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라인(REDLINE) 1부-5
5. 무서운 여자.
2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눈 앞에 두고 나는 학교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대학교 근처의 원룸으로 이사를 했다. 그냥 단칸 셋방이면 된다고 했지만, 아빠는 내 말과 상관없이 원룸을 전세로 얻어 주었다.
이사하는 날, 엄마는 오지 않았다. 아니 내가 이사하는 줄도 몰랐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사 가기 전날까지도 엄마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자식은 지수 하나 뿐인 양 지수만을 챙길 뿐 나는 아예 집에 없는 사람 취급을 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자취 생활은 생각보다 벅찼다.
당장 끼니를 때우는 것부터가 여간 신경을 거슬리는 게 아니다. 찬거리를 아빠의 아내로 있는 그 여자가 가져다 주긴 했지만, 먹고 싶은 몇 가지 반찬은 내가 직접 할 수 밖에 없었고, 밥은 직접 내가 하는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끼니 한번 때우려면 1시간은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나를 난감하게 한 것은 세탁과 청소였다. 세탁기가 있어 직접 손빨래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탁기가 옷까지 다려주고, 차곡차곡 정리해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1주일 치를 몰아서 세탁을 했는데, 세탁을 마치고 나면, 오전은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청소하는 것은 난 그때 처음 알았다. 집에 먼지가 그렇게 많이 쌓이는지 말이다. 난 파출부 아줌마가 밥하는 게 가장 큰 일이라 생각했었는데, 이건 막상 내가 청소를 해보니 자그마한 방 하나 청소하는 것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슨 먼지가 하루만 청소를 안 해도 그렇게 쌓이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될 정도로 많은 먼지가 내방에 쌓였다. 하지만, 난 꾹 참고서 자취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아니 참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생활비는 아빠와 엄마 모두 보내주었다.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던 엄마였는데, 아빠가 돈을 보내주기로 한 날 돈을 인출하러 은행을 갔을 때 통장에 뚜렷이 찍힌 엄마의 이름을 보고 나는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엄마는 아버지와 똑 같은 금액인 30만원을 보냈다.
하지만, 난 엄마의 돈은 조금도 쓰지 않았다. 아니 내 심정이 그랬다. 은행에서 인출해서 쓰는 돈이 엄마 돈인지 아빠 돈인지 구분이 될리 만무했지만, 어째건 나는 엄마의 돈은 쓰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생활했고, 실제로 생활비도 한 달에 10만으로 살았다.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빠의 아내인 그 여자가 내가 학교간 사이 수시로 내 방에 들어와 찬거리며, 쌀이며 각종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채워 놓았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가끔씩 책상에 놓여져 있는 작은 메모지에는 “수진 엄마”라고 쓰여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째건, 자취를 하는 나는 궁핍하게 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실제 현금의 지출만 없다 뿐이지, 먹는 거며, 입는 거에 큰 구애를 받지는 않았다. 아니 별로 욕심이 없었다. 특별히 사고 싶은 것도, 특별히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 당시는 고3인 때라 내 목표는 오직 하나 뿐이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알아주는 대학의 최고 학과로 진학하는 것.
물론, 그 과를 입학해서 내가 뭐가 되고, 어떻게 살아 갈 거란 뚜렷한 목표를 가지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저 막연하게 그런 목표를 세우고서 공부에만 매달렸다. 다른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하려면 그 길뿐이었다.
모든 수험생이 그렇듯 나도 열심히 공부했다.
나라에 행사가 있건, 사람이 죽건 말건 나는 그냥 공부에만 전력 투구를 할 뿐,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끊었다. 그런 나의 뜻을 알았는지, 아빠도 제사 참석 요구는 하지 않았고, 가끔씩 안부 전화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고3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시험을 보름 가량 앞 둔 시점에서 나는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 당시 독감이 유행병처럼 전국을 강타했는데, 뉴스 매체에서는 연일 독감에 대한 보고를 하면서 독감으로 인한 사망소식까지 함께 보도했다. 하지만, 나는 가장 혈기왕성한 나이가 아닌가? 난 약국에서 지어준 약을 먹으며 버텨내었지만, 몸이 무리한 혹사에 반란을 일으켰다.
4일째 밤 내 몸이 불타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내 몸은 뜨거우면서도 뼈속까지 추웠다. 정신은 점점 혼미해지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몸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와 온 몸을 전율시켰다. 약을 두 봉지, 세 봉지.. 계속 먹었지만, 좀처럼 몸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학교로 전화를 하고서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그 후로 내 기억은 없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온통 하얀 색으로 된 병실이었다.
내 입에는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고, 팔에는 링겔 바늘이, 가슴에도 뭔가 잔뜩 붙어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졸음에 나는 다시 눈을 감았고, 다음에 눈을 떴을 때 내 입에 산소마스크는 없었다.
“일어 났구나..”
나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였다. 물을 마시다 깨어난 나를 발견한 듯 엄마의 손에는 물컵이 들려져 있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왠지 초췌해 보였다. 병이 난 것이 내가 아니라 엄마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말이다.
나는 말없이 그런 엄마를 그냥 바라보았다.
“…….”
엄마는 한 참을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엄마의 눈에 뭔가 비치는 듯 하더니 눈물이 되어 눈가를 적시며 흘러 내리려 했다. 엄마는 물컵을 내려 놓더니 급히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내 병실로 들어온 것은 엄마가 아닌 아빠였다.
“괜찮니?”
“응…”
목이 부웠는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 다행이다.”
그렇게 아빠의 눈에도 살짝 눈물이 비쳤다. 아빠는 눈을 한번 쓱 닦더니 환하게 웃었다.
“이 녀석아.. 무슨 약을 그렇게 무식하게 먹어?”
“……”
무슨 말인지 몰라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네 담임이 전화 안 했더라면 너 큰일 날 뻔 했어 이 녀석아..”
그제서야 나는 너무 아파서 약을 계속 먹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난 분명 충분한 시간을 두고 약을 먹었던 같았다.
“약…?”
“그래.. 아무리 감기약이라도 그렇게 한꺼번에 먹으면 죽어 임마..”
“……”
“너 깨어난 게 몇 일 만인지는 아냐? 7일만이야…”
나는 황당했다. 그냥 자다가 일어난 것 같은데, 7일이 흘렀다니..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왠 일인지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머리가 핑 돌았다.
“괜찮니?”
“응… 괜찮아…”
“그러지 말고 다시 누워라…”
“아니 괜찮아. 그런데, 정말 7일이나 지난 거야?”
“그래…”
“거짓말 아니야?”
“못 믿겠니?”
그렇게 말하는 아빠를 나는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난감했다. 시험을 코 앞에 두고서 7일이나 허비하다니… 눈 앞이 캄캄했다. 그럼 이제 시험까지는 8일 정도 밖에 안 남은 셈이었다.
“아빠.. 나 집에 갈래… “
현기증을 참으며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안돼… 아직은…”
그때 의사들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는 의사들 뒤를 따라 들어왔는데, 얼핏 그 모습이 보였을 뿐, 내 시야는 곧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로 막혀버렸다. 의사들은 나에게 기분이 어떠냐는 둥, 어디 아픈데 없느냐는 둥 무슨 선무당 굿하는 것 같은 그런 질문과 함께 청진기로 내 가슴을 몇 번 대보고는 자기들끼리 수근 거렸다.
그리고는 엄마와 아빠에게 정확한 것은 검사를 더 해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괜찮은 것 같다고 하고 병실을 빠져나갔고, 아빠는 그 의사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병실에 남은 것은 엄마와 나 뿐이었다.
엄마는 침대 반대 쪽 변에 기대어 서서 한참을 나를 바라보았는데, 나도 그런 엄마를 같이 응시하였다. 우린 한참을 말을 하지 않고서 그렇게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눈을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 본 것은.. 그래서 일까? 나는 엄마의 눈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엄마의 눈은 크고 예뻤다. 물론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미인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날 난 엄마의 눈은 정말 아름다웠다고 생각되었다.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천사의 눈 같았다.
