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프 온리 (3)
어째 쓸 때마다 3편까지는 프롤로그가 되는 것 같은....ㅡ.ㅡ
3)
“ 자~ 마지막으로 잔들을 비우고 일어서야지.....”
“ 네~ 오빠~아~ 건배...”
“ 형님, 남은 기간 마무리 잘하세요...
“ 너희들, 오늘 정말로 고마워...”
“ ..............”
결국 끝까지 말이 없던 새미를 제하고서 모두가 한마디씩 뱉고는 잔을 들었다.
물론, 병호는 첫 잔이자 마지막 잔이었다.
첫 휴가복귀 때부터 자칫 술냄새를 풍겼다가는 당장 군기교육대는 물론,
새카만 놈이 빠졌다고 찍혀서 나머지 군생활이 힘들어질 게 뻔했기에,
맥주 몇 잔 정도야 어떠냐는 다른 사람들의 권유와 본인 또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민이 말렸었다.
아무리 동생 때문에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이 든다지만,
뻔한 결과를 알고서도 친구들의 부추김에 부화뇌동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 휴~ 지금 출발하면 여유가 조금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더 늦추기도 힘든 시간이다...병호야...”
“ 네..한 병장님...”
“ 임마....아쉬워도 조금만 참고...그러다 보면 다음 휴가도 금방이야...”
“ 네...알겠습니다...”
“ 오늘 모두들 고생했어...이 먼 곳까지...
돌아가려면 길이 머니까 서둘러...지금 출발해도 집에 가면 한밤일 텐데....”
어쩌면, 여동생에게 하는 말이었을 거다.
물론 상훈과 주연이 함께 갈 거기에 크게 걱정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오빠의 심정을 느낀 건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새미의 눈이 촉촉해진 듯도 보였다.
언제나 이렇다.
헤어짐의 시간은 이래서 싫다.
자신이야 금방 다시 나올 거라지만 병호 녀석이야....
하기야 이렇기에 원래부터 휴가복귀를 할 때는 누가 따라오는 것보다,
그냥 집에서 모든 인사를 끝내고서 혼자 나서는 게 제일 나은 법이다.
그 몇 시간의 아쉬움이 싫어서 미적거리게 되면,
부대 근처에 와서야 뒷모습을 보며 떠나 보낼 때가 되어서는 정말 배로 힘이 든다.
십중팔구는 눈시울을 붉히게 마련이다.
지금 이 경우가 바로 그랬다.
벌써 새미는 말할 것도 없고 덩치가 커다란 병호 녀석의 눈에도 습막이 비쳤다.
민 자신마저도 왠지 눈가가 뜨듯해지는 느낌이 들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전염이 된 건지, 그 쾌활하던 상훈과 주연도 숙연하게 침묵을 지켰다.
쩝~ 어쩔 수가 없다.
새미의 오빠로서, 그리고 제일 연장자로서 자신이 총대를 매야 하는 때였다.
이대로 두면 귀대하는 사람은 사람대로,
먼 길을 되돌아서 가야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내내 축 처질 게 분명했다.
그러면, 몸 또한 배로 힘들어질 터인데다가, 여동생은 잠들기 전 이불 속에서 혼자 훌쩍거릴게 뻔했다.
“ 자자자~~ 그만들 하고...이거 뭐...어디 해외전쟁터로 파병이라도 나가는 분위기잖아?
하루 세끼 맛있는 짬밥이 정확한 시간에 팍팍 나오고,
맑은 공기와 규칙적인 운동으로 술 담배에 찌든 육신을 정화시켜주는,
아주 끝내주는 요양소로 가는 사람들을 두고 뭔 짓들이야?....
원래, 만남은 길게 헤어짐은 짧게 하는 거라고 했지...
자...모두들 툴툴 털어버리고 다음 휴가 때 또 보면 되잖아?
훨씬 더 반가울 텐데...그때 또다시 회포들을 풀고...뭐...중간에 면회라도 와주면 더 좋겠지만...”
