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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어느 멋진날 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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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났다.

새학기, 혹은 시작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었던 차가운 바람은 며칠 사이 따뜻한 난풍으로 바뀌어 있었다.덕분에 내 옷도, 캠퍼스를 활보하는 이들의 옷도 점점 가벼워져 갔다.

누나는 본격적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월,수,금요일에 나간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저번에 화상채팅을 했던 목요일의 약속이 유효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조금씩은 초조해져 왔다. 한번에 속옷을 보여주는 것은 힘든 모양인지, 내가 아무리 샤워를 하며 욕실문을 빼꼼히 열어도 망설이는 누나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분명히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려 애를 쓰는 누나의 모습이 사뭇 귀엽게 느껴졌다.나 역시 보고 있다는 것을 최대한 내색 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평상시와 다를 바 없다는 인상을 주기위해 부던히 노력해야만 했다.

하지만 누나는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었다.집에 있는 시간에도 헝클어진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만 같았다.늘 나보다 먼저 일어나 샤워를 했고, 늘 맨 얼굴이 아닌 피부에 무언가를 바른 투명한 메이크업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조금씩 조금씩 여자의 향기를 잃지 않으려 하는 예림이의 모습은 내 평상심을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는 듯했다.

-음대를 지원하는 남자애 둘이랑 여자애 하나를 가르치기로 했어. 부자집이라서 꽤 페이도 셀 것 같아.-

자랑스레 이야기 하며 수줍게 웃는 그 하얀 얼굴을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입에 걸렸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누나에게 레슨을 받는 그 두 명의 사내녀석을 향한 요상한 질투심도 똑같이 고개를 들었지만, 나는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으며 ‘힘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화상채팅에서의 약속을 지킨 것은, 화상채팅에서 밤비와 내가 만나기로 한 목요일의 하루 전인 수요일날이 되어서였다.나는 여지 없이 약간의 기대감을 안고 욕실로 향했고, 여지 없이 서투른 손길로 빵이나 스프 따위의 아침을 준비하던 누나를 향해 ‘샤워 할거야’라고 힘을 주어 말해 버렸다. 뒤돌아 서있는 그녀의 고개가 희미하게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나는 욕실로 들어가 훌렁 훌렁 옷을 벗었다.

쏴아아아.

갑자기 옷을 벗어서 급격히 내려간 체온에, 샤워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수증기가 닿자 조금은 녹는 듯한 느낌이 들어왔다. 아무리 날씨가 봄이라는 타이틀을 되찾았다 한들, 자고 일어나서 체온이 떨어지는 것까지는 막을수 없는 모양이었다.

의식적으로 물소리가 들리도록 샤워기를 틀고나서, 천천히 문쪽으로 다가가는 내 발걸음은 떨리고 있었다.처음보다 익숙해졌다고 해봐야 훔쳐보는데 당당할 자가 있을리 없었다. 나는 어느새 아침에 정신이 들자마자 느끼는 이 묘한 긴장감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은 보여줄까?

문고리를 잡고 소리가 나지않게 돌리면서, 내 마음속 자신에게 되묻는 내 모습이 우스웠다. 내가 인재의 아이디로 화상채팅에서 밤비에게 제안을 할때는 잘 몰랐지만, 내가 제안한 내용들은 현실이 개입하게 되면 상당히 많은 제약이 있는 것이었다. ‘속옷 차림을 보여주세요’라는 것은 말로는 정말 쉬운 것이었지만, 그것이 말이 아닌 실제 상황이 되면 한번쯤은 망설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요 며칠은 그런 누나의 망설임만을 보며 아쉬운 마음으로 욕실문을 닫아야만 했었다.

문은 조용히 열렸다. 아마 보이진 않아도 수증기가 스멀스멀 바깥쪽으로 세어나가고 있을 것이지만 상관없었다. 최소한 내가 숨어서 본다는 양심선만 지켜주면 되는 것이었다. 어차피 누나는 내가 보는 것을 알고 있고, 나 역시 누나가 그 사실을 안다는 걸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요리를 하던 예림이의 몸이 살짝 경직되었다.어깨가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녀는 안절부절 하기 시작했다. 의식적으로 욕실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으려 애를 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까 말까 하는 작은 틈새였지만, 그녀는 마치 현미경으로 관찰당하는 느낌을 받는 것처럼 몸을 파르르 하고 떨었다.

