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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레드라인(REDLINE) 1부-7

7. 수지의 교통사고

선배와 그렇게 하루를 보낸 이후, 혜정선배와 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데이트를 즐겼다. 여전히 학교에서의 그녀는 당당하고 괄괄한 성격의 최고참 선배였지만, 나와 있을 때에는 때론 한없이 천진스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여자가 되었다. 물론,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아는 사람은 학교에서 나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부모가 5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도, 과외를 해서 생계를 꾸려간다는 것도, 무척이나 상처 받기 쉬운 성격이란 것도 모두 나만이 알고 있는 그녀의 비밀이었다.
그렇게 그녀를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면서 나는 내 자취방에서 자는 날 보다 그녀의 집에서 자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렇게 우린 동거 아닌 동거에 들어갔지만, 정식으로 동거를 하자는 내 제의를 그녀는 언제나 거절했다.
“만약 내가 임신을 하게 되면 그렇게 할게…”
선배는 늘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선배는 임신을 하지 않았고, 처음 관계를 가진 날을 제외하고 나는 늘 콘돔을 사용해야 했다.

그렇게 우린 1학기를 보내고, 여름방학을 보내었다.
여름방학 때에 그녀는 학기 중보다 더 바빴다. 과외를 15명이나 했는데, 모두 학년이 틀렸다. 고3이 있는가 하면 중학교 1학년 생도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늘 그들에게 가르칠 내용을 공부하고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1000만원 가량 들어 있는 내 통장을 주며 일을 줄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도움을 받기 싫어하는지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나에게 무척이나 신경을 썼다. 내가 잘 안 먹는 음식 같으면 두 번 다시 식탁에 올리지 않았고, 내 옷은 언제나 깨끗하게 세탁하여 주름 하나 없이 다려주며 하나하나 코디까지 해주었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대충 아무거나 입고 다녔다.
“선배나 신경 써…”
나는 몇 번이나 그렇게 말하며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지만, 그럴 때면 그녀는 피식 웃어 넘겼다. 자기는 걱정 말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미 알 고 있듯 그녀는 약한 여자였다. 강철로 된 사람인양 굴었지만 그녀는 무쇠다리 무쇠팔을 가진 로봇이 아니었다.

선배는 오뉴월에는 개도 안 걸린다는 감기에 걸렸다.
몸살을 동반한 그 감기로 인해 선배는 지독하게 앓았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나를 편하게 했다. 비로서 나도 그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었기에 말이다. 선배는 4일을 지독하게 앓았고, 5일을 더 아프고 서야 병이 완전히 낳았는데, 그 기간 동안 나는 그녀 대신 과외를 했고, 그녀를 위해 음식을 만들었다.
과외는 고3 녀석이 나를 만만하게 보고서 까불던 것만 제외하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고3 녀석은 자신의 주민등록증이 잘못 된 거라며 거의 나랑 맞먹으려 들어서 무척이나 내 비위를 건드렸다. 하지만, 난 최대한 참으며 그 녀석의 코를 실력으로 눌러버렸다. 어째거나 난 공짜로 대학에 들어온 대학생이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선배의 집을 돌보는 일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기름보일러는 너무 낡아서 화재의 위험성이 있었고, 여기 저기 갈라진 벽이 많았다. 난 우선 기름보일러를 신형으로 교체했다. 보일러를 교체하러 온 사람들은 오래된 집이라 보일러만 교체해서는 안되고 방 바닥도 뜯어야 한다고 했지만, 선배가 앓아 누워 있는 상태에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또한 난 심한 기관지염도 보이는 선배를 위해 가습기도 구입했다. 선배는 쓸데없는 짓 한다며 아픈 와중에도 화를 내었지만, 어째거나 그녀는 아픈 사람이었고, 난 건강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주도권은 내게 있었다.
집안 청소도 구석구석 했는데, 이건 정말 끝이 안보였다. 하루에 두 번씩 하는데도 저녁이면 또 먼지가 쌓였다. 나는 일단 선배가 누워 있는 방만 하루 3번 정도 청소하기로 하고, 다른 곳은 그냥 2번만 했다. 그리고, 선배가 먹을 미음도 쓰고, 스프도 만들어 보고, 태어나 처음으로 닭죽도 만들어 보았다.
