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게임 3부 (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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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3부 위험한 오해 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서 은행도 한가해지기 시작했다. 서늘한 객장에 앉아
유리창 밖을 보면, 건물과 아스팔트에서 내뿜는 열기가 이글거리며 아지랑이처럼
솟아올라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를 실감케 했다.
점심 시간에는 인근 사무실 아가씨들이나 샐러리 맨들이 점심을 먹고 시원한 객
장으로 몰려들어 잡지를 뒤적거렸다. 뿐만 아니라 볼일이 있어 명동에 왔던 행
인들도 땀을 식히러 은행으로 들어와 한참씩 앉아 있는 일이 많아졌다.
한성은행 명동 지점 같은 경우는 가계성 예금을 하는 일반 고객보다 기업 고객이
많은 터여서 본격적인 여름이 되자 마감 시간이 임박할 때를 제외하고는 낮에는
파리를 날릴 지경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한가했다. 고객들이 순서를
기다리느라 번호표를 뽑을 필요도 없었다.
창구에 앉아 있는 여행원들은 정면을 바라보며 귓속말로 옆 동료와 잡담을 나누
거나 아무 생각 없이 멍청히 유리창 밖 풍경에 시선을 던지고 있다가 손님이 오
면 버릇처럼 웃으며 일어나 용무를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아 명상을 즐기는 듯
한 표정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중에서 김희숙 옆에 앉은 미스 성의 경우는 짜증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스 성을 정면으로 하고 소파에 앉아 있는 뚱뚱한 중년 사내 때문이었다. 뚱뚱
한 체구에다 검은테 안경까지 쓰고 있어 앞이 꽉 막힌 듯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기는 그는 정확히 이십 분 간격으로 통장을 내밀며 입금 여부를 확인했다. 미
스 성이 자동 통장 정리기를 사용하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아직 입금이 안 됐어요. 그쪽에 전화를 해보지 그러세요.」
미스 성이 애써 화를 참으며 다시 말했다.
「전화를 백 번도 더 했다고. 입금시키러 간 지가 두 시간도 넘었는데 아직 입금
이 안 됐다면 컴퓨터에 이상이 있는 거 아니야?」
「저도 부산 지점에 전화를 해봤어요. 그쪽에도 온라인이 다운되지 않았대요.
우리 쪽도 이상이 없고요. 그러니 다시 한 번 전화를 해보세요.」
미스 성은 짜증스럽게 내뱉고 나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귓속말로 옆자리의
김희숙에게 별꼴이야, 정말 생긴 대로 놀고 있네, 하고 속삭였다.
「아니, 아가씨, 지금 뭐라고 했어? 뭐, 생긴 대로 놀고 있어! 야, 너 말 다 했어?」
중년 사내의 느닷없는 고함소리가 잔잔한 수면에 바위를 던진 것 같은 파문을
일으켰다. 객장에 앉아 있는 손님은 물론 일층에 있는 직원 모두의 시선이 중년
사내와 미스 성에게 몰렸다.
「제가 언제 그랬어요?」
미스 성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빨개진 얼굴로 빠르게 쏘아붙였다.
「방금 이 아가씨한테 생긴 대로 놀고 있다고 지껄이지 않았어? 그렇지 않아도
일 초라도 빨리 송금해야 할 돈 때문에 오장이 바싹바싹 마르고 있는 중인데
뭐, 생긴 대로 놀고 있어? 그래, 나, 생긴 대로 논다. 내가 생긴 대로 논다고
니가 이자라도 한푼 줬냐?」
중년 사내의 말이 험악해지기 시작하자 미스 성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저씨, 고정하세요.」
옆자리에 앉은 김희숙도 얼굴이 빨개지긴 마찬가지였다. 사내가 말을 할 때마다
튀기는 침을 피하며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로 진정을 시켰다.
「아가씨도 분명 들었지. 이 아가씨가 방금 한 말!」
중년 사내의 화살이 김희숙에게 돌아갔다.
「뭐라고 했는데요?」
「아니, 이것들이 단체로 멀쩡한 사람을 귀머거리로 만들려고 포룡환을 처먹었
나. 여기 서 있는 내 귀에까지 똑똑히 들려 왔는데 아가씨 귀에 대고 하는 말
을 못 들었단 말야? 아가씨, 귀 포경인가?」
중년 사내의 말은 거침없었다. 그 소리에 창구에 앉아 있는 여직원들은 일을 하
면서도 슬쩍슬쩍 중년 사내의 붉으락푸르락하는 표정을 살피느라 정숙해야 할 은
행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손님, 고정하시고 이 안으로 들어오세요. 네? 손님.」
어느 틈에 지불 계장 안상록이 객장으로 나와 중년 사내의 허리를 잡고 사근사
근한 말투로 달랬다. 그는 고참 행원으로서 대리 진급 시험에 전 과목 합격을
하고 발령나기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다.
「들어가긴 어딜 들어가! 이년들이 싸잡아서 멀쩡한 사람 귀머거리로 만들고 있
는데.」
중년 사내는 안상록이 부드럽고 사근사근한 말투로 달래자 한 풀 꺾인 음성으로
말하긴 했으나 억양에는 여전히 분노가 섞여 있었다.
「알겠습니다. 직원들한테는 제가 조치를 취할 테니 일단 들어오셔서 시원한
커피 한잔 하시며 기다리시죠.」
이런 경우는 무조건 손님을 객장 안으로 모시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객장에서
는 제아무리 총탄에 설맞은 멧돼지처럼 날뛰던 사람도 일단 객장 안으로 모셔서
커피를 대접하며 살살 달래면 화가 사그라지게 마련이었다.
중년 사내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웬만해선 이렇게 조용한 장소에서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쇼. 지금 세시까지 급하게 송금할 돈이 있는데 부산에서는 한시에
송금한다고 나간 놈은 소식도 없지, 날은 열불나게 덥지, 그렇지 않아도 속이 부
글부글 끓고 있던 참인데 그런 말을 듣고 화를 안 내게 되었나 생각을 해보시라
이겁니다.」
「알겠습니다. 우선 시원한 냉커피나 한잔 드시죠. 그리고 통장 이리 주십시오.
제가 확인을 해볼 테니.」
안상록의 역할은 중년 사내를 안으로 데리고 오는 것으로 끝났다. 다음은 박 대
리가 사내를 구슬려야 할 참이었다. 사내 입장에서 볼 때 뒷좌석에 앉아 있는 박
대리까지 우습게 볼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염두에 둔 작전 아닌 작전이었다.
「이거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백팔십도 변했다. 조금 전까지 소도둑놈 같은 인상을 쓰며 고
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기개는 간 곳이 없고, 주인에게 냅다 걷어챈 강아지처럼
고분고분했다.
「뭘요, 일이라는 게 가끔 이렇게 착오가 날 때도 있는 법이지요. 미스 김, 이
통장에 입금됐나 다시 한 번 확인해 줘요.」
박 대리가 김희숙을 불렀다. 김희숙은 대답도 하지 않고 뾰로통한 얼굴로 다가왔
다. 박 대리는 통장을 건네주면서 슬쩍 잔고를 봤다. 잔고는 몇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입출금은 많았다. 어디선가 입금이 되는 즉시 빼서 다른 은행으
로 입금을 하거나 송금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요 근처에서 사업을 하시나 보죠?」
전화위복이랬다. 박 대리는 슬금슬금 사내의 정체를 캐기 시작했다. 그의 짐작대
로라면 사내는 단순한 성격이었다. 이런 사내일수록 작은 친절에도 쉽게 감동한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네. 로열호텔 뒷골목에서 조그만 오퍼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담배 한 대 태우시죠.」
박 대리는 담배를 권한 뒤 우리 은행과 거래를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은행에 넣어 둘 돈이 있어야지요.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처지라 만날 빈털
터리죠.」
「하하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웬만하면 우리 은행하고 거래를 하시죠. 오퍼상
을 하신다면 꽤 많은 자금이 오고 갈 텐데.」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중국에서 수입한 물건이 소비되는 대로 한성
은행에 당좌 거래를 틀 예정이었습니다. 한데 아가씨들이 버릇이 없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명함입니다. 도움이 필
요하실 땐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박 대리는 순한 양으로 변한 사내에게 명함을 건넸다.
「이거 쑥스러워서, 이건 제 명함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명함을 꺼내서 주었다. 전화가 세 대 있는 것을
보니 그런 대로 거래를 틀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 입금이 안 됐네요.」
김희숙이 통장을 박 대리에게 건네주며 쌀쌀맞게 말했다. 그녀는 자기가 곤경에
빠져 있을 때 뒤에 있던 박 대리가 얼른 와서 거들어 주지 않은 것을 못내 서운
해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쪽에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전화를 해보시죠. 전화를 빌려 드릴
까요?」
박 대리가 사내에게 통장을 건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닙니다. 사고가 아닌 이상 한시에 입금하러 나갔는데 지금까지 입금이 안 될
리는 없죠. 커피 잘 마셨습니다. 허허.」
사내는 일그러진 얼굴로 억지웃음을 지으며 황망히 객장을 나갔다. 박 대리는
사내의 명함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제일상사 김억수란 이름 밑에 전화 번호
와 호출·핸드폰·팩스 번호 외에 별다른 사항이 없었다.
은행은 다시 일상적인 분위기 속으로 빠져 들었다. 언제 곰 같은 사내가 침을
튀기며 소란을 피웠는가 싶을 정도였다. 가끔 실내 마이크로 손님의 이름을 부르
는 소리, 전화기 울리는 소리 등이 잔잔한 침묵을 깨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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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3부 위험한 오해 ②
네시 삼십분, 벽시계의 분침이 정확히 6이라는 숫자를 가리키자 서인석이 셔터
를 내렸다. 일순간 밖의 빛이 차단되면서 객장 안이 약간 어두워졌다. 뱅크대 앞
에는 아직 용무를 마치지 않은 몇몇의 손님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창구 앞에 손님이 없는 여행원들은 빠르게 마감 준비를 했다. 하루 동안 돈을
받고 내준 전표를 챙겨셔 입금 전표와 출금 전표의 합계를 낸다. 그리고 남은
차액과 현재 가지고 있는 시재(남은 돈)의 합계가 일치하는지 여부를 파악해서
정확히 맞으면 마감은 끝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일계표를 작성하여 돈을
권액별로 분류, 기재한 다음에 지불계로 가져간다.
지불 계장인 안상록은 가져온 돈과 일계표의 일치 여부를 확인한 다음에 인수를
해서 권액별로 분류한 후 뭉치로 만들어 금고 안에 넣어 둔다. 그렇게 해서 지
점 전체의 입출금이 맞으면 일일 결산이 끝나는 셈이다.
이 시간이 되면 하루 종일 경직된 얼굴로 앉아 있던 직원들의 얼굴 가득히 해방
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조용조용 속삭이던 음성의 톤도 높아지고, 여기저기 약속
전화를 걸기도 하며 퇴근 시간인 여섯시가 되길 기다린다.
대리급 이상의 사람들은 더 이상 결재할 전표가 없으므로 도장을 잘 닦아서 서
랍에 넣고 잠그거나 포켓 안에 집어 넣는 것으로 하루 일을 끝낸다. 그러나 금고
당번이라 일컫는 시재 당번은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 하루 종일 거래한 전표의
합계와 금고에 남아 있는 돈이 일치하는지 여부를 확인한 다음에 외금고와 금고
실을 잠가야 하기 때문이다.
