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아이 - 01
-가끔 그렇게 생각한다.
차라리.
만나지 말았더라면.
하고.
내 고향은 부산이다. 서울만큼 온갖 사람들이 다 모이는 동네도 아니고, 영남쪽이 타지방에 비해서 보수적인 것은 있지만, 그런대로 부산에는 일반인과 다른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항구도시라서 일까.
항구는 선원들이 온다. 외국에서 온갖 경험을 다 하고. 배 안에서 성직자도 아니면서 금욕생활이나 다름없이 굶주려 있다가 육지에 내리게 된다.
그래서 그런사람들이 찾는 첫번째는 여자다. 술. 환락. 오랫동안 맡지 못했던 사람의 살냄새에 굶주린 선원들. 그들이 고객이기에 대개의 항구도시는 성적으로 개방된 분위기다. 외국에서도 보면 대개 유명한 사창가는 항구를 낀 도시 주변이라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애는 낄낄 웃었다. 서울의 이태원이나 이런 곳으로 가지 그러냐고 내가 말했을때 그애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아마 부산은 괜찮을거라고. 항구도시니까 괜찮을거라고.
지금와서 생각해 보지만. 아마도 그애는 부산을 좋아했던것 같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시작은 남포동. 그리고 용두산 공원이다.
왜 용두산 공원에 가자고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나도. 내 친구 녀석들도 처음에는 진지한 이야기로 시작을 했던것 같다. 그런데 대개의 불알 친구들이란게 -특히 사내자식들이란게- 그렇다.
둘이서 만날때는 진지한데, 셋이 모이면 웃기는 이야기를 하고. 넷이서 모이면 황당한 짓을 저지른다. 다른 사람들의 친구도 다 그런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랬다.
하나하나가 일일이 따져보면 착실하고 차분한 녀석들인데, 넷이 다같이 모이게 되면 웃기다 못해 황당한 일까지 가버린다.
용두산 공원에 왜 갔는지. 희미하게 기억나는건 서로간에 뭔가를 주장하다가 그래! 비둘기보러 가자! 라는 말이 나왔던 것 정도다.
용두산공원에는 비둘기가 많다.
비둘기 모이로 싸둔 종이봉투를 받아들고 옥수수 낱알들을 그냥 한주먹씩 뿌리면, 새똥찍찍 갈기며 동상위에 올라가 있던 비둘기들이 우루루루 모여든다. 비둘기를 부려보겠다고 이리저리 옥수수 던져보는 친구. 그냥 사진기 들고와서 찍는 친구. 그옆에서 구경만 하는 친구. 그리고 나는 어디 모여드나 보자 라고 손에 한주먹을 쥐고 휘휘 저어보였다.
후두두두두둑!
[으악!]
비둘기들이 갑자기 몰려들었다. 손에 쥔 모이에 눈이 뒤집혔는지 이것들이 수십마리가 달려들었다. 새 달려드는거에 비명까지 지르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수십마리면 생각보다 무섭다. 그리고 한놈이 날개로 내 안경을 쳐 버리는 바람에 작달막한 정원수들 뒤로 그게 굴러가 버렸다.
[아 젠장!]
투덜투덜하면서 안경을 찾았던게 기억난다.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있을때 왠 여자애가 왔다.
[이거?]
[어?]
그애가 건네준것은 내 안경. 약간 기스는 가 있었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참고로, 나는 심한 근시라서 안경이 없으면 앞이 잘 안보일 정도다.
[어. 고맙습니다.]
안경을 끼고 보니 무척 단정하게 생긴 애였다.
대충 고등학생? 아직 좀 어려 보이는 티가 났다. 화장을 했지만 오히려 엷어서, 성숙해 보인다기 보다는 오히려 얌전해 보였다.
회색 체크 치마에 위에는 하얀 스웨터를 입었고 약간 부석부석해 보이는 단발머리였다. 얼굴이 조금 통통했지만 그래도 보통보다는 이뻐보였다.
[아- 이놈의 비둘기들이 달려들어가지고]
나는 짐짓 비둘기를 탓하며 말을 질질 끌었다. 사실말이다. 예쁜 여자애가 말을 걸어오면 누구나 한마디라도 더 붙여 보고 싶은게 당연한 거 아닌가. 혹시 이게 무슨 인연이 되는게 아닌가 싶어서.
[에... 어디서 주웠어요?]
[저기]
손으로 내가 찾던 정 반대방향을 가리킨다.
[....굴러가도 그리 굴러갔냐. 아 민망하네.]
혼잣말로 그러고 머리를 벅벅 긁고 나는 그애를 힐끔힐끔 봤다.
"말수가 적네."
대충 이런 모습을 보이면 빙그레 웃어주는 게 상례(?)인데 웃지 않는다. 오히려 무표정.
말을 붙여보고는 싶었지만 쉽지 않다.
그냥 고개를 까딱하든지 아니면 짧게 한두마디로 끝내든지 하는 걸 보니 어째 잘 엮일 것 같지가 않았다.