엄마의 눈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파…-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사랑도 느껴졌고, 왠지 모르게 나를 쌀쌀 맞게 대하던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듯 했다. 그런 냉랭한 외면도 하나의 사랑이었음을 말이다.
엄마와 난 그렇게 서로의 눈을 응시하면서 의사의 진료실로 가서 상담을 한 아빠가 다시 들어올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3일 후 퇴원을 했다.
병원에서는 2일 정도 더 있으라고 했지만, 내 고집에 진 아빠가 나를 집에서 요양시키겠다고 하고서는 나를 퇴원시켜서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난 여전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제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도무지 힘을 낼 수가 없었다. 모든 기분이 다 빠져버린 듯했다.
그러나 이제 시험이 5일 정도 남은 상황에서 그런 핑계를 대고서 마냥 병원에 있을 수는 없었다. 아빠의 집으로 간 나는 아빠의 아내인 그 여자의 도움을 받으며 시험준비를 했다. 하지만, 아빠의 성화로 인해 나의 수험준비는 아빠가 출근한 낮 시간뿐이었고, 7시에 아빠가 들어오면 공부는 중지되었다. 가끔 열이 났지만, 다행히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5일을 보내었다.
다행히 나는 시험을 만족스럽게 치렀다.
나는 희망하던 대학의 희망 학과에 차석으로 합격했고, 아빠는 그런 나를 무척이나 대견스러워 하면서 어울리지 않게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기에 바빴다. 어쩌면 그건 당연할지도 몰랐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감기약을 한꺼번에 먹고서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아들이 다시 살아나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 최고 학과에 차석으로 합격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엄마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엄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아빠 역시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분명 어딘가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서 아빠보다 더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이 건강은 이제 거의 다 회복이 되었다.
난 10일째 되던 날 저녁에 아빠에게 이제 이 집을 떠나 내 자취방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아빠의 아내인 그 여자가 내 병수발을 들어주며 나에게 친근하게 대해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 가슴 한 켠에는 그 여자에 대한 적개심이 남아 있었다.
“안돼…앞으로는 여기서 지내거라.…”
아빠는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다. 하지만, 고집이라면 나도 아빠 못지 않았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아빠가 잘 알잖아.”
“내가 알긴 뭘 알아?”
아빠는 시치미를 뚝 떼고서 나에게 되려 반문했다. 그런 아빠의 반응에 그 여자도 호기심이 생기는 듯 궁금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잊었다면 할 수 없고. 아무튼 나는 내일 갈 거야..”
“무슨 말이에요?”
그 여자는 궁금한 듯 나와 아빠를 번갈아 보았지만, 아빠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보이며,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지혁씨 무슨 말이에요?”
그 여자는 이제 나에게 물었다. 나는 별 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웃었다. 어떻게 ‘너가 싫어서 그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대학에 입학 할 때까지 만이라도 여기서 지내라..”
아빠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응.. 좋아.. 그럼 입학 할 때까지만 여기서 지낼게..”
아마도 아빠는 나와 그 여자가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듯 했다. 어째거나 이제 아빠의 아내는 그 여자이고, 나중에 늙어서도 이변이 없는 한 같이 지내고, 죽어 제사상 지방에도 같이 쓰여질 여자였다.
“근데 너 이번에도 아빠의 여자를 뺏어가면 안 된다.”
그 말에 나와 그 여자는 동시에 아빠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그런 나와 그 여자의 시선을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가볍게 받아넘겼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나의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고, 차마 그 여자를 볼 수가 없어서 얼른 시선을 창 밖으로 보내었다.
“뭐에요…? 호호호….”
그 여자는 아빠의 말이 우스운지 간드러지게 웃으며 아빠의 어깨를 툭 쳤다.
“왜 그래.. 나로선 당연한 거 아냐? 나 이제 당신마저 빼앗기면 못 살아. 이 나이에 이제 다른 당신만한 여자를 찾을 수도 없다고.. 하하하…”
아빠도 유쾌하게 웃었다.
재미있을까? 아니 어쩌면 재미있는 코미디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게 가장 현명한 대처일지 모른다. 만약, 아빠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 가족은 정말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다.
아들에 대한 배신감을 아빠가 이기지 못했다면, 아니 단순히 극복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닌 나에게 혹은 엄마에게 복수하는 심정으로 나와 엄마 사이에 있었던 일을 세상에, 아니 적어도 가족에게라도 밝혀 버렸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나도, 엄마도 자살을 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죽음에 지수도 포함될지 몰랐고, 아빠 역시도,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충격으로 쓰러져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친척들은 패륜적인 나와 엄마로 인해 평생을 멍에를 쓰고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끔직했다.
아빠 집에서의 생활은 편했다.
아빠의 아내인 그 여자는 정말 부지런 했다. 패턴은 매일 같았지만, 쉼 없이 움직이며 집안을 청소하고, 손질하고 정리했다. 그러다 아이가 잠들 때인 11시쯤 되면 책을 읽었고, 점심 식사를 마치면 또 집안을 청소하고 손질하고서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누군가의 집으로 가는 가거나 아님 책을 읽었다. 책도 가리지 않고 읽었는데, 꽤 어려운 것 같은 전문서를 읽는가 하면, 사춘기 소녀들이나 읽을 법한 로맨틱 소설을 읽으며 눈물까지 흘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눈이 참 많이 내린 날이었다. 아빠는 출장을 가야 하는데 눈이 온다며 투덜거리며 출근을 했고, 집에 남은 나와 그 여자 그리고 수진이 이렇게 셋은 거실에서 세상을 하얗게 뒤덮으며 내리는 눈을 구경했다.
“지혁씨 우리 눈싸움 할래요?”
갑작스럽게 그 여자가 그렇게 말했다.
“예..?”
“눈싸움 하자구요. 몰라요 눈싸움..?”
“수진이가 있는데….”
나는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핑계였다. 무슨 연인사이도 아니고 왠 뚱딴지 같은 눈싸움이란 말인가?
“수진이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돼요..”
그렇게 말하는 그 여자의 눈빛은 장난기 혹은 호기심이 가득했다. 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럼 하는 거에요..”
그 여자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곤 곧 같은 동에 사는 친구들을 모두 불러내는 것 같았다.
난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 여자를 따라 단지 내에 있는 공원으로 갔다. 이미 공원에는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여기 저기 있었고, 일부 연인처럼 보이는 남녀가 한 귀퉁이에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눈사람을 만들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 여자의 전화로 모인 아줌마들은 6명이었다. 모두 비슷비슷한 또래처럼 보였고, 저마다 아이를 대동하고 나왔는데, 수진이 만큼 어린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자 그럼 아이 볼 사람을 가위바위 보로 정하는 거야. 알았지..”
그 여자는 외모와는 다르게 그 모임의 리더처럼 보였다. 정말 집에서 보던 모습이랑은 완전히 달랐다. 집에서의 그녀는 정말 순종적인 여자였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그녀는 그런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전혀 새로운 여자였다. 아이 같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가 하면, 말괄량이 같은 행동도 했다.
난 도무지 뭐가 뭔지…
“제가 볼게요…”
나는 아줌마들에게 말했다.
“저는 구경이나 할래요.”
“왜요.. 같이해요.. 아이는 우리 여자들 중에서 한 명이 볼 거에요.”
그 여자가 그렇게 말했지만, 난 극구 사양했고, 곧 아줌마들은 3:3으로 편을 먹고서 눈싸움을 시작했다.
“아야.. 너 죽었어…”
“할 수 있으면 해봐…”
눈싸움을 하는 아줌마들은 나이만 먹었지, 그 때는 사춘기 소녀나 다름없었다. 그런 엄마들을 보던 아이들은 곧 관심이 없는지 자기들 끼리 모여 눈으로 뭔가를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다. 여자 아이는 눈사람을 만들었고, 남자아이들은 뭐가 뭔지 모를 이상한 동물 같은 것을 만들었다.
“이게 뭔 줄 알아?”
한 꼬맹이가 말했다.
“뭔데?”
“호랑이….”
“무슨 호랑이가 그래…”
“아냐… 이런 호랑이도 있어…”
“아냐.. 호랑이는 이렇게 네 발로 서있어..”
