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멋진날 9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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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
세상에는, 아니 적어도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는 화(和)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흔히들 조화, 혹은 화음이라 부르기도 하는 그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벨런스를 의미하기도 한다. 무수히 짜여진 인간관계 속에서 화(和)는 지켜야할 하나의 덕목이자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세상은 혼자사는 것이 아닌 다른사람과 화(和)를 맞춰가며 살아야 하는 공동체의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이 모두 규격화된 성격이나 특징을 갖고 태어나지는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걔중에는 화(和)를 깨는 튀는 사람들이 하나씩은 꼭 있게 마련인 것이다. 모두가 네모 반듯한 모양을 해야만 탑을 쌓을수 있기 때문에, 둥근 모양, 혹은 별모양으로 생긴 사람은 그 ‘탑’속에 끼지 못하고 도태된다. 사회라는 탑을 이루는 부품으로서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화(和)를 깨는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자연스레 격리되며, 은근한 압박을 받고 비난의 손가락질도 감수해야만 했다.
나는 철저하게 그 화(和)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법없이도 살만큼 정직하고 순결한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일정한 대형에서 이탈하여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부류는 아니었다.아니, 오히려 그런 부류들을 싫어한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억눌린 욕망은 밑으로 분출해야 한다고 믿었다. 자신이 별 모양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사회에서 원하는 네모 반듯한 규격을 지키려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나는 조화, 혹은 화음을 깨는 인간이었다. 그래서는 안되는 상대에게 사랑과 동경, 그리고 성욕을 느꼈다. 누나의 알몸을 보기위해 내가 아닌 다른사람으로 사칭하여 그녀와 접선했다. 결코 그것들은 네모 반듯한 모양의 인간상이 아니었다.
문제는 알면서도 그것들을 멈출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조화를 깨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쉬웠으며, 생각보다 훨씬 달콤하고 짜릿한 유혹이었다. 조화를 지키려는 내 안의 양심과 미묘한 줄다리기를 했지만, 결과는 늘 양심의 패배였다. 조화라는 큰 틀을 보기에는 그것은 너무 달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그 앞에서는 늘 다른사람이 모르면 괜찮겠지 하는 합리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화(和)를 깨고있는, 또다른 두 명의 사람을 몰래 뒤따르고 있었다.
보기에도 눈에 띄는 미인인 강한별과 걷는 삼촌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잠시나마 걱정을 한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째서 내가 그들의 뒤를 밟고 있는걸까? 알 수는 없었지만 내 가슴은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치일 것만 같은 번화한 거리에서, 나는 들키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낯익은 둘의 그림자를 밟았다.
삼촌의 손은 강한별의 가녀린 허리춤에 둘러져 있었다. 언뜻 봐도 나이차이가 많이 나 보이는, 그러니까 누가봐도 불건전한 만남이라는 느낌이 들어왔다.강한별이 결혼과 가족의 수업을 땡땡이 치면서 만나는 것은 사촌오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는 빠르게 그것을 수정해야만 했다.
기회가 닿을때마다 측면쪽으로 돌아 들어가며, 쇼윈도에 비춘 둘의 얼굴을 간간히 확인하던 내 눈속에 강한별의 무표정한 얼굴이 들어왔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차가워 보이는 그녀의 표정. 마치 일을 하는 동안에는 딱딱한 회사원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신 헤벌쭉 웃는 삼촌의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너무나 딱딱한 표정으로 삼촌의 말에 간간히 고개를 끄덕여 답을 해줄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흠..하는 신음성을 흘렸다. 그제서야 강한별의 옷들이 일반 대학생들이 걸치기엔 지나치게 고가의 물건들 뿐이었던 이유가 조금씩 파악되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에 했던 생각대로 그녀의 사촌오빠가 자금이 넉넉한 사람일수도 있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강한별과 삼촌의 관계는 흔히들 말하는 조건만남의 모습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번화가를 누비는 그들의 모습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강한별이 쇼윈도를 보며 관심을 갖을 때마다, 연신 품안을 뒤적여 지갑을 꺼내며 사줄까?라고 묻는 듯 손가락으로 가게 안을 가리키는 삼촌의 뒷모습에서, 급식회사에서 된장찌개에 들어갈 야채를 다듬는 숙모의 모습이 겹쳐져 보이기 시작했다.그래. 틀림없었다. 숙모의 월급을 빼앗아 강한별에게 줄 정도로 숙모가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아닐것이다. 분명 삼촌은 출처 모를 돈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숙모에게 숨긴채로 그녀가 일을 할 동안 젊은 아이와 조건만남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완벽한 악인의 모습이었다. 흡사 물건밑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선한 인물들에게 기생하여 물을 더럽히는 전형적인 악인의 모습.그 악인은 조화를 부수며 자신의 사욕을 챙기고 있었다.자신의 옆에 걷는 소녀가, 20대 답지 않은 알수 없는 속을 갖고 있는 여우라는 것도 모른채 말이다. 아니, 오히려 여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빠져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삼촌은 예전부터 우리집안의 사고뭉치였고, 그가 치는 사고의 60퍼센트 이상이 여자문제였으니 말이다.
그들은 근사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식사를 했다.나는 그들이 나올때까지 길거리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둘이 들어간 건물만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이나 기다린 끝에 삼촌은 강한별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 안고는 밖으로 나왔고, 이번엔 근처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운 좋게도 바깥에서 훤히 보이는 2층의 창가쪽에 서로 마주보고 앉은 그들은, 내 쪽에서는 전혀 알수 있을리가 없는 대화를 열심히 나누기 시작했다. 주로 이야기 하는것은 삼촌이었고, 강한별은 가끔 고개만 까딱 거리며 커피를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가는 것도 모른채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이 크게 흡떠진 것은, 삼촌이 품안을 뒤적여 강한별에게 하얀 봉투를 내밀던 바로 그때였다.
“참..재밌네.”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미친놈마냥 피식피식 웃음까지 나왔다.불과 며칠전에 내가 강한별의 집에서 맡았던, 안나수이 어쩌고 하는 그 향수가 숙모가 맡았던 그 ‘젊은 여자의 향수 냄새’와 동일한 것이었던 거다. 그리고 돈이 들어 있는 봉투를 꺼내 차분하게 세어본 강한별은. 역시나 비싸보이는 핸드백 속으로 삼촌이 준 그 봉투를 아무렇게나 집어 넣어 버렸다.
그랬다.조화를 깨고 있는 내 앞에, 조화를 깨는 또다른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우습게도 그 중에 한명은 내가 동경하고 좋아하는 어느 천사의 남편이었고, 또 한 사람은 그 천사를 울리게 하는 간접적인 요인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셋은, 유동적이지는 않지만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끝까지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마음속에 무엇이 떠오르는건지 나는 알수 없었다.복잡하고 미묘했다. 삼촌에 대한 미움도 아니었고, 강한별이라는 아이에 대한 실망도 아니었다. 묘한 안도감?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둘이서 조건만남을 하고 있는 그 상황에 분노를 느끼면서도,왠지 모르게 저 관계가 은근히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야 말했다. 맞다. 나는 저들과 마찬가지로 화(和)를 깨는 존재였다.
커피숍에 들어간 그들은, 커피 한잔을 먹을 정도의 시간보다 훨씬 빨리 밖으로 나왔다.그 다음 행선지가 어딘지 나역시 뻔히 알수 있었지만, 확인 사살을 하려는 마음에 그들을 몰래,그리고 조용히 뒤따랐다.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어 몸매를 훤히 가늠하게 만드는 강한별의 뒷모습보다는, 이상하게도 삼촌의 뒷모습에 내 온 시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한 내 시선을 알리 없는 두 사람은 천천히 번화가 뒤쪽의 구석진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술집이 있는 번화가면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는 모텔들의 군락. 그리고 그들은 망설임 없이 한 건물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
그리고 나는 그렇게 되뇌이고 있었다. 맞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몇 년전 고등학교 시절에 우리집에 인사를 하러 온 삼촌 내외를 보면서,아니, 정확히는 숙모를 보면서 설레임을 느끼고 삼촌을 질투했을 그 때부터 나는 조화를 깨는 인간이었다. 덧붙여서 예전부터 여자문제로 우리집안의 골머리나 다름없던 삼촌이, 섹스리스 부부가 되어 이제 겨우 스무살이 된 여자애와 조건만남을 하는 것 역시 변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었다.