그때 난 처음으로 알았다. 누군가를 위하는 사람의 행복을 말이다. 그제야 난 엄마와 아빠의 마음을 이해할 듯했고, 선배의 마음이 이해될 듯 했다.

그렇게 5일을 보낸 후,
6일째 되던 날, 그 날은 아무런 과외도 없는 토요일 이었다. 난 대청소를 감행했다. 내 집이 아니라 가구 배치 등을 할 수는 없었지만, 커튼을 세탁하고, 창틀의 먼지를 제거, 창문 닦기 등은 할 수 있었다. 난 방에 있는 선배가 신경 쓰지 않게 소리를 내지 않으며 하나 하나 청소해나갔다. 그러다 문득 늘 잠겨있는 방이 궁금했다. 청소하면서 찾은 열쇠를 들고서 나는 그 방을 열고 들어갔다.
그 방에는 책이 가득 꼽혀 있는 책장이 양 벽을 둘러 쌓고 있었고, 책상과 함께 이는 장식장에는 액자가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찬찬히 액자를 살펴보았다. 선배의 가족 사진이었다. 어릴 적부터 선배가 대학에 입학 하던 날까지의 사진이 시간 순서대로 진열되어 있었는데, 선배는 어릴 때부터 상당한 미모를 보였다.
그렇게 한 참을 방을 둘러보던 내 눈에 책장 한 켠에 가지런히 꼽혀있는 책이 아닌 다른 것이 보였다. 한때 나도 여러 번 구입해서 사용한 적이 있는 것이어서 나는 직감적으로 그게 일기장이란 것을 알았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7권이나 되는 것을 몽땅 꺼내어 책상에 안아 페이지를 넘겼다.
일기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이 되었다.
여러 가지 사소한 일들이나, 철학 같은 생각들이 쭉 적혀있었는데, 사실 중학교의 일기는 그렇게 재미있는 것은 없었다. 고등학교 일기는 짝사랑 하는 남자에 관해서 적어 놓기는 했지만, 그 보다는 자아성찰이나 무지 어려운 철학적인 내용이 더 많았다. 일기에 나타난 선배의 성격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무척이니 여린 사람이었다. 작은 일에도 깊은 상처를 받았고, 자기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에 대한 보기 민망할 정도의 죄스러움이 적혀있었다.
일기에 일관되게 적혀진 선배의 꿈은 변호사였다. 간혹 어려운 나라에 가서 의료봉사하는 그런 꿈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보다는 변호사 쪽이 더 많이 적혀있었는데, 그 이유는 선배의 아버지와 관련이 있었다. 선배의 아버지는 소규모의 공장을 운영한 듯 했는데, 늘 법을 몰라 곤욕을 치르면서 선배에게 법관이 되라고 주문한 것 같았다. 그런 아버지의 말의 영향 때문에 선배는 법을 공부하고 싶어했고, 변호사가 되어 아버지 같은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고 적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간 이후의 선배의 일기에는 어떤 한 남자에 대한 글이 많이 이어졌다. 그녀에게 오늘은 이렇게 했다, 다음 날에는 저렇게 했다 식으로 이어지던 일기는 어느 순간부터는 사랑이란 단어가 나오고, 질투란 단어가 나왔다. 그리고, 선배는 순결을 잃은 날도 기록해 놓았다. 여름방학의 여행에서 였다. 그 남자와 단 둘만 여행을 갔고, 해안가의 깨끗한 여관에서 그녀는 그 남자를 받아들였다.
