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라인(REDLINE) 2부-8 (2부 완결)
16. 행복이란?
“네 엄마가 하겠다고 하면, 나도 찬성이다.”
그렇게 말하던 아버지는 창 밖으로 공허한 시선을 던졌었다. 모든 것이 덧없는 것인 양, 지금 세상이 무너진다고 해도 아쉬울 것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망설임 없이 수락했지만, 창 밖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표정은 내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언뜻 무관심한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내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엄마가 내 ‘첫 번째 아내’란 말은 아버지가 먼저 했었는데, 왜 결혼이란 말에 그런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 동사무소에 신고할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난 아버지와 엄마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부부나 다름없이 생활을 하고 있는데, 무엇을 겁내 하는 것일까? 결혼식이라고 해봐야 소꿉장난 하듯 언약하는 것이 전부일 텐데……
“안 갈거니?”
수정이 누나의 낮은 목소리가 강의실을 울렸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강의실엔 아무도 없었다.
“오래 전에 다 나갔어.”
그 말에 수정이 누나를 돌아보았다.
“강의 시간 내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그런 말을 하며 난 책을 챙기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걸상이 끽끽 소리를 내며 강의실의 정적을 깼고, 뚜벅거리는 발걸음 소리는 강의실에 이어 복도에서도 이어졌다. 석양으로 붉게 물든 교정엔 학생들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쓸쓸함이 감돌았다.
“가을도 이제 제법 물들었네……”
수정이 누나는 낙엽 하나를 발로 툭 찼다.
“그래……”
“너 가을 타지?”
“그래 보여?”
“그래 보여!”
“그럴지도.”
“그래도 주변을 좀 보면서 가을 타라.”
왠지 수정이 누나는 투정하는 것 같았다.
“내가 조용하니까 심심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나야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인 걸.”
“행운?”
“그래. 너와 친하게 지내면서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면서도 내게 아이들이 많이 따르니까.”
무슨 말인지 몰라서 난 누나를 슬쩍 돌아 보았다.
“몰랐니?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내 주변에 아이들이 많이 생겼다는 거.”
“그랬나?”
“무관심하긴……”
“미안해. 내가 요즘 좀 그래.”
“무슨 일이야?”
“그냥…… 가을 타는 거야.”
그러고는 난 걸음을 멈추어 석양을 받아 더욱 붉게 물든 단풍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단풍나무를 볼 때면, 난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것을 보며 휴식을 가지란 뜻으로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나무라고 말이다.
“왜 이 나무만 보면 마음이 편안할까?”
“예쁘잖아. 작은 호수와도 잘 어울리고……”
“작은 호수?”
“왜?”
“호수라고 말한 건 누나가 처음이라서. 다들 못이라고 하는데.”
“그게 더 예쁘잖아.”
“그렇긴 하네.”
“응.”
“아마 단풍나무는 신이 선물한 걸 거야.”
“왜?”
“사람이 인위적으로 가꿀수록 더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니까.”
“무슨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정원수로 가장 좋은 나무 같아서.”
“풋~ 그거야 학교에서 그럴 듯하게 꾸며놓아서가 아닐까? 호수 옆에 있는 나무는 다 예뻐.”
“맞아. 그런데, 단풍나무는 항상 못을 끼고 있어야 해. 습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라서……”
“그런가?”
“응”
“난 저 나무만 보면 보육원 시절이 생각나.”
“추억이 있는 거야?”
“추억? 그렇지. 이젠 추억이지. 우리에게 저 나무는 약이었어.”
“약?”
“응. 만병통치약. 원장님은 관절염 때문에 저 나무를 다려 먹었고, 우리들은 다쳤을 때나 가벼운 배앓이를 할 때면 저 나무의 도움을 받았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엔 약국에서 약을 지어 먹기에는 우린 너무 가난했었거든.”
“그랬구나. 예쁘기만 한 나무인줄 알았더니……”
“이제 그만 가자.”
“응”
우린 다시 걸음을 떼었다.
남자의 계절 가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가을이면, 난 휑한 마음을 느낀다. 이유도 없이 휑한 그 느낌은 석양을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무언가 행복하면서도 한 없이 쓸쓸하고, 또한 아쉬운 그런…….
“나 요즘 질투하는 거 아니?”
문득 생각이 난 듯 수정이 누나가 그렇게 말했다.
“질투?”
“가을에 너를 빼앗긴 것 같아서……”
“풋~”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마. 너를 구속하는 그런 마음에서 하는 말이 아니니까.”
“알아.”
“쳇~ 몰라도 되는데……”
“무슨 말이야?”
“글세 무슨 말일까?”
“선문답 해?”
그때, 수정이 누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왜?”
내가 돌아보자 수정이 누나는 눈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시선을 돌리니 혜정선배가 교정의 또 다른 단풍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
“언니가 너를 만나고 싶다고 했어.”
그 말에 난 직감적으로 혜정선배가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
“언니의 부탁이었어. 네가 알면 자신을 만나주지 않을 거라면서……”
“……”
“가봐. 난 도서관으로 갈 테니까.”