결국 아무리 삼촌을 욕해도, 조화를 깨고 있는 나는 삼촌과 다를바 없는 인간인 것이다.
그 날도 여느날과 다를바가 없었다.
다를바가 없는 목요일이지만, 요 근래에 내게 주는 목요일의 의미는 특별했다. 인재가 집에서 자리를 비우는 시간,누나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시간, 그리고 내가 누나와 화상채팅을 하는 그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누나는 점점 대담해지고 있었지만, 좀처럼 그 이상의 진전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내가 샤워를 하러 들어가면 옷을 갈아입었고, 내가 훔쳐보는 문틈의 넓이는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 언제 둘이 눈이 마주쳐도 이상한 점이 전혀 없을 것만 같은 시간이었지만, 절대 누나는 속옷을 벗지 않았다. 내가 아침에 샤워를 하는 날은 이틀에 한번에서 하루에 한번으로 수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상 예림이의 속옷만 감상하며 침을 삼키고 있었다.
한마디로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부끄러워 했던 누나의 볼에서 조금씩 홍조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여유로움까지 느껴지고 있었다.그녀가 과외를 하는 탓에 집에서 나누는 대화의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으로 나와 누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좁혀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성이라는 연악한 나무가지를 움켜쥐고 벼랑끝에 매달린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 연약한 나무가지가 끊어지는 그 순간 나는 다시 돌이킬수 없는 낭떠러지로 한없이 추락하는 것이다. 중력의 무게보다 무거운 본성이 점점 더 그 나무가지를 휘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 이성이 끊어지거나, 혹은 본성의 무게가 더해지거나 하는 날에는 모든것이 끝장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나는 스스로 나무가지를 움켜잡은 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내고 있었다. 우습게도 말이다.
접속을 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하고 빠르게 이루어졌다. 인재의 방에 들어가 컴퓨터를 켜고, 즐겨찾기 목록에 있는 화상채팅사이트로 접속을 하고, 또 한 번 듣고 외워버린 그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들어가는 그 모든 과정은 한마디로 말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맞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 있는 것이었다.
언제까지 누나와 화상채팅을 지속할수는 없었다.누나도 바빠질 것이며, 나 역시 목요일마다 늘 시간을 내는것이 힘들어 질수도 있었다. 덧붙여서, 거의 무한대라 느껴졌던 인재의 포인트도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내가 없을때에는, 인재가 죽순이들을 벗기며 ‘쇼’를 보는것에 대부분의 포인트를 할애할 것이기 때문이었다.즉, 더욱더 빨리 진도를 나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몹시 몸이 달아 있었다.
밤비: 오랜만이에요.
Fetish king : 잘 지냈나요?
이제는 거의 작은 창으로 보이는 예림이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게 되었다.내가 알몸을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어느정도 선 모양인지, 예림이 역시 편안한 복장으로 있을 뿐이었다. 작은 창으로 보이는 예림이의 모습은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실제 진도가 나가야 하는 것은 밤비와Fetish king 의 진도가 아닌, 김예영과 김예림의 진도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Fetish king :말해줘요. 그동안 어땠는지..우리의 내기에 대해서.
그녀는 내 물음에 한참이나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작은 화면으로 중간중간 멈칫 하며 머뭇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 기다리는 그 시간이 한없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나도 담배를 배울껄 그랬나? 적어도 담배를 피우면 이게 그렇게 길게 느껴지진 않을 텐데 말이다.
밤비: 동생에게 속옷차림을 보여줬어요.
Fetish king : 어떻던가요?
밤비: 창피했어요.동생은 혼자서 뭘 하는 것 같았고, 저를 빤히 보고 있었어요.
아직 자위라는 단어를 쓰기엔 많이 쑥쓰러운 모양이었지만 상관없었다.뭘 하고 있었는지는 당사자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동생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었다.
Fetish king : 기분이 어떻던가요?
밤비: 이상하게 짜릿했어요.동생이 제 몸을 보고 그걸 한다는게...너무 놀랐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았어요.
Fetish king: 반대로 동생이 자위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나요?
조금은 서두른 것일까? 한동안 밤비의 대답은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물을 마시고, 조금씩 저려오는 손가락을 다른 한쪽 손으로 비비고 있을 그 즈음, 밤비의 대답이 입력되었다.
밤비: 보고싶어요.
Fetish king: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밤비: 힘들것 같아요. 그걸 하는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 쪽을 바라보나요?
Fetish king: 동생은 밤비님을 보고 있잖아요. 밤비님이라고 못할게 뭐가 있나요?
밤비: 그래도...생각만해도 창피한데요.
Fetish king: 보는건 밤비님인데 뭐가 창피해요. 하지만 밤비님도 동생이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려면 어느정도는 희생해야 해요.
밤비: 희생이요?
Fetish king: 란제리입은 것만 보여줬죠?
밤비: 네.
Fetish king: 이번엔 그 란제리도 벗어보세요.
작은 창 사이로 파르르 떨리는 예림이의 어깨를 보았을때는, 내 입술 역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조화를 지키는 쪽에 있었던 사람을, 나는 지금 천천히 조화를 깨는 사람의 부류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덧, 어느덧 응당 느껴져야 할 괴리감 조차 저 멀리 던져버리고 말이다.
밤비: 너무 창피해요. 그건 힘들어요.
Fetish king: 하지만..짜릿할거 같지 않아요? 동생은 아마 너무나 좋아할 거에요. 덧붙여서 밤비님도 동생의 몸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길거에요. 동생은 흥분해 있을 테니까. 밤비님이 보는 지도 모르고 자위를 할지도 몰라요.
밤비: 정말 동생이 그럴까요?
Fetish king: 물론이죠.밤비님도 은근히...즐기고 있는거잖아요.그쵸?
밤비: 조금은...
떠보는 것이 아닌, 어느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한 말이었다.그리고 예림이의 대답은 나를 흡족하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예림이도, 어느정도 그 게임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숨결이 가파지고, 얼굴에 떠오른 부끄러움의 홍조가 사라진 것이 그 증거였다.
Fetish king: 동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밤비: 어떻게..라뇨?
Fetish king: 동생이 아닌 남자로서 말이에요.
밤비: 잘..모르겠어요.
Fetish king: 만약 남이라면..같이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것 같나요?
마지막 이라고 생각해서 일까. 화상채팅에서의 나는 막나가고 있었다.어쩌면 일상에서 그러지 못하기에 익명이 보장되는 채팅상에서 그것을 분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밤비의 정체를 알지만, 밤비는 내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그 사실은 지독하게 매력적인 부분인 것이었다. 동생 김예영으로 포장된 포장지를 뜯고, 흉측한 내용물을 내보이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무대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것은 밤비라는 탈을 쓴 누나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밤비: 그럴것 같아요.
콩닥거리는 소리보다는 쿵쿵거리는 소리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내 가슴을 옥죌듯이 심장은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들었던 그 어떤 긍정의 표현보다 자극적인 한줄의 긍정이었다.
Fetish king: 그럼, 혹시 밤비님도 동생에게 보여주면서 흥분했던 건 아닌가요?
밤비: 사실은..조금은 그랬어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맞다.다시 만난 누나는 헤어질때의 중학생의 나이 그대로가 아닌것이었다.그녀는 성인이었고,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미국땅에서 첫경험을 했을 것이다.누나 역시 어린 나이지만 섹스라는 것에 대해 모르는 나이가 아닌 것이다.
Fetish king: 밤비님 첫경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밤비: 첫경험이요?
Fetish king: 네.
밤비: 열 아홉살...되던 때였어요.
Fetish king: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주세요. 자세히 듣고 싶어요.상대는 누구였으며, 어땠는지.
밤비: 같은 유학생 오빠였어요.
Fetish king: 사귀던 사이인가요?
밤비: 네.
Fetish king: 그래서요?계속 해봐요.
밤비: 그 오빠네 집에 놀러갔고, 단둘이 있게 되었는데 키스를 하기 시작했어요.
Fetish king: 그리고요?
그녀는 잠시 멈칫 하면서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내 질문에 천천히 말문을 열고 있는 듯했다. 중간중간 그때의 생각을 하는듯, 살짝 심호흡을 하는 모습이 작은 화면을 통해 보여졌다.
밤비: 가슴을 막 만지고..눕혔어요.
