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反)영웅-(부제: 로얄 블러드) - #11 만월이 빛나는 밤에
란셀롯에겐 몹시도 바쁜 일주일이 흘렀다.
그는 원래 그가 목표하던대로 나뭇꾼인 잭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고 그를 자신의 아군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잭 이외에도 여러명을 더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란셀롯은 결국 요새 안에 있는 모든 일꾼들을 일차적으로 자신의 끄나플로 만들 수 있었다.(또한 란셀롯은 그들이 전달해오는 사소하면서고도 별 중요치 않아보이는 정보들을 통해 요새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들과 일들을 감시할 수 있게 되었다)
-짹 짹
새들이 노래하고 화창한 햇살이 내리째는 아침.
-웅성 웅성
그 날은 아침부터 요새 안이 분주해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밖에 나가 레지스탕스일을 하며 같이 싸울 이들을 모으던 카렌이 도착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다들 바쁜가 보군."
란셀롯은 식사 후 따스한 차를 받으며 메이리에게 말했다.
"네, 왕자님. 아무래도 원정 나갔던 부대들을 마중해야 하니까요."
메이리는 란셀롯의 말에 화사한 미소로 답하며 말하였다.
둘의 관계에는 그동안 많이 발전이 있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이는 것은 둘 사이의 대화였는데, 이전엔 반높임으로 그녀에게 하오체를 쓰던 란셀롯이 이제는 메이리와 친해지면서 하대를 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왠지 그와의 벽이 사라진 것 같아 더욱 친숙하게 느껴진 메이리가 기쁘게 받아들여 생긴 변화였다.
"역시 메이리의 차는 맛있군. 오늘도 왠지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아."
란셀롯의 칭찬에 메이리는 수줍게 볼을 붉혔다.
"란셀롯님..."
그녀는 란셀롯의 곁에서 그의 시중을 드는 것에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많은 뒷바라지를 해줘야 했지만, 그는 그렇게 자신을 성심성의껏 도와주는 그녀를 아껴주고 칭찬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아아~ 좀 더 칭찬해주세요. 란셀롯님. 저를 좀 더 칭찬해주세요~)
부끄러워하고는 있었지만 마치 주인의 칭찬을 듣고 기뻐하는 강아지같은 모습.
란셀롯의 존재와 그의 진심어린 칭찬은 이 어린 소녀의 방심을 마구 뒤흔들고 있었다.
(란셀롯님...♥)
메이리는 이제 그의 칭찬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쿡쿡~ 귀엽군.)
란셀롯은 그런 메이리의 모습에 속으로 웃음이 튀어나왔지만 애써 그것을 참고는 차를 들이켰다.
(카렌도 이렇게 단순하다면 좋겠지만. 그건 아마 기대하기 힘들겠지?)
조부의 고지식함과 통찰력을 그대로 물려받은 카렌은 설득을 하기 힘든 부류의 인물 이었다.
한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믿어주지만, 한번 사이가 틀어지면 다시는 돌이키기가 힘든 부류.
그녀를 사랑한 적이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녀에 대해 잘 아는 란셀롯이었다.
(3년 만에 만나는데 무슨 말로 서두를 꺼내야 할까나.)
란셀롯은 따스한 모닝티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xxx
"와아아아~~!!"
환대.
요새 전체에 엄청난 환성과 환대가 울려퍼졌다.
척! 척! 척!
그런 환대를 받으며 마치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카렌은, 질서정연한 그녀의 수하들과 함께 아프스 요새에 입성을 하였다.
"와아아~! 카렌님이다!!!"
검은 전투마에 적홍의 갑옷을 입은 카렌은 단연 일행들 중 돋보였다.
특히 그녀의 붉은 포니테일 머리는 그녀의 호숫빛와 어우려져 더욱 그녀를 돋보이게 하였다.
붉은 매 시절부터 유명한 [적홍의 사신]
지금에야 그 수가 많이 줄어서 소규모의 게릴라전만 벌이고 있지만, 그 뛰어난 기동력에서 나오는 돌파력으로 적들을 유린하는 그녀는, 그녀의 적기마병대와 함께 언제나 적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적기마병단장 카렌 드 코다스,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왕녀가 직접 자신을 마중나와 있자, 카렌은 급히 말에서 내려 로자리아 왕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보고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카렌 경. 무사해서 다행이예요."
왕녀는 순백의 경장용 갑옷을 걸친 채로 말을 하였다.
특수처리를 한 순백의 레더아머를 입은 왕녀의 모습은 카렌에 뒤떨어지지 않고, 마치 전여신(戰女神)을 연상케 하였다.
