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멋진날 1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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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
내가 타고 있는 택시의 차창이 푸른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금세 잠잠해졌다. 이윽고 콰르릉 하는 굉음이 귓가에 들려왔다.
“아휴..날씨 참 장난아니네요.”
택시기사는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나에게 중얼거리듯 말을 하며, 룸미러로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동의를 구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을 신호로 하듯 또 한번의 섬광과 또 한번의 굉음이 공기를 찢어발겼다.
옛 회상속을 더듬어 보니, 작은집으로 가는 이 길이 조금씩 낯익은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파트. 고등학생때에 엄마의 심부름으로 음식같은 것을 전해줄때 종종 들르곤 했었던 그 집의 모습 그대로였다. 고등학생의 모습을 했던 나는 귀찮아 하는 척 하면서도 작은집으로 가는 심부름을 늘 기다리곤 했었고, 우습게도 그때에 난 작은집을 삼촌댁이 아닌 ‘숙모네’라고 불렀다.
굵은 빗방울은 택시가 멈춘 그 동안에도 앞유리를 쉴새 없이 두들겨 대고 있었다.헤드라이트가 밀어낸 어둠위로 그 빗방울의 실체들이 손에잡힐 듯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내 손에 들려진 봉투에서 병과 병이 부딪혀 짤랑 하는 소리를 내었다.
“크..비오니까 소주 한잔 하시려는 모양이네요?”
그는 입맛까지 싹 다셔가면서 내 쪽을 돌아보았다. 정신이 다른곳에 팔려있던 나는 그제서야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고,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택시비를 내밀었다.문을 열고 내리는 내 왼손에는 오유민이 준 작은 우산이 들려져 있었다.
기사 아저씨의 말처럼, 비오는 날을 즐기며 술을 마시는 것에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다만 그러한 보통의 상황들과 비교할 때 운치, 혹은 낭만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왜인지 모르지만 나는 술을 사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그것이 천둥을 무서워 하는 숙모를 진정시켜 주리라 믿고 있었다. 아니, 틀림없이 그래야만 했다.
투두두두
여자들이 쓰는 아주 작고 귀여운 우산. 오유민이 내 손에 쥐어주었던 그 우산위로 굵은 빗방울들이 쏟아져 내렸다. 겨우겨우 마르기 시작했던 내 왼쪽 어깨는 다시금 젖어들기 시작했고, 그 빗속에서 숙모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외관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피씨방을 나와, 전화를 받았을때의 숙모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듣는 사람을 애처롭게 만들정도로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내가 지금 간다고 말을 하자 그녀는 미안해요 라는 말을 수없이 하며 전화를 끊었다.
숙모가 사는 그 집은 몇년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삼촌의 결혼선물로 장만해 주었던 그 집이었다. 아버지와 삼촌역시 나처럼 고아였고, 삼촌에게 있어 우리 아버지는 형이 아닌 ‘아빠’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악인은 돈이라는 시덥잖은 이유 하나만으로 내 부모님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나아가 조화를 부수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는 그 덕분에 혼자 있는 숙모의 집에 오게 된 것이었다.
“저에요.”
벨을 누르고 굳게 닫힌 철문위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그 와중에도 번쩍하는 섬광이 내 얼굴을 일순간 푸른빛으로 물들였다가 사라졌고, 무슨일이 있는게 아닌가 고민을 해야 할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철문이 빼꼼하게 열렸다.
“괜찮아요?”
문이 열리고 보인 숙모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놀라서 그렇게 물었다. 묶어 올린 머리, 그리고 그 밑으로 드러나는 얼굴은 너무나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늘상 보는 외출복이 아닌, 집에 입는 편안한 원피스에 긴팔 니트 가디건을 걸친 숙모의 눈망울은 보기에도 확연히 티가 날만큼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아니에요.”
거실의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거실에 있는 쇼파 위로는 방금 전까지 숙모가 덮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두꺼운 이불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그 안에 숨어, 내가 오기전까지 무서움에 떨었을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때도 그것을 무서워 하는 그녀가, 혼자서 저것들을 이겨내기란 엄청난 고역이었을 것이다.그리고 그 무서움이 나에게 전화를 하게 만들 용기로 바뀐 모양이었다. 그랬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숙모는 내가 집에 찾아간다고 하면 망설일 정도로, 의식적으로 나를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앉아 계세요.”
검은색 원피스 밑으로 내려온 하얀 다리. 그리고 그것만큼이나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서 숙모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주방으로 가서 작은 상을 가져와 사온 술을 올려 놓은 다음, 찬장을 뒤져 뜨거운 커피를 탔다. 술과 커피가 어울릴리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숙모에게는 따뜻한 것을 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이건 그냥 제가 마실게요.”
봉투에서 소주를 꺼내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애써 웃으며 그렇게 말해주었다. 무언가를 무서워할때에 소주를 주면 조금 안정적으로 변할 것 같았는데, 생각해보니 숙모는 술이 약했다. 오유민과 비슷하거나, 아마 그 보다 더 약할 지도 모른다.
콰쾅!
눈치없이 또 한번 천둥소리가 울려퍼졌고, 숙모의 작은 어깨는 비맞은 강아지처럼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화장기 없는 고운 얼굴에 조금씩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늘 맑게 반짝이며 나를 설레게 했던 두 눈은 긴 속눈썹에 덮여 감겨버렸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숙모의 손을 움켜쥐었다.
차가웠다.
비는 내가 맞고 왔는데, 이상하게 내 몸의 체온은 뜨거운 것에 비해 숙모의 손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한 겨울에 내리는 함박눈을 손으로 맞은 것과 같은 그런 차가움 이었다.내 손이 닿자, 그녀는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힘을 주어 잡았다.
“괜찮아요.무서워 하지 않아도 돼요. 곧 천둥이 멈출 거에요.”
누군가를 달래거나, 혹은 따뜻한 말을 하는데에 있어서는 자신이 없는 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숙모의 떨리는 어깨를 보니 그러한 말들이 자연스럽게 내 입을 통해 세어나왔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녀의 눈이 꼭 감겨 있는 것을 본 나는, 몸을 일으켜 쇼파위에 앉아있는 숙모의 옆에 붙어 앉았다. 이불속에서 느껴지는 떨림. 나는 그렇게 한참이나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안쓰러웠다. 그녀가 진정으로 무서워해야 할 것은 천둥이나 번개가 아닌 남편의 삐뚤어진 마음이었다.하지만 여린 그녀가 그것을 제대로 따질수 있을리가 없었다. 외적으로는 그것에 끙끙 앓고, 이렇게 천둥이 치는 날에는 무서움에 떨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동경을 하던 천사가 한 쪽 날개를 잃고 한없이 추락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그런 마음이었다.
게다가 숙모의 그것은 피할수 없는 공포증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높은곳에 가지 않으면 그만이었고,특정 식물이나 동물에 대한 공포증이 있다면 주변환경을 그것들이 서식할 수 없는 환경으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천둥과 번개는 피할수 없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자연재해는 환경을 바꾸거나, 혹은 장소를 옮긴다 해서 회피할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괜히 예영이한테...정말 미안해요.”
“괜찮아요.제가 왔으니까 안심하세요.정말 괜찮아요.”
이번에는 자유롭던 오른손 까지 사용해서 숙모의 양손을 꼭 움켜쥐어 주었다.그녀의 차가운 손은 뜨거운 내 손에 닿아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는 듯했다. 하얗고 예쁜 손. 그리고 화장을 지우고 나도 본연의 청순함은 사라지지 않는 그 하얀 얼굴에, 이번엔 내 가슴이 녹아내렸다.
나는 얼른 상위에서 고소한 향을 풍기는 커피잔을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숙모는 천천히 눈을 떠 나를 바라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마자 숨이 턱하고 막힌 내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가슴이 떨리고 화가 났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혼자 떨게 하고 밖에서 내도는 삼촌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숙모는 천천히 커피잔을 움켜쥐고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집 안이 추워서가 아닌, 공포때문에 느끼고 있던 한기를 조금씩 녹이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본인 나름대로의 안정을 되찾아갈 그 때즈음, 나는 소주병을 돌려 종이컵에 붓고 있었다. 그것이 삼촌에 대한 분노때문인지, 아니면 숙모로 인한 두근거림을 해소 하려는 것을 위함인지는 나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왠지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목이 탔고, 앞에는 술이 있었다.그리고 안정을 찾아가는 숙모에게, 천둥은 또 언제 그녀를 다시 한 번 겁에 질리게 할 지 모를 일이었다.
“여자는, 결혼을 하면...주변에 사람이 많이 없어져요.”
목안 가득 넘어간 술의 쓴맛을 달래고 있을때, 조금씩 떨리고 있는 숙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한 쪽 손을 잔을 들고, 한 쪽 손으로는 내 왼손을 꼭 움켜쥔 채로,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가만히 열었다.
“남편이 전부가 돼요. 친구들도 다 결혼해서 가정이 생기기도 하고, 남편을 따라 본래 살던 곳을 벗어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예영이 밖에 부를 사람이 없었어요.너무나 무서워서요.”
