 거짓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
자 저절로 욕이 나왔던 것이다.
가라지, 꺼져 버리라지. 내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며불며 할 줄 알았나? 개
같은 자식, 감히 날 속여!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박 대리를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나오려 했다. 종
업원이 칵테일잔을 내려놓는 게 흐릿하게 보였다.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아서 이번 것은 좀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알았어요.」
김희숙은 그 잔도 스트레이트로 마셔 버렸다. 이번에는 식도가 타는 듯한 통증
이 느껴지지 않았다. 알코올 섞은 한 잔의 시원한 음료를 마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또!」
종업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만한 남자라도 두 잔을 연거푸 스트레이트로 마
시면 나가떨어질 만큼 독한 술이었기 때문이다.
「한, 한 잔 더 주세요.」
김희숙은 두 번째 칵테일잔을 들었을 때 이미 종업원의 얼굴이 흔들려 보였었
다. 하지만 의식은 말짱했다. 말을 약간 더듬고 있다는 것까지 느낄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굉장하시군요.」
종업원은 남자 친구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비 맞은
몰골로 그 독한 버팔로를 두 잔이나 스트레이트로 마신 이 여자 손님의 남자 친
구가 안 온다면 더 이상 버팔로를 만들어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미스 김!」
김희숙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안상록이었다. 안상록은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어! 여긴 웬일이세요?」
김희숙은 안상록에게 전화를 했었다는 것을 깜박 잊었다. 그러나 곧 자기가 전
화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후후 웃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안상록이 종업원에게 물었다.
「손님이 버팔로를 두 잔이나 스트레이트로 마셨습니다.」
「버팔로라뇨?」
「우리 집에서 제일 독한 칵테일입니다. 남자들도 보통 스트레이트로 한 잔만 마
셔도 핑 도는 술입니다.」
「그래요.」
안상록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우선 알코올에 흠뻑 젖어 있는 김희숙이 문제였다.
「아, 앉으세요. 오늘 제, 제가 수, 술 한잔 사, 사드릴게요. 후후, 정, 정말이에요.」
김희숙은 안상록의 얼굴도 흐릿하게 보였다. 아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자기가
말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 시원한 얼음물 한 잔 주세요.」
안상록이 김희숙 옆에 앉으며 종업원에게 말했다.
「미지근한 설탕물이 좋을 겁니다.」
「그럼, 그걸로 주세요. 나도 버팔론가 덕팔인가 하는 술을 한 잔 주시고.」
안상록은 숙직실에서 고스톱을 치면서 소주 몇 잔을 마셔서 알딸딸한 기분이었
는데, 고주망태가 되어 있는 김희숙을 보자 왠지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술을 청했다.
「두 분이 오늘 약속이라도 하셨습니까?」
종업원이 칵테일을 만들면서 물었다.
「약속이라뇨?」
「버팔로 축제를 열기로 말입니다.」
종업원이 웃으며 농담을 했다.
「아닙니다. 얼마나 독한 술이기에 미스 김이 이렇게 취했나 확인을 해보려고 합
니다.」
「어머! 저, 저 안 취했어요. 여, 여기 한 잔 더 주세요.」
김희숙은 안상록의 음성이 아련하게 먼 곳에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도 술을 주문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여기 있습니다, 손님.」
종업원이 안상록에게 눈을 깜박거리며 설탕물이 담긴 칵테일잔을 내밀었다.
「이, 이쪽에도 하, 한 잔 주세요.」
「알겠습니다.」
종업원은 안상록에게 버팔로를 진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 우리 거, 건배해요. 지, 지랄 맞은 세, 세상을 위해.」
김희숙이 설탕물이 든 잔을 들어 안상록에게 내밀었다.
「좋습니다.」
안상록은 김희숙과 건배를 하고,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스트레이트로 마셔 버렸다.
「와! 후, 이거 굉장히 독하군. 위장이 타는 것 같네.」
「하하. 이분은 그 술을 자그마치 두 잔이나 마셨습니다.」
종업원이 거보라는 듯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 분명히 사고군요.」
안상록은 술값을 계산하고 김희숙을 부축했다.
「수, 술 사준다고 했잖아요.」
김희숙은 안상록이 부축하는 것을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나 기운이 없었다. 거
절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힘없이 안상록에게 끌려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차 갑시다. 이차 가자고요.」
실연당했나 보군. 그렇지 않고서야 이거 원.
안상록은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김희숙의 허리를 붙잡고 일
층 입구에서 망설였다. 일단 카페에서 나오긴 했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비만
안 온다면 김희숙을 집에까지 데려다 줄 수 있지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택시를 잡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은행이 아닌 밖에
서 처음 만난 처지에 여관으로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 저 안 취했어요.」
바람이 불 때마다 우산 속으로 비가 들이닥쳐 몸을 휘갈기는 바람에 김희숙은
약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안상록이 자기 허리를 껴안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팔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만약 팔을 뿌리치면
다리에 힘이 없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집이 어딥니까?」
안상록은 김희숙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온 것 같아 큰소리로 물었다.
「이, 이차 간다고 했잖아요. 저 오, 오늘 술 마시고 싶다고요.」
김희숙은 술에 취해 눈을 깜박거리며 계속 이차를 주장했다.
「미스 김이 혼자 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일단 집으로 갑시다. 거기서 이
차를 하든지 말든지.」
「뭐, 뭐라고요? 처, 처녀가 호, 혼자 사는 방에 같이 가자고요? 이, 이 팔 놔요!」
김희숙은 안상록의 팔에서 빠져 나오려고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그건 생각일
뿐 그럴수록 안상록의 팔이 죄어들었다.
「좋습니다. 이차 가죠.」
버팔로의 위력은 대단했다. 안상록도 주량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셌지
만, 숙직실에서 마신 소주 탓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취기가 밀려왔다. 그렇
다고 김희숙처럼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빠른 속도로 몰려오는 취
기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술의 위력에 감탄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성을 지킨다는 그 자체가 무리였다. 그는 단순하게 부축하려는 의도에서 잡고 있
는 김희숙의 팔로부터 취해 오는 속도와 같은 속도로 새로운 감촉이 심장으로
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김희숙의 젖가슴은 그가 보아 왔던 대로 글래머였다. 안상록은 어느 순간 자기
가 김희숙의 왼쪽 젖가슴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느낀 순간 취기가
확 덮쳤다. 어디론가 가야 했다.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무너지는 이성은
어차피 이 빗속에 그녀를 끌고 집으로 갈 수는 없잖아, 하고 소리 지르며 저벅
저벅 뛰어오고 있었다.
문제는 여관이 건너편 언덕에 있다는 점이다. 횡단 보도를 건너 골목으로 한참
들어가야 여관숲이 있을 뿐, 근처에는 여관이란 간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좋아, 비를 맞으면 그뿐.
알코올이 지나치면 만용을 몰고 온다. 한성은행, 그것도 이 나라 금융 일번지
명동 지점의 지불 계장 안상록은 비를 맞으며 김희숙을 데리고 여관에 가기로 했다.
「자, 갑시다. 우리들의 낙원을 위하여!」
「나, 낙원으로 이차를 가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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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4부 애욕의 트라이앵글 ③
김희숙은 빗줄기가 부드럽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샤워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
어 조금은 취기가 가셨다. 비를 맞고, 그것도 스물다섯의 처녀가 처음 만나는 직
장 동료의 품에 안겨 많은 행인들이 보는 앞에서 신호등 앞에 서 있다는 것이 아
무렇지도 않았다.