“그건 동물원 호랑이고, 내 건 서커스 호랑이란 말이야…”
“마자.. 나도 봤어.. 서커스 호랑이는 저래..”
그런 식으로 아이들은 제 각기 자신이 만든 모형을 들고서 옥식각신 하며 놀았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아이들의 기발한 생각과 말에 연신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아줌마들은 공원 저 끝으로 가서 계속 눈싸움을 했다. 노는 게 정말 애들이랑 다를 것이 하나 없었지만, 왠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녀들의 그런 놀이는 오전이 훌쩍 지나서야 끝이 났다.
눈싸움이 끝나고, 그 여자는 아줌마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자는 거였는데, 어째건 그로 인해 순식간에 집은 북적이는 시장처럼 변했다. 아이들은 거실과 방을 오가면 뛰어다녔고, 아줌마들은 거실에서 자기들끼리 뭐가 그리 좋은 수다를 떨며 집이 떠나가라 웃었다.
여자 3명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더니, 옛말 틀린 것 하나 없었다. 나는 내 방을 걸어 잠그고서 애써 잠을 청했다. 어차피 갈 곳도, 수다에 끼어들 수도 없는 나였다.
내가 잠에 일어났을 때는 시계가 막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창 밖에는 여전히 많은 눈이 내렸다. 대설경보로 아침 뉴스가 시끄럽더니 거짓말은 아닌가 보았다. 점심을 거르고 잠을 청했던 나는 시장기를 느끼고서 내 방을 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그 때, 시야에 그 여자가 소파에 누워 자는 모습이 보였다. 책은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책을 읽다가 그대로 잠이 들며 소파에 누워 버린 듯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여자의 긴 스커트가 위로 한 것 올라가 있었다. 어떻게 뒤척였길래 그렇게 올라가게 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로선 상당히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 여자의 속옷도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문득 3년 전의 일이 떠오르며 아빠의 말이 생각났다.
- 너 이번에도 아빠의 여자를 뺏어가면 안 된다.-
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성에 미친놈이 아니다. 비록 한번의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그건 정말 철없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적절하게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이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아빠가 그 말만 하지 않았어도 난 그냥 그 여자를 무시하고서 주방으로가 밥을 찾아 먹을 것이다. 그 여자가 떨그럭 거리는 소리에 깨든 말든 말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냥 내방으로 들어가서 저 여자가 깨어 날 때까지 기다릴까?-
-아냐, 그게 외려 이상할지 몰라..-
-그냥 무시하고 내 할 일을 할까?-
그러다 난 문득 스치는 생각에 따라 그 여자에게 가만히 다가갔다. 그 여자도 엄마 못지 않은 곱고 흰 피부를 가졌다. 미끈하니 쭉 빠진 다리는 왠지 그 여자의 얼굴 이미지와 썩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엄마만큼 훌륭한 다리였다.
나는 살며시 말려 올라간 치마 끝을 잡고서 아래로 내리고서 소리가 안 나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그 여자가 깨기만을 바라며 난 음식을 찾으며 최대한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소리가 약하다 싶으면 일부러 그릇을 탁자에 소리 나게 내려놓기도 했다. 뭐 안 일어나도 상관은 없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지금 일어나야 쓸데없는 오해를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또 언제 그 여자가 뒤척이다 치마가 올라가게 될지 모를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상을 다 차릴 때까지 거실 쪽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실패인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체념하고서 그냥 식사를 했다.
“언제 일어났어요?”
한 참을 먹고 있는데 그녀가 주방으로 들어섰다.
“조금 전에요..”
“깨우지 그랬어요. 제가 차려줄 텐데…”
“괜찮아요. 밥만 펐을 뿐인데요 뭐..”
“그래도…”
그 여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앞에 앉았다.
“점심 때 식사하라고 하려 했더니 문이 잠겼더라구요.”
“예.. 피곤해서 그냥 잠그고 잤어요..”
“많이 시끄러웠죠?”
“아뇨.. 재미있었어요. 그냥 오늘은 조금 피곤했을 뿐이에요.”
“피~ 거짓말…”
“예..?”
“다 알아요. 아줌마들 정말 시끄럽죠? 킥… 나도 처음에는 무척이나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지혁씨 아빠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난 내 자신이 아줌마이면서 아줌마들이 어떻게 사는지 몰랐거든요.”
“예… “
“그래서 수진이 때문에 전업주부를 결심했기는 했어도, 사실 겁도 많이 났었어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집에서만 어떻게 생활하나 하구요. 처음 한 두 달은 정말 힘들었어요. 지혁씨 아버지가 출근한 낯 시간은 정말 시간이 안 갔죠.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청소도 하고, 병원도 가고 했지만 정말 재미있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안 들었어요. 이렇게 생활하기 전에 나는 쭉 공부만 하다가 직장 생활만 했지 가정 일은 정말 해 본적이 없었거든요. 밥도 잘 못했고, 반찬은 햄 구이만 겨울 할 줄 알았죠. 킥~~~”
말 끝에 그 여자는 뭔가 생각 난 듯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혼자 뭐 하는 짓인지 나는 그 여자가 우스꽝스럽게 보였지만 내색 않았다.
“지혁씨 아버지가 그런 저를 보며 뭐라 그랬는 줄 알아요? 자기 아무래도 사기 당한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킥..킥… 뭐 틀린 말은 아니었죠. 회사에서 MT가거나 하면 나는 항상 근사하게 도시락을 준비했거든요. 찬거리도 꼼꼼하게 챙겨갔고.. 뭐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다들 내가 한 줄 알았어요. 그리고 나도 그렇게 보이고 싶었구요. 물론 MT에서 난 절대 음식은 만들지 않았죠. 집에서 하는 것만으로도 지겨운데 여기서까지 할 수는 없다고 버틴 거죠. 모두들 그런 내 모습에 속았어요. 지혁씨 아버지까지.. 그런데 막상 같이 살면서는 그런 제 연극이 통하지 않았죠. 크크크…. 지혁씨도 봤어야 하는데, 그런 말을 하던 그 이의 얼굴을….”
그 여자는 정말 즐거운 듯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하지만, 난 하나도 재미없었다. 그 여자의 이야기 하나 하나는 원래 나와 엄마가 공유해야 하는 것이란 생각에 말이다. 예전 우리집도 꽤나 재미있는 집이었다. 아빠의 엉뚱한 행동에 엄마와 나는 몇 번이나 뒤로 꼴가닥 넘어갔으니까 말이다.
“예.. 그랬군요. 그런데 저 때문에 깨신 거 같은데 가서 더 주무세요. 이제 저 밥도 거의 다 먹었어요.”
내 말에 그 여자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제가 싫어요?”
“예..? 그런 게 아니라, 피곤해 보여서요. 나 때문에 잠에서 깬 거 아닌가 하고..”
“정말요?”
“예…”
“일부러 깨운 거 아니구요?”
“예..!?”
나는 섬찟했지만 애써 태연한 얼굴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저 잠귀가 무척이나 밝아요. 아주 예민한 성격이거든요.”
“….”
“아무리 깊이 잠들어도 문을 열 때 나는 딸각거리는 소리에도 잠에서 깨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양. 하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아까.. 제 치마 내려주었죠?”
순간, 나는 얼굴이 확 달아 올랐다.
“고마워요. 저도 사실 많이 난감 했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던 그녀는 금새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여자는 정말 카멜레온 같은 여자였다. 아주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가하면, 금새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왠지 그 여자가 아주 무서운 사람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런데, 제 속살을 본 소감이 어때요?”
그 여자는 다시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되었다.
“지혁씨 어머니와 비교해서요..”
황당했다. 정말 황당한 그 여자의 질문이었다.
“아무런 느낌도 못 받았어요. 그냥 보기 민망해서 그렇게 했을 뿐이에요.”
“아니.. 그런 답변 말구요. 지혁씨 어머니랑 비교해서 어떠냐구요.”
“그게 궁금해요?”
“예.. 아주 많이…”
“왜죠?”
황당함은 화로 이어지는 법.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저의를 물었다.
“아.. 오해는 말아요. 그냥 단순한 호기심 일 뿐이에요.”