박 대리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천천히 마시면서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오늘 일산하자고.」
오늘의 시재 당번인 현 과장이 전표를 걷으러 다니는 계산계 직원에게 한마디했
다. 일산이란 단 한 번에 입출을 맞추자는 말이다. 그러나 한성은행 명동 지점
같은 경우는 쉽게 일산이 나오지 않는다. 일층과 이층에 근무하는 백여 명이 내
놓는 하루 전표 양만 해도 칠, 팔백 장이 넘었다. 그 많은 전표를 계정 과목별로
분류하여 단 한 번에 입출을 맞추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박 대리는 종이컵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지며 오수미를 생각했다. 그녀는 이
주일 전에 장흥에서 진하게 섹스를 나눈 뒤로 지금까지 소식이 없었다. 그녀가
근무하는 룸살롱 사하라에나 슬쩍 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떨쳐 버렸
다. 김 사장이 한 말이나 오수미의 행동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더 기다
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답답한 것은 김 사장이 그만한 돈을 어떠한 방법으로 어느 은행에 예치를 시켜
두었느냐 하는 점이었다. 추측이 가는 것은 가장 쉽고 보편적인 방법으로, 여러
은행에 분산해서 양도성 정기 예금 증서인 CD를 사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수미
로부터 연락이 오는 시기가 바로 그 CD가 만기되는 때일 것이다.
「돌아오는 해에 틀림없이 과장을 시켜 주지.」
김 사장의 말이 생각났다. 김 사장 집에 다녀온 후로 지금처럼 한가하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간헐적으로 떠오르는 말이었다. 그 말은 한마디로 과장으로 진급할
수 있을 정도의 실적을 안겨 준다는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오십여 명의 입행
동기 중 선두 대열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비록 대리 진급은 첫해
에 되지 않고 그 다음해에 됐다지만 문제는 과장부터이다. 그 다음엔 차장, 그리
고 지점장…….
박 대리는 은행 내에 이렇다 할 연줄이 없었다. 변변치 않은 지방대 출신에다 그
동안 내로라 할 만한 실적을 올린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김 사장
건만 물어 올 수 있다면 사정은 틀려진다. 대리 자격으로 그 많은 돈을 끌어 올
수는 없는 노릇, 지점장의 지원 사격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점장도 무시하
지 못할 성과를 얻게 되기에 명문 사립대 출신의 지점장과 긴밀한 상하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임원 승진을 앞둔 지점장의 인맥이 될 수 있다.
지점장이 은행장이 된다면?
박 대리의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미래까지 연결되고 있었다. 지점장이 은
행장이 될 확률은 농후했다. 현재 경제부처에는 지점장의 동문들이 상당수 포진
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 사장 건이 성공과 이어진다면, 그래서 지점장의 신임을
얻는다면 지점장이 은행장, 아니 상무만 된다 하더라도 충분하게 지점장으로 정
년 퇴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박 대리는 거기까지 상상이 이어지자 자신감이 생겼다. 지방대 출신이면 어떻
고 연줄이 없으면 어떤가. 운이 뒤따라 주면 연줄도 생기고 인맥도 형성된다. 그
렇게 된다면 지점장이 아니라 임원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라고 지점장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시중 은행, 그것도 1, 2위를 다투는 한성은행의 지점장이 된다면 시골에서 고생
을 하고 있는 부모님에게 충분히 효도를 하는 셈이었다. 그뿐인가, 대학 동문회
에서도 무게 있는 감투 하나 정도는 그냥 얻을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자리였다.
그렇지, 꿈이 없는 인간은 박제일 뿐이야.
박 대리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둡고 습한 동굴에서 겨울잠을
자고 나서 밖으로 빠져 나와 푸른 하늘을 보고 긴 기지개를 켜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사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금고문 닫으려면 아직 먼 것 같은데
저녁 내기나 하지.」
현 과장이 어깨를 툭 치고 한 발을 건들거리며 웃었다.
「멤버는 있습니까?」
박 대리가 상상의 날개를 접으며 물었다.
「멤버야 판을 벌여야 모여들지. 이층 김 과장도 한판 친다고 했으니까 가보자고.」
김 과장은 대출 담당 책임자였다. 박 대리는 김 과장 얼굴을 생각하면 저절로 인
상이 찡그려졌다.
생쥐라는 별명처럼 작은 체구에 세모진 턱을 가진 그에게 같은 동료로서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대출을 담당한다면 김 과장보
다 더 하면 더 했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유야 어떻든 신용 대출을 해준 먼 친척이 변제를 하지 못한 책임을 추궁하듯
자기에게 묻는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기분일 수 없었다.
「갈 거야, 안 갈 거야?」
현 과장이 박 대리 책상 위에 있는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며 재
촉을 했다.
「그럽시다. 저녁을 사주겠다는 데 마다할 사람 있습니까?」
김 대리는 책상 서랍을 잠갔다. 갑자기 눈 위가 간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책상 앞에 김희숙이 와 있었다.
「먼저 퇴근하겠어요.」
김희숙은 평범하게 인사를 하는 듯했으나 박 대리가 보기에는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수고했어요.」
왜 화가 났지, 하고 박 대리는 생각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미스 김은 하루가 다르게 예뻐지는 것 같아. 혹시 애인 있는 거 아냐?」
현 과장이 농담투로 말했다.
「과장님이 멋진 남자 한 명 소개해 주세요.」
김희숙이 박 대리 앞을 떠나려다 걸음을 멈추고 맞받아 쳤다.
「어떤 남자가 멋진 남잔데?」
「호호, 과장님이 제 이상형이에요.」
김희숙은 박 대리를 의식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이야! 야, 아까운데. 내가 너무 일찍 결혼을 했어. 몇 년만 참았더라도 미
스 김 같은 미인을 아내로 맞이했을 텐데 말이야.」
현 과장이 낄낄거리며 너스레를 떠는 동안 박 대리는 일어섰다.
「호호, 저도 그래요. 과장님이 결혼만 안 하셨더라도 적극적으로 매달렸을 거예
요.」
「그래? 정말 놀랐는걸. 하지만 난 깨진 쪽박이고, 꿩 대신 닭이라고 박 대리는
어때? 아직 총각이겠다, 충청도 양반이겠다, 핸섬하겠다, 앞길이 훤하겠다, 그야
말로 백 점짜리 신랑 아니야?」
현 과장이 박 대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공연한 소리 하지 마세요. 미스 김 애인 있어요. 괜히 능청 떠는 겁니다.」
박 대리는 듣기가 민망해서 슬쩍 돌려 말했다.
「어, 박 대리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런 것도 보고하나?」
「저 먼저 가겠어요. 편히 쉬세요.」
김희숙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현 과장의 말을 끊어 버리고 이층 탈의실로
향했다. 탈의실 안에는 퇴근 준비를 하는 여직원들이 여러 명 있었다. 화장을 고
치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옷을 갈아입고 옷 매무새를 보아 달라고 하는 직원,
상대방이 입은 옷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는 등 조용한 가운데서도 대화
가 끊이지 않았다.
김희숙은 캐비닛을 열고 문에 달린 거울을 습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아침에 옷을
갈아입을 때 탄력 있던 피부와는 달리 얼굴의 화장은 많이 흐뜨러져 있었고, 피
부의 윤기가 많이 가신 것 같았다.
「김밥 드실 분 모이세요.」
문이 열리면서 대부계 미스 한이 김밥이 든 도시락을 가져왔다.
「웬 김밥!」
「그냥 먹어도 되는 거니?」
「나 다이어트한다는 거 알고 있으면서 지금 누굴 죽일 작정이니?」
직원 몇 명이 미스 한에게 몰려들면서 한마디씩 했다. 김밥을 먹는 모습은 각양
각색이었다. 입 안에 김밥 세 개를 한꺼번에 밀어 넣고서 옷을 갈아입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우물우물 씹으면서 화장을 하는 직원, 김밥을 거저 얻어먹으면서
왜 튀김은 안 사왔냐고 투덜대며 먹는 직원 등 김밥을 먹던 미스 한이 김희숙을
불렀다.
「미스 김 언니, 김밥 좀 드세요. 저 밑에 새로 생긴 체인점에서 사왔는데 진짜
맛있어요.」
「그래, 너나 많이 먹어라.」
김희숙은 웃는 얼굴로 대답을 하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문득 밤에 화장을 하
는 여자는 요부라고 하는 말이 생각나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요부가 아니고 간
통녀라고 해도 박대리 앞에서 아름답게 보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는 생
각에서였다.
「진짜 김밥 맛있다.」
「좀더 사와. 내가 돈 줄게.」
「싫어. 나 오늘 데이트 있어. 목 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먹고 싶은 사람이 사
다 먹어.」
미스 한은 손바닥을 쓱쓱 문지르며 자기 캐비닛 앞으로 갔다.
「데이트한다는 애가 웬 김밥? 남자 친구가 저녁도 안 사주는가 보지?」
「걱정은 접어 두세요. 위가 텅 비어 있는 것보다 어느 정도 차 있어야 식욕이
동한다는 상식도 모르셔!」
미스 한이 휴지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김희숙은 미스 한의 꾸밈없이 밝은 성격에 웃음을 보내며 은근히 배가 고파왔다.
저녁에는 무얼 먹자고 할까?
박 대리는 음식을 가리지 않은 편이었다. 양식이면 양식, 한식이면 한식, 무엇
이든 맛있게 먹는 편이었다. 그 중에서도 소주에 곁들여 먹는 탕 종류를 좋아했
다. 그러다 갑자기 낮의 일이 생각났다. 소도둑놈 같은 고객이 소동을 부릴 때
은근히 박 대리가 도와 주길 기다렸으나, 안상록이 달려왔다는 점은 참을 수 없었다.
단단히 따져야겠어.
김희숙은 그런 생각이 들자 낮의 서운함이 증폭되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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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3부 위험한 오해 ③
박 대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숙직실의 방문을 열었다. 숙직실에는 김 과장과 외
환계의 오 대리가 있었다. 김 과장은 방석을 접어서 큰 대 자로 누워 있었고, 오
대리는 도수 높은 안경 밖으로 영자 신문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자, 선수들 입장합니더.」
오 대리는 현 과장과 박 대리가 들어오자 신문을 한쪽으로 던져 버리고 담요를
폈다.
「밤 일, 낮 장입니더.」
오 대리가 다시 화투목을 중앙에 탁 놓으며 계속 말했다.
「점에 천 원씩이지. 이크, 내가 선 같군.」
김 과장은 바닥에 깔린 여섯 장의 패 중에 두 끗짜리 매조 한 장을 뒤집으며 엄
살을 떨었다.
「아냐, 아직 낮이라고, 높은 게 선이지.」
현 과장은 난초 다섯 끗짜리, 박 대리는 국진 아홉을 잡아 박 대리가 선이었다.
「오늘은 정말 여섯시까지만 치는 겁니다.」
박 대리가 화투목을 들어 섞으며 다짐을 받았다.
「두말하면 잔소리, 난 일곱시에 영등포 갈 일 있어.」
박 대리 옆에 앉은 현 과장이 재떨이를 끌어다 옆에 놓으며 맞장구쳤다.
「여섯시 땡 하면 총알처럼 일어나는 겁니더.」
오 대리는 자기 앞으로 돌아온 화투패를 펴보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가봐야 알지. 괜히 말만 앞장세우지 말고 발바닥에 땀나도록 치라고, 다들.」
네 명 중에 가장 선임인 김 과장이 점잖게 한마디했다. 그는 모두들 이구동성으
로 여섯시까지만 치자고 말을 하지만 어차피 열한시가 넘어야 판이 끝난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그게 명동 지점의 고스톱 룰이기도 했다.
「무광! 나 광 없어.」
김 과장은 박 대리 옆에 앉아 있으므로 박 대리가 선일 때는 광을 팔아야 할
입장이었다. 대충 화투를 훑어본 뒤에 한 손으로 움켜쥐고 눈치를 살폈다.
「이게 뭐꼬, 내는 못 먹어도 고다.」
오 대리가 피 두 장으로 쳐주는 다이아몬드 한 장을 자기 앞에 맵시 있게 던지고
나서 중앙에 있는 목에서 한 장을 가져갔다.
「오 대리, 첫판부터 대형 사고 내겠군. 난 죽었어. 화투가 못 들어와도 이만
저만해야지, 완전히 또이또이라고 뽕치면 일등 하겠네.」
현 과장은 화투를 목에다 얹고 나서 척척 뒤섞었다.