그 이후 선배의 일기에는 더 이상 변호사나 개인적 사유 같은 것은 없었다. 오직 한 남자에 대한 글만 있었고, 그 남자에게 자신의 생각까지도 맞추어갔다. 그러던 그녀는 그 해 초겨울 임신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아버님은 결국 사업을 실패하고서 겨우 지금 사는 집만 건지고서 어머니와 함께 트럭으로 수산물이나, 농산물 등을 운반하는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선배를 힘들게 한 것은 선배의 임신소식을 들은 그 남자는 그녀에게 중절수술을 강요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선배는 많이 혼란스러워 했다. 뭐든 그 남자의 말이 맞다고 쓰면서도 아이에 대한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러다 일주일 가량을 선배는 일기에 아이와 대화를 하 듯 글을 적어갔다. 마치 눈 앞에 두고 대화를 하는 양 배속에 있는 아이에게 그녀의 깊은 사랑을 적으며, 미안하다는 수 백 번이나 적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선배는 아이를 지웠다.
하지만, 선배의 불행은 그 곳에서 끝나지 않았다.
부산에서 물건을 가지고 오던 그녀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이다. 선배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글을 계속해서 썼다. 그런데 12월 28일 이후부터 그녀의 일기는 끊어졌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 시기에 선배가 그 남자에게 버림을 받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방을 나온 난 측은한 마음에 선배가 잠들어 있어 방으로 향했다.
이제 그녀는 열이 많이 내렸고, 병마와 싸우느라 지쳤는지 새근새근 고른 호흡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선배는 다음날까지 중간에 잠시 깨어난 것을 빼고는 계속해서 잠을 잤다. 그렇게 모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하루를 쉰 선배는 이제 병이 낳은 것 같다며 일어나려 했지만, 난 그녀를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왜 그래 너?”
“더 쉬어요..”
“이제 괜찮다니까..”
“괜찮은 사람이 기침을 해요?”
“이 정도야 누구나 해…”
“그건 건강할 때 이야기고, 선배는 어제까지만 해도 불덩이처럼 않던 사람이잖아요.”
“이제 정말 괜찮다니까..”
“정말 왜 그래요? 나를 믿고 몇 일만 더 쉬어요.”
나는 완력을 써서 앉아있는 그녀를 강제로 눕혔다.
“너 정말 자꾸 이러면 나 화낸다..”
“화는 선배만 낼 줄 아는 게 아니에요. 저도 화낼 줄 알아요..”
나는 선배의 눈을 강하게 응시하면서 위압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나에게 선배도 나 못지 않게 강한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가 먼저 체념한 듯 시선을 거두었다.

혜정선배는 그렇게 2일을 더 쉬었다.
난 생각 같아서는 일주일을 더 그녀를 쉬게 하고 싶었으나, 잠시 내가 할인점에 찬거리를 간 사이에 쪽지만 남겨놓고 과외 하러 나갔다.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 너 까불면 죽어.…|
| 혜정. |
우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난 더 이상 그녀의 손님이길 거부했고, 선배와 함께 사는 사람이란 것을 선배에게 확인시키기 위해 집안 살림의 대부분을 내가 했다. 음식도 곧잘 했으나, 사실 선배만큼의 실력은 되지 않아 음식에 관해서는 선배가 했다.
그렇게 우린 여름방학을 부부인양, 혹은 남매인양 지냈다. 사실 부부에 더 가까운 생활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이웃들은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를 그녀의 친척 동생으로 간주하며 나를 대했다.
선배는 이웃들에 대한 신망이 아주 높았다.

“너 집을 이렇게 오래 비워도 돼?”
점심을 먹으며 선배가 말했다.
“괜찮아요.”
“네가 여기 있는 걸 네 부모님은 모를 거 아냐…”
“그렇죠.”
“연락은 드리는 거야?”
“아뇨… 어차피 예전에도 연락하며 지내지도 않는 걸요 뭐.”
내 말에 선배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요?”
“이해가 안 되어서…”
“뭐가요?”
“너만 연락을 안하게 아니라, 네 부모님도 연락을 안 한다는 말이니?”
“풋~~ 예…”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지낸 게 벌써 2년인걸요. 뭐 그렇다고 인연을 끊었다는 그런 말은 아니에요. 그냥 서로 연락을 안 해요. 뭐 연락해서 딱히 할 말도 없고요.”
“그냥 시간되면 돈만 보내는 주는 부모라….”
“예?”
“저번에 네가 나에게 보여준 통장의 돈 말이야.. 설마 네가 벌은 건 아닐 테고..”
“아… 예… 맞아요. 우린 그래요.”
