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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게임 2부 (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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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2부 고래를 잡았다 ①


김 사장의 집은 일산 신도시를 벗어나 한강 하류 쪽의 대화리란 마을에 있었다.
대화리로 들어서자 일산 부동산, 서울 부동산 등 여기저기 부동산 중개업소가
많이 눈에 띄었다. 신장 개업이란 붉은 글씨가 붙어 있는 음식점, 다방 등도 쉽
게 눈에 띄었다.

박 대리는 대화리 삼거리에서 일단 차를 세우고 오수미가 적어 준 약도를 꺼내
보았다. 약도에는 삼거리에 위치한 수궁이란 제법 규모가 큰 갈비집 쪽의 길로
들어서서 일 킬로미터쯤 가다 포장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회전하라고 적혀
있었다.

「삼십 분 전이군.」

약속 시간을 정확히 지키기 위하여 두 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출발한 것이 잘했
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십여 분이면 김 사장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를 길
옆에 세우고 보도에 비치 파라솔을 세워 놓은 슈퍼마켓으로 들어갔다.

「이 근처 땅값이 얼마나 합니까?」

박 대리는 콜라를 마시면서 주인에게 자연스럽게 물었다.

「요 일대가 백오십만 원은 형성되는가 봅니다. 하지만 팔려고 내놓은 땅은 없을
거요.」

먼지떨이로 문 앞에 쌓아 둔 음료수 박스를 털던 오십대 주인은 박 대리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래요?」

오수미의 말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전해 준 정보에 의하
면 김 사장은 일산 토박이로 이곳에 십여만 평의 땅을 갖고 있던 땅 부자였다고
한다. 일산에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그는 투기꾼으로 변신하여 지금은 천억대의
재산을 축적한 대갑부가 되었다. 그것은 외형으로 드러나는 현금이고, 부동산까
지 포함하면 김 사장 자신도 자기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모를 지경이라고 오수
미는 덧붙였다.

「이 길로 쭉 가다 보면 포장 도로가 끝나고, 거기서 우회전을 하면 느티나무가
있잖아요. 그 동네 이름이 뭡니까?」
「느티나무요? 아, 벌말을 말하는가 보군. 거기가 아마 벌말일 겁니다. 벌말
가시는 손님이신가 보군.」
「혹시 거기 살고 있는 김 사장이란 분을 아십니까? 이 근동에서 소문난 갑부라
고 하던데.」

박 대리는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글쎄올시다. 요즘은 땡볕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도 하룻밤만 지나면 사장으로
바뀌는 통에 그렇게 말하면 알 수가 없습니다. 아 참, 그 동네에 김달근이란 괴
짜 영감이 사는데 그 작자가 돈이 꽤 많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일산에
서 제 땅 가지고 농사짓던 사람 중에 억대 부자가 한두 명입니까? 일산에 신도
시가 들어서면서 한몫씩 잡은 사람들이 많지요.」

주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며 계속 먼지를 털었다. 박 대리는 김달근이란
말에 귀를 활짝 열었다. 오수미가 말한 김 사장이란 사람의 이름이 김달근이었
기 때문이다. 괴짜라는 말에 동명이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었다. 현재로서는 김달근이 VIP였기 때문이다.

「이 집도 보상금 받아서 지은 집인데, 지금 당장 내놓아도 오 억은 눈 감고도
받을 수 있지요.」

주인은 박 대리가 더 이상 묻지 않자 슬쩍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박 대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고 보니 일산은 어떤
면에서 축복받은 땅이었다. 모내기한 논이 보이고, 비닐 하우스가 보이고, 경운
기가 털털거리며 지나가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억대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
니 물질 만능 시대에 사는 사람치고는 축복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비포장 도로로 들어서자 칠월의 작열하는 태양에 마를 대로 마른 도로에서 먼지
가 일었다. 먼지 때문에 차 문을 닫고 집채만한 먼지를 꼬리에 달고 덜컹덜컹 달
리다 보니 차 안이 후텁지근했다. 에어컨을 틀고 고개를 들어 보니 멀리 느티나
무가 보였다. 오수미가 말한 느티나무였다. 그렇다면 그 근처 있는 파란색 기와
집만 찾으면 되는 셈이다.

느티나무가 있는 동네로 들어와 차에서 내리자 비릿한 갯벌 냄새가 아련하게 풍
겨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물은 보이지 않았다. 야산을 배
경으로 경지 정리가 잘된 논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파란 기와집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집은 야트막한 야산을 등지고 동네 끝에 버티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박 대리는 느티나무 밑에 차를 세워 놓고 나와서 파란 기와집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십여 미터 앞에 있는 파란 기와집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
옥 구조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게 없었다. 그런 집에 천억대의 현금을 동원할 수
있는 갑부가 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 근처에 파란 기와집이 또 있습니까?」

박 대리는 상추가 가득 담긴 비료 포대를 힘들게 들고 가는 중년 여인에게 물었다.

「파란 기와집은 저 집밖에 없는데요.」

중년 여인은 박 대리가 발견한 파란 기와집을 턱으로 가리키고 나서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그럼 저 집이 김달근 씨란 분의 댁입니까?」
「이름은 잘 모르겠고, 김 사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보긴 했는데…….」

중년 여인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목에 건 수건으로 훔치고 나서 이제 더 물어
볼 것이 없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가버렸다.