「박 대리는 잘 들어왔어?」
현 과장은 화투목을 중앙에 얌전히 놓고 나서 박 대리의 어깨 너머로 패를 훔쳐
보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이라서 할 수 없이 치는 거죠, 뭐!」
박 대리는 말과 다르게 국진이 석 장 들어 있었다. 이른바 폭탄감이었다. 거기에
다 깔린 패 중에는 국진 껍데기 한 장이 얌전히 깔려 있는 상황이므로 아무리
못 쳐도 피박을 면하는 데는 이상이 없었다.
「왜 이렇게 뒷장이 안 맞아.」
박 대리가 장 껍데기를 내밀고, 같은 껍데기 한 장을 가져오며 투덜거렸다.
「글쎄 말이야. 고스톱은 뭐니 뭐니 해도 뒷장이 잘 맞아야 따는 건데.」
박 대리의 패를 훔쳐본 현 과장이 능청을 떨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예, 화투는 이렇게 치는 거 아입니꺼!」
오 대리는 비 십 끗 자리에 비 껍데기를 딱 소리가 나도록 내려 치고 나서, 한
장을 뒤집어서 국진에다 힘껏 때렸다.
「이크, 이게 뭐꼬? 비 먹으면 비 나온다 카더니, 초반부터 팍 싸브렀네.」
「뭐야, 민폐 끼치는구먼.」
김 과장은 양미간을 좁히며 초 한 장을 내놓고 깔려 있는 초띠짜리 한 장과 뒤
집어서 나온 흑싸리 초단과 껍질을 가져갔다. 박 대리는 순서가 되었으나 판에
깔린 패가 없었다.
어느 것을 내놓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현 과장이 엉덩이를 쿡쿡 찌르며 턱으로
국진을 가리켰다. 폭탄을 터뜨리라는 말 같았다.
「비 치면 비 나오고, 초 치면 초 나온다고 했겠다.」
박 대리는 폭탄은 좀더 기다리자는 생각으로 오 껍데기를 내놓았으나 뒤집은 화
투는 홍싸리띠였다.
「초단이 일등이고마, 화투 칠 필요 없네.」
오 대리는 김 과장이 초단 두 장을 가져다 놓은 것을 보고 아무렇게나 화투를
내팽겨쳤다. 예상외로 비가 나왔다.
「오매, 효자 났네, 효자 났어. 요놈이 내 속을 그렇게 썩이더니 새끼까지 몰고
올 줄 누가 알았노. 빨리빨리 여섯시 되기 전에 한 장씩 주이소.」
오 대리는 신이 났다. 비를 모두 가져오고 박 대리와 김 과장한테 한 장씩 받
으니까 피가 금방 여섯 장이 되었다.
「에라, 초단이나 한 장 나와라.」
김 과장은 화투를 초띠에다 힘있게 쳤다. 그러나 팔광이 나와서 깔려 있는 팔
십 끗짜리를 끌어 갔다.
그렇게 해서 김 과장은 삼 광에 초단까지 했다. 두어 판만 더 돌면 피까지 날
차례였다. 오 대리는 피 여섯 장을 끌어다 놓은 상태에서 지지부진한 상태였고
박 대리는 피 여덟장을 가져다 놓았다.
「음, 오 대리는 날 가망이 없고. 보자, 박 대리는 피가 여덟 장이겠다, 좋다,
돌아. 까짓 것, 써봐야 삼 점이겠지.」
김 과장은 신이 났다. 입술 끝에 계속 물고 있던 담배를 빼고 연기를 내뿜으며
박 대리를 지켜 보았다.
「죄송합니다, 이겁니다.」
박 대리는 들고 있던 국진 석 장을 던지며 폭탄을 했다.
「뭐야? 폭탄이 있었잖아.」
김 과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허탈하게 말했다.
「으매, 박 대리님이 이렇게 예뻐 보일 줄은 몰랐다 아입니꺼.」
그와 반대로 오 대리가 박수를 쳤다. 김 과장이 고를 했기 때문이다.
「자, 몇 점이냐?」
박 대리는 폭탄에다 국진 피 넉 장에, 한 장씩 받은 피 두 장을 합쳐서 피 여섯
장이 늘었다. 거기에다 가지고 있던 피가 여덟 장 합쳐서 열넉 장이면 오 점이었다.
「보자, 광하고 초단은 김 과장님이 했고, 홍단하고 청단, 고도리는 사이좋게
한 장씩 나누어 가졌고…….」
「볼 것도 없이 고지 뭐. 김 과장이 피로 나려면 피가 넉 장이 더 있어야 되는데
쌍피는 모두 나왔잖아. 피박은 모두 면하고.」
현 과장이 자기 일처럼 신이 나서 거들었다.
「좋습니다, 고!」
박 대리가 호기로이 외쳤다. 그 뒤로 세 판이 더 돌아갔고, 박 대리의 실적은 첫
판치고 상당한 소득이었다. 스리 고에, 폭탄에 십일 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면 기본이 일만 일천 원, 거기다 스리 고, 폭탄이라 따,따블로 쳐서 사만 사천
원씩이었다. 그 중에서 김 과장이 고를 했으므로 오 대리는 해당 사항이 없고
김 과장 혼자 팔만 팔천 원을 뒤집어쓴 꼴이었다.
「과장님 첫판부터 죄송합니다!」
박 대리는 싱글싱글 웃으며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받고 일만 육천 원을 거슬
러 주었다.
「김 과장님, 계속 칠 수 있겠습니꺼. 지는 마, 뭐가 뭔지 모른다 안 합니꺼,
우찌 하면 첫판부터 수표가 쑥쑥 나올 수 있습니꺼?」
오 대리가 싱글벙글 웃으며 김 과장에게 초를 쳤다.
「이 사람, 화투는 원래 일어설 때 승부가 판가름나는 법인 줄 모르나!」
김 과장은 오 대리의 말에 화가 발끈 났으나 체면상 화를 토해 낼 수는 없고 마
음속으로 끙끙거리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박 대리가 패를 돌리고 막 첫 장을 내려고 하는 순간 호출기가 울렸다. 김희숙
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전화 번호는 둘이서 단골로 드나드는 신촌에 있는 카페
고흐의 전화 번호였다.
「과장님이 대신 치시죠. 전화 좀 하고 와야겠습니다.」
박 대리는 패를 현 과장에게 건네주었다.
「잃으면 돈은 박 대리가 내는 거야.」
두 판이나 쉬고 있던 현 과장은 웬 떡이냐는 듯한 얼굴로 화투를 받으며 판에 끼
여들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박 대리는 숙직실을 나와 이층에 있는 외환계로 갔다. 외환계 직원들은 하루 일
어나는 거래 전표가 타부서와는 달리 적었던 탓으로 모두 퇴근한 뒤였다.
「여보세요? 호출한 사람 좀 부탁합니다.」
호출기에 찍힌 전화 번호를 누르자 예상했던 대로 김희숙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예요. 신촌 고흐에 있어요. 또 고스톱 치는 거죠? 기다리고 있을 게요.」
「알았어. 일곱시까지 도착하도록 하지.」
박 대리는 그렇지 않아도 퇴근 무렵 김희숙 얼굴이 편해 보이지 않은 것 같아
궁금하던 터였기 때문에 쉽게 약속을 하고 숙직실로 들어갔다.
「어서 와! 고를 할까, 말까?」
현 과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오 대리와 김 과장은 양 피박이었다.
「한 판 더 돌아가도 피박은 면치 못하겠는데요.」
박 대리가 현 과장 옆에 끼어 앉으며 훈수를 들었다.
「좋지, 고!」
결국 현 과장은 십오 점으로 끝을 냈고, 오 대리와 김 과장은 피박을 뒤집어쓰
고 삼만 원씩 현 과장 앞에 내놓았다.
「여섯시까지만 치기로 했으니까 지루하게 고스톱으로 하지 말고 짓고땡으로 돌
리지. 어때, 오 대리?」
김 과장은 단 두 판만에 십이만 원이 나가자 화가 났는지 짓고땡을 제안했다.
「그게 좋겠어요.」
박 대리가 흔쾌히 대답했다. 어차피 고스톱으로 끝날 판이 아니었다. 항상 끝마
무리는 짓고땡으로 해야 승부가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내가 선을 잡지.」
현 과장이 알맹이만 스무 장을 골라 착착 치면서 말했다.
「우선 삼만 원부터 시작하죠.」
오 대리가 안경을 벗어 닦으며 판돈을 제시했다.
「좋아, 다섯 배가 되면 오야 바꾸기다.」
김 과장은 실눈을 뜨며 아예 지갑을 꺼냈다.
「벌써 짓고땡으로 돌아갔습니까?」
지불 계장 안상록이었다. 안상록은 들어오자마자 오 대리와 김 과장의 틈을 비집
고 앉았다.
「마감은?」
시재 당번인 현 과장이 물었다.
「시재는 다 맞았습니다. 계산계에서 입출만 나오면 됩니다.」
「일찍 끝날 것 같아?」
「그거야 끝나 봐야 알죠. 저도 오 자에 만 원 걸겠습니다.」
안상록은 건성으로 대답을 하며 김 과장이 판돈을 건 곳에 만 원을 얹었다.
「그럼, 난 쉬어야겠네.」
판돈이 삼만 원이므로 박 대리는 쉬기로 했다.
「삼만 원밖에 안 놓았습니까? 그럼, 박 대리님이 하시죠. 전 다음에 하기로 하
고.」
안상록이 김 과장 패에 걸었던 돈을 끌어 가며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아니야, 안 계장이 하라고. 어차피 쉽게 끝날 판은 아닌 것 같은데, 뭘.」
「벌써 피바가지 쓴 분이 있단 말입니까?」
안상록이 김 과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날 쳐다보고 묻나?」
김 과장이 기분 나쁜 얼굴로 반문했다. 그는 돈을 잃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
었다. 최소 한도로 본전이 될 때까지는 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박 대리
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말과 안상록이 김 과장을 쳐다보며 묻는 이유도
바로 그런 것 때문이었다.
「자, 육만 원입니다.」
현 과장이 가보를 잡아서 판돈이 육만 원으로 늘었다.
「내가 삼만 원 가지.」
현 과장이 다시 패를 돌리자 김 과장이 솔에다 만 원권 석 장을 척 갖다 놓았다.
「이만 원씩 골고루 가지 그래요?」
현 과장이 싫지 않은 얼굴로 김 과장에게 물었다.
「왜 이래, 벌써 이십만 원이나 나갔다고.」
김 과장은 양보하지 않았다.
「뭐라고요? 벌써 그런 거금이 나갔단 말입니까?」
안상록이 실실 웃으며 물었다.
「무슨……. 겨우 십만 원짜리 한 장 나갔을 뿐인데.」
현 과장이 웃기지 말라는 얼굴로 말했다.
「현 과장님요, 엊지녁에 무슨 꿈을 꿨습니꺼? 돼지꿈이라도 꿨는가예. 아주 자
신이 만만하네예.」
오 대리가 농담 섞인 음성으로 내뱉는 말을 들으며 박 대리는 슬며시 숙직실을
나왔다. 김희숙에게 가야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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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3부 위험한 오해 ④
카페 고흐는 신촌 로터리를 벗어나 작은 골목에 박혀 있는 다섯 평 남짓한 작은
카페였다. 주로 단골 손님 위주로 영업을 하였기 때문에 한자리에 앉아 하루 종
일 책을 보거나, 잡담을 나누어도 주인의 눈총을 받지 않는 장소이기도 했다.
「낮에 그게 뭐예요?」
박 대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김희숙이 토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거야? 영문이나 알자.」
박 대리는 유니폼을 입지 않은 김희숙을 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
다. 하긴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결혼 상대자로 점찍은 것이기도 했다.
「그 뭐예요, 산적 두목 같은 놈한테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 있는데도 자기가 도
와 줘야지, 왜 안상록 씨가 달려오게 만드는 거예요?」
「아, 난 또 뭐라고. 다른 사람들 눈 때문에 그랬어.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사이
를 이상하게 보는 눈이 많은데 내가 달려가 봐. 더 이상하게 볼 거 아냐.」
「누가 이상한 눈으로 본다고 그래요. 할말이 없으니까 변명하시는 거 아녜요?」
「어허, 미스 성도 우리 사이를 알고 있는 것 같던데 뭘.」
박 대리와 김희숙이 작은 음성으로 토닥거리고 있을 때 주인인 염 여사가 다가왔다.