"먼 길에 다들 지쳤을테니 오늘은 푹 쉬도록 하세요. 여러분을 위해 만찬을 준비하였으니 즐기시도록 하고요."
로자리아 왕녀는 오랜 원정으로 지친 병사들을 위로해주었다.
"깊은 배려에 감사드리옵니다. 전하."
카렌은 그런 로자리아의 배려에 감사의 답례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쩍
그녀는 왕녀 몰래 누군가를 찾았는데, 그녀는 자신이 찾는 상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란셀롯...)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전(前) 붉은 매단의 수장.
그는 메이드의 부축을 받으며 서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팔과 몸.
화색이 조금 돌긴 하지만 창백하기만 얼굴.
병이 든 것처럼 살짝 패인 눈가와 살짝 푸른 기가 보이는 입술.
-지끈 지끈.
언제나 자신에 차있던 기억 속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허약한 모습에, 잠깐 가슴에 가시가 박힌 듯 따끔 따끔 쓰라려왔다.
한때 너무나 사랑했던 연인이자, 일생에 걸친 충성의 맹세를 바쳤던 주군이었던 남자였는데...
너무나 존경했고, 또한 동경했으며 사랑했던 기사 중의 기사였던 남자였는데.
(란셀롯... 카린드...!)
으득.
그녀는 이를 쎄게 악문 뒤, 그에게서 시선을 떼서 찬바람이 일 정도로 냉정히 등을 돌려 자신들의 부하들을 챙겨주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 날은 종일 무사히 돌아온 적기마병단과 그들이 데려온 새로 한 가족이 될 신병들을 축하해주는 연회의 자리가 되었다.
"하하하~~!"
"오늘은 먹고 죽자!!"
"자! 다들 신나게 마시자! 건배!!"
다들 오랜만에 즐기는 술로 흥청망청 취해 신나게 웃고 떠들었다.
"내가 말야. 붉은 매 때부터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던 적기마병단이라는 거 아냐."
"크크큭~ 적기마병단인 건 맞지. 저 녀석 말을 잘 못 타서 언제나 지 발로 뛰어다녀서 그렇지."
"시꺼, 윌리! 응? 우리 적기마병단이 얼마나 용맹한가 하면 니웨산에서의 전투만을 봐도 알 수 있지..."
적기마병단의 단원들은 허풍을 섞어 자신들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는데, 그 중 일부는 카렌의 뛰어난 지휘로 어떻게 그들이 온갖 위험에서 빠져 나와 적들을 격퇴했는지에 대해서였다.
마치 다들 그 자리에 참여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손에 땀이 쥘 상황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특히 니웨산에서 포위 당했을 때 카렌과 적기마병단이 필사의 돌파를 벌인 이야기는 그 모든 이야기 중의 백미였다.
"...그 때 카렌님이 소리치셨지 "전부 나를 믿고 따르라! 내가 너희들을 기필코 살리고 말겠다!"고 말야!"
"캬아~ 지금 들으니 정말 닭살 떨리는 소리인데, 그 때 들었을 때는 왜 그리 멋져보였는지...! 킬킬킬~~! 그 때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던거지."
"맞아 맞아."
병사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술을 줄창 들이켰다.
"..."
아무래도 다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니까 부끄러웠던 것일까?
모두가 웃고 떠는 와중에, 카렌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갔다.
다들 그녀가 쑥쓰러워서 그런 걸로 여겨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란셀롯 또한 조용히 자리를 뜨는 카렌을 보며 눈을 빛냈다.
(때마침 잘 되었군.)
안 그래도 둘이서 따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에 란셀롯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얻은 뒤 카렌의 뒤를 쫒았다.
황금빛의 만월.
어느 새 하늘엔 밝은 달이 휘엉청 떠 있었고, 선선한 밤바람이 귓가에 느껴졌다.
"카렌."
카렌은 뒤에서 자신을 부른 란셀롯을 돌아보지 않은 체 말을 했다.
"역시 따라오셨군요... 란셀롯 왕자님."
차분히 흘러나오는 카렌의 말을 통해서 란셀롯은 그녀가 의도적으로 그런 자리를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란셀롯은 그녀의 이름을 나직히 말하였다.
"카렌."
"그렇게 절 다정하게 부르지 마세요!"
란셀롯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분노에 찬 목소리로 카렌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카렌...)
카렌의 시리도록 차가운 눈동자.
그런 그녀의 눈동자 안에 흐르는 차가운 분노의 불길을 본 란셀롯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배신을 당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눈동자.