「흐음.」

박 대리는 시계를 봤다. 오수미가 전해 준 약속 시간이 되려면 오 분이 남았다.
느티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가 평상 위에 앉았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나서
파란 기와집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에서 올 때만 해도 파란 기와를 얹은 전원 주
택을 연상했었다. 그러던 것이 여느 농부가 살고 있는 듯한 규모의 평범한 농가
주택으로 변하자 약간 실망했다.

하긴 돈 있는 사람일수록 저렇게 사는 법이니까. 박 대리는 애써 자기 좋을 대
로 생각하고 꽁초를 버렸다. 천천히 걸어서 파란 기와집 앞까지 왔을 때는 정확
히 일 분 전이었다.

이백여 평쯤 되어 보이는 정원의 한가운데는 1993년형 회색 엘란트라가 한 대
주차되어 있었다. 그 주변에는 몇 그루의 향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등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인상적인 것이 있다면 감나무 밑에 있는 평상이었다. 대나무로 엮은 평상 위에는
꽤 고가로 보이는 바둑판이 있었다. 김 사장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증거였다.
시계 바늘이 정확하게 약속 시간인 세시를 가리킬 때 벨을 눌렀다. 그러자 대청
문이 드르르 열리며 모시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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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2부 고래를 잡았다 ②


「어!」

오수미였다. 오수미는 난이 그려져 있는 회색 모시 한복을 입고 생긋 웃으며
대문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여기 있었습니까?」

박 대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호호, 그렇지 않아도 사장님하고 내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전 이,삼십
분쯤 일찍 오실 거라고 말했고, 사장님은 정시에 오신다고 하지 뭐예요.」

한복을 입은 오수미의 모습에서는 호스티스의 냄새를 느낄 수가 없었다. 갓 결
혼한 양가집 규수도 오수미의 용모를 따를 수 없을 만큼 한송이 수선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박 대리는 무엇보다 몇 시에 도착하는가 내기를 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정말 내기를 했단 말입니까?」

박 대리는 오수미의 뒤를 따르며 나직하게 물었다.

「정말이라니까요. 사장님, 은행에서 오셨습니다.」

오수미는 박 대리에게 귓속말로 속삭이고 나서 대청 안을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들어오시라고 하지.」

안에서 약간 쉰 듯한 음성이 선풍기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다. 대청 마루에 올
라서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쌀뒤주였다. 두어 가마니는 실히 들어갈 만한 쌀
뒤주가 반질반질한 윤기를 내며 구석에 있었다. 그 위에는 제법 값이 나갈 듯한
백자와 철쭉 분재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성은행 명동 지점에 있는 박찬호라고 합니다.」

박 대리는 꼭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포장 도로를 달려와 느티나무가 있
는 마을로 들어선 것을 시작해서 쌀뒤주 위에 놓여 있는 값비싼 백자, 그 옆의
잎이 무성한 철쭉 분재, 김 사장의 쉰 듯한 음성이 현실 감각을 잃게 했다.

「앉게. 할 일이 없어서 가보떼기를 하고 있던 중일세.」

김 사장이 박 대리의 얼굴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김 사장의 그러한 눈빛은 마루
밑 어둠 속에서 쏘아보는 고양이의 눈처럼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나서 김 사장
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거슴츠레한 눈으로 다시 돌아가 화투장을 읽어 나갔
다.

가보떼기란 화투 석 장의 합계가 9나 19, 29로 떨어질 때까지 패를 보는 것을
말한다. 똥과 비를 제외한 모든 화투를 석 장씩 조합하게 되면 끝자리가 9로 떨
어지게 되어 있는데, 나중에 9로 떨어진 화투들을 자기 나이 수만큼 쳐서 다섯
장씩 패를 갈라 끗수를 잰다. 이 끗수 중에 역시 가보가 많이 나오면 그날 운이
좋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일종의 화투로 운수 보기 게임이다.

김 사장은 방으로 들어오는 박 대리는 쳐다보지도 않고 군용 담요에 놓인 화투
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방 안에 있는 가구는 단출했다. 구형 컬러 텔레비전 한
대와 전화 외에는 골동품에 가까운 가구가 전부였다. 마치 산사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아랫목에 앉은 김 사장은 고개를 숙이고 척척 화투장을
내던졌다.

「실례하겠습니다.」

박 대리는 김 사장과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머, 이건 됐잖아요.」

오수미도 박 대리를 언제 방으로 안내했느냐는 듯한 얼굴로 화투장을 가리키며
탁구공이 튀는 것 같은 음성으로 훈수를 했다. 그녀가 가리킨 줄 위쪽에는 국진
두 장이 있었고, 김 사장이 방금 아래쪽에 칠자를 놓고 다음 칸에다 화투를 놓은
순간이었다.

「이런 육육칠 하면 가보가 된다는 것을 잊었구먼. 킬킬, 이래 서 젊음이 좋은
거여.」

김 사장의 웃음은 특이했다. 소리 내어 웃지를 않고 웃음이 입 안에서 새어 나
오는 듯했다. 웃음소리를 뱉어 내는 입술은 종이짝처럼 얇았다. 코는 주먹코였
고, 눈은 뱀눈처럼 길게 찢어졌다. 머리카락은 은발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온통
흰색이었다. 얼굴 전체는 진흙으로 대충 만들어 놓은 인형처럼 균형은 없었으
나, 피부는 젊은 사람처럼 혈색이 좋고 탄탄해 보였다.