Fetish king: 가만히 있었나요?
밤비: 아뇨.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자꾸 옷을 벗기고..그리고 하게 되었어요.
괜시리 이유모를 질투심이 밀려 들어왔다. 머리속에서 누나의 옷을 벗겨내는 한 사내의 모습이 재생되었다. 물론 그 사내의 외모는 내가 알수 없어서 모자이크처럼 뿌연 형상으로 내 상상속에서 등장했고, 역시나 내 상상속에서 란제리를 벗고 그의 손길에 부르르 떠는 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Fetish king: 흥분했나요? 첫경험할때에.
밤비: 아뇨. 그냥 아팠어요.
Fetish king: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좋았죠?
밤비: 그런것 같아요.
대화의 수위는 점점 더 올라가고 있었다. 내가 평생을 살면서 누나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누나도, 나도 가족이라는 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보여줄 기회가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대답은 노(No)였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화상채팅을 하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일지도 몰랐다.
Fetish king: 그럼 상상을 해봐요. 동생이 만약 남이라면, 밤비님과 함께 잤을수도 있지 않을까요? 동생의 몸을 애무해 줄수도 있었을 거에요.
밤비: 네...
그녀가 타자를 치는 속도는 눈에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무엇때문일까. 많은 생각이 들어왔지만 어떤 가정을 내려도 그것은 흥분으로 다가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짜릿한 가설은 ‘누나역시 나와의 섹스를 꿈꾸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럴리는 없겠지만,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세포들이 거꾸로 역류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Fetish king: 동생도 아마 밤비님을 보며 그렇게 생각할 거에요. 저번에 그랬잖아요.같이 쭉 자란 동생이 아니라고. 동생은 밤비님을 보며 늘 그런 야한 생각들을 할지도 몰라요.
밤비: 그럼 속옷을 벗은 다음..그 다음은 뭔가요?
Fetish king: 무슨뜻이에요?
밤비: 님이 제안하는 것이 점점 수위가 올라가고 있잖아요. 나도 호기심이 들고, 두근거리는건 인정하지만 조금 무서워요. 혹여나 알몸을 보여주는 것 다음에 무언가가 있을까봐서요.
이번에는 내가 선뜻 타자를 치지 못했다.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의 존재가 이해가 갔기 때문이었다. 맞다. 예림이 역시 나처럼 연약한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짜릿하고 긴장되는 이유는 ‘그 다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모래로 조그마한 산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 젓가락을 꽂아 조금씩 모래를 덜어가는 그 게임처럼, 그 다음에 펼쳐질 두려움을 즐기며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나도, 예림이도 마찬가지였다.
Fetish king: 밤비님도, 저도 이제는 자주 못올지 몰라요. 말했다시피 이건 친구의 아이디고, 제가 쓸수 있는것도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밤비: 저도에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동생은 대학생이라 귀가시간이 일정하지 않아서 늘 불안해요.
Fetish king: 맞아요. 목요일날 채팅을 하기로 했지만, 또 언제 같이 채팅을 하게 될지 모르니까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누나의 마음, 혹은 그녀의 속에 내재된 성적인 부분들을 확인하면 할수록, 화상채팅이 갖는 의미의 가치는 조금씩 하락하는 것이었다.나도 모르게 조금만더..조금만 더..를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모래위에 꽂혀있는, 그 나무젓가락이 넘어질때까지 말이다.
Fetish king: 그래요.그러니까 미리 알몸의 다음 단계를 말할께요. 이건 철저히 내 생각이니 따르지 않아도 되요.내 말을 무시해도 나는 할 말이 없어요.이건 밤비님의 일이니까요.
밤비: 네. 말씀하세요.
Fetish king: 침대옆에 있는 커텐을 중심으로 동생하고 자는 것 맞지요?
밤비: 네.동생은 바닥에서 자요.
조금씩 더 저려오는 손을 몇번이나 쥐었다 폈다 하며 꼼지락 거렸다.흥분한 놈마냥 오타를 내기는 싫었다. 비록, 내 몸은 흥분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Fetish king: 그 커튼을 사이에 두고, 자위를 하는 거에요.밤비님도.
도망치듯 인재의 집을 빠져나왔다.
이유란 간단했다. 곧 있으면 인재가 돌아올 시간이라는 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두번째는 밤비와의 채팅이 너무나 길게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늘 아련한 흥분에 취해서 예림이와 채팅을 하게 되면 시간은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가 있었다.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비단 시간의 흐름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닌 듯해 보였다.어두운 하늘 위로도 먹구름의 존재는 확연하게 느껴졌다.암청색 물감위에 흩뿌려진 검은색 물감과도 같은 느낌이었다.아니나 다를까 금세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일기예보를 체크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나는 우산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급히 앞에 있는 건물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최악이다.’
젖은 옷을 털어내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예림이와 화상채팅을 하고나면 나는 극도의 흥분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재의 집을 나오면서 부풀어 오른 아랫도리는 가라앉아 있을지는 몰라도, 내면에 가득한 욕망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날씨는 점차 우중충하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비, 그리고 밤은 사람을 설레게 한다. 빗물에 흥분이 씻겨 나가는 것이 아닌, 기름위에 붙은 불위로 물을 붓는 것처럼 더욱더 타오르게 했다. 모든 이들의 욕망이 가장 고조되는 어두운 저녁때, 거기에 비까지 내리니 내 가슴은 미친듯이 뛰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휴대폰을 열어 강한별의 이름을 검색하고 있었다.
‘아니야.’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이건 아니었다. 너무나 비겁하게 느껴지는 듯한 일이었다. 강한별이 잔뜩 성욕에 취한 나를 내치진 않을 것이다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망설여졌다. 그래, 어쩌면..어쩌면 지금도 삼촌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둘이 모텔에 갔던 그 시간도 이 시간대와 비슷했으니까. 어쩌면 오늘도 둘은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웅...우웅...
휴대폰을 들고 망설이던 나는 내 손에 느껴지는 진동에 깜짝 놀라 그것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짧은 진동끝에 더이상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전화는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서둘러 휴대폰을 들어 눈높이에 맞춘 후, 발신자 정보를 확인했다.
-선배 어디에요? 결혼과 가족 과제 하려고 하는데..지금 학교 후문에 있는 피씨방으로 오실수 있어요?2층에 있는 피씨방요.-
오유민..?
순간 오유민의 모습마저도 상상속에서 야하게 그려져 버린 덕택에, 나는 두어번 고개를 저어 그것들을 떨쳐내야만 했다.맞아. 그런 과목이 있었고, 나는 오유민과 같이 그 수업을 듣고 있었지. 그리고 오유민과 가상 커플로 짝이 되었고..과제가 뭐였더라. 상당히 귀찮은 것이었는데.
갑작스레 비가 쏟아져 내리는 밖을 바라보며, 나는 건물안에서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비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비를 맞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는 몇번의 서성임 끝에 그 과제가 ‘청첩장 만들기’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고, 곧이어 답장으로 그쪽으로 가겠다는 말을 해주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제를 하다보면 조금은 차분해 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귀여운 후배였던 오유민마저 상상속에서 옷을 벗길 정도의 상태라면, 지금 내 감정선은 상당히 위험수위에 치달아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억누를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설령 그 무언가가 내게 있어서 상당히 귀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크게 심호흡을 한 나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후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비가와서 내 눈앞으로 보여지는 저녁의 영상들은 더욱더 몽롱해지고 있었지만, 피씨방에 가게되면 깔끔하게 해결될 일이라 믿으며 한발 한발 내딛어 달렸다. 적어도 강한별을 찾아가는 그런 골때리는 짓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최선책이었다.
비가 오니 술을 마셔야 한다는, 뻔한 핑계거리를 만들어 삼삼오오 술집앞에 모여있는 무리들을 지나 피씨방이 있는 건물안으로 달려들었다. 짧은 거리를 왔음에도 내 옷은 흠뻑 젖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손으로 툭툭 털어내고 나서야 피씨방 안으로 들어갔다.
자욱한 담배연기, 그리고 별다른 술자리를 잡지 못한 대학생들이 게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대다수 남자들끼리 우르르 몰려 다니며, 게임을 통해 시간을 때우려는 인원들 뿐이었다. 그 중에서 과제를 하려고 온 귀여운 여학생을 찾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선배!여기요!”
