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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아이 - 05


쿠우웅--!


옆에서 귀청 때리는 소리가 났다. 놀라서 돌아본 나는 아예 기겁하고 말았다. 묵직한 철판과 각목의 뭉치가 내 바로 곁에 쓰러진 것이다.


[아따 아재! 누구 직일일 있습니까?]

거푸집. 시멘트 공구리(콘크리트)칠때의 필수품인데, 크기에 따라 무게도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참고로 이놈은 사람 키보다 더 크다. 대충 무게가 칠 팔십킬로는 나갈거다. 여기에 깔렸으면 뼈 한 두 개는 우습게 아작날 걸?

[감정 있으면 말로 하든가! 안전제일. 모릅니까? 안전제일!]


[얼라리요. 이늠 자슥 말본새 보소-]


쉬엄쉬엄 아르바이트 삼아 온 노가다판에서 -그래 내가 하고 있는 짓은 노가다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막노동이다. 공사판에서 시멘트. 벽돌을 날르고 있는 것이다- 다칠 생각은 꿈에도 없다. 나는 왈왈대며 항의했지만 노가다판에서 다져먹던 막일꾼은 귀나 틱틱 파고 있었다.


[이늠 새끼야. 니 몸은 니가 알아서 챙기야지 누구한테 앵길라 카노? 누가 거서 어정어정 서있으라데?]


[아. 자꾸 이랄깁니까? 내 이쪽으로 푸대 들고 안 오는 수가 있어예?]


성질이나서 슬몃 긁어본다. 노가다 아저씨의 얼굴에 그제서야 굵은 주름이 그어진다.


[이늠아야. 여기다 세멘 푸대 안날라오면 작업하지 말라는 말이가 머고?]


[그러게 와 그라냐고요. 사람 불안시럽구로.]


[아따 새참들 들고 하라고이~~~]


한참 대거리를 하고 있는데, 아래에서 참 들자고 불러댄다. 아저씨도 나도 지고 있던 짐들을 내려놓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우. 어깨야. 아우...]


근육통. 뻐근해진 어깨가 보통이 아니다.


노가다는 꽤 많은 체력을 요구한다. 고로 작업하다 말고 중간에 휴식탐을 자주 갖고 새참을 두 번 세 번 먹는다.


원래 운동하는 중이라면 하다말고 뭘 먹거나 하는건 몸에도 무리가 가는 일이지만, 노가다는 운동과 다르다. 많이 먹어줘야 지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으니까.


후루룩 후루룩!


소리가 요란하다. 노가다 일꾼들에게 제공하는 참은 보통 라면이다. 가격도 싸고 효율도 좋으니 주로 이게 골라진다. 짠 라면은 땀을 많이 흘려서 탈진하기 쉬운 노가다 인부들에게 소금을 보충시킨다. 90프로가 탄수화물인 라면은 혈당을 빨리 올려줘서 회복에도 빠르다.


양동이에 끓인 듯 엄청난 부피의 라면. 바가지를 하나씩 들고 둘레둘레 모여 앉은 사람들은 먹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꺼억!]


[으어어 잘 먹었다아!]


저걸 누가 다 먹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분량이었지만, 라면 양동이는 어느새 텅텅 비었다.


배를 채운 인부들은 이리저리 그늘로 흩어져서 잠깐의 잠을 청했다. 나 역시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을 대충 수건으로 덮고 한 구석에 처박혔다.


[바라. 학생아. 바라. 바라.]


좀 잠이 올 듯 말듯 한데, 누가 나를 부른다. 눈을 떠보니 아까 나와 대거리 했던 아저씨다.


[무라. 피곤하제?]


그 손에 들린 것은 선명한 글자의 <박카스> 헐. 이거 대체 어느 시대의 개그냐?


나는 잠시 멍청히 아저씨를 올려다 보다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아재.]


[멀. 다 묵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강아지 한 대 할래?]


피식 웃으며 아저씨가 담배를 내민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음. 아무래도 나이가 나보다 한참 위인 어른 앞에서 맞담배라니. 이건 좀 어색한데 말이지.


휘이잉! 바람이 불 때 마다 흙먼지가 이리저리 인다. 가을의 건조한 날씨는 흙도 모래도 전부 푸석푸석하게 만든다. 나는 고개를 돌려 피하는 것도 귀찮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머... 하실 말씀있습니까?]