조금씩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는 누나의 행동에 오늘도 아니구나 하는 마음으로 돌아서려는 바로 그때, 그녀는 천천히 침대쪽으로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내가 보고 있는 틈새로 미묘한 사각이 발생하는 바로 그 지점으로 그녀는 천천히 걸어나갔다. 문 틈새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동선을 따라가며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예림이가 집어 든 것은 입고 있던 원피스가 아닌 트레이닝 복 이었다.

심장이 쿵쾅 거리기 시작했다. 누가봐도 뜬금없이 옷을 갈아입는 것이지만 그 행동이 주는 의미는 실로 큰 것이었다. 그녀는 동생이 지켜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시도를 하는 것이었다.

예림이는 바보가 아니었다. 화상채팅에서 만난 낯선 남자의 말을 무조건 따르는 순둥이도 아닐 것이다. 그런 그녀가 그 말도 안되는 내기에 응하는 것은, 그녀 역시 흥미가 있고, 흥분하기 때문이라는 가설때문에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내려갔던 체온은 다시 반대 방향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몸의 무게중심으로 피가 쏠리는 느낌을 받는 그때, 내 입에서 깊은 호흡이 뿜어져 문 틈새로 세어나갔다.

예림이는 나를 등지고 서서, 천천히 앞치마를 분리해 내고는 하얗게 드러난 어깨를 어루만져 원피스의 어깨끈을 팔쪽으로 미끄러 뜨렸다. 부드럽고 얇은 천조각이 하얀 살결의 능선을 타고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려가는 모습은 내 눈을 크게 흡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소리가 너무나 크게 내 귓가에 들려왔다. 분명 그녀도 들었을 테지..하는 마음에 더욱더 대담해진 나는 조금 더 문을 열어 시야를 넓혔다. 곧이어 어깨끈이 풀린 원피스는 스르르 그녀의 발목까지 떨어져 버렸고, 흡사 누군가가 붙잡고 뒤흔드는 듯한 충격이 머리속으로 띵 하며 전달되어 왔다.

아이보리색 란제리를 착용한 누나의 뒷모습은 숨이 막혔다.채팅에서의 작은 창으로 보이던 그 모습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선명한 영상이 되어 내 눈으로 전송되고 있었다.팽팽하게 당겨진 힙과, 브라의 후크가 등 뒤에서 힘겹게 맞물려 있는 그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흥분과 짜릿함 그 자체였다.

‘헉!’

나는 그렇게 외칠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려서 섰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욕실 문이 아닌 티비쪽을 의식적으로 향해 있었고, 얼굴에는 붉은 홍조가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누나는 나처럼 조금 깊은 심호흡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완벽했다.

화상채팅의 작은 화면으로 이미 확인한 뒤였지만, 실제로 봄으로서 그 완벽함의 실체를 확인사살한 기분이었다. 화면으로 보았던 것보다 더 커 보이는 가슴을 아슬아슬 하게 받치고 있는 브레지어에 쉴 새 없이 눈이 갔다. 조금은 통통한 볼에 비해 가냘픈 허리. 그리고 팬티의 밑부분으로 보이는 긴 다리가 가슴을 설레게 했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유년기를 보내서 일까? 그녀의 몸매는 너무나 서구적이었다. 볼살이 약간 있어 귀여운 얼굴과는 상반되는 몸매는 아이러니 하게도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의 미국 유학생 여자애들이 햄버거나 피자 등등의 트랜스 지방에 쩔어 몸매가 망가지는 것에 비해, 그녀는 여자로서 살이 있어야 할 부분만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대부분의 마른 여자들이 가진,징그럽다고 느낄 정도로 허리가 아닌 통통하면서도 굴곡이 뚜렷한 선명한 몸매였다.

그 하얀 볼을 붉게 물들인 누나는 천천히 침대위로 걸터 앉았다. 바로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닌, 시간을 두고 내게 보여주는 듯한 그런 뉘앙스에 아련한 흥분감이 몰려 들었다. 문 틈새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고, 나는 오늘도 거대하게 솟아오른 분신을 움켜쥐고는 누나의 란제리 차림을 바라보았다.

누나의 그런 모습은 마치 어서 자위를 해보라는 도발처럼 느껴졌다.바로 트레이닝 복을 입어 버리면 의미가 없다는 듯, 내게 흥분을 해소할 시간을 부여해 주는 것만 같았다. 길고 긴 망설임의 시간동안 그녀는 조금 더 대담해져 있는 듯했다. 비록 얼굴은 부끄러움인지 흥분인지 모를 홍조로 가득 차 있었지만, 연신 내 아랫도리를 잡고 흔드는 나를 도와주기라도 한다는 듯이 누나는 침대위에 걸터 앉아 내 쪽에서 아주 잘 보이는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다.