카렌은 그런 눈동자를 한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왜 그때 제 남동생을 버리셨는지요? 왜 그를 구하지 않았나요? 제가 그토록 애원을 했었는데도요! 왜요?!"
카렌에게는 한살터울의 남동생이 있었다.
어릴 때 같이 부모를 여윈 탓에 그녀가 마치 자신의 친자식처럼 보호하며 지켜왔었던 어린 동생이 말이다.
"카렌...."
란셀롯은 그런 카렌에게 가끔 충고를 하였었다.
너무 과보호를 해서 키우는 건 좋지 않다고 말이다.
물론 그의 어떠한 명령을 다 받드는 카렌이었지만 그것만큼은 절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붉은 매의 날개가 꺽이던 날,
내부의 배신자에 의해 내외부적으로 군단 전체가 혼란에 빠져들었을 때 카렌은 적들의 공격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남동생의 부대를 구원해주기를 청원했었다.
남동생은 그녀의 목숨보다도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이 더 중요했던 란셀롯은 단호히 거부했었기 때문이다.
당장 군 전체 수습에 나서야 했는데다 카렌의 남동생이 속한 부대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판단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물론 적기마병단의 상식을 벗어난 돌파력을 이용한다면 그 부대를 구원해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란셀롯 본인을 둘러싸고 있는 적의 포위망을 뚫을 가능성이 희박해져 버린다.
그랬기에 란셀롯은 말했다.
정 남동생을 구하고 싶다면 "혼자서" 가라고 말이다.
설사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내뱉어서는 안되는 말.
그것이 실수였다.
카렌은 자신의 목숨만을 연연하는 자신의 군주에게 절망을 했고, 심장이 찢어지는 배신감을 느끼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런 란셀롯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는 그녀로 하여금 진짜 혼자서 남동생, 카린드를 구하기 위한 단기돌격으로 이어졌다.
물론 그녀도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논리적으로 따졌을 때, 란셀롯의 판단이 맞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엇다.
하지만 그래도 사랑을 하는 사이라면 한번쯤은 뒤쫒아와주고, 따스히 설득을 해주기를 원했었다.
그녀가 일생일대로 처음으로 한 청원이 받아들여지기를, 아니 한번쯤이라도 신중히 고려되어지길 원했었다.
그러나 란셀롯은 그러지를 않았다.
그는 그녀를 뒤쫒는 대신 자신의 안위를 위해 군부대의 정비에 온신경을 쏟아부었다.
배신감과 실망.
카렌은 두 번이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맛보고는 필사의 외로운 돌격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어이없이 자신들의 지휘관을 잃은 적기마병단은 결국 그 본래의 힘을 잃고 지리멸렬하고 말았다.
물론 란셀롯이 그들을 잘 지휘하긴 햇지만 갑작스레 바뀌게 된 지휘체계로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그들의 힘을 전부 발휘할 순 없었다.
결국 평소의 실력의 절반도 내지못한 적기마병단은 적들의 집요한 포위망을 뚫지를 못하고 만다.
그나마 마지막까지 필사의 돌파를 벌인 일부만이 피투성이가 된 자신들의 진짜 지휘관인 카렌을 회수해 도망을 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드골을 통해 알게 된 란셀롯은 자신의 잘못을 잘 깨닫고 있었고 또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말하던 그에겐 변명이 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때 절 버리셨나요...?"
"...."
카렌의 물음에 란셀롯은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주르륵
그 때 카렌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를 본 란셀롯은 어떻게든 해명을 해야겠다는 조급함을 느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카렌, 잠깐! 아...!"
하지만 신이 그를 변명쟁이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갑자기 바로 그때 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란셀롯님~."
등 뒤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에 란셀롯은 뒤를 돌아보았다.
"란셀롯님? 여기 계셨군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메이리였다.
(이런 제길! 하필이면 이런 때!)
그녀는 연회 도중 사라진 란셀롯이 걱정이 되어 그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뒷우물가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한 소리를 듣다 란셀롯의 목소리르 듣고 찾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메이리...!"
란셀롯은 시간을 못 맞춰주는 메이리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걱정했어요. 그런데...누구랑 대화를 하시던 거 아니었나요?"
"...!"
메이리의 궁금하다는 듯한 얼굴을 본 란셀롯은 급히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보았다.
"..."
이미 거기에는 카렌이 없었다.
(하아~ 제길..!)
그걸 깨달은 란셀롯은 깊은 한숨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아무런 말도 못하고 말았군.)
시리도록 밝은 만월이 떠있는 밤.
그는 결국 카렌의 마음 속에 얼마나 큰 불신과 증오로 가득차 있는지만 재확인하며 그 밤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
너무나 밝은 달이 떠있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