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아이 - 07
[...만나서. 뭘 어쩌라는 건데?]
대략 1분 정도.
아마도 좀 경직 되어 있었던 것도 같다.
겨우 머리를 진정시키고 말을 꺼내자 마자 나는 다시한번 망치로 골통을 후려갈기는 충격을 받았다.
[민지가 상사병 들게 한 책임 져 주세요. 오빠가.]
[뭐...? 무슨... 뭐 병?]
헐헐헐.
어이가 너무 없어져 버리면 실실 웃음이 나와 버린다.
이거 내가 미친거 아닐까. 아니. 이녀석도 미치고 세상이 다 미쳐버린거 아닐까.
뭐가 어떻게 어떻다고? 상사병이 뭐 어째? 내가 책임?
[부탁드려요. 제발...]
[지랄 쳐드시고 있네. 내가 왜 너거하고 엮여야 되는건데?]
헛웃음을 툴툴 내뱉으며 나는 독살스럽게 지껄였다.
[개새야. 너거들하고. 너하고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는거 자체가 짜증난다. 아나? 엉? 치아라. 더 이상 기도 안차는 이바구 듣고 싶지도 않다. 애초에 내가 왜 나왔는지 자체도 꽤 골때리는데. 그만 가라. 엉? 패버리기 전에]
그리고 거칠게 의자를 뒤로 밀어 젖히며 나는 일어섰다.
와락!
와락!
그런데 정이라는 그녀석도 홱 몸을 일으키며 나를 노려보았다. 얼씨구? 이게 아주 본격적으로 개기네?
[저를 어떻게 보시든 상관 없어요. 욕해도. 경멸해도 좋으니까 어쨌든 같이 가주세요]
그 순간. 녀석이 나즈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뭐가 아쉬워서?]
[아쉽게 되실거에요]
허. 이게 이제는 협박하러 들어오나? 체구도 자그마하고 비리비리한게 힘도 없게 생긴게 까불락 거리는 모습은 웃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번에 이녀석이 입으로 꺼내는 말은
[지금 이대로 나가시면, 전 제가 호모고, 오빠를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고백해 볼께요.]
[.....뭐?]
내 등골에 찬물을 끼얹는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주변에 사람 시선 다 몰리겠죠? 한동안 동네 방네 소문 다 날거고. 이 중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빠 아는 얼굴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스윽.
그렇게 말하고 녀석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는 그제서야 겨우 이를 갈았다.
[너 이 씹새.... 죽고싶나?]
뒤늦게 전기처럼. 짜릿한 분노가 몸에 퍼진다. 당장이라도 주먹으로 이 밉살맞은 조동아리를 후려 갈겨야 기분이 풀릴거 같다. 그런데.
[때려서 기분이 풀리신다면 그렇게 하세요.]
불쑥!
진짜 때리면 맞겠다는 식으로 녀석이 내 앞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 밀었다.
[무....저 저리 안가!!!]
이렇게 되면 오히려 내가 당황스럽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가 소란을 벌이는 바람에 주변에서 수군거리며 사람들이 보기 시작했다. 더러는 남녀간에 사랑싸움이라도 하는걸로 아는지 킥킥대는 소리까지 들린다. 미치겠네... 이거. 지금만 해도 충분히 쪽팔리는데...
[씨발... 맘대로 해라. 고함을 지르든지 노래를 부르든지. 개쪽 팔고 며칠 잠수 타면 그만이다. 그전에 너 이 씹새 아주 죽여놓는 수가 있다. 택도 아닌 협박할라하지 말고 꺼지라. 엉?]
나는 소리를 죽여 으르렁 거렸다. 그러자 정이는 아예 눈에 새파랗게 불을 켰다.
[그러시겠죠. 근데 저도 방법이 있어요. 오빠 학교에 대자보 써서 막 붙여 놓을수도 있어요. 호모들하고 여관에서 뒹굴었다고. 그냥 소리 지르는 거 보다 그건 훨씬 오래 갈텐데요? 그리고 우린 미성년자에요. 미성년자 성추행으로 그쪽이 잡혀 갈수도 있어요. 어차피 우리하고 용두산 공원아래서 만났을 때. 여관까지 꼬신 목적은 섹스 아니었어요? 아니면 손 휘둘르시든가요. 미성년자 폭행으로 유치장 가시게 될 거에요]
[뭐.... 뭐? 뭐?]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놈은 진짜 할 놈이란 걸.