“제가 엄마와 그 짓을 했다고 해서 제 엄마까지 만만하게 보이나요?”
내 목소리는 다소 커졌다.
“아… 그런 뜻은 전혀 없어요. 난 단지… 그냥 단순한 호기심 일 뿐이었어요.”
이제 그 여자는 아주 순진무구한 청순가련형의 여자였다. 하지만, 이미 그 여자에 대한 적개심을 가슴 한 켠에 두고 있던 나는 그런 그 여자의 변신에 속지 않았다. 아니 이 참에 가끔씩 나에게 조롱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그 여자에게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요. 저와 제 엄마가 우습죠? 개만도 못한 짓을 했고, 자식까지 두었으니 인간처럼 보이지 않은 거죠? 저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아요. 가끔씩 제게 보내는 이상한 시선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눈치 없지도 않고요.”
“그건…..”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솔직한 서로의 의견을 듣기로 해요. 알겠지만, 저는 이 집에 계속 살지는 않아요. 생활은 제가 이 집을 나가면 그 뿐이지만, 앞으로 우린 종종 만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란 건 알 겁니다. 그러니 서로가 찜찜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오늘 다 말해요.”
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어차피 더 이상 그 여자에게 감출 것도 없었다. 그런 내 말에 그 여자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 보이던 그녀는 다시금 사무적인 얼굴로 변해 있었다.
“그래요.. 우리 말해요..”
“예…”
“제가 먼저 말한다면, 아니 그냥 본론부터 말할게요. 그래야만 지혁씨가 오해를 풀 거 같으니까요. 사실, 전 지혁씨 아버님을 완벽하게 신뢰하지는 못해요. 그 사람의 마음에는 아직 지혁씨의 어머니의 존재가 저보다 더 크게 자리잡고 있죠. 물론, 첫사랑의 여자를, 그것도 17년을 같이 산 사람을 한 순간에 잊어버리라고 한다면 제가 나쁜 여자죠. 그런 것은 이해해요. 하지만, 저 역시 남편에게 사랑 받고 싶은 그냥 평범한 여자에요. 제 전 남편과 저는 사실 필요에 의해 만난 사이였죠. 그 때까지만 해도 난 사랑 같은 거 믿지 않았고, 해 본적도 없어요. 나에게 있어 남자는 그냥 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그런 존재일 뿐이었죠. 그런데, 직장에 들어가 지혁씨의 아버님을 만나면서부터 그런 제 생각은 서서히 무너졌어요.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설래임을 알았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사랑의 고통도 알게 되었어요. 그 때에서야 난 비로서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누군가의 여자가 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죠. TV드라마와 멜러 영화가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고, 재미가 있었다면 설명이 될까요?”
그 여자는 나에게 동의를 요구했다. 하지만,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좋아요.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요. 어째든 나는 지혁씨의 아버님을 만난 후에 뒤늦은 사랑의 열병을 앓았어요. 하지만, 그 사랑은 표현 할 수도, 하소연 할 수도 없는 그런 사랑이었죠. 지혁씨 아버님에겐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가족이 있었고, 난 그냥 그 사람의 직장 부하일 뿐이었죠. 그래도 난 만족했어요. 그 사람을 매일 회사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삶의 의미가 되었으니까요. 그렇게 8년을 보냈었죠.”
그기까지 이야기 했을 때, 나는 긴장했다. 이제 어떻게 해서 아빠와 그 여자가 연결이 되었는지 보다 상세히 알 수 있는 대목이 남았으니 말이다.
“우리 함께 출장을 갔어요. 원래는 나 혼자 가는 출장이었는데, 갑자기 지혁씨 아버지가 같이 가자고 했죠. 해외 지사를 순회하는 다소 고달픈 일이라 보통 실장은 그런데 가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실장이 몇 일이나 자리를 비우는 것이 말도 안 되었구요. 하지만, 그 사람은 저와 같이 출장을 갔어요. 나로선 당연히 기분 좋은 출장이었지만, 지혁씨 아버님은 그렇지 않은 듯했어요. 아니 나에겐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죠. 뭔가 다른 생각을 하는 듯. 그런데, 그런 제 생각이 맞았죠. 지혁씨의 아버님은 지사에 관심이 없었고, 학교를 알아보는 것에만 열중했어요.”
“학교요?”
“예.. 학교요.”
“왜….?”
“처음에는 저도 몰랐어요. 그러다 마지막 날, 술을 마시다 알게 되었죠. 지혁씨 아버님은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죠. 본인 뿐만 아니라 지혁씨까지 함께하는 유학을요.”
“!!!???”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빠가 나와 함께 하는 유학생을 생각했다는 것은 나로선 금시초문이었다.
“지혁씨도 몰랐던 것 같군요. 당시 지혁씨 아버님은 아들에게 더 큰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리고 자신도 더 공부하고.. 물론, 지금은 그런 뜻만 있는 게 아니란 것을 알지만, 당시에 저는 그렇게만 알았어요. 저는 당연히 충격을 받았고, 지혁씨 아버님을 앞으로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죠. 아니 나로선 눈물을 흘리는 거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난 지혁씨 아버님에게 아무런 권리도 없는 여자니까요. 그 날 우린 술을 참 많이 마셨죠. 나는 슬퍼서 울고, 지혁씨 아버님은 그런 나를 위로하느라 마시고…그리고, 술기운에 우린 그만 관계를 가졌어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지혁씨 아버님을 범했어요. 침대에 쓰러진 그의 옷을 벗긴 것은 나니까요.”
“……”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 후, 나는 그 것을 미끼로 계속 지혁씨 아버님을 협박했어요. 처음부터 그런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는데, 난 그냥 그렇게 했어요. 처음에는 몇 달만 더 있어 달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한국을 떠나지 말고 지혁씨만 유학 보내라고 했죠. 그러다 수진이가 생겼고 결국은 지금 이렇게….”
말을 마친 그 여자는 잠시 동안 나를 응시하곤 다시 말을 이었다.
“결과적으론 제가 지혁씨의 아버님을 뺏은 사람이 되었지만, 사실 난 욕심이 더 많아요. 그 사람의 마음에 제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요. 아니 적어도 여자들 중에서는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그 사람의 마음에는 여전히 지혁씨의 어머님이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어요.”
그 여자는 확신하듯 말했다.
“아마, 지혁씨 어머님이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된다고 해도 그 크기는 변하지 않을 거에요. 하지만……….”
그 여자는 잠시 말을 끊고서 나에게 강한 시선을 보내었다.
“지혁씨 어머님이 지혁씨의 여자가 된다면 아마 다를 거에요.”
“!!??”
“단순한 근친상간을 넘어선 진짜 지혁씨의 여자가 된다면, 그 사람의 마음 차지한 지혁씨의 어머니의 공간은 여자에서 며느리의 의미로 바뀔 테니까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그거에요. 지난 시간 가끔 지혁씨에게 보냈던 시선의 의미도 그러 하구요.”
그 여자의 눈이 빛났다.
확실히 무서운 여자였다. 자신이 목표한 것을 어떻게 하든 쟁취해내는 그런 집요한 미저리 같은 여자 말이다.
“이제야 알 것 같군요. 내가 왜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막연하게 싫어했는지…”
“…?”
그 여자는 내 말이 뜻밖이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몰랐나요? 내가 당신을 싫어하는 걸…”
“무슨…..”
“난 당신이 어색한 것이 아니라. 싫은 겁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군요. 왜 본능적으로 당신이 싫었는지.. 하지만, 그 말은 고려해보도록 하죠. 내 친 엄마를 내 여자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마에게 무슨 일을 할지 모르니까.”
내 말에 그 여자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표정 뒤에 그녀가 가진 생각의 전부가 다 읽혔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아빠에게서 나를 비롯하여 엄마, 지수, 그리고 다른 모든 가족의 기억을 전부 지우는 것이었다. 아빠는 나와 엄마의 관계를 말로서는 이해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눈 앞에 그 것이 현실화 되면 그 것은 완전히 다른 양상을 가질 게 뻔했고, 더구나 그 여자가 옆에서 도덕적 잣대 교묘하게 아빠게 사용한다면 그 여자는 아빠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눈 앞에 두고 나는 학교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대학교 근처의 원룸으로 이사를 했다. 그냥 단칸 셋방이면 된다고 했지만, 아빠는 내 말과 상관없이 원룸을 전세로 얻어 주었다.
