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멋진날 1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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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
완전한 봄. 누나와 길거리를 걸으며 느낀 것은 이 네 글자로 요약가능했다. 저녁이 되어도 쌀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직도 고집스럽게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는 내 등에는 살짝 땀이 나는 듯했다.하지만 두꺼운 옷을 걸쳤어도 내 팔에 느껴지는 감촉은 맨살에 닿은 것마냥 너무나 분명한 느낌의 것이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누나의 태도는 전과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남들이 봤을때는 조금의 위화감도 느낄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내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역시나 왜인지 모르지만 표정역시 밝고 싱그러웠다. 커다란 두 눈에는 알 수 없는 기대감이나 설레임 같은 것들이 가득 차 있는 듯했다. 하얀 목과 함께 보이는 옆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뒤따를 뿐이었다.
신이난 듯 지하철을 타고 번화가로 나가는 내내 누나의 표정은 그렇게 설레여 보였고 밝아보였다. 지금 이 순간 샤워를 가장한 훔쳐보기와 자위행위에 관한 생각에 민망함을 느끼는 것은 나 뿐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민망하거나 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것을 덮으려 애쓰기위해서 일부로 저러는 것일까? 누군가의 속마음은 당사자만 아는 것이었다.
“너 영화 본지 오래됐지?”
“응?”
“영화 말이야. 너 여자친구도 없잖아.”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놀리듯이 말을 하면서 쿡쿡 거리며 웃는다. 동그란 눈이 초승달 처럼 변하는 것은 상당히 귀여웠지만, 나는 짐짓 퉁명스럽게 되받아쳐 보였다.
“자기도 남자친구 없는 주제에.”
“에? 나는 귀국한지 얼마 안되었거든요? 댁은 여기서 쭈욱 살지 않았나요?”
“그래서 미국에서 남자친구 있었어?”
“당연히 있었지.”
당당하다는 듯이 말하는 누나의 말에, 나는 하마터면 ‘첫경험의 그 오빠?’라고 물을 뻔했다.다행히도 나는 그렇게 까지 멍청한 인간은 아닌 모양인지 잠시 멈칫하는 것에서 끝이났고, 그런 내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예림이가 내게 물었다.
“아까 그 아이들은 누구야?여자애들 되게 이쁘던데.”
“봐. 내가 이정도야. 그런 애들을 두 명이나 데리고 다니잖아.”
“오호?그럼 걔들 중에 하나는 니 여자친구인거야?”
“뭐 그건 아니지만.”
이번에도 역시 한 명과는 같이 잤어 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꺼낼 뻔하다가 겨우 참아내었다. 역시나 힘들다. Fetish king과 김예영을 동시에, 하지만 다른 인물로 완벽히 연기하는 것은 역시나 고난이도 였다. 나도 모르게 대화의 수위가 높은, 화상채팅에서의 김예영으로 은연중에 변신을 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나마 활발하게 활동하는 몇 개체의 뇌세포가 내게 스탑 명령을 내렸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에이. 그럼 뭐 뻔하지. 너희들에게 밥 사달라고 붙는 애들 맞지?”
“음...완전히 틀린말은 아닌데. 정답은 아냐.”
내 말에 곰곰히 생각에 잠긴듯한 그 표정이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깜찍해 보였다. 오늘따라 신경을 쓴 화장과, 지하철 안의 싸구려 조명에 반짝이는 입술이 그녀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싶게 만드는 충동을 자아내었다.
“근데 왜 갑자기 영화야?”
“그냥. 영화가 너무 보고싶어졌어.”
“장르는?”
“음. 봄이니까 역시...”
“액션이지.”
“아니 멜로야.”
“아쉽군.”
내 말에 누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듣기만 해도 졸음이 오는 멜로라는 장르를 나는 너무나 싫어했다. 뻔하고 졸렸다. 누나는 그런 내게 애정결핍이라며 말도 안되는 말을 갖다 붙였지만, 역시나 싫은 것은 싫은 것이었다. 감정이 메마른 것인지, 멜로라는 영화장르는 그저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연애사를 들여다보는 듯한 너무나 지루한 것이었다.영화에 몰입, 혹은 등장인물에의 대입이 안되는 것이었다.
“오늘은 내가 데이트 신청했으니까 양보해.”
“좋아. 대신 중간중간에 깨워줘.”
“숙녀랑 데이트를 하는데 그런건 비매너야.”
남매간에 무슨 숙녀는...이라고 쏘아 붙이려 했는데, 너무나 진지해 보이는 누나의 표정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느낌이 이상했다. 정말이지 타인 대 타인으로 만나 데이트를 하는, 그러니까 처음 시작하는 남과 여의 느낌이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나의 밝은 표정, 여전히 내 팔을 잡고는 지하철의 진동으로부터 몸을 지탱하는 행동 등등을 대입해 보니, 약간은 억지 스럽지만 뭔가 이상야릇한 하나의 그림이 나오는 듯했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을 잡고 있는 남녀, 팔짱을 끼고 있는 남녀, 어깨 동무를 하고 있는 남녀... 그런 무수한 평범한 커플들 사이에서, 꼭 붙어 있는 나와 예림이의 모습은 단 1퍼센트의 위화감 없이 절묘하게 섞여 있었다. 붉은 옷을 입은 응원단 속의 푸른색 옷이 아닌, 그냥 그들과 똑같은 붉은 옷을 입은 나와 예림이의 모습이 그 속에 있었다.
“뭐해?”
“응?”
“여기서 내려야지.”
“아...응.”
그러고보니 행선지도 말해주지 않았는데, 누나가 정한 곳은 우리 학교에서 부터 지하철로 두 세 정거장 떨어진 어느 번화가였다. 가로수에 주렁주렁 매달려 식상한 겨울 풍경을 자아내던 수없이 많은 전구들이 이미 철수한지 오래된 상태의 거리. 겨울과는 조금 다른 활력이 가득했다. 딱딱한 거리가 조금은 녹아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어..?’
보드라운 감촉이 손에 닿았다. 이번에는 정말 아주 심하게 멈칫 할 뻔했지만 역시나 자연스레 넘어갔다. 손안에 잡히는 부드러운 손등의 감촉을 엄지손가락으로 비벼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지하도를 통해 올라오자마자, 그녀는 이번에 내 손을 잡고 이끈 것이었다.
보통 남매끼리 손을 잡던가? 친하면 그럴수도 있지. 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잖아?
혼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을 질의응답을 반복하고 있었다.그러한 생각들을 해야 할 정도로 예림이의 행동은 내게 있어서 과감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손..손이라. 내가 언제 누나의 손을 잡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주 확실하게 각인된, 10년만에 공항에서 만나 리무진 안에서 살짝 잡았던 것. 그것을 빼고 말이다.
고왔다. 반 보 정도 그녀의 뒤에서 걸으며, 묶어 올린 머리에서 내려오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던 나는 용기를 내어 깍지를 껴 보았다. 뭔가에 정신이 팔린건지 누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그 부드러움의 실체를 맘껏 만끽할 수 있었다. 악기를 해서 손이 상한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지만 그것은 쓸대없는 불평임에 틀림없었다. 누나의 손은 고왔고, 또 부드러웠으며, 이제는 다 녹아버린 눈 처럼 하얗고 깨끗했다.
“잉? 없다! 없어.”
“뭐가?”
예림이만 바라보며 걷던 나는 문득 멈춰서서 울상을 지으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 뒤늦게 응답했다. 덕분에 약간은 어설픈 억양으로 되묻는 꼴이 되었지만.
“로맨스 영화가 없잖아. 로맨틱 코메디 영화도 없고.”
어떻게 영화관이 있는 곳을 알았는지 그녀가 멈춰선 곳은 영화관의 정문앞이었고, 상영작들과 시간표가 빽빽히 붙어 있는 포스터를 보며 그녀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괴수 영화, SF영화, 범죄 스릴러 한 편,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액션영화가 하나 있었지만 유독 예림이가 보고 싶어하던 로맨스 영화는 없었다.
“아이씨..그럼 뭐 보지?”
“이거 이거.”
열심히 액션영화의 포스터를 가리켰지만, 긴 속눈썹으로 덮힌 예림이의 큰 눈은 웃통을 훌렁까고 표효를 하는 남자 주인공이 서있는 그 포스터 쪽으로는 향해 가지도 않았다. 무안해진 내가 쩝 하고 입맛을 다실 때 즈음엔, 예림이는 꼼꼼히 작품들의 상영시간을 체크 하고 있었다.
“그럼 이거 보자.”
“그게 뭐야?”
“범죄 스릴러 영화.”
“음..로맨스 영화의 대안 치고는 좀 이미지가 안맞는데.”
“이 영화가 유일하게 지금 시간대에 있어.”
누가 범인인지 알아 맞춰야 할 것만 같은 고뇌섞인 표정의 등장인물들이 가득한 포스터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장르가 뭔지 척 하고 나올 정도였다. 로맨스보다는 낫겠지 하는 마음에 나는 별다른 반대를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그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는지 밝은 표정으로 나를 매표소까지 끌고 들어갔다.
“이 영화 지금 시간대에 몇자리 있나요?”
평범하게 생긴 매표소 여직원은 예림이와 내 쪽을 힐끗 하고 바라보더니, 이윽고 자판을 두드리며 검색을 하는 듯했다.
“자리는 많이 있네요. 뒷자리로 드릴까요?”
“네.”
내가 낸다고 했는데도, 누나는 그것을 말리며 얼른 지갑에서 돈을 꺼내 지불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나를 올려다보며, 과외비를 선불로 받아서 꽤 지갑이 두둑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랑스러운 듯이 이야기 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피식하고 웃을 그때쯤, 직원은 우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커플석으로 드릴까요?”
영화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병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그 속에 벌어지는 의료비리와 그것을 감추려는 의사, 그리고 비리를 파해치려는 수사관과 용의자들의 두뇌게임을 그린 영화였다. 미국 영화라서 나는 열심히 자막을 읽는데에 시간을 보냈고, 반대로 자막 없이도 대다수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누나는 연신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엄청나게 몰입하는 모습이었다.