필사적이다. 앞 뒤 안 가리고 물었다 하면 안 놓는 불독같은 아가리다. 저 서슬 퍼런 독기서린 눈. 맙소사. 덩치 때문에 완전히 방심했더니,
[너. 이....이....]
속에서 부글부글 열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젠 난 정말 손도 발도 못쓰게 되었다. 이 자식이 정말로 아까 말한 협박의 반절만 저지른다 하더라도 난 한동안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된다.
[일단 다시 앉으세요. 주변에서 쳐다봐요]
[......이 개자슥]
녀석도 나도 수군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일단 앉았다. 나는 열이 식지 않아 남은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후우... 후우... 하아...]
한동안 녀석도 나도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한참이나 발그레 한 얼굴로 식식거리고 있던 녀석은 -저도 꽤나 흥분했었는지- 손을 덜덜덜 떨면서 음료수를 주문했다.
[조...조금전에는 죄송해요... 정말 그러겠다는 건 아닌데...]
[하.]
[우선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그럼 좀 이해가 가실... 거... 에요.]
뭘 들어? 이야기를 들어?
근데 이야기 하겠다는 년. -인지 놈인지-이 왜 이렇게 바들바들 떠냐?
이....이... 아이고... 이런 놈이 날 협박한 거냐? 제가 협박해 놓고 제가 감당 안되서 덜덜 떠는 얼라한테 난 손도 못 쓰고 당하고 있는 거고?
[푸하하하하핫.... 큭큭큭....]
결국 터졌다. 웃음이 터졌다.
혹시 경험해 본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예상 외의 일들이 여러가지로 닥치게 되면 진짜 사람이 웃는다.
웃겨서 웃는게 아니라, 처음에는 기가 막혀서 웃고, 그다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웃고, 좀 더 지나면 그렇게 웃는 자기 모습이 웃겨서 웃고.... 나중에는 왜 웃는지도 모르고 그냥 웃는다.
말 그대로 머리속이 곤죽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 말해봐라.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애고. 좆만한 씹쌔끼.]
나도 모르게 그만 푹 풀어진 어투로 말이 나오고 말았다.
이젠 화도 나지 않는다. 이미 한번 웃음이 터지고 나면 열받은 기분을 도로 회복하기도 쉽지 않다. 나는 두손을 들어 항복하는 심정으로 의자에 뒤로 몸을 기댔다. 될대로 되라지. 어디 한번 어디까지 가나 봐 보자.
이미. 대화의 칼자루는 완전히 녀석이 가져갔다.
[민지가... 그날 오빠하고 있다가 들어오고 나서....]
내가 여전히 히죽히죽 웃거나 말거나. 다시 웃던 얼굴이 천천히 굳거나 말거나. 내 앞에 앉은 정이라는 녀석은 고개를 숙인채 띄엄 띄엄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애가 좀 이상하게 멍해지긴 했어요. 그래도 왜 그러는지 몰랐고... 그냥 몸도 아픈데다가 안 좋은 일을 겪었으려니 하고 생각해서 서로 묻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어쩐지 평소하고 다르게 그게 아주 오래 가고 있고... 희연이한테 전화기를 빌려가지고는 계속해서 들고 있으려고 하고... 그래서 무슨 일인가 있다고 생각해서 물었어요]
말 하기 시작하면서 녀석도 입이 마르는지 음료수를 조금 들었다.
[어쨌든. 오빠하고 아침 먹고 왔다는거... 그때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었어요.... 이틀이 지나고... 계속해서 멍한 얼굴로 앉아있다가. 혼자서 뭔가 중얼중얼 하다가. 다시 희연이 전화기 들여다보고... 아무래도 이상해서 민지가 이상해서 친구들이 물어봤어요. 그때 알았죠. 오빠가 민지를 여자로 보고 있고, 반드시 연락하겠다고 약속하고 갔다고]
[......]
[근데 바보 같은건 아는데... 어쩌면 .... 그래도 어쩌면 우리나 그애를 이해해 주는 그런 사람을 만난건지도 모른다고. 함부로 기대를 가져서는 안되는 것인줄 알면서도 기대를 했죠. 난... 어차피 괜히 기대가져 봐야 괜히 마음 고생한다고. 그냥 생각하지 말자고 했는데. 민지 바보는 말을 듣지도 않고....]