“킥… 왠지 드라마에나 나오는 남자 주인공 같다 너…”
“드라마요?”
“왜 그런 드라마 있잖아. 갑부 집 아들이 부모와 갈등을 일으켜서 가출해서는 착한 여자랑 지내고 하는….”
“푸풋~~~”
하마터면 음식물이 입에서 튀어나올 뻔 했다.
“그럼 너가 남자주인공이면 난 비련의 여주인공인가? 아니다. 비련의 여주인공은 남자가 나쁜 놈이어야 하니까. 아마 난 신데렐라 같은 여주인공이 되는 건가? 어때? 나 비련의 여주인공이야 아님 신데렐라야?”
“ㅎㅎㅎㅎㅎ……..”
난 어이가 없어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말해봐.. 난 어느 쪽에 속하니?”
“아무 쪽에도 속하지 않아요.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래?”
“예….”
“다행이다... 그럼 너 집에 연락해.”
“에…?”
“너 아무것도 아니라며? 집에 전화해서 잘 지낸다고 해..”
“……..”
“너 여기서 생활 한지만 벌써 1달이 넘었어. 아마 지금쯤 많이 걱정할 거야.”
혜정선배는 단호하게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비록 선배가 내 속사정을 잘 모른다고 해도 지난 세 달간 아빠와도 한 번연락을 하지 않은 것은 그리 잘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내가 연락을 취한 적은 없었다. 연락하는 쪽은 언제나 아빠였다.

그 날 난 선배가 과외 하러 간 뒤에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지혁이냐?”
“응…”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집으로 몇 번 전화를 했다만 안받더구나.”
“괜찮아… 아빠는?”
“나야 괜찮지만, 네 엄마하고 지수에게 문제가 생겼다.”
순간, 나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다행히 네 엄마는 크게 다친 데는 없다만, 지수는 조금 많이 다쳤다.”
그 말에 가슴이 몹시 뛰었지만,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물었다.
“얼마나요?”
“뭐 이젠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마 1달 정도는 병원에 더 있어야 될 것 같다.”
“언제 그랬어요?”
“한 열흘쯤 되었을 거다. 병원에 가보겠니?”
순간, 그 말에 난 망설여 졌다. 하지만, 아빠는 그 망설임을 일축시켰다.
“넌 그 애의 친 아빠이잖아.”
그 말에 난 억지로 유지하던 냉정함을 잃었다. 잊으려 했던 일이지만, 난 그 것이 결코 잊혀지지 않는 일이란 것을 새삼 느꼈다. 아빠의 입에 흘러 나온 ‘넌 그 애의 친 아빠이잖아’란 말이 계속 내 귓전에 맴돌았다.
난 무엇에 홀린 듯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버스로 30분 거리였다. 지수의 병실에 들어갈 때까지 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수의 상태가 어떤지만 궁금할 뿐 다른 모든 것에 관심이 없었다. 마치 내가 그 애의 진짜 아빠인 양 착각마저 했다.
그리고 그 착각은 병실에 들어선 후 여지 없이 무너졌다.
“지수야 네 오빠 왔네….”
지수 곁에 있던 외할머니가 멀뚱하니 나를 바라보는 지수에게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말했다. 다행히 내 눈에 보기에도 지수는 기브스한 다리를 제외 하곤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애미가 그렇게 너에게 연락하지 마라고 해서 안 했는데.. 어떻게 알고 왔냐?”
외할머니는 특유의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너무 걱정 마라.. 다행히 크게 다친 데는 없으니까. 그래 네 엄마는 만났냐?”
“엄마요?”
“그래.. 방금 마실 거 사러 간다고 나갔는데… 못 만났나 보구나..”
“예…”
“공부는 힘들지 않고..?”
“예.. 그럭저럭요.”
“원 녀석도… 그게 얼마나 어려운 공부인데.. 1학년 때는 좀 쉬지 무슨 사법고시를 벌써부터 준비한다고 그러냐..”
“예…?”
“숨길 거 없다. 네 엄마한테 이미 다 이야기 들었으니까..”