「아, 이것도 가보지.」

김 사장이 세 번째 칸에 나란히 놓인 국진과 매조, 솔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집
으며 오수미에게 물었다.

「다 아시면서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지금?」

오수미가 앙증맞게 눈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정신 없는 게 뭐가 좋다고 자랑을 하겠누. 요즘 같아서는 하루가 다르게 기억
력이 없어지는 것 같아서 살맛이 안 나.」
「보약이라도 한 첩 드시지 그래요. 제가 한 첩 지어 올까요?」
「쓸데없는 소리, 내 비루먹은 강아지같이 보여도 이날 이때까지 보약의 보자도
모르고 살아 온 사람이여. 옳지, 이것도 됐구나. 킬킬, 오늘 운이 좋은걸. 단판
에 떨어질 것 같아. 양귀비 같은 미인이 옆에 있어서 그런가, 안 그래?」

김 사장은 오수미를 쳐다보며 웃었다.

「사장님도 손님 계신데 못 하시는 말씀이 없으셔.」

오수미의 얼굴이 일순간 당혹감으로 빛났다. 반사적으로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박 대리는 화투 판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서늘한 눈망울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다시 김사장을 쳐다보았다. 김사장과 시선이 마주치자 굳게 다문 입술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싸늘한 시선을 교환하였다. 오수미는 그런 김 사장을 밉지 않
은 눈초리로 쳐다보며 봄볕 같은 미소를 지었다.

「오라, 내 정신 좀 봐라. 손님이 와 계신 줄 모르고 이 주접을 떨고 있었군. 하
지만 이해해 주게. 난 한번 시작한 것을 중도에서 끝내는 성미가 못 돼서 말이야.」

김 사장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박 대리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뿐이었다.
다시 앞에 깔린 화투장으로 시선을 던지고 왼손에 들고 있는 화투목에서 한 장
씩 빼서 숫자를 맞춰 보기 시작했다.

「아, 그럼요. 개의치 마시고 계속하시죠.」

김 사장과 오수미가 소리 없이 교환하는 눈빛을 보기 못한 박 대리는 과장스럽게
손을 저으며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부도 일보 직전
에 있는 회사 사장이 비상장 회사 어음을 들고 와서 할인을 해달라고 해도 이처
럼 냉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거기에다 방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는 오수미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답답하기까지 했다.

한편으로는 오수미와 김 사장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했다. 방금 밭에서
일을 하다 온 사람처럼 러닝 셔츠만 입고 앉아서 가보떼기를 하는 김 사장과 불
면 날아갈 듯한 모시 한복을 입고 김 사장을 제왕처럼 떠받드는 오수미의 역할을
알 수가 없었다.

「이것 봐라, 삼자가 떨어지지 않네.」

김 사장은 마지막으로 한 장 남은 세 끗짜리 사구라가 아홉으로 떨어지지 않자
즐거우면서도 짜증스럽게 말했다.

「원래 삼자 한 장은 남는 법이잖아요?」

옆에서 오수미가 거들었다.

「처녀가 화투는 언제 그렇게 배웠누. 돌고 돌면 삼자도 떨어지는 법여. 땡감도
하루 종일 가지를 흔들면 떨어지게 마련이거든. 이것 봐, 삥새우로 떨어지잖여.」
「어머머, 진짜네.」

오수미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고 김 사장은 아홉으로 떨어진 화투를 모아서 눈
을 지그시 감고 치기 시작했다.

박 대리는 잔기침을 하며 김 사장이 화투목을 몇 번 치는지 헤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 사장이 화투를 다 치고 다섯 장씩 패를 나누기 시작하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 사장이 일흔다섯 번을 치고 다섯 장씩 패를 나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정석대로 가보떼기를 했다면 그의 나이는 75세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60세 전후로 보일 정도로 살결이 팽팽했다.

「이런, 어렵게 떨어졌는데 끗수는 별 볼일 없는 걸 보니 오늘 하루도 별다른 일
이 없겠는걸.」

김 사장은 그렇지 않아도 작은 눈을 더 가늘게 뜨고 화투 끗수를 헤아려 보고
나서 화투를 오수미에게 건네주었다.

「그래도 꽤 좋은 편이었어요.」

오수미가 해맑게 웃으며 화투를 받아서 텔레비전 밑에 놓았다.

「아줌마는 아직 안 왔는가?」
「올 때가 됐습니다. 시장에 간 지 세 시간이 넘었잖아요.」

김 사장이 담배를 꺼내 물자 오수미가 재빠르게 불을 붙여 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대신 차 좀 가져오지. 손님이 너무 오래 기다렸어.」
「알겠습니다.」

오수미는 박 대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일어섰다. 그녀는 발 소리가 나지 않게 조
용조용 뒷걸음치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박 선생이라고 했던가?」

김 사장은 오수미가 밖으로 나가자 약간 쉰 음성으로 물었다.

「네. 박찬호라고 합니다.」

박 대리는 한 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 면접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또박또박 대답
했다.