빨간 털모자가 살짝 고개를 내민다. 그 밑으로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서 미소가 가득 걸려 있는 것을 보고는, 나는 천천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유민이 있는 자리까지 간 나는 우뚝 하고 멈춰서 버렸다.
“아..두 자리 연속으로 나있는게 이 자리뿐이어서..”
컴퓨터는 두 대. 의자는 하나였다. 긴 쇼파처럼 되어 있는 의자는 둘이 앉을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중간에 팔걸이나 칸막이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니 ‘커플 전용석’이라는 팻말이 대롱대롱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오유민이 앉은 자리 옆으로 캠퍼스 커플로 보이는 몇몇들이 꼭 붙어 앉아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아 뭐...할 수 없지.”
그녀의 말대로 피씨방의 자리들은 꽉 차 있었다.둘이 머리를 맞대고 해야 하는 과제이니 떨어져 앉으면 의미가 없으니, 커플석이라도 붙은 자리는 앉아야만 했다. 생각해보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내외할 필요도 없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그녀가 앉아있는 쇼파의 반대쪽을 슬쩍 잡아당겼다.
오유민은 왼쪽 끝편으로 바싹 붙어 앉으며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마치 내 마음속에 있는 부담을 줄여주겠다라는 무언의 메세지와도 비슷해 보였다. 긴팔 티셔츠밑으로 보이는 치마. 그리고 그녀의 무릎위로는 가방이 하나 올려져 있었다. 의자밑으로 뻗은 하얀다리에 시선이 갔지만, 그렇게 되면 애써 억누른 감정이 살아나는 불상사로 이어지기에 나는 얼른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디에 있었어요?”
“아..잠깐 인재네 집에서 쉬고 있었어.”
인재의 말이 나오자 오유민의 표정은 무표정해졌지만, 이내 살짝 웃고는 자신의 모니터를 가리켰다. 모니터 안에는 청첩장안에 쓰이는 글귀들만 모아놓은 인터넷 웹페이지가 띄워져 있었다.
“나름대로 찾아 봤는데..이정도만 쓰면 되지 않을까요?”
그녀가 작성해둔 초안을 보기위해 몸을 살짝 오유민쪽으로 기울이게 되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강한별에게서 나는 특유의 여자향수 냄새가 아닌, 달콤한 과일향기가 내 코를 살며시 간지럽혔다.
청첩장의 문구는 생각보다 다양했다. 시의 한구절을 적어 신랑과 신부의 사랑을 대입하는, 다소 닭살스런 문구들이 있는가 하면, 아름다운 두 사람의 사랑을 축하해 주십시오 라는 상투적인 문장들도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런 문구들 보다는 한구석에 자리잡은, 신랑 김예영 신부 오유민 이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우리 둘 사이에 어색한 공기를 뿌려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괜찮은데..”
“여기에 그냥 희미한 이미지좀 넣고, 아무 예식장이나 하나 정해서 약도를 넣으면 될 거 같은데요?”
“아..응.”
약간은 성의 없는 내 모습과는 달리, 오유민은 뭐가 재밌는지 연신 열심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컴퓨터를 켜긴 했지만 나는 별달리 할것이 없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문구들은 오유민이 찾아 놓았고, 어떤 식으로 할 것이라는 레이아웃도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냥 예의상 자리를 채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니터를 보는 척하며 오유민의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을 얼굴에 물들인 그녀의 눈망울은 너무나 진지해 보였다. 신입생들 특유의 의욕만만한 모습과는 비슷하지만 사뭇 다른 진지함이었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은은한 화장위로 큰 눈망울 두개가 모니터를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작지만 날렵한 코 밑으로 앙증맞은 입술이 반짝 거렸다. 좁은 커플석의 특성상 내 젖어있는 어깨에 닿은 그녀의 오른팔의 체온이 유달리 따뜻하게 느껴졌다.
“결혼날짜는 몇일로 할까요?”
“음?그냥 뭐..아무때나 괜찮지 않을까”
계속해서 성의없는 대답만 나오는 것은 정말 어쩔수 없었다. 청첩장 한구석에 쓰여진 신랑 김예영, 신부 오유민 이라는 글자가 계속해서 나를 어색하게 만들고 있는 듯했다. 그저 과제일 뿐이고, 가상일 뿐인데도 공기는 점점 어색해 지는 것만 같았다. 오유민의 모니터를 보려면 그녀와 조금 더 붙어야만 했고, 붙어 앉게 되면 여지없이 강한별과는 조금 다른 그 풋풋한 향기가 나를 어지럽게 했다.
“이런거 꼭 해보고 싶었어요.”
오유민은 나와 반대로 즐거워 보였다.모니터에서 나오는 열기 탓인지 약간은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내가 도움이 별로 되주지 못한거 같은데.”
“아니에요.어차피 저 혼자 만들순 없고, 선배랑 의견을 나눠야죠. 맘에 드는 문구가 어떤거에요?”
“이..시처럼 쓰여있는건 조금 민망하고..적당하게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도가 괜찮은거 같은데.”
“에이..가상이지만 무슨 남편이 그렇게 성의 없어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는 나를 보며 오유민은 쿡쿡 거리며 웃었다. 강한별과 마찬가지로 속을 알수 없는 아이였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와 풍기는 매력이 조금은 다르다는 점이었다. 음..인재가 이 아이에게 끌렸던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것만 같았다.
“어머..”
“왜?”
“날씨가..번개가 치네요.”
“응?”
오유민의 말에 깜짝 놀란 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응시했다. 순식간에 창문쪽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보이더니, 이윽고 빛보다 조금느린 천둥소리가 하늘을 찢을듯 울려 퍼졌다.
쿠르르르릉
“날씨가...왜 갑자기 이러지?”
“선배 우산 갖고 왔어요?”
“아니.”
“갈 때 제꺼 쓰고 가세요.저는 바로 옆이니까.”
“아냐 괜찮아.”
콰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피씨방 안에 있는 대다수의 인원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 정도의 굉음이 울려퍼졌다. 유민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이 전화기를 꺼내었다.
“괜찮으려나. 한별이 우산 없이 나갔는데.”
“어디로?”
“글쎄요. 저도 잘 모르죠. 한별이 일은 되게 궁금해 하시네요?”
“아..뭐 별로 그런게 아닌데.”
또 삼촌을 만나러 간건가?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이지만, 오유민은 장난스런 표정과 섭섭한 표정이 반반씩 섞인 얼굴을 하고 내게 물어왔다.그리고 잠시 어색해진 우리의 사이에 또한번의 섬광이 번뜩였다.
쿠르르릉!
“에휴.진짜 날씨가 미쳤나보네요.”
오유민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날씨에 강한별이 삼촌을 만나러 나간거라면, 삼촌 역시 대단한 사람인거다. 천둥번개가 쳐도 조건만남은 하겠다는 건가? 하하하하. 정말 우습다.
우우웅..우우웅..
모든 것을 신경끄고, 오유민과 붙어 앉아 맘에 없는 청첩장 만들기를 계속할때쯔음에 또다시 진동음이 들렸다.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한 그녀는 살짝 손가락으로 내쪽을 가리켜 보였다.그제서야 나는 그것이 내 휴대폰의 진동임을 알아채고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숙모-
나도 모르게 헛숨을 집어 삼켰다. 맞다. 잊고 있었다. 숙모는 천둥 번개를 무서워했다. 비오는날 밤을 싫어했으며, 천둥번개를 동반한 날은 더더욱 꺼려했다. 나도 모르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전화 안받으세요?”
누구에게 온것인지 궁금한듯, 오유민은 연신 전화기를 붙잡고 생각에 잠긴 나를 보며 물었다. 또 한번의 섬광, 또 한번의 굉음이 울려 퍼졌고, 나는 마른침을 꿀꺽 하고 삼켜 넘겼다.
“나..가봐야 할것 같아.미안해.”
“네?”