「길을 건너면 따뜻한 낙원이 우릴 기다릴 겁니다.」
취하기는 안상록도 마찬가지였다. 틀린 게 있다면 신호등의 붉은빛과 푸른빛을
구별할 수 있고, 붉은 등이 켜지기 전에 빨리 건너야 한다는 것쯤은 쉽게 판단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성이 아주 마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여기에 들어가야 하나요?」
김희숙은 안상록이 끌고 들어가는 곳이 여관이라는 것을 알았다. 스물세 해를
간직한 처녀성을 바친 곳, 박 대리와 시간이 날 때마다 이용하는 바로 그 여관
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순순히 따라갔다. 비록 자기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 안상
록이긴 하지만, 같은 동료로서 이렇게 술에 취했는데 범하기야 하겠느냐는 편한
생각 때문이었다.
「옷 세탁 해 드릴까요?」
여관 조바가 방을 안내하고 나서 돈을 받아 쥐며 물었다.
「금방 세탁할 수 있나?」
「헤헤헤. 세탁은 안 되고 말려서 다림질은 해줄 수 있어요. 물론 값은 세탁비와
같고요.」
십대로 보이는 조바가 실실 웃으며 안상록을 쳐다보았다.
「알았어. 조금 있다 부르지.」
안상록은 조바가 밖으로 나가자 일단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와 보
니 김희숙은 침대에 벌렁 누워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옷이 온몸에 착 달라붙어
서 얇은 브래지어를 했는지 젖꼭지까지 도톰하게 드러나 보였다.
「미스 김! 미스 김!」
안상록은 김희숙을 흔들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얼굴을 툭툭
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인연이 없나 보군.
안상록은 잠든 여자와 섹스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창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아니고, 당장 내일 출근하면 마주쳐야 할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옷은 세탁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젠장,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는 격이군.
잠든 여자의 옷을 벗기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마치 옷벗기를 싫어하는 몸집 큰
아이의 옷을 벗기는 것처럼 힘이 들었다. 간신히 옷을 벗긴 다음에 인터폰을 눌
렀다.
「맥주 두 병하고 옷 좀 세탁, 아니 말려 줘.」
담배 한 대를 다 피워 갈 무렵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한 시간이면 되겠지?」
안상록은 입구에서 맥주를 받고 김희숙의 옷을 건네주었다.
「헤헤헤, 삼십 분이면 충분합니다.」
안상록은 조바가 아래층 계단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 방문을 걸었다.
팬티와 거들을 입고 편안하게 누워 있는 김희숙의 육체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
웠다. 무엇보다 굴곡이 확실했고, 형광빛에 투여되는 살결도 희고 아름다웠다.
그림의 떡이지.
안상록은 김희숙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텔레비전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요즈음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여자 배우가 남자 주인공과 함께 갈대밭에서 포옹을 하
고 있는 장면이 불쑥 튀어나왔다.
젠장! 어떤 놈은 고주망태가 된 여자 보초나 서고 있고, 어떤 놈은…….
맥주를 따서 컵에 따랐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쭉 들이켜고 나니 취기가 금방
가라앉는 듯했다. 웃음이 나오면서 왠지 쓸쓸했다. 채널을 돌렸다. 그곳에도 비
슷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시 채널을 돌렸다. 자막이 있는 외국 영화가 펼
쳐졌다. 아래층 내실의 비디오와 연결된 채널 같았다.
내일 아침에는 어쩐담!
안상록의 눈은 비디오를 보고 있었지만 머리 속에는 김희숙이 헤엄을 치고 다녔
다. 아침에 눈을 뜨고 부끄러운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할 김희숙을 생각하니, 옷
만 말려 놓고 이 자리에서 사라지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도대체 어떤 놈한테 챈 거야?
심적으로 어려울 때 자기를 불러 준 것은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기는 했지만, 그
렇게 요조숙녀인 체하는 김희숙이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취한 것은 남자 관계
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현 과장?
안상록은 김희숙이 먼저 현 과장을 찾았던 일이 갑자기 생각나자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지점 내에서 호인으로 소문난 현 과장이었다. 또 행내 결혼을 한 부인을 끔찍
이 위한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가, 미스인
김희숙과 불륜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니지, 남녀 관계엔 정도가 없는 법이잖아. 이렇게 생각이 반전되자, 퇴근 후에
여행원들과 자주 술자리를 같이하는 현 과장의 또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술을 마
시고 잠깐 이성을 잃고 관계를 맺은 게 시작이 되어 계속 연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직원들에게 유난히 인기가 좋은 그였기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그럭저럭 맥주 한 병을 다 비워 버렸다. 남은 맥주를 따서 빈 잔
에 채웠을 때 노크 소리가 났다. 옷을 말려 왔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어섰다. 순
간 다리가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소주에, 그 독한 버팔로에, 맥주까지 마셔
섞였으니 당연했다.
「이만 원입니다」
「뭐야! 여자 옷 한 벌 말리는 데 이만 원이 다 뭐야, 임마!」
안상록은 취한 김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쉬, 다른 손님들 생각도 해주셔야지요. 그리고 이 빗속을 달려온 제 생각도
해주시고, 안 그렇습니까? 헤헤.」
「그래, 그래. 잘먹고 잘살아라, 임마.」
안상록은 이만 원을 주고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옷을 옷걸이에 걸어 놓은
후 잠자고 있는 김희숙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떤 놈 때문에 그렇게 마음고생이 심하냐?
침대에 걸터앉아 김희숙의 축축한 머리카락을 가만히 만져 보았다. 그 다음에 얼
굴을 쓰다듬었다. 지불계 창구에 앉아 슬쩍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새침한 표
정으로 시선을 돌리던 때가 생각났다.
쯧쯧, 인간만사가 이렇게 허무하다는 것을 겨우 스물다섯에 터득하면 어떻게 하냐!
김희숙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던 안상록의 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가슴으로 옮겨졌다.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거들은 체온으로 어느
정도 마른 것 같았는데 브래지어는 축축했다. 젖가슴이 놀랄 정도로 뜨거웠다.
젖꼭지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
김희숙이 갑자기 뜨거운 한숨을 토해 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안상록의 얼굴까
지 그 열기가 전달될 정도였다.
「미스 김!」
안상록은 김희숙이 잠을 자고 있는 체하는 줄 알고 얼른 손을 빼고 다급하게 불
렀다. 그러나 김희숙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얼굴을 톡톡 쳐보았다. 그녀는 잠들
어 있었다. 잠꼬대를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집
어 넣었다. 취기가 점점 밀려왔다.
딱딱하던 젖꼭지가 약간 풀어지면서 땀이 배어 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안
상록은 김희숙 옆에 고꾸라지듯 엎어지고 말았다. 그 지독한 버팔로가 맥주 한
병을 추가시켜서야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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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4부 애욕의 트라이앵글 ④
똑같은 시간.
신촌의 한 여관에서 김희숙이 충동적으로 불러낸 안상록과 똑같은 버팔로를 마
시고 취해서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든 그 시간에, 박 대리는 호텔 킬리만자로 215
호실에서 오수미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들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서로
를 갈구하며 진하게 사랑을 나누었다.
「이제 말을 해봐. 김 사장이 언제 날 보자고 하는지?」
박 대리가 오수미의 젖꼭지를 비비틀면서 물었다.
「아파요. 좀 부드럽게 만질 수 없어요?」
오수미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말했지만, 박 대리의 손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알았어. 그러니 어서 말을 해줘. 이렇게 애를 태워 놓고 말을 하면, 이자가 더
많아지나?」
오수미는 이 밤에 헐레벌떡 달려온 박 대리에게 킬리만자로에 가서 말을 해주겠
다며 김사장의 말을 전해 주지 않았었다.
「제가 일산에서 오는 길에 말했었죠?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오수미는 박 대리의 남성을 쥐고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벌써 이 주일이나 흘렀다고.」
박 대리는 다시 남성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호호, 이놈하고 박 대리님하고는 뜻이 같지 않군요.」
오수미가 갑자기 간드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기랄, 할 수 없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두고 보라지. 난 이놈의 뜻을 따
를 테니까.」
박 대리는 젖가슴에 있던 손을 스르르 내려 오수미의 꽃잎을 매만졌다. 물 고인
논처럼 질퍽했다. 이 여자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박 대리는 오수미의 끊임없
이 솟아나는 정욕에 기가 죽을 지경이었다.