“ 아~~ 맞다...면회...그걸 왜 생각 못했었지?”
“ 하하하...상훈아...이등병 땐 면회를 와봐야 외출도 안돼....그 동안에는 안 오길 정말 잘했다.
그 먼 길을 와서 부대 피엑스에서 몇 시간 얼굴만 보고 간다면 얼마나 허탈하겠냐?”
“ 아~! 그런 거에요? 형님?”
“ 그래...알았던 몰랐던 결과적으로 잘한 거야....”
“ 아...그렇구나...하하..저도 아직 군대를 안 갔으니...아는 게 있어야죠?
뭐...형님 말대로라면 이제는 병호도 일병이니까 괜찮은 거네요?”
“ 그래...맞아...이제는 언제라도 와주면 좋지....
이왕이면 주말, 그러니까 토요일에 와줘야 다음날 오후까지 여유가 있어...휴무니까...
안 그러고 평일 날에 오면 다음날 일과시간 전인 아침까지 복귀를 해야 하지...”
“ 네...잘 알았어요...병호야...들었지? 새미랑 같이 해서 우리가 면회를 갈 테니까...힘내...알았어?”
“ 그래...고마워...”
그렇게 서로를 위무하고 따스한 격려를 주고 받으며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정말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두 사람, 민과 새미 남매는 시선만 주고 받았다.
민 역시도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자 아까의 그 격렬하던 감정보다는 애틋하고 안타까운 마음만 커질 뿐이었다.
“ 서로의 등 뒤를 보는 건, 마음이 그러니까 여기서 각자 버스로 헤어지자...그게 나을 거다...”
“ 네..그래요...형님...”
“ 오빠...조심해서 들어가요...병호도 건강하고...”
“ 응...너희들도 조심해서 가...그리고...새미야...편지할게...난 걱정하지 말고...알았지? 울면 안돼”
“ 으, 응...내가 어린앤가? 울기나 하게...”
“ 하하아...그건 그렇지? 내가 오버한 건가?”
같은 정류장, 하지만 하행선과 상행선....그렇게 서로가 갈 곳은 달랐다.
대합실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새미도 생각보다 씩씩해 보여서 안심이 되었다.
“ 흠....새미씨도 먼 길에...고생이 많았어요....조심해서...”
“ 흑흑흑~~ 와앙~~ 미안해...오빠~~내가 잘못했어...엉엉~~”
“ 새, 새미야?”
“ 앙앙앙~~ 미안...미안...내가 나쁜 애야...흑흑흑....”
마음 속으로만 안타까워하다가 결국 여동생에게 어색하게 말을 건네자,
움찔하면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새미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더니 안겨 들었다.
녀석도....시치미를 떼려면 끝까지 버티지....지금까지 잘해 놓고는 마지막에 와서....
하기야 그 여린 성격으로 처음 엉겁결에 남인 척하고는 계속 힘들었을 것이다.
그 바람에 이곳에 와서도 거부도 못한 채 오빠에게 못 보일 모습까지 보여버렸으니...
“ 혀, 형님?”
“ 오빠? 새미야?”
“ ................”
놀란 경악성이 터져 나오는 중에도 병호는 어항 밖에 나온 금붕어마냥 입만 벙긋거리면서 말조차 못하고 있었다.
품에 안겨서 진저리까지 치며 울고 있는 동생의 보드랍고 따스한 몸이 마음을 포근하게 만든다.
단지, 무슨 신파극처럼 대합실의 사람들(그나마 많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의 시선집중을 받고,
가슴언저리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는 고장 난 수도꼭지 같은 새미의 눈물이 약간 문제긴 했지만....
“ 모두 들었지? 이제부터는 우리 남매의 가족상봉시간이니까...알아서들 비켜...빨랑...”
“ 어머? 어머? 그, 그러면...오빠가 정말 새미의 친오빠? 새미가 그렇게 자랑을 하던?”