“중요한 전화가 왔어. 가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
진동소리, 천둥소리가 교차해서 울렸고, 오유민은 그런 나를 그 큰 눈으로 빤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휴대폰 액정에 뜬 숙모라는 이름에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맞다. 천둥번개가 치는 날 밤. 강한별이 어딘가를 갔다면 삼촌도 어딘가로 나갔을 것이다.숙모는 집에서 혼자 있을 것이고 두려워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두 개의 아웃카운트와 한 개의 공격권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는, 아니 적어도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는 화(和)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흔히들 조화, 혹은 화음이라 부르기도 하는 그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벨런스를 의미하기도 한다. 무수히 짜여진 인간관계 속에서 화(和)는 지켜야할 하나의 덕목이자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세상은 혼자사는 것이 아닌 다른사람과 화(和)를 맞춰가며 살아야 하는 공동체의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이 모두 규격화된 성격이나 특징을 갖고 태어나지는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걔중에는 화(和)를 깨는 튀는 사람들이 하나씩은 꼭 있게 마련인 것이다. 모두가 네모 반듯한 모양을 해야만 탑을 쌓을수 있기 때문에, 둥근 모양, 혹은 별모양으로 생긴 사람은 그 ‘탑’속에 끼지 못하고 도태된다. 사회라는 탑을 이루는 부품으로서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화(和)를 깨는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자연스레 격리되며, 은근한 압박을 받고 비난의 손가락질도 감수해야만 했다.
나는 철저하게 그 화(和)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법없이도 살만큼 정직하고 순결한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일정한 대형에서 이탈하여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부류는 아니었다.아니, 오히려 그런 부류들을 싫어한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억눌린 욕망은 밑으로 분출해야 한다고 믿었다. 자신이 별 모양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사회에서 원하는 네모 반듯한 규격을 지키려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나는 조화, 혹은 화음을 깨는 인간이었다. 그래서는 안되는 상대에게 사랑과 동경, 그리고 성욕을 느꼈다. 누나의 알몸을 보기위해 내가 아닌 다른사람으로 사칭하여 그녀와 접선했다. 결코 그것들은 네모 반듯한 모양의 인간상이 아니었다.
문제는 알면서도 그것들을 멈출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조화를 깨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쉬웠으며, 생각보다 훨씬 달콤하고 짜릿한 유혹이었다. 조화를 지키려는 내 안의 양심과 미묘한 줄다리기를 했지만, 결과는 늘 양심의 패배였다. 조화라는 큰 틀을 보기에는 그것은 너무 달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그 앞에서는 늘 다른사람이 모르면 괜찮겠지 하는 합리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화(和)를 깨고있는, 또다른 두 명의 사람을 몰래 뒤따르고 있었다.
보기에도 눈에 띄는 미인인 강한별과 걷는 삼촌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잠시나마 걱정을 한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째서 내가 그들의 뒤를 밟고 있는걸까? 알 수는 없었지만 내 가슴은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치일 것만 같은 번화한 거리에서, 나는 들키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낯익은 둘의 그림자를 밟았다.
삼촌의 손은 강한별의 가녀린 허리춤에 둘러져 있었다. 언뜻 봐도 나이차이가 많이 나 보이는, 그러니까 누가봐도 불건전한 만남이라는 느낌이 들어왔다.강한별이 결혼과 가족의 수업을 땡땡이 치면서 만나는 것은 사촌오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는 빠르게 그것을 수정해야만 했다.
기회가 닿을때마다 측면쪽으로 돌아 들어가며, 쇼윈도에 비춘 둘의 얼굴을 간간히 확인하던 내 눈속에 강한별의 무표정한 얼굴이 들어왔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차가워 보이는 그녀의 표정. 마치 일을 하는 동안에는 딱딱한 회사원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신 헤벌쭉 웃는 삼촌의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너무나 딱딱한 표정으로 삼촌의 말에 간간히 고개를 끄덕여 답을 해줄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흠..하는 신음성을 흘렸다. 그제서야 강한별의 옷들이 일반 대학생들이 걸치기엔 지나치게 고가의 물건들 뿐이었던 이유가 조금씩 파악되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에 했던 생각대로 그녀의 사촌오빠가 자금이 넉넉한 사람일수도 있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강한별과 삼촌의 관계는 흔히들 말하는 조건만남의 모습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번화가를 누비는 그들의 모습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강한별이 쇼윈도를 보며 관심을 갖을 때마다, 연신 품안을 뒤적여 지갑을 꺼내며 사줄까?라고 묻는 듯 손가락으로 가게 안을 가리키는 삼촌의 뒷모습에서, 급식회사에서 된장찌개에 들어갈 야채를 다듬는 숙모의 모습이 겹쳐져 보이기 시작했다.그래. 틀림없었다. 숙모의 월급을 빼앗아 강한별에게 줄 정도로 숙모가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아닐것이다. 분명 삼촌은 출처 모를 돈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숙모에게 숨긴채로 그녀가 일을 할 동안 젊은 아이와 조건만남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완벽한 악인의 모습이었다. 흡사 물건밑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선한 인물들에게 기생하여 물을 더럽히는 전형적인 악인의 모습.그 악인은 조화를 부수며 자신의 사욕을 챙기고 있었다.자신의 옆에 걷는 소녀가, 20대 답지 않은 알수 없는 속을 갖고 있는 여우라는 것도 모른채 말이다. 아니, 오히려 여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빠져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삼촌은 예전부터 우리집안의 사고뭉치였고, 그가 치는 사고의 60퍼센트 이상이 여자문제였으니 말이다.
그들은 근사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식사를 했다.나는 그들이 나올때까지 길거리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둘이 들어간 건물만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이나 기다린 끝에 삼촌은 강한별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 안고는 밖으로 나왔고, 이번엔 근처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운 좋게도 바깥에서 훤히 보이는 2층의 창가쪽에 서로 마주보고 앉은 그들은, 내 쪽에서는 전혀 알수 있을리가 없는 대화를 열심히 나누기 시작했다. 주로 이야기 하는것은 삼촌이었고, 강한별은 가끔 고개만 까딱 거리며 커피를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가는 것도 모른채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이 크게 흡떠진 것은, 삼촌이 품안을 뒤적여 강한별에게 하얀 봉투를 내밀던 바로 그때였다.
“참..재밌네.”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미친놈마냥 피식피식 웃음까지 나왔다.불과 며칠전에 내가 강한별의 집에서 맡았던, 안나수이 어쩌고 하는 그 향수가 숙모가 맡았던 그 ‘젊은 여자의 향수 냄새’와 동일한 것이었던 거다. 그리고 돈이 들어 있는 봉투를 꺼내 차분하게 세어본 강한별은. 역시나 비싸보이는 핸드백 속으로 삼촌이 준 그 봉투를 아무렇게나 집어 넣어 버렸다.
그랬다.조화를 깨고 있는 내 앞에, 조화를 깨는 또다른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우습게도 그 중에 한명은 내가 동경하고 좋아하는 어느 천사의 남편이었고, 또 한 사람은 그 천사를 울리게 하는 간접적인 요인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셋은, 유동적이지는 않지만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끝까지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마음속에 무엇이 떠오르는건지 나는 알수 없었다.복잡하고 미묘했다. 삼촌에 대한 미움도 아니었고, 강한별이라는 아이에 대한 실망도 아니었다. 묘한 안도감?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둘이서 조건만남을 하고 있는 그 상황에 분노를 느끼면서도,왠지 모르게 저 관계가 은근히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야 말했다. 맞다. 나는 저들과 마찬가지로 화(和)를 깨는 존재였다.
커피숍에 들어간 그들은, 커피 한잔을 먹을 정도의 시간보다 훨씬 빨리 밖으로 나왔다.그 다음 행선지가 어딘지 나역시 뻔히 알수 있었지만, 확인 사살을 하려는 마음에 그들을 몰래,그리고 조용히 뒤따랐다.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어 몸매를 훤히 가늠하게 만드는 강한별의 뒷모습보다는, 이상하게도 삼촌의 뒷모습에 내 온 시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한 내 시선을 알리 없는 두 사람은 천천히 번화가 뒤쪽의 구석진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술집이 있는 번화가면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는 모텔들의 군락. 그리고 그들은 망설임 없이 한 건물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
그리고 나는 그렇게 되뇌이고 있었다. 맞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몇 년전 고등학교 시절에 우리집에 인사를 하러 온 삼촌 내외를 보면서,아니, 정확히는 숙모를 보면서 설레임을 느끼고 삼촌을 질투했을 그 때부터 나는 조화를 깨는 인간이었다. 덧붙여서 예전부터 여자문제로 우리집안의 골머리나 다름없던 삼촌이, 섹스리스 부부가 되어 이제 겨우 스무살이 된 여자애와 조건만남을 하는 것 역시 변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었다.