「전요, 긴장을 하면 늘 성적인 흥분을 느껴요.」
오수미가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 오는 남자하고 있을 땐 항상 긴장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군.」
박 대리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그러다 장흥에서도 그녀는 긴장하고 있었고
꽃잎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던 게 기억났다.
「그런 말을 하면 제가 화를 낼지도 몰라요. 난 아무 남자에게나 안기는 그런 여
자가 아니라고요.」
오수미가 눈을 하얗게 뜨고 쏘아붙였다.
「그럼, 왜 이렇게 긴장을 하지.」
「박 대리님하고 있으면 괜히 긴장이 돼요. 어쩜, 박 대리님을 사랑하는지도 모
르겠어요. 그래서 긴장이 되는지도 모르죠. 호호호.」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어요. 사랑하는지도 모른다고 말했을 뿐이에요. 그
건 그렇고, 제 말 잘 들으세요. 모레가 무슨 요일이죠?」
「그건 갑자기 왜 물어? 가만있자,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목요일이 되겠군.」
「우선 절 안아 주세요.」
박 대리는 순진한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오수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아니, 그러지 말고 위로 올라오세요.」
박 대리는 이번에도 착하게 오수미의 말을 들었다. 자연스럽게 남성이 오수미의
축축한 꽃잎 문 앞을 엿보는 꼴이 되어 버렸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남성이 슬
며시 기지개를 펴는가 했더니 꽃잎 속으로 냉큼 들어가 버렸다.
「헉! 거기까지는 말 안 했잖아요. 하지만 너무 좋아요. 제 말 잘 들으세요. 모
레 목요일 두시쯤에 십억이 예치될 거예요.」
「겨우 십억?」
박 대리는 남성이 오수미의 꽃잎 속에 들어가 있는 것엔 아랑곳없이 실망한 얼굴
로 반문했다.
「왜요? 그럼, 그것을 취소할까요?」
오수미는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히프를 살살 돌려 박 대리의 남성이
꽃잎 속에서 빠져 나가지 못 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말은 아니고, 천억을 말하다 갑자기 십억으로 다운되니까 놀라지 않을 수
없잖아.」
박 대리가 하체에 힘을 주며 말했다.
「천억이 적은 돈이 아니란 것은 저보다 박 대리님이 잘 알고 계시잖아요.」
오수미는 말을 끝내자마자 허리를 활처럼 휘며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맞아, 잠깐 내가 눈이 멀었어. 그래, 맞다고. 천억이란 천문학적 숫자지.」
박 대리는 세상을 거저 얻은 듯한 희열 속에 온몸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밑에
있는 오수미는 눈을 거슴츠레 뜨고 싫어, 싫어,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댔다.
「그만둘까?」
박 대리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아, 아니에요. 좋아요.」
「미스 오가 아무리 앞일에 대해서 함구를 하라고 했지만, 이 말만은 하고 넘어
가야겠어. 사장이 갑자기 우리 은행을 선택한 이유는 뭐야?」
「그, 그건 그날 말해 줄게요.」
「좋아. 그럼, 그날 김 사장이 우리 은행으로 직접 방문하는 건가?」
「아니에요. 대리인이 갈 거예요.」
「대리인이 누구지? 그것도 그날 알아야 할 숙제인가?」
「네, 제발 말 좀 시키지 말아요. 조금 있다 말해도 되잖아요.」
오수미는 박 대리에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가쁜 숨을 헐떡이다가 갑자기 축
늘어졌다. 수차례나 오르가슴에 도달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담배 좀 주세요.」
오수미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박 대리에게 말했다. 박 대리는 담배에 불을 붙여
서 오수미 입에 물려 주었다. 그리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문득 김
희숙의 얼굴이 떠올랐다. 김희숙과의 섹스 후에도 이렇게 땀을 닦아 주곤 했기
때문이다.
비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쳤다. 밤새도록 비를 뿌리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벽별이 보일 정도로 맑았다. 비가 왔었다는 증거로 공해가 씻긴 도시는
깨끗했고, 멀리 있는 북한산이 선명하고 푸르게 보였다. 김희숙은 머리가 깨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눈을 뜨고 나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옆자리에 안상록이 코
를 골며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나!
순간 그녀는 머리 통증이 말갛게 가시는 것을 느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가 이
번에는 까무라칠 듯이 놀랐다. 란제리 차림으로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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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4부 애욕의 트라이앵글 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제 저녁에 버팔로란 카페에서 칵테일 한 잔
을 마신 것 외에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옷부터 입는 게 급했다. 빠르게 사방을 휘둘러보니 옷은 옷걸이에 깨끗하게 걸려
있었다.안상록이 잠에서 깰까 봐 소리나지 않게 침대서 빠져 나와 옷을 입었다.
어?
옷을 입고 나서야 다림질이 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옷은 누가 다림질했고, 엊저녁에 안 계장과 무슨 짓을 한 거야. 얼른 팬티 속을
만져 보았다. 섹스를 했던 흔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장담을 할 수는 없었다. 세
상에 팬티 입고 섹스를 하는 여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 하느님!
김희숙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엊저
녁에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으며, 왜 반나체의 몸으로 안상록과 같이 잠을 잤
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가느다란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안상록이 넥타
이를 풀어 헤친 채 와이셔츠와 바지를 입고 잠을 자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내가 전화를 했었지. 하지만 술은 나 혼자 마셨잖아.
냉정을 되찾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혼곤한 잠속에 빠져 있는 안상록의 얼굴을 쳐
다보았다. 머리는 비를 맞았는지 제멋대로 헝클어져 까치집을 지어 놓은 것 같
았다.
맞아! 어제 저녁에 비가 왔었지. 비를 맞고 카페에 갔었어. 그리고 술을 마셨어.
하지만 그때는 안 계장이 없었잖아. 분명히 나 혼자 마셨어. 그렇다면 내가 취했
을 때 안 계장이 왔단 말인가? 그렇구나, 내가 버팔로란 카페로 오라고 했었지.
그래서 거기로 왔구나. 그건 그렇다치고 왜 내가 옷을 벗고 안 계장하고 잠을
잤지. 왜? 왜?
김희숙은 기억의 실마리가 풀어질 듯하다가 스프링이 달린 듯 도로 실타래 속으
로 엉켜 버리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슬며시 여관을 빠져 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당장 은행에서 마주칠 안 계장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명백
한 결과를 듣지 않고 몰래 빠져 나갔다가 은행에서 어떤 말을 들을지 몰랐다.
설령 내가 취해서 정신을 잃고 이 사람하고 그 짓을 했더라도 지금 알아야 된다.
은행에 가면 그이가 있지 않은가.
김희숙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추리가 박 대리로 연결되자 어젯밤처럼 화가 치미
는 대신 쓸쓸했다.
찬호 씨는 그 여자와 밤을 보냈을까?
김희숙은 어젯밤처럼 박 대리에게 분노를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했다. 어제
는 순간적인 감정에 휘말려 분노하고, 배신감에 떨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냉정하
게 생각해 보니, 그때에는 말해 줄 수 없는 그 어떤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어! 일어났군요.」
김희숙이 어제 저녁과 또다른 감정 속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 안상록이 부스스
눈을 뜨고 반갑게 말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김희숙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부끄러웠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자의든 타의든 그와 섹스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만약에 그와 섹스를 했다면, 그건 생각조차 하기 싫은 치명적인 실
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운명이 바뀔지도 몰랐다.
「하하하, 기억이 전혀 안 나십니까?」
안상록은 침대에서 내려와 물병부터 찾았다. 컵에 따를 것도 없이 병째로 꿀꺽꿀
꺽 마신 후에 입을 열었다.