「음, 이름이 좋군. 그래, 박 선생은 은행에 근무한 지 얼마나 됐는가?」
「십 년째입니다.」
「음……. 집은 서울인가? 서울 태생이냔 말일세.」

김 사장은 눈을 지그시 감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천천히 물었다.

「아닙니다. 고향은 충북입니다. 대학도 그곳에서 나왔습니다.」

박 대리는 김 사장이 눈을 감고 있어서 불안했다. 그가 언제 갑자기 눈을 뜨고
엉뚱한 질문을 할지 염려스러웠다. 슈퍼마켓 주인이 괴짜라고 한 말이 문득 생
각나기도 했으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집의 규모나 초라하리만큼 소박한 방 안
의 가구 같은 것을 생각하면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보이나 자신 있게 말하는
말투나 비록 호스티스에 불과하지만 오수미 같은 미인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배경 뒤에는 엄청난 부(富)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음……. 충청도 양반이군. 대리 진급은 언제 했나?」
「올해 사 년차입니다.」

박 대리는 자기도 모르게 등에 진땀이 났다. 갈수록 산이라더니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아무리 예금 유치를 권유하는 입장이지만 처음부터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푸대접을 받는가 했더니 종내는 면접 시험을 보듯 꼬치
꼬치 캐묻는 그 저의가 무엇인지 몰랐고, 쉰 목소리와 점을 보듯 눈을 지그시 감
고 묻는 표정 등 모든 것이 무언가 불안한 조짐이 있는 것 같았다.

「차 가져왔습니다.」

박 대리는 언제 방문이 열렸는지도 몰랐다. 오수미가 그만큼 조용히 방문을 열고
차를 내왔기 때문이다.

「차 마시지. 인도산인데 차 맛이 그만일세.」

김 사장은 박 대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오른손으로 찻잔을 잡고 왼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어 가만히 차의 향기를 음미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박 대리도 거래처를 자주 방문하다 보니 정석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다도에 대해
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 사장이 차를 대하는 표정이나 몸짓은 조선 시대의 초
의 선사가 그러했을 것처럼 엄숙하고 진지했다.

「드세요. 한번 마시고 나면 이 맛을 쉽게 잊지 못할 겁니다.」

오수미가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박 대리에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시선을
계속 주는 것도 아니었다. 말을 끝내고 나자 이내 시선을 거두고 자기 찻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박 선생은 한강에서 고래를 잡았다면 믿겠는가?」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질문인가. 박 대리는 뜨거운 차를 아무 맛 없이 한
모금 삼키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강에서 말입니까?」
「그렇다네. 한강에서 고래를 잡은 적이 있다면 믿겠는가?」

김 사장이 조용히 차 맛을 음미하며 다시 물었다.

「바다에 사는 고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박 대리는 화두(話頭)를 듣는 듯한 기분이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수
미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그 질문은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서늘한 눈매 속의 눈
동자가 흔들리면서 김 사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물론 고래는 바다에 살지. 하지만 나는 그 고래를 요 뒷산 너머 한강에서 잡은
적이 있다네.」

김 사장은 찻잔을 내려놓고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그, 그렇습니까?」

박 대리는 김 사장의 눈초리를 처음 보았다. 한마디로 독사의 눈을 보는 듯한 기
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내 눈동자가 흐려지며 안면이 실룩거리는가 싶
더니 킬킬 웃었다.

「믿지 못할 테지. 고래는 당연히 바다에 사는, 그것도 포구가 아닌 심해 한가운
데 사는 놈이니까 말일세.」
「고래를 어떻게 잡으셨나요?」

오수미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수미의 얼굴을 본 박 대리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강에서 고래를 잡았다는 말에, 도대체 말뜻이 무엇인
가를 찾아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그녀는 김 사장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 대리는 이 괴짜 영감이 정말 강에서, 그것도 서울 한복판을 가로
지르는 한강에서 고래를 잡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돌고래였을 테지요?」

박 대리는 오수미 쪽으로 패를 던지기로 하고 침착하게 물었다.

「으하하하, 하하하.」

김 사장이 갑자기 그 특유의 웃음소리에서 벗어나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왜 그러십니까?」

박 대리는 당황했다. 조롱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수미의 얼굴을 쳐다보
았다. 그녀도 조용히 웃고 있었다. 순간 대답이 틀렸다는 기분이 들면서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막말로 이까짓 천억 원을 유치하지
못한다고 해서 당장 내일 사표를 낼 처지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자네도 사람을 보는 눈이 있군.」

김 사장이 웃음을 그치고 오수미를 쳐다보며 고개를 짧게 끄덕거렸다. 오수미는
그렇다는 얼굴로 김 사장의 눈빛을 읽고 나서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그 눈은
마치 먹이를 노려보는 독수리의 일그러진 눈처럼 빛을 냈다. 박 대리가 혼란스러
운 얼굴로 오수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오수미는 눈을 깜박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깊고 서늘한 눈매로 되돌아
왔다. 박 대리는 오수미의 눈빛이 봄볕처럼 화사하다는 걸 느꼈다. 그것도 잠깐
박 대리는 다시 혼란 속에 빠져 들었다. 우선 김 사장의 웃는 표정의 종류는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대답이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겹쳤기
때문이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오수미가 고개를 약간 숙이며 겸손하게 말했다.