“언제든 불러도 돼요. 무서울때는 언제든지요.”
그녀의 눈이 나를 향했다.파르르 떨리는 어깨의 진동은 멈추지 않고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떨리는 내 가슴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주변에서 나는 커피향과, 내 주변에서 나는 알콜 냄새가 묘하게 섞여 공기중으로 가라앉았다.
“남편이...지금 전부가 될 수 없잖아요.”
내 말에 그녀는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왠일인지 나는 숙모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그냥..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맞다. 내가 제대로 된 사고를 가진 놈이라면, 어른들일에 참견을 하는 것을 무릅쓰고 라도 삼촌의 앞으로 다가가 그것을 말렸어야 했다. 강한별을 불러내 선배로서 타일러야 했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둘이 모텔로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관망하였으며, 오히려 숙모가 삼촌과 멀어지기를 은근히 바라기 까지 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마지막 남은 죄책감이었다.
“나도 한 잔 줄래요?”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때, 숙모는 다른 종이컵을 들고 내게 내밀고 있었다. 또 다시 번개가 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한 나는, 이내 술병을 들어 숙모의 잔을 채워주었다.
“술 못마시잖아요.”
“예영이가 옆에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녀의 미소는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달려와 준 나에대한 고마움으로 억지로 웃던 종전의 그 미소가 아닌, 정말 내가 반했었던 그 천사같은 미소를 지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내 우려와는 달리, 숙모는 눈을 질끈 감기까지 하며 술잔을 비우고는 그것을 상 위로 내려놓았다.
“삼촌이 미워요?”
숙모의 질문이었다.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그런 말이었지만, 나는 짐짓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만을 끄덕였다.내가 다시 채워주는 잔을 조금 들이킨 그녀는, 여전히 이불을 어깨에 걸친채로 조용히 물었다.
“그럼 나는요?”
그녀는 처음으로 내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숙모가 내게 그어놓은 그 미묘한 선을 아주 살짝 넘긴 듯한 그런 질문이었다. 두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고, 작은 어깨의 떨림은 조금 멈추어 있었다. 단 한잔 마셨을 뿐인데 벌써부터 붉어지는 두 볼에 손을 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좋아하죠 당연히.”
대답을 하며, 평범한 표정을 지으려 애를 쓰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무슨 의도로 물어본 것일지는 모르지만 내 대답은 당연히 진심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리고 말도 안되게 삼촌이라는 사람을 질투했을 때부터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내가 훗날 결혼한다면 숙모와 같은 여자와 할 것이라고, 그렇게 수없이 학창시절 내 마음속에서 다짐하고 다짐 했었다.
“그럼 삼촌을 미워하지 말아요.”
그녀의 마지막 말에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황급히 술잔을 잡아 내 목으로 넘겼고, 숙모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숙모를 만난이후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렇게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앗!”
순간적으로 거실로 푸른 빛무리가 일렁거렸다. 겨우 안정을 되찾은 듯한 숙모는 그 빛이 번뜩이자마자 반사적으로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번개가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 천둥이 찾아오기 전까지의 그 짧고도 긴 찰나의 시간. 나는 들고 있던 빈 종이컵을 조그마한 상위로 던져버렸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조건 반사적으로 그렇게 된 행동이었다. 뇌에서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내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이겠지만, 내가 무어라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숙모를 가슴가득 껴안고 있었다.
향기에 숨이 막혔다. 숙모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는, 그녀를 껴안은 나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내 가슴과 숙모의 가슴이 닿은 부분에 누구의 심장박동인지 모를 진동이 미묘하게 느껴지고 있었고, 나는 그대로 그녀의 작은 어깨를 끌어 안아 버렸다. 잠시후 하늘이 일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할 그때에, 나는 팔을 둘러 그녀의 귀를 막아버렸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우리 둘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고,이윽고 그 소리마저 천둥이 덮어 버렸지만, 우리는 그대로 아무런 움직임 없이 있을 뿐이었다. 신기하게도, 천둥의 굉음에도 숙모의 어깨는 더이상 떨리지 않고 있었다.
“괜찮아요. 무서워 하지 마세요.”
내 말의 톤이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아챈 것일까? 숙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숙모는 내 품에서 안정을 찾고 있음은 물론이고 내 허리 부분을 살며시 끌어 안았다는 점이었다. 너무 큰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알아채지 못할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행동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용해졌다. 하늘을 찢을 듯이 울려 퍼지던 천둥 소리도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만 남긴채 사라져 버렸다. TV조차 켜져 있지 않은 거실에는 빗소리와 우리둘의 호흡소리만 남았다. 급하게 술을 마셔서 조금은 깊어진 호흡소리 두 개가 창밖의 빗방울 소리와 맞물려서 연차적으로 들려왔다.
“예영이가 있어서 다행이에요.정말 고마워요.”
그 숨막히는 어색함이 싫었던 건지, 숙모는 그렇게 내게 중얼거렸다. 어깨를 감싸쥐었던 내 손은 어느덧 그녀의 가는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따뜻한 느낌이 들었고, 내 가슴에 닿는 그녀의 가슴감촉이 나를 설레게 했다.
“자..잠깐만 물좀 마실게요.”
그녀는 내게 안겨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 나를 밀어내며 쇼파에서 일어섰다. 무엇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숙모의 얼굴은 발그레 해져 있었고,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를 쓰며 눈 앞에 있는 잔에 술을 따라 목으로 넘겼다.
숙모는 천천히 주방으로 걸어갔다. 아직도 천둥에 대한 공포증이 남아 있음에 분명한, 그런 떨리는 걸음걸이였다. 애초에 물을 마실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데도, 그녀는 굳이 주전자에 있는 물을 컵에 따라 입술을 축였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녀를 따라 벌떡 일어나고야 말았다. 더이상 천둥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데도 여전히 조금씩 떨리는 어깨가 안쓰러워서였을까? 내가 한 행동이지만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아예 내 쪽으로 올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꾸만 심호흡을 하는 숙모의 모습에 자극을 받아서 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내가 공격할 수 있는 기회는 한 번 뿐이라는 것을 잊어버려서 일지도 모르겠다. 뭔진 모르지만, 나는 주방의 식탁위에 팔을 올리고 서 있는 숙모를 뒤에서 끌어 안았다.
멈칫했다. 숙모의 몸도, 순간적인 시간과 공기의 흐름도 그렇게 잠시 일시정지를 한것 처럼 멈춰섰다. 가느다란 그녀의 허리를 끌어 안은 내 코위로 그녀의 머리결이 스치며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왔다. 향긋한 샴푸 냄새. 하얀 목.그리고 내 팔에 느껴지는 가느다란 허리의 감촉.
그녀, 손미현은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많이 놀란듯 움찔했고, 반사적으로 허리를 감싸안은 내 손을 잡았지만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나보다 약간 키가 작은 숙모의 어깨에 내 턱을 걸쳤고, 그녀의 숨소리는 귀에 닿을듯 더욱 크게 들려왔다.
아마도, 나처럼 숙모도 왜 그랬는지 이유를 모를 것이었다. 내가 어째서 이렇게 과감한 짓을 한건지, 그리고 숙모는 왜 그런 나를 자르지 못했는지 서로 궁금해 하고 있을 터였다. 아무튼 나는 그녀를 안아야 겠다고 생각했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욕망에 이끌리는 대로 안았을 뿐이었다.
허리를 감싸 안으니, 그녀의 가슴을 내 팔로 받치고 있는 형상이 되어 버렸다.내가 팔을 움직일수록 원피스의 천은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숙모가 뭐라고 말을 하려던 그때에, 조금 앞으로 나아가 그녀와 몸을 밀착시킨 내 행동 덕분에 내 볼과 숙모의 볼이 맞닿았다.
참을수 없었다.진작에 가라앉았던 흥분이 다시금 찾아 온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비오는 날 술을 마신 것에 대한 영향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그녀의 엉덩이와 밀착한 아랫도리는 빳빳하게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숙모는 내 몸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부르르 떨었고, 나는 그것이 긍정의 뜻이라고 멋대로 해석하며 양 손을 각각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
고개를 숙인 숙모의 머리칼이 살짝 내려와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오른손이 그녀의 가슴위로 얹어졌다. 뭉클한 감촉이 들어오니 내 호흡소리도 자연히 커졌다. 눈으로 옷위를 훑어 봤던 것보다 조금 큰 것같은 존재감이었다. 왼손은 살며시 원피스의 천을 끌어 당겼고, 덕분에 드러난 허벅지 속으로 내 왼손은 거침없이 파고 들어갔다.
멈출수 없었다. 그 행위를 시작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멈추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특히나 손등으로 팬티의 천 감촉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허벅지의 느낌은 손을 뗼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렇게, 숙모의 가슴부분과 허벅지 부분은 내 양손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고,그녀는 마침내 깊은 숨결을 뿌리며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자신의 몸을 지탱했다.