내 어깨에는 누나의 어깨가 닿아 있었다. 간혹 편하게 내 쪽에 기대기도 했고, 순간순간 놀라는 장면이나 반전이 나올때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듯 내 손을 꽉 움켜쥐기도 했다.
커플석이라는 것은 이름만 다를 뿐 별것 없었다. 일반좌석과 가운데 팔걸이의 유무 하나로 손쉽게 구별이 가능했다. 피씨방에서도 가운데 팔걸이가 없는 커플석이라는 곳을 오유민과 앉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러고보니, 누나에게서도 오유민과 비슷한 그 과일향기 같은것이 나는 것 같았다.
외관상 팔걸이 하나가 없는 것 뿐이지만, 나와 누나의 거리는 엄청나게 가까워져 있었다. 그 작은 플라스틱 막대기 하나가, 개개인의 공간을 보장하고 타인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완벽한 철책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와 예림이는 철책이 없는 그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더불어,그녀와 내 마음속에 있는 철책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게 눈에 보였다. 물론 그것이 ‘남매관계’라는, 철옹성과 같은 철벽수비를 자랑하는 철책이긴 하지만 그것은 조금씩 균열이가고, 조금씩 붕괴되고 있었다. 거북이가 달리는 것마냥 너무나 느린 속도지만 눈에 보일듯 확연한 차이였다. 그리고 분명, 저렇게 모르는 척을 하고 있지만 예림이 역시 그 변화를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우와아..”
조용히 탄성을 지르는 예림이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여전히 그녀는 나와 어깨를 꼭 붙이고 앉아 있었고, 여전히 조금씩 땀이나는 내 손을 붙들고 있었으며, 여전히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조그마한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들었을때는 어둑했던 영화관이 밝아지며, 스크린에는 앤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반전이 진짜 엄청나.그치?”
사실 후반부서부터 생각에 잠겨있던 탓에 그 ‘반전’이 뭔지는 몰랐지만, 숙녀의 앞에서- 그것도 먼저 데이트를 신청한- 실례를 범하고 싶지 않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내가 모르는 그 결말이 충격적이었는지, 사람들이 대다수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예림이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부드러운 입술을 만지작 거리며 감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등장 인물중 하나가 범인이겠고, 뭐 정의가 승리했겠지..하는 간단한 결론을 내려버린 나는 슬쩍 예림이 쪽을 바라보았다. 치마 위 무릎에 얹어 놓았던 자신의 가방, 그리고 내가 들고 있던 바이올린 케이스의 어깨끈을 살짝 움켜쥐며,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속을 알수 없는 애들이 항상 실마리를 쥐고 있는 거라니까.”
누가봐도 일반적이고 누가봐도 위화감 없어 보이는 그 데이트는 계속되었다. 스파게티가 먹고 싶다는 말에 역시나 내가 딱히 반대를 하지 않은 덕분에 조금 늦어버린 저녁식사는 스파게티 집에서 이루어졌다. 내가 맥주를 주문하는 것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마치 다람쥐를 보는 것처럼 깜찍했다.
“너 술 잘마셔?”
해물 스파게티를 하나 시키고는 열심히 잔에 맥주를 붓는 나를 보며 누나가 물어왔다. 뭔가 호기심, 그리고 배신감 같은 것이 섞인 묘한 눈빛이었다. 아이보리색 브라우스 위로 붉은 입술이 반짝반짝 거렸다. 어렸을때 누나를 괴롭히던 만수를 흠씬 두들겨 패주던, 그때의 남동생 김예영의 모습이 순간 떠오른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추억을 산산히 부숴주기 위해서 컵에 있는 맥주를 시원하게 원샷했다.
“한국 대학생들은 다 잘마셔. 못마시던 애들도 잘 마셔 지게 돼.”
“흠..그래?”
“누나는?”
“나는 별로..안마셔 봤는데.”
“미국 대학생들은 술 안마셔?”
“마시는 애들도 있지만...다 마시지는 않아.”
“뭐야. 그럼 개강파티때도 안마셔?”
“개강파티가 뭐야?”
“말 그대로 개강하면서 하는 파티.”
“파티야 많이 하지. 하지만 대학교 다니면서 다같이 술을 꼭 마시거나 하지는 않는데. 학교근처에 술집도 없는걸.”
나는 엄청난 문화충격에 입을 쩍 하고 벌렸다. 맙소사. 다같이 술을 마시지 않는 대학이 존재한단 말인가? 아니, 학교 근처에 술집이 없다는게 말이 되는 것인가? 그런 황금상권을 그냥 두다니 말이다. 그야말로 술로 시작해서 술로 연결되며 술로 끝나는 한국 대학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여튼..누나는 어느정도 마시는데?”
내 질문에 스파게티의 면발을 포크로 살짝 말은 채로,그녀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미국 대학생들이 참이슬을 마실리가 없으니까, 맥주로 마실때의 주량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못 마셔.”
“한잔 할래?”
못마신다는 말에 맥주병을 들어 흔들어 보이는 나를 보며 누나는 그 큰 눈을 내게 흘겨 보였다. 그 귀여운 얼굴에서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섹시함을 보았던 나는 멈칫했고, 그녀는 대답대신 조용히 앞에 있는 컵을 내게 내밀었다.
“즐거운 데이트를 위하여.”
내 말에 또 베시시 웃은 그녀는, 장난스럽게 나와 건배를 하고는 입술을 오므려 잔에 있는 맥주를 조금씩 목으로 넘겼다.투명한 컵속에 가득찬 거품이 사라지며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는, 글라스 속으로 보이는 그녀의 입술을 나는 계속해서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조금은 쓴 맛이 나는지 살짝 미간을 찡그리는 것도 귀여웠다. 그 갈색의 액체들은 그녀의 조그마한 입술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빨려 들어갔다.이미 잔을 다 비운 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꾸만 그녀의 속옷차림을 떠올리는 나와는 달리, 누나는 계속해서 밝게 말을 하고 있었다.너무나 신이 나 보이는 그 표정에 조금은 미안해졌다. 한국에 온 이후로 그녀가 맘 놓고 놀아 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을 해보니 이런 사소한 것에 즐거워하는 누나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단 둘만 남았다는 생각에 많이 좌절하고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아마도 동생인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돈이 된다는 말 하나에 화상채팅을 한 것이겠고, 거기서 나를 만난 것이겠지만.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근데 왜 여자친구가 없어?”
“그렇게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하냐..”
“흠..”
호기심에 어린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맥주를 살짝 홀짝 거린 그녀는,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듯했다.
“언제 사귀고 안사귀었는데?”
“고등학교때. 누나는?”
“나는...”
내 질문에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고등학교이후로 사귀지 않았다고 하자, 그 이후로 몇년간 여성과의 스킨쉽이 없었는지 계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나는, 내가 자신의 몸을 보면서 자위를 했던 것을 알고 있으니까,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도 몇년된거 같아.”
“그 이후로 남자와의 스킨쉽이 없었어?”
아차, 나도 모르게 말을 꺼내놓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속에 있던 생각을 이번에는 스탑버튼 없이 그대로 내뱉어 버린 것이었다. 내 질문에 적잖이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내 눈빛도 당황으로 물들었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었다. 이왕 질문을 한 것, 뻔뻔하게 굴어야 했다. 어차피 누나의 머리속에서 나는 은연중에 ‘밝히는 동생’으로 자리잡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나는 얼굴에 띄워진 당혹스러움을 얼른 지워 버리고는,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마치 미국에서 친구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뻔뻔한 표정을 하고서.소위 말하는 쿨한 표정을 말이다.
“응. 없었네 그러고보니.”
“생각 날때도 있지? 스킨쉽이.”
“너 정말...”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무섭다기 보단 귀여웠다.일부러 능글맞은 미소를 만면에 띄우며,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짜릿했다.키보드와 모니터만 없을뿐, 이것은 화상채팅에서의 대화의 현신이나 다름없었다.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잖아. 개방적인 나라에서 쭉 자라놓구선 왜그래.”
“있어. 가끔.”
말을 해놓고도 민망한지 술을 마시는 예림이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왜 내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순수한 동화속에 나오는 청순한 백설공주의 드레스가 하나하나 벗겨지는 듯한 그런 묘한 기분이었다. 그 백설공주는 내 상상속에서 부끄러움과 술기운때문에 살짝 빨개진 볼을 만지며, 천천히 드레스 속에 감춰진 곡선을 내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럴땐 어떻게 하는데?”
“뭘 어떻게 해?”
“남자들은 생각났을때 해결하는 방법이 있지만 여자들은...”
“야..김예영 너...”
그만 하라는 듯 격양된 톤에도 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가 똑똑한 놈은 아니지만 지금 그녀가 진짜 화가 났는지, 아니면 민망함 때문에 연기를 하고 있는지를 구별할 수 있는 눈치 정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계속 능글거리는 내 표정을 본 예림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난 그냥 참아. 못 참을 정도로 막 올라오고 그런거 아냐.”
역시..여자와 남자는 성적 관념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대답으로, 누나가 내 앞에서 옷을 벗은 것이 그저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수 있었다. 아련한 흥분감이 들어왔고, 맥주잔을 쥔 내 손은 조금씩 차가워졌다.
나는 그녀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내 웃음속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살짝 당황스런 표정을 짓는 누나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화상 채팅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만 이뤄지던 줄타기가 조금씩 현실화 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다 식어버린 스파게티 대신, 나는 차가운 맥주를 목 안으로 넘겼다. 오늘은, 오늘은 여기에서 내 스스로 스탑버튼을 눌러야만 했다.
다행히도 집 앞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지하철을 타게 되면 갈아타야 해서 여러모로 번거롭기 때문에, 나는 버스 노선을 잘 알지 못하는 누나를 데리고 앞장서서 버스 정류장으로 갈 수 있었다. 아까의 그 대화 탓인지 처음처럼 내 팔짱을 끼지 못하는 누나 대신에, 이번엔 내가 그녀의 작은 손목을 움켜쥐고 잡아 끌었다. 남매끼리 닮지 않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지만, 그것이 이렇게 좋은 점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남들이 본 우리의 모습은 남매와는 거리가 멀 테니까. 그것 뿐이었다. 세상의 인식으로부터 조금만 벗어나면, 세상이 정한 규격을 조금만 속이면 나와 예림이만 남는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설령 지극히 임시적인 공간이라 해도 말이다.
