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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5부 유혹의 올가미 ①

목요일 아침. 박 대리가 명동의 미도파 백화점 앞에 도착한 시각은 여덟시가 안
되었을 때였다. 그는 싱그러운 아침 바람을 맞으며 설레는 기분으로 바쁘게 걸음
을 옮겼다. 오늘은 김 사장의 대리인이 현금 십억 원을 가지고 오는 날이자, 한
성은행에서 대리 박찬호의 위상이 백팔십도 바뀌는 날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일찍 출근하시는군요.」

은행 앞의 화원 주인 김씨가 덧문을 열다 말고 돌아서서 밝은 웃음을 던졌다.

「네.」

박 대리는 굳은 얼굴로 짤막하게 대답하고 후문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
에서 김씨가 덧문 한 짝을 들고 서서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하는 얼굴로 고개
를 갸웃거렸다. 후문의 인터폰을 누르자 경비의 음성이 흘러나왔고, 박 대리의
음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철컥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청소부 아주머니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의 인공 연못 난간을 닦고 있다가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네.」

박 대리는 이번에도 짤막하게 인사를 하고 천천히 이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밑에
서 있던 청소부 아주머니가 저놈이 술이 덜 깼나, 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배달되어 있는 신문 중에 경제 신문을 들고 책상으로 갔다.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놓고 편하게 앉아서 신문을 펼쳤다. 습관처럼 금융면부터 읽기 시작했다.
올해 상반기 가결산에 대한 은행 간의 실적이 나와 있었다. 역시 한성은행은 2
위를 차지했고, 1위는 국제은행이었다.

「국제만 이겨 봐, 내 권한으로 일주일 동안 유럽 여행은 물론, 경비까지 일체
부담해 줄 테니까. 그래도 못 이기면 여자하고 잠잘 때 손가락만 놀리는 고자들
이거나, 폼으로 도장만 찍는 능력이 없는 놈들이지.」

지점장이 책임자급 이상이 모인 회식 자리에서 혀가 꼬이도록 술을 마시다 굳은
얼굴로 하던 말이 떠올랐다.

국제은행은 한성은행의 경쟁 은행이었다. 크게는 은행 전체의 실적에서, 작게는
전 지역에 산재해 있는 지점에서도 국제는 두통거리였다. 그 중에서 명동 지점으
로 발령을 받는 지점장마다 은행장에게 받는 특명은 문을 열면 코앞에 있는 국제
를 이기라는 엄명이었다.

문제는 신임 지점장이 올 때마다 머리를 싸매고 국제 타도를 외치지만, 중반에
들어서면 시들해지다가, 이임 때가 되면 숙제로 남겨 놓고 떠난다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급 점포인 명동 지점에서 국제를 누를 수만 있다면 차기 주총
에서 임원이 되는 것은 차려 놓은 잔칫상으로 먹기만 하면 된다는 등식과 연결
된다.

박 대리는 예금 담당 대리로 지점 전체의 수신 실적을 관리하고 있었다. 현재
국제와 수신 실적의 차이는 팔백여억 원이었다. 그 팔백여억 원은 한성은행에서
마의 팔백고지라 부를 정도로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작년에도 그랬고, 그 전해도 그랬고, 현재도 넘을 수 없는 팔백고지를 두고 한
성은행에서는 갖가지 억측을 풀어내기 일쑤였다. 그 중에서 가장 신빙성 있는 것
은, 전직 대통령이 미처 실명화하지 못한 비자금이었다. 그러므로 정권이 바뀌어
야 그 돈이 흘러나올 것이라는 억측이었다.

현지점장인 허영세 지점장도 전임 지점장들과 대동소이했다. 전임 지점장과 틀린
게 있다면, 마의 팔백고지 점령은 초저녁부터 포기하고 내년에 있을 주총에서 임
원으로 선임되기 위해 발가락 사이에 무좀이 기생할 틈도 주지 않고 각종 유관
부서나 경제 부처에 로비를 하고 다닌다는 점이었다.

팔백고지!

박 대리는 신문을 덮었다. 활자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것보다 오늘 두시에
입금된다는 십억 원을 도화선으로 마의 팔백고지를 점령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된
다는 것, 그렇게 됨으로써 지점장이 신화의 주인공이 되고 후에 신화의 주인공이
은행장이 되면 일등 공신인 자기는 가볍게 지점장실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가만있자, 오늘 지점장 일정이 어떻게 되지?