수정이 누나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걸음을 떼어 곧장 앞으로 향했다. 그런 수정이 누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혜정선배를 보았다. 선배는 그림처럼 서 있었다. 때마침 불어온 가벼운 바람이 선배의 머리 결을 흩날려 선배의 모습이 만화 속 여주인공만큼이나 환상적으로 보였다. 그런 아름다움에 도취된 듯 난 선배를 향해 걸음을 떼었다. 한걸음, 한걸음 조금씩 선배에게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내 심장도 고동쳤다.
9개월만의 재회였다.
“잘 지냈니?”
혜정선배 앞에 섰을 때 선배가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예. 선배는요?”
“나도.”
“더 예뻐졌네요.”
“그래 보이니?”
“예.”
“고마워. 우리 앉자.”
혜정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벤치에 앉았다. 그런 선배 곁에 나도 자리를 잡았는데, 엄마와 같은 라일락 향이 선배에게서 묻어났다. 내가 기억하는 선배의 향기는 라벤더였는데……
“향수 바꾸었나 보군요.”
“누군가를 닮고 싶어서.”
“선배답지 않은 말이네요.”
“나다운 게 뭔데?”
선배는 토를 달 듯 반문했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요.”
내 말에 선배는 빙긋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9개월이 짧지 않더라. 세월이 참 더디게도 흘러간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나 할까.”
“동감이에요. 겨우 아홉 달이 지났을 뿐인데, 오래된 옛일 같으니……”
“무슨 말이야?”
“그냥…… 말 그대로 에요.”
“서운하네. 나를 벌써 잊었다는 말 같아서.”
“오히려 제가 아직도 기억하는 게 불쾌하지는 않나요?”
“그랬다면, 실장님에게 그런 제안도 하지 않았겠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너를 좋아하니까.”
“쉽게 말하네요.”
“어려울 것도 없잖아.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당연한 거 아니니?”
“그럼 처음부터 잡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그랬다면?”
“아니에요.”
“훗~ 한때 그런 생각을 했었어. 왜 너를 한 번도 잡지 않았을까 하고……”
그렇게 말하는 선배의 눈이 깊어졌다. 옛일을 떠올리는 듯. 그리고 선배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는 겁이 났어. 다시는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네가 내 마음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았지. 그래도, 난 그 것을 인정하지 않았어.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게 더 옳을 거야. 나보다 6살이나 어린 네 앞길을 막고 싶지 않았다고나 할까.”
“단지 나이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응……”
“그래서 내가 엄마와 부부처럼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새롭게 용기를 낸 건가요?”
“그건 아니야.”
“그럼……?”
“실장님은 힘겨워하셨어. 복잡한 회사일 보다 너를 더…… 그러면서 한때, 질투에 눈이 멀어 너와 나를 떼어놓을 것을 많이 후회했지. 정상적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것을 놓쳐버렸다면서.”
“……”
“하지만, 난 알고 있었어 실장님의 마음 속에는 이미 네가 남자로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그런 제안을 한 거야. 위태로워 보여서……”
“적선하는 마음으로?”
“글세. 인생전체를 적선하는 사람도 있을까?”
“어째든, 그런 생각은 이제 하지 마세요. 그리고 선배 인생을 찾아가요.”
“내 인생?”
“그래요 선배의 인생. 불행 속으로 뛰어들지 말고 행복을 찾아 가세요.”
“훗~”
“왜 웃어요?”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우스워서.”
“……”
“세상이 우스워. 행복과 불행을 개인의 영역으로 돌리면서도, 온갖 규칙으로 행복과 불행을 재판하는 것을 보면……”
“그래도,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사세요. 세상을 따르면 다치는 일은 없어요.”
“그럴 거야. 그 말을 하려고 너를 찾아온 거고.”
그렇게 선배는 덤덤하게 말을 했지만, 그 말은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순식간에 마음이 텅 비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느낌. 내가 엄마에게 청혼을 할 때마다 엄마는 선배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의 말대로 하자고 했다. 내 거부가 너무 완강하여 때론 내가 선배를 미워하는 게 아닐까 스스로 착각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선배가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랬는데, 지금 와서 이런 느낌이란 건.
그날, 혜정선배와 난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선배와 난 말없이 벤치를 지키기만 했다. 서로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말이다. 선배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는 것뿐이었다. 영화필름처럼 지나가는 선배와의 추억이 진짜 추억이 되는 구나 하는 감상과 함께.
그 날 이후, 난 더 이상 아버지와 엄마의 이해되지 않는 표정에 집착하지 않았다.
난 통보하듯이 엄마에게 결혼식 날짜를 말했고, 아버지의 도움을 얻어 결혼식 준비를 했다. 하지만, 굳이 준비랄 것도 없었다. 하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중의 결혼식장을 빌려서 할 수 있는 결혼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저, 눈에 띄지 않는 장소와 예복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장소를 선택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문제였다. 아버지는 식당을 하루 빌려서 사용하자고 했지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결혼식이라 해도 식당에서 하기는 싫었다.
“식당은 안 되겠어요. 아무리 꾸민다고 해도 약혼식 분위기 밖에 안 날 것 같아요.”
“그럼 마음에 둔 곳이라도 있니?”
“제 생각에는 성당이 어떨까 해요.”
“성당?”
“예. 지방의 작은 성당이라도……”
“흠……”
“혹시 아는데 있나요?”