“저거 타야해. 내가 찍을 테니까 나 따라와.”
내 말에 누나는 아무말 없이 붉어진 얼굴을 끄덕였다. 번화가 답게 우리 뒤로도 줄줄이 사람들이 서 있었고, 버스 안 역시 단 한 개의 좌석도 비어 있지 않았다. 승객들은 저마다 손잡이를 하나씩 잡고 창가쪽에 2열 종대로 쭈욱 늘어서 있었다. 좌석은 커녕 제대로 서있을 자리도 찾지 못한 우리는, 결국 어중간하게 복도쪽에 나란히 섰고, 나는 손을 뻗어 한참이나 옆에 있는 손잡이를 움켜 쥐었다. 손잡이를 잡지 못하는 예림이에게는 내 손을 뻗어 주었고, 그녀는 내 손을 살짝 감싸쥐고 중심을 잡듯 섰다.
문제는 다음 순간이었다. 대충 공간을 확보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뒤에 도열해 있던 사람들이 버스안으로 들이 닥친 것이었다. 흡사 더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는 보따리에 옷을 잔뜩 쑤셔넣는 그런 느낌이었다. 우리는 애초에 자리를 잡은 위치에서 점점 더 뒤로 밀렸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등짝에 둘러쌓여 마주보고 설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잠시, 마주보고 선 우리둘 사이의 거리는 사람들의 압박 때문에 조금씩조금씩 좁혀졌다.
내 턱에 누나의 이마가 살짝 닿았다. 오유민과 닮은 그 향기는 다른 승객들의 불쾌한 냄새를 확 밀어내며 내 얼굴에 닿았다.우리의 몸은 서로를 마주보며 완벽하게 밀착했고, 버스는 덜컹 거리며 출발하기 시작했다. 몸이 휘청하는 예림이의 허리를 팔로 감싸안아 끌어 당겼다.
“조금만 가면 될거야.”
내 속삭임에 누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반짝이는 입술을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손으로 감싸 안은 그녀의 허리는, 비록 옷 위로 느껴지는 것이었지만 구체적인 촉감을 내 머리속으로 전송해 주고 있었다. 눈을 살짝 내리 깔아 보니, 브라우스의 단추와 단추 사이로 살짝 벌어진 그 틈에, 그녀의 란제리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위험했다. 아마도 조금 깊어진 내 숨결이 그녀의 정수리 부분에 계속해서 닿을 것이었다. 버스가 흔들릴 수록 그녀를 껴안은 내 팔에는 힘이 들어갔고, 또 아무도 우리를 보고 있지 않다는 느낌에 내 손가락이 간질 거렸기 때문이었다. 누나의 표정을 볼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누나역시 긴장을 한듯 꼼지락 거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허리를 감싼 내 손은 버스의 흔들거림을 핑계삼아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예림이의 등, 그리고 브라의 끈이 위치한 자리, 그리고 다시 허리의 순으로 조금씩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예림이의 몸이 움찔했다.버스가 이번에는 상하로 덜컹거리며, 그녀의 이마에 내 입술이 살짝 닿았기 때문이었다. 로멘틱한 키스는 아니었지만, 내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이마의 감촉에 이번엔 나 역시 움찔하고 있었다.덜컹 거릴수록 불안함을 느낀 그녀의 두 팔은 앞으로 뻗어져 내 허리를 살짝 감싸 안았고, 나는 그 따뜻한 느낌을 느끼며 조용히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내 숨결에 의해 흔들리는 누나의 머리결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양 옆을 둘러싼 사람들은 각자 보이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우리의 앞 뒤를 점한 사람들은 우리로 부터 등을 돌리고는 숨막히는 만원버스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짜릿한 충격이었다. 임시적인 우리만의 공간이 현실속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우리가 살고있는 원룸이 그 공간의 전부였는데, 지금은 우리만의 공간이 타인들의 공간과 살짝 교집합을 이루면서 겹쳐 있는 것이었다. 묘했다. 누나는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 가슴은 뛰고 있었다. 버스가 덜컹거리기 만을 기다리며, 나는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살짝 힘을 주었다.
반응은 쉽게 나타났다. 내 다섯 손가락이 브라우스위를 꾹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이마에 입술을 대는 것은 버스가 조금만 움직여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독하지 않은 화장품 냄새, 그리고 내 목에 와서 부딪히는 누나의 숨결이 간지러웠다. 모르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점점 더 앞으로 밀착하고 있었다.
누나는 힘들어 보였다. 미세한 내 움직임을 하나하나 눈치채고 있는 듯했지만, 그것을 떨쳐내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그녀도 기분이 좋은걸까? 또다시 멋대로 가설을 내린 나는 일부러 깊은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치마 언저리에 맞닿아 있는 바지 앞섬이 조금씩 더 불룩해진다. 차라리 청바지를 입었더라면 그녀도 모를텐데, 면바지위로 딱딱한 무언가가 부드러운 치마를 조금씩 압박해 갔다.
내 허리, 정확히 말하자면 내 허리춤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예림이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내가 허리를 감싸쥐고 있으니 움직일 수 없었고, 설사 감싸쥐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나와의 밀착을 그대로 유지해야만 했다. 게다가 밑에서는 무언가 딱딱한 것이 자신의 배꼽 밑부분을 집요하게 두드리고 있으니 불편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만약 누나의 입술 부분이 내 목부분으로 향해 있지 않았더라면 그만 두었을지도 모르지만, 누나의 심호흡이 깊어 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이 마당에 멈출 수 있는 스탑버튼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마 부분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지만, 약간은 통통한 볼살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밑에 있는 도톰한 입술색과 같은 색깔이었다.
덜컹!
기대했던 것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버스가 어떤 길을 지나가는지 모르지만, 크게 한번 상하로 덜컹거렸기 때문이었다. 승객들 사이에 끼어 있으니 굳이 손잡이를 움켜쥐며 자세를 고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상하로 덜컹 거리는 그 순간, 허리에 있던 내 손은 순식간의 누나의 엉덩이 부분으로 이동했다.
이제는 더이상 버스의 정류장 안내 멘트가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 현실속에서는 계속 그것이 울려지고 있겠지만, 우리만의 임시 공간에는 무성(無聲)만이 존재했다.검지 손가락의 첫번째 마디선으로 보드라운 치마의 감촉, 그리고 팬티끈의 굴곡이 느껴졌다. 누나의 호흡은 조금더 그 농도가 짙어졌으며, 엉덩이를 감싸쥔 내 손아귀에는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술같지도 않았던 맥주의 알콜기운이 확 하고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왼손에 느껴지는 풍만한 감촉에 몸이 떨렸다. 이미 실제로 보았던 그 탄력있는 힙이 내 손바닥 아래에 살짝 짓눌려 있었다.버스의 진동을 빌미로 내 손은 조금씩 움직이며 그 탄력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내 자켓의 주머니 부분을 움켜쥔 예림이의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안돼-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그녀는 입술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행동의 스탑버튼으로 작용되지 않았다.오히려 내 손은 더욱더 노골적으로 엉덩이 사이의 골을 따라, 볼록하게 튀어오른 두개의 능선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생각하기 이전에,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숙모를 뒤에서 껴안았던 어제의 그 순간처럼 말이다.
“아...”
나도 모르게 아쉬움의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사방에서 느껴지던 압박들이 일순간 느슨해 졌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류장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통에 몇몇 사람들의 등에 끼어있는 듯했던 그 느낌은 순식간에 헐거워졌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듯이 후다닥 떨어졌고, 우리 둘만의 임시적 공간은 그렇게 깨어져 버렸다.
“내려야 해. 이제 다왔어.”
아쉬움을 뒤로하고, 왼손에 가득차있던 그 부드러운 느낌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살짝 뒤를 돌아 나가는 예림이의 목소리는, 그 어느때보다 떨리고 있었다.
“얌마! 술자리에서 뭘 그렇게 생각해?”
“응? 아...응.”
어제의 일을 생각하던 나는 인재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듯 후다닥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서 옆으로 살짝 치켜 올라가 야한 느낌을 주는 눈빛 하나와, 대각선 앞으로는 그와 상반되는 귀여운 눈망울 하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맞다. 나는 강한별과 오유민, 그리고 박인재와 술을 마시고 있었지.그제서야 나는 인재의 제안에 우리 넷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테이블 위에는 몇개의 술병이 놓여져 있었고, 이미 숨을 쉴때마다 내 코에 알콜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꽤나 들이부은 상태였다.
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제 예림이와 있었던 데이트 아닌 데이트가 계속해서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그리고 짜릿했던 그 버스안에서의 기억 때문이 아니었다. 그 날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때의 기억이 계속해서 떠오른 것이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조금은 어색한 거리를 유지하며 집까지 걸어야만 했다. 누나는 내가 엉덩이를 주무른 것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간혹 어색함을 깨려 밝은 대화를 하기도 했지만, 대화의 종지부가 찍히고 나서는 다시한번 분위기는 어두워졌다.
문제는 방안에 도착해서였다. 둘 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둘 다 먼저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결국 나는 샤워를 한다고 말하며 욕실로 들어가버렸고, 누나는 그 틈을 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우리 진실게임 할까요?”
상념속에서 어제의 일을 재생시키던 나는 강한별의 말에 다시 한번 화들짝 깨어나며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나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유민도, 인재도 동의의 뜻을 밝히며 흥미 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강한별은 슬쩍 내 쪽을 보며 미소를 지어 내 동의를 구했다.
“좋아.”
나는 그렇게 혀가 꼬부라지는 소리로 말했고, 인재 역시 취한 표정이었으며, 술이 약한 오유민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겉모습으로는 티가 나지 않는 것은 역시 강한별 뿐이었다.