박 대리는 오늘 십억 원이 예치된다는 사실을 가장 가까운 현 과장은 물론이고
상부에도 보고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십여 년 동안 은행원 생활을 해오면서 시
나브로 몸에 밴 조심성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오늘 입금이 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가만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괜히 헛소리해서 푼수가 되기 십상인 경우
를 종종 보아 왔기 때문이다.

지점장실의 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지점장실에 들어가자 한 평이 넘는 마호가
니 책상이 뒤쪽에 턱 버티고 있었다. 그 앞에는 지점장 허영세란 대리석 명
패가 위풍당당하게 자기를 쏘아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박 대리는 책상으로 가서
어제 날짜로 되어 있는 탁상용 다이어리를 넘겼다.

세시 여신 부장 약속, 다섯시 상무님 약속, 일곱시 성일실업 변 사장 을지로
일식집 청하.

지점장은 두시 삼십분경이면 은행에서 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본점이 있
는 을지로까지는 걸어서 이십 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렇다면 김
사장의 대리인이 두시 정각에 도착한다면 지점장은 세시에 여신 부장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취소해야 될 것이다.

박 대리는 지점장이 세시에 여신 부장을 만나고, 일곱시에 성일실업의 변 사장
과 만난다는 메모를 보고 무언가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연관성은 금방 추측할 수 있었다. 보나마나 성일실업에서 신규 대출을 신청했
을 것이고, 대출 한도 문제로 로비를 하기 위해 여신 부장을 만나는 것이며, 변
사장과는 그 결과에 따른 접대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은행의 고유 업무는 수신과 여신으로 분리된다. 수신은 고객의 예탁, 즉 예금
을 말하는 것이고, 고객이 예탁한 돈을 대출해 주는 일이 여신 업무이다. 따라
서 은행의 수익은 수신 금리보다 일 퍼센트 이상 높은 여신 금리와의 차율에서
생긴다. 이 밖에도 신탁이나 각종 수수료 등이 부과적인 수익 사업으로 연결된
다. 또 예금과 대출의 비율을 예·대 비율이라고 하는데 은행에서 대출을 해줄
수 있는 대출 한도는 예·대 비율에 따른다.

그러므로 예금이 많은 은행은 대출도 상대적으로 많이 해줄 수 있으나, 예금이
적은 은행은 대출을 해줄 수 있는 한도도 줄어든다. 또한 예금의 금리가 이자가
없는 별단 예금부터 시작해서 2퍼센트 미만인 보통 예금, 10퍼센트가 넘는 정기
예금 등으로 차별화되듯이 대출 금리도 정책 자금인 장기 저리 자금이 있는가 하
면, 할인 어음이나 일반 자금 등 고율의 금리로 구분된다. 대출 한도는 지점의
총 대출 한도가 있고, 세부적으로는 각 계정 과목의 한도가 있다. 일반 자금의
대출 한도, 적금의 대출 한도 등으로 한도가 있어 그 한도가 넘는 자금은 본점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한도를 늘리는 경우가 있고, 그 외 임시 한도
가 있다. 특별 대출이임시 한도에 속하는데, 특정한 기업에 대출한 금액만큼 한
도를 늘렸다가 대출이 회수되면 한도가 소멸되는 경우이다. 지점장이 여신 부장
을 만나는 이유도 성일실업의 대출 한도때문이라고 박 대리는 추측했다.

성일실업측에서는 주거래 은행인 한성은행 명동 지점의 동일인한도가 꽉찼기 때
문에 한도를 늘리거나, 타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우에 담
보 설정 문제로 주거래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면 로비가 필요하고, 로비의 성격
에 따라 은밀히 커미션이 오가는 게 상례이다.

박 대리가 지점장실을 나와 자리에 앉으려는데 지불 계장 안상록이 이층에서 내
려왔다.

「박 대리님, 웬일이십니까?」

안상록이 빈 영업장이 울리도록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 계장이야말로 웬일?」
「하하하, 어제 친구들과 한잔 했거든요. 집엘 못 들어갔어요. 새벽부터 갈 데가
있어야지요. 여기로 기어 들어올 수밖에.」

안상록이 가까이 다가왔다.

「난, 오늘부터 일찍 출근하기로 결심했거든.」

박 대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점잖은 말투로 대답했다.

「왜요? 결혼을 못 하니까 잠이 안 옵니까?」

안상록이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서 사람은 때가 되면 다 짝을 찾아가야지 외기러기가
되면 나처럼 소득 없이 충성하게 된다고. 내 말은 경험에서 비롯된 진리니까 안
계장은 제때 짝을 찾으라고. 안 그러면 나처럼 이렇게 아침부터 별 볼일 없이 바
쁘게 되거든.」
「명심하죠, 사부님 말씀. 제가 명강의를 들은 대가로 모닝 커피 한잔 사드리죠.
어떻습니까?」
「좋지.」

박 대리와 안상록은 지하 커피 숍으로 내려갔다.