「두 분 사랑싸움하시나 봐.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뭘 마셔야지.」
녹색의 개량 한복을 시원스럽게 차려 입은 염 여사가 사람 좋게 웃으며 주문을
청했다.
「커피로 주세요.」
김희숙이 화가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주문을 했다.
「미스 김, 화가 많이 났나 봐. 박 대리님, 오늘 단단히 각오를 해야겠는걸.」
염 여사가 가자 김희숙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말예요. 집에서는 해를 넘기지 말라고 성화가 대단하다고요」
김희숙은 지금까지의 말투와 다르게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그 문제에 대해서 말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우리 올해는 참고 내년 일월
에 결혼하자.」
박 대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일월에 과장으로 진급을 시켜 준다는 김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꼭 일월에 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전 가능하면 올해를 넘기지 않았으면 좋
겠어요. 내년이면 이십대 후반으로 접어든다고요. 서른 살 쪽으로 꺾어진단 말이
에요.」
「스물다섯이나 여섯이 무슨 차이가 있다고 야단이야. 중요한 건 내가 희숙이를
얼마만큼 사랑하느냐가 아니야?」
박 대리는 염 여사가 가지고 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염 여사가 끓여
준 커피는 진하고 맛이 있었다.
「커피 맛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박 대리는 카운터에 앉아 책을 뒤적이고 있는 염 여사에게 찡긋거리며 인사를 했다.
「두 분 싸우시는 것 같아 특별히 맛있게 끓여 준 거니 어서 화해하세요.」
염 여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머! 우리 싸우는 거 아니에요. 화가 난 것도 아니고요.」
김희숙은 염 여사에게 밝게 웃어 보이며, 박 대리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알지만 여자에겐 한 살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르실 거예요. 이십대 중
반이면 금방 서른이 되는 나이잖아요.」
「어째서 금방 서른이 되나? 음력으로 따지면 내년 일월도 스물다섯 살이나 마찬
가지인데.」
박 대리는 김희숙의 손을 잡았다. 통통한 손가락이었다. 문득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누르던 오수미의 마디가 길고 가는 손가락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손
은 편안해 보이지 않았고 왠지 불안했다. 김희숙의 손가락은 그렇지 않았다. 정
겹고 가슴을 편안하게 해주는 손이었다. 하지만 현재로선 통통한 손이나 가는
손 모두 필요했다.
「그럼, 내년 일월에 결혼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 줘요. 저도 알 권리가 있잖아요.」
김희숙도 박 대리의 손을 마주 잡았다. 사랑스러운 손이었다. 직장에서는 너무
서운해서 화가 났지만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면 품에 안겨 응석이라도 부리
고 싶은 손이었다.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어. 두어 달 후면 내가 왜 일월에 결혼을 해야 하는지 이
유를 알 수 있을 거야.」
박 대리는 오늘 집에 들어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김희숙과 저녁을 먹고 술
한잔 한 다음에 노래방에라도 가서 스트레스를 풀고 품에 안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새삼스럽게 김희숙의 커다란 젖가슴이 그리워졌다.
「점점 더 궁금하네요. 도대체 그 이유가 뭐예요?」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그래. 하지만 빅 뉴스가 될 것은 틀림없어. 그러니까 궁
금해도 두어 달만 참아. 일만 잘되면 희숙이한테 제일 먼저 알려 줄 테니까, 알
았지? 그 대신 우리 어디 가서 술 한잔 하고 오랜만에 희숙이 찌찌나 먹을까?」
「아이, 염 여사 듣겠어요.」
김희숙의 얼굴이 금방 붉게 타올랐다. 사실 그녀도 오늘 집에 들어가지 않을 계
획이었다. 혼자 살고 있는 것은 김희숙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었
다. 틀린 게 있다면 박 대리는 작은 원룸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이고, 그녀는
단독 주택의 출구가 다른 이층집을 전세 내어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좋아. 그럼, 우리 어디로 갈까. 간단하게 한잔 하고 노래방에 가자고, 어때?」
「정말이죠? 어서 가요.」
김희숙의 입이 함지박만해지며 핸드백을 챙기고 있을 때 박 대리의 호출기가 울
렸다.
「삐삐 왔네. 이 시간에 올 데가 없는데. 김 과장이 알거지가 됐나?」
박 대리는 숙직실 패거리한테 퇴근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슬며시 빠져 나온 것
때문에 호출을 했나 하는 생각을 하며 번호를 확인했다. 낯선 번호였다.
누구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중 전화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런, 카드 전화기잖아.」
다시 카운터 앞으로 갔다. 김희숙은 커피값을 계산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화 카드가 없어서 전화 한 통화 해야겠습니다.」
「한 통화에 백 원씩이에요.」
염 여사가 웃으며 카운터 아래 있던 전화를 카운터 위에 올려 놓았다. 신호음이
떨어지자마자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누가 카페나 커피 숍에서 호출을 한 모
양이었다. 누굴까? 박 대리는 호출한 사람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호출기에 찍힌
전화 번호도 전혀 모르는 번호였기 때문이다.
「저예요, 오수미.」
음성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오수미였다.
「뭐라고요? 오수미 씨!」
박 대리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뒤에 김희숙이 서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큰소
리로 오수미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김희숙의 눈동자가 크게 확대되고 있는 것을
박 대리가 알 턱이 없었다. 그녀는 박 대리가 가출했던 아들이 귀가한 것을 반
기는 어미처럼 반가운 음성으로 여자 이름을 부르자 온몸이 긴장되어 오는 걸 느
꼈다. 염 여사는 커피잔을 치우러 테이블에 가 있는 중이었다.
「은행에 전화를 했더니 이미 한 시간 전에 퇴근을 했다고 하더군요.」
「내가 전화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 줄 알아?」
「후후, 알 만해요. 하지만 오늘 만나면 보답이 될 거예요.」
박 대리는 오수미의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드디어 일이 성사되어 가는 것을 느
끼며 온몸이 떨릴 정도로 흥분이 밀려왔다.
「알았어. 거기 어디야? 지금 당장 달려가지.」
박 대리는 킬킬거리는 김 사장의 웃음소리와 서늘한 오수미의 눈매가 겹쳐 떠오
르는 순간, 쾌재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뒤에 서 있는 김희숙은 그
정반대의 선에 서있었다.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뒤에 서 있는 줄 알면서…….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참으며 밖으로 나갔다. 밖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골목 끝 신촌 로터리에는 차량의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로터리에 있
는 건물 옥상에 설치된 거대한 음료수 병이 네온 사인에 둘러싸인 체 반짝거릴
때마다 나를 마셔, 나를 먹으라니까, 하고 속삭였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먹장구름이 끼어 있었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성급한 판단인지 모르지. 친척일 수도 있잖아.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내고 박 대리가 나오길 기다렸다.
「이거 어떡하지.」
박대리가 바쁘게 뛰어나와 김희숙 앞에 섰다.
「왜요?」
김희숙은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반문했다.
「오늘 희숙이하고 같이 못 있겠는걸.」
박 대리는 이유야 어떻든 이 시간에 여자를, 그것도 술집의 호스티스를 만나러
간다고 바른대로 말을 할 수가 없어 머뭇거렸다.
「만나자는 삐삐예요?」
김희숙은 오수미란 여자가 만나자는 삐삐예요, 하고 물으려다가 앞의 말을 빼버
렸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을 보면 친척은 아닌 게 분명했다. 실낱 같은 희망
이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존심이 있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응. 현 과장님한테 온 삐삐인데, 저번에 만난 거래처 손님이 오늘 꼭 만나자는
거야. 정말 미안하게 됐어. 모처럼 같이 지내려고 했는데 말이야.」
박 대리는 오수미와 밤을 보내고 김희숙에게 현 과장 핑계를 대고 넘어갔던 때
를 떠올리며 빠르게 변명을 했다.
「현 과장님이?」
사람은 극도로 절망하거나, 분노가 치밀면 냉정해지는 법이다. 김희숙의 음성에
는 아무런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래.」
「얼마나 중요한 약속인데 그래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자고 해놓고선…….」
김희숙은 박 대리의 말이 거짓으로 와닿았다.
「내 앞날이 좌지우지될 만한 거래선이야. 그러니 오늘은 그냥 집에 들어가. 그
대신 내일은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알았지? 참, 그리고 이거 받아둬. 그냥 집
에 들어가기 뭐하거든, 친구라도 불러내서 한잔 하고 들어가든지. 맛있는 거 사
먹고 가.」
박 대리는 숙직실에서 김 과장에게 받은 십만 원권 수표를 김희숙에게 건네주었다.
「됐어요. 그만한 여유는 저도 있어요. 어서 가보세요.」
김희숙은 강하게 거절했다.
「아냐, 미안해서 주는 거니까 받아. 그렇다고 내일 어물쩍 넘어가겠다는 뜻은
아니니까 안심하고. 그리고 어서 빨리 가자. 방배동까지 가려면 차가 안 밀릴는
지 모르겠네.」
박 대리는 서둘러서 김희숙의 어깨를 껴안고 골목을 빠져 나갔다. 그 동안 김희
숙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박 대리는 박 대리 나름대로 오수미가 어떤 말을
할까 하는 궁금증때문에 김희숙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전철역 가까이 와서 김희숙이 걸음을 멈추며 냉정을 되찾고 물었다.
「뭔데 그래? 빨리 말해.」
박 대리는 한시가 급했다. 신촌역에서 전철을 타고 가서, 다시 바꿔 타고 방배역
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가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데, 은행원으로서의
앞날이 걸려 있는 오수미를 기다리게 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
「한마디 대답만 해주면 돼요.」
「지금 말해야 되는 거야? 내일 말하면 안 돼? 난 지금 빨리 가봐야 한다고.」
「일이 먼저예요, 아니면 제가 먼저예요?」
김희숙이 차갑게 물었다.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농담할 시간이 아니라고. 당연히 희숙이가 먼저지.」
박 대리는 어이가 없었다. 일천억 원을 유치하느냐 못 하느냐, 초를 다투는 중
요한 순간에 그런 문제를 갖고 심각하게 묻는 김희숙을 보고 여자란 어쩔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담이 아니에요. 분명히 말해 주세요.」
「농담이 아니라면, 그걸 말이라고 묻는 거야?」
「저에겐 중요해요. 빨리 대답해 주세요.」
「그래, 분명하게 대답해 주지. 희숙이가 먼저야. 됐지?」
박 대리는 시간을 봤다. 빨리 서둘러야 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요. 그 말이 진실이라면 오늘 현 과장님을 만나지 말고 저와 함께 있어 주세요.」
김희숙은 간절했다.
「화났어? 하지만 화를 낼 문제가 아냐. 희숙이는 죽을 때까지 같이 있을 수 있
지만, 일이란 기회와 때를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 알았지? 그럼, 내일 은행
에서 보자고.」
박 대리는 김희숙이 대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을 내어 이해를 구하
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지점장은커녕 차장자리에서 은퇴를 하고 말 것 같은 조바심이 일어났다.
「알겠어요.」
김희숙은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오수미란 여자의 이름을 듣지만 않았어도 박
대리를 붙잡고 정말 꼭 가야 하느냐고 계속 따져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여자
를 만나러 가기 위해 결혼 상대자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달려가고 있는 박 대리를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
흐 앞에서 무작정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 미터쯤 앞에서 걸어가는 박 대리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박 대리는 곧
인파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막연한 불안감이 스멀거리며 차오르고 있음을 느꼈
다. 그 불안감이 어쩌면 다시는 박 대리와 고흐에서 만나는 일이 없을지도 모
른다는 상상으로 이어지자 그녀는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을 쳐다보며 몸을 부
르를 떨었다.