이사하는 날, 엄마는 오지 않았다. 아니 내가 이사하는 줄도 몰랐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사 가기 전날까지도 엄마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자식은 지수 하나 뿐인 양 지수만을 챙길 뿐 나는 아예 집에 없는 사람 취급을 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자취 생활은 생각보다 벅찼다.
당장 끼니를 때우는 것부터가 여간 신경을 거슬리는 게 아니다. 찬거리를 아빠의 아내로 있는 그 여자가 가져다 주긴 했지만, 먹고 싶은 몇 가지 반찬은 내가 직접 할 수 밖에 없었고, 밥은 직접 내가 하는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끼니 한번 때우려면 1시간은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나를 난감하게 한 것은 세탁과 청소였다. 세탁기가 있어 직접 손빨래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탁기가 옷까지 다려주고, 차곡차곡 정리해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1주일 치를 몰아서 세탁을 했는데, 세탁을 마치고 나면, 오전은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청소하는 것은 난 그때 처음 알았다. 집에 먼지가 그렇게 많이 쌓이는지 말이다. 난 파출부 아줌마가 밥하는 게 가장 큰 일이라 생각했었는데, 이건 막상 내가 청소를 해보니 자그마한 방 하나 청소하는 것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슨 먼지가 하루만 청소를 안 해도 그렇게 쌓이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될 정도로 많은 먼지가 내방에 쌓였다. 하지만, 난 꾹 참고서 자취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아니 참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생활비는 아빠와 엄마 모두 보내주었다.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던 엄마였는데, 아빠가 돈을 보내주기로 한 날 돈을 인출하러 은행을 갔을 때 통장에 뚜렷이 찍힌 엄마의 이름을 보고 나는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엄마는 아버지와 똑 같은 금액인 30만원을 보냈다.
하지만, 난 엄마의 돈은 조금도 쓰지 않았다. 아니 내 심정이 그랬다. 은행에서 인출해서 쓰는 돈이 엄마 돈인지 아빠 돈인지 구분이 될리 만무했지만, 어째건 나는 엄마의 돈은 쓰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생활했고, 실제로 생활비도 한 달에 10만으로 살았다.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빠의 아내인 그 여자가 내가 학교간 사이 수시로 내 방에 들어와 찬거리며, 쌀이며 각종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채워 놓았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가끔씩 책상에 놓여져 있는 작은 메모지에는 “수진 엄마”라고 쓰여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째건, 자취를 하는 나는 궁핍하게 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실제 현금의 지출만 없다 뿐이지, 먹는 거며, 입는 거에 큰 구애를 받지는 않았다. 아니 별로 욕심이 없었다. 특별히 사고 싶은 것도, 특별히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 당시는 고3인 때라 내 목표는 오직 하나 뿐이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알아주는 대학의 최고 학과로 진학하는 것.
물론, 그 과를 입학해서 내가 뭐가 되고, 어떻게 살아 갈 거란 뚜렷한 목표를 가지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저 막연하게 그런 목표를 세우고서 공부에만 매달렸다. 다른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하려면 그 길뿐이었다.
모든 수험생이 그렇듯 나도 열심히 공부했다.
나라에 행사가 있건, 사람이 죽건 말건 나는 그냥 공부에만 전력 투구를 할 뿐,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끊었다. 그런 나의 뜻을 알았는지, 아빠도 제사 참석 요구는 하지 않았고, 가끔씩 안부 전화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고3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시험을 보름 가량 앞 둔 시점에서 나는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 당시 독감이 유행병처럼 전국을 강타했는데, 뉴스 매체에서는 연일 독감에 대한 보고를 하면서 독감으로 인한 사망소식까지 함께 보도했다. 하지만, 나는 가장 혈기왕성한 나이가 아닌가? 난 약국에서 지어준 약을 먹으며 버텨내었지만, 몸이 무리한 혹사에 반란을 일으켰다.
4일째 밤 내 몸이 불타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내 몸은 뜨거우면서도 뼈속까지 추웠다. 정신은 점점 혼미해지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몸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와 온 몸을 전율시켰다. 약을 두 봉지, 세 봉지.. 계속 먹었지만, 좀처럼 몸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학교로 전화를 하고서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그 후로 내 기억은 없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온통 하얀 색으로 된 병실이었다.
내 입에는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고, 팔에는 링겔 바늘이, 가슴에도 뭔가 잔뜩 붙어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졸음에 나는 다시 눈을 감았고, 다음에 눈을 떴을 때 내 입에 산소마스크는 없었다.
“일어 났구나..”
나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였다. 물을 마시다 깨어난 나를 발견한 듯 엄마의 손에는 물컵이 들려져 있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왠지 초췌해 보였다. 병이 난 것이 내가 아니라 엄마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말이다.
나는 말없이 그런 엄마를 그냥 바라보았다.
“…….”
엄마는 한 참을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엄마의 눈에 뭔가 비치는 듯 하더니 눈물이 되어 눈가를 적시며 흘러 내리려 했다. 엄마는 물컵을 내려 놓더니 급히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내 병실로 들어온 것은 엄마가 아닌 아빠였다.
“괜찮니?”
“응…”
목이 부웠는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 다행이다.”
그렇게 아빠의 눈에도 살짝 눈물이 비쳤다. 아빠는 눈을 한번 쓱 닦더니 환하게 웃었다.
“이 녀석아.. 무슨 약을 그렇게 무식하게 먹어?”
“……”
무슨 말인지 몰라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네 담임이 전화 안 했더라면 너 큰일 날 뻔 했어 이 녀석아..”
그제서야 나는 너무 아파서 약을 계속 먹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난 분명 충분한 시간을 두고 약을 먹었던 같았다.
“약…?”
“그래.. 아무리 감기약이라도 그렇게 한꺼번에 먹으면 죽어 임마..”
“……”
“너 깨어난 게 몇 일 만인지는 아냐? 7일만이야…”
나는 황당했다. 그냥 자다가 일어난 것 같은데, 7일이 흘렀다니..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왠 일인지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머리가 핑 돌았다.
“괜찮니?”
“응… 괜찮아…”
“그러지 말고 다시 누워라…”
“아니 괜찮아. 그런데, 정말 7일이나 지난 거야?”
“그래…”
“거짓말 아니야?”
“못 믿겠니?”
그렇게 말하는 아빠를 나는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난감했다. 시험을 코 앞에 두고서 7일이나 허비하다니… 눈 앞이 캄캄했다. 그럼 이제 시험까지는 8일 정도 밖에 안 남은 셈이었다.
“아빠.. 나 집에 갈래… “
현기증을 참으며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안돼… 아직은…”
그때 의사들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는 의사들 뒤를 따라 들어왔는데, 얼핏 그 모습이 보였을 뿐, 내 시야는 곧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로 막혀버렸다. 의사들은 나에게 기분이 어떠냐는 둥, 어디 아픈데 없느냐는 둥 무슨 선무당 굿하는 것 같은 그런 질문과 함께 청진기로 내 가슴을 몇 번 대보고는 자기들끼리 수근 거렸다.
그리고는 엄마와 아빠에게 정확한 것은 검사를 더 해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괜찮은 것 같다고 하고 병실을 빠져나갔고, 아빠는 그 의사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병실에 남은 것은 엄마와 나 뿐이었다.
엄마는 침대 반대 쪽 변에 기대어 서서 한참을 나를 바라보았는데, 나도 그런 엄마를 같이 응시하였다. 우린 한참을 말을 하지 않고서 그렇게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눈을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 본 것은.. 그래서 일까? 나는 엄마의 눈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엄마의 눈은 크고 예뻤다. 물론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미인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날 난 엄마의 눈은 정말 아름다웠다고 생각되었다.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천사의 눈 같았다.
엄마의 눈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파…-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사랑도 느껴졌고, 왠지 모르게 나를 쌀쌀 맞게 대하던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듯 했다. 그런 냉랭한 외면도 하나의 사랑이었음을 말이다.