「참, 그저께 말입니다.」

커피를 다 마신 안상록이 담배를 거꾸로 잡고 테이블에 톡톡 치며 음성을 낮추었다.

「그저께?」
「네. 김 과장님 말인즉, 박 대리님이 씨감자 팔아 만든 노름 밑천을 한판에 우
려서 날라 버린 날 말입니다.」
「김 과장이 그렇게 말해?」

박 대리는 그 말을 듣고 나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돈을 잃으면 본전을 찾을
때까지 판을 벌여야 직성이 풀리는 김 과장의 성격으로는 충분히 내뱉고도 남을
말이었다.

「하여튼 그날 김 과장님 피박살났나 봐요. 사실 저도 그날 십만 원 정도 챙기
고 날라 버렸거든요.」
「안 계장은 왜 날랐어? 난 약속이 있어서 그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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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5부 유혹의 올가미 ②

박 대리는 신촌 고흐에서 김희숙과 안 좋은 감정으로 헤어졌던 기억이 나자 그녀
가 아직 화가 안 풀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아침은 킬리만자로에서 바로
은행으로 출근을 했다. 퇴근 후에는 화가 나 있을 김희숙을 달랠 겸 선물이라도
하나 사주고 함께 밤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었으나 사정이 또 변하고 말았다.

성일실업의 김 부장 때문이었다. 마감 시간에 쫓겨 은행 안이 어수선할 때 그로
부터 전화가 왔다. 메기탕을 잘하는 집을 알아냈다는 게 전화의 요지였다.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성일실업이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몸을 사려야 했지만, 개
천에서 오수미란 금붕어를 낚게 해준 장본인이라 어쩔 수 없었다.

현 과장을 부추겨서 강남에 있는 메기탕집에서 일차를 하고, 이차로 사하라에
갔다. 물론 사하라는 박 대리가 은근하게 추천을 했다. 김부장은 기다렸다는 듯
이 오케이를 했고, 오수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달려갔으나 그녀는 그만둔
지 보름이 다 되어 간다는 마담의 말을 듣고 대충 입가심만 하고 집으로 갔었다.

「내 참, 아니, 박 대리님만 총각입니까? 난 아직 영계라고요. 저라고 약속이
없었겠어요? 저도 팔등신 미녀로부터 전화가 와서 총알처럼 달려갔습니다.」

안상록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때를 생각하자 김희숙의 반나체가 선명하게 떠
올랐다. 비록 술에 취해 정신없이 자고 있었지만, 손끝으로 짜릿하게 전해져 오
던, 땀에 젖은 촉촉한 젖꼭지의 감촉이 생생하게 전이되어 오는 것 같았다.

「그래. 안 계장은 영계이고, 난 퇴계야. 그건 알고 있으니까 본론부터 말해봐」

박 대리는 흘끗 시계를 봤다. 삼십 분 전이었다. 지금쯤 김희숙도 출근해 있을
확률이 컸다. 미안했었다는 말이라도 하고 오늘은 화를 풀어 주어야겠다고 생각
했다.

「글쎄, 김 과장님이 그날 도깨비에 씌었는지, 삶은 감자를 그냥 씹었는지 모르
지만 자그마치 칠십만 원을 뿌렸다는 낭보가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 생쥐가? 아니 김 과장이 칠십만 원을 뿌리고 얌전히 항복을 했어?」

박 대리는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 역시 인간이었기 때문에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잘못됐다는 말을 듣자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날은 그 흔한 가계수표도 없었다는 비
극이 벌어졌지 뭡니까?」
「그럼, 누가 다 딴 거야. 내가 십만 원, 안 계장이 십만 원이라면, 오십만 원
은 누가 챙긴 거야?」
「현 과장님이 장원을 했다지 뭡니까?」
「그래? 그럼 오늘 씻김굿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는데.」

박 대리는 어제 현 과장하고 일찌감치 퇴근을 했으므로 오늘 김 과장은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복수전을 청해 올 것이다.

「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눈먼 돈 십만 원을 먹은 죄로 아침부터 이렇게
전령 노릇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러다 살인나는 거 아냐? 김 과장은 눈에 불붙으면 보이는 게 없는 사람인데.」

박 대리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오늘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김희숙을
불러내 화를 풀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박 대리는 은행문이 열리고 나서부터 초
조하게 오수미의 전화를 기다렸다. 김희숙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냉랭한 눈빛
으로 밀어냈다. 그때마다 박 대리는 어떤 식으로 변명을 해야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슬쩍 넘어갈까를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오수미의 전화를 기다
렸다. 기다리던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점심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인 열한시 삼
십분이었다.