길게. 길게 녀석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생각처럼은 안될거야... 나도 큰 기대는 안해.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민지는 자꾸만 희연이 전화를 들여다 보았단다. 언뜻언뜻 그 얼굴에는 애타는 갈망과. 그리고 실망과. 체념. 그리고 때로는 밝은 웃음과 희망이 스치고 지나갔다고 했다.
그냥 그 정도만이라면 어떻게 다른 말이라도 해주련만, 전화를 기다리던 민지는 이제껏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될거라고 응원하지도 못하고. 안될거라고 기대를 꺾게 할수도 없었던 친구들은, 그저 한숨만 쉬며 조용히 그런 민지를 보고 있었다. 어느새 민지만이 아니라 같은 방을 쓰는 친구들 모두가 돌아가며 전화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민지가 지쳐서 잠들고 나면 희연이가 전화기를 지켰다. 자기 전화기면서도, 민지가 아닌 자신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때마다 민지에게 너무 미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1주일이 마침내 끝나던 날....
[12시를 넘겼죠... 다들... 체념했어요... 아. 그래. 역시 안되는 구나. 그렇게 알고들 있었고... 그래도 민지는 안자고 기다리고... 그렇게... 또 하루를 꼬박 새웠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 밤까지... 이틀을 꼬박 안자고... 혹시 전화 올지 모른다고...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그러다가.... 울었어요...]
-알아... 아는데... 그래도... 아는데... 그래도.... 알았어....
그렇게 혼잣말로 계속 되뇌이다가 결국 마지막으로 한통의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울었다고 했다.
[....밤 아홉시에 말이지.]
내가 메시지를 받았던 때다.
-고마웠다 오빠. 이렇게 불러도 되제.
-그럼 안녕 오빠. 나 원망안한다.
나 역시 갑자기 그때가 생생하게 떠올라서 이마에 손을 갖다대고 문질렀다. 뭔가가... 해서는 안 될 뭔가에 다가가게 될것 같은.... 그런 느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애가 죽어가다시피 해요. 처음에는 그냥 감기가 도진 정도였는데... 마음이 심하게 상해서 인지 음식을 먹지를 못해요. 먹으면 토하고... 그러니 몸은 자꾸 안 좋아지는데, 그만 죽고 싶다고... 그런 말만 중얼거리고... 헛소리로 오빠.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런 소리만 계속하고....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열이 44도였어요... 정말 큰일이 날거 같아서... 그래서....]
[허.....]
무슨말을 해야 할지... 나는 그저 그런 이상한 소리만 나왔다.
[민지는... 착한애에요. 오빠가 저희들을 어떻게 보시든... 걔는 너무 착하고 여린 애라서... 저렇게 둘 수가 없어요.... 그리고 저희는 친구들도 별로 없어요...]
친구들? 별로 없겠지.
[다들 저희가 이상한 애들이라고 욕하는 사람만 있으니까요]
(그렇겠지.)
그리고 그때... 나는 보고 말았다. 민지와 비슷한... 그 처연한 눈을.
[그래도.... 우리도 사람이에요]
<사람이에요.>
이상할 정도로 가슴을 울리는 말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어느새 분노를 잃고 있음을 알았다. 이건... 더 이상 화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친구도 필요하고... 가족이 그립기도 하고... 우리들... 마음은 여자에요. 그래도... 남자기도 하고요. 그래도... 저희도 사람이에요]
[...누가 사람 아니라나. 궤변 섞지마라. 변태새끼야.]
억지로 욕을 섞어 보지만, 내 목소리는 꺼질듯 가늘었다. 이미 흔들리는 내 심사를 짐작한듯. 정이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고, 그 웃는 얼굴이 다시금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친구라는 것들이. 그렇게 아프면 병원에 데리고 가든가....]
[우리 병원 못가요.]
[병원을... 못가?]
[의료보험이 없어요... 그럴 돈도 없고... 있어도 꺼내지도 못하고... 병원에 가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게 되니까요... 주사 맞는다고 바지 내리다가도 들통나고... 그래서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아요]
[.......]
나는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럴테지.
주민등록번호. 그 한가지로 사람의 중요한 정보는 어느정도 기입이 되어있는 세상이다. 무조건 병원에 밀어 넣는다고 다 치료해주는 곳이 아니니까. 의료사고나 법제상으로 병원도 진료차트를 만들게 되어있다.
그리고 병원에서 치료 받는다는 것은, 민지들 에게는 다시금 고스란히 세상에 드러난다는 말과도 같다. 그걸 바랄수가 없겠지.