「정말 기억이 안 난단 말입니까?」
「부끄럽지만, 부인할 수 없군요. 이 상황에서는…….」
김희숙의 목소리는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안상록이 자고 있었을 때는 몰랐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와 섹스를 했든 안 했든, 일단은 자신의 반나체를 훔쳐보았
을 것이란 점이다.
「좋아요. 버팔로를 두 잔씩이나 마셨으니까 필름이 끊어질 만도 하죠. 그럼 일
절부터 말해 드리죠. 우선 은행으로 전화를 한 것은 기억이 나죠?」
「네, 기억이 나요. 하지만 버팔로를 두 잔씩이나?」
김희숙은 한 잔을 마신 것은 기억이 나지만 두 번째 잔은 기억이 없었다.
「거기 종업원 말로는 두 잔을 마셨다고 하더군요. 또 내가 마셔 본 경험에 비
추어 볼 때 두 잔을 마셨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아요.」
「그랬었군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나요?」
김희숙은 가슴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았다.
「제가 버팔로에 도착했을 땐 미스 김은 이미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덕
분에 저도 버팔로란 그 독한 놈을 스트레이트로 마셨고, 비를 철철 맞으며 여기
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김희숙은 그 다음 말은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오해하지 말아요. 저 양복을 보면 알겠지만, 소나기를 맞고 여기까지 오다 보
니 옷이 우의가 아닌 이상 멀쩡했겠습니까? 해서 실례가 되는 줄 알지만 허락을
구하지 않고 옷을 벗겨서 여관 조바에게 부탁을 해서 지금 입고 있는 것처럼 다
림질을 해온 것입니다. 그리고 난 맥주를 두 병 시켜서 한 병을 마신 다음에 나
도 모르게 잠이 들었습니다. 이상입니다. 지난밤에있었던 일 중에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하세요.」
안상록은 후줄근하게 늘어진 양복 상위를 손짓하며 또박또박 설명했다.
「죄송해요, 추한 꼴을 보여서.」
김희숙은 안상록의 말이 진실로 들렸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추하긴요. 전 그처럼 아름다운 여체를 처음 보았습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일단 옷은 말려야지, 옷 주인은 고주망태이지.」
「난, 몰라요!」
김희숙은 얼른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금방 빨개지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것보다 우선 머리부터 감으셔야겠습니다. 그 머리에다 꽃만 꽂으면 영락없이
약간 돈 여자처럼 보이겠는데요?」
「어머, 정말이에요?」
김희숙은 거울을 쳐다보았다. 안상록의 까치집 또한 만만치 않게 머리가 엉망이
었다.
「그럼, 잠깐 실례하겠어요. 하지만 참고로 안 계장님도 거울 좀 보세요.」
「이런, 하하하.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었군요.」
김희숙은 목욕탕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웃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안상록
에 대한 고마움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서 여자의 마음은 흔들리는 갈대라고
했던가. 그녀는 자기의 정조를 지켜준, 더구나 무방비상태로 누워 있는 반나체의
자기를 지켜 준 것에 그치지 않고, 비에 젖은 옷을 다림질까지 해준 안상록의
세심한 인품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감동은 자연스럽게 믿음으로 이어졌다.
▶욕망의 게임◀ 제4부 애욕의 트라이앵글 ⓛ
김희숙은 지하도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박 대리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
았다. 이윽고 박 대리는 보이지 않고 수많은 행인들이 쌍쌍으로 혹은 삼삼오오로
즐겁게 대화를 하며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만 보였다.
더러운 자식!
그녀는 박 대리 대신 낯모르는 행인들 등뒤에 한마디 내뱉고 나서 돌아섰다. 갑
자기 서울 바닥에 홀로 서 있는 듯한 외로움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왔다.
공중 전화가 보였다. 이십대 초반의 사내가 수화기를 붙잡고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쳤다. 갈 곳이 없었다. 그냥 집으로 들어가면 밤이 새도록
울어 버릴 것 같은 참담한 기분이 가슴을 메우고 있었다. 공중 전화 앞을 몇 발
자국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아냐, 내가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뒤돌아섰다. 한참 동안 공중 전화를 쳐다보았다.
고스톱을 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항상 여섯시까지만 치자고 약속하지. 그러나
일어설 때는 약속이나 한 듯 빨라야 열한시야.
박 대리의 말이 생각났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시간에 은행에 전화를 걸면
현 과장은 퇴근했어야 했다.
그래, 내가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녀는 전화를 걸어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자기 위안이었다. 한
편으로는 이 년이 넘게 뜨겁게 사랑을 불태웠던 박 대리에 대한 애증 때문이기도
했다.
공중 전화 부스에는 조금 전에 전화를 걸던 사내가 여전히 깔깔거리며 통화를 하
고 있었다.
「그래, 걘 내가 먹었다니까. 못 믿겠으면 걔 사타구니 안쪽에 콩알만한 점이 있
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라고. 그럼, 맞아. 걘 그걸 만져 주면 되게 좋아한다니까,
깔깔깔.」
김희숙은 사내의 통화 내용을 엿들으면서 뒤돌아섰다. 내가 왜 이런 전화를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자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비참했다. 하지만 확인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현 과장이 없다는 말을 들었으
면 하는 바람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건 절실함이기도 했다. 만약 이 시간에 현
과장이 숙직실에 있다면 그건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이자, 배신이었다.
사내가 침을 찍 내갈기며 사라지자 그녀는 공중 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번
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가볍게 떨렸다. 유리창 밖으로 빗물이 떨어졌다. 저녁나절
부터 비가 올 조짐이더니 기어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자 기분이 축축
해지면서 박 대리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깊어졌다.
현 과장님은 자리에 없을 거야. 지금쯤 방배동 어디에선가 찬호 씨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녀는 비슷한 말을 수없이 되뇌이며 조용히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네. 한성은행 명동 지점 안상록입니다.」
지불 계장 안상록이었다. 아직 마감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서히 절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현 과장은 오늘 시재 당번이었다. 안상록이 퇴근을 하지 않
았다면, 금고문이 닫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고 현 과장이 남아 있다는 말과 연
결된다.
아냐, 금고 키를 다른 책임자한테 맡기고 나갈 수도 있잖아.
그녀는 마른침을 힘겹게 삼키고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현 과장을 찾았다.
「댁입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이럴 수가!
김희숙은 허탈감과 분노로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과장님 저 안에 계신데 바꿔 드려요?」
안상록의 음성이 계속 흘러나왔지만 김희숙은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수화기를 내려놓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아니에요, 혹시 안 계장님 아니세요?」
김희숙의 눈이 갑자기 번쩍거렸다. 그 눈빛이 하늘까지 통했는지 빗줄기가 굵어
지기 시작했다. 은빛 철사 토막 같은 빗줄기가 유리벽을 착착 휘갈기다 방울이
되어 아래로 떨어졌다.
「네. 안상록입니다만, 누구세요?」
「제 목소리 모르겠어요?」
김희숙은 가슴이 벌벌 떨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 대상으로 평소 자기에게 연정 어린 눈빛을 자주 보냈던 안상록이 적당했다.
「아, 미스 김! 김희숙 씨 맞죠?」
안상록의 음성이 갑자기 줄어들었다. 옆에 누군가 있는 모양이었다.
「네, 저예요」
「근데, 이 시간에 웬일입니까? 현 과장님을 찾는 이유는 또 뭐고요?」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필요가 없네요. 마감 끝났어요?」
김희숙은 빗줄기를 바라보며 건조한 음성을 수화기 속에 집어 넣었다.
「벌써 끝냈습니다. 숙직실에서 소주 한잔 하다가 화장실 다녀 오는 길입니다.