「두시 정각에 장영달이라는 사람이 박 대리님을 찾아갈 거예요.」

오수미의 음성이 흘러나올 때를 같이해서 창구에 앉아 있던 김희숙이 신규 통장
을 박 대리에게 결제 맡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 섰다.

「장영달이란 분이 대리인이야?」

박 대리는 송화기를 감싸고 비밀 전화를 하듯 은밀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네.」
「인사는 어떻게 해야지?」
「그분이 박 대리님을 만나면 말해 줄 거예요.」
「고마워, 미스 오. 우린 언제 만나지? 내가 한턱 톡톡히 쓸게. 언제든 시간만
내라고.」

귀머거리도 자기를 욕하는 소리는 듣는다는 말이 있다. 김희숙은 박 대리가 속삭
이는 말 중에 미스 오란 말이 튀어나오자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제가 모레쯤 전화드릴게요, 그럼.」

오수미는 용건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박 대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이 온통 장밋빛으로 보이는 것 같은 기쁨에 차서 고개를 들어보니 김희숙이 신규
통장을 들고 있다 뒤돌아서는 게 보였다.

「미스 김, 신균가?」

박 대리의 음성은 경쾌했다.

「빠뜨린 게 있어서요.」

김희숙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신규 통장을
펴고 그 안에 있는 메모지를 슬쩍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그 다음에 태연하게
일어나 통장을 들고 박 대리에게 가져갔다.

「송금용 통장을 만드는 건가?」

박 대리는 김희숙에게 미소를 보내며 통장을 펼쳤다. 입금액이 일만 원이었다.
송금을 받기 위해 임시로 개설하는 통장인 것 같았다. 고객의 인감란 위에 셀로
판 용지를 붙이고 간인을 한 후에 김희숙에게 통장을 건네주었다.

화가 단단히 났나 보군.

박 대리는 미소를 보내도 김희숙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렇게만 생각했다.
김희숙은 애써 태연한 체하며 제자리로 돌아가 뱅크대 앞에 서 있는 손님에게
통장을 넘겨 주었다.

「감사합니다.」

김희숙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객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다음 고객의 입금
전표를 단말기에 찍었다.

「어디 아파?」

옆자리의 미스 성이 안색이 창백한 김희숙에게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괜찮아. 나 화장실 좀.」

김희숙은 은밀한 미소를 보내고 있는 박 대리의 표정을 거칠게 외면하며 화장실
로 갔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서 메모지를 꺼냈다. 메모지에는 고흐에서 헤어
질 때 저 때문에많이 속상했죠? 하지만 어젠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오늘 고흐에
서 기다릴게요. 알았죠?란 말이적혀 있었다. 메모지 위로 뜨거운 눈물이 뚝 떨
어졌다. 수성 사인펜으로 쓴 글씨가 얼룩으로 번져서 상했죠라는 단어를 지
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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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5부 유혹의 올가미 ③

장영달이란 오십대 전후의 사내는 도무지 빈틈이 없어 보였다. 직사각형의 얼굴
에 염색을 한 듯한 머리카락은 요즈음 유행에 어 울리지 않게 중앙에 가르마를
했다. 얼굴의 피부는 다림질을 해놓은 듯 팽팽했고, 거의 없다시피 한 속눈썹
밑의 눈동자는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 은행을 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박 대리는 입맛이 없어 점심도 거르고 기다린 장영달을 객장 뒤에 있는 테이블로
모셨다.

「감사는 어르신께 드려야죠. 전 단순한 대리인에 불과합니다.」

장영달은 육사생도처럼 꼿꼿한 자세로 냉커피를 마셨다.

「하지만 이렇게 왕림해 주신 장 선생님의 은혜도 큽니다. 김 사장님께서 다른
말씀은 안 하시던가요?」
「지점장님께 직접 전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장영달은 거의 아부에 가까운 몸짓을 하는 박 대리를 무색케 할 정도로 굳어 있
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장 선생님이 오시면 지점장님께 보고를 드리
려고 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박 대리는 웬 손님이냐는 듯한 얼굴로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황 차장의 책상으
로 갔다.

「차장님, 십억을 예치하겠다는 손님이 오셨습니다.」

박 대리의 음성은 흥분으로 떨려 있었다.