“ 왜? 내가 너무 못나서 도저히 새미의 오빠로는 못 봐주겠어?”
“ 아, 아니...그게...아니라...그...”
“ 야~야~ 주연이 너 뭐해? 형님이 그랬잖아? 자리를 좀 비켜달라고...
시간도 얼마 없어...병호야...너도 이리와...빨리...”
“ 그래..상훈아...고맙다...나중에 제대하고 나서 소주나 한잔 사마...”
“ 하하하..형님도 무슨?...세미의 오빠면 저한텐 친형이나 마찬가지인데요...”
역시나 눈치가 빠른 상훈이 멍하게 있는 병호까지 챙겨서 손을 잡아 아예 플랫폼으로 끌고 나가 버렸다.
그러자 이제는 대합실 안에 둘만 남게 되었다.
물론 호기심에 아직도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별로 상관이 없었다.
울진, 이곳의 정류장에 다시 올 일이 있을까?
하물며 스쳐 지나가는 저 사람들은....
그보다는 아직도 훌쩍거리고 있는 품 속의 동생이 훨씬 더 중요했다.
민은 새미를 안은 채로 대합실의 구석자리 긴 나무의자에 앉았다.
“ 뚝~ 그만 울어...새미야...”
“ 훌쩍~ 하지만..오빠...내가...흑...”
“ 자자...그만...우리 새미...새미는 오빠 말을 잘 듣잖아? 응?”
“ 훌쩍...알았어...오빠...”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자 훌쩍거리면서도 좋아라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 동안에 얼마나 가슴을 졸였으면....
아직도 젖살이 조금 남은 듯하게 아주 말랑거리는 보드라운 뺨의 감촉이 너무나 좋다.
새미 역시 오빠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눈썹 끝에다가 눈물방울을 매단 채,
눈을 지그시 감고서 자신의 뺨을 민의 손바닥에다 비비며 미소를 지었다.
“ 녀석도....휴~~ 이제는 좀 괜찮아?”
“ 훌쩍...응...오빠...미안해..정말....”
“ 괜찮아..새미야...난 그냥 좀 당황했던 것뿐이야...그건 너도 마찬가지였고...”
“ 하지만...그래도...훌쩍....”
“ 후~~~ 우리 새미가 이제는 정말 아가씨로구나....언제 이렇게 어른이 된 걸까?”
“ 치이~~ 그러니까...오빠..꼭 아저씨 같아....”
“ 하하하...원래 남자는 군대를 다녀오면 아저씨가 되는 거야...
너..군인남자..군인학생...군인오빠(사창가에 가면 그러긴 하지만) 그러는 거 봤어?
다들 군인아저씨라고 부르지....”
“ 몰라...앙~~”
“ 어라? 금새..또 애기 짓을 하네? 우리 귀염둥이...후후후~~”
민의 농담에 조금 전까지도 훌쩍거리다가 바로 웃으려는 자신이 창피한지,
다시 얼굴을 파묻고 비비적거리면서 애교를 부리는 내 동생...
민은 지금 자신의 감정이 참 묘했다.
어릴 때 헤어졌던 동생을 다시 만난 것 같은 반가움과 함께 안심이 되면서도,
이미 한번 자각을 해버린 탓에 동생에게서 느껴지는 확연한 여자가 정말 난감했다.
전에는 그냥 좋은 냄새, 따스한 체온 그리고 말랑말랑한 살결이라고만 느꼈는데,
지금은 확실히 여자의 체취와 함께 탄력이 넘치고 굴곡이 아름다운 여체였다.
자신도 모르게 아래쪽에 힘이 들어가려는 걸 진정시키자니 싸늘한 날씨에도 식은 땀이 흘렀다.
“ 자~~ 새미야...병호는 내가 잘 챙겨줄 테니까...아무 걱정은 하지 말고...”
그래도 어쩌겠는가?