황당한 말이었지만, 이해가 되었다. 엄마는 아마도 내가 연락을 하지 않는 걸 그렇게 둘러 댔던 거 같다.
“그래 열심히 하는 건 좋다만, 그래도 가끔 연락도 하고, 네 엄마도 찾아보고 그래라. 네가 너무 연락이 안되니까 지수하고 차 타고 네가 사는데 다녀오다 저렇게 된 거잖니..”
“….!!!???”
금치 초문이었다.
“제가 사는 데요?”
“그래.. 그래도 큰 사고가 아니라 천만 다행이지. 하지만 앞으로는 네가 직접 와서 반찬이랑 필요한 것들은 가져가거라. 너도 알 듯이 네 엄마 무척 피곤할 게다. 네 외할아버지 후계자 수업이 보통 혹독해야지. 네 큰 외삼촌도 두 손 들은 일 인데…”
난 머리가 핑 돌았다.
그제야 지금까지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옷이 있을 때에만 메모지가 있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난 그 메모지만 을 보고 언제나 아빠의 아내로 있는 그 여자가 내 방을 청소해주고, 찬거리며 각종 필요한 것들을 챙겨 주는 줄로만 알았었다. 그렇게 외할머니와 내가 이야기 하는 사이 엄마가 들어왔다. 엄마는 많이 작년보다 더 야위었다. 피곤함이 얼굴 뿐 아니나 온 몸에서 느껴졌다.
“어떻게 알고…?”
나를 본 엄마의 첫마디였다.
“아빠에게 들었어..”
“응...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린 괜찮으니까 어서 가..”
냉랭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무슨 모자가 그러냐..”
엄마와 나의 썰렁한 대면이 보기 어색했던 지 외할머니가 나섰다. 외할머니는 그렇게 어색한 엄마와 나 사이에서 병실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참 많이도 웃었다.

그 후,
나는 매일 병실을 찾았다. 엄마의 냉랭한 태도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매일 병실을 찾으며 2년 사이 훌쩍 커버린 지수와의 시간적 공백을 메꾸려 노력했다. 아빠 말대로 어째든 지수는 내 친딸이었다. 법으로도, 상식적으로도 용납이 되건 안되건 그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으니까 말이다.
엄마는 낮 시간에는 어쩌다 드르는 것을 제외하고, 언제나 밤이 되어서야 지수의 병실로 찾아왔다. 그러면 난 외할머니와 함께 지수를 엄마에게 맡기고 병실을 떠났다. 물론, 엄마가 병실에 굳이 있지 않아도 되었다. 지수는 특급병실에 있었기에 전담 간호사와 의사가 있었고, 게다가 지수의 병 수발을 들어줄 사람도 있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외할머니가 친척의 경사로 인해 오지 않았고, 병실에는 나와 지수 그리고 병수발을 하는 아주머니 이렇게 셋이 있었다. 그 동안 지수와 나는 많이 친해져 있었던 터라 난 지수와 장난도 치며 즐겁게 놀았다.
그날도, 저녁이 되자 엄마는 병원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엄마의 모습은 그날따라 더 지쳐 보이고, 피곤해 보였다. 훅하니 불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꼿꼿하니 살아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엄마의 조건반사 일지도 몰랐다. 엄마를 보면 표정부터 굳어지는 나에 대한…
어째건, 엄마가 온 이상 나는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썰렁한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어봐야 주변사람들만 불편하게 할 뿐이기에 말이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엄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손에서 전해져 오는 느낌은 기다려 달라는 뜻이었다. 난 말없이 엄마 곁에 앉아 엄마와 지수가 대화하는 걸 들었고, 지수가 잠이 들 때까지 어린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을 보았다. 지친 엄마의 얼굴에는 지수에 대한 사랑이 온화하게 퍼져 잔잔한 미소를 만들었다.

지수가 완전히 잠에 빠져들자 우린 간병인에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빠져 나왔다.
“술 한잔 하자.”
엄마에게 인사할 때를 기다리며 서 있는 나에게 엄마가 말했다.