「박 대리, 뭐라고 했나, 지금?」

황 차장이 엉덩이를 반쯤 일으켜 세우며 빠르게 반문했다.

「우리 지점에 십억을 예치하겠다는 손님이 오셨단 말입니다.」

박 대리가 다시 말했다.

「그럼, 저분이 바로!」
「맞습니다.」
「알았네. 당장 지점장님께 보고를 드릴 테니 지점장실로 모시게.」

황 차장이 지점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박 대리는 장영달 앞으로 갔다.

「들어가시죠.」

박 대리는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말했다. 장영달은 박 대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꼿꼿하게 일어나 박 대리의 뒤를 따랐다.

「어서 오십시오.」

지점장은 황급하게 문을 열고 나오다 마주친 장영달에게 박 대리 못지않게 인사
를 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여길 책임지고 있는 지점장 허영세입니다.」

지점장이 황송하다는 얼굴로 명함을 내밀었다.

「전, 명함이 없습니다. 그냥 어르신네의 대리인인 장영달이라고 기억하시면 됩
니다.」

장영달은 지점장이 권하는 자리에 직각으로 앉으며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네?」

지점장과 황 차장의 눈이 동시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십억 원이란 금액을 대
리인을 통해 예치시킬 정도라면, 어르신네라고 불리우는 사람의 실체는 어마어마
할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이분은 김 사장님의 대리인 자격으로 오셨습니다.」

옆에 서 있던 박 대리가 지점장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김 사장님?」

지점장이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네. 전 어르신의 대리인입니다.」

장영달이 박 대리 대신 지점장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장 선생님, 차는 드셨습니까?」

황 차장이 물었다.

「어른신께서는 일억 원짜리 CD 열 장을 원하십니다.」

장영달은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봉투 한 장을 내밀었다.

「어느 은행 겁니까?」

지점장이 조심스럽게 봉투를 당겨서 내용물을 꺼냈다. 놀랍게도 코앞에 있는 국
제은행 명동 지점에서 발행한 일억 원짜리 일반 자기앞수표 열 장이었다.

「아니, 국제은행 거 아닙니까?」

지점장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입니까?」

황 차장과 박 대리가 동시에 지점장에게 물었다. 경쟁 점포에서 십억 원을 뺏어
오면 이십억 원을 뺏어 오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그만큼 민감한 사항이었다.

「박 대리, 얼른 CD로 바꾸어 오게.」

지점장이 긴장한 얼굴로 박 대리에게 수표를 건네주었다. 박 대리는 수표를 받
은 즉시 지점장실을 나왔다. 책상 앞에 앉자마자 우선 수표 조회를 했다. 국제
은행측에서 자기 은행 발행 수표가 틀림없다고 확인을 해주었다.

박 대리는 일억 원짜리 CD 열 장을 끊어서 지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점장실
안에는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그 동안 지점장과 황 차장이 많은 질문을 던졌지
만 장영달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금 증서 여기 있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지점장이 양도성 정기 예금 증서, 즉 CD 열 장을 장영달 앞에 내밀었다. 장영
달은 확인도 하지 않고 빈 봉투에 그것을 넣고 나서 안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
런 후 양복의 윗단추를 채웠다.

「흠!」

장영달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서 있는 박 대리를 비롯하여 지점장과 황 차장
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신하며 장영달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러나 장영달
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어떤 식으로 감사를 드려야겠습니까?」

지점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행에서 고객에게 대출을 해줄 때 음성적으로 커
미션을 요구하는 것과 반대로 거액의 금액을 예치하면 예금주에게 일정액을 사례
비조로 주거나, 약정된 금리 외에 비밀스러운 특정 금리를 약속하기도 한다. 선
뜻 십억을 예치할 때는 무언가 조건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였다.

「어르신께서는 박 대리님의 신의 어린 정성에 탄복을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영달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터져 나왔다.

「아니, 박 대리가?」
「그럼, 박 대리가 유치한 고객?」

지점장과 황 차장이 동시에 외치며 박 대리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사실은 김 사장님을 여러 번 찾아뵈었습니다.」

놀라기는 박 대리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기뻐서 얼떨결에 단 한 번 방문했던
사실에 살을 붙여 혀 굴러가는 대로 보고를 했다. 가장 효과적이고 함축된 언어
로 자기 공로를 표현했으니 웬 횡재냐 하는 기분도 들었다.