“헉..헉..”

그녀가 대담해지니 나도 대담해졌다. 어느새 입 사이로 거친 호흡소리가 조금의 여과과정 없이 흘러나왔다. TV가 꺼져 있어 고요한 방에는 흡사 천둥소리 처럼 느껴질 만한 소리였지만 그녀는 절대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둘의 무언의 약속이었다. 서로의 내숭, 서로의 모르는 척이 깨어지는 순간 이 미묘하고 아련한 흥분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내숭이 깨어지는 순간 더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에서 일 것이다. 아마도 나와 예림이의 양심이 쌓아놓은 철책의 최종 방어선이 딱 여기까지 일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가 그 방어선을 침입하는 그 순간,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는 그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알고 있지만 그것 역시 ‘모르는 척’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는 와중에 내 흥분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상상속에서는 눈앞에 보이는 브라의 후크를 풀고, 부드러운 살덩이의 감촉을 두 손가득 느끼고 있었다. 내 상상속에서 누나는 한 번의 반항도 없이 내 분신을 받아들였고, 나는 상상속에서 누나의 몸안에 뜨거운 정액들을 뿌리고 있었다.

“허억..허억..”

욕실의 바닥으로 후두두둑 무언가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왔다.누나는 여전히 내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은채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흡사 내가 끝난 것을 훤히 알고 있다는 듯, 그제서야 그녀는 트레이닝 복을 집어 들고 천천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벌겋게 출혈된 불기둥에서 손을떼고, 이제는 너무나 노골적으로 열려 있는 욕실의 문을 천천히 닫을 때쯤엔, 누나의 몸은 긴 면 트레이닝 복으로 완벽하게 가리워져 있었다.

쏴아아..

샤워기의 물줄기로, 잔뜩 뿌려진 정액들이 배수구 쪽으로 쓸려나갔다. 아직도 흥분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내 팔과 다리는 힘겹게 나를 세면대 쪽으로 밀어 넣었다. 머리털이 모두 서 있는 것만 같은 충격과 흥분, 그리고 긴장감으로 인해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두근거렸다.

남자라면, 누구나 자위를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 자위 이후에 밀려드는 허무함과 후회감 역시 느낀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경험과, 그러한 감정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지금은 달랐다.

‘조금만..더..조금만..’

자위를 하면 욕심이 없어질 줄 알았다. 짜릿한 양심의 가책으로 한없이 반성을 할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욕심은 눈 앞에 있는 산을 넘어 더 높은 산을 오르길 바라고 있었다. 란제리에 감춰진 그녀의 속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같이 타올랐다. 분명 예림이도 이것을 즐기고 있노라고, 정체 모를 한 녀석이 내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알몸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거야. 그래, 보는 것만이야. 라고, 그 녀석은 쉴새없이 감언이설로 나를 꼬드기고 있는 듯했다. 뜨거운 물을 몸에 맞아도, 진정 하려고 크게 심호흡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그때부터 이미 늦은 것이다.





“무슨 생각하세요?”

아무말 없이 걷다가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차...까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2교시가 끝나고 밥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고, 나는 거기서 오유민을 만나 걸어오고 있었지.

“아..별거 아냐.”

약간은 케쥬얼한 치마에, 얇은 가디건을 입은 오유민의 모습은 마치 파릇파릇한 신입생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한 파스텔톤 일색이었다.단발머리, 그리고 동그란 눈의 귀여운 외모와 묘하게 잘 매치가 되는 복장이었지만,애석하게도 그 쪽으로 시선이 많이 가지는 않았다.요새는 이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나 많아진 탓이었다.

“사주시는 거죠?”

“응?아..응.....응?”

아무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깜짝 놀라 옆을 보니, 오유민은 눈웃음을 치며 귀엽게 웃고 있었다. 당했구나. 나는 저런것에 안 당하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역시 오유민도 강한별과 마찬가지로 보통아이가 아닌 듯했다.

“저는 카페테리아도 좋아요.”

“원래 그리로 가려고 했어.”

“치..”

괜히 새침한 표정을 짓는 오유민에게, 차마 인재와의 일을 묻기 힘들것 같았다.뭐 인재의 입을 통해 섬씽따윈 실패였다 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적어도 이 모습을 그 녀석에게 들켜서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진 않아 주위를 두리번 거려 녀석을 찾았다. 내가 아는 박인재는 틀림없이 ‘친구가 찜한 여자와 밥을 쳐먹어?’하면서 쌍심지를 켜며 나를 피곤하게 할 것이 틀림없었다. 녀석의 피같은 ‘화상채팅 포인트’에 기생하고 있는 나로서는 분명 피해야 할 일이었다.