그래. 잠시만 잊고 있자. 내가 어제밤 데이트가 끝나고 샤워를 하러 들어가서, 평소처럼 아침이 아닌 저녁에 욕실문을 빼꼼히 열고 자위를 시작했던 일. 그리고 누나가 욕실문이 열린것을 알면서도 또 한번 내 자위가 끝날때까지 란제리 차림으로 계속 왔다갔다 했던 일들을 잠시 머리속 한켠에 미뤄두지 않으면 계속해서 생각이 날 것만 같았다.
“대답하기 곤란할때는 소주 먹는 거에요.자 그럼 유민이 너부터 질문해.아무나 찍어서”
강한별은 새 소주잔을 주문하고는 그것에 술을 따랐다. 소매에서 튀어나온 가느다란 팔목이 떨리는 것으로 봐선 취하긴 취한 모양이었다. 맞다. 어제 있었던 누나와의 일을 생각하느라 집중하진 못했지만, 우리는 어영부영 모여서 술을 푸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그 새로생긴 호프집의 구석진 자리에서 말이다.
지목당한 오유민은 살짝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그란 눈망울이 나와 인재, 그리고 강한별을 한번씩 쓰윽 하고 훑어나갔다.그리고 그런 눈빛은 좌중을 한바퀴 돌고나서, 내 얼굴위로 안착했다.
“예영 선배.”
그녀의 지목에 인재의 표정은 살짝 찡그려졌고, 강한별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희미한 미소를 짓어 보였다.옆에서 인재가 담배를 피워물었는지 담배연기가 훅 하고 내 얼굴 쪽으로 뿜어졌고, 오유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누구에게 가셨던 거죠?”
“그때라니?”
“피씨방에서 둘이서 과제로 청첩장 만들었을 때요.”
“아...”
천둥번개가 치던 그 날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인재는 ‘둘이서’라는 말에 경악과 배신감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지만, 나는 그것을 철저히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숙모에게 갔었어.”
“숙모요?”
“응.천둥번개를 무서워 하시거든.”
오유민은 아~하는 탄성과 함께, 궁금증 가득했던 얼굴을 다시 웃는 얼굴로 되돌려 놓았고, 내 앞에 있던 강한별은 ‘누나 뿐만이 아니었나..’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솔직히 말해서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것 같은 인재의 차례였다. 아주 아주 당연하게도 인재는 오유민을 지목했고, 나와 강한별의 시선도 오유민을 향했다.
“이 안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푸하하. 웃긴 질문이었다. ‘ 이 안에’라는 질문을 쓰려면 오유민이 레즈비언이라는 전제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남자는 나와 인재 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나와 예영이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라는 질문을 아주 멍청하게 돌려 말한 것이다.
하지만 웃기게도, 가만히 생각하던 오유민은 술도 약하면서 벌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인재의 표정은 조금 전 보다 더 묘해지고 있었고 강한별은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다시금 술잔에 술을 부었다. 그 다음은 당연히 나라고 생각했는데, 강한별은 자기가 하겠다며 나를 바라보았다.
“예영 선배. 선배가 좋아하는 연상의 여자랑과는 진도가 나갔나요?”
나는 심하게 인상을 구기며 강한별을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선을 넘지 않았으니 파울이 아니야’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오유민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뭐야.김예영 너 연상이랑 사귀냐?”
갑자기 끼어든 인재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것이 진실은 아니니까, 진실게임의 룰을 벗어난 거짓말이 아니었다. 강한별의 질문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것은 답변하기 엄청나게 애매한 것이었다. 틀림없다. 이 여우는 내가 대답대신 술을 마실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술잔을 비우는 나를 보며, 오유민은 나와 강한별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계속해서 웃는 그 얼굴과는 많이 멀어진 느낌이었다. 부드득 하고 어금니에 이가 갈렸다. 여유로운 표정의 강한별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예영선배 차례에요.”
“나는 한별이에게 물을게.”
강한별은 어떤 공격이라도 해보라는 듯 느긋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누가봐도 예쁘고, 누가봐도 섹시한 얼굴이지만 속에는 어떤 얼굴이 자리잡고 있는지 모를 아이였다. 심호흡을 크게 한 나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돈을 위해서 맘에 없는 상대와 데이트를 한적이 있는지?최근 1주일 이내에.”
내 공격은 성공이었다. 언제나 도도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강한별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드는 것을 보는 건 큰 쾌감이었다. 유민이와 인재는 또 한번 화들짝 놀라며 다시금 강한별 쪽을 응시했다. 억울해 보이는 인재의 눈빛은 ‘내가 없을때 무슨일이 일어난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순간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던 강한별은, 너무나 쉽게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오며 술잔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분위기는 더더욱 무르익었다. 다시 일순(一循)하여 오유민의 차례였다.
“어떤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나요?”
내가 아닌 인재를 향해 묻는 질문이었다. 당연하게도 인재는 신이나서 누가 들어도 오유민의 인상착의와 성격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답변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그 말을 듣는 오유민의 시선은 인재가 아닌 나를 향해 있었다. 이것 참...두 여자의 각기 다른 시선을 받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썩 기분좋은것이 아니었다.
“첫 경험은 언제야?”
역시나 박인재. 선을 넘는 능력에 있어서는 동급최강이었다. 내 질문 이후로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던 강한별은 그렇다 치고, 그 질문을 들은 오유민의 표정역시 굳어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딱 봐도 더이상 술을 못마실 것만 같은 그녀는 술잔을 들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진실을 덮을수 있는 여력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진실게임이 진정한 의미의 진실게임이 되는 것은 술을 마실 여력이 없을 때 부터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요.”
칙칙폭폭. 옆에서 잔뜩 흥분한 박인재라는 기차가 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콧김에 테이블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여전히 굳어진 강한별의 표정과, 얼굴이 더더욱 빨개진 오유민의 표정이 내 눈에 같이 담겼다.
“뭐해? 다시 니 차례잖아.”
내 말에 강한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유롭게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내 모습을 조금은 의식한 그녀는, 진실게임용 질문이 아닌 다른 말을 꺼내었다.
“벌써 시간이 늦어서, 저는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에엥?뭔소리야 갑자기?”
“다들 취했잖아요. 시간도 늦었고..내일 1교시가 있는게 생각이 나서요.판을 꺠서 죄송해요.”
인재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강한별의 통보에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물론 강한별이 마음에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한 명이 빠지게 되면 진실게임의 판이 깨질 것이고, 그것 때문에 오유민에게 집적 거릴 ‘기회’를 놓치기 때문이겠지. 덕분에 나는 인재의 간절한 시선을 받아주어야만 했고, 어깨를 으쓱하는 나를 향해 강한별은 살짝 목례를 했다.
“저 이만 들어가 볼게요. 저 신경쓰지 말고 그냥 드세요.”
“나도..갈게.”
강한별의 말에 오유민이 살짝 몸을 일으켰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친구가 가는데 이런 자리에서 홍일점으로 남고 싶어하는 성격은 아닐 테니까. 인재의 표정에 허탈함이 가득찬 것은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바래다 줄게.”
“아니에요.저랑 유민이 같은 건물에서 자취해요.호수는 다르지만.”
“네.그냥 한별이랑 둘이 갈게요.”
바래다 주는 것까지 거절당한 인재는 더더욱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서 쟤들 좀 잡아줘 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철저히 무시하듯 말했다.
“조심해서 들어가. 우리도 곧 갈게.”
“네. 다음에 뵈요.”
강한별의 몸이 비틀거린다는 느낌이 들때쯤, 약간은 불규칙한 구두의 또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그녀들의 모습은 출입구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오유민은 살짝 고개를 돌려 내 쪽으로 꾸벅 인사를 했고, 나는 오른손을 들어 답해 주었다.
“아놔 씨발!”
“왜그래?”
“한별이가 다 파토낸거야.”
“파토?”
“응. 유민이랑 잘 될 수 있었는데! 아오!”
“...어딜 봐서.”
내 뚱한 표정에 인재는 담배값을 뒤적 거려 마지막 남은 한가치를 피워 물고는, 그것을 손으로 구겨 테이블위로 던져버렸다.
“야야. 유민이 술 약하잖아. 진실게임이 원래 달아오르게 하기엔 아주 좋은 게임인데..한창 불판이 달궈지는데 한별이가 찬물 뿌린거 아냐. 저 기집애는 왜 갑자기 집에 간다는 거야?”
“글쎄.”
“니가 한 질문 때문 아니냐? 그건 무슨 의미였냐?”
인재의 말에 나는 잠시 머뭇거리며 다른 핑계를 찾아야만 했다. 어차피 진실게임이 깨어진 판에 진실을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냥 별거아냐. 니가 강한별은 업소에 다닐 것 같다는 말을 해서, 조금 돌려 질문했을 뿐이야.”
“음..한별이 술 마신걸로 봐선 내 말이 100프로 맞아.”
“그래..참 업소녀 구별할 능력있어서 좋겠다 자식아.”
“새끼가 까칠하기는...야. 그냥 엉아가 낼게. 오늘은 우리도 여기서 쫑 하자. 고추들끼리 술처먹어서 뭐하냐.”
“그러던지.”
나 역시 인재와 단둘이 술먹는 것은 사절이었다. 어차피 나도 거나하게 취했고, 시간은 10시를 지나가고 있으며, 지금 가면 누나가 잠들어 있을테니까.
우우웅..
품 안에서 느껴지는 진동소리에 몽롱해진 눈을 비비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인재는 계산서를 보며 열심히 얼마가 나왔는지 가늠하기에 바빠보였다.
-강한별-
액정에 표시된 발신자의 이름은 방금 전까지 내 앞에 있던 아이였고, 그것은 전화가 아닌 문자메세지 였다.
-오늘 자고 갈래요?-
푸핫. 나도 모르게 실없이 웃어버렸다. 나에게 한방 먹은게 분해서 설욕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그때처럼 또다시 각자의 머리속에 있는 그 인물들을 떠올리기 위함인 걸까?
답은 모르지만 웃음이 나왔다. 오유민과 같은 건물에 사는데, 그녀와 헤어지고 보낸 걸까? 아니,강한별이라면 옆에서 오유민이 걷고 있어도 태연하게 그런 문자를 내게 보낼 아이였다.그래. 역시나, 예림이가 영화를 보고 나서 했던 그 말이 옳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아이는,반드시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다. 언제나 말이다.