「어르신께서는 앞으로 예치될 금액도 박 대리님 한 분으로 창구를 통일하길 원
하십니다.」
「그럼?」

지점장은 장영달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십억 원을 안겨 준 것만 해도
황송할 지경인데 또 있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께서는 박 대리님처럼 유능하고 정직하신 분은 예금 파트보다 대출 파
트가 적당하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장영달의 입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말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다음달부터는 대출 파트를 맡길 예정이었
습니다.」

지점장은 장영달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답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박 대리가 자
리에 앉아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었다. 지점 내에 는 대리급 이상 중견 행원이
열두 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 예금계에 앉아 하루 종일 도장만 찍다가 퇴근하는
박 대리를 눈여겨봐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장영달의 말을 듣는 순간, 갑
자기 박 대리가 유능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박 대리를 대출 담당으로
옮겨 줄 생각은 없었다. 대출 담당은 서열이나 경력으로 봐서 현재의 김 과장
이 앉아 있을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르신께서는 어느 여자분께 천만 원의 신용 대출을 해주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이번에는 박 대리가 놀랄 차례였다. 어느 여자란 생각할 것도 없이 오수미를 지
칭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지점장은 순간적으로 리베이트를 원하는거라고 생각했다. 말이 신용 대출이지
십억을 예치하는 조건으로 일 퍼센트를 요구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고 부담스러운 금액은 아니었다. 일 년짜리 예금 십억이 늘어나면 상대적으로 대
출 한도도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어떤 놈한테 커미션을 받아서 대체를 하면 그
만이었다.

「그분에 대한 신상은 박 대리님한테 전화로 연락을 주시겠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장영달은 할말을 다 했다는 얼굴로 허리를 굽히지 않은 자세로 일어나 지점장실
에서 나갔다.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지점장이 황급하게 옆으로 따라붙었다. 그 뒤에 황 차장과 박 대리가 부하처럼
뒤를 따랐다. 객장에 있던 과장급 이하 직원들은 바짝 마른 사내가 장작개비처럼
걸어가는 뒤를 지점장과 황 차장, 박 대리가 황망한 얼굴로 따르자 모두들 대단
한 거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 다른 은행에 볼일이 있어 그곳으로 가봐야 합니다.」

장영달이 은행 밖에까지 따라 나온 지점장 일행에게 표정 없이 말했다.

「그럼, 김 사장님께 언제쯤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지 말씀 좀 해주십시오.」

지점장은 가슴까지 서늘할 정도로 시원한 은행에 있다가 갑자기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밖으로 나오자 숨이 턱 막혔다. 훤하게 벗겨진 이마에 구슬땀이 송송
맺혔다.

「어르신은 지금 일본에 계십니다. 귀국하시는 대로 박 대리님에게 연락을 드
리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장영달은 그 말만 남겨 놓고 뒤돌아섰다.

「안녕히 가십시오.」

세 명은 동시에 등뒤에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하고 나서도 경이로운 표정으로 장
영달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장영달은 퇴계로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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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5부 유혹의 올가미 ④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우선 들어가자고.」

지점장이 더위도 잊어버리고 한참이나 서 있다가 정신이 든 듯 박 대리에게 말했
다. 지점장은 지점장실로 들어오자마자 얼음물을 청했다.

「서무계 유 대리 좀 오라고 해.」

지점장은 인터폰을 내려놓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여행원이 물을 가져왔다. 물
한 컵을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 테이블 위에 있던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냈
다. 지점장 앞에 앉아 있던 황 차장이 탁상용 라이터를 내밀었다.

「박 대리,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지점장의 음성에는 조금 전과는 달리 분노가 듬뿍 묻어 있었다.

「그렇게 엄청난 고객의 정보를 입수했으면, 즉각 지점장님께 보고를 드렸어야
지. 만에 하나 실수라도 했으면 어떡할 뻔했나, 이 사람아.」

황 차장이 지점장이 분노하는 이유를 대신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를 보이기까지는 보고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상대가 적지 않은 현금 동원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서 솔직히 약간 두려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박 대리는 그 동안 느꼈던 심정을 그대로 보고했다.

「음.」

지점장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담배를 피웠다.

「김 사장이란 분이 그렇게 돈이 많은 사람인가?」

지점장이 비웃는 투로 은근하게 물었다.

「제가 파악한 정보로는 김 사장의 현금 동원 능력은 이백억 원 이상입니다.」

박 대리는 알고 있는 정보의 오분의 일만 말했다. 그래야 상품 가치가 컸기 때문
이다.