[봐 줄만한 곳은 보건소 인데... 거기도 못가요. 저희가 미성년자라서.]
[그게 무슨 상관...]
[저희가 아니라 저희를 돌봐주는 언니들한테 폐 끼치게 되요. 미성년자가 집단으로 가출하고 있는데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경을 치거든요.]
[언니들....?]
[저희랑 비슷한... 알고 지내는 언니들이 있어요...그 언니들 아니었으면 길바닥에서 자야 해요. 저희... 그러니 절대로 그렇게 할수는 없어요....]
[....]
나는 또 한번 이마를 쓸어올렸다.
어지럽다. 제기랄. 어지럽다. 뭐가 이렇게 .... 가슴이 아프게 만드는 거냐...
이건 대체 무슨 삼류소설이냐...
-내....집에서 내놨다
-방세는?
-우리가 낸다
-너거 돈은 있나?
-번다
-괘안타. 한두번 있는 일도 아니고
-밥 먹은거 되게 오랫만인거 같다
-라면이나... 빵이나... 어제처럼 사람 만나면 로바다야끼에서 안주 먹어서 배 채웠다
[생활.... 아주 환타지로 사네...]
기억나는 민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나는 그저 한숨만 내 쉬었다.
[알따.... 내가 간다고 가가 병 나을거 같지는 안하지만.... 그래 한번 가보자]
사람...
남자든 여자든... 둘다 아니든... 이젠 그냥 아무 생각도 없었다.
쳇. 그냥 소말리아 난민 꼬마 하나 간호해주는 그런 기분으로 도와 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말 그대로 사람대 사람으로 보면 거리낄 것도 없지 않은가...
[고맙...고맙습니다...]
정이라는 녀석은 그제서야 탁자에 얼굴을 박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다시금 나는 불편해 졌는데, 내용물이야 어쨋건 포장지는 여자애같이 생긴 녀석이 아주 여성스러운 태도로 울고 있으니 주변에서 저 개새... 하는 눈으로 쏘아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야야. 주변에서 본다. 일나라. 일나]
툭툭 두들겨서 일으키니, 울음을 멈추려고 애를 쓰면서 부르르 떠는 정이였다. 그...모습이.
너무도 여성스러워서 나는 잠시 말을 잊었다.
[.... 보기 싫으니까. 질질 짜지마라. 사내자슥이 우는 꼴... 안좋다....]
뒷말은 아주 작게 중얼거리며...
[....여자같으면 더 그렇고...]
빠아아아앙-----
덜컹- 두쿵두쿵-두쿵두쿵-두쿵두쿵-
낡아서 당장이라도 쓰러질듯한 집 바로 옆을 기차가 지나간다.
한 3미터? 고작 그정도 거리를 두고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날때마다 판잣집 비슷한 집들은 당장이라도 무너질듯이 몸서리를 치고, 널어놓은 빨래들은 먼지와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어 누리끼리한 색채를 허공에 날리고 있었다.
[....서면에 이런곳도 있었나....]
서면은 서울로 치자면 압구정동이나 종로에 해당하는 도심의 최중심이다.
백화점과 각종 영화관... 그리고 온갖 술집과 휘황찬란한 은행및 병원 건물들이 늘어선 이 도심 한 복판에 판자촌 달동네같은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위치는 더 기가 막혔다. 바로 롯데 백화점 건너편 위로 딱 세블럭.
세블럭 위쪽으로 이런 슬럼가가 위치하고 있다니.
교통이야 그나마 편하겠지만, 철도 바로 옆에 위치한 이런 곳에서 대체 사람이 살아지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반대쪽으로는 8차선 왕복도로가 두개가 지나가고. 이쯤되면 소음. 먼지. 공해. 매연. 다들 장난이 아닐텐데.
(하긴. 대도심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슬럼이라고 하던가)
문득 그런 말이 기억났다.
편리한 교통편. 그러면서 싼 집세. 열악한 생활환경이지만 그래서 거기 생활하는 사람들이 고스란히 도심 안에서 일하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미국의 뉴욕 조차도 도심 중심에서 서너블럭만 뒤로 돌아가면 지옥같은 슬럼이 위치해 있는 까닭이 그것이라던가.
대도시는 그만큼 힘든 삶의 노동자들을 요구한다고. 역설적으로, 생활하기에 편리한 주택가가 있는 곳 주변에서는 대도심이 성립하지 못한다고. 땅값 자체가 오르기 때문에 대형 건물이 들어설 부지를 마련할수가 없다고.