결국 아무리 삼촌을 욕해도, 조화를 깨고 있는 나는 삼촌과 다를바 없는 인간인 것이다.
그 날도 여느날과 다를바가 없었다.
다를바가 없는 목요일이지만, 요 근래에 내게 주는 목요일의 의미는 특별했다. 인재가 집에서 자리를 비우는 시간,누나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시간, 그리고 내가 누나와 화상채팅을 하는 그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누나는 점점 대담해지고 있었지만, 좀처럼 그 이상의 진전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내가 샤워를 하러 들어가면 옷을 갈아입었고, 내가 훔쳐보는 문틈의 넓이는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 언제 둘이 눈이 마주쳐도 이상한 점이 전혀 없을 것만 같은 시간이었지만, 절대 누나는 속옷을 벗지 않았다. 내가 아침에 샤워를 하는 날은 이틀에 한번에서 하루에 한번으로 수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상 예림이의 속옷만 감상하며 침을 삼키고 있었다.
한마디로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부끄러워 했던 누나의 볼에서 조금씩 홍조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여유로움까지 느껴지고 있었다.그녀가 과외를 하는 탓에 집에서 나누는 대화의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으로 나와 누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좁혀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성이라는 연악한 나무가지를 움켜쥐고 벼랑끝에 매달린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 연약한 나무가지가 끊어지는 그 순간 나는 다시 돌이킬수 없는 낭떠러지로 한없이 추락하는 것이다. 중력의 무게보다 무거운 본성이 점점 더 그 나무가지를 휘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 이성이 끊어지거나, 혹은 본성의 무게가 더해지거나 하는 날에는 모든것이 끝장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나는 스스로 나무가지를 움켜잡은 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내고 있었다. 우습게도 말이다.
접속을 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하고 빠르게 이루어졌다. 인재의 방에 들어가 컴퓨터를 켜고, 즐겨찾기 목록에 있는 화상채팅사이트로 접속을 하고, 또 한 번 듣고 외워버린 그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들어가는 그 모든 과정은 한마디로 말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맞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 있는 것이었다.
언제까지 누나와 화상채팅을 지속할수는 없었다.누나도 바빠질 것이며, 나 역시 목요일마다 늘 시간을 내는것이 힘들어 질수도 있었다. 덧붙여서, 거의 무한대라 느껴졌던 인재의 포인트도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내가 없을때에는, 인재가 죽순이들을 벗기며 ‘쇼’를 보는것에 대부분의 포인트를 할애할 것이기 때문이었다.즉, 더욱더 빨리 진도를 나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몹시 몸이 달아 있었다.
밤비: 오랜만이에요.
Fetish king : 잘 지냈나요?
이제는 거의 작은 창으로 보이는 예림이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게 되었다.내가 알몸을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어느정도 선 모양인지, 예림이 역시 편안한 복장으로 있을 뿐이었다. 작은 창으로 보이는 예림이의 모습은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실제 진도가 나가야 하는 것은 밤비와Fetish king 의 진도가 아닌, 김예영과 김예림의 진도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Fetish king :말해줘요. 그동안 어땠는지..우리의 내기에 대해서.
그녀는 내 물음에 한참이나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작은 화면으로 중간중간 멈칫 하며 머뭇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 기다리는 그 시간이 한없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나도 담배를 배울껄 그랬나? 적어도 담배를 피우면 이게 그렇게 길게 느껴지진 않을 텐데 말이다.
밤비: 동생에게 속옷차림을 보여줬어요.
Fetish king : 어떻던가요?
밤비: 창피했어요.동생은 혼자서 뭘 하는 것 같았고, 저를 빤히 보고 있었어요.
아직 자위라는 단어를 쓰기엔 많이 쑥쓰러운 모양이었지만 상관없었다.뭘 하고 있었는지는 당사자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동생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었다.
Fetish king : 기분이 어떻던가요?
밤비: 이상하게 짜릿했어요.동생이 제 몸을 보고 그걸 한다는게...너무 놀랐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았어요.
Fetish king: 반대로 동생이 자위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나요?
조금은 서두른 것일까? 한동안 밤비의 대답은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물을 마시고, 조금씩 저려오는 손가락을 다른 한쪽 손으로 비비고 있을 그 즈음, 밤비의 대답이 입력되었다.
밤비: 보고싶어요.
Fetish king: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밤비: 힘들것 같아요. 그걸 하는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 쪽을 바라보나요?
Fetish king: 동생은 밤비님을 보고 있잖아요. 밤비님이라고 못할게 뭐가 있나요?
밤비: 그래도...생각만해도 창피한데요.
Fetish king: 보는건 밤비님인데 뭐가 창피해요. 하지만 밤비님도 동생이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려면 어느정도는 희생해야 해요.
밤비: 희생이요?
Fetish king: 란제리입은 것만 보여줬죠?
밤비: 네.
Fetish king: 이번엔 그 란제리도 벗어보세요.
작은 창 사이로 파르르 떨리는 예림이의 어깨를 보았을때는, 내 입술 역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조화를 지키는 쪽에 있었던 사람을, 나는 지금 천천히 조화를 깨는 사람의 부류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덧, 어느덧 응당 느껴져야 할 괴리감 조차 저 멀리 던져버리고 말이다.
밤비: 너무 창피해요. 그건 힘들어요.
Fetish king: 하지만..짜릿할거 같지 않아요? 동생은 아마 너무나 좋아할 거에요. 덧붙여서 밤비님도 동생의 몸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길거에요. 동생은 흥분해 있을 테니까. 밤비님이 보는 지도 모르고 자위를 할지도 몰라요.
밤비: 정말 동생이 그럴까요?
Fetish king: 물론이죠.밤비님도 은근히...즐기고 있는거잖아요.그쵸?
밤비: 조금은...
떠보는 것이 아닌, 어느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한 말이었다.그리고 예림이의 대답은 나를 흡족하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예림이도, 어느정도 그 게임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숨결이 가파지고, 얼굴에 떠오른 부끄러움의 홍조가 사라진 것이 그 증거였다.
Fetish king: 동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밤비: 어떻게..라뇨?
Fetish king: 동생이 아닌 남자로서 말이에요.
밤비: 잘..모르겠어요.
Fetish king: 만약 남이라면..같이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것 같나요?
마지막 이라고 생각해서 일까. 화상채팅에서의 나는 막나가고 있었다.어쩌면 일상에서 그러지 못하기에 익명이 보장되는 채팅상에서 그것을 분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밤비의 정체를 알지만, 밤비는 내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그 사실은 지독하게 매력적인 부분인 것이었다. 동생 김예영으로 포장된 포장지를 뜯고, 흉측한 내용물을 내보이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무대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것은 밤비라는 탈을 쓴 누나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밤비: 그럴것 같아요.
콩닥거리는 소리보다는 쿵쿵거리는 소리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내 가슴을 옥죌듯이 심장은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들었던 그 어떤 긍정의 표현보다 자극적인 한줄의 긍정이었다.
Fetish king: 그럼, 혹시 밤비님도 동생에게 보여주면서 흥분했던 건 아닌가요?
밤비: 사실은..조금은 그랬어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맞다.다시 만난 누나는 헤어질때의 중학생의 나이 그대로가 아닌것이었다.그녀는 성인이었고,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미국땅에서 첫경험을 했을 것이다.누나 역시 어린 나이지만 섹스라는 것에 대해 모르는 나이가 아닌 것이다.
Fetish king: 밤비님 첫경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밤비: 첫경험이요?
Fetish king: 네.
밤비: 열 아홉살...되던 때였어요.
Fetish king: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주세요. 자세히 듣고 싶어요.상대는 누구였으며, 어땠는지.
밤비: 같은 유학생 오빠였어요.
Fetish king: 사귀던 사이인가요?
밤비: 네.
Fetish king: 그래서요?계속 해봐요.
밤비: 그 오빠네 집에 놀러갔고, 단둘이 있게 되었는데 키스를 하기 시작했어요.
Fetish king: 그리고요?
그녀는 잠시 멈칫 하면서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내 질문에 천천히 말문을 열고 있는 듯했다. 중간중간 그때의 생각을 하는듯, 살짝 심호흡을 하는 모습이 작은 화면을 통해 보여졌다.
밤비: 가슴을 막 만지고..눕혔어요.