「이백억!」

황 차장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인가?」

지점장이 박 대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로는 그렇습니다.」

박 대리는 어제의 박 대리가 아니었다. 임원 승진을 눈앞에 둔 일급 점포의 지점
장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동전 자루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시장을 돌아다
니며 고객을 끌어 모아야 하는 금융계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 우뚝 솟아오른 거대
한 별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엄청난 고객을 만나게 되었나?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어딘가?
어떤 회사를 운영하고?」

지점장은 이미 본점 여신 부장과 만나기로 한 시간을 초과하고 있었다. 그는 이
백억이란 숫자가 박 대리 입에서 튀어나오자 생각나는 대로 질문했다.

「우연한 기회에 낚시터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개인적인 사생활 노출
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박 대리는 거짓말을 했다. 룸살롱에서 오수미의 입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되었다
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음, 그랬었구먼.」

지점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박 대리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었나 보지?」

황 차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침 서로가 밤낚시를 갔었기 때문에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둘이서 여러 번 낚시를 다녔습니다. 그러다 김 사장님이 엄청난 현
금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로 적극적으로 매달렸지요. 우리
지점장님께서 임원 승진을 앞두고 실적이 낮아서 고민을 많이 하고 계시니, 이
왕이면 우리 은행과 거래를 해주십사 하고 말입니다.」

첫번째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까지 잘못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거짓말
은 또다른 거짓말을 낳는 법이다. 박 대리는 거짓말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계속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장 선생이 한 말 중에 신의 어린 정성이란 말이 그래서 나왔군.」

지점장은 감격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들었어도, 코앞에 둔 인재가 보이
지 않는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기분 같아서는 꼭 껴안아 주고 싶은 심
정이었다.

「돈을 어떻게 모았다는 말 정도는 했을 거 아냐?」

지점장은 노련했다. 아무리 사생활 노출을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재산 자랑을 하
려면 축적 방법은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일산 신도시 지역에 땅이 수만 평 있었답니다. 그걸 몇 번 굴리니까 돈이 저
절로 굴러 들어왔다고 그러더군요.」

박 대리는 김 사장이 아닌, 오수미를 통해 들은 대로 말했다.

「아! 그랬었구먼.」

지점장은 이해를 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산 신도시 지역에 땅이
수만 평 있었다면 이백억 정도는 쉽게 축적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참, 박 대리에겐 예금 파트보다 대출 파트가 좋겠다는 김 사장의 말은 무슨 뜻
인가? 앞으로 대출도 받겠다는 뜻인가? 우리야 얼마든지 환영하겠지만 말일세.」

황 차장이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지점장님, 부르셨습니까?」

박 대리가 글쎄요,하고 대답을 하려는데 서무 담당인 유 대리가 들어왔다. 그는
지점장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지점장의 지시 사항을 메모하려고 다이어리를 펴
고 메모 준비를 했다.

「오늘 책임자급 이상 회식 준비를 하게. 장소는 저번에 갔던 한남동의 갈비집
이 좋겠지. 이런, 내 정신 좀 봐라. 세시에 본점 김 부장하고 만나기로 했는데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났군.」
「네, 알겠습니다.」

유 대리는 지점장의 지시를 메모하고 밖으로 나갔다. 박 대리는 지점장이 유 대
리에게 지시하는 말을 듣는 순간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아침에 본 지점장의 다
이어리에는 오늘 일곱시에 성우실업의 변 사장을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
런데도 회식을 한다면 그 약속은 취소가 된 거고, 이번 십억 예치 건의 비중을
그만큼 크게 두고 있다는 증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점장은 유 대리가 나가면서 하는 인사를 받지도 않고 본점 전화 번호를 눌렀다.

「여신부 부장님 좀 바꿔 줘. 나 명동 지점 허 지점장이야.」

지점장은 본점 교환이 행내 전화를 바꿔 주는 동안에 황 차장하고 박 대리에게
그만 나가 보라는 말을 소리나지 않게 입으로 중얼거렸다. 박 대리는 황 차장 뒤
를 따라 지점장실에서 나왔다. 대신 자리를 봐주느라 앉아있던 현 과장이 도장
을 들고 일어서며 웬일이냐는 얼굴로 다가왔다.

「박 대리, 잠깐만. 현 과장은 좀더 수고해 주고.」

황 차장이 자리로 돌아가려는 박 대리를 불러서 보조 의자를 자기 옆에 가져다
놓았다.

「박 대리, 정말 서운한데.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주지 그랬나?」

황 차장은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부하 직원이 일언반구 없이
깜짝쇼를 벌였으니 지점장 뵙기에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차장님, 왜 제가 차장님 생각을 안 했겠습니까? 사실은 김 사장의 현금 동원
능력은 삼백억 이상입니다. 차장님께 미처 보고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지점장
님께는 이백억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 대리가 귓속말로 말했다.

