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글]밤에 찾아온 여자 2/2
밤에 찾아온 여자 2/2
홀은 꽤 넓고 모던한 분위기의 인테리어였다.손님들은 주로 직장인들로서
특실에는 아가씨들이 대여섯명 모여서 생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술
을 마시며 오늘은 전처럼 취하지 않도록 조심했다.그 날은 빈 속에 의외
로 술이 센 그녀와 맞추느라 그만 과음했엇다. / 무슨 일 하세요? / 하고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 기획실에 다녀요./ 예../ 미선씨는? / 그냥..조
그만 회사에 다녀요./
대화가 끊어지고 우리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그녀는 술을 따라주면 한번
에 마셨는데 술 잘마시는 걸 과시하는 게 아니고 버릇인 듯 했다. 마담이
다시 우리 자리에 끼어들어 잠시 침묵이 깨어지며 분위기가 다소 활발해
졌다.술과 안주를 더 시키고 한동안 손님이 뜸해서 셋이 마셨다.미선은
나와는 말을 잘 안해도 마담과는 잘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참 재미없는
여자로군..하고 나는 생각했다.전의 일 때문에 날 경계하는 걸까? 그런데
미선이 잠깐 화장실에 갔을 때 마담이 내게 말했다. / 저 아가씨 그동안
이틀에 한번꼴로 오던데..눈치보니까 아저씨 안오나 하는 것 같더라구..
/ 그리고는 호호 웃는 것이었다.
/ 아, 그래요?../ 나는 뜻밖의 말에 좀 어리둥절했다.그렇다면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길 꺼려하거나 서툰 여자인가보다. 그 날 안좋은
꼴로 헤어졌는데 그녀는 날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를 바꾼 다음 좀 친밀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
다. 그녀가 자리로 돌아왔다.우리는 좀 더 시간을 보내다가 자리를 일어
섰다.전날처럼 우리는 차타는 곳을 향해 말없이 걸었다.
/ 2차 안갈래요? / 하고 이번에는 내가 제안했다.그녀는 웃음지으며 나를
보며 말했다. / 무리하지 마세요./ 나는 잠시 사이를 두고 말했다. / 오
늘은 괜찮아요. 그 때는 몸 상태가 안좋아서../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 그럼 2차는 아저씨 집 근처에 가서 해요. 그게 안전하겠어요./ 음..어
쩌다 이 꼴이 됐나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 그래요,그럼./ 하고 택시를
잡아타고 내가 사는 동네입구에서 내렸다.
어디로 들어갈까 하고 둘러보다가 깨끗해뵈는 한식집이 보여 / 저기 갈래
요? / 하자 그녀는 고개를 젓고는 두리번거리더니 저기가 좋아요./ 한다.
돌아보니 또 포장집이었다. / 춥지 않아요? / / 괜찮아요.이 정도는 ../
그래서 우린 다시 포장집에서 2차를 했다. 포장집 안에는 다른 남녀 커플
하나가 술을 마시고 있엇다. 나는 그녀와 친밀한 분위기를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여기서는 힘들겠구나 싶어서 좀 실망이 되었다.
그렇게 또 심드렁하게 술만 마시고 있는데 중년남자 셋이 들어왔다. 곧
걸직한 남자들의 목소리로 포장집의 분위기는 활발해졌으나 나는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 그만 나가죠./ 하고 내가 말했다. 밖으로 나오자 눈발
이 흩날리고 있었다.겨울들어 처음 내리는 눈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
야,눈온다.." 하며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것이었다.그 모습이 꼭 사춘기
소녀 같았다.
곧 눈발이 굵어지며 온 거리를 하얗게 덮기 시작한다. 오늘은 나보다 그
녀가 꽤 취했는데 비틀거리는 그녀를 안고 잠시 텅 빈 어느 주차장 안으
로 들어갔다. / 준호씨../ 하고 그녀가 말한다. / 나 좀 꼭 안아줘요../
나는 그녀의 말대로 했다. 그렇게 부둥켜안고 있는 우리 위로 하얗게 눈
이 자꾸자꾸 쌓여왔다. 그녀가 내 품에 안긴체 어깨를 들썩이길래 얼굴을
들어보니 울고 있었다. 나는 이럴 땐 부드럽게 달래주는게 남자의 역활이
려니 생각하고 등을 토닥거려주었다.그녀는 내가 모르는 나름대로의 깊은
사연이 있나보다..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훌쩍이는 그녀를 안고 비틀거리며 주차장을 빠져나와 거리를 걷
는데 그녀가 말했다. / 저..준호씨, 나 커피 좀 뽑아줄래요? / 주위를 둘
러보니 길건너에 커피자판기가 눈에 띄었다. 그녀를 어느 건물의 계단에
앉혀놓고 길을 건너서 커피 2잔을 뽑아왔다.