“아는데야 있지만, 우리를 알아보는 곳으로 갈 수는 없잖아.”
“아…… 그렇죠.”
“그건 내가 한번 알아보마.”
“예. 고마워요.”
“그런데, 예복은 준비된 거냐?”
“빌려 입기로 했어요. 맞추려고 했더니, 엄마가 싫다고 해서……”
“그래……”
아버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제게 너무 시간을 뺏긴 거 아닌가요?”
내 말에 아버지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흠. 그래 그럼 이만 들어가봐야겠다.”
“죄송해요. 요즘 저 때문에 일도 제대로 못하시고.”
“아냐. 넌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그럼 이제 일어나요.”
“그러자.”
아버지는 대답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 역시 뒤 따라 일어섰다.
아버지와 헤어진 후, 난 보석가게로 향했다.
엄마는 내가 이전에 사준 반지를 결혼식에서 사용하려 하는 듯 했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땀 흘려 번 돈으로 샀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결혼반지로 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록, 통장에 있는 돈이 부모님에게 받은 돈일 지라도 난 가능하면 좋은 반지를 엄마의 손에 끼워주고 싶었다.
보석가게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혜정선배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엄마와 나의 결혼식까지만 지켜보겠다고 했었다. 물론, 난 싫었다. 내게 사랑이란 감정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여자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지만, 그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나 하나만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모두 버리려 했던 여자가 아닌가?
“언제 온 거에요?”
“나도 막 도착했어.”
“예.”
선배와 난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 받고서 바로 반지를 골랐다. 주인에게 내가 지불할 수 있는 돈의 상한선을 제시했더니, 주인은 알아서 물건들을 꺼내 놓으면서 우리에게 고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선택을 하라는 사람치고는 주인은 말이 너무 많았다. 우리가 시선을 주기 무섭게 장황한 설명을 늘어 놓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를 깬다는 말이 있는데, 주인 남자는 혼자서도 접시를 엄청나게 깨먹었을 것 같았다. 결국, 난 참지 못하고 주인에게 조용히 해 줄 것을 청하고서 반지 하나를 가리키며 혜정선배이 의향을 물었다.
“이거 어때?”
“괜찮은데.”
“이걸로 할까?”
“그 전에 것도 한번 볼래? 이 것도 괜찮은 것 같아.”
혜정선배가 반지 한 쌍을 가리켰다. 적당한 굵기와 두께에 보석은 안으로 박혀 있는 형태였다. 남자인 내 손에는 어울릴 것 같아 보였지만, 엄마의 손에서는 그렇게 예뻐 보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짐만, 난 그 반지로 결정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엄마를 닮고 싶어하는 선배가 아무래도 엄마의 취향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흠…… 괜찮네. 그걸로 할까?”
“네가 선택해.”
“좋아.”
난 흔쾌히 결정을 하고는 주인을 보며 말했다.
“이 것으로 해 주세요.”
“탁월한 선택입니다. 가격은 조금 더 비싸지만, 이게 가장 낳죠.”
“50만원 더 비싸다고 했던가요?”
“예. 470만원입니다.”
“지금 다 드려야 하는가요?”
“아뇨. 오늘은 일단 계약금 10%만 주시고, 3일 후에 잔금 가져오시면 됩니다.”
그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주인에게 주었고, 주인에게서 계약서를 받아 들고서 선배와 함께 점포를 빠져 나왔다. 그렇게 큰 계약을 한 것은 태어나 처음 이었다.
“차라도 한잔 하고 갈래요?”
난 예의상 선배에게 차를 권했다.
“그냥 가려고 했니?”
“풋~ 그래 가요. 대신 전통 찻집으로.”
“아는데 있어?”
“여기에 오다가 보아 둔데 있어요.”
난 선배를 이끌고 조금 떨어진 곳의 전통 찻집으로 향했다.
처음 와본 전통 찻집은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오래 전 농촌에서 쓰던 것 같은 물건들이 잔뜩 장식되어 있었고, 칸칸이 구분해 놓은 좌석들은 어쩐지 술집 분위기마저 풍겼다. 간판이나 메뉴가 아니었더라면, 술집으로 오인하기 딱 좋았다. 그래서 일까? 손님은 하나도 없었고, 주인여자는 느긋하게 음악을 듣고 있었다. 느낌에 돈 벌기 위해 장사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주인 여자가 주문을 받아가자 선배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술집을 찻집으로 바꾼 것 같네.”
“선배가 보기에도 그래요?”
“응. 아무래도 여기 장사되긴 힘들 것 같다.”
“그러게요. 분위기가 이래서야 어디.”
“그러게 말이야. 한번 오면 두 번 다시 안 올 것 같다.”
“뭐. 주인도 장사에 별로 관심도 없는 것 같으니까 상관없겠죠.”
“훗~ 그러게……”
“그건 그렇고. 요즘 엄마는 회사에서 어때요?”
“어떻긴. 바보 같지.”
“바보?”
내 반응에 선배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요즘 나 스파이 같은 느낌인 거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이죠?”
“실장님도 네 반응을 물어보고, 너도 실장장님 반응을 물어보고……”
“그럼?”