마음과는 달리 하고 싶지 않은 말들을 해야만 했다.
그게 사랑스럽고 소중한 동생을 위하는 길인 걸....
사람이란 건 이럴 때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딱히 머리 속으로 계산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필요한 일을 순간 해내는 적응력을 가졌으니...
민은 답답해지는 것 같은 가슴을 그저 동생이 전해주는 포근함으로 만족하려 애를 썼다.
“ 오빠...”
“ 응? 왜?”
이럴 땐 여전히 어린 시절의 동생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길에도 아랑곳 않고 품을 벗어나기 싫은지 뺨을 오빠의 가슴에다 댄 채로 소곤거린다.
“ 병호...”
“ 응..그래...병호...”
“ 아니, 병호 이야기는 그만 하라고....”
“ 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 오빠하고 이야기는 한마디도 못했잖아?”
“ 하하하...나하고야...나중에 내가 돌아가면....”
“ 그만...싫어....”
“ 새미야...”
“ 그냥...지금은 그냥...우리 이야기만 해...곧 가야 하는데...흑...”
“ 쉬~ 쉬~~ 그래...그럴 테니까...울지마...”
그 동안 참았던 울음이 한번에 터져 나오는 걸까?
그쳤던 눈물이 이제 금방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다시 시작되려 한다.
동생의 정수리에다 턱을 누르면서 등을 토닥거리고 달랬다.
새근거리면서 울음을 삼키는 동생....
자꾸만 가슴이 짠해지면서 이제는 자신의 눈시울이 따끔거린다.
가녀리고 애달픈 느낌이 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대로 품에 안은 채로 어디론가 도망을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들짝~
민은 뜨거운 물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라 동생의 등을 쓰다듬던 손을 들었다.
이게 무슨 미친 생각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자책을 하면서도 정말로 자신이 그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그리고 희미하게 예감을 했다.
앞으로 자신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 날들을 보내게 될지를....
“ 자자~~ 그만하고 일어서자...나도 더 이상은 안돼...애들도 기다릴 테고...”
“ 히잉~ 오빠....”
“ 어서...너도 빨리 가서 쉬어야지...오늘 많이 힘들었을 텐데...”
“ 오, 오빠? 그, 그게...”
무심결에 민이 내뱉은 말에 화들짝 놀라 몸을 떼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시선을 돌리는 동생..
먼 길을 움직이느라 힘들었다는 말이었는데 뱉고 보니 많이 이상했다.
마치 병호와 모텔에서 있었던 일을 의미하는 것 같은....
아차 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또다시 성숙한 여자라는 걸 확 느끼게 하고 있었다.
짜르르 하고 면도칼로 긋는 듯한 예리한 통증이 또 한번 화끈하게 가슴 속을 파고든다.
“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말고...어서...일어서...”
“ 오, 오빠...”
“ 자..어서...집에 가서 뜨거운 물에 씻고 푹 자기...저녁은 꼭 먹고...알았지?”
“ 으, 응...오빠...”
“ 에고~ 우리 막내...참 착하기도 하지?”
“ 어머? 오빠? 창피하게?”
동생을 재촉하며 어릴 때처럼 장난스럽게 엉덩이를 두드리자 곱게 눈을 흘긴다.
그 눈길이 요염하게 느껴진 건 역시 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탓이겠지?
순간적으로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며 아랫도리에서 큰 박동이 울렸다.
“ 우리 막내...이제는 정말 시집을 가도 되겠다...방뎅이가 산 만해진 걸 보니까...하하하~~”
“ 모, 몰라...오빠...”
“ 하하하..같이 가....”
후다닥 하고 도망이라도 가듯이 종종걸음을 치는 새미의 뒷모습을 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살랑거리는 엉덩이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손에 느껴졌던 그 아찔한 감촉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과연 자신은 순수하게 한 행동이었을까?