그녀에게 커피를 건네자 어린아이처럼 두 손으로 커피를 받아들고 후후
불어가며 커피를 마신다. / 괜찮아요? / 하고 내가 물었다. 그녀는 웃으
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나 담배 하나만 줘요./ 하고 그녀. 나는 담배를
꺼내어 그녀의 입에 물려주고 불을 붙여주었다.
담배연기를 뿜고는 그녀가 말했다. / 나,참 이상하죠? / / 아뇨? ..왜 그
렇게 생각해요? / 솔직히 말해봐요./ 나는 잠시 사이를 두고는 / 음..사
실 좀 그렇긴 해요../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 준호씨..나, 오늘 준
호씨 방에서 자면 안될까? 자취한다고 하셨죠? / / 그래요.자고가요.그러
지않아도 오늘은 미선씨 너무 취했어요./ 하고 나. 다시금 늑대근성이
살아난다...
그녀는 내 말에 의미있는 웃음을 지으며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는 / 그럼
준호씨 방으로 가요./ 하며 일어나서 내 팔을 잡았다. 오르막길을 조심조
심 걸어 자취방 앞에 당도했다.우리는 눈을 털고 안으로 들어갔다.백열등
을 켜자 그녀는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 아이,침침해../ 하다가 이젤에
걸린 그림을 보고 / 어머,그림 그려요? / 하고 관심을 나타낸다./ 예,취
미로요./ 하고 나. 그러나 그녀는 그림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 곧 시선을
돌리며 / 그런데 왜 형광등 안켜고 백열등을 켜요? 침침하게../ 형광등보
다는 백열등이 그림그리는데 좋아요./ 하고 내가 설명했다.
그녀는 내 방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않는듯 했다. / 뭐 마실 거라도 드
려요? / 하고 내가 묻자 고개를 젓더니 / 물이나 좀 주세요./ 나는 물이
든 컵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물을 마시면서 방안을 둘러본다. /
방이 너무 지저분하죠? / 내가 물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 이렇게
해놓고 지내면 정신 산만하지 않아요? / 한다. / 버릇이 돼서 잘 모르는
데 다른 사람들이 오면 그런 말들 하지요./ 그녀는 잠시 말없이 앉아있더
니 / 이제 그만 자요.준호씨 안졸려요? / 한다. / 그래요,잡시다./ 하고
나는 방을 대충 치우고 이불을 폈다.그녀는 코트만 벗어두고 옷을 입은체
로 내가 펴준 이불 속으로 몸을 뉘였다.불을 끄고 나도 그녀 옆에 누웠
다.
어둠 속에서 나도 모르게 몸이 자석에 쇠가 이끌리듯 그녀에게 끌려간다.
내가 껴안자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그녀의 입술을 찾아 어둠 속에서 긴
입맞춤을 했다.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며 아래로 아래로 더듬어 내려가려니
까 또 그녀의 손이 내려오며 가로막는다.
나는 이번엔 정말 그녀의 행동에 대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옆에
누워 그녀를 향해 물었다. / 왜 그래요, 지금 생리에요? / / 아뇨,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대체 왜../ ..그냥요..부탁인데 거긴 제발 ../ (끄
응..) 하고 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 우리 그냥 아까처럼 안고 자
요./ 하고 그녀. 그러나 나는 그럴 기분이 사라졌다.내가 가만있자 그녀
는 한숨을 쉬며 / 남자들은 참 이상해요..그게 그렇게 하고싶을까? / 그
말이 그렇잖아도 아리송한 그녀의 이미지를 더욱 아리송하게 만든다.내가
물었다./ 그럼..미선씬 그런 욕구가 없단 말에요? / 그녀는 잠시 말이 없
더니 / 아직은..글쎄요..별로에요,그런 거./ 이런 ..불감증인가? 나는 맥
이 빠져서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 미안해요../ 하고 그녀가 말했으
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까처럼 안아주길 바라는 것 같았으나 나는 모른 척하고 잠을 청
했다.아침에 눈을 떳을 때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그녀
에게 흥미를 잃었고 그 호프집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번호로 호출이 왔다. 퇴근시간이 가까와져 있었다.