이미 2500원짜리의 뻔한 식단에 질린 학생들이 많기 때문인지 카페테리아는 평소와 달리 많은 사람이 있지는 않았다. 반사적으로 두리번 거리며 숙모의 모습을 눈으로 찾은 나는 식권 두 장을 구입해서 한 장을 오유민 쪽으로 내밀었다. 시덥지 않은 밥 한끼 사주는 것인데도 웃으면서 인사하는 오유민을 보니, 괜시리 비싼 것을 사주지 못해 미안한 생각도 살짝 고개를 들었다.

“음.오늘도 한식인가요?”

“싸구려 돈까스 보단 훨씬 나을걸.”

하지만 20살 짜리 여대생이 선뜻 된장찌개의 줄에 서기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머뭇머뭇하던 오유민은 그대로 돈까스 줄을 고수했고, 나는 비교적 줄이 적어 수월한 한식메뉴의 줄에 서서, 금방 식판을 받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오늘은 나오지 않은 걸까?’

한참을 두리번거려도 숙모의 모습, 혹은 ‘손미현’이라는 명찰을 단 젊은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주방에서 일을 하기 때문인 걸까? 분주하게 밥솥을 나르는 아주머니들을 보니, 숙모가 저런 힘든 일을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씁쓸해져 왔다. 숙모라면...그렇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식당일을 하는 것보다 디자이너나, 혹은 잡지사의 편집장 같은 커리어 우먼의 직종이 훨씬 더 어울렸다. 30대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갖췄고, 얼굴도 ‘동안’이라 부를 수 있는 손미현이라는 여자에게는 그것이 맞는것 같았다. 만약 삼촌이 큰 부호라고 가정한다면, 그 집에서 손에 물도 묻히지 않고 고상한 취미를 즐기는 사모님이 가장 어울리겠지만 말이다.

“선배. 혹시 다음수업 있어요?”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밥공기의 수증기를 쐬며 한참이나 숙모의 모습을 찾던 나는, 이제서야 식판을 받고 와서 말을 거는 오유민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큰 눈망울위로 호기심을 잔뜩 덮어 씌운 채로 나를 응시하는 오유민을 보며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슨 수업인데요?”

“결혼과 가족...일껄?”

“정말요?”

이게 그렇게 신기한 일인 걸까? 뭐...교양과목이라는 게 원래 저런 시덥잖은 과목들도 꽤 많은 건인데... 과목의 이름이 신기한 건지 그녀는 마치 10년동안 헤어진 친구를 길에서 만난 것마냥 반가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도 그거에요.”

“음? 그거 1학년도 듣던가?”

“그런것 같은데요?”

그제서야 나는 결혼과 가족이라는 과목이 1학년1학기때 자동적으로 신청되는 과목이며, 더불어 내가 1학년때 학점을 이수하지 못했음을 인지하고야 말았다. 꼬박꼬박 출석만 하면 거의 그냥 학점을 주는, 시험조차 보지 않는 과목인데 1학년때는 왜인지 잘 출석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 사소한 것도 잊어 버리고 있는 것을 보니, 요 근래 내가 어딘가에 정신줄을 놓고 다니는 것이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근데 누굴 그렇게 계속 찾으세요?”

“응?”

내 딴에는 아주 태연하게, 아무도 모르게 식사를 하는 척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유민은 내 눈이 좌우를 살피는 것을 분명히 본 모양이었다. 돈까스를 먹기좋게 자르면서 그런 것까지 관찰하다니...역시 여자란 동물은 남자와 다르게 한 번에 두가지 행동이 가능한 특이한 종족이었다.

“아냐. 아무것도.”

순간 오유민의 얼굴에서 약간의 실망감과 정체모를 뚱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는,그저 숙모는 홀에 잘 나오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내린채 식사에 열중하려 수저를 들 뿐이었다.

“한별이네 집에 놀러 가셨어요?”

문득 수저를 들어 밥을 떠먹으려 하던 나는 문득 들려오는 오유민의 말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여전히 앞에 놓인 음식들은 건드리지도 않은 채,그리고 여전히 호기심이 섞인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쪽으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한별이가 그래?”