「그래? 알겠어. 내가 괜한 오해를 할 뻔했군. 이래서 병은 자랑해야 하고, 오해
는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말이 생긴 거야. 우리 회식 끝나면 현 과장하고 셋이서
한 잔 더 하자고, 알겠지?」

황 차장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오늘따라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박 대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술값은 오늘 내가 내는 거야. 오늘은 괜히 허튼수작들 말라고. 오랜만에 나도
술값 좀 내게 해달라고, 알았지?」

황 차장이 기분좋게 웃으며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알겠습니다.」

박 대리는 모든 게 순조롭게 풀리는 것 같아 하늘로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십억은 박 대리가 끌어온 거야?」

자리로 돌아오자 현 과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물었다.

「하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어쩐지 요즘 쥐뿔 나게 뛰어다니더라. 난 장가 갈 준비를 하느라고 그렇게 뛰
어다니는 줄 알았더니 그런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었군. 나도 한몫 끼워 달라고.」

현 과장이 사람 좋게 웃으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섭외 갈 때 선배님하고 같이 나갔어야 하는데…….」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는 법이다. 박 대리는 현 과장이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자 현 과장한테 정보를 미리 말해 주지 않은 게 미안했다.

「말이라도 고마워. 듣자 하니 황 차장이 한잔 산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네. 회식이 끝난 다음에 현 과장님하고 셋이서 한잔 하자더군요.」
「회식은 또 뭐야?」
「오늘 책임자급 이상 회식이 있답니다.」
「그럼 그렇지. 난 황 좀생원이 한잔 산다기에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떠서 동쪽
으로 지는가 했지.」

현 과장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자기 자리로 갔다. 박 대리는 자리에 앉아 넘
어온 전표에 도장을 찍고 나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오수미로부터 김 사장을
소개시켜 주겠다는 말을 들은 이후 처음으로 내쉬는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것도
잠깐, 단순하게 생각했던 일천만 원 대출 건이 생각났다. 장영달이 어느 여자분
이라고 지칭한 사람은 현재 오수미가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말이 대출이지 바
꿔 말하면 거저 일천만 원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인 그 돈이 김 사장에게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쉽게 생각하면 단순히 오수미를 매개체로 해서 김 사장에게 전달
되는 돈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박 대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김 사장과
오수미의 묘해 보이는 관계 때문이었다. 문제는 김 사장은 왜 오수미에게 일천만
원을 줘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김 사장과
오수미가 흔히 하는 말로 내연의 관계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수미가 그
런 관계는 아니라고 부정한 말의 진실 여부를 떠나서, 김 사장이 하는 행동이나
말투, 성격으로 봐서 연령 차이가 50세 이상이나 되는 손녀 같은 오수미를 정부
로 삼지는 않을 것 같았다.

박 대리가 창구에서 간간이 넘어오는 입출금 전표에 습관처럼 도장을 찍으며 생
각에 잠겼을 때 전화가 걸려 왔다.

「장영달이라는 분 왔다 갔죠?」

전화의 음성은 마침 오수미였다.

「정말 고마워. 이 은혜를 뭘로 다 갚지?」

박 대리는 새삼스럽게 오수미에 대한 고마움이 샘솟듯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
는 순간, 그녀가 보고 싶었다.

「토요일에 약속 없죠? 그날 일 박 이 일로 기차 여행이나 떠나요. 전 그걸로 만
족해요.」
「난 그것으로 만족 못 하겠는데.」

박 대리는 오수미의 말을 듣고 십대처럼 즐거워했다.

「후후후.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아셔야죠, 안 그래요?」
「맞아. 내가 그걸 잊었어. 그리고 은행엔 언제 나올 거야? 장 선생님 말씀은 어
느 여자분에게 천만 원을 대출해 주라고 하던데,미스 오가 주인공 아냐?」

박 대리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을 넘겨짚고 반응을 살폈다.

「역시 박 대리님은 보통이 아니셔. 바쁜 돈은 아니니까 토요일에 만나서 말씀드
릴게요.」
「좋아. 출발은 몇 시?」
「밤차로 출발했다가 밤차로 돌아오는 거예요. 어때요? 멋지지 않아요? 기차표
는 제가 준비할게요.」
「목적지는?」
「그건 비밀. 그럼 토요일에 다시 전화드릴게요, 안녕!」

박 대리는 오수미의 음성이 멀어진 후, 첫 데이트를 앞둔 사람처럼 가슴이 설레
며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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