현 과장님도 숙직실에 계시고.」
「현 과장님하고 통화 안 해도 된다고 그랬잖아요. 안 계장님, 저 술 한잔 사주
실래요?」
「네?」
안상록의 놀라는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시간 없으세요?」
「시간이 없다니요! 철철 넘치는 게 시간인데. 당장 미친놈처럼 달려가죠. 거기
어딥니까?」
「음, 신촌 로터리에서 이대 쪽으로 가는…….」
김희숙은 말을 끊고 공중 전화 부스 밖을 내다보며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건너
편 이층에 버팔로란 카페가 보였다.
「로터리 어딥니까?」
안상록의 들뜬 음성이 빠르게 들려왔다.
「로터리에서 이대 가는 쪽으로 오른편 건물 이층에 버팔로란 카페가 보이네요.
거기서 기다릴게요.」
「알았습니다. 삼십 분 후면 미스 김 앞에 앉아 있을 겁니다. 그럼, 이따 봐요」
김희숙은 전화가 끊어졌어도 계속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뚜뚜 소리가 한참 동안
들려 왔지만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에 넋을 잃고 멍하니 내갈기는 빗줄기
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공중 전화 부스를 툭툭 쳤다. 고개를 돌리니 한 쌍의 데이트족이 우산을
쓰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남자가 어서 전화를 끊으라는 표정으로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김희숙은 밖으로 나왔다. 빗줄기가 뜨듯했다. 낮 동안 뜨겁게 달아 있던 아스팔
트가 식으면서 뿜어내는 수증기 때문이었다. 비를 맞으며 횡단 보도를 건넜다.
카페 버팔로가 있는 건물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
다. 어두운 계단 입구에서 손수건으로 대강 머리카락의 빗물을 훔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카페는 이중문으로 되어 있었다. 덧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공중 전화가 보였다.
그녀는 멈칫하다가 서둘러 카드를 집어 넣고 은행 전화 번호를 눌렀다. 아무래
도 안상록을 불러낸 것은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호음이 떨어지고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안상록의 음성이 아니었다. 그는 벌써 출발한 모양이었
다. 생각해 보니 안상록에게 전화를 건 지도 벌써 십 분 정도 경과한 뒤였다.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실내의 벽에는 커다란 마차 바퀴와 모조품인 듯한 맨체스터 소총이 붙어 있었고,
들소 머리 박제, 카우보이 모자 등이 적당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실내에는 모두
남녀가 쌍쌍이 앉아서 고개를 맞대거나 어깨를 마주하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걸로 한 잔 주세요.」
김희숙은 혼자 테이블에 앉아 있기가 민망해 스탠드 앞에 앉자마자 버팔로라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이 칵테일은 여자분이 들기에는 독할 텐데요. 원액 위스키입니다. 우리 가게의
상징이기도 하지요.」
비에 젖은 김희숙을 보고 종업원이 말했다.
「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
「하하하! 술이 꽤 센가 보군요. 하긴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엔 버팔로 한잔 마
시면 기분이 그만이지요.」
김희숙은 종업원이 칵테일을 만드는 동안 박 대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괜찮은 남
자였다. 오수미란 여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이름만 듣지 않았다면, 아
니 그녀로부터 오늘 저녁에 호출만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사랑을 나누고 있을
괜찮은 남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먼 타인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자, 다됐습니다. 천천히 음미하시며 드시죠. 스트레이트로 마시면 속에 불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종업원이 칵테일을 스탠드 위에 올려놓았다.
「고마워요.」
김희숙은 잔을 들어 입 안에 부어 버렸다. 냄새는 향긋한데 술이 식도로 넘어가
는 동안은 짜릿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어!」
「한 잔 더 주세요.」
김희숙은 놀라는 종업원의 얼굴을 보지 않고,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을
참으며 술잔을 탁하고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괜찮으세요?」
종업원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끄떡없어요. 한 잔 더 마시면 딱 좋을 것 같은데요.」
위장이 불붙은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러자니
눈물이 핑 돌았다. 박 대리에 대한 연민의 정이 화끈거리는 열기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혼자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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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4부 애욕의 트라이앵글 ②
종업원은 버팔로를 스트레이트로 마시고도 괜찮겠느냐는 표정이었다.
「조금 있으면 남자 친구가 올 거예요. 걱정 마시고 한 잔 더 주세요.」
「아, 그렇습니까?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 보죠?」
「아니에요. 아저씨 말처럼 이런 날 버팔로가 최고잖아요, 안 그래요?」
김희숙은 독한 술 기운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개 같은 자식!
박 대리 생각을 안 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생각이 났다. 좋은 의미로서가 아니었
다. 오늘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한 것을 보면, 그 언젠가 현 과장하고 의정부
에서 외박을 했다는 말도 오늘처럼 거짓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
자 저절로 욕이 나왔던 것이다.
가라지, 꺼져 버리라지. 내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며불며 할 줄 알았나? 개
같은 자식, 감히 날 속여!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박 대리를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나오려 했다. 종
업원이 칵테일잔을 내려놓는 게 흐릿하게 보였다.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아서 이번 것은 좀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알았어요.」
김희숙은 그 잔도 스트레이트로 마셔 버렸다. 이번에는 식도가 타는 듯한 통증
이 느껴지지 않았다. 알코올 섞은 한 잔의 시원한 음료를 마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또!」
종업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만한 남자라도 두 잔을 연거푸 스트레이트로 마
시면 나가떨어질 만큼 독한 술이었기 때문이다.
「한, 한 잔 더 주세요.」
김희숙은 두 번째 칵테일잔을 들었을 때 이미 종업원의 얼굴이 흔들려 보였었
다. 하지만 의식은 말짱했다. 말을 약간 더듬고 있다는 것까지 느낄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굉장하시군요.」
종업원은 남자 친구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비 맞은
몰골로 그 독한 버팔로를 두 잔이나 스트레이트로 마신 이 여자 손님의 남자 친
구가 안 온다면 더 이상 버팔로를 만들어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미스 김!」
김희숙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안상록이었다. 안상록은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어! 여긴 웬일이세요?」
김희숙은 안상록에게 전화를 했었다는 것을 깜박 잊었다. 그러나 곧 자기가 전
화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후후 웃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안상록이 종업원에게 물었다.
「손님이 버팔로를 두 잔이나 스트레이트로 마셨습니다.」
「버팔로라뇨?」
「우리 집에서 제일 독한 칵테일입니다. 남자들도 보통 스트레이트로 한 잔만 마
셔도 핑 도는 술입니다.」
「그래요.」
안상록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우선 알코올에 흠뻑 젖어 있는 김희숙이 문제였다.
「아, 앉으세요. 오늘 제, 제가 수, 술 한잔 사, 사드릴게요. 후후, 정, 정말이에요.」
김희숙은 안상록의 얼굴도 흐릿하게 보였다. 아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자기가
말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 시원한 얼음물 한 잔 주세요.」
안상록이 김희숙 옆에 앉으며 종업원에게 말했다.
「미지근한 설탕물이 좋을 겁니다.」
「그럼, 그걸로 주세요. 나도 버팔론가 덕팔인가 하는 술을 한 잔 주시고.」
안상록은 숙직실에서 고스톱을 치면서 소주 몇 잔을 마셔서 알딸딸한 기분이었
는데, 고주망태가 되어 있는 김희숙을 보자 왠지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술을 청했다.
「두 분이 오늘 약속이라도 하셨습니까?」
종업원이 칵테일을 만들면서 물었다.
「약속이라뇨?」
「버팔로 축제를 열기로 말입니다.」
종업원이 웃으며 농담을 했다.
「아닙니다. 얼마나 독한 술이기에 미스 김이 이렇게 취했나 확인을 해보려고 합
니다.」
「어머! 저, 저 안 취했어요. 여, 여기 한 잔 더 주세요.」
김희숙은 안상록의 음성이 아련하게 먼 곳에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도 술을 주문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여기 있습니다, 손님.」
종업원이 안상록에게 눈을 깜박거리며 설탕물이 담긴 칵테일잔을 내밀었다.