혹시나 오빠를 빙자해 여동생에게서 가장 여성스러운 그곳을 만져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또다시 마구 밀려드는 망상을 쫓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 자..이젠 정말로 안녕이다...너희들...”
“ 형님...아니...형...진짜 놀랐어요...새미의 오빠라니...”
“ 하하하..미안..미안...내가 워낙 못난 오빠라서..우리 새미에게 무관심했더니...
아까는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속였어...
상훈아..우리 동생...집에까지 잘 부탁한다...주연이도 마찬가지로 잘 챙기고...”
“ 하하하...네...제가 책임지고 대문 앞까지 모실게요...”
“ 오빠....너무했어...정말...”
“ 후후후..주연이 너한테도 미안해...나중에 꼭 복수하렴...”
“ 흥...정말? 각오해요...”
“ 그래..그래...”
이제서야 주연이 아까 했던 말들이 다시 기억났다.
잠깐 경황이 없어서 잊었었지만....
그래서 농담을 던지면서도 조심스럽게 주연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입으로는 역시 우스개 소리를 하면서도 그 눈에는 의혹과 당황이 가득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이 자리에서 당장 풀 수도 없는 문제였다.
민은 이게 언젠가는 무슨 일을 만들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 병호야...”
“ 네? 네...한 병장님...”
“ 녀석도? 이제는 그냥 형이라 불러...”
“ 네? 네...형...”
“ 그래..민이 형이라 부르면 돼...”
“ 네...민이 형...”
“ 이제는 우리도 가자...잘못하면 늦겠다...”
“ 알았어요...형...”
민의 강권에 먼저 버스로 오른 일행들을 멍하니 보고 있던 병호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돌아섰다.
후후...병호는 형이라 부르라고 하자...좀 전까지 까, 다로...딱딱 잘라서 대답하던 게,
어느새 밖에서 쓰던 말투로 요..라는 대답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보면 그런 어리벙벙한 면이 동생과 비슷한 점이 있어서 귀엽기도 했다.
단지, 동생과 얽히다 보니 자신의 마음에 벽이 생기는 것 같지만....
“ 병호야~~”
“ 네..형...”
버스에 올라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병호를 부르자 움찔하면서 대답을 한다.
정신이 좀 들고나자 온갖 생각이 머리 속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휴가를 가면서 새미에 대해 했던 이야기, 도착했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까 일까지...
지금 병호는 바늘방석에 앉은, 아니,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 같은 심정일 게 분명했다.
물론, 민도 그냥 병호를 단죄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병호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그냥 사랑을 하고 있을 뿐이데...
단지, 그게 자신의 여동생이라는 것이 현재의 상황을 만들었지....
“ 새미...많이 좋아하지?”
“ 네..형...사랑합니다...”
이 녀석 성격에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로 동생을 사랑한다는 것일 거다.
안도와 함께 밀려드는 아픔...
참으로 복잡한 감정이었다.
“ 그래...믿는다...너보고 새미를 끝까지 책임지라는 둥 그런 이야기는 안 하마..그런 걸 바라지도 않고...
대신에 둘이 사귀는 동안에는 울리지 말고...진심으로 대해...알았지? 그것만 부탁하마...너무 흔한 말이지만...”
“ 아, 아니요...당연한 말씀인데요...? 네...그건 자신해요....형 말처럼 최선을 다할게요...”
“ 그래..그래...그리고 이제는 안심이 되지?”
“ 네? 뭐가요?”
“ 뭐긴 임마, 괜히 고참한테 애인을 보여줬다고 불안했던 거 말이야...”
“ 네? 네...아, 아니..그런 거...아니...”
“ 하하하...임마..다 알아...나라도 그래...대뜸 보자마자 끌어안지를 않나? 손을 잡고 놓지는 않지...
속은 타고 한방 패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지..더군다나 얼마 안 있으면 제대를 하는데...
애인이랑 같은 동네에 사니 걱정이 태산 같았겠지...맞지?”