콜록콜록!


내 말에 아저씨가 사래들려 기침을 한다. 그리고는 슬쩍 눈을 흘긴다.


[으찌 알았노?]


[하실 말씀 있으니까 오신 거 아입니까. 다들 쉬기 바쁜데.]


나는 턱짓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내 말처럼 공사장의 다른 인부들은 하나 둘씩 흩어져서 단 오분이라도 더 쉬기 위해서 늘어져 있다. 이 와중에 굳이 친한 척 박카스 들고 찾아오고, 자식뻘 되는 놈한테 담배까지 물려주면 못 알아채는 게 이상하지.


[편하게 말하소. 일 그만하까요? 임금 모자랍니까?]


나는 선수를 쳤다.


대형 공사장도 아니고, 빌라 맨션 정도 짓는 동네 공사장은 수시로 자금이 모자란다. 그런때 돈 굳히는 제일 손 쉬운 일은 군 입을 줄이는 것이다.


체력만 좋고 일머리 어리버리한 초짜 대학생은 짤리는 우선 순위 1위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건 노가다 경력 몇 년씩 되는 아저씨들인 거다.


쓰읍- 푸우우-!


속 답답한지 아저씨는 담배를 거듭 피웠다. 그러다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학생아. 니 학생 맞제?]


[예. 맞지예.]


[그라믄 학생이 이 시간에 공부는 안하고 여서 머하는 짓이고? 이 험한데에. 험한 일에. 하꼬방에 콕 처박히서 책 읽어야 안되나?]


[휴학했으예]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 그 날 이후로 나는 학교에 나가지도 않고 있다. 그리고 돈 벌려고 공사판에서 노가다 뛰고 있는 것이다. 뭐. 일단 용돈벌이 삼아 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현장에서 생각이 너무 많다.]


툭. 내뱉듯 아저씨가 말을 던졌다.


쯧. 아무래도 짤릴 모양이군. 한숨쉬는 나에게 아저씨가 다시 말을 던졌다.


[돈 벌라고 노가다판 들린게 아이다. 니. 먼 고민 있제? 그래서 여 온거제?]


[...어찌 알았습니까?]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피식. 아저씨가 담배를 한 대 더 물며 고개 저었다.


[내 노가다 십장이다. 이짓으로 삼십년 안 벌어 묵었나. 니 얼굴에 다 쓰여 있는기라. 내는 일할라고 온기 아입니다. 존나고민 많고. 그래서 생각하기 싫어서 몸 쓸라고 왔습니다. 이케.]


[.......]


뻐억. 뻐억.


나는 말 없이 담배만 피웠다.


[할만 하드나? 그래. 빡세게 몸 굴리면 고민은 좀 덜해지제. 머리가 하얗게 되고, 집에 가면 뻗어서 자기 바쁘고. 글체?]


[....예]


[근데. 현장에서 그런 사람 못쓴다. 일하러 온 사람이 아닌기라. 그거는. 일하러 온 사람 아닌데 그런 사람 오래 쓰면 사고가 나거덩. 그래서 하는 말이다. 니는 내가 몇 번 주의를 줘도 계속 정신을 못차리.]


나는 머리만 벅벅 긁었다. 딴에 대학생입네 하고 건설 현장 노동자들 쉽게 생각했던 내 얼굴이 뜨듯하다.


아. 연륜이란 무시 못한다. 이 아저씨. 어째 자꾸 내 주변에서 요란하게 물건 내려놓는다 했더니 그게 그런 거였군. 딴 생각하지 말고 집중해서 일 하라는 거였나. 그런 경고를 알아 듣지도 못하고 있었으니 내 잘못이 크다.


[나쁘게 생각하지 말그라. 내. 자슥같은 놈 노가다 현장에서 시체 치우기 싫어서 이라는 기다.]


[알겠습니다. 아재.]


[돈은 내일까지 쳐 주꾸마.]


[안 그러셔도...]


[그 돈가 술 먹고 이자뿌리라. 가시나 일 같은 거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훠이훠이 내젓고 아저씨가 멀어져 갔다.


귀신이 따로 없군. 나는 멀거니 앉아 어느새 꺼진 담배를 비비적 거리다 피식 웃었다.