완전한 봄. 누나와 길거리를 걸으며 느낀 것은 이 네 글자로 요약가능했다. 저녁이 되어도 쌀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직도 고집스럽게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는 내 등에는 살짝 땀이 나는 듯했다.하지만 두꺼운 옷을 걸쳤어도 내 팔에 느껴지는 감촉은 맨살에 닿은 것마냥 너무나 분명한 느낌의 것이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누나의 태도는 전과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남들이 봤을때는 조금의 위화감도 느낄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내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역시나 왜인지 모르지만 표정역시 밝고 싱그러웠다. 커다란 두 눈에는 알 수 없는 기대감이나 설레임 같은 것들이 가득 차 있는 듯했다. 하얀 목과 함께 보이는 옆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뒤따를 뿐이었다.
신이난 듯 지하철을 타고 번화가로 나가는 내내 누나의 표정은 그렇게 설레여 보였고 밝아보였다. 지금 이 순간 샤워를 가장한 훔쳐보기와 자위행위에 관한 생각에 민망함을 느끼는 것은 나 뿐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민망하거나 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것을 덮으려 애쓰기위해서 일부로 저러는 것일까? 누군가의 속마음은 당사자만 아는 것이었다.
“너 영화 본지 오래됐지?”
“응?”
“영화 말이야. 너 여자친구도 없잖아.”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놀리듯이 말을 하면서 쿡쿡 거리며 웃는다. 동그란 눈이 초승달 처럼 변하는 것은 상당히 귀여웠지만, 나는 짐짓 퉁명스럽게 되받아쳐 보였다.
“자기도 남자친구 없는 주제에.”
“에? 나는 귀국한지 얼마 안되었거든요? 댁은 여기서 쭈욱 살지 않았나요?”
“그래서 미국에서 남자친구 있었어?”
“당연히 있었지.”
당당하다는 듯이 말하는 누나의 말에, 나는 하마터면 ‘첫경험의 그 오빠?’라고 물을 뻔했다.다행히도 나는 그렇게 까지 멍청한 인간은 아닌 모양인지 잠시 멈칫하는 것에서 끝이났고, 그런 내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예림이가 내게 물었다.
“아까 그 아이들은 누구야?여자애들 되게 이쁘던데.”
“봐. 내가 이정도야. 그런 애들을 두 명이나 데리고 다니잖아.”
“오호?그럼 걔들 중에 하나는 니 여자친구인거야?”
“뭐 그건 아니지만.”
이번에도 역시 한 명과는 같이 잤어 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꺼낼 뻔하다가 겨우 참아내었다. 역시나 힘들다. Fetish king과 김예영을 동시에, 하지만 다른 인물로 완벽히 연기하는 것은 역시나 고난이도 였다. 나도 모르게 대화의 수위가 높은, 화상채팅에서의 김예영으로 은연중에 변신을 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나마 활발하게 활동하는 몇 개체의 뇌세포가 내게 스탑 명령을 내렸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에이. 그럼 뭐 뻔하지. 너희들에게 밥 사달라고 붙는 애들 맞지?”
“음...완전히 틀린말은 아닌데. 정답은 아냐.”
내 말에 곰곰히 생각에 잠긴듯한 그 표정이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깜찍해 보였다. 오늘따라 신경을 쓴 화장과, 지하철 안의 싸구려 조명에 반짝이는 입술이 그녀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싶게 만드는 충동을 자아내었다.
“근데 왜 갑자기 영화야?”
“그냥. 영화가 너무 보고싶어졌어.”
“장르는?”
“음. 봄이니까 역시...”
“액션이지.”
“아니 멜로야.”
“아쉽군.”
내 말에 누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듣기만 해도 졸음이 오는 멜로라는 장르를 나는 너무나 싫어했다. 뻔하고 졸렸다. 누나는 그런 내게 애정결핍이라며 말도 안되는 말을 갖다 붙였지만, 역시나 싫은 것은 싫은 것이었다. 감정이 메마른 것인지, 멜로라는 영화장르는 그저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연애사를 들여다보는 듯한 너무나 지루한 것이었다.영화에 몰입, 혹은 등장인물에의 대입이 안되는 것이었다.
“오늘은 내가 데이트 신청했으니까 양보해.”
“좋아. 대신 중간중간에 깨워줘.”
“숙녀랑 데이트를 하는데 그런건 비매너야.”
남매간에 무슨 숙녀는...이라고 쏘아 붙이려 했는데, 너무나 진지해 보이는 누나의 표정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느낌이 이상했다. 정말이지 타인 대 타인으로 만나 데이트를 하는, 그러니까 처음 시작하는 남과 여의 느낌이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나의 밝은 표정, 여전히 내 팔을 잡고는 지하철의 진동으로부터 몸을 지탱하는 행동 등등을 대입해 보니, 약간은 억지 스럽지만 뭔가 이상야릇한 하나의 그림이 나오는 듯했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을 잡고 있는 남녀, 팔짱을 끼고 있는 남녀, 어깨 동무를 하고 있는 남녀... 그런 무수한 평범한 커플들 사이에서, 꼭 붙어 있는 나와 예림이의 모습은 단 1퍼센트의 위화감 없이 절묘하게 섞여 있었다. 붉은 옷을 입은 응원단 속의 푸른색 옷이 아닌, 그냥 그들과 똑같은 붉은 옷을 입은 나와 예림이의 모습이 그 속에 있었다.
“뭐해?”
“응?”
“여기서 내려야지.”
“아...응.”
그러고보니 행선지도 말해주지 않았는데, 누나가 정한 곳은 우리 학교에서 부터 지하철로 두 세 정거장 떨어진 어느 번화가였다. 가로수에 주렁주렁 매달려 식상한 겨울 풍경을 자아내던 수없이 많은 전구들이 이미 철수한지 오래된 상태의 거리. 겨울과는 조금 다른 활력이 가득했다. 딱딱한 거리가 조금은 녹아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어..?’
보드라운 감촉이 손에 닿았다. 이번에는 정말 아주 심하게 멈칫 할 뻔했지만 역시나 자연스레 넘어갔다. 손안에 잡히는 부드러운 손등의 감촉을 엄지손가락으로 비벼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지하도를 통해 올라오자마자, 그녀는 이번에 내 손을 잡고 이끈 것이었다.
보통 남매끼리 손을 잡던가? 친하면 그럴수도 있지. 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잖아?
혼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을 질의응답을 반복하고 있었다.그러한 생각들을 해야 할 정도로 예림이의 행동은 내게 있어서 과감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손..손이라. 내가 언제 누나의 손을 잡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주 확실하게 각인된, 10년만에 공항에서 만나 리무진 안에서 살짝 잡았던 것. 그것을 빼고 말이다.
고왔다. 반 보 정도 그녀의 뒤에서 걸으며, 묶어 올린 머리에서 내려오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던 나는 용기를 내어 깍지를 껴 보았다. 뭔가에 정신이 팔린건지 누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그 부드러움의 실체를 맘껏 만끽할 수 있었다. 악기를 해서 손이 상한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지만 그것은 쓸대없는 불평임에 틀림없었다. 누나의 손은 고왔고, 또 부드러웠으며, 이제는 다 녹아버린 눈 처럼 하얗고 깨끗했다.
“잉? 없다! 없어.”
“뭐가?”
예림이만 바라보며 걷던 나는 문득 멈춰서서 울상을 지으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 뒤늦게 응답했다. 덕분에 약간은 어설픈 억양으로 되묻는 꼴이 되었지만.
“로맨스 영화가 없잖아. 로맨틱 코메디 영화도 없고.”
어떻게 영화관이 있는 곳을 알았는지 그녀가 멈춰선 곳은 영화관의 정문앞이었고, 상영작들과 시간표가 빽빽히 붙어 있는 포스터를 보며 그녀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괴수 영화, SF영화, 범죄 스릴러 한 편,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액션영화가 하나 있었지만 유독 예림이가 보고 싶어하던 로맨스 영화는 없었다.
“아이씨..그럼 뭐 보지?”
“이거 이거.”
열심히 액션영화의 포스터를 가리켰지만, 긴 속눈썹으로 덮힌 예림이의 큰 눈은 웃통을 훌렁까고 표효를 하는 남자 주인공이 서있는 그 포스터 쪽으로는 향해 가지도 않았다. 무안해진 내가 쩝 하고 입맛을 다실 때 즈음엔, 예림이는 꼼꼼히 작품들의 상영시간을 체크 하고 있었다.
“그럼 이거 보자.”
“그게 뭐야?”
“범죄 스릴러 영화.”
“음..로맨스 영화의 대안 치고는 좀 이미지가 안맞는데.”
“이 영화가 유일하게 지금 시간대에 있어.”
누가 범인인지 알아 맞춰야 할 것만 같은 고뇌섞인 표정의 등장인물들이 가득한 포스터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장르가 뭔지 척 하고 나올 정도였다. 로맨스보다는 낫겠지 하는 마음에 나는 별다른 반대를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그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는지 밝은 표정으로 나를 매표소까지 끌고 들어갔다.
“이 영화 지금 시간대에 몇자리 있나요?”
평범하게 생긴 매표소 여직원은 예림이와 내 쪽을 힐끗 하고 바라보더니, 이윽고 자판을 두드리며 검색을 하는 듯했다.
“자리는 많이 있네요. 뒷자리로 드릴까요?”
“네.”
내가 낸다고 했는데도, 누나는 그것을 말리며 얼른 지갑에서 돈을 꺼내 지불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나를 올려다보며, 과외비를 선불로 받아서 꽤 지갑이 두둑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랑스러운 듯이 이야기 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피식하고 웃을 그때쯤, 직원은 우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커플석으로 드릴까요?”
영화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병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그 속에 벌어지는 의료비리와 그것을 감추려는 의사, 그리고 비리를 파해치려는 수사관과 용의자들의 두뇌게임을 그린 영화였다. 미국 영화라서 나는 열심히 자막을 읽는데에 시간을 보냈고, 반대로 자막 없이도 대다수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누나는 연신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엄청나게 몰입하는 모습이었다.