“ 하..하...그게...미안해요...형....”
“ 후후후...그런 마음이 없었다면...넌 오히려 나한테 한방 맞았을 거다....당연한 거야...
이제는 안심하고 군생활을 할 수가 있겠지?
그런 근심거리가 사라진데다가 이렇게 든든한 오빠가 새미를 지켜줄 테니...어때?”
“ 하하하...맞아요....정말로 안심이 되요...형이 새미 오빠라니...고마워요...형...”
“ 임마..고마운 줄 알면 새미한테 앞으로 더 잘해...나한텐 정말 소중한 동생이니까...”
“ 넵~!!”
“ 하하하...자식...이제야 대답에 힘이 팍팍 들어가는구나...나 한숨 눈을 붙일게...술이 조금 취한다...”
“ 네..형..주무세요...도착하면 깨워드릴게요...”
환하게 밝아진 병호의 얼굴을 보고는 눈을 감았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잘한 거야...
민은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다.
새미를 잘 지켜줄 테니 마음 놓으라던 약속을 자신의 손으로 깨게 될 줄은....
[ 한 민 병장님, 김 병호 일병...면회가 와있습니다...피엑스로 가보십시오~~ ]
이 한 겨울에 면회를 오는 건 드물었다.
더군다나 자신처럼 제대를 바로 코 앞에 둔 말년에게는....
민은 순간적으로 동생 일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들...면회를 오란다고 달랑 일주일 만에 쫓아오는 녀석들이 어디 있냐?
조금 어이가 없었다.
물론 녀석들이야 지금이면 겨울방학을 막 시작했을 테니 그럴 만도 하지만....
자신이야 상관이 없지만,
병호처럼 아직 짬밥이 적은데다가 휴가복귀를 한지 일주일 밖에 안되었는데 또 면회라니...
사실 이건 별로 좋지가 않았다.
이러면 본인도 많이 남은 답답한 군생활을 버티는데 힘이 들고,
다른 사람들의 사기문제도 있어서 간부들도 그다지 반가워하지를 않는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고참들에게 찍히기 십상이고....
자신이 미리 주의를 주지 않은 불찰이었다.
아니, 그런 걸 떠나서 당장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 우~~~ 한 병장님...너무 한 거 아닙니까? 누구 기를 죽이는 것도 아니고...”
“ 야..야...미안하다..아마 동생이 온 모양이다...내가 좀 있다 음료수를 사다 줄 테니까 그냥 봐주라..”
“ 흠..흠...제가 음료수 때문이 아니고...”
“ 임마...됐어...병호야...가자...”
“ 일병 김 병호...네, 알겠습니다...”
병호를 챙겨서 내무반을 나왔다.
내무반은 한참 바빴다.
군장검사를 끝으로 일과를 끝내고 오후 휴무를 위해 정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내일 다시 최종점검을 해야 하기에 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월요일부터 동계대대종합훈련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맞다.
문제는 바로 이거였다.
민이야 말년이라서 자대에 잔류하게 되어있지만, 병호는 월요일부터 훈련이었다.
당연히 오늘은 외출외박이 허용이 안 되는 것이었다.
물론 얼굴을 보는 것만해도 무척이나 반갑겠지만, 많이 아쉬울 게 분명했다.
더구나 이 멀리까지 온 애들의 입장이야....
자신은 나갈 수가 있겠지만, 어디 애들이 자신이 주목적인가? 그냥 덤일 뿐이지...
“ 오빠~~~”
“ 오빠..병호야..”
피엑스로 들어서자 맑고 고운 여자들의 음성이 울리면서,
가뜩이나 시선을 끌고 있던 두 여자의 예쁜 자태가 다시 한번 사람들을 집중시켰다.
“ 어? 상훈이는? 어디 화장실을 갔나?”
“ 아니야..오빠..우리끼리 왔어...걔는 친구들하고 지리산으로 산행을 갔어...흥~ 배신자 같으니...”