[가시나는 아닌데예.]


그래서 문제지. 말하고 보니 참 재미있는 상황이다. 가시나 문제 때문에 온 형편인데 사실 가시나는 아니다라....


[다음주가 추석이네]


[아따. 날짜가 벌써 글케 됐나? 세월 빠르구만~]


[시간 잘가제--]


어느 아저씨 두 명이 그렇게 하는 소리를 듣고 문득 나는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오늘이...]


민지가 말한 1주일. 오늘이 그 1주일째였다.


[.....진짜 잘가네.]


한주가 훌쩍 지나버렸다. 이래저래 생각할 것도 많았지만, 아무 생각도 정리하지 못한채로 시간은 덧 없이 지나갔다.


아니... 생각할 것 자체가 많지는 않았다. 간단히 따져보면 둘 중의 하나니까.


연락을 할까.


말까.


머리로 생각하자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양쪽 다 심하게 가슴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냥....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락도 말아버리고 ... 그렇게 해 버릴수는 없을까.


하지만 시간이라는. 한정된 길 안에서는 어느쪽이든 선택을 해야 한다.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그 조차도 또 하나의 선택이 될 뿐이니까.

[......후우....]


하얗게 뻗어나가는 담배연기.


담배는 참 좋은 물건이다. 복잡한 상념이 머리속을 후벼팔때... 담배라는 것은 감정 전체를 희석시켜 준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더 큰 이유겠지만...
담배 연기를 내 뿜으면서 한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다.

젊은놈이 푹푹 한숨 쉬는 꼴은 누가 봐도 한심하다. 이유가 어쨌건 무슨 사정이 있건. 하지만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내는 걸로 시비 걸 사람은 없다.
대한민국 남자들에게서 담배를 빼앗는것이 잔혹한 까닭은 거기에 있다. 담배가 아니면 그나마 한숨을 내쉴 기회조차 빼앗겨 버리니까.

[대한민국 남자라...]


가슴 한 구석을 쳐오는 또 하나의 묵직한 기분에 나는 킥킥거리고 웃을수 밖에 없었다.


[자자.... 고마 일들 합시다. 갈길이 바쁭께]


[그라자~]


[일나들보입시다잉-]


짧은 휴식이 끝나고 인부들이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잠깐의 상념으로 머리가 복잡해진 나도 담배를 비벼끄고 일어섰다.


[......으]


휘청.


눈앞이 캄캄한게 별이 다 보인다.


젠장. 진짜 십장님 말이 틀린게 없군. 일하는 내내 피로가 회복이 되지 않아서 자꾸 위태위태스러웠다. 어제밤 잠을 잠을 설친 탓인가?


(이러다 진짜 사고나는 거 아냐?)


불안하다. 조금 더 쉬고 시작했으면 싶기도 하지만, 나이든 아저씨들도 낑낑대며 힘쓰는 중에 피곤하다고 쉴 수도 없다. 젠장. 오히려 더 쉬엄쉬엄 못하겠단 말야. 오늘로 그만이라는 말 때문에.


쿵- 쿵-


발빠른 인부 아저씨들은 벌써 윗층에 벽돌 무더기를 내려놓고 있었다. 나도 모래를 지고 얼기설기 나무로 엮은 계단을 휘청거리며 올랐다.


흐윽. 흐읍. 크윽. 후우.


(안좋은데...)


잠깐 쉬고 난 직후라 그런가 더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몸을 혹사하면서 머릿속이 진공처럼 비어지는 기분. 우울하고 죽고싶어지는 기분조차도 육체가 가져오는 순수한 고통 앞에서는 잠시 물러가 버린다.


땀이 흐를때까지의 데스포인트. 몸안에 마구 넘쳐나는 아드레날린과 피로물질로, 혈액은 산성으로 변하고 체온은 일시적으로 40도 가까이 오른다. 그리고 그때를 넘어서고 나면 천천히 신체는 상쾌감을 가져오기 시작한다. 땀이 흐르고 근육에는 신선한 산소와 당분이 들어찬다. 몸에 걸리는 부하가 익숙해 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조금만 더....으읍...]


3층까지다. 벽돌보다 모래는 조금 가볍지만, 그만큼 더 부피스러워서 중심잡기가 힘들다. 그래서...


