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反)영웅-(부제: 로얄 블러드) - #14 흔들리는 마음들
동쪽 숲에서 돌아오고 난 뒤, 란셀롯이 메이리와 함께 붙어다니는 시간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원래부터 재활을 위해서 메이리의 시중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던 란셀롯이었지만 이제는 그 정도가 지나쳐 노골적이었다.
그건 이미 카렌을 뒤흔들기로 마음 먹었기에, 란셀롯은 그녀에게 메이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둘이 행복해하는 다정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카렌이 아직 내게 미련이 남아있다면, 자신의 연인이었던 내가 다른 여자와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질투에 의한 동요.
란셀롯이 꾸미고 있는 시나리오는 지극히 단순한 질투 유발 작전이었다.
(연애에 있어서 질투만큼 무서운 무기는 없다고 사형이 그랬으니까.)
그는 지략은 높지 않았으나 연애전(戰)에 있어서는 백전백승이었던 자신의 바람둥이 사형의 말을 잠시 생각해보았다.
(분명 사이가 틀어진 연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은 그런 강렬한 감정이라고 그랬지?)
당시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여기고 귓등으로 흘렸던 이야기들.
왠지 그렇게 쓰잘데 없다 여겼던 것들이 최근들어 중요하다는 것을 자꾸 깨닫게 되는 란셀롯이었다.
(칫! 그때 좀 더 자세히 들어두는 거였는데. 내가 제대로 기억은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군.)
사람 좋았던 사형의 엉터리 연애론까지 필요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란셀롯은 기억이 가물 가물한 그 이야기들이 몹시 아쉬웠다.
(이런 순진한 아이를 상대로 그런 얍삽한 작전에 쓰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카렌에게 아직 자신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다는 가정 하에 실행하고 있는 작전.
그 작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며 란셀롯은 자신의 근처에 있던 메이리를 바라보았다.
동쪽 숲에서의 일 이후로 더욱 란셀롯을 좋아하게 된 메이리는 이제는 그림자처럼 그를 수행하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에선 행복에 찬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미안. 메이리.)
그런 메이리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안 드는 것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이용하는데에 주저함이 없는 란셀롯이었지만, 순진한 처녀의 연정마저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에는 다소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네가 가장 효과가 클 것은 자명하니까 어쩔 수 없구나...)
이미 메이리를 만나 그녀의 감정을 확인한 바 있는 카렌에게, 메이리의 헌신적인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이런 메이리의 태도는 옛날의 카렌을 연상케 하니까.)
메이리의 봉사를 받을수록 그런 생각이 자꾸 들던 란셀롯이었기에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신뢰의 눈동자를 볼 때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역시 메이리는 그때의 카렌을 생각나게 해.)
3년 전 그를 맹목적으로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그리고 따랐던 카렌.
드골과 함께 유일하게 믿을 수 있었던 아군 중의 아군을 말이다.
(굳이 아군 중의 아군이 아니라 해도 좋아. 이 아이와 있으면 그냥 기분이 매우 좋아지니까. 그건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메이리는 매우 편안하였다. 마치 그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품 안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절로 안심이 되었고, 느긋해졌다.
(만약 작전때문이 아니라해도, 이대로 이 아이와 사귀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메이드인 메이리와 왕자인 그의 열애는 완전히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해도 큰 흉이 되진 않았다.
로드리아 왕국 시절, 왕족이나 귀족들과 눈이 맞아 후궁으로 들어간 시녀의 일은 비일비재 했으니 말이다.
오히려 시녀들 중엔 노골적으로 귀족들에게 접근을 하여 물의를 빚는 일이 많았다.
다들 둘의 관계를 듣게 되면 놀라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욕을 하진 않을 것이다.
이미 요새 안에는 알게 모르게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보이도록 란셀롯이 유도한 점도 있지만, 둘의 관계가 진짜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이 아이에게 빠져들어가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어.)
란셀롯은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 접근을 하였는데, 왠지 자승자박하게 되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였다.
(후후~ 그래도 정말 메이리를 알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군.)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그가 그녀에게 빠져드는 느낌을 받고 있었음에도 그는 메이리가 좋아졌다.
그녀는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존재였으며, 로렌조와는 다른 의미로 배울 점이 많은 아이였다.
(설마 그런 재능도 있었는지 몰랐고 말야.)
메이리를 통해 자신도 모르는 나쁜 버릇을 알게 된 란셀롯은 자신의 약점을 더이상 노출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기 되기까지 메이리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놀랍게도 메이리는 평범한 시녀들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재능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남들의 미세한 버릇을 파악해 상대의 거짓을 어느정도 꽤뚫어 본다는 것이었다.