내 어깨에는 누나의 어깨가 닿아 있었다. 간혹 편하게 내 쪽에 기대기도 했고, 순간순간 놀라는 장면이나 반전이 나올때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듯 내 손을 꽉 움켜쥐기도 했다.
커플석이라는 것은 이름만 다를 뿐 별것 없었다. 일반좌석과 가운데 팔걸이의 유무 하나로 손쉽게 구별이 가능했다. 피씨방에서도 가운데 팔걸이가 없는 커플석이라는 곳을 오유민과 앉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러고보니, 누나에게서도 오유민과 비슷한 그 과일향기 같은것이 나는 것 같았다.
외관상 팔걸이 하나가 없는 것 뿐이지만, 나와 누나의 거리는 엄청나게 가까워져 있었다. 그 작은 플라스틱 막대기 하나가, 개개인의 공간을 보장하고 타인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완벽한 철책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와 예림이는 철책이 없는 그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더불어,그녀와 내 마음속에 있는 철책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게 눈에 보였다. 물론 그것이 ‘남매관계’라는, 철옹성과 같은 철벽수비를 자랑하는 철책이긴 하지만 그것은 조금씩 균열이가고, 조금씩 붕괴되고 있었다. 거북이가 달리는 것마냥 너무나 느린 속도지만 눈에 보일듯 확연한 차이였다. 그리고 분명, 저렇게 모르는 척을 하고 있지만 예림이 역시 그 변화를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우와아..”
조용히 탄성을 지르는 예림이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여전히 그녀는 나와 어깨를 꼭 붙이고 앉아 있었고, 여전히 조금씩 땀이나는 내 손을 붙들고 있었으며, 여전히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조그마한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들었을때는 어둑했던 영화관이 밝아지며, 스크린에는 앤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반전이 진짜 엄청나.그치?”
사실 후반부서부터 생각에 잠겨있던 탓에 그 ‘반전’이 뭔지는 몰랐지만, 숙녀의 앞에서- 그것도 먼저 데이트를 신청한- 실례를 범하고 싶지 않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내가 모르는 그 결말이 충격적이었는지, 사람들이 대다수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예림이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부드러운 입술을 만지작 거리며 감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등장 인물중 하나가 범인이겠고, 뭐 정의가 승리했겠지..하는 간단한 결론을 내려버린 나는 슬쩍 예림이 쪽을 바라보았다. 치마 위 무릎에 얹어 놓았던 자신의 가방, 그리고 내가 들고 있던 바이올린 케이스의 어깨끈을 살짝 움켜쥐며,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속을 알수 없는 애들이 항상 실마리를 쥐고 있는 거라니까.”
누가봐도 일반적이고 누가봐도 위화감 없어 보이는 그 데이트는 계속되었다. 스파게티가 먹고 싶다는 말에 역시나 내가 딱히 반대를 하지 않은 덕분에 조금 늦어버린 저녁식사는 스파게티 집에서 이루어졌다. 내가 맥주를 주문하는 것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마치 다람쥐를 보는 것처럼 깜찍했다.
“너 술 잘마셔?”
해물 스파게티를 하나 시키고는 열심히 잔에 맥주를 붓는 나를 보며 누나가 물어왔다. 뭔가 호기심, 그리고 배신감 같은 것이 섞인 묘한 눈빛이었다. 아이보리색 브라우스 위로 붉은 입술이 반짝반짝 거렸다. 어렸을때 누나를 괴롭히던 만수를 흠씬 두들겨 패주던, 그때의 남동생 김예영의 모습이 순간 떠오른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추억을 산산히 부숴주기 위해서 컵에 있는 맥주를 시원하게 원샷했다.
“한국 대학생들은 다 잘마셔. 못마시던 애들도 잘 마셔 지게 돼.”
“흠..그래?”
“누나는?”
“나는 별로..안마셔 봤는데.”
“미국 대학생들은 술 안마셔?”
“마시는 애들도 있지만...다 마시지는 않아.”
“뭐야. 그럼 개강파티때도 안마셔?”
“개강파티가 뭐야?”
“말 그대로 개강하면서 하는 파티.”
“파티야 많이 하지. 하지만 대학교 다니면서 다같이 술을 꼭 마시거나 하지는 않는데. 학교근처에 술집도 없는걸.”
나는 엄청난 문화충격에 입을 쩍 하고 벌렸다. 맙소사. 다같이 술을 마시지 않는 대학이 존재한단 말인가? 아니, 학교 근처에 술집이 없다는게 말이 되는 것인가? 그런 황금상권을 그냥 두다니 말이다. 그야말로 술로 시작해서 술로 연결되며 술로 끝나는 한국 대학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여튼..누나는 어느정도 마시는데?”
내 질문에 스파게티의 면발을 포크로 살짝 말은 채로,그녀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미국 대학생들이 참이슬을 마실리가 없으니까, 맥주로 마실때의 주량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못 마셔.”
“한잔 할래?”
못마신다는 말에 맥주병을 들어 흔들어 보이는 나를 보며 누나는 그 큰 눈을 내게 흘겨 보였다. 그 귀여운 얼굴에서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섹시함을 보았던 나는 멈칫했고, 그녀는 대답대신 조용히 앞에 있는 컵을 내게 내밀었다.
“즐거운 데이트를 위하여.”
내 말에 또 베시시 웃은 그녀는, 장난스럽게 나와 건배를 하고는 입술을 오므려 잔에 있는 맥주를 조금씩 목으로 넘겼다.투명한 컵속에 가득찬 거품이 사라지며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는, 글라스 속으로 보이는 그녀의 입술을 나는 계속해서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조금은 쓴 맛이 나는지 살짝 미간을 찡그리는 것도 귀여웠다. 그 갈색의 액체들은 그녀의 조그마한 입술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빨려 들어갔다.이미 잔을 다 비운 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꾸만 그녀의 속옷차림을 떠올리는 나와는 달리, 누나는 계속해서 밝게 말을 하고 있었다.너무나 신이 나 보이는 그 표정에 조금은 미안해졌다. 한국에 온 이후로 그녀가 맘 놓고 놀아 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을 해보니 이런 사소한 것에 즐거워하는 누나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단 둘만 남았다는 생각에 많이 좌절하고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아마도 동생인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돈이 된다는 말 하나에 화상채팅을 한 것이겠고, 거기서 나를 만난 것이겠지만.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근데 왜 여자친구가 없어?”
“그렇게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하냐..”
“흠..”
호기심에 어린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맥주를 살짝 홀짝 거린 그녀는,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듯했다.
“언제 사귀고 안사귀었는데?”
“고등학교때. 누나는?”
“나는...”
내 질문에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고등학교이후로 사귀지 않았다고 하자, 그 이후로 몇년간 여성과의 스킨쉽이 없었는지 계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나는, 내가 자신의 몸을 보면서 자위를 했던 것을 알고 있으니까,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도 몇년된거 같아.”
“그 이후로 남자와의 스킨쉽이 없었어?”
아차, 나도 모르게 말을 꺼내놓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속에 있던 생각을 이번에는 스탑버튼 없이 그대로 내뱉어 버린 것이었다. 내 질문에 적잖이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내 눈빛도 당황으로 물들었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었다. 이왕 질문을 한 것, 뻔뻔하게 굴어야 했다. 어차피 누나의 머리속에서 나는 은연중에 ‘밝히는 동생’으로 자리잡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나는 얼굴에 띄워진 당혹스러움을 얼른 지워 버리고는,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마치 미국에서 친구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뻔뻔한 표정을 하고서.소위 말하는 쿨한 표정을 말이다.
“응. 없었네 그러고보니.”
“생각 날때도 있지? 스킨쉽이.”
“너 정말...”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무섭다기 보단 귀여웠다.일부러 능글맞은 미소를 만면에 띄우며,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짜릿했다.키보드와 모니터만 없을뿐, 이것은 화상채팅에서의 대화의 현신이나 다름없었다.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잖아. 개방적인 나라에서 쭉 자라놓구선 왜그래.”
“있어. 가끔.”
말을 해놓고도 민망한지 술을 마시는 예림이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왜 내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순수한 동화속에 나오는 청순한 백설공주의 드레스가 하나하나 벗겨지는 듯한 그런 묘한 기분이었다. 그 백설공주는 내 상상속에서 부끄러움과 술기운때문에 살짝 빨개진 볼을 만지며, 천천히 드레스 속에 감춰진 곡선을 내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럴땐 어떻게 하는데?”
“뭘 어떻게 해?”
“남자들은 생각났을때 해결하는 방법이 있지만 여자들은...”
“야..김예영 너...”
그만 하라는 듯 격양된 톤에도 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가 똑똑한 놈은 아니지만 지금 그녀가 진짜 화가 났는지, 아니면 민망함 때문에 연기를 하고 있는지를 구별할 수 있는 눈치 정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계속 능글거리는 내 표정을 본 예림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난 그냥 참아. 못 참을 정도로 막 올라오고 그런거 아냐.”
역시..여자와 남자는 성적 관념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대답으로, 누나가 내 앞에서 옷을 벗은 것이 그저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수 있었다. 아련한 흥분감이 들어왔고, 맥주잔을 쥔 내 손은 조금씩 차가워졌다.
나는 그녀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내 웃음속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살짝 당황스런 표정을 짓는 누나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화상 채팅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만 이뤄지던 줄타기가 조금씩 현실화 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다 식어버린 스파게티 대신, 나는 차가운 맥주를 목 안으로 넘겼다. 오늘은, 오늘은 여기에서 내 스스로 스탑버튼을 눌러야만 했다.
다행히도 집 앞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지하철을 타게 되면 갈아타야 해서 여러모로 번거롭기 때문에, 나는 버스 노선을 잘 알지 못하는 누나를 데리고 앞장서서 버스 정류장으로 갈 수 있었다. 아까의 그 대화 탓인지 처음처럼 내 팔짱을 끼지 못하는 누나 대신에, 이번엔 내가 그녀의 작은 손목을 움켜쥐고 잡아 끌었다. 남매끼리 닮지 않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지만, 그것이 이렇게 좋은 점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남들이 본 우리의 모습은 남매와는 거리가 멀 테니까. 그것 뿐이었다. 세상의 인식으로부터 조금만 벗어나면, 세상이 정한 규격을 조금만 속이면 나와 예림이만 남는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설령 지극히 임시적인 공간이라 해도 말이다.