나는 최대한 신경쓰지 않는 다는 뉘앙스를 주려 노력하며 평온한 말투로 되물었다. 오유민이 나와 강한별 사이를 오해해서는 절대 안되는 그런것은 아니었지만,반대로 생각했을때 오해해서 좋을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여자 후배의 집에서 혼자 나오는 남자선배의 모습이, 그것도 그런 밤에 나오는 모습이 좋게 보일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그렇게 말하던데요.게다가 저도 그 건물 살거든요.한별이가 얘기 안했어요?”

나도 모르게 뿌드득 하고 이를 갈고 말았다.강한별 이 자식..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문득 나는 모르오 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강요하는 대답대신 소주를 넘기며 씨익 웃고 있을 듯한 강한별의 표정을 상상하며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아..뭐..그냥. 별거 아니었어.”

“뭐였는데요?”

동글동글한 귀여운 얼굴을 했지만,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묻는 오유민의 모습에 괜시리 땀이 흘렀다.

나는 잠시 망설이는 실수를 저질렀다.대충 뭐 전해줄 것이 있었다는 식의 거짓말을 하면 그만이지만, 강한별이 오유민에게 뭐라고 이야기 했는지 알 겨를이 없으니 함부로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왠지 오유민은 답을 뻔히 알면서도 내게 묻는 듯한 느낌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술마셨어.”

“단둘이요?”

“응.”

솔직히 이야기 하는게 최상일것 같아 나는 그렇게 말을 해 버렸다.물론 그것이 100퍼센트 정확한 솔직함이 아니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포크로 돈까스를 뒤적거리던 오유민은, 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한별이는 선배가 뭐 전해줄게 있어서 잠깐 들른 거라던데.”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는 오유민과 있음에도, 상당히 어색한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결혼과 가족’의 강의를 들으러 강의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유민은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고, 나 역시 예림이의 일, 그리고 숙모의 일, 강한별 과의 일 등등을 생각하느라 시선은 땅을 향해 있었다.

“한별이는 없는것 같네요.”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적당한 대답거리를 찾지 못하고 고개만을 끄덕일 뿐이었다.내 어설픈 반응에 신이 났는지, 그녀는 나를 놀리듯 내가 묻지도 않은 강한별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걔는 늘 누구한테 전화만 받으면 수업이고 뭐고 팽개치고 나가더라고요. 중요한 약속이라나...”

아무래도 사촌오빠인 모양이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걸렸다가 다시 들어갔다. 뭔가 속내를 드러낼 듯 드러내지 않는 강한별의 태도가 어이없기도 했고, 자꾸만 의식적으로 강한별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내 반응을 살피는 오유민의 모습도 의아했지만, 다행히도 적절한 타이밍에 교수가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일단락 정리되었다.

“선배.”

“응?”

“그러고보니까 우연이네요.”

“뭐가?”

“보통 우리학교에서 1학년 2학년은 수업이 겹칠 확률이 조금 적잖아요.근데 선배랑 나랑은 같이 듣는게 두개인데요?”

“우연인가 보지 뭐.”

“흐음..필연일 수도..”

“뭐?”

“아니에요.”

내가 확 하고 고개를 돌리자, 오유민은 내쪽을 바라보지 않고 교수쪽을 보며 싱글거리고 있었다. 이녀석도 저녀석도 다 속을 알수 없는 후배들 뿐인거 같아 기분이 묘했다. 어쩌면 단순 무식한 박인재가 오유민과의 화끈한 하루밤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수업은 중간고사까지의 프로젝트성 수업으로 진행됩니다.결혼과 가족이라는 과목에서 스스로의 미래도 결정하고,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교수는 차분하게 수업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역시나 주위를 둘러봐도 대부분 신입생들인 듯한 강의실 내의 광경이었다.경제학과가 아닌 다른 과의 학생들도 종종 있는 듯했지만, 1학년 공통 과목이라는 것 때문에 2학년 이상의 학생은 나를 포함해서 극히 드물 것이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가정을 갖게 되고, 가장으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을 갖게 될 날도 있을거에요.가정은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입니다. 이 수업은 여러분들이 앞으로 가정을 갖게 되면서 벌어질 일들에 대해 미리 체험하는 시간입니다.고로...”