쨍그렁! 바작! 와사삭!
[기가 막히는군....]
깨진 형광등과 쓰레기 더미가 군데군데 널린 길을 조심스레 걸으며 나는 앞서 걷는 정이를 보았다. 녀석은 오히려 발걸음이 빨라지는지 온 얼굴에 기쁜 빛을 띄며 저 앞을 걷다가 뒤돌아서서 초조한 얼굴로 내가 따라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무슨 강아지 같군)
그나마 그 집들 중에서 약간. 정말로 약간 집 비슷하게 보이는 낡은 2층 건물 앞에서 녀석이 부끄러워 하며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땄다.
[저... 민지가 아파서 집이 좀 어지러운데...]
끼이이이... 드르륵...
거센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조금 어둡긴 했지만, 바깥에서 보는 것 보다는 훨씬 깔끔하고 밝은 분위기의 방이다.
제 말처럼 정말 마음만은 여자들이라 그런가.
여자들 방처럼 귀엽고 아기자기한 장식에, 노란색 커튼까지 드리워져 컴컴한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와 불을 켜자, 밖에서 보기와는 딴판으로 깔끔하고 밝은 분위기의 방이 되어 있었다.
[민지야....]
문 하나를 열자 매트리스 하나가 절반을 차지하는 작은 방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수척해진 얼굴로. 그 아이가 있었다.
[민지야... 좀 괜찮아? 아직 많이 아파? 바보야... 눈좀 떠봐... 민수오빠가... 민수 오빠가 왔어... 민지야... 민지야...]
[......]
나는....
정말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 다가갔다.
[.......]
수척해진 하얀 얼굴.
계속 누워 있어서 그런지 머리는 조금 흐트려져 있었고 눈 주변은 퀭하니 들어갔는지 거무스름한 기색이 어려 있다. 입술은 바싹 말라서 회갈색으로 빛이 바래고 얼굴 살도 많이 빠져 있었다.
[......]
정이가 강요한것도 아니지만 나는.....
조용히 아픈 민지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바보가....]
얼굴에 나도 모르게 손이 다가간다. 약간 떨리는 것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충격. 걱정. 그리고 이상한 슬픔에 절어 있다.
[왜.... 몸을 이래 망가뜨리노...바보가...]
차가운 손이 닿아서인지 민지는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아픈 와중이라 더 가련하고 약해 보이는 모습이다. 적어도 이 순간 만큼은 나는 이 애가 성별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병신아...]
목소리가 잠긴다. 어느새 나도 코가 시큰해졌다.
이러라고 그런게 아닌데. 너가 이러라고 내가 연락하지 않은게 아닌데. 그냥... 그냥.... 나도 ....
[...미안하다...]
미안해. 네가 무슨 기분일지 알면서.
네가 상처 받을줄 알면서도 널 그냥 지워버려서 미안해.
차라리 정직하게 말했더라면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차라리 솔직하게 말했어야 하는데.
나.... 무서웠거든.
널 좋아한다는 게.
손에 닿은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겁다. 사람의 몸이 낼수 있는 체온이 아닌것처럼.
그저 만져본것 만으로도 정말 이 애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미안하다... 내가....미안했다...고마... 그니까....]
툭....
민지의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난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정말로 이 아이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관심이 아닌 것임도.
[그러니까... 정신좀 차리바라... 나아야지... 이래가 죽을끼가....]
간절한 마음으로 나는 한참동안 민지를 쓰다듬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만져주고. 달아오른 이마를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야윈 볼을 손등으로 매만져 주고.
그렇게 얼마간을 있자.
[.....응.......]
모기소리처럼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그 아이가 눈을 떴다.
[.....민....수....오빠가......?]
[......그래]
슥....
아주 천천히. 하얀 손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아직도 너무 뜨거워서.... 화상을 입을것 만 같았다.
[....왔나....]
[그래....늦어서 미안]
[....아이다....]
그 까만 눈동자가 한없이 투명해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민지의 눈가 옆으로 고운 이슬 방울이 데구르르 흘렀다.
[...미안...]
[뭐가...]
[안와도 되는데....괜히...]
[얼른 낫기나 해라. 바보야....]
그리고....
그 눈동자에 홀려버리고 만 나는.
새하얀 이마에 두번째로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