“어서 타…”
엄마는 내 대답 같은 건 기다리지도 않았다. 나는 얼떨떨 했다. 술을 마시면 인사불성이 되는 엄마가 술을 하자는 소리가 이상했지만, 차에 먼저 타고서 나를 기다리는 엄마 옆 좌석에 동석했다.
“놀랬지?”
어디론가로 운전을 해가며 엄마가 말했다.
“나도 이제 술을 해…”
“응…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야?”
“집…”
“집? 집으로 가려면 이쪽이 아니잖아.”
“우리 이사했어.”
“이사?”
뜻 밖이었다. 외할머니를 통해 엄마의 결혼이 무산되었다는 것은 들었지만, 이사를 한 사실은 몰랐다. 그 후, 엄마와 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이사한 집은 상당히 먼 곳이었다. 새로 지은 아파트라 깨끗하기는 했지만, 엄마의 직장과 거리상으로 이전 집보다 배는 더 멀었다.
아파트엔 아직 새집 냄새가 남아 있었다. 비단, 집만 새집이 아니었다. 가구며, 장식장이며 이전 집에서 사용하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앉아 있어.. 내가 술 내어 올 테니까…”
상의를 벗어 소파에 걸친 엄마는 하얀 브라우스 차림으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걸어가는 엄마의 뒷 모습은 확실히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져 보였다. 거실엔 아무것도 없었다. 예전 우리 집에는 거실에 가족사진이 커다랗게 걸려져 있었는데 여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삭막하리만치 썰렁했다.
“이사한지 얼마 안되었나 보네..?”
간단한 마른 안주와 맥주를 내어오는 엄마를 보며 내가 말했다.
“아니.. 벌서 3개월 정도 되었는 걸..”
“3개월?”
“응…”
엄마는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술이 목적인 양 나에게 한잔을 따라 주고는 자작으로 연거푸 3잔을 마셨다. 내가 아는 엄마는 그 정도면 그대로 기절해서 다음 날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는 멀쩡해 보였다.
“놀랬지?”
엄마가 내 표정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나 이제 술 잘 마셔.. 너 안마시고 뭐해?”
“응… 마셔야지…”
나는 컵을 반쯤 비웠다. 맥주는 별루 였다. 처음 대학에 들어가 술을 배울 때에는 맥주를 마셨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소주만 마셨었다.
“학교는 어때?”
“그럭 저럭 괜찮아…”
“여자친구는..?”
“글세….”
“저번에 극장 앞에서 너랑 머리 긴 여자애랑 있는 거 봤는데, 혹시 그 애 아니니?”
“언제…?”
“한 달 정도 되었을 거야…”
아마 혜정선배와 내가 극장 앞에 서서 어떤 영화를 볼지 고를 때 본 것 같았다.
“응 그랬구나..좋은 마음으로 만나고 있어…”
“좋은 마음..? 풋~~”
“왜 웃어?”
“너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던데..?”
“응… 많아..”
“몇 살이나?”
“6살…”
“6살?”
엄마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재주 좋네.. 우리 아들..”
“재주는 무슨.. 어쩌다 그렇게 된 건데..”
“어쩌다가?”
“응..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까…”
“뭘 어떻게 해봐?”
“그냥 술 마시고, 만나고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고…”
“여자애도 너 좋아하니?”
“싫어하진 않을 거야..”
“같이 잤어?”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눈 빛이 빛났다. 순간적으로 난 울컥했다. 집요하게 따져 묻는 것도 예전 엄마 같지가 않아 어색한데, 그런 질문을 받자 난 기분이 상했다.
“뭘 알고 싶은 거야?”
“같이 잤는지 알고 싶어서…”
“몰라.. 마음대로 상상해..”
“잤구나..”
그렇게 말한 엄마는 잔을 다시 비웠다. 어느새 2병이 비워졌고, 3번째의 병도 반만 남았다. 난 아직 한 잔도 비우지 않았는데, 엄마는 혼자서 2병이나 마신 거였다. 예전 같으면 엄마에게 그 양이면 아마 치사량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얼굴은 이제야 취기가 오르는 듯 빨갛게 달아 올랐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냐?”
“아니.. 아직 괜찮아. 맥주 5병도 마셔봤는 걸 뭐…”
“왜 그래?”