▶욕망의 게임◀ 제3부 위험한 오해 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서 은행도 한가해지기 시작했다. 서늘한 객장에 앉아
유리창 밖을 보면, 건물과 아스팔트에서 내뿜는 열기가 이글거리며 아지랑이처럼
솟아올라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를 실감케 했다.
점심 시간에는 인근 사무실 아가씨들이나 샐러리 맨들이 점심을 먹고 시원한 객
장으로 몰려들어 잡지를 뒤적거렸다. 뿐만 아니라 볼일이 있어 명동에 왔던 행
인들도 땀을 식히러 은행으로 들어와 한참씩 앉아 있는 일이 많아졌다.
한성은행 명동 지점 같은 경우는 가계성 예금을 하는 일반 고객보다 기업 고객이
많은 터여서 본격적인 여름이 되자 마감 시간이 임박할 때를 제외하고는 낮에는
파리를 날릴 지경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한가했다. 고객들이 순서를
기다리느라 번호표를 뽑을 필요도 없었다.
창구에 앉아 있는 여행원들은 정면을 바라보며 귓속말로 옆 동료와 잡담을 나누
거나 아무 생각 없이 멍청히 유리창 밖 풍경에 시선을 던지고 있다가 손님이 오
면 버릇처럼 웃으며 일어나 용무를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아 명상을 즐기는 듯
한 표정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중에서 김희숙 옆에 앉은 미스 성의 경우는 짜증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스 성을 정면으로 하고 소파에 앉아 있는 뚱뚱한 중년 사내 때문이었다. 뚱뚱
한 체구에다 검은테 안경까지 쓰고 있어 앞이 꽉 막힌 듯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기는 그는 정확히 이십 분 간격으로 통장을 내밀며 입금 여부를 확인했다. 미
스 성이 자동 통장 정리기를 사용하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아직 입금이 안 됐어요. 그쪽에 전화를 해보지 그러세요.」
미스 성이 애써 화를 참으며 다시 말했다.
「전화를 백 번도 더 했다고. 입금시키러 간 지가 두 시간도 넘었는데 아직 입금
이 안 됐다면 컴퓨터에 이상이 있는 거 아니야?」
「저도 부산 지점에 전화를 해봤어요. 그쪽에도 온라인이 다운되지 않았대요.
우리 쪽도 이상이 없고요. 그러니 다시 한 번 전화를 해보세요.」
미스 성은 짜증스럽게 내뱉고 나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귓속말로 옆자리의
김희숙에게 별꼴이야, 정말 생긴 대로 놀고 있네, 하고 속삭였다.
「아니, 아가씨, 지금 뭐라고 했어? 뭐, 생긴 대로 놀고 있어! 야, 너 말 다 했어?」
중년 사내의 느닷없는 고함소리가 잔잔한 수면에 바위를 던진 것 같은 파문을
일으켰다. 객장에 앉아 있는 손님은 물론 일층에 있는 직원 모두의 시선이 중년
사내와 미스 성에게 몰렸다.
「제가 언제 그랬어요?」
미스 성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빨개진 얼굴로 빠르게 쏘아붙였다.
「방금 이 아가씨한테 생긴 대로 놀고 있다고 지껄이지 않았어? 그렇지 않아도
일 초라도 빨리 송금해야 할 돈 때문에 오장이 바싹바싹 마르고 있는 중인데
뭐, 생긴 대로 놀고 있어? 그래, 나, 생긴 대로 논다. 내가 생긴 대로 논다고
니가 이자라도 한푼 줬냐?」
중년 사내의 말이 험악해지기 시작하자 미스 성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저씨, 고정하세요.」
옆자리에 앉은 김희숙도 얼굴이 빨개지긴 마찬가지였다. 사내가 말을 할 때마다
튀기는 침을 피하며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로 진정을 시켰다.
「아가씨도 분명 들었지. 이 아가씨가 방금 한 말!」
중년 사내의 화살이 김희숙에게 돌아갔다.
「뭐라고 했는데요?」
「아니, 이것들이 단체로 멀쩡한 사람을 귀머거리로 만들려고 포룡환을 처먹었
나. 여기 서 있는 내 귀에까지 똑똑히 들려 왔는데 아가씨 귀에 대고 하는 말
을 못 들었단 말야? 아가씨, 귀 포경인가?」
중년 사내의 말은 거침없었다. 그 소리에 창구에 앉아 있는 여직원들은 일을 하
면서도 슬쩍슬쩍 중년 사내의 붉으락푸르락하는 표정을 살피느라 정숙해야 할 은
행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손님, 고정하시고 이 안으로 들어오세요. 네? 손님.」
어느 틈에 지불 계장 안상록이 객장으로 나와 중년 사내의 허리를 잡고 사근사
근한 말투로 달랬다. 그는 고참 행원으로서 대리 진급 시험에 전 과목 합격을
하고 발령나기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다.
「들어가긴 어딜 들어가! 이년들이 싸잡아서 멀쩡한 사람 귀머거리로 만들고 있
는데.」
중년 사내는 안상록이 부드럽고 사근사근한 말투로 달래자 한 풀 꺾인 음성으로
말하긴 했으나 억양에는 여전히 분노가 섞여 있었다.
「알겠습니다. 직원들한테는 제가 조치를 취할 테니 일단 들어오셔서 시원한
커피 한잔 하시며 기다리시죠.」
이런 경우는 무조건 손님을 객장 안으로 모시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객장에서
는 제아무리 총탄에 설맞은 멧돼지처럼 날뛰던 사람도 일단 객장 안으로 모셔서
커피를 대접하며 살살 달래면 화가 사그라지게 마련이었다.
중년 사내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웬만해선 이렇게 조용한 장소에서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쇼. 지금 세시까지 급하게 송금할 돈이 있는데 부산에서는 한시에
송금한다고 나간 놈은 소식도 없지, 날은 열불나게 덥지, 그렇지 않아도 속이 부
글부글 끓고 있던 참인데 그런 말을 듣고 화를 안 내게 되었나 생각을 해보시라
이겁니다.」
「알겠습니다. 우선 시원한 냉커피나 한잔 드시죠. 그리고 통장 이리 주십시오.
제가 확인을 해볼 테니.」
안상록의 역할은 중년 사내를 안으로 데리고 오는 것으로 끝났다. 다음은 박 대
리가 사내를 구슬려야 할 참이었다. 사내 입장에서 볼 때 뒷좌석에 앉아 있는 박
대리까지 우습게 볼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염두에 둔 작전 아닌 작전이었다.
「이거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백팔십도 변했다. 조금 전까지 소도둑놈 같은 인상을 쓰며 고
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기개는 간 곳이 없고, 주인에게 냅다 걷어챈 강아지처럼
고분고분했다.
「뭘요, 일이라는 게 가끔 이렇게 착오가 날 때도 있는 법이지요. 미스 김, 이
통장에 입금됐나 다시 한 번 확인해 줘요.」
박 대리가 김희숙을 불렀다. 김희숙은 대답도 하지 않고 뾰로통한 얼굴로 다가왔
다. 박 대리는 통장을 건네주면서 슬쩍 잔고를 봤다. 잔고는 몇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입출금은 많았다. 어디선가 입금이 되는 즉시 빼서 다른 은행으
로 입금을 하거나 송금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요 근처에서 사업을 하시나 보죠?」
전화위복이랬다. 박 대리는 슬금슬금 사내의 정체를 캐기 시작했다. 그의 짐작대
로라면 사내는 단순한 성격이었다. 이런 사내일수록 작은 친절에도 쉽게 감동한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네. 로열호텔 뒷골목에서 조그만 오퍼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담배 한 대 태우시죠.」
박 대리는 담배를 권한 뒤 우리 은행과 거래를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은행에 넣어 둘 돈이 있어야지요.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처지라 만날 빈털
터리죠.」
「하하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웬만하면 우리 은행하고 거래를 하시죠. 오퍼상
을 하신다면 꽤 많은 자금이 오고 갈 텐데.」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중국에서 수입한 물건이 소비되는 대로 한성
은행에 당좌 거래를 틀 예정이었습니다. 한데 아가씨들이 버릇이 없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명함입니다. 도움이 필
요하실 땐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박 대리는 순한 양으로 변한 사내에게 명함을 건넸다.
「이거 쑥스러워서, 이건 제 명함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명함을 꺼내서 주었다. 전화가 세 대 있는 것을
보니 그런 대로 거래를 틀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 입금이 안 됐네요.」
김희숙이 통장을 박 대리에게 건네주며 쌀쌀맞게 말했다. 그녀는 자기가 곤경에
빠져 있을 때 뒤에 있던 박 대리가 얼른 와서 거들어 주지 않은 것을 못내 서운
해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쪽에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전화를 해보시죠. 전화를 빌려 드릴
까요?」
박 대리가 사내에게 통장을 건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닙니다. 사고가 아닌 이상 한시에 입금하러 나갔는데 지금까지 입금이 안 될
리는 없죠. 커피 잘 마셨습니다. 허허.」
사내는 일그러진 얼굴로 억지웃음을 지으며 황망히 객장을 나갔다. 박 대리는
사내의 명함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제일상사 김억수란 이름 밑에 전화 번호
와 호출·핸드폰·팩스 번호 외에 별다른 사항이 없었다.
은행은 다시 일상적인 분위기 속으로 빠져 들었다. 언제 곰 같은 사내가 침을
튀기며 소란을 피웠는가 싶을 정도였다. 가끔 실내 마이크로 손님의 이름을 부르
는 소리, 전화기 울리는 소리 등이 잔잔한 침묵을 깨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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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3부 위험한 오해 ②
네시 삼십분, 벽시계의 분침이 정확히 6이라는 숫자를 가리키자 서인석이 셔터
를 내렸다. 일순간 밖의 빛이 차단되면서 객장 안이 약간 어두워졌다. 뱅크대 앞
에는 아직 용무를 마치지 않은 몇몇의 손님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창구 앞에 손님이 없는 여행원들은 빠르게 마감 준비를 했다. 하루 동안 돈을
받고 내준 전표를 챙겨셔 입금 전표와 출금 전표의 합계를 낸다. 그리고 남은
차액과 현재 가지고 있는 시재(남은 돈)의 합계가 일치하는지 여부를 파악해서
정확히 맞으면 마감은 끝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일계표를 작성하여 돈을
권액별로 분류, 기재한 다음에 지불계로 가져간다.
지불 계장인 안상록은 가져온 돈과 일계표의 일치 여부를 확인한 다음에 인수를
해서 권액별로 분류한 후 뭉치로 만들어 금고 안에 넣어 둔다. 그렇게 해서 지
점 전체의 입출금이 맞으면 일일 결산이 끝나는 셈이다.
이 시간이 되면 하루 종일 경직된 얼굴로 앉아 있던 직원들의 얼굴 가득히 해방
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조용조용 속삭이던 음성의 톤도 높아지고, 여기저기 약속
전화를 걸기도 하며 퇴근 시간인 여섯시가 되길 기다린다.
대리급 이상의 사람들은 더 이상 결재할 전표가 없으므로 도장을 잘 닦아서 서
랍에 넣고 잠그거나 포켓 안에 집어 넣는 것으로 하루 일을 끝낸다. 그러나 금고
당번이라 일컫는 시재 당번은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 하루 종일 거래한 전표의
합계와 금고에 남아 있는 돈이 일치하는지 여부를 확인한 다음에 외금고와 금고
실을 잠가야 하기 때문이다.