“저거 타야해. 내가 찍을 테니까 나 따라와.”
내 말에 누나는 아무말 없이 붉어진 얼굴을 끄덕였다. 번화가 답게 우리 뒤로도 줄줄이 사람들이 서 있었고, 버스 안 역시 단 한 개의 좌석도 비어 있지 않았다. 승객들은 저마다 손잡이를 하나씩 잡고 창가쪽에 2열 종대로 쭈욱 늘어서 있었다. 좌석은 커녕 제대로 서있을 자리도 찾지 못한 우리는, 결국 어중간하게 복도쪽에 나란히 섰고, 나는 손을 뻗어 한참이나 옆에 있는 손잡이를 움켜 쥐었다. 손잡이를 잡지 못하는 예림이에게는 내 손을 뻗어 주었고, 그녀는 내 손을 살짝 감싸쥐고 중심을 잡듯 섰다.
문제는 다음 순간이었다. 대충 공간을 확보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뒤에 도열해 있던 사람들이 버스안으로 들이 닥친 것이었다. 흡사 더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는 보따리에 옷을 잔뜩 쑤셔넣는 그런 느낌이었다. 우리는 애초에 자리를 잡은 위치에서 점점 더 뒤로 밀렸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등짝에 둘러쌓여 마주보고 설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잠시, 마주보고 선 우리둘 사이의 거리는 사람들의 압박 때문에 조금씩조금씩 좁혀졌다.
내 턱에 누나의 이마가 살짝 닿았다. 오유민과 닮은 그 향기는 다른 승객들의 불쾌한 냄새를 확 밀어내며 내 얼굴에 닿았다.우리의 몸은 서로를 마주보며 완벽하게 밀착했고, 버스는 덜컹 거리며 출발하기 시작했다. 몸이 휘청하는 예림이의 허리를 팔로 감싸안아 끌어 당겼다.
“조금만 가면 될거야.”
내 속삭임에 누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반짝이는 입술을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손으로 감싸 안은 그녀의 허리는, 비록 옷 위로 느껴지는 것이었지만 구체적인 촉감을 내 머리속으로 전송해 주고 있었다. 눈을 살짝 내리 깔아 보니, 브라우스의 단추와 단추 사이로 살짝 벌어진 그 틈에, 그녀의 란제리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위험했다. 아마도 조금 깊어진 내 숨결이 그녀의 정수리 부분에 계속해서 닿을 것이었다. 버스가 흔들릴 수록 그녀를 껴안은 내 팔에는 힘이 들어갔고, 또 아무도 우리를 보고 있지 않다는 느낌에 내 손가락이 간질 거렸기 때문이었다. 누나의 표정을 볼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누나역시 긴장을 한듯 꼼지락 거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허리를 감싼 내 손은 버스의 흔들거림을 핑계삼아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예림이의 등, 그리고 브라의 끈이 위치한 자리, 그리고 다시 허리의 순으로 조금씩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예림이의 몸이 움찔했다.버스가 이번에는 상하로 덜컹거리며, 그녀의 이마에 내 입술이 살짝 닿았기 때문이었다. 로멘틱한 키스는 아니었지만, 내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이마의 감촉에 이번엔 나 역시 움찔하고 있었다.덜컹 거릴수록 불안함을 느낀 그녀의 두 팔은 앞으로 뻗어져 내 허리를 살짝 감싸 안았고, 나는 그 따뜻한 느낌을 느끼며 조용히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내 숨결에 의해 흔들리는 누나의 머리결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양 옆을 둘러싼 사람들은 각자 보이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우리의 앞 뒤를 점한 사람들은 우리로 부터 등을 돌리고는 숨막히는 만원버스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짜릿한 충격이었다. 임시적인 우리만의 공간이 현실속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우리가 살고있는 원룸이 그 공간의 전부였는데, 지금은 우리만의 공간이 타인들의 공간과 살짝 교집합을 이루면서 겹쳐 있는 것이었다. 묘했다. 누나는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 가슴은 뛰고 있었다. 버스가 덜컹거리기 만을 기다리며, 나는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살짝 힘을 주었다.
반응은 쉽게 나타났다. 내 다섯 손가락이 브라우스위를 꾹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이마에 입술을 대는 것은 버스가 조금만 움직여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독하지 않은 화장품 냄새, 그리고 내 목에 와서 부딪히는 누나의 숨결이 간지러웠다. 모르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점점 더 앞으로 밀착하고 있었다.
누나는 힘들어 보였다. 미세한 내 움직임을 하나하나 눈치채고 있는 듯했지만, 그것을 떨쳐내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그녀도 기분이 좋은걸까? 또다시 멋대로 가설을 내린 나는 일부러 깊은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치마 언저리에 맞닿아 있는 바지 앞섬이 조금씩 더 불룩해진다. 차라리 청바지를 입었더라면 그녀도 모를텐데, 면바지위로 딱딱한 무언가가 부드러운 치마를 조금씩 압박해 갔다.
내 허리, 정확히 말하자면 내 허리춤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예림이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내가 허리를 감싸쥐고 있으니 움직일 수 없었고, 설사 감싸쥐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나와의 밀착을 그대로 유지해야만 했다. 게다가 밑에서는 무언가 딱딱한 것이 자신의 배꼽 밑부분을 집요하게 두드리고 있으니 불편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만약 누나의 입술 부분이 내 목부분으로 향해 있지 않았더라면 그만 두었을지도 모르지만, 누나의 심호흡이 깊어 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이 마당에 멈출 수 있는 스탑버튼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마 부분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지만, 약간은 통통한 볼살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밑에 있는 도톰한 입술색과 같은 색깔이었다.
덜컹!
기대했던 것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버스가 어떤 길을 지나가는지 모르지만, 크게 한번 상하로 덜컹거렸기 때문이었다. 승객들 사이에 끼어 있으니 굳이 손잡이를 움켜쥐며 자세를 고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상하로 덜컹 거리는 그 순간, 허리에 있던 내 손은 순식간의 누나의 엉덩이 부분으로 이동했다.
이제는 더이상 버스의 정류장 안내 멘트가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 현실속에서는 계속 그것이 울려지고 있겠지만, 우리만의 임시 공간에는 무성(無聲)만이 존재했다.검지 손가락의 첫번째 마디선으로 보드라운 치마의 감촉, 그리고 팬티끈의 굴곡이 느껴졌다. 누나의 호흡은 조금더 그 농도가 짙어졌으며, 엉덩이를 감싸쥔 내 손아귀에는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술같지도 않았던 맥주의 알콜기운이 확 하고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왼손에 느껴지는 풍만한 감촉에 몸이 떨렸다. 이미 실제로 보았던 그 탄력있는 힙이 내 손바닥 아래에 살짝 짓눌려 있었다.버스의 진동을 빌미로 내 손은 조금씩 움직이며 그 탄력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내 자켓의 주머니 부분을 움켜쥔 예림이의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안돼-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그녀는 입술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행동의 스탑버튼으로 작용되지 않았다.오히려 내 손은 더욱더 노골적으로 엉덩이 사이의 골을 따라, 볼록하게 튀어오른 두개의 능선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생각하기 이전에,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숙모를 뒤에서 껴안았던 어제의 그 순간처럼 말이다.
“아...”
나도 모르게 아쉬움의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사방에서 느껴지던 압박들이 일순간 느슨해 졌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류장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통에 몇몇 사람들의 등에 끼어있는 듯했던 그 느낌은 순식간에 헐거워졌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듯이 후다닥 떨어졌고, 우리 둘만의 임시적 공간은 그렇게 깨어져 버렸다.
“내려야 해. 이제 다왔어.”
아쉬움을 뒤로하고, 왼손에 가득차있던 그 부드러운 느낌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살짝 뒤를 돌아 나가는 예림이의 목소리는, 그 어느때보다 떨리고 있었다.
“얌마! 술자리에서 뭘 그렇게 생각해?”
“응? 아...응.”
어제의 일을 생각하던 나는 인재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듯 후다닥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서 옆으로 살짝 치켜 올라가 야한 느낌을 주는 눈빛 하나와, 대각선 앞으로는 그와 상반되는 귀여운 눈망울 하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맞다. 나는 강한별과 오유민, 그리고 박인재와 술을 마시고 있었지.그제서야 나는 인재의 제안에 우리 넷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테이블 위에는 몇개의 술병이 놓여져 있었고, 이미 숨을 쉴때마다 내 코에 알콜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꽤나 들이부은 상태였다.
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제 예림이와 있었던 데이트 아닌 데이트가 계속해서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그리고 짜릿했던 그 버스안에서의 기억 때문이 아니었다. 그 날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때의 기억이 계속해서 떠오른 것이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조금은 어색한 거리를 유지하며 집까지 걸어야만 했다. 누나는 내가 엉덩이를 주무른 것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간혹 어색함을 깨려 밝은 대화를 하기도 했지만, 대화의 종지부가 찍히고 나서는 다시한번 분위기는 어두워졌다.
문제는 방안에 도착해서였다. 둘 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둘 다 먼저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결국 나는 샤워를 한다고 말하며 욕실로 들어가버렸고, 누나는 그 틈을 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우리 진실게임 할까요?”
상념속에서 어제의 일을 재생시키던 나는 강한별의 말에 다시 한번 화들짝 깨어나며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나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유민도, 인재도 동의의 뜻을 밝히며 흥미 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강한별은 슬쩍 내 쪽을 보며 미소를 지어 내 동의를 구했다.
“좋아.”
나는 그렇게 혀가 꼬부라지는 소리로 말했고, 인재 역시 취한 표정이었으며, 술이 약한 오유민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겉모습으로는 티가 나지 않는 것은 역시 강한별 뿐이었다.