[어엇... 조심해라!]


계단 위에서 퍽. 하고 떨어지는 시멘트 푸대가 어깨에 진 모래 등짐을 심하게 쳤다. 화라락 하고 매캐하고 지독하게 쓴 시멘트 분말이 얼굴을 덮쳤다.


[우앗....]


한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등골이 오싹한다. 무게가 20킬로를 넘는 물건을 지고 계단에서 중심을 잃으면?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다가 나는 어느 쇠 파이프를 잡아 몸을 지탱했다.


끼이이익...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가 났다. 제길.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다!


[콜록콜록! 크허억!]


눈에 들어간 시멘트 때문에 앞도 안보이고 기침은 격렬하게 났다. 한번 휘청거린 중심 때문에 다시 반대쪽으로 심하게 쏠리는 것을 느꼈다. 필사적으로 손에 힘을 주어서 계단 밖으로 떨어지려는 것을 면하나 했지만....


끼이이이.....끼이익!


손에쥔 파이프가 틱틱. 튀는 것이 느껴진다. 구조물과 파이프가 연결된 철사가 끊어진다!


끼이이이이익!!!!


[으...으.... 으아아악!!]


잠시... 아주 잠시. 나는 공포감을 느꼈다. 결국 내 몸은 새까만 어둠속으로 떨어졌다.


사고다아-!


얼핏. 멀리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드나본데요. 선생님.]

[......]


처음 느낀 건 소리다.


긴 잠을 자고 난 뒤 처럼, 너무 많이 자고 난 뒤 처럼 머리가 아팠다. 음. 나 혹시 이번에도 술 먹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때 눈 앞이 희 뿌연 막 같은 걸로 가려진 게 보였다.


확!


[으...]


갑자기 빛이 몰려들었다. 예리한 빛이 마치 송곳으로 눈을 찌르는 것 같다. 섬광의 건너편. 펜 라이트 너머로 차가운 유리알 안경이 보인다.


[흠.... 선생님. 정신이 좀 드세요?]


[......]


이거 무슨 상황인가? 나는 대답하기 앞서 잠시 생각을 골랐다.


툭툭. 까닥까닥.


그러는 와중에도. 하얀옷의 남자는 내 눈에다 뭘 비춰가며 확인하고 있었다.


[바이탈 문제 없는거죠?]


[없습니다. 반응상으로는 환자분 의식 돌아오신거 분명한거 같은데...]


[아. 멀리 안 갔거든요.]


마지막 한 말은 내 말이다.


말을 나누던 흰 옷의 남자와 여자 -의사와 간호사-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큭큭큭큭큭!]


옆에서 들리는 낮익은 웃음소리. 정호다. 요즘 들어 이놈하고 자주 만나는군.


[니 임마. 이틀 만에 정신 차린거 아나?]


[....들켰네. 정호야 이거 비밀이다.]


[머가?]


[나 원래 잠 졸라 많다. 니만 알아라]


[크하하하하!]


정호는 기어코 폭소해 버렸고, 우리 둘을 보던 의사는 얼굴을 흠흠 헛기침을 했다. 기절했다가 깨자 마자 농담부터 하는 환자는 의사도 처음 보겠지.


[환자분 뭐. 어지럽거나 구역질이나 없습니까? 오늘이 몇일이죠? 집이랑 자기 이름 기억나십니까?]


애써 자기 일에 집중하려고 하지만 힘든가보다. 음. 볼 오른쪽이 막 경련을 일으키고 있어.


[괜찮습니다. 뭐. 일단은. 멀쩡한 것 같은.... 아야야...]


나는 머리를 긁으려다가 찌르는 듯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딱 보니 왼팔이 깁스로 둘둘 말려 있다.


쯥. 결국 이렇게 되나?


[좋군요. 바이탈 안정적... 다른 증상은.... 아니 애초에 물을 필요 없겠네요. 골절 빼고는 정말 깨끗합니다. 다른 외상은 전혀 없는게 신기할 지경이고.]


쓰윽. 거기까지 말하고 의사는 안경을 밀어 올렸다.


[인턴 2년하고 레지3년 하는 동안에 이렇게 팔팔하신 분은 처음 뵙네요. 절 이렇게 당황하게 하다니. 영광으로 생각하십시오.]


[......예?]