올해 서른은 조금 넘었을까?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교수는 연신 빙긋 웃으며 학생들을 향해 설명하고 있었다. 숙모처럼 튀는 용모는 아니었지만,교수라는 타이틀을 놓고 보았을 때 상당히 고운 외모를 갖고 있는 축에 속하는 여교수였다. 젊은 여교수라는 것이 은연중에 흥미로 작용하는 모양인지, 강의실 내에 있는 많은 학생들은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상당히 재미없는 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부터 2인 1조로 조를 짜서 가상 부부로 설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순식간에 강의실에 경악에 찬 술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유민은 재밌겠다 라는 말을 하며 킥킥 거렸고, 대부분 민망해서 그딴 것을 어떻게 하느냐는 반응을 보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가상 부부? TV버라이어티도 아니고 그딴것을 꼭 해야 하나? 이제서야 왜 내가 1학년때 이 수업을 땡땡이 쳤는지 기억이 나는 순간이었다.

“물론 성비율이 맞지 않아서, 남자끼리 커플이 된 조도 있을거에요. 제가 임의로 조를 짰으니까, 지금부터 나눠드리는 프린트를 보고 자신의 파트너가 누군지 확인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확인이 되셨으면 앞으로의 강의는 파트너와 함께 앉도록 합니다. 아셨지요?”

밀려드는 귀찮음과 짜증에 이마를 움켜쥐고 있는 동안, 오유민은 설레는 표정으로 맨 뒷자리인 우리 자리까지 프린트가 돌아올때까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를 확인하셨으면, 다음 시간까지 청첩장을 만드는 것부터 과제로 드리겠습니다. 결혼과 가족인 만큼 첫 과제로서 청첩장을 만드는건 당연하겠죠? 각자 파트너와 아이디어를 모아서 개성있는 청첩장을 만들어 제출해 주시길 바랍니다.”

듣는 것만으로 오싹할 정도의 과제가 발표되고 나서도, 맨 뒷자리인 우리 자리까지는 프린트가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TV에서 나오는 가상 웨딩 버라이어티에도 시덥잖은 일을 한다며 체널을 돌리던 내가, 실제 대학에서 그런것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두 번의 낙제란 허용되지 않는 것이기에 나도 오유민과 마찬가지로 프린트를 받자마자 허둥지둥 내 파트너를 찾아야 했다. 수강자들은 생각보다 많은지 찾는 데는 꽤나 오랜시간이 소요되었고, 나는 맨 밑의 칸까지 내려가고 나서야 내 이름과 학번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821070 김예영, 20921008 오유민-


“참..우연이네요. 이것도.”

멍하니 그 프린트를 바라보는 나를 보며, 오유민은 어깨를 으쓱 하는 포즈를 지어 보이며 웃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온갖 귀찮은 일에 대한 고찰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오유민과 함께 있던 강의실을 빠져나와, 후문으로 향할수 있었다.그녀는 마지막에도 수업이 있어 같이 돌아가지 못한 다고 아쉬워 했다. 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그때에, 오유민은 ‘우리 청첩장 이쁘게 만들어요’라는 인사를 함으로서 내 몸을 쭈뼛하게 만들고 나서야 다음 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후우..”

최근들어 화상채팅이나 술자리같은 일들 때문에 늘 늦게 들어갔기 때문인지, 수업이 끝나고 바로 집에가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누나가 집에 없을 테지. 오늘은 그녀가 과외를 하는 수요일이기 때문이다. 누나와 같은 방안에 있는 것은 분명 두근거리고 설레는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내가 먼저 집에 들어가 있는 것이 훨씬 부담감이 덜 할 것 같았다.

“어어?”

문득 버스 정류장 쪽으로 다가가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너무나 익숙한 한 여자가 그곳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는 그 정류장을 환하게 비춰주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자세히 보니, 그 곳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숙모였다.

여전히 수수한 옷차림을 했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단아함은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수수한 치마에 수수한 겉옷을 걸쳤을 뿐인데 마치 봄 기운에 신이 난 소녀를 보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자아내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걷고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린 나는, 황급히 그리로 달려가 숙모의 팔을 붙잡았다.

“어어? 예영이?”

누군가가 팔을 붙잡으니 깜짝 놀라는 듯한 모션을 취한 그녀는, 그 주인공이 나라는 것을 알자마자 환하게 웃어주었다. 별 것 아니었지만, 오히려 예전에 작은집과 사이가 좋았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장난이었다. 두 번의 술자리로 숙모와 친해진것 같아 기분이 좋아 있을 그때에, 숙모는 베시시 웃으며 한 손으로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결을 정리했다.

“이제 끝난거에요?집에 가는 거?”

“네. 숙모도 지금 퇴근하는 거에요?”

“보시다 시피요.예영이도 버스로 다니나 봐?”

“네.”

처음으로 반말을 한 숙모의 말에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지하철을 통해 가면 훨씬 손쉽게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즉흥적으로 나는 ‘버스로 통학하는 대학생’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몇 번타고 가요?”