“뭘?”
“왜 안 하던 술을 하고..”
“무슨 말이니… 벌써 2년이나 마시는 술인데….”
“일이 힘들면 그만 둬.. 그러다 건강 헤쳐…”
난 짐짓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일은 힘들지 않아…”
“그럼 왜?”
“몰라서 묻는 거니? 내가 왜 힘든지…”
“나 때문이라고?”
“그래.. 너 때문에…”
난 뭐라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건 엄마는 완벽한 피해자이고, 난 완벽한 가해자 이니까 말이다.
“난 어떻게 하면 좋니? 말해 볼래?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니?”
이제 엄마는 취기가 완전히 올랐다. 혀가 꼬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잠시 전까지만 해도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엄마를 감싸던 긴장감이 눈에 보일 정도로 풀어져 있었다. 엄마는 소파에 파묻힐 듯 몸을 뒤로 한껏 기대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은 쇼파와 대조가 되어 한 없이 작아 보였다.
“그래서 피해 드렸잖아요.”
“알아…”
“왜 결혼하지 않은 거에요? 듣자 하니 엄마가 거절했다던데…”
“어차피 너 때문에 하려 했던 결혼인데.. 네가 나갔으니까..”
“……”
“우리 행복하지 않았었니?”
그 때부터 엄마는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를 했다. 딱 붙힌 두 다리에 양 손을 곱게 올려 놓고, 고개를 숙인 체 엄마는 나직하게 말했다.
“난 참 행복했었는데.. 엄마는 16살에 너를 가졌어. 주변에서는 손가락질을 하며 나와 우리 가족을 욕했지만, 난 부끄럽지 않았단다. 내 속에 있는 너가 자랑스러웠고, 네 아빠도 주변의 반응 때문에 힘들어하긴 했어도 너를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았어. 그만큼 네 아빠와 난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실히 믿었거든. 그런 우리들은 어른들이 이해하고 받아 주었지. 뭐 어른들끼리 우리가 네 아빠나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친하게 지낸 사이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점도 있었지만, 어째든 나와 네 아빠는 16살, 22살이란 나이에 결혼을 했단다. 그리고, 그 이듬해 네가 태어났어. 넌 무척이나 예뻤지. 방긋방긋 웃을 때면, 내가 중학교 중퇴를 한거나, 친구들을 잃어버린 것이나 하나도 아깝지 않았어. 낯선 집안 살림의 힘겨움도 네 미소 하나면 모두 잊어버렸지. 난 네게 부끄러운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어. 그래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공부도 잘 했단다. 네 아빠가 내 속을 썩힌 잠시간의 기간을 제외하곤 난 언제나 1등을 했고, 대학에서도 그랬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너 때문이었어.”
엄마는 확인을 받고 싶은 듯 내게 눈을 맞추었다.
“네가 있었기에 다 가능했던 거야.”
엄마는 한 번 더 강조했다.
“아빠는 필요 없었나요?”
난 쌀쌀맞게 대답했다. 지금 엄마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듣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던 나는 그냥 그렇게 말했다. 단순한 푸념이라면 그래 들어 줄 수 있었다. 꾹 참고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내가 알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난 그 것이 참기 힘들만큼 보기 싫었다.
“아니.. 네 아빠도 필요했지. 우린 서로 깊이 사랑했으니까. 네 아빠는 내게 참 잘 해주었단다. 내가 하자는 것이면 뭐든지 했어. 설령 그게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하는 시늉까지는 했거든. 그래서 난 행복했던 거야.”
“그렇게 사랑한 아빠를 왜 그렇게 보낸 거죠? 모든 게 저로 인해 잘못되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 때 조금만 참고서 아빠를 받아들였다면, 지금 이렇게까지는 안되었을 것 아닌가요?”
“네가 내게 못된 짓을 한 건 인정하는 거니?”
“예… 그것 때문에 돌아 맞아 죽는다 해도 전 할 말없어요.”
“그래… 넌 내가 단순히 질투 때문에 네 아빠를 보낸 거라 생각한 거니?”
“그럼..?”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어..”
“예…?”