말을 한참 듣고 있던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이거... 무슨 말이냐?


[흠흠. 전 그럼 이만.... 어. 김간호사? 김간호사!]


흰 가운. 차가운 금테 안경에 싸늘한 인상의 남자는 얼굴을 확 붉히면서 후다다닥 뛰쳐나갔다.
[방금 그거... 농담?]

[글쎄다. 의사들 조크인가?]

나와 정호는 서로 입을 벌린 채 쳐다 보았다.

 


노가다판에서 일하다 사고가 났다. 의사의 말대로 충격은 있었지만 상처는 크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른편 어깨가 부러진것 빼고는 자잘한 찰과상과 타박상 정도였으니까.


의사는 의사답게 의례적인 주의사항.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데스크를 부라라고 하고, 한동안 열이 오를지 모른다는 잔소리를 시시콜콜하게 늘어 놓고 나갔다.


아닌게 아니라 그가 나가고 난 뒤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병자답게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진정제와 마취제가 떨어지면서 열도 오르기 시작했고. 목이 심하게 말랐다.


[어야. 정호야. 물좀 주라.]


[어.]


시간은 이미 저녁이다. 그리고 나는 환자다. 세상 참 웃기는게, 다친 사람한테는 안정이 필요하다고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 일은 아주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슬슬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타이밍에, 가족이 들이 닥쳐서 <괜찮냐-에.>


공사판 소장들어서서 괜찮제, 고소안할거제. 니도 책임있었던거 알제. 해대고.


보험회사 직원 들이 닥쳐서 상태 보자고 해 대고... 등. 들이닥치는 방문객들로 나는 살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걱정이야 왜 안 하시겠냐만은, 몸 아플때 신경쓰이는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더 피곤하다. 옆에서 자고 가겠다는 어머니를 소리 질러서 가시게 하고, 정호만 옆에서 무협지 환타지 수십권을 쌓아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니도 가지 와.]


[치아라. 내 안그래도 휴가다. 이참에 니 엉아 노릇이나 제대로 해보자]


[휴가라고?]


나는 기가 막혔다. 이거. 고맙기는 한데.


[임마. 직장인이 휴가를 친구 병상에서 개기는게 어딨노. 어디 놀러를 가던가. 아니면 하다못해 집에서 좀 쉬든가]


[영구 휴가다 임마. 조장이랑 시비 붙어가꼬 한대 치고 때리 치아삐맀다]


[.....]


나는 한숨만 내쉬었다. 어째. 이놈 성질에 회사에 오래 붙어있다 싶었지.


[.... 아. 목 칼칼하네]


[또 물 주까? 새끼. 아주 하마가 다 됐노]


[물 말고 담배나 한대 도]


[....미친놈. 병자가 담배 달라하나]


[니도 이틀 못 피바라. 갑갑하다. 몸이 니코틴을 바란다니까]


[마 이참에 끊어라 씨댕아]


투덜거리면서도 녀석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근데 와?]


[머?]


[우짜다가 쌈 붙었냐고]


[.....헤이고]


녀석이 다시 뒤통수를 탁탁 두드리기 시작한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열이 나나보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뚱뚱하지도 않은 녀석이 이 나이에 뭔 고혈압인지.


[그때 그 호모새끼들 때매 재수 옴붙었다아이가]


[....뭐고. 그기?]


정호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씨바. 그때 좀 놀랬잖아? 그래가. 담날에 일 마치고 우리조 다 같이 술 먹으로 갔제. 가가 술먹다 말고 그때 그 이야기를 했어. 용두산 공원앞에서 그런 일 있었다고. 근데 벗겨가 묵을라 했디만 남자더라고]


[.....응]


[그게 말이다... 나는 그때 웃자고 한 이야기였어. 좀 웃기잖아. 어차피 술들 먹었고. 기가 막힌 경험도 했고. 그래서 좀 푸는 겸 삼아서 이야기 한거고. 근데... 조장 새끼가 졸라 좋아라 하면서 웃더니, 그 뒤로는 씨빠. 부를때 정호정호 안하고 정호모-하노 정호모-하노 이래 샀는기라. 이 씨발놈이... 기분 더럽잖아. 하지 말라 그랬거든. 근데 계속한다 아이가]


[허....]


좀 기가 막혔다.