천둥은 멈췄지만, 내 가슴속에서는 아까보다 더 큰 천둥이 치고 있었다. 아마도 내 눈빛은 정상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한번 시작한 미친짓은 제정신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제어할 수 없는 고삐풀린 망아지나 다름없었다.가슴과 허벅지를 주무르는 내 손엔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고, 마침내 숙모의 입에서는 귓가에 크게 들릴 정도의 한숨이 세어나왔다.
나는 그대로 테이블 쪽으로 숙모를 몰아 세웠다. 빳빳하게 일어선 내 지퍼의 앞섬이 숙모의 엉덩이 골 사이를 지긋이 누르고 있었다. 은근하게 움직일 때마다 숙모의 다리는 조금씩 떨리는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망설일 것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허벅지와 가슴을 만졌고, 이제는 머리속에 끝없이 펼쳐질 그것을 실행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짤그랑.
나란히 놓여있던 컵과 컵이, 식탁이 흔들리는 통에 서로 부딪혀 청명한 유리의 소리를 내었다.각각 다른 부분들을 더듬던 내 손은 그녀의 어깨를 잡아 숙모의 몸을 돌렸고, 순식간에 우리는 마주보는 형상이 되었다. 비록,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는 못했지만.
숙모는 갈곳이 없었다. 식탁이 뒤에 떡 하니 버티고 있으니, 그것에 몸을 기댈수 밖에 없었다. 내 손은 그녀의 원피스 밑부분을 잡아 위로 끄집어 올리고 있었다.하얀 허벅지와 남색 팬티가 보인 것, 그것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손은 숙모의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었고, 입술은 그대로 목적지를 향해 돌진했다.
“웁!”
숙모는 놀라서 헛숨을 집어 삼켰다. 술냄새와 향기가 섞여 코 안에 가득차는 듯했다.약간은 말라있는 그녀의 입술을 내 것으로 덮었다. 달콤한 사탕을 베어 문것같은 환상이 들어왔다.
“흡..흡..”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내 입안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울리고 있는 것이었다.내 손은 거침없이 엉덩이 선을 타고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 들었고, 조금은 뜨겁게 느껴지는 팬티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그 부분을 더듬는 다는 생각에 아득한 흥분이 머리위를 가득 메울 그때, 내 몸은 자석의 같은 극이 닿은 것처럼 뒤로 확 밀려나 버렸다.
“그..그만..그만..그만해요.”
순간적으로 나를 밀쳐낸 숙모는 고개를 숙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이미 내 손에 의해 잔뜩 일그러진 옷가지들을 양 손으로 가리며, 그녀는 식탁에 기댄채 스르르 무너지듯 주저 앉았다.
“하아..하아..”
내 호흡역시 가빠져 있었지만, 나는 계속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당혹스런 표정의 숙모의 두 눈이 나를 향하자, 전기에 감전된 것 처럼 찌리릿 느낌이 왔다. 그것은 확실한 스탑버튼 이자 브레이크였다. 달리던 차의 핸드 브레이크를 올린 것처럼, 내 귓가에 끼이익 하는 타이어의 마찰음과 함께 욕망에 가득찼던 마음이 빙글 돌아 힘겹게 멈춰섰다.
“미안해요. 하지만..이러면 안되요..지금은 이러면 안되요.”
숙모의 가녀린 어깨가 다시금 떨려왔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내 머리속에는 후회가 아닌 아쉬움의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맞다. 그녀는 수비하는 투수였다. 그리고 나는 욕망의 베트를 들고 타석에 서있는 타자였다. 나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주어졌고, 타자에 비해 약자의 입장을 하고 있는 투수인 그녀는 네 번의 기회를 갖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포볼을 던지지 않고 나를 밀쳐내 아웃시켜 버린 것이었다.
“번개가 멈췄어요. 돌아가 볼게요.”
“미안해요.나는 정말...”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미안해 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나였다.하지만 숙모는 아직도 벌게진 두 볼을 감싸쥐고는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나로 인해 조금이나마 흥분을 했던 것이 수치심으로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내 입술에는 그녀의 입술과 닿았던 감촉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돌아가기 힘들었다. 다시 한번 입을 맞춰! 라는 명령이 쉴새없이 뇌에서 떨어지고 있었다.헝클어진 옷가지를 하고 주저 앉은 손미현이라는 여자의 모습은 그 정도로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조카인 나를 상대로, 혼란에 빠져있는 그 모습 그대로. 그 순간만큼은 숙모가 아닌 손미현 이라는 여자였다.
“들어가 볼게요. 미안해요.”
결국 나는 도망치듯 ‘타석’을 빠져나와 버렸다. 여전히 그 곳에 주저 앉아 나를 보는 숙모의 시선이 뒤통수에 따갑게 느껴지는 듯했지만, 나는 후다닥 철문을 열어 밖으로 뛰쳐나왔다. 패배감. 그것은 패배감이었다. 한심하게 생각하던 삼촌에게만, 손미현이라는 천사를 만질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다. 정작 그 사람은 그 자격을 시시껄렁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내 열등감에 더더욱 불을 지피는 그런 행위였다.
오유민이 준 우산을 손에 쥐고 비를 맞고 걸었다.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에 닿는 감촉을 느끼며 나는 빠른 속도로 그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버렸다. 숙모는 내가 가는 것을 보고 있을까?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다음 타석을 기약해야만 하는 것이었다.많은 공을 던진 투수가, 너무나 정직한 정가운데 직구를 내게 던져줄때 까지, 나는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귀찮은 시간’은 일주일을 순회하여 다시 나를 찾아왔다.
강의실을 가득메운 1학년생들. 그 와중에 나같이 게을렀던 신입생의 경력을 갖고 있는 2학년들이 종종 눈에 띄였다. 학기가 끝날때까지 결혼과 가족의 수업은 정해진 파트너와 같이 앉아야 했기에, 오늘도 내 옆에는 오유민이 앉아 있었다. 연신 내 얼굴 표정을 살피는 그녀의 손에는 과제로 제출할 청첩장이 쥐어져 있었다.
“무슨일 있어요?”
“응?아니..”
숙모와의 일을 생각하며 멍해져 있던 나를 보며 오유민이 물어왔다. 여전히 상큼하고 발랄한 옷차림을 하고서, 짧은 머리결을 살짝 귀 뒤로 넘긴 그녀는 호기심과 걱정이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과제 혼자 다하게 해서.”
“괜찮아요.”
“그거 나 좀 봐도 돼?”
예의상, 관심이라도 보여야 할 것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이 아이는 왠일인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손에 쥔 청첩장을 내밀고 있었다. 초대하는 글,임의로 정한 예식장의 약도 따위가 그려져 있는 내용물 안에는, ‘신랑 김예영 신부 오유민’이라는 글자들이 유독 눈에 띄게 굵은 글씨로 프린트 되어 있었다. 재질 역시 건성으로 만든 A4용지가 아닌, 실제 청첩장 처럼 빳빳한 종이의 느낌이 들어왔다.
“괜찮죠?”
“아..응. 잘만들었네.”
이번 대답은 건성이 아닌 진심이었다.그녀는 매우 꼼꼼하게 신경을 쓴 듯했다.수업이 끝나갈 때쯔음 교수는 과제를 제출하라고 말을 했고, 우리는 청첩장을 앞으로 전달을 했다.
“그럼 오늘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부부에게 있어서 서로의 역할, 즉 롤에 대해 바꾸어 생각하는 시간을 갖을 거에요. 모두 다음 강의시간에 봅시다.”
교수는 언제나처럼 의욕에 가득찬 멘트를 날리고는 총총히 사라졌고, 나는 그대로 책상위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저마다 청첩장을 만들며 자신의 파트너와 친해졌는지, 대다수의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도 각자의 파트너와 대화를 하기에 바빴다. 걔중에는 내 쪽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남학생들도 몇몇 눈에 들어왔고, 어김없이 그들의 파트너는 정말이지 눈뜨고 보기 힘든 외모의 여학생들 뿐이었다.
“굉장한 우연이군요.”
음? 낯익은 대사, 그리고 낯익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강한별이 나와 오유민을 보며 서있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과 짙은 화장, 그리고 내가 방에서 맡았던 그 향수의 향을 풍기면서.
“유민이랑 예영선배가 부부인가요?”
“응.너는 누구야?”
내 대답을 가로채고 오유민이 묻자, 강한별은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손가락으로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그 곳에는 뭐가 불만인지 툴툴 거리며 가방을 챙기는 한 남학생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저번 시간 결석한 파트너 강한별을 대신해 모든 작업을 혼자 한 것만 같은, 그런 억울한 표정이었다.
“흐음..잘 어울리는데요?”
“무슨뜻이야?”
“실제 부부라고 해도 믿겠네요.”
강한별은 여유있는 표정으로 우리를 보며 말했다. 내가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겠지.아니, 설사 내가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해도 크게 놀라지 않을 아이였다. 강한별은 내가 여태까지 본 20살 여자애들 중에서 가장 여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테니까.
“뭐야. 농담하지마.”