그래. 잠시만 잊고 있자. 내가 어제밤 데이트가 끝나고 샤워를 하러 들어가서, 평소처럼 아침이 아닌 저녁에 욕실문을 빼꼼히 열고 자위를 시작했던 일. 그리고 누나가 욕실문이 열린것을 알면서도 또 한번 내 자위가 끝날때까지 란제리 차림으로 계속 왔다갔다 했던 일들을 잠시 머리속 한켠에 미뤄두지 않으면 계속해서 생각이 날 것만 같았다.
“대답하기 곤란할때는 소주 먹는 거에요.자 그럼 유민이 너부터 질문해.아무나 찍어서”
강한별은 새 소주잔을 주문하고는 그것에 술을 따랐다. 소매에서 튀어나온 가느다란 팔목이 떨리는 것으로 봐선 취하긴 취한 모양이었다. 맞다. 어제 있었던 누나와의 일을 생각하느라 집중하진 못했지만, 우리는 어영부영 모여서 술을 푸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그 새로생긴 호프집의 구석진 자리에서 말이다.
지목당한 오유민은 살짝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그란 눈망울이 나와 인재, 그리고 강한별을 한번씩 쓰윽 하고 훑어나갔다.그리고 그런 눈빛은 좌중을 한바퀴 돌고나서, 내 얼굴위로 안착했다.
“예영 선배.”
그녀의 지목에 인재의 표정은 살짝 찡그려졌고, 강한별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희미한 미소를 짓어 보였다.옆에서 인재가 담배를 피워물었는지 담배연기가 훅 하고 내 얼굴 쪽으로 뿜어졌고, 오유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누구에게 가셨던 거죠?”
“그때라니?”
“피씨방에서 둘이서 과제로 청첩장 만들었을 때요.”
“아...”
천둥번개가 치던 그 날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인재는 ‘둘이서’라는 말에 경악과 배신감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지만, 나는 그것을 철저히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숙모에게 갔었어.”
“숙모요?”
“응.천둥번개를 무서워 하시거든.”
오유민은 아~하는 탄성과 함께, 궁금증 가득했던 얼굴을 다시 웃는 얼굴로 되돌려 놓았고, 내 앞에 있던 강한별은 ‘누나 뿐만이 아니었나..’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솔직히 말해서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것 같은 인재의 차례였다. 아주 아주 당연하게도 인재는 오유민을 지목했고, 나와 강한별의 시선도 오유민을 향했다.
“이 안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푸하하. 웃긴 질문이었다. ‘ 이 안에’라는 질문을 쓰려면 오유민이 레즈비언이라는 전제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남자는 나와 인재 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나와 예영이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라는 질문을 아주 멍청하게 돌려 말한 것이다.
하지만 웃기게도, 가만히 생각하던 오유민은 술도 약하면서 벌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인재의 표정은 조금 전 보다 더 묘해지고 있었고 강한별은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다시금 술잔에 술을 부었다. 그 다음은 당연히 나라고 생각했는데, 강한별은 자기가 하겠다며 나를 바라보았다.
“예영 선배. 선배가 좋아하는 연상의 여자랑과는 진도가 나갔나요?”
나는 심하게 인상을 구기며 강한별을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선을 넘지 않았으니 파울이 아니야’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오유민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뭐야.김예영 너 연상이랑 사귀냐?”
갑자기 끼어든 인재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것이 진실은 아니니까, 진실게임의 룰을 벗어난 거짓말이 아니었다. 강한별의 질문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것은 답변하기 엄청나게 애매한 것이었다. 틀림없다. 이 여우는 내가 대답대신 술을 마실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술잔을 비우는 나를 보며, 오유민은 나와 강한별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계속해서 웃는 그 얼굴과는 많이 멀어진 느낌이었다. 부드득 하고 어금니에 이가 갈렸다. 여유로운 표정의 강한별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예영선배 차례에요.”
“나는 한별이에게 물을게.”
강한별은 어떤 공격이라도 해보라는 듯 느긋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누가봐도 예쁘고, 누가봐도 섹시한 얼굴이지만 속에는 어떤 얼굴이 자리잡고 있는지 모를 아이였다. 심호흡을 크게 한 나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돈을 위해서 맘에 없는 상대와 데이트를 한적이 있는지?최근 1주일 이내에.”
내 공격은 성공이었다. 언제나 도도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강한별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드는 것을 보는 건 큰 쾌감이었다. 유민이와 인재는 또 한번 화들짝 놀라며 다시금 강한별 쪽을 응시했다. 억울해 보이는 인재의 눈빛은 ‘내가 없을때 무슨일이 일어난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순간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던 강한별은, 너무나 쉽게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오며 술잔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분위기는 더더욱 무르익었다. 다시 일순(一循)하여 오유민의 차례였다.
“어떤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나요?”
내가 아닌 인재를 향해 묻는 질문이었다. 당연하게도 인재는 신이나서 누가 들어도 오유민의 인상착의와 성격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답변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그 말을 듣는 오유민의 시선은 인재가 아닌 나를 향해 있었다. 이것 참...두 여자의 각기 다른 시선을 받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썩 기분좋은것이 아니었다.
“첫 경험은 언제야?”
역시나 박인재. 선을 넘는 능력에 있어서는 동급최강이었다. 내 질문 이후로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던 강한별은 그렇다 치고, 그 질문을 들은 오유민의 표정역시 굳어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딱 봐도 더이상 술을 못마실 것만 같은 그녀는 술잔을 들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진실을 덮을수 있는 여력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진실게임이 진정한 의미의 진실게임이 되는 것은 술을 마실 여력이 없을 때 부터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요.”
칙칙폭폭. 옆에서 잔뜩 흥분한 박인재라는 기차가 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콧김에 테이블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여전히 굳어진 강한별의 표정과, 얼굴이 더더욱 빨개진 오유민의 표정이 내 눈에 같이 담겼다.
“뭐해? 다시 니 차례잖아.”
내 말에 강한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유롭게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내 모습을 조금은 의식한 그녀는, 진실게임용 질문이 아닌 다른 말을 꺼내었다.
“벌써 시간이 늦어서, 저는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에엥?뭔소리야 갑자기?”
“다들 취했잖아요. 시간도 늦었고..내일 1교시가 있는게 생각이 나서요.판을 꺠서 죄송해요.”
인재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강한별의 통보에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물론 강한별이 마음에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한 명이 빠지게 되면 진실게임의 판이 깨질 것이고, 그것 때문에 오유민에게 집적 거릴 ‘기회’를 놓치기 때문이겠지. 덕분에 나는 인재의 간절한 시선을 받아주어야만 했고, 어깨를 으쓱하는 나를 향해 강한별은 살짝 목례를 했다.
“저 이만 들어가 볼게요. 저 신경쓰지 말고 그냥 드세요.”
“나도..갈게.”
강한별의 말에 오유민이 살짝 몸을 일으켰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친구가 가는데 이런 자리에서 홍일점으로 남고 싶어하는 성격은 아닐 테니까. 인재의 표정에 허탈함이 가득찬 것은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바래다 줄게.”
“아니에요.저랑 유민이 같은 건물에서 자취해요.호수는 다르지만.”
“네.그냥 한별이랑 둘이 갈게요.”
바래다 주는 것까지 거절당한 인재는 더더욱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서 쟤들 좀 잡아줘 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철저히 무시하듯 말했다.
“조심해서 들어가. 우리도 곧 갈게.”
“네. 다음에 뵈요.”
강한별의 몸이 비틀거린다는 느낌이 들때쯤, 약간은 불규칙한 구두의 또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그녀들의 모습은 출입구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오유민은 살짝 고개를 돌려 내 쪽으로 꾸벅 인사를 했고, 나는 오른손을 들어 답해 주었다.
“아놔 씨발!”
“왜그래?”
“한별이가 다 파토낸거야.”
“파토?”
“응. 유민이랑 잘 될 수 있었는데! 아오!”
“...어딜 봐서.”
내 뚱한 표정에 인재는 담배값을 뒤적 거려 마지막 남은 한가치를 피워 물고는, 그것을 손으로 구겨 테이블위로 던져버렸다.
“야야. 유민이 술 약하잖아. 진실게임이 원래 달아오르게 하기엔 아주 좋은 게임인데..한창 불판이 달궈지는데 한별이가 찬물 뿌린거 아냐. 저 기집애는 왜 갑자기 집에 간다는 거야?”
“글쎄.”
“니가 한 질문 때문 아니냐? 그건 무슨 의미였냐?”
인재의 말에 나는 잠시 머뭇거리며 다른 핑계를 찾아야만 했다. 어차피 진실게임이 깨어진 판에 진실을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냥 별거아냐. 니가 강한별은 업소에 다닐 것 같다는 말을 해서, 조금 돌려 질문했을 뿐이야.”
“음..한별이 술 마신걸로 봐선 내 말이 100프로 맞아.”
“그래..참 업소녀 구별할 능력있어서 좋겠다 자식아.”
“새끼가 까칠하기는...야. 그냥 엉아가 낼게. 오늘은 우리도 여기서 쫑 하자. 고추들끼리 술처먹어서 뭐하냐.”
“그러던지.”
나 역시 인재와 단둘이 술먹는 것은 사절이었다. 어차피 나도 거나하게 취했고, 시간은 10시를 지나가고 있으며, 지금 가면 누나가 잠들어 있을테니까.
우우웅..
품 안에서 느껴지는 진동소리에 몽롱해진 눈을 비비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인재는 계산서를 보며 열심히 얼마가 나왔는지 가늠하기에 바빠보였다.
-강한별-
액정에 표시된 발신자의 이름은 방금 전까지 내 앞에 있던 아이였고, 그것은 전화가 아닌 문자메세지 였다.
-오늘 자고 갈래요?-
푸핫. 나도 모르게 실없이 웃어버렸다. 나에게 한방 먹은게 분해서 설욕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그때처럼 또다시 각자의 머리속에 있는 그 인물들을 떠올리기 위함인 걸까?
답은 모르지만 웃음이 나왔다. 오유민과 같은 건물에 사는데, 그녀와 헤어지고 보낸 걸까? 아니,강한별이라면 옆에서 오유민이 걷고 있어도 태연하게 그런 문자를 내게 보낼 아이였다.그래. 역시나, 예림이가 영화를 보고 나서 했던 그 말이 옳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아이는,반드시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다. 언제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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