「아니야, 난 처음 박 선생이 혼자 왔다는 말을 듣고 면담을 하지 않으려고 했
다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자네가 자꾸 만나 보라고 권유한 것을 듣길 잘했어.」
「고래를 잡으신 이야기부터 해주세요.」

오수미가 빈 찻잔에 다시 차를 채우며 물었다.

「그러지. 한참 오래전 일이었다네. 이 뒷산 너머가 어딘고 하면 한강 하류라
네. 그 물은 임진강 물과 합쳐서 바다로 흘러가게 돼 있지. 그래서 강이라지만
조수 차이가 심하다네. 물이 빠져 나갈 때는 오십 미터쯤이나 빠져 나가는 형편
이니 강으로 보기보다는 바다와 인접한 포구로 보아도 좋지.」

김 사장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한강에서 고래 잡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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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게임◀ 제2부 고래를 잡았다 ③


이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산 너머에 살고 있는 맹씨에게 간 적이 있었다. 맹씨는 강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
를 꾸려 가는 어부였다. 그때만 해도 한강이 그렇게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강 하류에는 어부가 적지 않았다. 맹씨에게 간 이유도 며칠 전에 잉어를 잡으면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던 탓이었다. 마침 그날 아침 잡은 잉어를 갖다 주마
고 전화가 왔었는데 바람도 쐴 겸 직접 가기로 했다.

날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오월이었다. 어차피 바람도 쐴 겸 나온 터라 바
쁘지 않은 걸음으로 천천히 산을 넘어 외딴집에 살고 있는 맹씨에게로 갔다.

「지금 강가에서 포구를 손질하고 있을 낀디유.」

늙은 맹씨 아낙은 자기가 맹씨를 데려오겠다며 집에 있으라고 했지만, 이왕 나
온 김에 강바람을 맞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소주를 두어 병 사들고 강
으로 향했다.

시간은 오전이었다. 물이 빠져 나간 갯벌 둑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저만큼 몇
척의 쪽배가 보였고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물을 꿰고 있는 맹씨의 모습도 보
였다.

맹씨가 앉아 있는 지점을 이십여 미터 앞두고 있을 때였다. 아무 생각 없이 강
을 쳐다보면서 가노라니 물이 고인 갯벌에 시커먼 전신주 토막 같은 것이 흔들
거리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그냥 통나무 토막이나 군용 타이어 조각이 웅덩이
에서 흔들거리는가 싶어 그냥 걸어갔다.

아니 흐르는 강물도 아니고 갯벌에 고여 있는 웅덩이 물이 흔들렸지 않은가? 김
사장은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뒤돌아섰다. 그리고 강가 쪽으로 몇 발자국 내려
가서 흔들리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타원형의 통나무 같은 검은 물
체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보게, 맹씨!」

아무래도 강물에 밝은 맹씨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소리쳐 맹씨를 불렀다.

「아이고, 어르신 나오셨습니까? 집에 계시지 왜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요. 강
바람이 성그러운뎁쇼.」
「그게 아닐세. 빨리 여기로 와보게. 여기 웬 괴물이 있다네.」
「뭐라고요?」
「괴물이 있으니 몽둥이 될 만한 것을 들고 빨리 오라니까.」

김 사장의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웅덩이에 갇힌 검은 물체가 더 심하게 흔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겠습니다요.」

맹씨가 길다란 노를 질질 끌고 뛰는 걸음으로 가까이 왔다.

「저것 좀 보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김 사장은 긴장이 돼서 목이 탈 지경이었다.

「워매, 저건 수, 수달 아닌가?」
「수달이라고 했나, 자네 지금?」
「글씨요. 제 눈에는 수달로 보이는데 한번 가봐야겠구만요.」

강에서 수십 년을 살아 온 맹씨는 두려울 게 없었다. 그는 노를 어깨에 메고 갯
벌 위를 저벅저벅 걸어갔다.

「와따매! 이, 이놈이 고래 아닌가벼.」

맹씨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그 소리에 물에 갇힌 검은 물체가 퍼덕 물장구를 쳤다.

「고, 고래라고 했나?」

김 사장은 맹씨의 말에 신발을 벗어 던지고 웅덩이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맹
씨는 쉽게도 웅덩이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으나 김 사장이 걷기에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한 발을 디디면 한 발이 빠지고, 다시 한 발을 디디면 한 발이
빠지는 식으로 구슬땀을 흘리며 웅덩이로 갔다. 고래였다. 그놈은 영락없는 고
래였다. 송아지처럼 크고 맑은 눈을 가진 돌고래 새끼였다.

「오늘 어르신 횡재를 했구만이라우.」

맹씨는 노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냅다 휘갈겼다.

「퍽!」
「퍽!」

맹씨는 나이 육십이 넘었다지만 고기를 잡으며 한평생을 보낸 어부답게 아직 팔
뚝의 근육이 살아 있었다. 그런 그가 있는 힘을 다하여 돌고래의 잔등을 휘갈겨
도 놈은 도무지 허연 배를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만, 그만두게.」

김 사장은 맹씨의 매질을 중지시켰다. 왠지 놈이 영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
기 들어서였다.