오유민이 살짝 웃으며 말을 하자, 강한별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나를 보며 웃었다.내가 뭐라고 하려는 찰나, 그녀는 들릴듯 말듯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실제 부부처럼 같이 살아봐도 재밌을텐데..”
“야 너..”
오유민은 듣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분명히 들었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 했던 그때,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가방을 챙기느라 강한별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오유민의 전공서적 사이에, 종이 하나가 살짝 삐져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까 우리가 제출했던 청첩장의 종이와 똑같은 제질의 것이었다.
“어이! 오랜만!”
어째서...청첩장을 또 한장 만들어 책 속에 껴놓은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오유민을 바라보던 그때, 또 한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셋의 고개가 일제히 출입구 쪽으로 향했고, 그 곳에는 한껏 멋을 낸 인재가 우릴 보며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유민과 강한별은 살짝 목례를 했고, 싱글 거리며 웃던 인재는 나와 오유민이 같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살짝 배신감 어린 표정을 내게 보내보였다.휴..앞으로 땍땍거리며 날 귀찮게 할 녀석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해져, 피곤함 어린 한숨이 세어나왔다.
“여..김예영이..결혼과 가족 F맞고 신입생들이랑 같이 미래설계하는구나?”
“그렇게 됐어.”
“이 수업 여전히 가상 커플로 지정해 두고 같이 앉아서 수업듣게 하...”
인재의 말이 갑자기 뚝 하고 멈췄다. 그제서야 나와 오유민이 같이 앉아있는 것이 우리 둘이 가상 커플로 지정된 것을 의미함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녀석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움직였고, 영문을 모르는 오유민은 옆에서 쿡쿡 거리며 웃는 강한별을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흠흠! 뭐 일단 다들 배들 안고파? 내가 쏠게 밥먹으러 가자.”
‘다들’이라고 말은 했지만 인재의 시선은 오유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반대로 오유민은 반사적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이상하게도 나는 강한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지 뭐.”
내가 원래 이렇듯 주도권을 잡고 있는 사람이었나? 건성으로 대답한 내 말에 강한별과 오유민 역시 암묵적인 동의를 보내주고 있었다. 인재는 만족한 듯 씨익 웃었고, 그녀들이 강의실을 빠져나가자 그는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은 나중에 묻겠다.”
“내가 원해서 조가 된건 아냐.”
“아오! 나도 이럴줄 알았으면 F맞는건데!”
역시나 여자는 밝히지만 취향하나는 확실한 녀석이었다. 더불어 한번 찍은 사냥감은 왠만해선 놓지 않는 쓰잘대기 없는 근성의 소유자 이기도 했다. 뭐 여하튼, 나야 밥을 사준다니 따라가는 수밖에 없겠지만.
졸지에 나와 인재, 그리고 강한별과 오유민이 같이 이동하는 그룹이 생겨나 버렸다. 인재는 여지없이 이동하는 와중에도 오유민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잠시 보류해 두었던 숙모와의 일에 대한 생각을 다시 끄집어 내며 발길을 재촉했다. 강한별은 그런 나를 관찰하듯 내 뒤를 말없이 따를 뿐이었다.
당연히 카페테리아 겠지. 그리고 내가 숙모를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하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인재는 후문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사주겠다며 우릴 이끌었다. 아쉬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지만, 여지 없이 카페테리아를 지날 때에 그 쪽에 시선을 두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지나가는 학생들은 우리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대부분 부러움에 섞인 남자들의 시선이었고, 인재는 괜시리 으쓱한 표정을 지으며 오유민의 옆에 살짝 붙어서서 걸었다. 그래도 인재가 싫지는 않은 모양인지, 오유민은 싹싹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다 들어주고 있었다.
“차라리 딱 잘라 말하는게 편할텐데.”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강한별은 살짝 웃으며 내 옆에 붙어서서 걸었다. 후문까지는 걸어서 꽤 걸리는 거리였지만, 이제 다음 수업이 없는 나에게는 걸어갈 수 있을만한 거리였다. 머리속에 복잡하게 들어오는 상념들을 한구석에 치워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일 테니.
저녁을 먹기엔 조금 이르고, 점심을 먹기에는 한참 늦은 시간이었지만,아직까지는 해가 짧은지 주변은 조금씩 어두워질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어제처럼 비가 오고 천둥번개가 치지는 않았지만, 잔뜩 습해진 하늘은 또 언제 비를 뿌릴지 몰랐다.
“선배.”
“어?”
누군가가 불러서 고개를 들었는데, 인재며 강한별, 오유민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문모를 표정을 지으니 강한별이 후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여자분이 방금 선배 이름을 불렀는데요.”
“응?”
강한별의 말에 후문쪽을 살피니, 한 여자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짧지도 길지도 않은 치마, 긴 머리를 예쁘게 묶어 올리고 은은한 화장까지 한 예림이의 모습이었다. 봄이라는게 복장에서부터 물씬 느껴지는 귀여운 옷차림이었다. 아니, 그것을 떠나서 왜 누나가 저기 서있지?
“누구야?”
“우리 누나.”
인재의 말에 대답한 것 뿐인데, 좌중의 표정들이 뭔가 이상했다. 인재는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을 표시했고, 강한별은 ‘오호?’하는 알수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유민은 말이 없긴 했지만 역시나 놀란 표정이었다.
누나는 웃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치마를 입고, 핸드백과 바이올린이 들어있는 하드케이스를 같이 어깨에 걸쳐 메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살짝 불어오면서 앞머리가 일렁거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저렇게..예뻤던가?’
물론 누나는 예뻤다.어릴적에도 귀여웠지만, 공항에서 처음 봤을때는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달라져 있긴 했었다. 하지만 저렇게 예쁘게 꾸미고 바이올린까지 메고 있으니 뭐랄까, 늘 보는 누나의 모습같지가 않았다.
“야.김예영.”
“응?”
“정말 니네 누나야?친누나?”
“어. 맞는데?”
갑작스레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은근하게 속삭이던 인재는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너무나 다정한 표정을 내게 보이며 말했다.
“왜 지금 이야기 했어~저런 귀여운 누님이 있다는거?”
“뭐?”
“잘 부탁한다 처남.”
나는 시덥지 않은 녀석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오유민은 여전히 누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고, 강한별은 나에게 입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이해가 가네요.-
어이 없는 표정을 짓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내가 좋아해서는 안될 존재를 좋아하고, 성적욕망을 느껴서는 안될 존재에게 그것을 느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강한별은, 그 실체를 눈앞에서 보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같은여자가 봐도 인정한다는 건가? 왠지 모르게 기분이 묘했다.
“밥은 다음에 먹을게.니들끼리 먹어.”
“왜 인마. 같이 밥먹자. 니네 누님도.”
누나가 왜 찾아왔는지는 모르지만, 누나까지 껴서 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무엇보다 인재녀석이 누나를 보며 껄떡대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강한별은 곤란해 하는 오유민을 살짝 바라보더니, 이윽고 인재를 보며 말했다.
“저도 일이 생겨서 가봐야 겠네요. 유민이만 밥 사주세요.”
인재는 신나는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아니면 아쉬운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일행들에게 인사를 건낸 나는 누나쪽으로 걸어나갔다. 누나는 싱긋 웃으며 강한별과 오유민, 그리고 인재쪽을 향해 살짝 목례를 하고 있었다.오유민은 강한별을 보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통할리 없었다. 강한별은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대신, 내 귀에도 잘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오유민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강적인데?”
“갑자기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놀러왔지. 동생이 다니는 학교도 구경하고 싶어서.왜? 안돼?”
“아니 안될건 없지만 갑작스러워서.”
나는 누나의 가방을 빼앗듯 낚아 채고는 내 어깨에 걸쳐 메었다.어둑해 지는 시간이었지만 햇빛에 비친듯 밝아 보이는 누나의 표정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국 대학교는 이렇게 생겼구나.”
“별거 없어. 좋은 학교도 아닌걸 뭐.”
“누나랑 오늘 데이트 할래?”
“뭐?”
“영광인줄 알아. 누나가 먼저 신청하는 거니까.”
“참 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그녀를 따라 웃고 있었다.가방을 걸치고 있지 않은 내 왼팔에 팔짱을 끼고 잡아끄는 그녀의 발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나머지 인원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왠일인지 해맑게 웃고 있는 누나의 미소를 보니 뒤를 돌아보고 싶지가 않아졌다. 내 팔을 끌어 안은 부드러운 감촉이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밥 먹으러가자. 이 근처에서 말고.”
“생각해 둔 곳이라도 있어?”
“음...그래도 번화가에 가는게 좋지 않을까?”
나는 귀찮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데이트를 신청해야 하는 것은 나인데, 누나가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누나를 보며 풀려있던 인재의 표정, 그리고 오유민의 표정이 눈에 밟혔다.요 근래들어 왜 내가 주변사람들을 의식하는 일이 많아졌는지는 알수 없었다. 귀여운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는 인재가 예림이에게 꽂힌 것이야 이해가 갔지만, 오유민의 저 표정은 뭘 의미하는 걸까?