(아직 체계적이지 못해서 그렇지 만약 이것을 확실히 부화만 시켜준다면 그녀는 정말 무서운 무기가 될 수도 있어.)
외교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서로를 속고 속이는 치밀한 심리전에 있었다.
그런 면에서 메이리는 아주 강력한 무기를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키우고 있었다.
남의 거짓을 꽤뚫어 보는 재능을 말이다.
"왜 그리 절 빤히 쳐다보기만 하세요?"
란셀롯이 마치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고만 있자 메이리는 몸을 움추리며 물었다.
그 모습이 마치 겁을 집어먹은 토끼와 같아, 란셀롯은 눈 앞의 소녀가 너무나 귀여웠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왠지 오물 오물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아닌 게 아니라 큰 샌드위치를 필사적으로 갉아 먹는 메이리의 모습은 토끼 그 자체였다.
"히잉~. 너무해요."
울상이 체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귀여워서 너털웃음을 짓고 만 란셀롯이었다.
"저길 봐. 또 왕자님이 메이리와 함께 피크닉을 즐기신다."
이미 산책을 하는 둘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자주 눈에 띄여서 요새 안에서는 둘이 사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퍼져 있었다.
"둘이 사귀다는 소문은 진짜인 것 같아."
"진짜? 설마."
요새 내에서 일하던 일꾼들 중 둘이 란셀롯들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며 수근거렸다.
"아니야. 난 전에 란셀롯님이 메이리의 뺨에 뽀뽀하는 것도 보았는걸?"
"진짜로?"
되묻는 다른 일꾼의 말에 입이 가벼운 듯 보이는 일꾼이 더듬거렸다.
"아니...그게 꼭 그런 건 아니었는데 여튼 볼에 얼굴이 가까웠던 것만은 확실해."
"그게 뭐야. 그건 뽀뽀한 것이 아니잖아. 죽고 싶냐?"
열심히 경청하고 있던 일꾼이 입이 가벼워보이는 일꾼을 때릴 듯이 노려보았다.
그렇게 요새 안의 일꾼들 사이에는 몰래 그런 대화들이 오갈 정도로 둘의 분위기는 남들이 보기에 오해하기가 쉽상이었다.
(역시 이렇게 되는건가?)
일꾼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카렌은 남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소문을 통해 란셀롯과 메이리가 가까워지고 있단 소리를 듣고는 남몰래 둘을 뒤따라 다니면 훔쳐보고 있었다.
(우려했던 대로네...)
이미 그에게 푹 빠진 듯한 메이리의 눈동자를 통해 그녀가 란셀롯에게 마음이 있음을 알았지만,
이 정도로 빨리 둘의 관계가 급진 전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카렌이었다.
(일단 신분의 벽이 있으니까 쉽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역시 란셀롯은 그런 걸 따지질 않는구나.)
란셀롯은 이전부터 냉철한 사람이긴 했지만,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자신에게 잘 대해 주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보답을 해주는 성격이었다.
뭐랄까, 정확히 말하자면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랄까.
남들을 이용하는데 능해 필히 미움을 받을 성격이었지만,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장점들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 중에 능력만 있다면 평민이든 귀족이든 가리지 않는 공정함은 평민 출신이 대다수였던 저항군들에게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였다.
-지끈!
(왜 이리...가슴이 아프지...?)
그녀는 입 안이 씁쓸했다.
3년 전 그날 이후, 그를 절대 용서치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막상 그를 보자 자꾸 흔들리는 자신이 못나보였다.
또한 자신을 영원히 사랑할 것 같았던 그가 다른 여자에게 시선을 주고 있자 가슴이 아팠다.
(화가 나. 화도 나지만 너무나 슬퍼.)
부글 부글 끓는듯한 기분과 또한 한없이 추락하는 듯한 슬픈 마음이 들어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질투심에 자꾸 질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러웠다.
지난 몇 주일간 지켜본 바로는 란셀롯은 많이 변해있었다.
이전에 조부인 드골이 지적을 하며 아쉬워했었던 모난 부분들이 많이 다듬어졌으며,
아직 얼굴이 경직되긴 했지만 사람들에게 따스한 미소를 보낼 줄 알 정도로 대범해졌다.
오랜 고문으로 많이 망가졌던 몸이 회복이 되면서 미남이었던 외모가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으며,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말을 고르는 듯한 행동을 자주 보였다.
(이전이라면 유아독존인 듯한 태도를 많이 보였을텐데...)
카렌은 리더로서 란셀롯이 한층 더 성장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가져다 주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메이리라는 것 또한 알 수가 있었다.