박 대리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천천히 마시면서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오늘 일산하자고.」
오늘의 시재 당번인 현 과장이 전표를 걷으러 다니는 계산계 직원에게 한마디했
다. 일산이란 단 한 번에 입출을 맞추자는 말이다. 그러나 한성은행 명동 지점
같은 경우는 쉽게 일산이 나오지 않는다. 일층과 이층에 근무하는 백여 명이 내
놓는 하루 전표 양만 해도 칠, 팔백 장이 넘었다. 그 많은 전표를 계정 과목별로
분류하여 단 한 번에 입출을 맞추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박 대리는 종이컵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지며 오수미를 생각했다. 그녀는 이
주일 전에 장흥에서 진하게 섹스를 나눈 뒤로 지금까지 소식이 없었다. 그녀가
근무하는 룸살롱 사하라에나 슬쩍 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떨쳐 버렸
다. 김 사장이 한 말이나 오수미의 행동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더 기다
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답답한 것은 김 사장이 그만한 돈을 어떠한 방법으로 어느 은행에 예치를 시켜
두었느냐 하는 점이었다. 추측이 가는 것은 가장 쉽고 보편적인 방법으로, 여러
은행에 분산해서 양도성 정기 예금 증서인 CD를 사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수미
로부터 연락이 오는 시기가 바로 그 CD가 만기되는 때일 것이다.
「돌아오는 해에 틀림없이 과장을 시켜 주지.」
김 사장의 말이 생각났다. 김 사장 집에 다녀온 후로 지금처럼 한가하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간헐적으로 떠오르는 말이었다. 그 말은 한마디로 과장으로 진급할
수 있을 정도의 실적을 안겨 준다는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오십여 명의 입행
동기 중 선두 대열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비록 대리 진급은 첫해
에 되지 않고 그 다음해에 됐다지만 문제는 과장부터이다. 그 다음엔 차장, 그리
고 지점장…….
박 대리는 은행 내에 이렇다 할 연줄이 없었다. 변변치 않은 지방대 출신에다 그
동안 내로라 할 만한 실적을 올린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김 사장
건만 물어 올 수 있다면 사정은 틀려진다. 대리 자격으로 그 많은 돈을 끌어 올
수는 없는 노릇, 지점장의 지원 사격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점장도 무시하
지 못할 성과를 얻게 되기에 명문 사립대 출신의 지점장과 긴밀한 상하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임원 승진을 앞둔 지점장의 인맥이 될 수 있다.
지점장이 은행장이 된다면?
박 대리의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미래까지 연결되고 있었다. 지점장이 은
행장이 될 확률은 농후했다. 현재 경제부처에는 지점장의 동문들이 상당수 포진
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 사장 건이 성공과 이어진다면, 그래서 지점장의 신임을
얻는다면 지점장이 은행장, 아니 상무만 된다 하더라도 충분하게 지점장으로 정
년 퇴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박 대리는 거기까지 상상이 이어지자 자신감이 생겼다. 지방대 출신이면 어떻
고 연줄이 없으면 어떤가. 운이 뒤따라 주면 연줄도 생기고 인맥도 형성된다. 그
렇게 된다면 지점장이 아니라 임원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라고 지점장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시중 은행, 그것도 1, 2위를 다투는 한성은행의 지점장이 된다면 시골에서 고생
을 하고 있는 부모님에게 충분히 효도를 하는 셈이었다. 그뿐인가, 대학 동문회
에서도 무게 있는 감투 하나 정도는 그냥 얻을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자리였다.
그렇지, 꿈이 없는 인간은 박제일 뿐이야.
박 대리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둡고 습한 동굴에서 겨울잠을
자고 나서 밖으로 빠져 나와 푸른 하늘을 보고 긴 기지개를 켜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사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금고문 닫으려면 아직 먼 것 같은데
저녁 내기나 하지.」
현 과장이 어깨를 툭 치고 한 발을 건들거리며 웃었다.
「멤버는 있습니까?」
박 대리가 상상의 날개를 접으며 물었다.
「멤버야 판을 벌여야 모여들지. 이층 김 과장도 한판 친다고 했으니까 가보자고.」
김 과장은 대출 담당 책임자였다. 박 대리는 김 과장 얼굴을 생각하면 저절로 인
상이 찡그려졌다.
생쥐라는 별명처럼 작은 체구에 세모진 턱을 가진 그에게 같은 동료로서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대출을 담당한다면 김 과장보
다 더 하면 더 했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유야 어떻든 신용 대출을 해준 먼 친척이 변제를 하지 못한 책임을 추궁하듯
자기에게 묻는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기분일 수 없었다.
「갈 거야, 안 갈 거야?」
현 과장이 박 대리 책상 위에 있는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며 재
촉을 했다.
「그럽시다. 저녁을 사주겠다는 데 마다할 사람 있습니까?」
김 대리는 책상 서랍을 잠갔다. 갑자기 눈 위가 간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책상 앞에 김희숙이 와 있었다.
「먼저 퇴근하겠어요.」
김희숙은 평범하게 인사를 하는 듯했으나 박 대리가 보기에는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수고했어요.」
왜 화가 났지, 하고 박 대리는 생각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미스 김은 하루가 다르게 예뻐지는 것 같아. 혹시 애인 있는 거 아냐?」
현 과장이 농담투로 말했다.
「과장님이 멋진 남자 한 명 소개해 주세요.」
김희숙이 박 대리 앞을 떠나려다 걸음을 멈추고 맞받아 쳤다.
「어떤 남자가 멋진 남잔데?」
「호호, 과장님이 제 이상형이에요.」
김희숙은 박 대리를 의식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이야! 야, 아까운데. 내가 너무 일찍 결혼을 했어. 몇 년만 참았더라도 미
스 김 같은 미인을 아내로 맞이했을 텐데 말이야.」
현 과장이 낄낄거리며 너스레를 떠는 동안 박 대리는 일어섰다.
「호호, 저도 그래요. 과장님이 결혼만 안 하셨더라도 적극적으로 매달렸을 거예
요.」
「그래? 정말 놀랐는걸. 하지만 난 깨진 쪽박이고, 꿩 대신 닭이라고 박 대리는
어때? 아직 총각이겠다, 충청도 양반이겠다, 핸섬하겠다, 앞길이 훤하겠다, 그야
말로 백 점짜리 신랑 아니야?」
현 과장이 박 대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공연한 소리 하지 마세요. 미스 김 애인 있어요. 괜히 능청 떠는 겁니다.」
박 대리는 듣기가 민망해서 슬쩍 돌려 말했다.
「어, 박 대리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런 것도 보고하나?」
「저 먼저 가겠어요. 편히 쉬세요.」
김희숙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현 과장의 말을 끊어 버리고 이층 탈의실로
향했다. 탈의실 안에는 퇴근 준비를 하는 여직원들이 여러 명 있었다. 화장을 고
치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옷을 갈아입고 옷 매무새를 보아 달라고 하는 직원,
상대방이 입은 옷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는 등 조용한 가운데서도 대화
가 끊이지 않았다.
김희숙은 캐비닛을 열고 문에 달린 거울을 습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아침에 옷을
갈아입을 때 탄력 있던 피부와는 달리 얼굴의 화장은 많이 흐뜨러져 있었고, 피
부의 윤기가 많이 가신 것 같았다.
「김밥 드실 분 모이세요.」
문이 열리면서 대부계 미스 한이 김밥이 든 도시락을 가져왔다.
「웬 김밥!」
「그냥 먹어도 되는 거니?」
「나 다이어트한다는 거 알고 있으면서 지금 누굴 죽일 작정이니?」
직원 몇 명이 미스 한에게 몰려들면서 한마디씩 했다. 김밥을 먹는 모습은 각양
각색이었다. 입 안에 김밥 세 개를 한꺼번에 밀어 넣고서 옷을 갈아입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우물우물 씹으면서 화장을 하는 직원, 김밥을 거저 얻어먹으면서
왜 튀김은 안 사왔냐고 투덜대며 먹는 직원 등 김밥을 먹던 미스 한이 김희숙을
불렀다.
「미스 김 언니, 김밥 좀 드세요. 저 밑에 새로 생긴 체인점에서 사왔는데 진짜
맛있어요.」
「그래, 너나 많이 먹어라.」
김희숙은 웃는 얼굴로 대답을 하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문득 밤에 화장을 하
는 여자는 요부라고 하는 말이 생각나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요부가 아니고 간
통녀라고 해도 박대리 앞에서 아름답게 보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는 생
각에서였다.
「진짜 김밥 맛있다.」
「좀더 사와. 내가 돈 줄게.」
「싫어. 나 오늘 데이트 있어. 목 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먹고 싶은 사람이 사
다 먹어.」
미스 한은 손바닥을 쓱쓱 문지르며 자기 캐비닛 앞으로 갔다.
「데이트한다는 애가 웬 김밥? 남자 친구가 저녁도 안 사주는가 보지?」
「걱정은 접어 두세요. 위가 텅 비어 있는 것보다 어느 정도 차 있어야 식욕이
동한다는 상식도 모르셔!」
미스 한이 휴지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김희숙은 미스 한의 꾸밈없이 밝은 성격에 웃음을 보내며 은근히 배가 고파왔다.
저녁에는 무얼 먹자고 할까?
박 대리는 음식을 가리지 않은 편이었다. 양식이면 양식, 한식이면 한식, 무엇
이든 맛있게 먹는 편이었다. 그 중에서도 소주에 곁들여 먹는 탕 종류를 좋아했
다. 그러다 갑자기 낮의 일이 생각났다. 소도둑놈 같은 고객이 소동을 부릴 때
은근히 박 대리가 도와 주길 기다렸으나, 안상록이 달려왔다는 점은 참을 수 없었다.
단단히 따져야겠어.
김희숙은 그런 생각이 들자 낮의 서운함이 증폭되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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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3부 위험한 오해 ③
박 대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숙직실의 방문을 열었다. 숙직실에는 김 과장과 외
환계의 오 대리가 있었다. 김 과장은 방석을 접어서 큰 대 자로 누워 있었고, 오
대리는 도수 높은 안경 밖으로 영자 신문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자, 선수들 입장합니더.」
오 대리는 현 과장과 박 대리가 들어오자 신문을 한쪽으로 던져 버리고 담요를
폈다.
「밤 일, 낮 장입니더.」
오 대리가 다시 화투목을 중앙에 탁 놓으며 계속 말했다.
「점에 천 원씩이지. 이크, 내가 선 같군.」
김 과장은 바닥에 깔린 여섯 장의 패 중에 두 끗짜리 매조 한 장을 뒤집으며 엄
살을 떨었다.
「아냐, 아직 낮이라고, 높은 게 선이지.」
현 과장은 난초 다섯 끗짜리, 박 대리는 국진 아홉을 잡아 박 대리가 선이었다.
「오늘은 정말 여섯시까지만 치는 겁니다.」
박 대리가 화투목을 들어 섞으며 다짐을 받았다.
「두말하면 잔소리, 난 일곱시에 영등포 갈 일 있어.」
박 대리 옆에 앉은 현 과장이 재떨이를 끌어다 옆에 놓으며 맞장구쳤다.
「여섯시 땡 하면 총알처럼 일어나는 겁니더.」
오 대리는 자기 앞으로 돌아온 화투패를 펴보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가봐야 알지. 괜히 말만 앞장세우지 말고 발바닥에 땀나도록 치라고, 다들.」
네 명 중에 가장 선임인 김 과장이 점잖게 한마디했다. 그는 모두들 이구동성으
로 여섯시까지만 치자고 말을 하지만 어차피 열한시가 넘어야 판이 끝난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그게 명동 지점의 고스톱 룰이기도 했다.
「무광! 나 광 없어.」
김 과장은 박 대리 옆에 앉아 있으므로 박 대리가 선일 때는 광을 팔아야 할
입장이었다. 대충 화투를 훑어본 뒤에 한 손으로 움켜쥐고 눈치를 살폈다.
「이게 뭐꼬, 내는 못 먹어도 고다.」
오 대리가 피 두 장으로 쳐주는 다이아몬드 한 장을 자기 앞에 맵시 있게 던지고
나서 중앙에 있는 목에서 한 장을 가져갔다.
「오 대리, 첫판부터 대형 사고 내겠군. 난 죽었어. 화투가 못 들어와도 이만
저만해야지, 완전히 또이또이라고 뽕치면 일등 하겠네.」
현 과장은 화투를 목에다 얹고 나서 척척 뒤섞었다.