아. 그러고보니, 예림이와 오유민은 꽤나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그냥 잠깐 든 내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타고 있는 택시의 차창이 푸른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금세 잠잠해졌다. 이윽고 콰르릉 하는 굉음이 귓가에 들려왔다.
“아휴..날씨 참 장난아니네요.”
택시기사는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나에게 중얼거리듯 말을 하며, 룸미러로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동의를 구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을 신호로 하듯 또 한번의 섬광과 또 한번의 굉음이 공기를 찢어발겼다.
옛 회상속을 더듬어 보니, 작은집으로 가는 이 길이 조금씩 낯익은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파트. 고등학생때에 엄마의 심부름으로 음식같은 것을 전해줄때 종종 들르곤 했었던 그 집의 모습 그대로였다. 고등학생의 모습을 했던 나는 귀찮아 하는 척 하면서도 작은집으로 가는 심부름을 늘 기다리곤 했었고, 우습게도 그때에 난 작은집을 삼촌댁이 아닌 ‘숙모네’라고 불렀다.
굵은 빗방울은 택시가 멈춘 그 동안에도 앞유리를 쉴새 없이 두들겨 대고 있었다.헤드라이트가 밀어낸 어둠위로 그 빗방울의 실체들이 손에잡힐 듯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내 손에 들려진 봉투에서 병과 병이 부딪혀 짤랑 하는 소리를 내었다.
“크..비오니까 소주 한잔 하시려는 모양이네요?”
그는 입맛까지 싹 다셔가면서 내 쪽을 돌아보았다. 정신이 다른곳에 팔려있던 나는 그제서야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고,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택시비를 내밀었다.문을 열고 내리는 내 왼손에는 오유민이 준 작은 우산이 들려져 있었다.
기사 아저씨의 말처럼, 비오는 날을 즐기며 술을 마시는 것에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다만 그러한 보통의 상황들과 비교할 때 운치, 혹은 낭만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왜인지 모르지만 나는 술을 사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그것이 천둥을 무서워 하는 숙모를 진정시켜 주리라 믿고 있었다. 아니, 틀림없이 그래야만 했다.
투두두두
여자들이 쓰는 아주 작고 귀여운 우산. 오유민이 내 손에 쥐어주었던 그 우산위로 굵은 빗방울들이 쏟아져 내렸다. 겨우겨우 마르기 시작했던 내 왼쪽 어깨는 다시금 젖어들기 시작했고, 그 빗속에서 숙모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외관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피씨방을 나와, 전화를 받았을때의 숙모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듣는 사람을 애처롭게 만들정도로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내가 지금 간다고 말을 하자 그녀는 미안해요 라는 말을 수없이 하며 전화를 끊었다.
숙모가 사는 그 집은 몇년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삼촌의 결혼선물로 장만해 주었던 그 집이었다. 아버지와 삼촌역시 나처럼 고아였고, 삼촌에게 있어 우리 아버지는 형이 아닌 ‘아빠’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악인은 돈이라는 시덥잖은 이유 하나만으로 내 부모님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나아가 조화를 부수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는 그 덕분에 혼자 있는 숙모의 집에 오게 된 것이었다.
“저에요.”
벨을 누르고 굳게 닫힌 철문위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그 와중에도 번쩍하는 섬광이 내 얼굴을 일순간 푸른빛으로 물들였다가 사라졌고, 무슨일이 있는게 아닌가 고민을 해야 할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철문이 빼꼼하게 열렸다.
“괜찮아요?”
문이 열리고 보인 숙모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놀라서 그렇게 물었다. 묶어 올린 머리, 그리고 그 밑으로 드러나는 얼굴은 너무나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늘상 보는 외출복이 아닌, 집에 입는 편안한 원피스에 긴팔 니트 가디건을 걸친 숙모의 눈망울은 보기에도 확연히 티가 날만큼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아니에요.”
거실의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거실에 있는 쇼파 위로는 방금 전까지 숙모가 덮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두꺼운 이불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그 안에 숨어, 내가 오기전까지 무서움에 떨었을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때도 그것을 무서워 하는 그녀가, 혼자서 저것들을 이겨내기란 엄청난 고역이었을 것이다.그리고 그 무서움이 나에게 전화를 하게 만들 용기로 바뀐 모양이었다. 그랬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숙모는 내가 집에 찾아간다고 하면 망설일 정도로, 의식적으로 나를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앉아 계세요.”
검은색 원피스 밑으로 내려온 하얀 다리. 그리고 그것만큼이나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서 숙모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주방으로 가서 작은 상을 가져와 사온 술을 올려 놓은 다음, 찬장을 뒤져 뜨거운 커피를 탔다. 술과 커피가 어울릴리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숙모에게는 따뜻한 것을 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이건 그냥 제가 마실게요.”
봉투에서 소주를 꺼내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애써 웃으며 그렇게 말해주었다. 무언가를 무서워할때에 소주를 주면 조금 안정적으로 변할 것 같았는데, 생각해보니 숙모는 술이 약했다. 오유민과 비슷하거나, 아마 그 보다 더 약할 지도 모른다.
콰쾅!
눈치없이 또 한번 천둥소리가 울려퍼졌고, 숙모의 작은 어깨는 비맞은 강아지처럼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화장기 없는 고운 얼굴에 조금씩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늘 맑게 반짝이며 나를 설레게 했던 두 눈은 긴 속눈썹에 덮여 감겨버렸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숙모의 손을 움켜쥐었다.
차가웠다.
비는 내가 맞고 왔는데, 이상하게 내 몸의 체온은 뜨거운 것에 비해 숙모의 손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한 겨울에 내리는 함박눈을 손으로 맞은 것과 같은 그런 차가움 이었다.내 손이 닿자, 그녀는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힘을 주어 잡았다.
“괜찮아요.무서워 하지 않아도 돼요. 곧 천둥이 멈출 거에요.”
누군가를 달래거나, 혹은 따뜻한 말을 하는데에 있어서는 자신이 없는 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숙모의 떨리는 어깨를 보니 그러한 말들이 자연스럽게 내 입을 통해 세어나왔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녀의 눈이 꼭 감겨 있는 것을 본 나는, 몸을 일으켜 쇼파위에 앉아있는 숙모의 옆에 붙어 앉았다. 이불속에서 느껴지는 떨림. 나는 그렇게 한참이나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안쓰러웠다. 그녀가 진정으로 무서워해야 할 것은 천둥이나 번개가 아닌 남편의 삐뚤어진 마음이었다.하지만 여린 그녀가 그것을 제대로 따질수 있을리가 없었다. 외적으로는 그것에 끙끙 앓고, 이렇게 천둥이 치는 날에는 무서움에 떨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동경을 하던 천사가 한 쪽 날개를 잃고 한없이 추락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그런 마음이었다.
게다가 숙모의 그것은 피할수 없는 공포증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높은곳에 가지 않으면 그만이었고,특정 식물이나 동물에 대한 공포증이 있다면 주변환경을 그것들이 서식할 수 없는 환경으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천둥과 번개는 피할수 없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자연재해는 환경을 바꾸거나, 혹은 장소를 옮긴다 해서 회피할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괜히 예영이한테...정말 미안해요.”
“괜찮아요.제가 왔으니까 안심하세요.정말 괜찮아요.”
이번에는 자유롭던 오른손 까지 사용해서 숙모의 양손을 꼭 움켜쥐어 주었다.그녀의 차가운 손은 뜨거운 내 손에 닿아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는 듯했다. 하얗고 예쁜 손. 그리고 화장을 지우고 나도 본연의 청순함은 사라지지 않는 그 하얀 얼굴에, 이번엔 내 가슴이 녹아내렸다.
나는 얼른 상위에서 고소한 향을 풍기는 커피잔을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숙모는 천천히 눈을 떠 나를 바라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마자 숨이 턱하고 막힌 내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가슴이 떨리고 화가 났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혼자 떨게 하고 밖에서 내도는 삼촌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숙모는 천천히 커피잔을 움켜쥐고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집 안이 추워서가 아닌, 공포때문에 느끼고 있던 한기를 조금씩 녹이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본인 나름대로의 안정을 되찾아갈 그 때즈음, 나는 소주병을 돌려 종이컵에 붓고 있었다. 그것이 삼촌에 대한 분노때문인지, 아니면 숙모로 인한 두근거림을 해소 하려는 것을 위함인지는 나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왠지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목이 탔고, 앞에는 술이 있었다.그리고 안정을 찾아가는 숙모에게, 천둥은 또 언제 그녀를 다시 한 번 겁에 질리게 할 지 모를 일이었다.
“여자는, 결혼을 하면...주변에 사람이 많이 없어져요.”
목안 가득 넘어간 술의 쓴맛을 달래고 있을때, 조금씩 떨리고 있는 숙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한 쪽 손을 잔을 들고, 한 쪽 손으로는 내 왼손을 꼭 움켜쥔 채로,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가만히 열었다.
“남편이 전부가 돼요. 친구들도 다 결혼해서 가정이 생기기도 하고, 남편을 따라 본래 살던 곳을 벗어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예영이 밖에 부를 사람이 없었어요.너무나 무서워서요.”
