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 18
저고리와 치마로 이루어진 한복이 아닌 원피스처럼 아주 긴 가운처럼 요즘의 한복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새하얀 한복이 발끝까지 이어져 땅에 닿을듯 말듯한 모습... 어깨부터 길게 늘어진 한복의 허리부분에는 살짝 둘러져있는 허리끈이 잘록한 허리의 라인을 표시해주고 있었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머리카락과 옷자락처럼 그 바람에 실려 날아가버려도 하나 이상할것이 없을것같은 모습의 여인.. 얇은 입술이 맞닿아 닿혀있던 그 여인의 입술이 열리면서 그 소리만으로도 홀려버릴것만같은 아름다운 옥음이 새어나왔다.
『치우님은 업보라는 말을 아십니까?? 』
『그렇게 귀계에서 이 세상으로 다시 나온 영혼들은 앞으로 새롭게 태어날 생명을 찿아갑니다... 아시다시피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만... 이 때 대부분은 생전에 만들어두었던 인연의 끈에 쉽게 이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연은 얽히고 섥힌 인연의 끈을 따라 새로운 또는 주위의 인연들을 끌어들여 다시 얽히게 만듭니다.. 인연이라는 것이 상당히 소중하고도 중요한 것이.. 이처럼 한번 맺은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고 몇 번을 윤회하는 동안에도 계속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
『아마도 현지도 치우님과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맺어져 있을 가능성이 많지요.. 아니면 치우님이 맺고 있는 인연들을 정리해줄 새로운 인연일지도 모르겠구요.. 』
뜬근없는듯한 이야기에 잠시 수호령을 바라보던 치우는 다시 드넓게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치우는 현지의 고향에 있는 성황당의 수호령을 찿아 그간 현지와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전에 수호령이 말했던 순음지체라는 것에대해 물어봤다. 그리고 현지가 안전해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었다. 치우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있던 수호령이 꺼낸 이야기가 지금 이 업보와 인연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마도 치우님이 그토록 그리워하시는 그 분 역시.. 그 기억을 잊은채 누군가의 몸에서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저는... 현지가 치우님이 그리워하시던 그 분이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
"현지가.... 지아.... 라고..??"
치우는 수호령의 말에 다시 시선을 수호령쪽으로 옮겼다. 현지를 보면 지아가 많이 떠오르는것은 사실이었지믄 그런 생각까지는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 현지는 지아가 아니었다. 그건 치우도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수호령은 그런 치우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인연이라는게 참 신기해서 전생의 기억이 봉인되어 있어도 강하게 이어진 인연은 서로를 알아보게 만들기도 하지요... 현지라는 아이... 그 아이가 제게 빌었던 소원은 그 첫째가 치우님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고 그 다음으로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자신이 죽은후에라도 항상 치우님 곁에서 치우님이 외롭지 않게 해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
『뭐라고?? 』
수호령의 말에 치우는 깜짝 놀랐다.
현지가 수호령에게 빌었던 두번째 소원이 그런것일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고 더구나 그런 아이를 죽을뻔한 위기에 몰아넣은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안그래도 편치않은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 아이의 그 소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아시겠지요? 』
『하지만.. 치우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분명 현지는 치우님의 그 분이 아니겠군요... 현지가 그 분이라면 현지의 영혼과 계약하고 교감까지 하셨다면 치우님이 그 분을 못알아볼리가 없을테니까요... 』
수호령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도 지아의 모습과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한 생을 마친 인간의 영혼은 귀계로 돌아가 정화의 작업을 거치면서 전생의 기억들이 봉인되어 집니다... 하지만 어떤 계기나 전생의 일과 관련된 강한 충격이나 일을 겪게되면 봉인되어있던 전생의 기억이 풀려버리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가끔씩 인간세상에 전생을 기억하는 자가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지요... 』
『보통 순음지체의 몸을 가진 인간이 성인이 되는 경우는 제가 아는한에서는 현지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순음지체의 인간이 성인까지 살아남는 것과 그 순음지체에 깃들여진 영혼의 봉인이 풀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수호령의 말에 치우는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어왔다. 순음지체의 인간이 성인까지 살아남는 것과 그에 깃들여진 봉인이 풀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면... 그리고 영혼의 봉인이 풀어지는 것은 전생과 관련한 어떤 충격이나 일들때문이라면.... 어쩌면...
『확신할 수는 없지만... 현지의 영혼의 봉인이 풀어진 것은... 아마도.... 치우님이 현지와 교감을 했을시에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치우님과 관계가 있는 그 영혼이 치우님과의 접촉의 충격으로 봉인에서 깨어나버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겠지요.. 』
수호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럴 생각으로 한 것은 아니라지만 치우는 현지에게 엄청난 짓을 해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 정체를 알 수없는 치우와 인간에게 묘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그 존재를 깨워버린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말이었다.