「이, 이쪽에도 하, 한 잔 주세요.」
「알겠습니다.」
종업원은 안상록에게 버팔로를 진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 우리 거, 건배해요. 지, 지랄 맞은 세, 세상을 위해.」
김희숙이 설탕물이 든 잔을 들어 안상록에게 내밀었다.
「좋습니다.」
안상록은 김희숙과 건배를 하고,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스트레이트로 마셔 버렸다.
「와! 후, 이거 굉장히 독하군. 위장이 타는 것 같네.」
「하하. 이분은 그 술을 자그마치 두 잔이나 마셨습니다.」
종업원이 거보라는 듯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 분명히 사고군요.」
안상록은 술값을 계산하고 김희숙을 부축했다.
「수, 술 사준다고 했잖아요.」
김희숙은 안상록이 부축하는 것을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나 기운이 없었다. 거
절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힘없이 안상록에게 끌려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차 갑시다. 이차 가자고요.」
실연당했나 보군. 그렇지 않고서야 이거 원.
안상록은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김희숙의 허리를 붙잡고 일
층 입구에서 망설였다. 일단 카페에서 나오긴 했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비만
안 온다면 김희숙을 집에까지 데려다 줄 수 있지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택시를 잡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은행이 아닌 밖에
서 처음 만난 처지에 여관으로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 저 안 취했어요.」
바람이 불 때마다 우산 속으로 비가 들이닥쳐 몸을 휘갈기는 바람에 김희숙은
약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안상록이 자기 허리를 껴안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팔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만약 팔을 뿌리치면
다리에 힘이 없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집이 어딥니까?」
안상록은 김희숙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온 것 같아 큰소리로 물었다.
「이, 이차 간다고 했잖아요. 저 오, 오늘 술 마시고 싶다고요.」
김희숙은 술에 취해 눈을 깜박거리며 계속 이차를 주장했다.
「미스 김이 혼자 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일단 집으로 갑시다. 거기서 이
차를 하든지 말든지.」
「뭐, 뭐라고요? 처, 처녀가 호, 혼자 사는 방에 같이 가자고요? 이, 이 팔 놔요!」
김희숙은 안상록의 팔에서 빠져 나오려고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그건 생각일
뿐 그럴수록 안상록의 팔이 죄어들었다.
「좋습니다. 이차 가죠.」
버팔로의 위력은 대단했다. 안상록도 주량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셌지
만, 숙직실에서 마신 소주 탓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취기가 밀려왔다. 그렇
다고 김희숙처럼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빠른 속도로 몰려오는 취
기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술의 위력에 감탄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성을 지킨다는 그 자체가 무리였다. 그는 단순하게 부축하려는 의도에서 잡고 있
는 김희숙의 팔로부터 취해 오는 속도와 같은 속도로 새로운 감촉이 심장으로
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김희숙의 젖가슴은 그가 보아 왔던 대로 글래머였다. 안상록은 어느 순간 자기
가 김희숙의 왼쪽 젖가슴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느낀 순간 취기가
확 덮쳤다. 어디론가 가야 했다.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무너지는 이성은
어차피 이 빗속에 그녀를 끌고 집으로 갈 수는 없잖아, 하고 소리 지르며 저벅
저벅 뛰어오고 있었다.
문제는 여관이 건너편 언덕에 있다는 점이다. 횡단 보도를 건너 골목으로 한참
들어가야 여관숲이 있을 뿐, 근처에는 여관이란 간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좋아, 비를 맞으면 그뿐.
알코올이 지나치면 만용을 몰고 온다. 한성은행, 그것도 이 나라 금융 일번지
명동 지점의 지불 계장 안상록은 비를 맞으며 김희숙을 데리고 여관에 가기로 했다.
「자, 갑시다. 우리들의 낙원을 위하여!」
「나, 낙원으로 이차를 가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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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4부 애욕의 트라이앵글 ③
김희숙은 빗줄기가 부드럽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샤워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
어 조금은 취기가 가셨다. 비를 맞고, 그것도 스물다섯의 처녀가 처음 만나는 직
장 동료의 품에 안겨 많은 행인들이 보는 앞에서 신호등 앞에 서 있다는 것이 아
무렇지도 않았다.
「길을 건너면 따뜻한 낙원이 우릴 기다릴 겁니다.」
취하기는 안상록도 마찬가지였다. 틀린 게 있다면 신호등의 붉은빛과 푸른빛을
구별할 수 있고, 붉은 등이 켜지기 전에 빨리 건너야 한다는 것쯤은 쉽게 판단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성이 아주 마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여기에 들어가야 하나요?」
김희숙은 안상록이 끌고 들어가는 곳이 여관이라는 것을 알았다. 스물세 해를
간직한 처녀성을 바친 곳, 박 대리와 시간이 날 때마다 이용하는 바로 그 여관
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순순히 따라갔다. 비록 자기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 안상
록이긴 하지만, 같은 동료로서 이렇게 술에 취했는데 범하기야 하겠느냐는 편한
생각 때문이었다.
「옷 세탁 해 드릴까요?」
여관 조바가 방을 안내하고 나서 돈을 받아 쥐며 물었다.
「금방 세탁할 수 있나?」
「헤헤헤. 세탁은 안 되고 말려서 다림질은 해줄 수 있어요. 물론 값은 세탁비와
같고요.」
십대로 보이는 조바가 실실 웃으며 안상록을 쳐다보았다.
「알았어. 조금 있다 부르지.」
안상록은 조바가 밖으로 나가자 일단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와 보
니 김희숙은 침대에 벌렁 누워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옷이 온몸에 착 달라붙어
서 얇은 브래지어를 했는지 젖꼭지까지 도톰하게 드러나 보였다.
「미스 김! 미스 김!」
안상록은 김희숙을 흔들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얼굴을 툭툭
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인연이 없나 보군.
안상록은 잠든 여자와 섹스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창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아니고, 당장 내일 출근하면 마주쳐야 할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옷은 세탁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젠장,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는 격이군.
잠든 여자의 옷을 벗기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마치 옷벗기를 싫어하는 몸집 큰
아이의 옷을 벗기는 것처럼 힘이 들었다. 간신히 옷을 벗긴 다음에 인터폰을 눌
렀다.
「맥주 두 병하고 옷 좀 세탁, 아니 말려 줘.」
담배 한 대를 다 피워 갈 무렵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한 시간이면 되겠지?」
안상록은 입구에서 맥주를 받고 김희숙의 옷을 건네주었다.
「헤헤헤, 삼십 분이면 충분합니다.」
안상록은 조바가 아래층 계단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 방문을 걸었다.
팬티와 거들을 입고 편안하게 누워 있는 김희숙의 육체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
웠다. 무엇보다 굴곡이 확실했고, 형광빛에 투여되는 살결도 희고 아름다웠다.
그림의 떡이지.
안상록은 김희숙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텔레비전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요즈음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여자 배우가 남자 주인공과 함께 갈대밭에서 포옹을 하
고 있는 장면이 불쑥 튀어나왔다.
젠장! 어떤 놈은 고주망태가 된 여자 보초나 서고 있고, 어떤 놈은…….
맥주를 따서 컵에 따랐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쭉 들이켜고 나니 취기가 금방
가라앉는 듯했다. 웃음이 나오면서 왠지 쓸쓸했다. 채널을 돌렸다. 그곳에도 비
슷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시 채널을 돌렸다. 자막이 있는 외국 영화가 펼
쳐졌다. 아래층 내실의 비디오와 연결된 채널 같았다.
내일 아침에는 어쩐담!