“언제든 불러도 돼요. 무서울때는 언제든지요.”
그녀의 눈이 나를 향했다.파르르 떨리는 어깨의 진동은 멈추지 않고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떨리는 내 가슴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주변에서 나는 커피향과, 내 주변에서 나는 알콜 냄새가 묘하게 섞여 공기중으로 가라앉았다.
“남편이...지금 전부가 될 수 없잖아요.”
내 말에 그녀는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왠일인지 나는 숙모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그냥..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맞다. 내가 제대로 된 사고를 가진 놈이라면, 어른들일에 참견을 하는 것을 무릅쓰고 라도 삼촌의 앞으로 다가가 그것을 말렸어야 했다. 강한별을 불러내 선배로서 타일러야 했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둘이 모텔로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관망하였으며, 오히려 숙모가 삼촌과 멀어지기를 은근히 바라기 까지 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마지막 남은 죄책감이었다.
“나도 한 잔 줄래요?”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때, 숙모는 다른 종이컵을 들고 내게 내밀고 있었다. 또 다시 번개가 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한 나는, 이내 술병을 들어 숙모의 잔을 채워주었다.
“술 못마시잖아요.”
“예영이가 옆에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녀의 미소는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달려와 준 나에대한 고마움으로 억지로 웃던 종전의 그 미소가 아닌, 정말 내가 반했었던 그 천사같은 미소를 지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내 우려와는 달리, 숙모는 눈을 질끈 감기까지 하며 술잔을 비우고는 그것을 상 위로 내려놓았다.
“삼촌이 미워요?”
숙모의 질문이었다.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그런 말이었지만, 나는 짐짓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만을 끄덕였다.내가 다시 채워주는 잔을 조금 들이킨 그녀는, 여전히 이불을 어깨에 걸친채로 조용히 물었다.
“그럼 나는요?”
그녀는 처음으로 내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숙모가 내게 그어놓은 그 미묘한 선을 아주 살짝 넘긴 듯한 그런 질문이었다. 두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고, 작은 어깨의 떨림은 조금 멈추어 있었다. 단 한잔 마셨을 뿐인데 벌써부터 붉어지는 두 볼에 손을 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좋아하죠 당연히.”
대답을 하며, 평범한 표정을 지으려 애를 쓰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무슨 의도로 물어본 것일지는 모르지만 내 대답은 당연히 진심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리고 말도 안되게 삼촌이라는 사람을 질투했을 때부터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내가 훗날 결혼한다면 숙모와 같은 여자와 할 것이라고, 그렇게 수없이 학창시절 내 마음속에서 다짐하고 다짐 했었다.
“그럼 삼촌을 미워하지 말아요.”
그녀의 마지막 말에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황급히 술잔을 잡아 내 목으로 넘겼고, 숙모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숙모를 만난이후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렇게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앗!”
순간적으로 거실로 푸른 빛무리가 일렁거렸다. 겨우 안정을 되찾은 듯한 숙모는 그 빛이 번뜩이자마자 반사적으로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번개가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 천둥이 찾아오기 전까지의 그 짧고도 긴 찰나의 시간. 나는 들고 있던 빈 종이컵을 조그마한 상위로 던져버렸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조건 반사적으로 그렇게 된 행동이었다. 뇌에서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내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이겠지만, 내가 무어라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숙모를 가슴가득 껴안고 있었다.
향기에 숨이 막혔다. 숙모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는, 그녀를 껴안은 나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내 가슴과 숙모의 가슴이 닿은 부분에 누구의 심장박동인지 모를 진동이 미묘하게 느껴지고 있었고, 나는 그대로 그녀의 작은 어깨를 끌어 안아 버렸다. 잠시후 하늘이 일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할 그때에, 나는 팔을 둘러 그녀의 귀를 막아버렸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우리 둘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고,이윽고 그 소리마저 천둥이 덮어 버렸지만, 우리는 그대로 아무런 움직임 없이 있을 뿐이었다. 신기하게도, 천둥의 굉음에도 숙모의 어깨는 더이상 떨리지 않고 있었다.
“괜찮아요. 무서워 하지 마세요.”
내 말의 톤이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아챈 것일까? 숙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숙모는 내 품에서 안정을 찾고 있음은 물론이고 내 허리 부분을 살며시 끌어 안았다는 점이었다. 너무 큰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알아채지 못할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행동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용해졌다. 하늘을 찢을 듯이 울려 퍼지던 천둥 소리도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만 남긴채 사라져 버렸다. TV조차 켜져 있지 않은 거실에는 빗소리와 우리둘의 호흡소리만 남았다. 급하게 술을 마셔서 조금은 깊어진 호흡소리 두 개가 창밖의 빗방울 소리와 맞물려서 연차적으로 들려왔다.
“예영이가 있어서 다행이에요.정말 고마워요.”
그 숨막히는 어색함이 싫었던 건지, 숙모는 그렇게 내게 중얼거렸다. 어깨를 감싸쥐었던 내 손은 어느덧 그녀의 가는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따뜻한 느낌이 들었고, 내 가슴에 닿는 그녀의 가슴감촉이 나를 설레게 했다.
“자..잠깐만 물좀 마실게요.”
그녀는 내게 안겨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 나를 밀어내며 쇼파에서 일어섰다. 무엇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숙모의 얼굴은 발그레 해져 있었고,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를 쓰며 눈 앞에 있는 잔에 술을 따라 목으로 넘겼다.
숙모는 천천히 주방으로 걸어갔다. 아직도 천둥에 대한 공포증이 남아 있음에 분명한, 그런 떨리는 걸음걸이였다. 애초에 물을 마실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데도, 그녀는 굳이 주전자에 있는 물을 컵에 따라 입술을 축였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녀를 따라 벌떡 일어나고야 말았다. 더이상 천둥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데도 여전히 조금씩 떨리는 어깨가 안쓰러워서였을까? 내가 한 행동이지만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아예 내 쪽으로 올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꾸만 심호흡을 하는 숙모의 모습에 자극을 받아서 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내가 공격할 수 있는 기회는 한 번 뿐이라는 것을 잊어버려서 일지도 모르겠다. 뭔진 모르지만, 나는 주방의 식탁위에 팔을 올리고 서 있는 숙모를 뒤에서 끌어 안았다.
멈칫했다. 숙모의 몸도, 순간적인 시간과 공기의 흐름도 그렇게 잠시 일시정지를 한것 처럼 멈춰섰다. 가느다란 그녀의 허리를 끌어 안은 내 코위로 그녀의 머리결이 스치며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왔다. 향긋한 샴푸 냄새. 하얀 목.그리고 내 팔에 느껴지는 가느다란 허리의 감촉.
그녀, 손미현은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많이 놀란듯 움찔했고, 반사적으로 허리를 감싸안은 내 손을 잡았지만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나보다 약간 키가 작은 숙모의 어깨에 내 턱을 걸쳤고, 그녀의 숨소리는 귀에 닿을듯 더욱 크게 들려왔다.
아마도, 나처럼 숙모도 왜 그랬는지 이유를 모를 것이었다. 내가 어째서 이렇게 과감한 짓을 한건지, 그리고 숙모는 왜 그런 나를 자르지 못했는지 서로 궁금해 하고 있을 터였다. 아무튼 나는 그녀를 안아야 겠다고 생각했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욕망에 이끌리는 대로 안았을 뿐이었다.
허리를 감싸 안으니, 그녀의 가슴을 내 팔로 받치고 있는 형상이 되어 버렸다.내가 팔을 움직일수록 원피스의 천은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숙모가 뭐라고 말을 하려던 그때에, 조금 앞으로 나아가 그녀와 몸을 밀착시킨 내 행동 덕분에 내 볼과 숙모의 볼이 맞닿았다.
참을수 없었다.진작에 가라앉았던 흥분이 다시금 찾아 온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비오는 날 술을 마신 것에 대한 영향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그녀의 엉덩이와 밀착한 아랫도리는 빳빳하게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숙모는 내 몸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부르르 떨었고, 나는 그것이 긍정의 뜻이라고 멋대로 해석하며 양 손을 각각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
고개를 숙인 숙모의 머리칼이 살짝 내려와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오른손이 그녀의 가슴위로 얹어졌다. 뭉클한 감촉이 들어오니 내 호흡소리도 자연히 커졌다. 눈으로 옷위를 훑어 봤던 것보다 조금 큰 것같은 존재감이었다. 왼손은 살며시 원피스의 천을 끌어 당겼고, 덕분에 드러난 허벅지 속으로 내 왼손은 거침없이 파고 들어갔다.
멈출수 없었다. 그 행위를 시작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멈추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특히나 손등으로 팬티의 천 감촉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허벅지의 느낌은 손을 뗼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렇게, 숙모의 가슴부분과 허벅지 부분은 내 양손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고,그녀는 마침내 깊은 숨결을 뿌리며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자신의 몸을 지탱했다.