사무실을 나서며 가까운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전화를 하자 귀에 익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호출한 분 계세요? / ..준호씨에요? / 그제야
그녀가 미선이라는 걸 알았다. / 아,미선씨에요? / 예../ / 왠일이세요?
/ 그냥요..궁금해서./ 나는 별로 할말도 없고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그
러자 그녀가 말했다./ 지금 어디 계세요? / / 퇴근하는 중이죠./ 그녀는
좀 망설이더니 / 오늘 저랑 한잔 안하실래요? 저도 지금 퇴근하려는데.
좀 드릴 말씀도 있고 해서요./ 나는 어떻게 할까 잠깐 생각해보고 / 그
래요.어디서 만날까요? <샘>에서 기다릴까요? / 샘은 그녀와 만난 호프
집이었다./ 아뇨,오늘은 다른데서 만나는 게 좋겠어요./ 그러더니 / 이쪽
으로 오실래요? 어차피 퇴근 방향이니../ / 그러죠.그럼./ 그녀가 만날
곳을 알려주었다.
그리 멀지않은 곳이어서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그녀가 일러준 곳은 어느
지하의 소주방이었다. 한쪽 구석에 그녀가 앉아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녀의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녀는 전보다 좀 초췌해보였다./ 아팠
어요? / 하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여종업원이 메뉴를 들고 왔다. 주문을
하고 술이 오자 우리는 한잔씩 마셨다.그녀의 얼굴을 조명 아래에서 보니
꽤 예뻐보였다.
광대뼈만 아니라면 그녀도 꽤 예쁠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큰 눈에 오똑
한 코,도톰한 입술.그러나 광대뼈때문에 얼굴이 넓어보였고 반면에 어깨
는 좁았다.그러나 그녀는 키가 크고 날씬해서 전체적인 프로필은 괜찮은
편이었다.그녀가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듯 해서 내가 이런저런 말을 꺼
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 했다.가벼운 잡담을 나누며 술을 마시다보
니 이곳의 분위기도 그리 나쁘지 않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 여기 괜찮네요,분위기./ 하고 나. / 제가 자주 오는 곳이에요./ 하고
그녀. / 샘에는 어떻게 자주 가게 됐어요? / 하고 나. 그녀는 후후 웃더
니 / 친구따라 갔죠,그곳에서 서빙하는 남자애가 귀엽다고 해서..지금은
그만 뒀지만./ 이런 말을 들으면 그녀도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닌
데..하는 생각이 든다. / 이런 얘기 누구한테 한 적은 없지만..더구나 남
자한테 하려니까../ 하며 그녀가 말을 꺼낸다.아,이제 드디어 그녀의 사
연을 말하려는군..
그녀가 술을 비우고 내가 다시 한잔을 따라주었다. / 별로 특별한 사연도
아니에요.어떻게 보면 흔한 일일지도 모르죠.. 고 2 때였어요.하루는 친
구들과 놀다보니까 밤늦게 집에 들어가게 됐죠.아빠한테 야단을 맞다가
나도 모르게 대들었어요.아빠의 간섭이 왠지 모르게 견딜 수 없는 기분이
어서..그 전까지 아빠에게 맞은 일은 한번도 없었는데 그 때 처음으로 뺨
을 맞았어요.그래서 홧김에 집을 뛰쳐나왔죠. 그리고 밤새도록 거리를 돌
아다녔어요.어디라고 할 것 없이. 기분은 참담했어요.죽고싶었다고나 할
까..내가 뭐하러 사는 걸까. 이렇게 살아간들 내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하는 그 무렵에 이따금 찾아오는 삶의 회의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방황하다가 주택가의 으슥한 골목을 지나가다가 불량배들에게 붙잡혔어
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는 잔을 비웠다.그녀의 잔을 채워주고 나도 잔을
비웠다.그녀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 세 명이었어요.제 또래로 보였는데 절 가까운 산밑으로 끌고 갔어요.