“그래. 네 말대로라면, 아마 너에게만 조금 냉랭하게 대하는 걸 거야.”
“흠……”
“그런데, 장소는 잡았니?”
“아직. 하지만 곧 잡힐 거에요.”
“어디로 할 건데?”
“지금 성당 쪽으로 알아 보고 있어요.”
“성당?”
“예. 그 쪽이 가장 무난할 것 같아요.”
내 말에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다.”
“생각 같아서는 근사한 결혼식을 올리고 싶지만, 아무래도 여건이……”
“그래. 그런데, 성당이라면 내가 아는 곳이 있는데……”
“선배가?”
“응. 지방인데, 신부님 한 분과 수녀 한 분이 계시는 작은 곳이야. 두 분다 아주 좋으신 분들이고.”
“소개시켜 줄 수 있나요?”
“그래. 내가 부탁하면 들어 줄 거야.”
“그럼 한번 연락해 보세요. 다음 주에 주례를 서 주실 수 있는지.”
“알았어.”
선배는 쉽게 대답해 주었다.
그런 식으로 결혼준비는 쉽게 착착 진행 되었다.
오랜 시간 엄마가 결혼하는 것을 거부한 것에 비하면, 너무 쉽게 모든 것이 풀렸다. 이상할 정도로 쉽게 말이다. 그기에 아버지는 뜻하지 않게 신혼여행 티켓을 나에게 주었으니, 이젠 하객만 없다 뿐이지 엄마와 나의 결혼식은 거의 완전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준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결혼식 전 날.
지수를 일찍 재우고, 엄마와 난 장난처럼 결혼식 예행연습을 했다. 하객들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입장을 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했기 때문에 거실 끝에서부터 끝까지 조용히 걷는 연습도 하고, 반지를 서로의 손에 끼워주는 연습도 했다.
“키스도 하는 게 낳지 않을까?”
영화에서 본 장면이 떠오른 난 장난처럼 엄마에게 말했다.
“그래.”
의외로 엄마는 쉽게 승낙했다.
“정말?”
“그래.”
“풋~~~”
“왜 웃어?”
“너무 쉽게 승낙하니까 믿기지 않아서……”
그 말에 엄마는 해석하기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그냥.”
“그런데, 아버지가 엄마와 내가 키스하는 모습까지 찍어 줄지 의문이네.”
“찍어 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그냥…… 느낌으로.”
“풋~~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까 우습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 당신이란 말 쓸거니?”
“앞으로도 계속.”
“결혼해도 달라질 건 없다고 말했잖아. 쓰지마.”
“걱정하지마. 실수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하지마.”
엄마는 정색을 하며 거부했다. 생각 같아서는 내 의견을 관철시키고 싶었지만, 결혼식을 앞두고 엄마와 다투어서 좋을 건 없었다. 물론, 엄마 말이 옳다는 것은 나도 안다. 습관이란 무서운 거여서 실수할 가능성이 높았고, 더욱이 지수가 나에게 ‘아빠’라는 말을 장난처럼 할 때면 나 역시 기겁을 하며 주변을 살피지 않았던가.
“와인 할래?”
뜬금없이 엄마가 그렇게 말했다.
“와인? 집에 있어?”
“응. 방에서 기다려 가져올 테니까.”
“그래.”
내가 대답을 하자마자 엄마는 주방으로 향했고, 난 그런 엄마를 보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라일락 향이 내 코끝을 자극했다. 문득, 선배 생각이 났다. 선배는 엄마의 무엇을 닮고 싶어하는 걸까? 엉뚱하게도 난 선배 생각을 하면서 엄마를 기다렸고, 잠시 후 엄마는 와인을 가지고 왔다.
“잔으로 가져 온 거야?”
“밤이잖아. 내일 결혼식도 있고……”
“그래도 잔술 마시면 감질 나는데.”
“와인은 음미하는 거야. 마시는 게 아니라.”
“그래. 자 그럼 음미 해볼까?”
난 엄마에게 잔을 내 밀었고, 엄마는 그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혔다.
-챙-
잔은 맑은 소리를 내면서 울렸다.
생각해보니, 지난 해 엄마와 맥주를 마신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때, 정신 없이 연애를 즐길 때에도 술은 마시지 않았었다.
“기분 묘하네.”
“뭐가?”
“그냥……”
“정말 너 나를 사랑하니?”
“응.”
“엄마가 아닌 여자로서 말이야.”
“그럼.”
그 말에 엄마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진실성을 찾으려는 듯.
“무슨 일이 있어도 변치 않을 거지?”
“불안해?”
“조금은……우리 혹시 벌 받지 않을까?”
“……”
난 대답대신 엄마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벌을 받으면 어떠랴. 극심한 불안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미 벌을 받고 있는 것인데. 어쩌면 세상이 우리의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 용서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는 것이 차라리 더 행복한 것일지도……
엄마와 나에게 주어진 형벌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겠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엄마와 내가 불안 속에서 쌓아 올린 탑이 높아 질수록 그 탑이 무너질까 더욱 불안해 할 테니까. 엄마와 나의 결혼식. 그건 분명 축복이기 보다는 불행이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탄일 것이다. 하지만, 난 두렵지 않다. 세상에 의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해도 끝내 나를 버리지 못한 엄마의 사랑을 얻은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네 엄마가 하겠다고 하면, 나도 찬성이다.”