천둥은 멈췄지만, 내 가슴속에서는 아까보다 더 큰 천둥이 치고 있었다. 아마도 내 눈빛은 정상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한번 시작한 미친짓은 제정신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제어할 수 없는 고삐풀린 망아지나 다름없었다.가슴과 허벅지를 주무르는 내 손엔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고, 마침내 숙모의 입에서는 귓가에 크게 들릴 정도의 한숨이 세어나왔다.
나는 그대로 테이블 쪽으로 숙모를 몰아 세웠다. 빳빳하게 일어선 내 지퍼의 앞섬이 숙모의 엉덩이 골 사이를 지긋이 누르고 있었다. 은근하게 움직일 때마다 숙모의 다리는 조금씩 떨리는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망설일 것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허벅지와 가슴을 만졌고, 이제는 머리속에 끝없이 펼쳐질 그것을 실행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짤그랑.
나란히 놓여있던 컵과 컵이, 식탁이 흔들리는 통에 서로 부딪혀 청명한 유리의 소리를 내었다.각각 다른 부분들을 더듬던 내 손은 그녀의 어깨를 잡아 숙모의 몸을 돌렸고, 순식간에 우리는 마주보는 형상이 되었다. 비록,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는 못했지만.
숙모는 갈곳이 없었다. 식탁이 뒤에 떡 하니 버티고 있으니, 그것에 몸을 기댈수 밖에 없었다. 내 손은 그녀의 원피스 밑부분을 잡아 위로 끄집어 올리고 있었다.하얀 허벅지와 남색 팬티가 보인 것, 그것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손은 숙모의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었고, 입술은 그대로 목적지를 향해 돌진했다.
“웁!”
숙모는 놀라서 헛숨을 집어 삼켰다. 술냄새와 향기가 섞여 코 안에 가득차는 듯했다.약간은 말라있는 그녀의 입술을 내 것으로 덮었다. 달콤한 사탕을 베어 문것같은 환상이 들어왔다.
“흡..흡..”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내 입안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울리고 있는 것이었다.내 손은 거침없이 엉덩이 선을 타고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 들었고, 조금은 뜨겁게 느껴지는 팬티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그 부분을 더듬는 다는 생각에 아득한 흥분이 머리위를 가득 메울 그때, 내 몸은 자석의 같은 극이 닿은 것처럼 뒤로 확 밀려나 버렸다.
“그..그만..그만..그만해요.”
순간적으로 나를 밀쳐낸 숙모는 고개를 숙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이미 내 손에 의해 잔뜩 일그러진 옷가지들을 양 손으로 가리며, 그녀는 식탁에 기댄채 스르르 무너지듯 주저 앉았다.
“하아..하아..”
내 호흡역시 가빠져 있었지만, 나는 계속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당혹스런 표정의 숙모의 두 눈이 나를 향하자, 전기에 감전된 것 처럼 찌리릿 느낌이 왔다. 그것은 확실한 스탑버튼 이자 브레이크였다. 달리던 차의 핸드 브레이크를 올린 것처럼, 내 귓가에 끼이익 하는 타이어의 마찰음과 함께 욕망에 가득찼던 마음이 빙글 돌아 힘겹게 멈춰섰다.
“미안해요. 하지만..이러면 안되요..지금은 이러면 안되요.”
숙모의 가녀린 어깨가 다시금 떨려왔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내 머리속에는 후회가 아닌 아쉬움의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맞다. 그녀는 수비하는 투수였다. 그리고 나는 욕망의 베트를 들고 타석에 서있는 타자였다. 나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주어졌고, 타자에 비해 약자의 입장을 하고 있는 투수인 그녀는 네 번의 기회를 갖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포볼을 던지지 않고 나를 밀쳐내 아웃시켜 버린 것이었다.
“번개가 멈췄어요. 돌아가 볼게요.”
“미안해요.나는 정말...”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미안해 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나였다.하지만 숙모는 아직도 벌게진 두 볼을 감싸쥐고는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나로 인해 조금이나마 흥분을 했던 것이 수치심으로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내 입술에는 그녀의 입술과 닿았던 감촉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돌아가기 힘들었다. 다시 한번 입을 맞춰! 라는 명령이 쉴새없이 뇌에서 떨어지고 있었다.헝클어진 옷가지를 하고 주저 앉은 손미현이라는 여자의 모습은 그 정도로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조카인 나를 상대로, 혼란에 빠져있는 그 모습 그대로. 그 순간만큼은 숙모가 아닌 손미현 이라는 여자였다.
“들어가 볼게요. 미안해요.”
결국 나는 도망치듯 ‘타석’을 빠져나와 버렸다. 여전히 그 곳에 주저 앉아 나를 보는 숙모의 시선이 뒤통수에 따갑게 느껴지는 듯했지만, 나는 후다닥 철문을 열어 밖으로 뛰쳐나왔다. 패배감. 그것은 패배감이었다. 한심하게 생각하던 삼촌에게만, 손미현이라는 천사를 만질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다. 정작 그 사람은 그 자격을 시시껄렁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내 열등감에 더더욱 불을 지피는 그런 행위였다.
오유민이 준 우산을 손에 쥐고 비를 맞고 걸었다.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에 닿는 감촉을 느끼며 나는 빠른 속도로 그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버렸다. 숙모는 내가 가는 것을 보고 있을까?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다음 타석을 기약해야만 하는 것이었다.많은 공을 던진 투수가, 너무나 정직한 정가운데 직구를 내게 던져줄때 까지, 나는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귀찮은 시간’은 일주일을 순회하여 다시 나를 찾아왔다.
강의실을 가득메운 1학년생들. 그 와중에 나같이 게을렀던 신입생의 경력을 갖고 있는 2학년들이 종종 눈에 띄였다. 학기가 끝날때까지 결혼과 가족의 수업은 정해진 파트너와 같이 앉아야 했기에, 오늘도 내 옆에는 오유민이 앉아 있었다. 연신 내 얼굴 표정을 살피는 그녀의 손에는 과제로 제출할 청첩장이 쥐어져 있었다.
“무슨일 있어요?”
“응?아니..”
숙모와의 일을 생각하며 멍해져 있던 나를 보며 오유민이 물어왔다. 여전히 상큼하고 발랄한 옷차림을 하고서, 짧은 머리결을 살짝 귀 뒤로 넘긴 그녀는 호기심과 걱정이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과제 혼자 다하게 해서.”
“괜찮아요.”
“그거 나 좀 봐도 돼?”
예의상, 관심이라도 보여야 할 것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이 아이는 왠일인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손에 쥔 청첩장을 내밀고 있었다. 초대하는 글,임의로 정한 예식장의 약도 따위가 그려져 있는 내용물 안에는, ‘신랑 김예영 신부 오유민’이라는 글자들이 유독 눈에 띄게 굵은 글씨로 프린트 되어 있었다. 재질 역시 건성으로 만든 A4용지가 아닌, 실제 청첩장 처럼 빳빳한 종이의 느낌이 들어왔다.
“괜찮죠?”
“아..응. 잘만들었네.”
이번 대답은 건성이 아닌 진심이었다.그녀는 매우 꼼꼼하게 신경을 쓴 듯했다.수업이 끝나갈 때쯔음 교수는 과제를 제출하라고 말을 했고, 우리는 청첩장을 앞으로 전달을 했다.
“그럼 오늘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부부에게 있어서 서로의 역할, 즉 롤에 대해 바꾸어 생각하는 시간을 갖을 거에요. 모두 다음 강의시간에 봅시다.”
교수는 언제나처럼 의욕에 가득찬 멘트를 날리고는 총총히 사라졌고, 나는 그대로 책상위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저마다 청첩장을 만들며 자신의 파트너와 친해졌는지, 대다수의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도 각자의 파트너와 대화를 하기에 바빴다. 걔중에는 내 쪽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남학생들도 몇몇 눈에 들어왔고, 어김없이 그들의 파트너는 정말이지 눈뜨고 보기 힘든 외모의 여학생들 뿐이었다.
“굉장한 우연이군요.”
음? 낯익은 대사, 그리고 낯익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강한별이 나와 오유민을 보며 서있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과 짙은 화장, 그리고 내가 방에서 맡았던 그 향수의 향을 풍기면서.
“유민이랑 예영선배가 부부인가요?”
“응.너는 누구야?”
내 대답을 가로채고 오유민이 묻자, 강한별은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손가락으로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그 곳에는 뭐가 불만인지 툴툴 거리며 가방을 챙기는 한 남학생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저번 시간 결석한 파트너 강한별을 대신해 모든 작업을 혼자 한 것만 같은, 그런 억울한 표정이었다.
“흐음..잘 어울리는데요?”
“무슨뜻이야?”
“실제 부부라고 해도 믿겠네요.”
강한별은 여유있는 표정으로 우리를 보며 말했다. 내가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겠지.아니, 설사 내가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해도 크게 놀라지 않을 아이였다. 강한별은 내가 여태까지 본 20살 여자애들 중에서 가장 여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테니까.
“뭐야. 농담하지마.”
오유민이 살짝 웃으며 말을 하자, 강한별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나를 보며 웃었다.내가 뭐라고 하려는 찰나, 그녀는 들릴듯 말듯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실제 부부처럼 같이 살아봐도 재밌을텐데..”