“5년 전 그 날 아침, 난 이미 이상하다는 걸 알았어. 내 몸에 남자의 흔적은 있는데, 네 아빠에겐 여자의 흔적이 없었거든. 게다가 속 옷을 갈아입은 흔적도… 하지만, 난 애써 외면했어. 내게 남아 있는 남자의 흔적이 네 아빠의 것일 거라고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지. 하지만, 지수를 가지고, 지수의 혈액형이 O형으로 나왔을 때에는 사실 나도 많이 겁을 먹었단다. 자꾸만 네가 떠올라서 말이야. 다른 남자도 아닌 네가 직감적으로 자꾸만 걸려서 난 더 겁먹었어. 하지만, 그런 나에게 네 아빠는 지수가 자기랑 닮았다며 참 많이도 안심시켰지. 혈액형을 거짓으로 말하면서까지 말이야.”
엄마는 다시 내게 시선을 보내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슬픈 눈이었다.
“그래서 네 아빠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난 한편으론 마음이 편했단다. 물론, 질투심이 없었다고는 안 할게. 나도 여자이니 그런 게 없을 수는 없었으니까. 난 네 아빠를 떠나 보내기로 했어. 그 여자 카멜레온 보다 더 간사해 보이기는 했지만, 네 아빠에게 만큼은 진심인 것 같았으니까. 난 막연한 두려움으로부터 네 아빠를 보호하고 싶었어. 하지만, 나중에 네 아빠의 비밀을 알게 되었지. 네 아빠는 나처럼 막연하게 아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나를 범한 사람이 너란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리고 네 아빠가 말하더구나. 이대로 우리만 아는 사실로 묻어두자고. 네게 우리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숨기자고 말이야. 하지만,.....”
어느새 엄마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게 얼마나 힘든 줄 아니?”
엄마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네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너를 대하고, 네게 미소를 본고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지 알아? 너를 볼 때 마다 지수가 저주 받고 태어난 아이 같아 한없이 더러워 보이는 내 심정을 정말 알 수 있겠니? 내가 낳은 아이들을 그런 두 가지의 마음으로 바라 보아야 하는 내 마음을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난 미칠 것 같았어. 하지만, 미칠 수도 없었어. 너와 지수 때문에….”
그기까지 말한 엄마는 눈을 감고 몸을 소파에 기대었다. 엄마의 감은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엄마 몸에 있는 수분이란 수분은 전부다 빠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내 가슴은 해머로 맞은 듯 경직되었다. 콱 하니 숨이 막히고, 머리가 아득해졌다. 내가 저지른 죄악이 얼마나 큰지 난 이제 실감도 나지 않았다. 후회, 변명, 사과… 그런 단어들은 그저 내게 하나의 쓰레기였다. 그런 것도 어느 정도의 죄악에서만 사용되는 것이란 걸 난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피할 수 없는 문제에 닥치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문제이고,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면 우린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모든 것을 놓아 버린다. 시간여행을 하여 과거로 도망 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 날, 엄마는 내게 그것을 알린 것이었다.
-나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라는 그런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미를 찾은 것은 지금의 생각이고, 당시에 난 그저 엄마가 막다른 골목에서 부들부들 떠는 약한 여자로 보였다. 커다란 비밀을 안고서 이리저리 몸부림 쳐보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수렁으로 빠지기만 하는 엄마였다. 그러나, 난 용감하게 악과 싸워 약자를 구하는 정의 흑기사는 아니었다. 그럴 능력도, 그럴 힘도 없었다. 나 조차도 세상이 두려워 모든 것을 숨기고, 거짓말 하고, 도망치고 싶었으니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홀로 앉아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는 엄마 곁에 있는 주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난 엄마 곁에 가서 앉았다. 이젠 나보다 10cm는 작고, 그간의 고통으로 체중이 줄어 혜정선배보다 가는 어깨를 가진 엄마였다. 나는 팔을 둘러 엄마의 어깨를 감싸고,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게 했다. 엄마는 거부하지 않았다. 엄마에게서 향긋한 라일락 내음이 피어 올랐다. 그건 이 낯선 집에서 유일하게 내가 기억하는 과거 엄마의 향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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