「왜 그런다요. 요놈을 잡아서 팔믄 못 받아도 십만 원짜리 한 장은 너끈히 받을
수 있을 낀데.」
「아닐세. 내 고래 값을 쳐줄 테니 이놈은 못 본 걸로 해두게.」

김 사장은 맹씨의 옷깃을 잡아당겨 갯벌 밖으로 끌어냈다.

「지야 밑질 것이 없다지만 어르신네야 고래를 발견하시구도 생돈을 내게 생겼으니…….」

맹씨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갯벌 밖으로 나왔다.

「물이 언제쯤 차기 시작하나?」
「두시쯤에 물이 차기 시작해서 다섯시쯤이면 만조가 될 끼구만유. 헌데 왜 그러
십니까유?」
「그래, 그럼 그 동안 이 술이나 마시면서 저놈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세.」
「점점 알 수 없는 말씀만 하시는구먼유. 카, 생각해 봉께 그것도 옳으신 생각이
구만유. 우리처럼 잉어나 가물치 따위나 잡는 어부가 바다의 왕인 고래를 잡으
면 해신(海神)이 노할지도 모르니깬유.」

맹씨는 그 말을 남겨 놓고 횟감이 있다며 배가 있는 곳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
다. 그날 맹씨와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늘씬하게 얻어맞은 돌고래가 무사히 강물
속에 잠기는 것을 보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맹씨는 고인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강에서 고래를 잡은 사람은 이 세상 천지에 김 사장 한 명밖에 없는 셈이 되었다.


「하지만 말일세, 그 고래는 놓아 준 것이 아닐세.」

김 사장은 길게 말을 끝내고 천장을 응시했다.

「그렇다면요?」

박 대리는 동화를 듣는 듯한 기분에서 깨어나며 조용히 물었다.

「피멍이 들고 등이 째진 상태로 내 가슴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지. 내 말 알아듣
겠나?」
「누가 뭐래도 진실은 살아 있다는 뜻과 같은 맥락이겠군요.」

오수미가 조용히 물었다.

「역시 자네는 총명해, 빠르다고. 암, 이런 경우를 전광석화(電光石火)라고 말하
는가?」

김 사장은 오수미의 잔등을 토닥거리며 낄낄거렸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맹씨란 분만 계셨더라도 강에서 고래를 잡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증인이 있었을 텐데, 하지만 비록 그 분이 가셨더라도 강에서 고래를
잡았다는 사실은 사장님 가슴 속에 살아 있다는 뜻이로군요.」

박 대리는 지금까지 희미하게 품고 있던 김 사장의 천억설에 대한 의심이 깨끗이
씻겨 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니, 김 사장은 오수미가 말한 그 이상의 부를 축적
하고 있으면 있지 그 이하는 아닐 것이라는 자신감이 들 정도였다.

「바른 말일세. 자네가 내 심정을 꿰뚫어서 하는 말이지만, 난 자네가 문밖에 혼
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내쫓아 버리려고 생각했다네. 왜 그런지 잘 알겠지?」

김 사장이 표정을 바꾸고 엄숙하게 물었다.

「네. 미스 오의 말을 진실로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지점장님을 모시고 오지
않은 점에 용서를 빕니다.」

박 대리는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양손을 방바닥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보기와 다르게 척하면 삼천리군. 자네, 대리 사 년차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만…….」
「그럼, 내년에 과장 진급 케이스구먼.」
「네?」

박 대리는 한낱 이 괴짜 같은 영감이 은행 생리까지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다
시 한 번 놀랐다. 그러나 이내 그 의문은 쉽게 풀렸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말이 천억이지, 천억은 천문학적인 금액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것도 그 많은
금액을 은행에 예치하고 있을 정도라면 얼마나 많은 은행 간부들과 접촉했겠는
가를 상상할 수 있었다.

「자넨, 틀림없이 돌아오는 일월에는 과장으로 진급을 할걸세. 그럼, 이만 가보
게. 저녁에 손님이 오기로 해서 난 좀 쉬어야겠네.」

김 사장은 그 말을 하고 박 대리야 일어서건 말건 길게 누웠다.

「과장 승진을…….」

박 대리는 정신이 번쩍 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천억을 예치한 대가로
겨우 은행장 표창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자신의 좁은 시야가 부끄러워 얼굴
을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난 똑같은 말을 두 번 이상 하는 성미가 아닐세.」

김 사장이 누운 자세로 박 대리를 쳐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박 대리는 심심산천에서 십 년을 모셔 온 스승과 작별을 하고 하산하는 제자처
럼 비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도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오수미가 장롱에서 베개를 꺼내 김 사장의 머리에 받쳐 주며 말했다.

「그러지. 그런데 이 아줌마는 왜 안 오는 거지. 하긴 지금 와 봐야 별로 할 일
도 없겠지만.」
「그럼 아주머니가 올 때까지 기다릴까요?」
「아냐, 자네는 그만 가봐. 박 선생 혼자 가기도 심심할 텐데, 말동무나 해주는
것도 복 받을 일일 테니까.」

김 사장은 졸립다는 듯이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한 후 눈을 감았다.

「초면에 오랜 시간 동안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음에 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
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 대리는 돈을 예치하는 시기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김 사장에게
무언가 묻고 싶었지만,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오수미
와 서울까지 동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서울까지 가는 동안 김 사장의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오수미는 한복을 벗고 투피스 차림으로 차에 올라탔다. 박 대리는 차가 느티나
무가 있는 풍경을 벗어날 때까지 한마디 말도 안 했다.