「박 대리는 잘 들어왔어?」
현 과장은 화투목을 중앙에 얌전히 놓고 나서 박 대리의 어깨 너머로 패를 훔쳐
보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이라서 할 수 없이 치는 거죠, 뭐!」
박 대리는 말과 다르게 국진이 석 장 들어 있었다. 이른바 폭탄감이었다. 거기에
다 깔린 패 중에는 국진 껍데기 한 장이 얌전히 깔려 있는 상황이므로 아무리
못 쳐도 피박을 면하는 데는 이상이 없었다.
「왜 이렇게 뒷장이 안 맞아.」
박 대리가 장 껍데기를 내밀고, 같은 껍데기 한 장을 가져오며 투덜거렸다.
「글쎄 말이야. 고스톱은 뭐니 뭐니 해도 뒷장이 잘 맞아야 따는 건데.」
박 대리의 패를 훔쳐본 현 과장이 능청을 떨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예, 화투는 이렇게 치는 거 아입니꺼!」
오 대리는 비 십 끗 자리에 비 껍데기를 딱 소리가 나도록 내려 치고 나서, 한
장을 뒤집어서 국진에다 힘껏 때렸다.
「이크, 이게 뭐꼬? 비 먹으면 비 나온다 카더니, 초반부터 팍 싸브렀네.」
「뭐야, 민폐 끼치는구먼.」
김 과장은 양미간을 좁히며 초 한 장을 내놓고 깔려 있는 초띠짜리 한 장과 뒤
집어서 나온 흑싸리 초단과 껍질을 가져갔다. 박 대리는 순서가 되었으나 판에
깔린 패가 없었다.
어느 것을 내놓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현 과장이 엉덩이를 쿡쿡 찌르며 턱으로
국진을 가리켰다. 폭탄을 터뜨리라는 말 같았다.
「비 치면 비 나오고, 초 치면 초 나온다고 했겠다.」
박 대리는 폭탄은 좀더 기다리자는 생각으로 오 껍데기를 내놓았으나 뒤집은 화
투는 홍싸리띠였다.
「초단이 일등이고마, 화투 칠 필요 없네.」
오 대리는 김 과장이 초단 두 장을 가져다 놓은 것을 보고 아무렇게나 화투를
내팽겨쳤다. 예상외로 비가 나왔다.
「오매, 효자 났네, 효자 났어. 요놈이 내 속을 그렇게 썩이더니 새끼까지 몰고
올 줄 누가 알았노. 빨리빨리 여섯시 되기 전에 한 장씩 주이소.」
오 대리는 신이 났다. 비를 모두 가져오고 박 대리와 김 과장한테 한 장씩 받
으니까 피가 금방 여섯 장이 되었다.
「에라, 초단이나 한 장 나와라.」
김 과장은 화투를 초띠에다 힘있게 쳤다. 그러나 팔광이 나와서 깔려 있는 팔
십 끗짜리를 끌어 갔다.
그렇게 해서 김 과장은 삼 광에 초단까지 했다. 두어 판만 더 돌면 피까지 날
차례였다. 오 대리는 피 여섯 장을 끌어다 놓은 상태에서 지지부진한 상태였고
박 대리는 피 여덟장을 가져다 놓았다.
「음, 오 대리는 날 가망이 없고. 보자, 박 대리는 피가 여덟 장이겠다, 좋다,
돌아. 까짓 것, 써봐야 삼 점이겠지.」
김 과장은 신이 났다. 입술 끝에 계속 물고 있던 담배를 빼고 연기를 내뿜으며
박 대리를 지켜 보았다.
「죄송합니다, 이겁니다.」
박 대리는 들고 있던 국진 석 장을 던지며 폭탄을 했다.
「뭐야? 폭탄이 있었잖아.」
김 과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허탈하게 말했다.
「으매, 박 대리님이 이렇게 예뻐 보일 줄은 몰랐다 아입니꺼.」
그와 반대로 오 대리가 박수를 쳤다. 김 과장이 고를 했기 때문이다.
「자, 몇 점이냐?」
박 대리는 폭탄에다 국진 피 넉 장에, 한 장씩 받은 피 두 장을 합쳐서 피 여섯
장이 늘었다. 거기에다 가지고 있던 피가 여덟 장 합쳐서 열넉 장이면 오 점이었다.
「보자, 광하고 초단은 김 과장님이 했고, 홍단하고 청단, 고도리는 사이좋게
한 장씩 나누어 가졌고…….」
「볼 것도 없이 고지 뭐. 김 과장이 피로 나려면 피가 넉 장이 더 있어야 되는데
쌍피는 모두 나왔잖아. 피박은 모두 면하고.」
현 과장이 자기 일처럼 신이 나서 거들었다.
「좋습니다, 고!」
박 대리가 호기로이 외쳤다. 그 뒤로 세 판이 더 돌아갔고, 박 대리의 실적은 첫
판치고 상당한 소득이었다. 스리 고에, 폭탄에 십일 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면 기본이 일만 일천 원, 거기다 스리 고, 폭탄이라 따,따블로 쳐서 사만 사천
원씩이었다. 그 중에서 김 과장이 고를 했으므로 오 대리는 해당 사항이 없고
김 과장 혼자 팔만 팔천 원을 뒤집어쓴 꼴이었다.
「과장님 첫판부터 죄송합니다!」
박 대리는 싱글싱글 웃으며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받고 일만 육천 원을 거슬
러 주었다.
「김 과장님, 계속 칠 수 있겠습니꺼. 지는 마, 뭐가 뭔지 모른다 안 합니꺼,
우찌 하면 첫판부터 수표가 쑥쑥 나올 수 있습니꺼?」
오 대리가 싱글벙글 웃으며 김 과장에게 초를 쳤다.
「이 사람, 화투는 원래 일어설 때 승부가 판가름나는 법인 줄 모르나!」
김 과장은 오 대리의 말에 화가 발끈 났으나 체면상 화를 토해 낼 수는 없고 마
음속으로 끙끙거리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박 대리가 패를 돌리고 막 첫 장을 내려고 하는 순간 호출기가 울렸다. 김희숙
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전화 번호는 둘이서 단골로 드나드는 신촌에 있는 카페
고흐의 전화 번호였다.
「과장님이 대신 치시죠. 전화 좀 하고 와야겠습니다.」
박 대리는 패를 현 과장에게 건네주었다.
「잃으면 돈은 박 대리가 내는 거야.」
두 판이나 쉬고 있던 현 과장은 웬 떡이냐는 듯한 얼굴로 화투를 받으며 판에 끼
여들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박 대리는 숙직실을 나와 이층에 있는 외환계로 갔다. 외환계 직원들은 하루 일
어나는 거래 전표가 타부서와는 달리 적었던 탓으로 모두 퇴근한 뒤였다.
「여보세요? 호출한 사람 좀 부탁합니다.」
호출기에 찍힌 전화 번호를 누르자 예상했던 대로 김희숙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예요. 신촌 고흐에 있어요. 또 고스톱 치는 거죠? 기다리고 있을 게요.」
「알았어. 일곱시까지 도착하도록 하지.」
박 대리는 그렇지 않아도 퇴근 무렵 김희숙 얼굴이 편해 보이지 않은 것 같아
궁금하던 터였기 때문에 쉽게 약속을 하고 숙직실로 들어갔다.
「어서 와! 고를 할까, 말까?」
현 과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오 대리와 김 과장은 양 피박이었다.
「한 판 더 돌아가도 피박은 면치 못하겠는데요.」
박 대리가 현 과장 옆에 끼어 앉으며 훈수를 들었다.
「좋지, 고!」
결국 현 과장은 십오 점으로 끝을 냈고, 오 대리와 김 과장은 피박을 뒤집어쓰
고 삼만 원씩 현 과장 앞에 내놓았다.
「여섯시까지만 치기로 했으니까 지루하게 고스톱으로 하지 말고 짓고땡으로 돌
리지. 어때, 오 대리?」
김 과장은 단 두 판만에 십이만 원이 나가자 화가 났는지 짓고땡을 제안했다.
「그게 좋겠어요.」
박 대리가 흔쾌히 대답했다. 어차피 고스톱으로 끝날 판이 아니었다. 항상 끝마
무리는 짓고땡으로 해야 승부가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내가 선을 잡지.」
현 과장이 알맹이만 스무 장을 골라 착착 치면서 말했다.
「우선 삼만 원부터 시작하죠.」
오 대리가 안경을 벗어 닦으며 판돈을 제시했다.
「좋아, 다섯 배가 되면 오야 바꾸기다.」
김 과장은 실눈을 뜨며 아예 지갑을 꺼냈다.
「벌써 짓고땡으로 돌아갔습니까?」
지불 계장 안상록이었다. 안상록은 들어오자마자 오 대리와 김 과장의 틈을 비집
고 앉았다.
「마감은?」
시재 당번인 현 과장이 물었다.
「시재는 다 맞았습니다. 계산계에서 입출만 나오면 됩니다.」
「일찍 끝날 것 같아?」
「그거야 끝나 봐야 알죠. 저도 오 자에 만 원 걸겠습니다.」
안상록은 건성으로 대답을 하며 김 과장이 판돈을 건 곳에 만 원을 얹었다.
「그럼, 난 쉬어야겠네.」
판돈이 삼만 원이므로 박 대리는 쉬기로 했다.
「삼만 원밖에 안 놓았습니까? 그럼, 박 대리님이 하시죠. 전 다음에 하기로 하
고.」
안상록이 김 과장 패에 걸었던 돈을 끌어 가며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아니야, 안 계장이 하라고. 어차피 쉽게 끝날 판은 아닌 것 같은데, 뭘.」
「벌써 피바가지 쓴 분이 있단 말입니까?」
안상록이 김 과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날 쳐다보고 묻나?」
김 과장이 기분 나쁜 얼굴로 반문했다. 그는 돈을 잃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
었다. 최소 한도로 본전이 될 때까지는 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박 대리
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말과 안상록이 김 과장을 쳐다보며 묻는 이유도
바로 그런 것 때문이었다.
「자, 육만 원입니다.」
현 과장이 가보를 잡아서 판돈이 육만 원으로 늘었다.
「내가 삼만 원 가지.」
현 과장이 다시 패를 돌리자 김 과장이 솔에다 만 원권 석 장을 척 갖다 놓았다.
「이만 원씩 골고루 가지 그래요?」
현 과장이 싫지 않은 얼굴로 김 과장에게 물었다.
「왜 이래, 벌써 이십만 원이나 나갔다고.」
김 과장은 양보하지 않았다.
「뭐라고요? 벌써 그런 거금이 나갔단 말입니까?」
안상록이 실실 웃으며 물었다.
「무슨……. 겨우 십만 원짜리 한 장 나갔을 뿐인데.」
현 과장이 웃기지 말라는 얼굴로 말했다.
「현 과장님요, 엊지녁에 무슨 꿈을 꿨습니꺼? 돼지꿈이라도 꿨는가예. 아주 자
신이 만만하네예.」
오 대리가 농담 섞인 음성으로 내뱉는 말을 들으며 박 대리는 슬며시 숙직실을
나왔다. 김희숙에게 가야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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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3부 위험한 오해 ④
카페 고흐는 신촌 로터리를 벗어나 작은 골목에 박혀 있는 다섯 평 남짓한 작은
카페였다. 주로 단골 손님 위주로 영업을 하였기 때문에 한자리에 앉아 하루 종
일 책을 보거나, 잡담을 나누어도 주인의 눈총을 받지 않는 장소이기도 했다.
「낮에 그게 뭐예요?」
박 대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김희숙이 토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거야? 영문이나 알자.」
박 대리는 유니폼을 입지 않은 김희숙을 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
다. 하긴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결혼 상대자로 점찍은 것이기도 했다.