그렇게 말하던 아버지는 창 밖으로 공허한 시선을 던졌었다. 모든 것이 덧없는 것인 양, 지금 세상이 무너진다고 해도 아쉬울 것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망설임 없이 수락했지만, 창 밖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표정은 내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언뜻 무관심한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내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엄마가 내 ‘첫 번째 아내’란 말은 아버지가 먼저 했었는데, 왜 결혼이란 말에 그런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 동사무소에 신고할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난 아버지와 엄마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부부나 다름없이 생활을 하고 있는데, 무엇을 겁내 하는 것일까? 결혼식이라고 해봐야 소꿉장난 하듯 언약하는 것이 전부일 텐데……
“안 갈거니?”
수정이 누나의 낮은 목소리가 강의실을 울렸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강의실엔 아무도 없었다.
“오래 전에 다 나갔어.”
그 말에 수정이 누나를 돌아보았다.
“강의 시간 내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그런 말을 하며 난 책을 챙기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걸상이 끽끽 소리를 내며 강의실의 정적을 깼고, 뚜벅거리는 발걸음 소리는 강의실에 이어 복도에서도 이어졌다. 석양으로 붉게 물든 교정엔 학생들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쓸쓸함이 감돌았다.
“가을도 이제 제법 물들었네……”
수정이 누나는 낙엽 하나를 발로 툭 찼다.
“그래……”
“너 가을 타지?”
“그래 보여?”
“그래 보여!”
“그럴지도.”
“그래도 주변을 좀 보면서 가을 타라.”
왠지 수정이 누나는 투정하는 것 같았다.
“내가 조용하니까 심심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나야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인 걸.”
“행운?”
“그래. 너와 친하게 지내면서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면서도 내게 아이들이 많이 따르니까.”
무슨 말인지 몰라서 난 누나를 슬쩍 돌아 보았다.
“몰랐니?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내 주변에 아이들이 많이 생겼다는 거.”
“그랬나?”
“무관심하긴……”
“미안해. 내가 요즘 좀 그래.”
“무슨 일이야?”
“그냥…… 가을 타는 거야.”
그러고는 난 걸음을 멈추어 석양을 받아 더욱 붉게 물든 단풍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단풍나무를 볼 때면, 난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것을 보며 휴식을 가지란 뜻으로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나무라고 말이다.
“왜 이 나무만 보면 마음이 편안할까?”
“예쁘잖아. 작은 호수와도 잘 어울리고……”
“작은 호수?”
“왜?”
“호수라고 말한 건 누나가 처음이라서. 다들 못이라고 하는데.”
“그게 더 예쁘잖아.”
“그렇긴 하네.”
“응.”
“아마 단풍나무는 신이 선물한 걸 거야.”
“왜?”
“사람이 인위적으로 가꿀수록 더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니까.”
“무슨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정원수로 가장 좋은 나무 같아서.”
“풋~ 그거야 학교에서 그럴 듯하게 꾸며놓아서가 아닐까? 호수 옆에 있는 나무는 다 예뻐.”
“맞아. 그런데, 단풍나무는 항상 못을 끼고 있어야 해. 습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라서……”
“그런가?”
“응”
“난 저 나무만 보면 보육원 시절이 생각나.”
“추억이 있는 거야?”
“추억? 그렇지. 이젠 추억이지. 우리에게 저 나무는 약이었어.”
“약?”
“응. 만병통치약. 원장님은 관절염 때문에 저 나무를 다려 먹었고, 우리들은 다쳤을 때나 가벼운 배앓이를 할 때면 저 나무의 도움을 받았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엔 약국에서 약을 지어 먹기에는 우린 너무 가난했었거든.”
“그랬구나. 예쁘기만 한 나무인줄 알았더니……”
“이제 그만 가자.”
“응”
우린 다시 걸음을 떼었다.
남자의 계절 가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가을이면, 난 휑한 마음을 느낀다. 이유도 없이 휑한 그 느낌은 석양을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무언가 행복하면서도 한 없이 쓸쓸하고, 또한 아쉬운 그런…….
“나 요즘 질투하는 거 아니?”
문득 생각이 난 듯 수정이 누나가 그렇게 말했다.
“질투?”
“가을에 너를 빼앗긴 것 같아서……”
“풋~”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마. 너를 구속하는 그런 마음에서 하는 말이 아니니까.”
“알아.”
“쳇~ 몰라도 되는데……”
“무슨 말이야?”
“글세 무슨 말일까?”
“선문답 해?”
그때, 수정이 누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왜?”
내가 돌아보자 수정이 누나는 눈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시선을 돌리니 혜정선배가 교정의 또 다른 단풍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
“언니가 너를 만나고 싶다고 했어.”
그 말에 난 직감적으로 혜정선배가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
“언니의 부탁이었어. 네가 알면 자신을 만나주지 않을 거라면서……”
“……”
“가봐. 난 도서관으로 갈 테니까.”