흠. 어쩐다. 안경 주워주셔서 감사한데 콜라라도 하나 사드릴께요. 라고 해볼까. 이상한놈이라고 쳐다보면 어쩌지. 그래도 해보는게 나을까.
그렇게 혼자서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
[민지야. 약사왔다. 어?]
와작와작.
조경수들을 헤치고 여자애 두엇이 다가왔다. 그중 하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재빨리 내 앞을 막아 섰다.
[저. 누구세요? 민지 아는 사람이에요?]
[아. 그게...]
난처하군. 너무 경계하니까 뭐 나쁜 짓 하려다 걸린 거 같잖아?
나는 애매하게 대답하며 슬몃 눈을 위아래로 깔았다. 아마도 이 아이의 친구인가 보다. 그런데...
"좀... 노는 애네?"
차림새가 다르다. 화장은 진하게 하고 별모양 귀걸이에다 청치마-미니-에 짝 달라붙는 검정티-나시-다. 나이도 분위기도, 말 하는 걸로는 동갑같은데 화장때문에 뒤에 나타난 애가 몇살 더 먹어 보인다.
[좀전에 안경 떨궜는데 그거 주워줬어요. 그래서 고맙다고...]
[그래요?]
찌릿하게 노려보는 여자애. 반면. 그 여자애를 탁탁 치며 다른 애가 붙잡았다.
[아. 가시나. 유난좀 그만 떨어라. 누가 민지 잡아 먹나.]
[희연이...]
[야. 민지야. 약이나 먹자. 가시나. 이 계절에 감기가 걸려가지고. 이기 머고?]
그러면서 콜라캔을 턱 하니 건네줬다. 민지라고 불린. 내 안경을 주워준 애는 약을 받아서 캔을 땄다.
[어. 저기...]
가만히 보고 있을수가 없어서 말했다.
[약을 콜라랑 먹게요?]
[예? 예. 물도 없고 얘는 쓴약 잘 못먹어요]
[어... 그래도 콜라랑 먹으면 약이 녹아서 더 쓸건데. 약에 공기달라붙어서 삼키다가 목에 걸릴거고]
[어. 맞다. 아. 어짜지?]
[다시 사와야지]
[아. 씨. 또 한참 가야 되잖아. 매점 먼데.]
[아. 저...]
여자애들끼리 투덕대고 있을때. 나는 말했다.
[우리 음료수 있는데 그거 마실래요?]
갑자기 내 친구들이 얼 빠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평소에 얌전한 편이던 내가, 떡하니 여자애들을 셋이나 끌고 나타났으니까.
"야야. 민수야."
"이기이기이기. 우찌된 기고?"
당연한 의문이지만, 나는 들은체도 않았다. 냉큼 컵에 음료수를 따라서 희진이라는 애에게 건냈다.
[한번에 꿀꺽 들어요. 목에 걸리면 안되니까.]
희진이가 끄덕이고 민지가 약을 먹었다. 감기로 목이 부었던 걸까. 자꾸 뭐 걸린거 같다며 한잔 더. 한잔 더 마시던 민지는, 결국 우리 음료수 병을 다 비워 버리고 말았다.
[가시나. 콜라 먹었다가는 난리났겠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희진이라는 애는 투덜거리는게 버릇인가 보다. 반면 정이라는 애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한다. 처음에 나를 되게 경계했었는데, 그건 그냥 민지라는 애를 챙기는 거였나.
[아니 뭘요. 그쪽이 안경 안 주워줬으면 나는 오늘 하루종일 찾았을건데]
"야야. 어찌된거냐니까!"
"새꺄! 아니. 형님아! 이기 우예된기고! 엉?"
참고로 이건 내 친구들이 입 모양으로 뻐끔뻐끔대는 말이다. 나는 여자애들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내 친구들 쪽으로 천천히 왔다.
[네명. 네명이다!]
한 놈이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도 넷. 저쪽도 넷이다. 각각 남자 넷. 여자 넷.
[민수야. 다리좀 대 바라]
[알제? 오늘 기현이 있는거 알제?]
[가마있어바라. 머이리 급하노. 듣는다!]
한편. 우리는 입이 귀에 걸렸다. 복장부터 요란한 애들. 이런애들은 놀자고 하면 쉽게 응해준다. 문제는 탄알인데, 마침 월급 탄 친구가 있어서 그건 잘 될것도 같았다.
우리가 수근덕 거리고 있는동안 여자애들은 여자애들 대로 수근수근 거리고 있었다. 그쪽도 마침 네명인데 우리가 네명인걸 보고 어쩔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결정은 그쪽이 먼저 내렸다. 아까본 청치마가 물어왔다.
[저기. 오빠야들 네명이가?]
[아. 예]
[말 놔라. 우리 어리다]
[아. 응]
어리면 화장을 왜 하고 다니는데? 내가 선수를 뺏긴 기분에 투덜거릴때. 상대는 진짜 선기를 치고 들어왔다.
[같이 놀러 안갈래?]
여자애들 쪽에서 먼저 대쉬를 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