엄마와 난 그렇게 서로의 눈을 응시하면서 의사의 진료실로 가서 상담을 한 아빠가 다시 들어올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3일 후 퇴원을 했다.
병원에서는 2일 정도 더 있으라고 했지만, 내 고집에 진 아빠가 나를 집에서 요양시키겠다고 하고서는 나를 퇴원시켜서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난 여전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제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도무지 힘을 낼 수가 없었다. 모든 기분이 다 빠져버린 듯했다.
그러나 이제 시험이 5일 정도 남은 상황에서 그런 핑계를 대고서 마냥 병원에 있을 수는 없었다. 아빠의 집으로 간 나는 아빠의 아내인 그 여자의 도움을 받으며 시험준비를 했다. 하지만, 아빠의 성화로 인해 나의 수험준비는 아빠가 출근한 낮 시간뿐이었고, 7시에 아빠가 들어오면 공부는 중지되었다. 가끔 열이 났지만, 다행히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5일을 보내었다.
다행히 나는 시험을 만족스럽게 치렀다.
나는 희망하던 대학의 희망 학과에 차석으로 합격했고, 아빠는 그런 나를 무척이나 대견스러워 하면서 어울리지 않게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기에 바빴다. 어쩌면 그건 당연할지도 몰랐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감기약을 한꺼번에 먹고서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아들이 다시 살아나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 최고 학과에 차석으로 합격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엄마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엄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아빠 역시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분명 어딘가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서 아빠보다 더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이 건강은 이제 거의 다 회복이 되었다.
난 10일째 되던 날 저녁에 아빠에게 이제 이 집을 떠나 내 자취방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아빠의 아내인 그 여자가 내 병수발을 들어주며 나에게 친근하게 대해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 가슴 한 켠에는 그 여자에 대한 적개심이 남아 있었다.
“안돼…앞으로는 여기서 지내거라.…”
아빠는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다. 하지만, 고집이라면 나도 아빠 못지 않았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아빠가 잘 알잖아.”
“내가 알긴 뭘 알아?”
아빠는 시치미를 뚝 떼고서 나에게 되려 반문했다. 그런 아빠의 반응에 그 여자도 호기심이 생기는 듯 궁금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잊었다면 할 수 없고. 아무튼 나는 내일 갈 거야..”
“무슨 말이에요?”
그 여자는 궁금한 듯 나와 아빠를 번갈아 보았지만, 아빠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보이며,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지혁씨 무슨 말이에요?”
그 여자는 이제 나에게 물었다. 나는 별 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웃었다. 어떻게 ‘너가 싫어서 그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대학에 입학 할 때까지 만이라도 여기서 지내라..”
아빠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응.. 좋아.. 그럼 입학 할 때까지만 여기서 지낼게..”
아마도 아빠는 나와 그 여자가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듯 했다. 어째거나 이제 아빠의 아내는 그 여자이고, 나중에 늙어서도 이변이 없는 한 같이 지내고, 죽어 제사상 지방에도 같이 쓰여질 여자였다.
“근데 너 이번에도 아빠의 여자를 뺏어가면 안 된다.”
그 말에 나와 그 여자는 동시에 아빠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그런 나와 그 여자의 시선을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가볍게 받아넘겼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나의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고, 차마 그 여자를 볼 수가 없어서 얼른 시선을 창 밖으로 보내었다.
“뭐에요…? 호호호….”
그 여자는 아빠의 말이 우스운지 간드러지게 웃으며 아빠의 어깨를 툭 쳤다.
“왜 그래.. 나로선 당연한 거 아냐? 나 이제 당신마저 빼앗기면 못 살아. 이 나이에 이제 다른 당신만한 여자를 찾을 수도 없다고.. 하하하…”
아빠도 유쾌하게 웃었다.
재미있을까? 아니 어쩌면 재미있는 코미디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게 가장 현명한 대처일지 모른다. 만약, 아빠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 가족은 정말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다.
아들에 대한 배신감을 아빠가 이기지 못했다면, 아니 단순히 극복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닌 나에게 혹은 엄마에게 복수하는 심정으로 나와 엄마 사이에 있었던 일을 세상에, 아니 적어도 가족에게라도 밝혀 버렸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나도, 엄마도 자살을 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죽음에 지수도 포함될지 몰랐고, 아빠 역시도,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충격으로 쓰러져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친척들은 패륜적인 나와 엄마로 인해 평생을 멍에를 쓰고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끔직했다.
아빠 집에서의 생활은 편했다.
아빠의 아내인 그 여자는 정말 부지런 했다. 패턴은 매일 같았지만, 쉼 없이 움직이며 집안을 청소하고, 손질하고 정리했다. 그러다 아이가 잠들 때인 11시쯤 되면 책을 읽었고, 점심 식사를 마치면 또 집안을 청소하고 손질하고서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누군가의 집으로 가는 가거나 아님 책을 읽었다. 책도 가리지 않고 읽었는데, 꽤 어려운 것 같은 전문서를 읽는가 하면, 사춘기 소녀들이나 읽을 법한 로맨틱 소설을 읽으며 눈물까지 흘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눈이 참 많이 내린 날이었다. 아빠는 출장을 가야 하는데 눈이 온다며 투덜거리며 출근을 했고, 집에 남은 나와 그 여자 그리고 수진이 이렇게 셋은 거실에서 세상을 하얗게 뒤덮으며 내리는 눈을 구경했다.
“지혁씨 우리 눈싸움 할래요?”
갑작스럽게 그 여자가 그렇게 말했다.
“예..?”
“눈싸움 하자구요. 몰라요 눈싸움..?”
“수진이가 있는데….”
나는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핑계였다. 무슨 연인사이도 아니고 왠 뚱딴지 같은 눈싸움이란 말인가?
“수진이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돼요..”
그렇게 말하는 그 여자의 눈빛은 장난기 혹은 호기심이 가득했다. 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럼 하는 거에요..”
그 여자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곤 곧 같은 동에 사는 친구들을 모두 불러내는 것 같았다.
난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 여자를 따라 단지 내에 있는 공원으로 갔다. 이미 공원에는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여기 저기 있었고, 일부 연인처럼 보이는 남녀가 한 귀퉁이에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눈사람을 만들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 여자의 전화로 모인 아줌마들은 6명이었다. 모두 비슷비슷한 또래처럼 보였고, 저마다 아이를 대동하고 나왔는데, 수진이 만큼 어린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자 그럼 아이 볼 사람을 가위바위 보로 정하는 거야. 알았지..”
그 여자는 외모와는 다르게 그 모임의 리더처럼 보였다. 정말 집에서 보던 모습이랑은 완전히 달랐다. 집에서의 그녀는 정말 순종적인 여자였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그녀는 그런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전혀 새로운 여자였다. 아이 같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가 하면, 말괄량이 같은 행동도 했다.
난 도무지 뭐가 뭔지…
“제가 볼게요…”
나는 아줌마들에게 말했다.
“저는 구경이나 할래요.”
“왜요.. 같이해요.. 아이는 우리 여자들 중에서 한 명이 볼 거에요.”
그 여자가 그렇게 말했지만, 난 극구 사양했고, 곧 아줌마들은 3:3으로 편을 먹고서 눈싸움을 시작했다.
“아야.. 너 죽었어…”
“할 수 있으면 해봐…”
눈싸움을 하는 아줌마들은 나이만 먹었지, 그 때는 사춘기 소녀나 다름없었다. 그런 엄마들을 보던 아이들은 곧 관심이 없는지 자기들 끼리 모여 눈으로 뭔가를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다. 여자 아이는 눈사람을 만들었고, 남자아이들은 뭐가 뭔지 모를 이상한 동물 같은 것을 만들었다.
“이게 뭔 줄 알아?”
한 꼬맹이가 말했다.
“뭔데?”
“호랑이….”
“무슨 호랑이가 그래…”
“아냐… 이런 호랑이도 있어…”
“아냐.. 호랑이는 이렇게 네 발로 서있어..”