『그... 그럼... 혀..현지는... 현지는 어떻게 되는거야??? 』
치우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수호령은 공존할 수도 있을거라고 이야기했지만 자신에게 그리고 인간에게까지 적대감을 보인 그 녀석이 공존의 길을 택하지는 않을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아마도.. 치우님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봤을 때 그 영혼은 현지를 통해 치우님에게 무슨 복수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현지가 금방 흡수당해 버리지는 않을겁니다... 』
그건 치우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석이 나타나기전에 이상하게 되어버린 현지가 과연 원래대로 되돌아 올 수 있을 것인지 치우는 무척이나 걱정을 했었지만 그 녀석이 나타나고 두고보겠다는 식의 불길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을때는 최소한 현지가 다시 눈을 뜰 때는 원래의 모습일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왔었다. 아마..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전까지는 쉽게 현지를 흡수해버리거나 하지는 않을것이었다.
하지만... 단지 시간의 문제일뿐인데다 그 녀석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현지는 그 녀석에게 휘둘려 시달릴대로 시달리다가 그 녀석에게 흡수당해버리는 상황까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냥 영혼이라면 싸우기라도 해서 소멸시켜버리든 무엇을 하든 하겠지만 그 영혼이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은 현지 역시 소멸되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이야기였고 그렇다는 것은 지금의 치우에게 할 수 있는 조치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나 똑같은 것이었다.
순간 치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엇을 찿는듯 주위를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착각....인가?"
분명 누군가 치우를 부르는듯한... 마치 현지가 자신을 부르는듯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 거렸지만 이런곳에 현지가 있을리 없었고 더군다나 치우가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현지가 치우를 부를리는 더더욱 없었다.
낙심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 치우의 가슴에 무엇인가 찌르르한 느낌이 들어왔다.
"이런 느낌은...?? 두려움..?? 공포..?? 어째서 내가 이런 느낌을..??"
자신으로 인해 현지가 위험한 일에 시달리거나 흡수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인가?
아니다.. 그런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지금껏 느껴본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느낌이 왜...
더군다나 지금 상황에서 두려움이나 공포감이 느껴진다는 것은......
설마...??!!
『현지.... 현지가...??!! 』
지금 느껴지는 것은 치우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잇는 것은 하나...
교감을 통한 계약관계를 맺은 현지가 느끼는 감정.....
그렇다는건....??
『현지... 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것이 분명해!!! 』
치우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현지에게 달려가려고 하는 순간...
『치우님!! 』
치우가 그 말을 남기고 허공으로 날아오르려는 순간 믿기 어려운 말이 치우의 발목을 잡았다.
『현지를... 죽이셔야합니다!! 』
『뭐?? 너 지금 뭐라고...?? 』
너무도 뜻밖의 말...
그 말에 치우는 뒤돌아 수호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현지를... 죽이셔야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이 세상에는... 지금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과 귀들의 세상이라 할 수 있는 귀계이외에 또하나의 세상이 있습니다... 』
수호령의 멱살을 잡고 무서운 눈을 하고 수호령을 바라보는 치우에게 수호령은 또다시 치우로서는 엉뚱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야!! 』
『그러기에 더 들으셔야만 하는 겁니다!!! 』
금방이라도 공격할듯한 태도와 불타오르는듯한 치우의 눈을 바라보면서도 수호령은 치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외치듯 말하고 있었다.
『좋아.. 들어주지.. 하지만 아까같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면 아무리 너라도 용서하지 않겠어.. 』
수호령의 이야기를 듣는 치우의 머리속에 하나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숙사에서 현지가.. 아니 현지가 아닌 현지가 남자들을 바라보았을 때 마법에라도 걸린것처럼 저항의지를 잃었던 남자들....
『그리고 또 한가지... 그 분이 즐겨쓰시던 것... 느릿하고 정적으로 거의 움직임이 없는듯한 모습으로 춤을 추는듯한 움직임... 도무지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지지 않는 그런 움직임에도 누구도 그 주위로 다가 갈수 없었고 그 춤이 끝나면 그 주위의 적들은 모두 죽어 있는 ... 자신이 죽는줄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그 기술... 치우님이 말씀하신것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
『상관없어... 』
치우가 갑자기 수호령의 말을 끊었다.
『난 인간들을 구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따위는 없어.. 내가 구하고 싶은건 인간이 아닌 현지야... 현지는.. 내가 그렇게 만든것이나 다름없지... 한설이라는 녀석과 싸워야만하고 내가 패배하는게 필연적이라 할지라도 현지를 구하지 못한다면 그 싸움에서 이기는 것 역시 나에겐 의미가 없어... 』
그 말을 남기고 치우는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수호령은 치우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흐음... 이제 나도 슬슬 이곳을 떠날때가 된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