수정이 누나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걸음을 떼어 곧장 앞으로 향했다. 그런 수정이 누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혜정선배를 보았다. 선배는 그림처럼 서 있었다. 때마침 불어온 가벼운 바람이 선배의 머리 결을 흩날려 선배의 모습이 만화 속 여주인공만큼이나 환상적으로 보였다. 그런 아름다움에 도취된 듯 난 선배를 향해 걸음을 떼었다. 한걸음, 한걸음 조금씩 선배에게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내 심장도 고동쳤다.
9개월만의 재회였다.
“잘 지냈니?”
혜정선배 앞에 섰을 때 선배가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예. 선배는요?”
“나도.”
“더 예뻐졌네요.”
“그래 보이니?”
“예.”
“고마워. 우리 앉자.”
혜정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벤치에 앉았다. 그런 선배 곁에 나도 자리를 잡았는데, 엄마와 같은 라일락 향이 선배에게서 묻어났다. 내가 기억하는 선배의 향기는 라벤더였는데……
“향수 바꾸었나 보군요.”
“누군가를 닮고 싶어서.”
“선배답지 않은 말이네요.”
“나다운 게 뭔데?”
선배는 토를 달 듯 반문했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요.”
내 말에 선배는 빙긋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9개월이 짧지 않더라. 세월이 참 더디게도 흘러간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나 할까.”
“동감이에요. 겨우 아홉 달이 지났을 뿐인데, 오래된 옛일 같으니……”
“무슨 말이야?”
“그냥…… 말 그대로 에요.”
“서운하네. 나를 벌써 잊었다는 말 같아서.”
“오히려 제가 아직도 기억하는 게 불쾌하지는 않나요?”
“그랬다면, 실장님에게 그런 제안도 하지 않았겠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너를 좋아하니까.”
“쉽게 말하네요.”
“어려울 것도 없잖아.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당연한 거 아니니?”
“그럼 처음부터 잡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그랬다면?”
“아니에요.”
“훗~ 한때 그런 생각을 했었어. 왜 너를 한 번도 잡지 않았을까 하고……”
그렇게 말하는 선배의 눈이 깊어졌다. 옛일을 떠올리는 듯. 그리고 선배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는 겁이 났어. 다시는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네가 내 마음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았지. 그래도, 난 그 것을 인정하지 않았어.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게 더 옳을 거야. 나보다 6살이나 어린 네 앞길을 막고 싶지 않았다고나 할까.”
“단지 나이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응……”
“그래서 내가 엄마와 부부처럼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새롭게 용기를 낸 건가요?”
“그건 아니야.”
“그럼……?”
“실장님은 힘겨워하셨어. 복잡한 회사일 보다 너를 더…… 그러면서 한때, 질투에 눈이 멀어 너와 나를 떼어놓을 것을 많이 후회했지. 정상적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것을 놓쳐버렸다면서.”
“……”
“하지만, 난 알고 있었어 실장님의 마음 속에는 이미 네가 남자로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그런 제안을 한 거야. 위태로워 보여서……”
“적선하는 마음으로?”
“글세. 인생전체를 적선하는 사람도 있을까?”
“어째든, 그런 생각은 이제 하지 마세요. 그리고 선배 인생을 찾아가요.”
“내 인생?”
“그래요 선배의 인생. 불행 속으로 뛰어들지 말고 행복을 찾아 가세요.”
“훗~”
“왜 웃어요?”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우스워서.”
“……”
“세상이 우스워. 행복과 불행을 개인의 영역으로 돌리면서도, 온갖 규칙으로 행복과 불행을 재판하는 것을 보면……”
“그래도,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사세요. 세상을 따르면 다치는 일은 없어요.”
“그럴 거야. 그 말을 하려고 너를 찾아온 거고.”
그렇게 선배는 덤덤하게 말을 했지만, 그 말은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순식간에 마음이 텅 비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느낌. 내가 엄마에게 청혼을 할 때마다 엄마는 선배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의 말대로 하자고 했다. 내 거부가 너무 완강하여 때론 내가 선배를 미워하는 게 아닐까 스스로 착각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선배가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랬는데, 지금 와서 이런 느낌이란 건.
그날, 혜정선배와 난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선배와 난 말없이 벤치를 지키기만 했다. 서로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말이다. 선배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는 것뿐이었다. 영화필름처럼 지나가는 선배와의 추억이 진짜 추억이 되는 구나 하는 감상과 함께.
그 날 이후, 난 더 이상 아버지와 엄마의 이해되지 않는 표정에 집착하지 않았다.
난 통보하듯이 엄마에게 결혼식 날짜를 말했고, 아버지의 도움을 얻어 결혼식 준비를 했다. 하지만, 굳이 준비랄 것도 없었다. 하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중의 결혼식장을 빌려서 할 수 있는 결혼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저, 눈에 띄지 않는 장소와 예복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장소를 선택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문제였다. 아버지는 식당을 하루 빌려서 사용하자고 했지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결혼식이라 해도 식당에서 하기는 싫었다.
“식당은 안 되겠어요. 아무리 꾸민다고 해도 약혼식 분위기 밖에 안 날 것 같아요.”
“그럼 마음에 둔 곳이라도 있니?”
“제 생각에는 성당이 어떨까 해요.”
“성당?”
“예. 지방의 작은 성당이라도……”
“흠……”
“혹시 아는데 있나요?”