“ 햐~~”
둘만 보이기에 설마 했더니 정말로 여자 둘이서만 덜렁 왔다니....
더군다나 병호도 나가기 힘든 상황인데...
벌써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 휴...어쩔 수 없지...주번사관한테 말을 한번 잘해봐야지...”
“ 오빠..그게 무슨 소리야?”
“ 응...사실은...”
주연의 질문에 민은 천천히 설명을 했다.
“ 어머? 미안해...상훈이 말처럼 다음 주에 올 걸...내가 괜히 우겨서...”
“ 네가 우기다니?”
“ 으, 응...상훈이는 자기가 산에 갔다 온 다음에 같이 오자고 했는데...
내가 저만 놀러 간 게 얄미워서 새미를 꼬신 거거든....”
“ 에효.....”
“ 오빠...”
“ 아니다...새미야...네 잘못이 뭐 있냐?”
“ 오, 오빠...그렇다고 나만 대놓고 잘못했다고 그러면 내가 너무 서운하지~~?”
“ 하하하...아니야..누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고...그냥 타이밍이 안 좋다는 이야기야...”
기가 팍 죽은 새미를 달래자 주연이 쌍심지를 켜면서 반발했다.
민은 웃으면서 주연도 다독였다.
그렇게 발끈하는 모습도 칙칙한 분위기의 실내를 환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그건 자신만이 그런 게 아닌지 여기저기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 병호야...자~ 이 음료수를 가지고 가서 내무반에다 좀 돌려라...”
“ 네...”
“ 자식이...기운 내고...그나마 나라도 나갈 수가 있어서 다행으로 생각하자...
잘못했으면 얘들끼리만 그 군바리만 득실거리는 읍내서 재울뻔했잖아?”
“ 하..하...네...그러네요....”
하필이면 주번사관이 민과 사이가 별로인 중사여서 병호는 고사하고 잔류를 하는 자신마저,
훈련 전 대기상태인 점을 꼬투리로 안 내보내주려 해서 자칫 싸울뻔했다.
아마 동생과 주연의 미모를 보고서 배알이 꼴린 것 같았다.
사실 민보다도 한살이 어린 녀석이 평상시에도 늙은 척 거들먹거리는 통에 민과 많이 안 좋았었다.
결국, 외박증을 받은 민과 두 여자가 피엑스에서 저녁식사시간 전까지 병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어선 것이었다.
민은 음료수를 잔뜩 사서 병호에게 안겨주었다.
“ 내가 제대하고 나면 새미 데리고 바로 면회를 올 테니까...실망하지 말고 알았지?”
“ 네...”
“ 내일 보자...얘들은 내가 잘 챙길 테니까...걱정 말고...”
“ 네...잘 다녀오세요...새미야...주연아..고마워...”
“ 미안해..병호야...나 때문에...”
“ 아니야...괜찮아...이렇게 와준 게 어딘데...?”
“ 병호야...”
“ 응...그래...넌 형이랑 저번에 못했던 이야기 많이 하고...난 걱정하지마...”
“ 으, 응....또 올게..몸 조심해야 해...”
“ 그래...추~웅~성...올라갑니다...”
“ 그래...”
양 손에다 음료수를 담은 비닐봉투를 들고 돌아서는 병호의 등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 나가자...아마 우리가 부른 택시가 지금쯤이면 왔을 거야...”
“ 응...오빠...”
“ 허~~”
“ 좋지? 이렇게 미녀들이 양쪽에서 팔짱을 껴주니까?”
“ 하하하..그래...황송하다...황송해...”
말 없이 슬며시 새미가 팔짱을 껴오자 질 새라 주연이 다른 쪽에 매달렸다.
위병소를 나올 때 근무자들의 눈이 부러움으로 가득 찬 걸 보자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또한 양 팔뚝에서 느껴지는 뭉클한 감촉도 야릇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추운 강원도의 겨울 산바람도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