“야 너..”
오유민은 듣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분명히 들었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 했던 그때,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가방을 챙기느라 강한별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오유민의 전공서적 사이에, 종이 하나가 살짝 삐져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까 우리가 제출했던 청첩장의 종이와 똑같은 제질의 것이었다.
“어이! 오랜만!”
어째서...청첩장을 또 한장 만들어 책 속에 껴놓은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오유민을 바라보던 그때, 또 한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셋의 고개가 일제히 출입구 쪽으로 향했고, 그 곳에는 한껏 멋을 낸 인재가 우릴 보며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유민과 강한별은 살짝 목례를 했고, 싱글 거리며 웃던 인재는 나와 오유민이 같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살짝 배신감 어린 표정을 내게 보내보였다.휴..앞으로 땍땍거리며 날 귀찮게 할 녀석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해져, 피곤함 어린 한숨이 세어나왔다.
“여..김예영이..결혼과 가족 F맞고 신입생들이랑 같이 미래설계하는구나?”
“그렇게 됐어.”
“이 수업 여전히 가상 커플로 지정해 두고 같이 앉아서 수업듣게 하...”
인재의 말이 갑자기 뚝 하고 멈췄다. 그제서야 나와 오유민이 같이 앉아있는 것이 우리 둘이 가상 커플로 지정된 것을 의미함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녀석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움직였고, 영문을 모르는 오유민은 옆에서 쿡쿡 거리며 웃는 강한별을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흠흠! 뭐 일단 다들 배들 안고파? 내가 쏠게 밥먹으러 가자.”
‘다들’이라고 말은 했지만 인재의 시선은 오유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반대로 오유민은 반사적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이상하게도 나는 강한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지 뭐.”
내가 원래 이렇듯 주도권을 잡고 있는 사람이었나? 건성으로 대답한 내 말에 강한별과 오유민 역시 암묵적인 동의를 보내주고 있었다. 인재는 만족한 듯 씨익 웃었고, 그녀들이 강의실을 빠져나가자 그는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은 나중에 묻겠다.”
“내가 원해서 조가 된건 아냐.”
“아오! 나도 이럴줄 알았으면 F맞는건데!”
역시나 여자는 밝히지만 취향하나는 확실한 녀석이었다. 더불어 한번 찍은 사냥감은 왠만해선 놓지 않는 쓰잘대기 없는 근성의 소유자 이기도 했다. 뭐 여하튼, 나야 밥을 사준다니 따라가는 수밖에 없겠지만.
졸지에 나와 인재, 그리고 강한별과 오유민이 같이 이동하는 그룹이 생겨나 버렸다. 인재는 여지없이 이동하는 와중에도 오유민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잠시 보류해 두었던 숙모와의 일에 대한 생각을 다시 끄집어 내며 발길을 재촉했다. 강한별은 그런 나를 관찰하듯 내 뒤를 말없이 따를 뿐이었다.
당연히 카페테리아 겠지. 그리고 내가 숙모를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하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인재는 후문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사주겠다며 우릴 이끌었다. 아쉬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지만, 여지 없이 카페테리아를 지날 때에 그 쪽에 시선을 두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지나가는 학생들은 우리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대부분 부러움에 섞인 남자들의 시선이었고, 인재는 괜시리 으쓱한 표정을 지으며 오유민의 옆에 살짝 붙어서서 걸었다. 그래도 인재가 싫지는 않은 모양인지, 오유민은 싹싹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다 들어주고 있었다.
“차라리 딱 잘라 말하는게 편할텐데.”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강한별은 살짝 웃으며 내 옆에 붙어서서 걸었다. 후문까지는 걸어서 꽤 걸리는 거리였지만, 이제 다음 수업이 없는 나에게는 걸어갈 수 있을만한 거리였다. 머리속에 복잡하게 들어오는 상념들을 한구석에 치워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일 테니.
저녁을 먹기엔 조금 이르고, 점심을 먹기에는 한참 늦은 시간이었지만,아직까지는 해가 짧은지 주변은 조금씩 어두워질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어제처럼 비가 오고 천둥번개가 치지는 않았지만, 잔뜩 습해진 하늘은 또 언제 비를 뿌릴지 몰랐다.
“선배.”
“어?”
누군가가 불러서 고개를 들었는데, 인재며 강한별, 오유민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문모를 표정을 지으니 강한별이 후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여자분이 방금 선배 이름을 불렀는데요.”
“응?”
강한별의 말에 후문쪽을 살피니, 한 여자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짧지도 길지도 않은 치마, 긴 머리를 예쁘게 묶어 올리고 은은한 화장까지 한 예림이의 모습이었다. 봄이라는게 복장에서부터 물씬 느껴지는 귀여운 옷차림이었다. 아니, 그것을 떠나서 왜 누나가 저기 서있지?
“누구야?”
“우리 누나.”
인재의 말에 대답한 것 뿐인데, 좌중의 표정들이 뭔가 이상했다. 인재는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을 표시했고, 강한별은 ‘오호?’하는 알수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유민은 말이 없긴 했지만 역시나 놀란 표정이었다.
누나는 웃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치마를 입고, 핸드백과 바이올린이 들어있는 하드케이스를 같이 어깨에 걸쳐 메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살짝 불어오면서 앞머리가 일렁거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저렇게..예뻤던가?’
물론 누나는 예뻤다.어릴적에도 귀여웠지만, 공항에서 처음 봤을때는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달라져 있긴 했었다. 하지만 저렇게 예쁘게 꾸미고 바이올린까지 메고 있으니 뭐랄까, 늘 보는 누나의 모습같지가 않았다.
“야.김예영.”
“응?”
“정말 니네 누나야?친누나?”
“어. 맞는데?”
갑작스레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은근하게 속삭이던 인재는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너무나 다정한 표정을 내게 보이며 말했다.
“왜 지금 이야기 했어~저런 귀여운 누님이 있다는거?”
“뭐?”
“잘 부탁한다 처남.”
나는 시덥지 않은 녀석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오유민은 여전히 누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고, 강한별은 나에게 입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이해가 가네요.-
어이 없는 표정을 짓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내가 좋아해서는 안될 존재를 좋아하고, 성적욕망을 느껴서는 안될 존재에게 그것을 느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강한별은, 그 실체를 눈앞에서 보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같은여자가 봐도 인정한다는 건가? 왠지 모르게 기분이 묘했다.
“밥은 다음에 먹을게.니들끼리 먹어.”
“왜 인마. 같이 밥먹자. 니네 누님도.”
누나가 왜 찾아왔는지는 모르지만, 누나까지 껴서 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무엇보다 인재녀석이 누나를 보며 껄떡대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강한별은 곤란해 하는 오유민을 살짝 바라보더니, 이윽고 인재를 보며 말했다.
“저도 일이 생겨서 가봐야 겠네요. 유민이만 밥 사주세요.”
인재는 신나는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아니면 아쉬운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일행들에게 인사를 건낸 나는 누나쪽으로 걸어나갔다. 누나는 싱긋 웃으며 강한별과 오유민, 그리고 인재쪽을 향해 살짝 목례를 하고 있었다.오유민은 강한별을 보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통할리 없었다. 강한별은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대신, 내 귀에도 잘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오유민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강적인데?”
“갑자기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놀러왔지. 동생이 다니는 학교도 구경하고 싶어서.왜? 안돼?”
“아니 안될건 없지만 갑작스러워서.”
나는 누나의 가방을 빼앗듯 낚아 채고는 내 어깨에 걸쳐 메었다.어둑해 지는 시간이었지만 햇빛에 비친듯 밝아 보이는 누나의 표정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국 대학교는 이렇게 생겼구나.”
“별거 없어. 좋은 학교도 아닌걸 뭐.”
“누나랑 오늘 데이트 할래?”
“뭐?”
“영광인줄 알아. 누나가 먼저 신청하는 거니까.”
“참 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그녀를 따라 웃고 있었다.가방을 걸치고 있지 않은 내 왼팔에 팔짱을 끼고 잡아끄는 그녀의 발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나머지 인원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왠일인지 해맑게 웃고 있는 누나의 미소를 보니 뒤를 돌아보고 싶지가 않아졌다. 내 팔을 끌어 안은 부드러운 감촉이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밥 먹으러가자. 이 근처에서 말고.”
“생각해 둔 곳이라도 있어?”
“음...그래도 번화가에 가는게 좋지 않을까?”
나는 귀찮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데이트를 신청해야 하는 것은 나인데, 누나가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누나를 보며 풀려있던 인재의 표정, 그리고 오유민의 표정이 눈에 밟혔다.요 근래들어 왜 내가 주변사람들을 의식하는 일이 많아졌는지는 알수 없었다. 귀여운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는 인재가 예림이에게 꽂힌 것이야 이해가 갔지만, 오유민의 저 표정은 뭘 의미하는 걸까?
아. 그러고보니, 예림이와 오유민은 꽤나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그냥 잠깐 든 내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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