“아는데야 있지만, 우리를 알아보는 곳으로 갈 수는 없잖아.”
“아…… 그렇죠.”
“그건 내가 한번 알아보마.”
“예. 고마워요.”
“그런데, 예복은 준비된 거냐?”
“빌려 입기로 했어요. 맞추려고 했더니, 엄마가 싫다고 해서……”
“그래……”
아버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제게 너무 시간을 뺏긴 거 아닌가요?”
내 말에 아버지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흠. 그래 그럼 이만 들어가봐야겠다.”
“죄송해요. 요즘 저 때문에 일도 제대로 못하시고.”
“아냐. 넌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그럼 이제 일어나요.”
“그러자.”
아버지는 대답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 역시 뒤 따라 일어섰다.
아버지와 헤어진 후, 난 보석가게로 향했다.
엄마는 내가 이전에 사준 반지를 결혼식에서 사용하려 하는 듯 했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땀 흘려 번 돈으로 샀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결혼반지로 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록, 통장에 있는 돈이 부모님에게 받은 돈일 지라도 난 가능하면 좋은 반지를 엄마의 손에 끼워주고 싶었다.
보석가게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혜정선배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엄마와 나의 결혼식까지만 지켜보겠다고 했었다. 물론, 난 싫었다. 내게 사랑이란 감정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여자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지만, 그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나 하나만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모두 버리려 했던 여자가 아닌가?
“언제 온 거에요?”
“나도 막 도착했어.”
“예.”
선배와 난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 받고서 바로 반지를 골랐다. 주인에게 내가 지불할 수 있는 돈의 상한선을 제시했더니, 주인은 알아서 물건들을 꺼내 놓으면서 우리에게 고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선택을 하라는 사람치고는 주인은 말이 너무 많았다. 우리가 시선을 주기 무섭게 장황한 설명을 늘어 놓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를 깬다는 말이 있는데, 주인 남자는 혼자서도 접시를 엄청나게 깨먹었을 것 같았다. 결국, 난 참지 못하고 주인에게 조용히 해 줄 것을 청하고서 반지 하나를 가리키며 혜정선배이 의향을 물었다.
“이거 어때?”
“괜찮은데.”
“이걸로 할까?”
“그 전에 것도 한번 볼래? 이 것도 괜찮은 것 같아.”
혜정선배가 반지 한 쌍을 가리켰다. 적당한 굵기와 두께에 보석은 안으로 박혀 있는 형태였다. 남자인 내 손에는 어울릴 것 같아 보였지만, 엄마의 손에서는 그렇게 예뻐 보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짐만, 난 그 반지로 결정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엄마를 닮고 싶어하는 선배가 아무래도 엄마의 취향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흠…… 괜찮네. 그걸로 할까?”
“네가 선택해.”
“좋아.”
난 흔쾌히 결정을 하고는 주인을 보며 말했다.
“이 것으로 해 주세요.”
“탁월한 선택입니다. 가격은 조금 더 비싸지만, 이게 가장 낳죠.”
“50만원 더 비싸다고 했던가요?”
“예. 470만원입니다.”
“지금 다 드려야 하는가요?”
“아뇨. 오늘은 일단 계약금 10%만 주시고, 3일 후에 잔금 가져오시면 됩니다.”
그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주인에게 주었고, 주인에게서 계약서를 받아 들고서 선배와 함께 점포를 빠져 나왔다. 그렇게 큰 계약을 한 것은 태어나 처음 이었다.
“차라도 한잔 하고 갈래요?”
난 예의상 선배에게 차를 권했다.
“그냥 가려고 했니?”
“풋~ 그래 가요. 대신 전통 찻집으로.”
“아는데 있어?”
“여기에 오다가 보아 둔데 있어요.”
난 선배를 이끌고 조금 떨어진 곳의 전통 찻집으로 향했다.
처음 와본 전통 찻집은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오래 전 농촌에서 쓰던 것 같은 물건들이 잔뜩 장식되어 있었고, 칸칸이 구분해 놓은 좌석들은 어쩐지 술집 분위기마저 풍겼다. 간판이나 메뉴가 아니었더라면, 술집으로 오인하기 딱 좋았다. 그래서 일까? 손님은 하나도 없었고, 주인여자는 느긋하게 음악을 듣고 있었다. 느낌에 돈 벌기 위해 장사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주인 여자가 주문을 받아가자 선배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술집을 찻집으로 바꾼 것 같네.”
“선배가 보기에도 그래요?”
“응. 아무래도 여기 장사되긴 힘들 것 같다.”
“그러게요. 분위기가 이래서야 어디.”
“그러게 말이야. 한번 오면 두 번 다시 안 올 것 같다.”
“뭐. 주인도 장사에 별로 관심도 없는 것 같으니까 상관없겠죠.”
“훗~ 그러게……”
“그건 그렇고. 요즘 엄마는 회사에서 어때요?”
“어떻긴. 바보 같지.”
“바보?”
내 반응에 선배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요즘 나 스파이 같은 느낌인 거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이죠?”
“실장님도 네 반응을 물어보고, 너도 실장장님 반응을 물어보고……”
“그럼?”
“그래. 네 말대로라면, 아마 너에게만 조금 냉랭하게 대하는 걸 거야.”