「그 뭐예요, 산적 두목 같은 놈한테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 있는데도 자기가 도
와 줘야지, 왜 안상록 씨가 달려오게 만드는 거예요?」
「아, 난 또 뭐라고. 다른 사람들 눈 때문에 그랬어.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사이
를 이상하게 보는 눈이 많은데 내가 달려가 봐. 더 이상하게 볼 거 아냐.」
「누가 이상한 눈으로 본다고 그래요. 할말이 없으니까 변명하시는 거 아녜요?」
「어허, 미스 성도 우리 사이를 알고 있는 것 같던데 뭘.」
박 대리와 김희숙이 작은 음성으로 토닥거리고 있을 때 주인인 염 여사가 다가왔다.
「두 분 사랑싸움하시나 봐.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뭘 마셔야지.」
녹색의 개량 한복을 시원스럽게 차려 입은 염 여사가 사람 좋게 웃으며 주문을
청했다.
「커피로 주세요.」
김희숙이 화가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주문을 했다.
「미스 김, 화가 많이 났나 봐. 박 대리님, 오늘 단단히 각오를 해야겠는걸.」
염 여사가 가자 김희숙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말예요. 집에서는 해를 넘기지 말라고 성화가 대단하다고요」
김희숙은 지금까지의 말투와 다르게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그 문제에 대해서 말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우리 올해는 참고 내년 일월
에 결혼하자.」
박 대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일월에 과장으로 진급을 시켜 준다는 김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꼭 일월에 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전 가능하면 올해를 넘기지 않았으면 좋
겠어요. 내년이면 이십대 후반으로 접어든다고요. 서른 살 쪽으로 꺾어진단 말이
에요.」
「스물다섯이나 여섯이 무슨 차이가 있다고 야단이야. 중요한 건 내가 희숙이를
얼마만큼 사랑하느냐가 아니야?」
박 대리는 염 여사가 가지고 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염 여사가 끓여
준 커피는 진하고 맛이 있었다.
「커피 맛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박 대리는 카운터에 앉아 책을 뒤적이고 있는 염 여사에게 찡긋거리며 인사를 했다.
「두 분 싸우시는 것 같아 특별히 맛있게 끓여 준 거니 어서 화해하세요.」
염 여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머! 우리 싸우는 거 아니에요. 화가 난 것도 아니고요.」
김희숙은 염 여사에게 밝게 웃어 보이며, 박 대리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알지만 여자에겐 한 살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르실 거예요. 이십대 중
반이면 금방 서른이 되는 나이잖아요.」
「어째서 금방 서른이 되나? 음력으로 따지면 내년 일월도 스물다섯 살이나 마찬
가지인데.」
박 대리는 김희숙의 손을 잡았다. 통통한 손가락이었다. 문득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누르던 오수미의 마디가 길고 가는 손가락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손
은 편안해 보이지 않았고 왠지 불안했다. 김희숙의 손가락은 그렇지 않았다. 정
겹고 가슴을 편안하게 해주는 손이었다. 하지만 현재로선 통통한 손이나 가는
손 모두 필요했다.
「그럼, 내년 일월에 결혼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 줘요. 저도 알 권리가 있잖아요.」
김희숙도 박 대리의 손을 마주 잡았다. 사랑스러운 손이었다. 직장에서는 너무
서운해서 화가 났지만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면 품에 안겨 응석이라도 부리
고 싶은 손이었다.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어. 두어 달 후면 내가 왜 일월에 결혼을 해야 하는지 이
유를 알 수 있을 거야.」
박 대리는 오늘 집에 들어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김희숙과 저녁을 먹고 술
한잔 한 다음에 노래방에라도 가서 스트레스를 풀고 품에 안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새삼스럽게 김희숙의 커다란 젖가슴이 그리워졌다.
「점점 더 궁금하네요. 도대체 그 이유가 뭐예요?」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그래. 하지만 빅 뉴스가 될 것은 틀림없어. 그러니까 궁
금해도 두어 달만 참아. 일만 잘되면 희숙이한테 제일 먼저 알려 줄 테니까, 알
았지? 그 대신 우리 어디 가서 술 한잔 하고 오랜만에 희숙이 찌찌나 먹을까?」
「아이, 염 여사 듣겠어요.」
김희숙의 얼굴이 금방 붉게 타올랐다. 사실 그녀도 오늘 집에 들어가지 않을 계
획이었다. 혼자 살고 있는 것은 김희숙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었
다. 틀린 게 있다면 박 대리는 작은 원룸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이고, 그녀는
단독 주택의 출구가 다른 이층집을 전세 내어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좋아. 그럼, 우리 어디로 갈까. 간단하게 한잔 하고 노래방에 가자고, 어때?」
「정말이죠? 어서 가요.」
김희숙의 입이 함지박만해지며 핸드백을 챙기고 있을 때 박 대리의 호출기가 울
렸다.
「삐삐 왔네. 이 시간에 올 데가 없는데. 김 과장이 알거지가 됐나?」
박 대리는 숙직실 패거리한테 퇴근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슬며시 빠져 나온 것
때문에 호출을 했나 하는 생각을 하며 번호를 확인했다. 낯선 번호였다.
누구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중 전화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런, 카드 전화기잖아.」
다시 카운터 앞으로 갔다. 김희숙은 커피값을 계산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화 카드가 없어서 전화 한 통화 해야겠습니다.」
「한 통화에 백 원씩이에요.」
염 여사가 웃으며 카운터 아래 있던 전화를 카운터 위에 올려 놓았다. 신호음이
떨어지자마자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누가 카페나 커피 숍에서 호출을 한 모
양이었다. 누굴까? 박 대리는 호출한 사람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호출기에 찍힌
전화 번호도 전혀 모르는 번호였기 때문이다.
「저예요, 오수미.」
음성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오수미였다.
「뭐라고요? 오수미 씨!」
박 대리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뒤에 김희숙이 서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큰소
리로 오수미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김희숙의 눈동자가 크게 확대되고 있는 것을
박 대리가 알 턱이 없었다. 그녀는 박 대리가 가출했던 아들이 귀가한 것을 반
기는 어미처럼 반가운 음성으로 여자 이름을 부르자 온몸이 긴장되어 오는 걸 느
꼈다. 염 여사는 커피잔을 치우러 테이블에 가 있는 중이었다.
「은행에 전화를 했더니 이미 한 시간 전에 퇴근을 했다고 하더군요.」
「내가 전화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 줄 알아?」
「후후, 알 만해요. 하지만 오늘 만나면 보답이 될 거예요.」
박 대리는 오수미의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드디어 일이 성사되어 가는 것을 느
끼며 온몸이 떨릴 정도로 흥분이 밀려왔다.
「알았어. 거기 어디야? 지금 당장 달려가지.」
박 대리는 킬킬거리는 김 사장의 웃음소리와 서늘한 오수미의 눈매가 겹쳐 떠오
르는 순간, 쾌재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뒤에 서 있는 김희숙은 그
정반대의 선에 서있었다.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뒤에 서 있는 줄 알면서…….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참으며 밖으로 나갔다. 밖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골목 끝 신촌 로터리에는 차량의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로터리에 있
는 건물 옥상에 설치된 거대한 음료수 병이 네온 사인에 둘러싸인 체 반짝거릴
때마다 나를 마셔, 나를 먹으라니까, 하고 속삭였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먹장구름이 끼어 있었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성급한 판단인지 모르지. 친척일 수도 있잖아.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내고 박 대리가 나오길 기다렸다.
「이거 어떡하지.」
박대리가 바쁘게 뛰어나와 김희숙 앞에 섰다.
「왜요?」
김희숙은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반문했다.
「오늘 희숙이하고 같이 못 있겠는걸.」
박 대리는 이유야 어떻든 이 시간에 여자를, 그것도 술집의 호스티스를 만나러
간다고 바른대로 말을 할 수가 없어 머뭇거렸다.
「만나자는 삐삐예요?」
김희숙은 오수미란 여자가 만나자는 삐삐예요, 하고 물으려다가 앞의 말을 빼버
렸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을 보면 친척은 아닌 게 분명했다. 실낱 같은 희망
이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존심이 있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응. 현 과장님한테 온 삐삐인데, 저번에 만난 거래처 손님이 오늘 꼭 만나자는
거야. 정말 미안하게 됐어. 모처럼 같이 지내려고 했는데 말이야.」
박 대리는 오수미와 밤을 보내고 김희숙에게 현 과장 핑계를 대고 넘어갔던 때
를 떠올리며 빠르게 변명을 했다.
「현 과장님이?」
사람은 극도로 절망하거나, 분노가 치밀면 냉정해지는 법이다. 김희숙의 음성에
는 아무런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래.」
「얼마나 중요한 약속인데 그래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자고 해놓고선…….」
김희숙은 박 대리의 말이 거짓으로 와닿았다.
「내 앞날이 좌지우지될 만한 거래선이야. 그러니 오늘은 그냥 집에 들어가. 그
대신 내일은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알았지? 참, 그리고 이거 받아둬. 그냥 집
에 들어가기 뭐하거든, 친구라도 불러내서 한잔 하고 들어가든지. 맛있는 거 사
먹고 가.」
박 대리는 숙직실에서 김 과장에게 받은 십만 원권 수표를 김희숙에게 건네주었다.
「됐어요. 그만한 여유는 저도 있어요. 어서 가보세요.」
김희숙은 강하게 거절했다.
「아냐, 미안해서 주는 거니까 받아. 그렇다고 내일 어물쩍 넘어가겠다는 뜻은
아니니까 안심하고. 그리고 어서 빨리 가자. 방배동까지 가려면 차가 안 밀릴는
지 모르겠네.」
박 대리는 서둘러서 김희숙의 어깨를 껴안고 골목을 빠져 나갔다. 그 동안 김희
숙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박 대리는 박 대리 나름대로 오수미가 어떤 말을
할까 하는 궁금증때문에 김희숙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전철역 가까이 와서 김희숙이 걸음을 멈추며 냉정을 되찾고 물었다.
「뭔데 그래? 빨리 말해.」
박 대리는 한시가 급했다. 신촌역에서 전철을 타고 가서, 다시 바꿔 타고 방배역
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가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데, 은행원으로서의
앞날이 걸려 있는 오수미를 기다리게 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
「한마디 대답만 해주면 돼요.」
「지금 말해야 되는 거야? 내일 말하면 안 돼? 난 지금 빨리 가봐야 한다고.」
「일이 먼저예요, 아니면 제가 먼저예요?」
김희숙이 차갑게 물었다.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농담할 시간이 아니라고. 당연히 희숙이가 먼저지.」
박 대리는 어이가 없었다. 일천억 원을 유치하느냐 못 하느냐, 초를 다투는 중
요한 순간에 그런 문제를 갖고 심각하게 묻는 김희숙을 보고 여자란 어쩔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담이 아니에요. 분명히 말해 주세요.」
「농담이 아니라면, 그걸 말이라고 묻는 거야?」
「저에겐 중요해요. 빨리 대답해 주세요.」
「그래, 분명하게 대답해 주지. 희숙이가 먼저야. 됐지?」
박 대리는 시간을 봤다. 빨리 서둘러야 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요. 그 말이 진실이라면 오늘 현 과장님을 만나지 말고 저와 함께 있어 주세요.」
김희숙은 간절했다.
「화났어? 하지만 화를 낼 문제가 아냐. 희숙이는 죽을 때까지 같이 있을 수 있
지만, 일이란 기회와 때를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 알았지? 그럼, 내일 은행
에서 보자고.」
박 대리는 김희숙이 대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을 내어 이해를 구하
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지점장은커녕 차장자리에서 은퇴를 하고 말 것 같은 조바심이 일어났다.
「알겠어요.」
김희숙은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오수미란 여자의 이름을 듣지만 않았어도 박
대리를 붙잡고 정말 꼭 가야 하느냐고 계속 따져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여자
를 만나러 가기 위해 결혼 상대자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달려가고 있는 박 대리를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
흐 앞에서 무작정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 미터쯤 앞에서 걸어가는 박 대리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박 대리는 곧
인파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막연한 불안감이 스멀거리며 차오르고 있음을 느꼈
다. 그 불안감이 어쩌면 다시는 박 대리와 고흐에서 만나는 일이 없을지도 모
른다는 상상으로 이어지자 그녀는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을 쳐다보며 몸을 부
르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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