물론 처음엔 반항했지만 형편없이 얻어맞았죠..바로 전에 아빠에게 뺨을
맞았다고 분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할만큼 무자비하게 때렸어요. 맞고나
서는 너무나 무섭고 떨려서 아무 저항할 엄두도 못내고 끌려 갔지요.그리
고는../ 그녀는 말을 멈추고 목이 매이는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참으려
애곰다.나는 아무 말없이 그녀의 손등에 손을 얹고 손을 두드려주었다.그
녀는 진정하고나서 말을 이었다.
/ 그 뒤로 두번 자살하려다가 실패했어요..신경정신과에도 한참 다니고..
그 일 때문인지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매번 안좋게 끝났어요../ 그녀는 무
언가 더 말하려했으나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만으로도 마음에 벅찬
듯 했다.
/ 그런 일이 있었는 줄은 생각도 못했군요./ 하고 나.그녀에게 측은한 마
음과 지난 나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 그런 줄도 모르고 전../ /
아네요,준호씬 잘못한 거 없어요..그저 제 행동에 대해서 ..그런 얘길 하
고 싶었어요./
우린 잠자코 술을 마셨다.그러다가 그녀가 말했다. / 저..그런데 준호씨
한테 부탁이 있어요./ 예, 말씀하세요./ / 준호씬 참 착한 것 같아요.그
래서 그런데요.우리 앞으로도 그냥 이렇게 부담없이 만나면 어떨까요? 나
이도 비슷하고하니까 말도 놓고 술생각나면 아무 때나 만나서 술한잔하고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좋지요.우리는 술에 대해서는 궁합이 잘맞는 한쌍의 술고래니까./ 그녀
가 모처럼 웃는다.그러더니 / 그리고요..가끔 준호씨 방에 가서 자더라
도../ 나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 예,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그녀
와 술잔을 맞추고 한잔 마셨다. / 앞으론 엉큼한 생각 안할께요. 그냥
친구처럼 지냅시다./ 그녀가 내게 마음을 털어놓고 말하기 힘든 사연을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나는 고마왔다.그녀를 이해했으며 그녀에게 잘해주
고 싶었다.그녀의 마음에 아직도 남아있을 깊은 상처가 아무는데 힘이 되
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가 술고래가 된 건 체질상의 이유만은 아니었
던 것이다.
그 뒤 우리는 이따금 만나 술을 마셨다.따분한 일상생활에서의 일시적인
탈피의 수단으로 우리가 택한 방법이었다.우리는 도시 속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리 뛰어나지도 않고 별나지도 않은 평범한 남녀였다.
그녀는 가끔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내 방에 와서 자고갔다.그녀가 그런
식으로 자유분방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은 그녀 역시 자취생활을 하기
때문이었는데 내가 그녀의 방에 가지않은 것은 함께 생활하는 여자친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가끔 주말에 호출할 때 나는 그녀를 데리고 영화관에 가기도 하고
가까운 야외로 나가기도 했다.그러는 동안 우리는 꽤 친해졌다. 나는 그
녀가 기억하고 있을 과거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 건강하고 성숙한 여자로
새로 태어나기를 바랬다.그러나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야심(?)은 품지 않
았다.그것은 그녀가 내 이상형이 아니라서든가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사
실 난 여자에 대해 이상형이니 하는 환상은 품고 살지 않는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어느 한가지 유형에 집착한다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
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만남 중 가장 즐거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나쁜 것은 술이었다. 우리는 강물처럼 천천히 흘러가는 인생의 흐름 속에
서 일시적으로 만나 한조각의 나무토막을 붙잡고 표류하는 두 사람 같았
다. 나도 늘 과음하는 편이었지만 그녀가 마시는 걸 볼 때면 이따금 겁이
날 정도였다. 나는 언젠가는 술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해오다 1주일 전부터
실행에 옮긴 참이었다.그런데 지금 다시 그녀와 술잔을 기울이게 됐다.