Fetish king: 가만히 있었나요?
밤비: 아뇨.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자꾸 옷을 벗기고..그리고 하게 되었어요.
괜시리 이유모를 질투심이 밀려 들어왔다. 머리속에서 누나의 옷을 벗겨내는 한 사내의 모습이 재생되었다. 물론 그 사내의 외모는 내가 알수 없어서 모자이크처럼 뿌연 형상으로 내 상상속에서 등장했고, 역시나 내 상상속에서 란제리를 벗고 그의 손길에 부르르 떠는 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Fetish king: 흥분했나요? 첫경험할때에.
밤비: 아뇨. 그냥 아팠어요.
Fetish king: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좋았죠?
밤비: 그런것 같아요.
대화의 수위는 점점 더 올라가고 있었다. 내가 평생을 살면서 누나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누나도, 나도 가족이라는 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보여줄 기회가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대답은 노(No)였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화상채팅을 하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일지도 몰랐다.
Fetish king: 그럼 상상을 해봐요. 동생이 만약 남이라면, 밤비님과 함께 잤을수도 있지 않을까요? 동생의 몸을 애무해 줄수도 있었을 거에요.
밤비: 네...
그녀가 타자를 치는 속도는 눈에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무엇때문일까. 많은 생각이 들어왔지만 어떤 가정을 내려도 그것은 흥분으로 다가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짜릿한 가설은 ‘누나역시 나와의 섹스를 꿈꾸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럴리는 없겠지만,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세포들이 거꾸로 역류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Fetish king: 동생도 아마 밤비님을 보며 그렇게 생각할 거에요. 저번에 그랬잖아요.같이 쭉 자란 동생이 아니라고. 동생은 밤비님을 보며 늘 그런 야한 생각들을 할지도 몰라요.
밤비: 그럼 속옷을 벗은 다음..그 다음은 뭔가요?
Fetish king: 무슨뜻이에요?
밤비: 님이 제안하는 것이 점점 수위가 올라가고 있잖아요. 나도 호기심이 들고, 두근거리는건 인정하지만 조금 무서워요. 혹여나 알몸을 보여주는 것 다음에 무언가가 있을까봐서요.
이번에는 내가 선뜻 타자를 치지 못했다.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의 존재가 이해가 갔기 때문이었다. 맞다. 예림이 역시 나처럼 연약한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짜릿하고 긴장되는 이유는 ‘그 다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모래로 조그마한 산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 젓가락을 꽂아 조금씩 모래를 덜어가는 그 게임처럼, 그 다음에 펼쳐질 두려움을 즐기며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나도, 예림이도 마찬가지였다.
Fetish king: 밤비님도, 저도 이제는 자주 못올지 몰라요. 말했다시피 이건 친구의 아이디고, 제가 쓸수 있는것도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밤비: 저도에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동생은 대학생이라 귀가시간이 일정하지 않아서 늘 불안해요.
Fetish king: 맞아요. 목요일날 채팅을 하기로 했지만, 또 언제 같이 채팅을 하게 될지 모르니까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누나의 마음, 혹은 그녀의 속에 내재된 성적인 부분들을 확인하면 할수록, 화상채팅이 갖는 의미의 가치는 조금씩 하락하는 것이었다.나도 모르게 조금만더..조금만 더..를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모래위에 꽂혀있는, 그 나무젓가락이 넘어질때까지 말이다.
Fetish king: 그래요.그러니까 미리 알몸의 다음 단계를 말할께요. 이건 철저히 내 생각이니 따르지 않아도 되요.내 말을 무시해도 나는 할 말이 없어요.이건 밤비님의 일이니까요.
밤비: 네. 말씀하세요.
Fetish king: 침대옆에 있는 커텐을 중심으로 동생하고 자는 것 맞지요?
밤비: 네.동생은 바닥에서 자요.
조금씩 더 저려오는 손을 몇번이나 쥐었다 폈다 하며 꼼지락 거렸다.흥분한 놈마냥 오타를 내기는 싫었다. 비록, 내 몸은 흥분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Fetish king: 그 커튼을 사이에 두고, 자위를 하는 거에요.밤비님도.
도망치듯 인재의 집을 빠져나왔다.
이유란 간단했다. 곧 있으면 인재가 돌아올 시간이라는 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두번째는 밤비와의 채팅이 너무나 길게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늘 아련한 흥분에 취해서 예림이와 채팅을 하게 되면 시간은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가 있었다.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비단 시간의 흐름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닌 듯해 보였다.어두운 하늘 위로도 먹구름의 존재는 확연하게 느껴졌다.암청색 물감위에 흩뿌려진 검은색 물감과도 같은 느낌이었다.아니나 다를까 금세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일기예보를 체크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나는 우산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급히 앞에 있는 건물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최악이다.’
젖은 옷을 털어내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예림이와 화상채팅을 하고나면 나는 극도의 흥분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재의 집을 나오면서 부풀어 오른 아랫도리는 가라앉아 있을지는 몰라도, 내면에 가득한 욕망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날씨는 점차 우중충하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비, 그리고 밤은 사람을 설레게 한다. 빗물에 흥분이 씻겨 나가는 것이 아닌, 기름위에 붙은 불위로 물을 붓는 것처럼 더욱더 타오르게 했다. 모든 이들의 욕망이 가장 고조되는 어두운 저녁때, 거기에 비까지 내리니 내 가슴은 미친듯이 뛰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휴대폰을 열어 강한별의 이름을 검색하고 있었다.
‘아니야.’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이건 아니었다. 너무나 비겁하게 느껴지는 듯한 일이었다. 강한별이 잔뜩 성욕에 취한 나를 내치진 않을 것이다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망설여졌다. 그래, 어쩌면..어쩌면 지금도 삼촌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둘이 모텔에 갔던 그 시간도 이 시간대와 비슷했으니까. 어쩌면 오늘도 둘은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웅...우웅...
휴대폰을 들고 망설이던 나는 내 손에 느껴지는 진동에 깜짝 놀라 그것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짧은 진동끝에 더이상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전화는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서둘러 휴대폰을 들어 눈높이에 맞춘 후, 발신자 정보를 확인했다.
-선배 어디에요? 결혼과 가족 과제 하려고 하는데..지금 학교 후문에 있는 피씨방으로 오실수 있어요?2층에 있는 피씨방요.-
오유민..?
순간 오유민의 모습마저도 상상속에서 야하게 그려져 버린 덕택에, 나는 두어번 고개를 저어 그것들을 떨쳐내야만 했다.맞아. 그런 과목이 있었고, 나는 오유민과 같이 그 수업을 듣고 있었지. 그리고 오유민과 가상 커플로 짝이 되었고..과제가 뭐였더라. 상당히 귀찮은 것이었는데.
갑작스레 비가 쏟아져 내리는 밖을 바라보며, 나는 건물안에서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비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비를 맞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는 몇번의 서성임 끝에 그 과제가 ‘청첩장 만들기’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고, 곧이어 답장으로 그쪽으로 가겠다는 말을 해주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제를 하다보면 조금은 차분해 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귀여운 후배였던 오유민마저 상상속에서 옷을 벗길 정도의 상태라면, 지금 내 감정선은 상당히 위험수위에 치달아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억누를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설령 그 무언가가 내게 있어서 상당히 귀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크게 심호흡을 한 나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후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비가와서 내 눈앞으로 보여지는 저녁의 영상들은 더욱더 몽롱해지고 있었지만, 피씨방에 가게되면 깔끔하게 해결될 일이라 믿으며 한발 한발 내딛어 달렸다. 적어도 강한별을 찾아가는 그런 골때리는 짓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최선책이었다.
비가 오니 술을 마셔야 한다는, 뻔한 핑계거리를 만들어 삼삼오오 술집앞에 모여있는 무리들을 지나 피씨방이 있는 건물안으로 달려들었다. 짧은 거리를 왔음에도 내 옷은 흠뻑 젖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손으로 툭툭 털어내고 나서야 피씨방 안으로 들어갔다.
자욱한 담배연기, 그리고 별다른 술자리를 잡지 못한 대학생들이 게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대다수 남자들끼리 우르르 몰려 다니며, 게임을 통해 시간을 때우려는 인원들 뿐이었다. 그 중에서 과제를 하려고 온 귀여운 여학생을 찾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선배!여기요!”