“그건 동물원 호랑이고, 내 건 서커스 호랑이란 말이야…”
“마자.. 나도 봤어.. 서커스 호랑이는 저래..”
그런 식으로 아이들은 제 각기 자신이 만든 모형을 들고서 옥식각신 하며 놀았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아이들의 기발한 생각과 말에 연신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아줌마들은 공원 저 끝으로 가서 계속 눈싸움을 했다. 노는 게 정말 애들이랑 다를 것이 하나 없었지만, 왠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녀들의 그런 놀이는 오전이 훌쩍 지나서야 끝이 났다.
눈싸움이 끝나고, 그 여자는 아줌마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자는 거였는데, 어째건 그로 인해 순식간에 집은 북적이는 시장처럼 변했다. 아이들은 거실과 방을 오가면 뛰어다녔고, 아줌마들은 거실에서 자기들끼리 뭐가 그리 좋은 수다를 떨며 집이 떠나가라 웃었다.
여자 3명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더니, 옛말 틀린 것 하나 없었다. 나는 내 방을 걸어 잠그고서 애써 잠을 청했다. 어차피 갈 곳도, 수다에 끼어들 수도 없는 나였다.
내가 잠에 일어났을 때는 시계가 막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창 밖에는 여전히 많은 눈이 내렸다. 대설경보로 아침 뉴스가 시끄럽더니 거짓말은 아닌가 보았다. 점심을 거르고 잠을 청했던 나는 시장기를 느끼고서 내 방을 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그 때, 시야에 그 여자가 소파에 누워 자는 모습이 보였다. 책은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책을 읽다가 그대로 잠이 들며 소파에 누워 버린 듯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여자의 긴 스커트가 위로 한 것 올라가 있었다. 어떻게 뒤척였길래 그렇게 올라가게 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로선 상당히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 여자의 속옷도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문득 3년 전의 일이 떠오르며 아빠의 말이 생각났다.
- 너 이번에도 아빠의 여자를 뺏어가면 안 된다.-
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성에 미친놈이 아니다. 비록 한번의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그건 정말 철없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적절하게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이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아빠가 그 말만 하지 않았어도 난 그냥 그 여자를 무시하고서 주방으로가 밥을 찾아 먹을 것이다. 그 여자가 떨그럭 거리는 소리에 깨든 말든 말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냥 내방으로 들어가서 저 여자가 깨어 날 때까지 기다릴까?-
-아냐, 그게 외려 이상할지 몰라..-
-그냥 무시하고 내 할 일을 할까?-
그러다 난 문득 스치는 생각에 따라 그 여자에게 가만히 다가갔다. 그 여자도 엄마 못지 않은 곱고 흰 피부를 가졌다. 미끈하니 쭉 빠진 다리는 왠지 그 여자의 얼굴 이미지와 썩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엄마만큼 훌륭한 다리였다.
나는 살며시 말려 올라간 치마 끝을 잡고서 아래로 내리고서 소리가 안 나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그 여자가 깨기만을 바라며 난 음식을 찾으며 최대한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소리가 약하다 싶으면 일부러 그릇을 탁자에 소리 나게 내려놓기도 했다. 뭐 안 일어나도 상관은 없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지금 일어나야 쓸데없는 오해를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또 언제 그 여자가 뒤척이다 치마가 올라가게 될지 모를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상을 다 차릴 때까지 거실 쪽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실패인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체념하고서 그냥 식사를 했다.
“언제 일어났어요?”
한 참을 먹고 있는데 그녀가 주방으로 들어섰다.
“조금 전에요..”
“깨우지 그랬어요. 제가 차려줄 텐데…”
“괜찮아요. 밥만 펐을 뿐인데요 뭐..”
“그래도…”
그 여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앞에 앉았다.
“점심 때 식사하라고 하려 했더니 문이 잠겼더라구요.”
“예.. 피곤해서 그냥 잠그고 잤어요..”
“많이 시끄러웠죠?”
“아뇨.. 재미있었어요. 그냥 오늘은 조금 피곤했을 뿐이에요.”
“피~ 거짓말…”
“예..?”
“다 알아요. 아줌마들 정말 시끄럽죠? 킥… 나도 처음에는 무척이나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지혁씨 아빠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난 내 자신이 아줌마이면서 아줌마들이 어떻게 사는지 몰랐거든요.”
“예… “
“그래서 수진이 때문에 전업주부를 결심했기는 했어도, 사실 겁도 많이 났었어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집에서만 어떻게 생활하나 하구요. 처음 한 두 달은 정말 힘들었어요. 지혁씨 아버지가 출근한 낯 시간은 정말 시간이 안 갔죠.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청소도 하고, 병원도 가고 했지만 정말 재미있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안 들었어요. 이렇게 생활하기 전에 나는 쭉 공부만 하다가 직장 생활만 했지 가정 일은 정말 해 본적이 없었거든요. 밥도 잘 못했고, 반찬은 햄 구이만 겨울 할 줄 알았죠. 킥~~~”
말 끝에 그 여자는 뭔가 생각 난 듯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혼자 뭐 하는 짓인지 나는 그 여자가 우스꽝스럽게 보였지만 내색 않았다.
“지혁씨 아버지가 그런 저를 보며 뭐라 그랬는 줄 알아요? 자기 아무래도 사기 당한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킥..킥… 뭐 틀린 말은 아니었죠. 회사에서 MT가거나 하면 나는 항상 근사하게 도시락을 준비했거든요. 찬거리도 꼼꼼하게 챙겨갔고.. 뭐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다들 내가 한 줄 알았어요. 그리고 나도 그렇게 보이고 싶었구요. 물론 MT에서 난 절대 음식은 만들지 않았죠. 집에서 하는 것만으로도 지겨운데 여기서까지 할 수는 없다고 버틴 거죠. 모두들 그런 내 모습에 속았어요. 지혁씨 아버지까지.. 그런데 막상 같이 살면서는 그런 제 연극이 통하지 않았죠. 크크크…. 지혁씨도 봤어야 하는데, 그런 말을 하던 그 이의 얼굴을….”
그 여자는 정말 즐거운 듯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하지만, 난 하나도 재미없었다. 그 여자의 이야기 하나 하나는 원래 나와 엄마가 공유해야 하는 것이란 생각에 말이다. 예전 우리집도 꽤나 재미있는 집이었다. 아빠의 엉뚱한 행동에 엄마와 나는 몇 번이나 뒤로 꼴가닥 넘어갔으니까 말이다.
“예.. 그랬군요. 그런데 저 때문에 깨신 거 같은데 가서 더 주무세요. 이제 저 밥도 거의 다 먹었어요.”
내 말에 그 여자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제가 싫어요?”
“예..? 그런 게 아니라, 피곤해 보여서요. 나 때문에 잠에서 깬 거 아닌가 하고..”
“정말요?”
“예…”
“일부러 깨운 거 아니구요?”
“예..!?”
나는 섬찟했지만 애써 태연한 얼굴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저 잠귀가 무척이나 밝아요. 아주 예민한 성격이거든요.”
“….”
“아무리 깊이 잠들어도 문을 열 때 나는 딸각거리는 소리에도 잠에서 깨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양. 하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아까.. 제 치마 내려주었죠?”
순간, 나는 얼굴이 확 달아 올랐다.
“고마워요. 저도 사실 많이 난감 했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던 그녀는 금새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여자는 정말 카멜레온 같은 여자였다. 아주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가하면, 금새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왠지 그 여자가 아주 무서운 사람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런데, 제 속살을 본 소감이 어때요?”
그 여자는 다시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되었다.
“지혁씨 어머니와 비교해서요..”
황당했다. 정말 황당한 그 여자의 질문이었다.
“아무런 느낌도 못 받았어요. 그냥 보기 민망해서 그렇게 했을 뿐이에요.”
“아니.. 그런 답변 말구요. 지혁씨 어머니랑 비교해서 어떠냐구요.”
“그게 궁금해요?”
“예.. 아주 많이…”
“왜죠?”
황당함은 화로 이어지는 법.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저의를 물었다.
“아.. 오해는 말아요. 그냥 단순한 호기심 일 뿐이에요.”