[장난으로 한거겠지만.... 좀 짜증 나는 사람이네]


[씨바. 장난인거야 알지. 근데 일주일을 달아서 그래 불러바라. 사람 도나 안도나]


[허....]


웃고 말았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 딱. 불러가. 한마디 했지. 장난이 심하다고. 고마 하라고. 그랬디만 이 새끼가 또 인상 딱 굳어가. 협박하나. 이래 삿는기라. 씨발. 지가 한짓은 생각도 안하고 웃사람한테 화낸다고 지랄하재. 말이 안통한다 싶어서 딱 쳐다 보고 있었드만. 오히려... 아이고 혈압이야]


다시 정호가 뒷덜미를 주물렀다.


[마지막에 심지에 불을 땡기대. 내보고 이라는 기라. 와. 혹시 정곡을 찔맀나. 니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거 보이 좀 요상하다? 이라데.]


[.....]


[그래가 존나 딱아 팼지. 그게 어제 저녁이다. 그래가 씨바 사장한테 전화 걸어가 그만두겠다고 하고 그랬지]


[에이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금마가 잘못한건데 왜 니가 그만두노? 사장한테 그 말 까지 하든가.]


[씨발. 내라고 모르나. 잘못이야 금마가 했지. 나도 솔직히 따지고 싶기는 하지. 근데 금마가 웃사람아이가.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웃대가리한테 주먹잽이 한번 했다하면 이바닥에서는 어차피 그자리 오래 못있는다]


이해가 간다. 하기야 그거야 그바닥에서만 그런건 아니겠지만...


나는 성한팔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서?]


[어쨌든 간에 그래가. 한 며칠 쉴라고. 쉬고, 다시 일 찾을동안 동생 간호나 좀 해 줄라고]


[지랄하네. 동생이 당연히 엉아 옆에서 시중들러 와야지]


우리는 둘다 낄낄대며 웃었다. 친구라는게... 참 서로 엉기면서도 서로 위로 올라서려고 툭닥거리는 존재다.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참 따사로웠다.


[아참. 니 전화기 가져 왔다]


[.....]


드리링.


전화기 폴더가 열리는 소리가 나고, 나는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기억 어느 한켠으로 애써 밀어두었던 어떤 문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부재중 전화가 있습니다.


010-XXX-XXXX


(역시...)



희연이라는 애의 전화번호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민지가 걸었던 거겠지.


시간은.... 어제 아침 아홉시...


[후우.....]


나는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생각을 해 본다.


전날 잠을 잘 못자고 거의 뜬 눈으로 새운탓에... 그날 오후에 사고가 나고. 그리고 기절 반 잠 보충 반으로 하루를 새 버렸다. 그리고....다시 하루가 지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하루 동안. 민지라는 아이는 기다렸을 것이다.




-하루동안 전화 빌리가. 기다리 보께. 오빠 진심인가 아닌가.



[흐....]



-오빠는 아직 모른다.

-내... 잘 모르니까. 오빠 그말. 오빠 아직 모르니까 믿어야 되는지 어째야 되는지.




[몰랐지...]



참.... 희한한 경험이었다.

단 한순간에 머릿속을 수많은 기억과 대화가 스쳐 지나간다는 것은.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다는 것은.




-오빠 아직 모르니까.



난 그말이. 그애가 날 모른다는 말인줄 알았다.

내가 가볍게 말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말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 반대였다. 내가 그애를 아직 모른다는 말.


순수하게 그 말 그대로. 내가 아직 어떤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에 대해.


민지 나름대로의 배려였던 것이다.




-오빠친구들 어제 갑자기 간거 알제.

-왜 갑자기 다른 오빠야들이 내친구들한테 욕하고 씨발씨발새끼야 그랬는지 아나.



-그뜻 아니다.



-괘안타. 한두번 있는 일도 아니고.



[흐....]



그랬던 것이다.

한두번 있는 일이 아닐수 밖에.


욕해대는 모습들이 익숙하겠지.




-일주일 뒤에 전화해라.

-오빠가 전화 안해도... 내 오빠 원망 안할끼다.




일주일.

나름대로 그애가 나를 위해 배려한 시간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떤 충격을 받을 것인지.




-다음주에 전화하께. 자지말고 꼭 받아라!



[나는....]