/ 나랑 있는 친구 내일 이사가./ 하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 애인하고
동거한데나봐./ 그럼 앞으로 혼자 지내겠네../ 하고 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잔을 비우더니 나를 본다. / 나두 일루 이사올까? / 하
고 그녀가 말하며 웃음짓는다.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그녀와 함께 지내긴 방이 너무 좁았다.그리고
나는 아직 나만의 생활이 좋았다.내가 가만있자 그녀는 / 농담이야./
하고 흘린다. / 농담이 아니고../ 하고 내가 말했다. / 함께 지내는 건
좋은데 방이 너무 좁아. 네가 정말 생각있으면 그 문제는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잠시 말없이 술을 마셨다.밖에서 후드득하며 비오는 소리가 들렸
다.곧 쏴아~~하며 비바람이 몰아친다. 술병이 비자 나는 자리를 치우고
그녀가 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녀가 자리에 눕고 내가 불을 끄려하자
그녀가 불끄지말라고 한다. 내가 그녀를 보자 / 불끄지말고 잠깐 같이
있자./ 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옆에 누웠다.습관이 되어서인지 그녀
에 대해 별다른 기대는 품지 않았다.그녀는 옆으로 누우며 나를 본다.
손을 뻗어 나의 가슴을 안으며 내게 다가오며 말한다. / 나 좀 안아줘./
그녀는 잠들기 전에 품에 안기길 좋아했다. 나는 그녀를 안았다.그렇게
안고 있는데 그녀가 몸을 바싹 붙여온다. 왠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
다.그렇게 몸이 밀착된 체 그녀의 몸의 감촉을 느끼고 있노라니 어쩔 수
없이 나의 몸이 생리적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그러자 그녀는 더욱 몸
을 밀착시킨다.
내가 그녀의 얼굴을 보자 그녀도 나를 빤히 바라본다.그녀는 몽롱한 눈
길로 나를 보며 말했다. / 나..오늘 겪어보고 싶어./ 그녀의 말에 충격
을 느끼며 가만히 있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 하고싶단 말야.너하구../
그리고는 내 입술에 입술을 포개고는 키스했다.
/ 불 끌까? / 하고 내가 물었다. / 아니,그냥 해..네 몸이 보고싶어./
나는 그녀의 갑작스런 적극성에 의아하면서도 그것이 좋았고 반가왔다.
그녀의 내부에 어떤 변화가 나타난 것일까?
우리는 옷을 벗고 서로의 나신을 보았다.백열등 불빛 아래의 그녀의 나신
은 따사롭게 느껴졌고 아름다왔다.그러나 나의 것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
빛에 오래된 불안이 잠시 살아나는 듯 했다. 고교시절에 겪었던 악몽같은
체험 뒤로 굳게 문을 닫고 자신만의 껍질 속에 틀어박혀 거부해온 성의
세계로 뒤늦게 한걸음 내디딘 그녀는 아직 사춘기 소녀같은 모습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의 불안한 눈빛에 잘 나타나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갸날픈 몸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계곡으로 내려갔다.오랜 가뭄으로 개울은 바싹 말라있었고 언덕의 숲은
빈약했다.나는 계곡에 입을 대고 가볍게 키스했다.그리고 오랫동안 애무
했다.그녀는 눈을 감고 얕은 신음을 내었다.이윽고 개울에 물이 흐르기
시작하며 생기를 띄었다.
그녀의 몸 속으로 빨려들어가며 우리는 서로 껴안았다. 하나로 녹아드는
느낌이 몰려온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내 팔을 베개삼아 베고 쌔근쌔근
고른 숨을 쉬며 잠들었다. 그러나 나는 정신이 또렷하고 잠이 오지 않았
다. 어둠 속에서 여러가지 생각들을 했다.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일과
지금까지의 일들을 생각했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를 베개에 베어주고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
다. 비는 그쳐 있었다.발코니 난간에 팔을 기대고 어둠에 잠긴 주택가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구름이 동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구름이 지나가며
노란 달이 얼굴을 빛내며 드러난다.멀리서 이층집 창문의 불이 꺼졌다.
무더웠던 여름날의 공기의 찌꺼기를 몰고 가려는 듯 어디선가 우수수 초
가을의 입김이 불어온다.그 바람은 온거리와 건물들 사이를 흐르고 담벼
락에 감아내려진 담쟁이 넝쿨 곁을 지나간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말없
이 전해주는 밤의 이야기를 듣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그리고 그녀 옆
에 누워 잠을 청하려 애쓰다가 새벽녁에야 잠이 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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