“흠……”
“그런데, 장소는 잡았니?”
“아직. 하지만 곧 잡힐 거에요.”
“어디로 할 건데?”
“지금 성당 쪽으로 알아 보고 있어요.”
“성당?”
“예. 그 쪽이 가장 무난할 것 같아요.”
내 말에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다.”
“생각 같아서는 근사한 결혼식을 올리고 싶지만, 아무래도 여건이……”
“그래. 그런데, 성당이라면 내가 아는 곳이 있는데……”
“선배가?”
“응. 지방인데, 신부님 한 분과 수녀 한 분이 계시는 작은 곳이야. 두 분다 아주 좋으신 분들이고.”
“소개시켜 줄 수 있나요?”
“그래. 내가 부탁하면 들어 줄 거야.”
“그럼 한번 연락해 보세요. 다음 주에 주례를 서 주실 수 있는지.”
“알았어.”
선배는 쉽게 대답해 주었다.
그런 식으로 결혼준비는 쉽게 착착 진행 되었다.
오랜 시간 엄마가 결혼하는 것을 거부한 것에 비하면, 너무 쉽게 모든 것이 풀렸다. 이상할 정도로 쉽게 말이다. 그기에 아버지는 뜻하지 않게 신혼여행 티켓을 나에게 주었으니, 이젠 하객만 없다 뿐이지 엄마와 나의 결혼식은 거의 완전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준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결혼식 전 날.
지수를 일찍 재우고, 엄마와 난 장난처럼 결혼식 예행연습을 했다. 하객들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입장을 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했기 때문에 거실 끝에서부터 끝까지 조용히 걷는 연습도 하고, 반지를 서로의 손에 끼워주는 연습도 했다.
“키스도 하는 게 낳지 않을까?”
영화에서 본 장면이 떠오른 난 장난처럼 엄마에게 말했다.
“그래.”
의외로 엄마는 쉽게 승낙했다.
“정말?”
“그래.”
“풋~~~”
“왜 웃어?”
“너무 쉽게 승낙하니까 믿기지 않아서……”
그 말에 엄마는 해석하기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그냥.”
“그런데, 아버지가 엄마와 내가 키스하는 모습까지 찍어 줄지 의문이네.”
“찍어 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그냥…… 느낌으로.”
“풋~~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까 우습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 당신이란 말 쓸거니?”
“앞으로도 계속.”
“결혼해도 달라질 건 없다고 말했잖아. 쓰지마.”
“걱정하지마. 실수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하지마.”
엄마는 정색을 하며 거부했다. 생각 같아서는 내 의견을 관철시키고 싶었지만, 결혼식을 앞두고 엄마와 다투어서 좋을 건 없었다. 물론, 엄마 말이 옳다는 것은 나도 안다. 습관이란 무서운 거여서 실수할 가능성이 높았고, 더욱이 지수가 나에게 ‘아빠’라는 말을 장난처럼 할 때면 나 역시 기겁을 하며 주변을 살피지 않았던가.
“와인 할래?”
뜬금없이 엄마가 그렇게 말했다.
“와인? 집에 있어?”
“응. 방에서 기다려 가져올 테니까.”
“그래.”
내가 대답을 하자마자 엄마는 주방으로 향했고, 난 그런 엄마를 보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라일락 향이 내 코끝을 자극했다. 문득, 선배 생각이 났다. 선배는 엄마의 무엇을 닮고 싶어하는 걸까? 엉뚱하게도 난 선배 생각을 하면서 엄마를 기다렸고, 잠시 후 엄마는 와인을 가지고 왔다.
“잔으로 가져 온 거야?”
“밤이잖아. 내일 결혼식도 있고……”
“그래도 잔술 마시면 감질 나는데.”
“와인은 음미하는 거야. 마시는 게 아니라.”
“그래. 자 그럼 음미 해볼까?”
난 엄마에게 잔을 내 밀었고, 엄마는 그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혔다.
-챙-
잔은 맑은 소리를 내면서 울렸다.
생각해보니, 지난 해 엄마와 맥주를 마신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때, 정신 없이 연애를 즐길 때에도 술은 마시지 않았었다.
“기분 묘하네.”
“뭐가?”
“그냥……”
“정말 너 나를 사랑하니?”
“응.”
“엄마가 아닌 여자로서 말이야.”
“그럼.”
그 말에 엄마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진실성을 찾으려는 듯.
“무슨 일이 있어도 변치 않을 거지?”
“불안해?”
“조금은……우리 혹시 벌 받지 않을까?”
“……”
난 대답대신 엄마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벌을 받으면 어떠랴. 극심한 불안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미 벌을 받고 있는 것인데. 어쩌면 세상이 우리의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 용서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는 것이 차라리 더 행복한 것일지도……
엄마와 나에게 주어진 형벌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겠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엄마와 내가 불안 속에서 쌓아 올린 탑이 높아 질수록 그 탑이 무너질까 더욱 불안해 할 테니까. 엄마와 나의 결혼식. 그건 분명 축복이기 보다는 불행이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탄일 것이다. 하지만, 난 두렵지 않다. 세상에 의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해도 끝내 나를 버리지 못한 엄마의 사랑을 얻은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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