「차 안이 덥지 않나요?」

비포장 도로가 끝나고 포장 도로로 진입했을 때 오수미가 정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먼지 때문에 창문을 열지 않았어.」

박 대리는 에어컨을 켜는 대신 양쪽 창문을 절반 열었다. 오수미의 검고 윤나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들은 다시 말을 잃었다. 박 대리는 카 스테레오
의 버튼을 눌렀다. 비발디의 <사계>가 흘러나왔다. 오수미는 음악을 감상하려는
듯 눈을 감고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박 대리는 왠지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김 사장 집에서 본 오수미의 이미지가
그전의 그녀 이미지와 전혀 딴판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은
말의 실마리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꽉차 있었다.

김 사장하고는 어떤 관계인가? 다음에 김 사장은 언제 만나야 할 것인가? 왜 오
늘 돈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는가? 내년 일월에 틀림없이 과장
으로 진급된다는 말의 뜻은 천억을 예치시킨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은가?

도대체 어느 말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차가 일산 외곽 도
로를 지나 통일로로 접어들었다. 한낮인데도 노인들로 구성된 사이클 팀이 빠른
속도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 뒤로 빨간 스포츠 카가 재즈 음악을 요란하게 흘
리며 뒤따르다가 곡예를 하듯 차선을 바꿔 사이클 무리의 앞으로 끼여드는 게
보였다.

박 대리는 백미러를 통해 슬쩍 오수미를 쳐다보았다.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도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았다. 한복을 입었을 때와는 또다른 신선한 매력이 풀풀 풍기고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누르고 있는 손가락은 희고 길었다. 힘주어 잡으면
바스라질 것 같은 손목에는 나무 조각과 검은 실로 이어진 인디언 풍의 팔찌를
차고 있었다. 그것이 하얀 살결과 대비를 이뤄 한껏 야성적이면서도 은근한 멋을
풍기고 있었다.

도대체 이 여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박 대리는 한때 알몸으로 혀를 교환하며 침
대에서 뒹굴었던 오수미를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자고 있는 숙녀를 훔쳐 보면 실례라고 했죠.」

오수미가 살며시 눈을 뜨고 백미러를 쳐다보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자고 있진 않았잖아. 어때, 어디 가서 저녁이라도 먹을까?」
「저녁을 먹고 나서는요?」
「음, 저녁을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시는 거지.」
「그 뒤에는요.」
「그 뒤, 글쎄 그 뒤라…….」

박 대리는 오수미가 듣고자 하는 말뜻을 알면서도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호
텔 킬리만자로에서 보고 나서 지금 야외로 드라이브를 나온 입장이라면 대답을
못 할 리가 없었다. 대답을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짧은 미니 스커트 밑으로
곧게 뻗은 허벅지를 지겹도록 쓰다듬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김 사장
집에 다녀온 지금은 그렇지가 못했다. 김 사장의 돈을 끌어 오느냐 못 하느냐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녀, 오수미였기 때문이다.

「우리 장흥으로 가요, 괜찮죠?」

박 대리가 대답을 못 하고 어물거리자 오수미가 잘라 말했다.

「장흥?」

박 대리는 오후에 일단 은행에 들어가야 할 처지였다. 김 사장의 예금 건이 확
실한 정보가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인 볼일이 있다고 황 차장에게 말해 두고 왔기
때문이다.

「왜요, 곤란한가요?」

오수미는 핸드백을 열었다. 금박을 입힌 담뱃갑을 꺼내 열었 다. 노랑 필터의
켄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중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를 꺼냈
다. 던힐이었다. 불을 붙이는 모습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곤란할 것도 없지.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퍽 신중한 분이시군요. 전 벌말에서 출발하자마자 궁
금했던 것들을 질문할 줄 알았어요.」

오수미는 빨간 립스틱이 매혹적으로 칠해진 입술로 하얀 연기를 곧게 내뿜었다.

「미스 오가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아서.」

박 대리는 생각나는 대로 말해 버렸다. 오수미의 말이 사실이긴 하나 바르게 말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무튼 박 대리님은 제 마음에 꼭 들어요. 요기까지 후후.」

미스 오가 갑자기 박 대리의 남성을 툭 쳤다.

「이런!」

박 대리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짐짓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오수미
와 벌어졌던 간격이 갑자기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전 박 대리님 편이에요. 박 대리님이 묻지 않아도 때가 되면 다 말해 줄 참이
었어요.」
「뭘 보고 날 믿는다는 거지? 김 사장하고는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던데.」
「후후, 김 사장님은 나이가 칠십이 넘었어요. 그리고 전 이제 겨우 스물셋이라
고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

오수미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으며 카 스테레오를 꺼버렸다.

「그럼, 만난 지 겨우 세 번밖에 안 되는 나를 믿는 이유가 뭐지?」

박 대리는 그것이 궁금했다. 김 사장하고야 성(性)적으로 관련이 없다 하지만,
하는 말투나 행동을 보면 보통 가까운 사이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음, 전 헤픈 여자가 아니거든요. 바꿔 말하면 그런 생활을 하긴 하지만, 전
한 번도 그 직업이 추하다거나 부끄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알 것도 같긴 한데 해답이 희미한걸.」

박 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흥 쪽으로 핸들을 틀었다.