“제가 엄마와 그 짓을 했다고 해서 제 엄마까지 만만하게 보이나요?”
내 목소리는 다소 커졌다.
“아… 그런 뜻은 전혀 없어요. 난 단지… 그냥 단순한 호기심 일 뿐이었어요.”
이제 그 여자는 아주 순진무구한 청순가련형의 여자였다. 하지만, 이미 그 여자에 대한 적개심을 가슴 한 켠에 두고 있던 나는 그런 그 여자의 변신에 속지 않았다. 아니 이 참에 가끔씩 나에게 조롱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그 여자에게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요. 저와 제 엄마가 우습죠? 개만도 못한 짓을 했고, 자식까지 두었으니 인간처럼 보이지 않은 거죠? 저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아요. 가끔씩 제게 보내는 이상한 시선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눈치 없지도 않고요.”
“그건…..”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솔직한 서로의 의견을 듣기로 해요. 알겠지만, 저는 이 집에 계속 살지는 않아요. 생활은 제가 이 집을 나가면 그 뿐이지만, 앞으로 우린 종종 만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란 건 알 겁니다. 그러니 서로가 찜찜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오늘 다 말해요.”
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어차피 더 이상 그 여자에게 감출 것도 없었다. 그런 내 말에 그 여자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 보이던 그녀는 다시금 사무적인 얼굴로 변해 있었다.
“그래요.. 우리 말해요..”
“예…”
“제가 먼저 말한다면, 아니 그냥 본론부터 말할게요. 그래야만 지혁씨가 오해를 풀 거 같으니까요. 사실, 전 지혁씨 아버님을 완벽하게 신뢰하지는 못해요. 그 사람의 마음에는 아직 지혁씨의 어머니의 존재가 저보다 더 크게 자리잡고 있죠. 물론, 첫사랑의 여자를, 그것도 17년을 같이 산 사람을 한 순간에 잊어버리라고 한다면 제가 나쁜 여자죠. 그런 것은 이해해요. 하지만, 저 역시 남편에게 사랑 받고 싶은 그냥 평범한 여자에요. 제 전 남편과 저는 사실 필요에 의해 만난 사이였죠. 그 때까지만 해도 난 사랑 같은 거 믿지 않았고, 해 본적도 없어요. 나에게 있어 남자는 그냥 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그런 존재일 뿐이었죠. 그런데, 직장에 들어가 지혁씨의 아버님을 만나면서부터 그런 제 생각은 서서히 무너졌어요.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설래임을 알았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사랑의 고통도 알게 되었어요. 그 때에서야 난 비로서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누군가의 여자가 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죠. TV드라마와 멜러 영화가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고, 재미가 있었다면 설명이 될까요?”
그 여자는 나에게 동의를 요구했다. 하지만,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좋아요.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요. 어째든 나는 지혁씨의 아버님을 만난 후에 뒤늦은 사랑의 열병을 앓았어요. 하지만, 그 사랑은 표현 할 수도, 하소연 할 수도 없는 그런 사랑이었죠. 지혁씨 아버님에겐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가족이 있었고, 난 그냥 그 사람의 직장 부하일 뿐이었죠. 그래도 난 만족했어요. 그 사람을 매일 회사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삶의 의미가 되었으니까요. 그렇게 8년을 보냈었죠.”
그기까지 이야기 했을 때, 나는 긴장했다. 이제 어떻게 해서 아빠와 그 여자가 연결이 되었는지 보다 상세히 알 수 있는 대목이 남았으니 말이다.
“우리 함께 출장을 갔어요. 원래는 나 혼자 가는 출장이었는데, 갑자기 지혁씨 아버지가 같이 가자고 했죠. 해외 지사를 순회하는 다소 고달픈 일이라 보통 실장은 그런데 가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실장이 몇 일이나 자리를 비우는 것이 말도 안 되었구요. 하지만, 그 사람은 저와 같이 출장을 갔어요. 나로선 당연히 기분 좋은 출장이었지만, 지혁씨 아버님은 그렇지 않은 듯했어요. 아니 나에겐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죠. 뭔가 다른 생각을 하는 듯. 그런데, 그런 제 생각이 맞았죠. 지혁씨의 아버님은 지사에 관심이 없었고, 학교를 알아보는 것에만 열중했어요.”
“학교요?”
“예.. 학교요.”
“왜….?”
“처음에는 저도 몰랐어요. 그러다 마지막 날, 술을 마시다 알게 되었죠. 지혁씨 아버님은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죠. 본인 뿐만 아니라 지혁씨까지 함께하는 유학을요.”
“!!!???”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빠가 나와 함께 하는 유학생을 생각했다는 것은 나로선 금시초문이었다.
“지혁씨도 몰랐던 것 같군요. 당시 지혁씨 아버님은 아들에게 더 큰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리고 자신도 더 공부하고.. 물론, 지금은 그런 뜻만 있는 게 아니란 것을 알지만, 당시에 저는 그렇게만 알았어요. 저는 당연히 충격을 받았고, 지혁씨 아버님을 앞으로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죠. 아니 나로선 눈물을 흘리는 거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난 지혁씨 아버님에게 아무런 권리도 없는 여자니까요. 그 날 우린 술을 참 많이 마셨죠. 나는 슬퍼서 울고, 지혁씨 아버님은 그런 나를 위로하느라 마시고…그리고, 술기운에 우린 그만 관계를 가졌어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지혁씨 아버님을 범했어요. 침대에 쓰러진 그의 옷을 벗긴 것은 나니까요.”
“……”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 후, 나는 그 것을 미끼로 계속 지혁씨 아버님을 협박했어요. 처음부터 그런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는데, 난 그냥 그렇게 했어요. 처음에는 몇 달만 더 있어 달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한국을 떠나지 말고 지혁씨만 유학 보내라고 했죠. 그러다 수진이가 생겼고 결국은 지금 이렇게….”
말을 마친 그 여자는 잠시 동안 나를 응시하곤 다시 말을 이었다.
“결과적으론 제가 지혁씨의 아버님을 뺏은 사람이 되었지만, 사실 난 욕심이 더 많아요. 그 사람의 마음에 제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요. 아니 적어도 여자들 중에서는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그 사람의 마음에는 여전히 지혁씨의 어머님이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어요.”
그 여자는 확신하듯 말했다.
“아마, 지혁씨 어머님이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된다고 해도 그 크기는 변하지 않을 거에요. 하지만……….”
그 여자는 잠시 말을 끊고서 나에게 강한 시선을 보내었다.
“지혁씨 어머님이 지혁씨의 여자가 된다면 아마 다를 거에요.”
“!!??”
“단순한 근친상간을 넘어선 진짜 지혁씨의 여자가 된다면, 그 사람의 마음 차지한 지혁씨의 어머니의 공간은 여자에서 며느리의 의미로 바뀔 테니까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그거에요. 지난 시간 가끔 지혁씨에게 보냈던 시선의 의미도 그러 하구요.”
그 여자의 눈이 빛났다.
확실히 무서운 여자였다. 자신이 목표한 것을 어떻게 하든 쟁취해내는 그런 집요한 미저리 같은 여자 말이다.
“이제야 알 것 같군요. 내가 왜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막연하게 싫어했는지…”
“…?”
그 여자는 내 말이 뜻밖이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몰랐나요? 내가 당신을 싫어하는 걸…”
“무슨…..”
“난 당신이 어색한 것이 아니라. 싫은 겁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군요. 왜 본능적으로 당신이 싫었는지.. 하지만, 그 말은 고려해보도록 하죠. 내 친 엄마를 내 여자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마에게 무슨 일을 할지 모르니까.”
내 말에 그 여자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표정 뒤에 그녀가 가진 생각의 전부가 다 읽혔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아빠에게서 나를 비롯하여 엄마, 지수, 그리고 다른 모든 가족의 기억을 전부 지우는 것이었다. 아빠는 나와 엄마의 관계를 말로서는 이해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눈 앞에 그 것이 현실화 되면 그 것은 완전히 다른 양상을 가질 게 뻔했고, 더구나 그 여자가 옆에서 도덕적 잣대 교묘하게 아빠게 사용한다면 그 여자는 아빠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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