“그게..”

버스로 통학하지 않으니, 바로 대답을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삼촌이 살던 동네로 가는 버스의 번호를 열심히 기억해 내려 애를 써야만 했다. 너무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약간의 머뭇거림 끝에 나는 가까스로 기억해 낸 버스의 번호를 말해주었고, 숙모는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어?나랑 같은 거네요?”

“정말요? 우연이군요.”

오유민에게 들었던 그 우연이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숙모에게 사용하고 있었다. 다행히 숙모는 내가 오유민에게 느꼈던 수상함과 이상함을 느끼지 않은 듯 그냥 웃어주기만 할 뿐이었다.

“으음. 아까 식당에서 같이 밥먹은 여학생은 여자친구?”

“에에?”

장난스럽게 묻는 숙모의 말에 나도 모르게 아연실색해버렸다. 보고 있었다는 건가? 내가 당황을 하니 그녀는 소리를 죽여 쿡쿡 하고 웃었다.

“보고 있었던 거에요?그렇게 찾아도 안보이더니.”

“내가 잘 숨어 있었던 거에요. 여자친구를 앞에두고 그렇게 두리번 거리는 건 실례에요.”

정말로 숙모는 내가 두리번 거리는 모습까지 모두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괜시리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 들며, 볼이 뜨끈뜨끈 해졌다.

“예영이는 그런 타입을 좋아하는 군요?”

“그냥 후배에요.”

“에이.되게 귀엽던데 왜.”

“아이참. 진짜 아니에요. 그냥 같은 과 후배인데요.”

수상하다는 듯한 숙모의 표정에 나는 있는 힘껏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 모습이 그녀를 더 재미있게 만든 모양인지,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나는 숙모의 의심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변명을 해야만 했다.

버스의 안은 한산했다. 나는 습관처럼 맨 뒷자리에 가서 앉았고, 가까운 곳에 앉으려던 숙모는 그런 나를 보며 눈을 흘기더니 결국 내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맨 뒷자리가 약간 높은 탓에 내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 올려주어야 했고,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숙모의 부드러운 손을 잡아 볼수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내 옆에 앉아 무릎밑으로 몇번이고 치마를 잡아 당기고 나서야, 편안한 포즈로 앉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밥 맛있었어요?된장찌개 먹었죠?”

“와..그런것도 다 보고 계신 거에요?”

“된장찌개 만들때 재료는 제가 다 다듬었거든요.”

“으휴. 어쩐지 너무 맛이 없던데.”

오만상을 찌푸리며 웃어보이는 내 모습에 숙모는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울상을 지었다. 내가 신이나서 찌개의 내용물들이 설익었다고 핀잔을 줄 그때쯤, 숙모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맛이 없었으면서 애인앞이라서 맛있게 먹는 척했구나?”

“아휴. 내가 졌어요. 됐죠?”

“조카님은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유명한 말도 몰라요?”

“잘 알긴 하는데, 이 상황에서는 강한 부정만이 현명한 선택인거 같아요.”

내 말에 그녀는 소리죽여 웃었다. 사람이 많이 타지 않아 유달리 덜컹거리는 버스는 어디론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숙모가 내리면 나는 집에 어떻게 가야하지? 라는 생각에 잠길 틈도 없이, 커브를 돌때마다 내 왼쪽 어깨에 부딪히는 그녀의 어깨 감촉이 주는 기분좋은 향기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집에 가면 뭐해요?”

“음..공부도 하고..누나랑 이야기도 하고 그러죠.”

사실 둘 다 거짓말 이었지만,왠지 모르게 숙모의 앞에서는 내 자신을 포장하려는 거짓말이 너무나 술술 튀어나왔다. 다행히도 그녀가 내 거짓말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숙모는요?”

“글쎄요. 나는 가서 집안일도 해야하고..밥도 지어야 하고.물론 삼촌은 집에 없겠지만요.”

씁쓸한 그녀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했다. 그때의 그 젊은 여자를 만나러 가는 건가요?하는 개념없는 질문따위는 애초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괜시리 내가 되물어 스트레스를 준 건가?하는 미안한 마음에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와! 그럼 제가 가서 삼촌 행세를 하면 되겠네요?”

“투아웃인거 잊고 있었나봐요?아웃 카운트 하나는 아껴써야죠.”