(내가 아닌, 단순한 메이드인 메이리가 말이야.)
메이리를 바라보자 그녀의 검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보였다.
신뢰에 가득찬 그 눈동자가 이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다시 아파왔다.
(왜 이리 가슴이 아프지?)
자꾸 순수한 메이리의 모습에서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게 되는 카렌이었다.
(...)
그녀는 잠시 더 메이리와 란셀롯을 훔쳐본다음 그 자리를 떠났다.
이런 착잡한 마음을 풀 방법은 검술에 매진하는 수 밖엔 없었다.
"..."
카렌이 그곳을 떠나고나서 한참 후, 그 근처 그늘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휴우~. 난 정말 뭐하고 있는건지..."
그 사람은 한숨을 내쉬면서 더운 듯 후드를 제꼈다.
-스르륵~
놀랍게도 그 안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로자리아 왕녀였다.
그녀는 남에게 들킬 걸 염려한 듯 두껍고 어두운 색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동화(同化)라는 은신술에 능한 딜런의 모습과 비슷했다.
"자신의 오라버니를 남몰래 훔쳐보다니..."
이미 딜런을 통해 란셀롯에 대한 의심을 벗은지 오래인 로자리아였다.
남들에게 친절하며, 그들의 어려움을 손수 돌봐주는 친절한 사나이.
자신과는 너무나 다르게 다른 이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동경의 대상.
그녀는 란셀롯의 역정보에 당해 그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어 버렸다.
자신에겐 없는 이상적인 인간이자 바람직한 군주의 상을 란셀롯을 통해 보게 된 로자리아는 이미 그를 로드리아의 왕으로 합당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친오라버니를 훔쳐보는 여동생은 들어보지도 못 했었어요."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남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로자리아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란셀롯에 대한 의심을 벗자 이미 가지고 있던 동경심이 더욱 깊어져 돌이킬 수 없을 정도까지 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딜런이 가지고 있던 "동화의 후드"를 걸치고 시간날 때마다 란셀롯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 둘이 붙어다닌 시간이 무척 많네. 아직 오라버니의 몸이 완쾌된 것은 아니어서 그렇다지만 저렇게 연인처럼 다정해보인다니...)
로자리아 왕녀는 메이리와 란셀롯의 웃는 모습을 보자 왠지 기분이 안 좋아졌다.
이미 심복인 딜런을 통해 란셀롯에 대한 의심을 벗은 그녀는 오라버니로서의 란셀롯 또한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심을 한 다음부터는 왠지 쉽게 다가가기 어려워서 멀리서 지켜볼 따름이었는데, 자꾸만 눈에 둘의 오붓한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내가 그때 의심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 둘도 저런 식으로 가까워졌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원래는 로자리아 자신이 란셀롯을 간호하려고 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건은 모든 하인들의 반대에 부딪쳐 꺽여버렸다. 안 그랬다면 아마추어인 로자리아의 손길에 란셀롯의 상태가 오히려 악화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아~, 동경하던 오라버니의 근처에 가지도 못한다니... 정말 한심하네.)
로자리아는 다정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메이리와 란셀롯을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오누이끼리 저렇게 다정히 대화를 한다면 멋질텐데...)
잠시 그런 상상을 하자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살짝 후훗 웃어보인 로자리아는 다시금 메이리와 란셀롯을 훔쳐보았다.
(에? 지금 뭐하는 짓이지?)
갑자기 둘의 입술이 겹쳐질 듯 가까워지자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꿀꺽! 저,저렇게 가깝게...!)
오누이끼리 다정히 대화를 나누던 상상을 하고 있던 도중이라, 마치 그녀가 란셀롯에게 접근되어지고 있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입술들.
(하윽~. 저렇게 부드럽게 입술을...)
로자리아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왠지 자신이 그렇게 입맞춰지는 것 같아 몸도 달아올랐다.
-두근!
순간 로자리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찌르르한 감각과 함께 그녀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뭐야. 지금 이 기분은...?)
잠깐 상상만을 했을 뿐인데 그녀의 기분은 묘한 행복감과 함께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이,이상해. 이 기분.)
왠지 배덕한 쾌감을 알아버린 듯한 죄악감이 물씬 들었다.
하지만...
(역시 저런 식으로 되는 건 나이고 싶어.)
왠지 복잡한 마음이 되어버린 로자리아는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였다.
아무래도 찬물로 목욕을 하지 않고는 그녀는 달아오른 몸을 식힐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란셀롯이 의도한 것은 카렌 뿐이었지만,
흔들리고 있는 것은 두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