안상록의 눈은 비디오를 보고 있었지만 머리 속에는 김희숙이 헤엄을 치고 다녔
다. 아침에 눈을 뜨고 부끄러운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할 김희숙을 생각하니, 옷
만 말려 놓고 이 자리에서 사라지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도대체 어떤 놈한테 챈 거야?
심적으로 어려울 때 자기를 불러 준 것은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기는 했지만, 그
렇게 요조숙녀인 체하는 김희숙이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취한 것은 남자 관계
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현 과장?
안상록은 김희숙이 먼저 현 과장을 찾았던 일이 갑자기 생각나자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지점 내에서 호인으로 소문난 현 과장이었다. 또 행내 결혼을 한 부인을 끔찍
이 위한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가, 미스인
김희숙과 불륜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니지, 남녀 관계엔 정도가 없는 법이잖아. 이렇게 생각이 반전되자, 퇴근 후에
여행원들과 자주 술자리를 같이하는 현 과장의 또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술을 마
시고 잠깐 이성을 잃고 관계를 맺은 게 시작이 되어 계속 연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직원들에게 유난히 인기가 좋은 그였기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그럭저럭 맥주 한 병을 다 비워 버렸다. 남은 맥주를 따서 빈 잔
에 채웠을 때 노크 소리가 났다. 옷을 말려 왔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어섰다. 순
간 다리가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소주에, 그 독한 버팔로에, 맥주까지 마셔
섞였으니 당연했다.
「이만 원입니다」
「뭐야! 여자 옷 한 벌 말리는 데 이만 원이 다 뭐야, 임마!」
안상록은 취한 김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쉬, 다른 손님들 생각도 해주셔야지요. 그리고 이 빗속을 달려온 제 생각도
해주시고, 안 그렇습니까? 헤헤.」
「그래, 그래. 잘먹고 잘살아라, 임마.」
안상록은 이만 원을 주고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옷을 옷걸이에 걸어 놓은
후 잠자고 있는 김희숙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떤 놈 때문에 그렇게 마음고생이 심하냐?
침대에 걸터앉아 김희숙의 축축한 머리카락을 가만히 만져 보았다. 그 다음에 얼
굴을 쓰다듬었다. 지불계 창구에 앉아 슬쩍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새침한 표
정으로 시선을 돌리던 때가 생각났다.
쯧쯧, 인간만사가 이렇게 허무하다는 것을 겨우 스물다섯에 터득하면 어떻게 하냐!
김희숙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던 안상록의 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가슴으로 옮겨졌다.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거들은 체온으로 어느
정도 마른 것 같았는데 브래지어는 축축했다. 젖가슴이 놀랄 정도로 뜨거웠다.
젖꼭지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
김희숙이 갑자기 뜨거운 한숨을 토해 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안상록의 얼굴까
지 그 열기가 전달될 정도였다.
「미스 김!」
안상록은 김희숙이 잠을 자고 있는 체하는 줄 알고 얼른 손을 빼고 다급하게 불
렀다. 그러나 김희숙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얼굴을 톡톡 쳐보았다. 그녀는 잠들
어 있었다. 잠꼬대를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집
어 넣었다. 취기가 점점 밀려왔다.
딱딱하던 젖꼭지가 약간 풀어지면서 땀이 배어 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안
상록은 김희숙 옆에 고꾸라지듯 엎어지고 말았다. 그 지독한 버팔로가 맥주 한
병을 추가시켜서야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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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4부 애욕의 트라이앵글 ④
똑같은 시간.
신촌의 한 여관에서 김희숙이 충동적으로 불러낸 안상록과 똑같은 버팔로를 마
시고 취해서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든 그 시간에, 박 대리는 호텔 킬리만자로 215
호실에서 오수미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들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서로
를 갈구하며 진하게 사랑을 나누었다.
「이제 말을 해봐. 김 사장이 언제 날 보자고 하는지?」
박 대리가 오수미의 젖꼭지를 비비틀면서 물었다.
「아파요. 좀 부드럽게 만질 수 없어요?」
오수미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말했지만, 박 대리의 손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알았어. 그러니 어서 말을 해줘. 이렇게 애를 태워 놓고 말을 하면, 이자가 더
많아지나?」
오수미는 이 밤에 헐레벌떡 달려온 박 대리에게 킬리만자로에 가서 말을 해주겠
다며 김사장의 말을 전해 주지 않았었다.
「제가 일산에서 오는 길에 말했었죠?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오수미는 박 대리의 남성을 쥐고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벌써 이 주일이나 흘렀다고.」
박 대리는 다시 남성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호호, 이놈하고 박 대리님하고는 뜻이 같지 않군요.」
오수미가 갑자기 간드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기랄, 할 수 없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두고 보라지. 난 이놈의 뜻을 따
를 테니까.」
박 대리는 젖가슴에 있던 손을 스르르 내려 오수미의 꽃잎을 매만졌다. 물 고인
논처럼 질퍽했다. 이 여자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박 대리는 오수미의 끊임없
이 솟아나는 정욕에 기가 죽을 지경이었다.
「전요, 긴장을 하면 늘 성적인 흥분을 느껴요.」
오수미가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 오는 남자하고 있을 땐 항상 긴장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군.」
박 대리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그러다 장흥에서도 그녀는 긴장하고 있었고
꽃잎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던 게 기억났다.
「그런 말을 하면 제가 화를 낼지도 몰라요. 난 아무 남자에게나 안기는 그런 여
자가 아니라고요.」
오수미가 눈을 하얗게 뜨고 쏘아붙였다.
「그럼, 왜 이렇게 긴장을 하지.」
「박 대리님하고 있으면 괜히 긴장이 돼요. 어쩜, 박 대리님을 사랑하는지도 모
르겠어요. 그래서 긴장이 되는지도 모르죠. 호호호.」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어요. 사랑하는지도 모른다고 말했을 뿐이에요. 그
건 그렇고, 제 말 잘 들으세요. 모레가 무슨 요일이죠?」
「그건 갑자기 왜 물어? 가만있자,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목요일이 되겠군.」
「우선 절 안아 주세요.」
박 대리는 순진한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오수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아니, 그러지 말고 위로 올라오세요.」
박 대리는 이번에도 착하게 오수미의 말을 들었다. 자연스럽게 남성이 오수미의
축축한 꽃잎 문 앞을 엿보는 꼴이 되어 버렸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남성이 슬
며시 기지개를 펴는가 했더니 꽃잎 속으로 냉큼 들어가 버렸다.
「헉! 거기까지는 말 안 했잖아요. 하지만 너무 좋아요. 제 말 잘 들으세요. 모
레 목요일 두시쯤에 십억이 예치될 거예요.」
「겨우 십억?」
박 대리는 남성이 오수미의 꽃잎 속에 들어가 있는 것엔 아랑곳없이 실망한 얼굴
로 반문했다.
「왜요? 그럼, 그것을 취소할까요?」
오수미는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히프를 살살 돌려 박 대리의 남성이
꽃잎 속에서 빠져 나가지 못 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말은 아니고, 천억을 말하다 갑자기 십억으로 다운되니까 놀라지 않을 수
없잖아.」
박 대리가 하체에 힘을 주며 말했다.
「천억이 적은 돈이 아니란 것은 저보다 박 대리님이 잘 알고 계시잖아요.」
오수미는 말을 끝내자마자 허리를 활처럼 휘며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맞아, 잠깐 내가 눈이 멀었어. 그래, 맞다고. 천억이란 천문학적 숫자지.」
박 대리는 세상을 거저 얻은 듯한 희열 속에 온몸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밑에
있는 오수미는 눈을 거슴츠레 뜨고 싫어, 싫어,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댔다.