손바닥을 들어 나는 얼굴을 감쌌다.



-오빠 원망 안할끼다.

-진짜 고마웠다. 아플때. 힘들때. 오빠가 옆에 있어줘서.... 민지 좋았다.




-다음주에 전화하께.



-오빠는 아직 모른다.


-니... 아직 모르는 모양이네.


-일주일....

-기다리보께.


-오빠가 전화 안해도...


-고맙다.





[윽....]


어깨에서 격통이 몰려왔다.

너무도 격심한 감정. 머릿속을 회오리 치는 상념들 때문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부러진 어깨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조차도 머릿속을 파고드는 지독한 감정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일주일 내내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문제였다. 생각할 수가 없었던 문제였다. 그래서 노가다로 몸을 혹사하면서 까지 잊으려고 했던 일이었다.


그것이... 일주일 전의 그때보다 오히려 더 나를 휘몰아 대고 있었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입가로 나는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딱 하루였지만, 정호에게서 그 충격적인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여자애들을 만난일은 많았다.


꽃미남도 아니지만 우린 잘 놀았다. 아니. 썩 잘논건 아니지만 즐겁게 놀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지켜주고 싶었던 적은 없었었다.


그렇게 마음이 사로잡힌 적도 없었다.


그 하루동안만 해도 나는 심장이 뛰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할만큼 기쁜 기분으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정호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순간. 그 행복하던 기분은 삽시간에 진흙탕에 쑤셔 박히는 기분으로 변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 말을 듣고 내가 느낀 분노는, 민지보다 내 친구 정호를 향하려고 했었다. 필사적인 이성을 발휘하고 나서야 겨우 나는 엉뚱한 녀석에게 주먹을 날리지 않았다.



그 뒤로 일주일...


일주일동안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름대로 민지는 나를 배려한 것일 테지만. 글쎄. 하... 이게 일주일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달로도 부족할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고민이라....


[킥.... 미쳤구나....나...]


아주 웃음이 다 나오려고 했다.


고민한다는것. 거꾸로 그것은, 이미 알고나서도 나는 뭐라고 단언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 친구들은 이미 그 일을 알자마자 바로 결론을 내려 버렸지만. 난...


나 변태인건가?


상대가 남자든 뭐든 상관 안하는 건가? 내가 미친건가?


왜 이렇게 자꾸 생각나는 걸까. 왜 이렇게 자꾸... 그 하얀 얼굴이 지워지지 않고 떠오르는걸까...


[칫....]


눈가를 거칠게 닦았다.


대체 내가 뭔 죄를 지었길래 이런일이 나한테 생긴거냐.... 라는 그런 의문만 숟하게 하고 있을때. 



드링드링~~~


[......?]
마법처럼. 만지작 거리는 가운데 갑자기 전화기로 뭔가 메세지가 들어왔다. 놀라서 전화를 든 손을 놓친다.


-메세지가 도착했습니다


민지의 번호였다.


[......]


삐이.



-고마웠다 오빠. 이렇게 불러도 되제.

-그럼 안녕 오빠. 나 원망 안한다




덜덜덜.

메시지를 확인하고 내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대체뭐야.]
그 어떤 욕을 먹은 것보다.

경멸을 당한것 보다. 더 비참한 이 기분은.

[씨팔....]

목소리 끝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눈물이 다 왈칵 나려고 했다.


기가 막히는 심정. 대상을 알수 없는 분노. 그리고 안타까움.


그랬다. 안타까웠다. 동정을 하는것이 아니다. 기가 막히게도...난...




[첫사랑이었단 말야...]



누가 그랬던가. 첫사랑은.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알수 있다고.

겨우 단 하룻동안. 더할나위 없이 행복하던 그 마음은 삽시간에 퇴색되었고.


떠올리는 것 조차 가슴이 움츠러드는... 그런 기분 속에서 나는 알았다.


그것이 내 첫사랑이었음을. 


머릿속으로...자꾸만 그 아름답던 햇살아래의 한 아이가 보였다.


-다음주에 전화하께. 자지말고 꼭 받아라!




그리고 그렇게 외치던 내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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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러리라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취향을 많이 타네요.

원모어? 를 외쳐보았지만 너무 반응이 없으시구... 쩝.

이러면 기운 빠진다구요.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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