조금은 선을 넘어선 능청스런 내 농담에 숙모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그녀에게 이런 재치가 있을 거라곤 예전에 상상하지 못했었는데...아이러니 하게도 작은집과 우리집이 의절을 하고 나서야 숙모와 나는 훨씬 더 가까워 진것만 같았다.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무심코 튀어나온 내 말에 숙모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웃음뒤에 눈물이 감춰져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조금 저렸지만, 이미 결혼전부터 통제 불능이었던 삼촌을 지금 돌릴수 있는 가능성은 너무나 희박해 보였다. 차라리 내가 선을 넘어 그녀를 웃게 만든다면, 능구렁이 조카가 된다 하더라도 그 편이 훨씬 나았다.

“나 먼저 내릴게요. 조심해서 가요.”

“에..벌써?”

나도 모르게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숙모를 바라보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렴풋이 보이는 어둠사이로 작은집이 있는 동네로 들어서 버린 것이었다. 예전에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종종 찾아갔던 그 동네를 보니 새삼 예전에 보았던 숙모의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왔다.

맞다. 지금이나 그때나 숙모는 예뻤다. 왜 천사같은 이런 여자가 우리 삼촌에게 시집을 왔을까 하는 생각은 사춘기였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삼촌 역시 본래 가지고 있던 성격이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숙모와 나와의 가까워진 관계 뿐이었다.

“들어가세요.그리고 다음에 댁에 놀러갈게요.”

내 말에 숙모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는 웃을 뿐이었다.뒷 문이 열리고 그녀는 천천히 내렸고, 창문을 통해 비춰지는 내 모습을 향해 하얀 손을 흔들었다. 숙모가 웃는 그 모습이 조카를 향한 것 치고는 너무나 밝다는, 내 나름대로의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는 동안 버스는 다시금 숙모가 서있는 정류장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데..이제 집에 어떻게 가지?’

내가 생각해도 정말 웃긴 짓을 해버린 것이었다. 내가 이걸 타고 귀가하기엔, 이 버스는 우리집의 근처에도 지나가지 않는 너무나 쌩뚱맞은 노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새들어 평소의 나 답지 않는 실없는 짓을 많이 한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얼른 벽면에 부착된 노선도를 바라보았다.

자세히보니, 그것은 시내의 번화가를 포함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번화가에 있는 지하철역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면 우리집까지 한번에 갈 수도 있을것 같았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혼자 있을때엔 여러가지 생각에 정신이 없는데, 숙모나 누나와 있을때는 그것들이 싹 잊혀지는 것이었다. 흡사 계기월식처럼 교묘하게 내 안에 있는 갈등이 덮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한차례의 월식이 끝이나면, 또다시 알 수 없는 갈등이 내 몸 구석구석을 달빛처럼 비추고, 부끄러운 치부를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내 안에서 존재하는 고민들이, 모두 누나,숙모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끼이익.

버스는 정류장에 도착하여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를 울려대며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으로 가까워져 오는 듯했다.그나마 몇 명있던 승객들이 모두 이 정거장에서 내리는 듯, 벨은 이미 눌려져 있었고 대다수의 손님들은 하나 둘 씩 뒷문으로 모여들었다. 나 역시 내리기 위해 몸을 일으켰고, 뒷문으로 향해 드리워진 줄의 맨 뒤에서서 아무런 생각없이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

나도 모르게 경악과 의아함에 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승객들은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창가쪽에 가까이 서서 붙으며 연신 내 눈을 의심했다.너무나 익숙한 자동차 한 대가, 번화가의 길가에 비상등을 켜고 정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차문을 열고 내린 한 남자는 내 동공을 더욱 크게 확장시키고 있었다.

그 사람이었다. 내가 방금까지 동승했던 여인의 남편. 우리 아버지의 동생이자, 의절을 하고 남처럼 지냈던 가족. 고등학교 시절부터 내게 은근한 질투심을 부여해 주었던 그 사람. 손미현이라는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도, 그녀를 울리는 사람.

삼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도. 그리고 카센터를 하며 자신이 개조한 특이한 외관의 차를 갖고 있는 것 역시 그대로였다. 자신의 아내는 학교 식당에서 일을 하는데, 어울리지도 않는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어른답지 않은 철없음 역시 그대로 인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다수의 손님들은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지만 나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이 학생! 안내릴거야? 문 닫는다?”

나만 홀로 남아있는 고요한 버스 안에, 기사가 나를 향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아무런 대꾸조차 해 줄수 없었다.삼촌은 내 시야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조수석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삼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한 젊은 여자가 천천히 그 차쪽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몸은 조금도 움직여 지지 않았다.

삼촌이 열어준 조수석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하며 탑승하는 그 젊은 여자는,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이 아닌 강한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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