「한 가지 다짐을 해둘 것이 있어요.」

오수미가 담배를 비벼 끄며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뭔데?」
「김 사장님의 돈이 한성은행 명동 지점으로 옮겨질 확률이 커요. 그 대신 앞으
로 진척되는 상황에서 성급하게 앞일을 아시려고 하지 말아요. 그분은 그것을 제
일 싫어해요. 그리고 저와 김 사장님의 관계도 알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박 대
리님을 멀리할지 모르니까요. 한 가지 알려 드릴 것은 그분과 저와의 관계가 쉽
게 생각할 수 있는 그렇고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거예요. 됐죠?」
「음…….」

박 대리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왜 대답을 안 하시는 거죠?」
「약속하지.」

박 대리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기분이 안 좋다
는 것을 표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요. 앞으로 그분의 연락이 있을 때마다 전화를 드리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삐삐를 칠게요. 그러니 오늘 남은 시간은 일 이야기는 하지 말고 그냥 순
수하게 즐겨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이것만은 내가 알아야겠어.」

박 대리는 왜 오수미란 여자가 김 사장 같은 거물을 자기에게 소개를 해주었는지
궁금했다.

「왜, 그 많은 은행원들 중에 하필 박 대리님에게 김 사장님을 소개시켜 주었느
냐는 점이 궁금하신 거죠?」

오수미가 그 말을 준비해 두었다는 표정으로 쉽게 반문했다.

「바로 그 점이야. 그 점은 알아 두어야겠어.」

박 대리는 오수미가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듯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킬리만자로에서도 말했듯이 전 호스티스라고 해서 이 남자, 저 남자와 몸을
섞는 헤픈 여자가 아니에요. 물론 그렇다고 박 대리님이 첫 남자라는 말은 아니
고요. 하지만 많지 않은 남자 중에서 박 대리님에게 특별히 호감이 가는 건 사실
이에요. 그래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다른 뜻은 없어요.」

오수미는 말을 끝내고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크고 서늘한 눈 안에 박 대리의 옆
모습이 각인되고 있었다.

「그럼, 내가 운이 좋았던 게로군.」

박 대리는 오수미의 말이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으나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궁금한 것은 없죠?」
「좋아. 미스 오 말대로 하기로 하지. 앞으로 김 사장 건에 대해선 미스 오가
많이 도와줘, 알았지?」「물론이죠.」

오수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도 미스 오의 말을 명심하지.」

박 대리는 이 상황에서 결단을 빨리 하면 빨리 할수록 좋을 것 같았다. 경쾌하게
대답을 한 것과 동시에 오수미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어머!」

오수미가 깜짝 놀라며 박 대리의 손을 얼른 치웠다.

「왜, 순수하게 즐기자면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변할 수 있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속을 들여다보지
못해 벌레 씹은 얼굴로 운전하셨으면서…….」

오수미는 하얀 치아를 한껏 드러내며 박 대리의 허벅지 안쪽을 살며시 잡았다.
뒤로는 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낙엽송이 울창하게 서 있는 숲이고, 앞으로는
장흥 냇가가 보이는 모텔이었다. 모텔 아래층에는 카페를 겸하고 있어, 누구든
적당하게 요기를 하고 이층에 있는 모텔로 들어가서 성희를 즐기라고 만들어 놓
은 구조였다.

박 대리는 카페에서 은행에 전화를 했던 터라 홀가분했다. 내일 아침에 적당히
덧붙여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밖에서 보았던 것보다 안이 조용하고 깨끗하네요.」

모텔 안으로 들어온 오수미는 핸드백을 테이블 위에 놓고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
려다보았다.

「바깥 풍경보다 이쪽이 더 재미있을걸.」

박 대리는 오수미의 등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손으로 고무공 같은 젖가슴의
탄력이 짜릿하게 전해져 왔다.

「누가 봐요!」

오수미는 얼른 커튼을 내리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박 대리를 마주 껴안았다.

「우리 이렇게 사랑해도 되는 거야?」
「호호, 박 대리님은 저를 사랑하시나요?」
「그럴지도 모르지.」

오수미는 뜨겁게 박 대리의 입술을 덮쳤다. 박 대리는 손을 아래로 내려 그녀
의 스커트 속으로 집어 넣었다.

「좋아요. 저도 노력할게요.」

오수미가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하체를 깊게 밀착시켜 왔다.

「그래, 내일 태양이 뜨지 않는다 해도 오늘이 중요하지.」

박 대리는 온몸이 짜릿해져 오면서도 마음 한쪽으로는 알 수 없는 의문이 생기고
있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전……. 전 있죠, 긴장할 때 무척 흥분하는 버릇이 있어요.」

박 대리가 오수미의 팬티 속으로 손을 넣었다. 팬티까지 축축히 젖어 있는 꽃잎
을 보고 흠칫 놀랐을 때 그녀가 한 말이었다.

「나도 그래.」

박 대리는 오수미를 침대에 눕히면서 온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성욕이 일어났
다. 하지만 차 안에서 물었던 것처럼 왜 이 여자가 나에게 이처럼 헌신적이어야
하는지 그 답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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