빨간 털모자가 살짝 고개를 내민다. 그 밑으로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서 미소가 가득 걸려 있는 것을 보고는, 나는 천천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유민이 있는 자리까지 간 나는 우뚝 하고 멈춰서 버렸다.
“아..두 자리 연속으로 나있는게 이 자리뿐이어서..”
컴퓨터는 두 대. 의자는 하나였다. 긴 쇼파처럼 되어 있는 의자는 둘이 앉을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중간에 팔걸이나 칸막이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니 ‘커플 전용석’이라는 팻말이 대롱대롱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오유민이 앉은 자리 옆으로 캠퍼스 커플로 보이는 몇몇들이 꼭 붙어 앉아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아 뭐...할 수 없지.”
그녀의 말대로 피씨방의 자리들은 꽉 차 있었다.둘이 머리를 맞대고 해야 하는 과제이니 떨어져 앉으면 의미가 없으니, 커플석이라도 붙은 자리는 앉아야만 했다. 생각해보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내외할 필요도 없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그녀가 앉아있는 쇼파의 반대쪽을 슬쩍 잡아당겼다.
오유민은 왼쪽 끝편으로 바싹 붙어 앉으며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마치 내 마음속에 있는 부담을 줄여주겠다라는 무언의 메세지와도 비슷해 보였다. 긴팔 티셔츠밑으로 보이는 치마. 그리고 그녀의 무릎위로는 가방이 하나 올려져 있었다. 의자밑으로 뻗은 하얀다리에 시선이 갔지만, 그렇게 되면 애써 억누른 감정이 살아나는 불상사로 이어지기에 나는 얼른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디에 있었어요?”
“아..잠깐 인재네 집에서 쉬고 있었어.”
인재의 말이 나오자 오유민의 표정은 무표정해졌지만, 이내 살짝 웃고는 자신의 모니터를 가리켰다. 모니터 안에는 청첩장안에 쓰이는 글귀들만 모아놓은 인터넷 웹페이지가 띄워져 있었다.
“나름대로 찾아 봤는데..이정도만 쓰면 되지 않을까요?”
그녀가 작성해둔 초안을 보기위해 몸을 살짝 오유민쪽으로 기울이게 되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강한별에게서 나는 특유의 여자향수 냄새가 아닌, 달콤한 과일향기가 내 코를 살며시 간지럽혔다.
청첩장의 문구는 생각보다 다양했다. 시의 한구절을 적어 신랑과 신부의 사랑을 대입하는, 다소 닭살스런 문구들이 있는가 하면, 아름다운 두 사람의 사랑을 축하해 주십시오 라는 상투적인 문장들도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런 문구들 보다는 한구석에 자리잡은, 신랑 김예영 신부 오유민 이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우리 둘 사이에 어색한 공기를 뿌려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괜찮은데..”
“여기에 그냥 희미한 이미지좀 넣고, 아무 예식장이나 하나 정해서 약도를 넣으면 될 거 같은데요?”
“아..응.”
약간은 성의 없는 내 모습과는 달리, 오유민은 뭐가 재밌는지 연신 열심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컴퓨터를 켜긴 했지만 나는 별달리 할것이 없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문구들은 오유민이 찾아 놓았고, 어떤 식으로 할 것이라는 레이아웃도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냥 예의상 자리를 채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니터를 보는 척하며 오유민의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을 얼굴에 물들인 그녀의 눈망울은 너무나 진지해 보였다. 신입생들 특유의 의욕만만한 모습과는 비슷하지만 사뭇 다른 진지함이었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은은한 화장위로 큰 눈망울 두개가 모니터를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작지만 날렵한 코 밑으로 앙증맞은 입술이 반짝 거렸다. 좁은 커플석의 특성상 내 젖어있는 어깨에 닿은 그녀의 오른팔의 체온이 유달리 따뜻하게 느껴졌다.
“결혼날짜는 몇일로 할까요?”
“음?그냥 뭐..아무때나 괜찮지 않을까”
계속해서 성의없는 대답만 나오는 것은 정말 어쩔수 없었다. 청첩장 한구석에 쓰여진 신랑 김예영, 신부 오유민 이라는 글자가 계속해서 나를 어색하게 만들고 있는 듯했다. 그저 과제일 뿐이고, 가상일 뿐인데도 공기는 점점 어색해 지는 것만 같았다. 오유민의 모니터를 보려면 그녀와 조금 더 붙어야만 했고, 붙어 앉게 되면 여지없이 강한별과는 조금 다른 그 풋풋한 향기가 나를 어지럽게 했다.
“이런거 꼭 해보고 싶었어요.”
오유민은 나와 반대로 즐거워 보였다.모니터에서 나오는 열기 탓인지 약간은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내가 도움이 별로 되주지 못한거 같은데.”
“아니에요.어차피 저 혼자 만들순 없고, 선배랑 의견을 나눠야죠. 맘에 드는 문구가 어떤거에요?”
“이..시처럼 쓰여있는건 조금 민망하고..적당하게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도가 괜찮은거 같은데.”
“에이..가상이지만 무슨 남편이 그렇게 성의 없어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는 나를 보며 오유민은 쿡쿡 거리며 웃었다. 강한별과 마찬가지로 속을 알수 없는 아이였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와 풍기는 매력이 조금은 다르다는 점이었다. 음..인재가 이 아이에게 끌렸던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것만 같았다.
“어머..”
“왜?”
“날씨가..번개가 치네요.”
“응?”
오유민의 말에 깜짝 놀란 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응시했다. 순식간에 창문쪽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보이더니, 이윽고 빛보다 조금느린 천둥소리가 하늘을 찢을듯 울려 퍼졌다.
쿠르르르릉
“날씨가...왜 갑자기 이러지?”
“선배 우산 갖고 왔어요?”
“아니.”
“갈 때 제꺼 쓰고 가세요.저는 바로 옆이니까.”
“아냐 괜찮아.”
콰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피씨방 안에 있는 대다수의 인원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 정도의 굉음이 울려퍼졌다. 유민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이 전화기를 꺼내었다.
“괜찮으려나. 한별이 우산 없이 나갔는데.”
“어디로?”
“글쎄요. 저도 잘 모르죠. 한별이 일은 되게 궁금해 하시네요?”
“아..뭐 별로 그런게 아닌데.”
또 삼촌을 만나러 간건가?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이지만, 오유민은 장난스런 표정과 섭섭한 표정이 반반씩 섞인 얼굴을 하고 내게 물어왔다.그리고 잠시 어색해진 우리의 사이에 또한번의 섬광이 번뜩였다.
쿠르르릉!
“에휴.진짜 날씨가 미쳤나보네요.”
오유민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날씨에 강한별이 삼촌을 만나러 나간거라면, 삼촌 역시 대단한 사람인거다. 천둥번개가 쳐도 조건만남은 하겠다는 건가? 하하하하. 정말 우습다.
우우웅..우우웅..
모든 것을 신경끄고, 오유민과 붙어 앉아 맘에 없는 청첩장 만들기를 계속할때쯔음에 또다시 진동음이 들렸다.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한 그녀는 살짝 손가락으로 내쪽을 가리켜 보였다.그제서야 나는 그것이 내 휴대폰의 진동임을 알아채고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숙모-
나도 모르게 헛숨을 집어 삼켰다. 맞다. 잊고 있었다. 숙모는 천둥 번개를 무서워했다. 비오는날 밤을 싫어했으며, 천둥번개를 동반한 날은 더더욱 꺼려했다. 나도 모르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전화 안받으세요?”
누구에게 온것인지 궁금한듯, 오유민은 연신 전화기를 붙잡고 생각에 잠긴 나를 보며 물었다. 또 한번의 섬광, 또 한번의 굉음이 울려 퍼졌고, 나는 마른침을 꿀꺽 하고 삼켜 넘겼다.
“나..가봐야 할것 같아.미안해.”
“네?”
“중요한 전화가 왔어. 가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
진동소리, 천둥소리가 교차해서 울렸고, 오유민은 그런 나를 그 큰 눈으로 빤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휴대폰 액정에 뜬 숙모라는 이름에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맞다. 천둥번개가 치는 날 밤. 강한별이 어딘가를 갔다면 삼촌도 어딘가로 나갔을 것이다.숙모는 집에서 혼자 있을 것이고 두려워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두 개의 아웃카운트와 한 개의 공격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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