「그만둘까?」
박 대리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아, 아니에요. 좋아요.」
「미스 오가 아무리 앞일에 대해서 함구를 하라고 했지만, 이 말만은 하고 넘어
가야겠어. 사장이 갑자기 우리 은행을 선택한 이유는 뭐야?」
「그, 그건 그날 말해 줄게요.」
「좋아. 그럼, 그날 김 사장이 우리 은행으로 직접 방문하는 건가?」
「아니에요. 대리인이 갈 거예요.」
「대리인이 누구지? 그것도 그날 알아야 할 숙제인가?」
「네, 제발 말 좀 시키지 말아요. 조금 있다 말해도 되잖아요.」
오수미는 박 대리에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가쁜 숨을 헐떡이다가 갑자기 축
늘어졌다. 수차례나 오르가슴에 도달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담배 좀 주세요.」
오수미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박 대리에게 말했다. 박 대리는 담배에 불을 붙여
서 오수미 입에 물려 주었다. 그리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문득 김
희숙의 얼굴이 떠올랐다. 김희숙과의 섹스 후에도 이렇게 땀을 닦아 주곤 했기
때문이다.
비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쳤다. 밤새도록 비를 뿌리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벽별이 보일 정도로 맑았다. 비가 왔었다는 증거로 공해가 씻긴 도시는
깨끗했고, 멀리 있는 북한산이 선명하고 푸르게 보였다. 김희숙은 머리가 깨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눈을 뜨고 나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옆자리에 안상록이 코
를 골며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나!
순간 그녀는 머리 통증이 말갛게 가시는 것을 느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가 이
번에는 까무라칠 듯이 놀랐다. 란제리 차림으로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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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4부 애욕의 트라이앵글 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제 저녁에 버팔로란 카페에서 칵테일 한 잔
을 마신 것 외에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옷부터 입는 게 급했다. 빠르게 사방을 휘둘러보니 옷은 옷걸이에 깨끗하게 걸려
있었다.안상록이 잠에서 깰까 봐 소리나지 않게 침대서 빠져 나와 옷을 입었다.
어?
옷을 입고 나서야 다림질이 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옷은 누가 다림질했고, 엊저녁에 안 계장과 무슨 짓을 한 거야. 얼른 팬티 속을
만져 보았다. 섹스를 했던 흔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장담을 할 수는 없었다. 세
상에 팬티 입고 섹스를 하는 여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 하느님!
김희숙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엊저
녁에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으며, 왜 반나체의 몸으로 안상록과 같이 잠을 잤
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가느다란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안상록이 넥타
이를 풀어 헤친 채 와이셔츠와 바지를 입고 잠을 자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내가 전화를 했었지. 하지만 술은 나 혼자 마셨잖아.
냉정을 되찾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혼곤한 잠속에 빠져 있는 안상록의 얼굴을 쳐
다보았다. 머리는 비를 맞았는지 제멋대로 헝클어져 까치집을 지어 놓은 것 같
았다.
맞아! 어제 저녁에 비가 왔었지. 비를 맞고 카페에 갔었어. 그리고 술을 마셨어.
하지만 그때는 안 계장이 없었잖아. 분명히 나 혼자 마셨어. 그렇다면 내가 취했
을 때 안 계장이 왔단 말인가? 그렇구나, 내가 버팔로란 카페로 오라고 했었지.
그래서 거기로 왔구나. 그건 그렇다치고 왜 내가 옷을 벗고 안 계장하고 잠을
잤지. 왜? 왜?
김희숙은 기억의 실마리가 풀어질 듯하다가 스프링이 달린 듯 도로 실타래 속으
로 엉켜 버리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슬며시 여관을 빠져 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당장 은행에서 마주칠 안 계장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명백
한 결과를 듣지 않고 몰래 빠져 나갔다가 은행에서 어떤 말을 들을지 몰랐다.
설령 내가 취해서 정신을 잃고 이 사람하고 그 짓을 했더라도 지금 알아야 된다.
은행에 가면 그이가 있지 않은가.
김희숙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추리가 박 대리로 연결되자 어젯밤처럼 화가 치미
는 대신 쓸쓸했다.
찬호 씨는 그 여자와 밤을 보냈을까?
김희숙은 어젯밤처럼 박 대리에게 분노를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했다. 어제
는 순간적인 감정에 휘말려 분노하고, 배신감에 떨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냉정하
게 생각해 보니, 그때에는 말해 줄 수 없는 그 어떤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어! 일어났군요.」
김희숙이 어제 저녁과 또다른 감정 속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 안상록이 부스스
눈을 뜨고 반갑게 말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김희숙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부끄러웠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자의든 타의든 그와 섹스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만약에 그와 섹스를 했다면, 그건 생각조차 하기 싫은 치명적인 실
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운명이 바뀔지도 몰랐다.
「하하하, 기억이 전혀 안 나십니까?」
안상록은 침대에서 내려와 물병부터 찾았다. 컵에 따를 것도 없이 병째로 꿀꺽꿀
꺽 마신 후에 입을 열었다.
「정말 기억이 안 난단 말입니까?」
「부끄럽지만, 부인할 수 없군요. 이 상황에서는…….」
김희숙의 목소리는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안상록이 자고 있었을 때는 몰랐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와 섹스를 했든 안 했든, 일단은 자신의 반나체를 훔쳐보았
을 것이란 점이다.
「좋아요. 버팔로를 두 잔씩이나 마셨으니까 필름이 끊어질 만도 하죠. 그럼 일
절부터 말해 드리죠. 우선 은행으로 전화를 한 것은 기억이 나죠?」
「네, 기억이 나요. 하지만 버팔로를 두 잔씩이나?」
김희숙은 한 잔을 마신 것은 기억이 나지만 두 번째 잔은 기억이 없었다.
「거기 종업원 말로는 두 잔을 마셨다고 하더군요. 또 내가 마셔 본 경험에 비
추어 볼 때 두 잔을 마셨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아요.」
「그랬었군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나요?」
김희숙은 가슴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았다.
「제가 버팔로에 도착했을 땐 미스 김은 이미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덕
분에 저도 버팔로란 그 독한 놈을 스트레이트로 마셨고, 비를 철철 맞으며 여기
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김희숙은 그 다음 말은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오해하지 말아요. 저 양복을 보면 알겠지만, 소나기를 맞고 여기까지 오다 보
니 옷이 우의가 아닌 이상 멀쩡했겠습니까? 해서 실례가 되는 줄 알지만 허락을
구하지 않고 옷을 벗겨서 여관 조바에게 부탁을 해서 지금 입고 있는 것처럼 다
림질을 해온 것입니다. 그리고 난 맥주를 두 병 시켜서 한 병을 마신 다음에 나
도 모르게 잠이 들었습니다. 이상입니다. 지난밤에있었던 일 중에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하세요.」
안상록은 후줄근하게 늘어진 양복 상위를 손짓하며 또박또박 설명했다.
「죄송해요, 추한 꼴을 보여서.」
김희숙은 안상록의 말이 진실로 들렸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추하긴요. 전 그처럼 아름다운 여체를 처음 보았습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일단 옷은 말려야지, 옷 주인은 고주망태이지.」
「난, 몰라요!」
김희숙은 얼른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금방 빨개지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것보다 우선 머리부터 감으셔야겠습니다. 그 머리에다 꽃만 꽂으면 영락없이
약간 돈 여자처럼 보이겠는데요?」
「어머, 정말이에요?」
김희숙은 거울을 쳐다보았다. 안상록의 까치집 또한 만만치 않게 머리가 엉망이
었다.
「그럼, 잠깐 실례하겠어요. 하지만 참고로 안 계장님도 거울 좀 보세요.」
「이런, 하하하.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었군요.」
김희숙은 목욕탕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웃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안상록
에 대한 고마움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서 여자의 마음은 흔들리는 갈대라고
했던가. 그녀는 자기의 정조를 지켜준, 더구나 무방비상태로 누워 있는 반나체의
자기를 지켜 준 것에 그치지 않고, 비에 젖은 옷을 다림질까지 해준 안상록의
세심한 인품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감동은 자연스럽게 믿음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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