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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厚の野望 49

음지가 깊어지면 볕은 더욱 강해진다. 소주 전체가 먹구름에 잠겨 있는데 유독 실용 상단만은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강부자의 미필적 고의(?)에 의해 실시한 경강의 계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덕후는 이 계획을 실행함과 동시에 곡물 값이 수직 상승할 것을 예견하고 묵은 쌀을 대대적으로 사들이도록 선동했다. 상인뿐만 아니라 관의 서리들에게 포괄적인 상납 비를 던져줌으로써 닥치는 데로 긁었다. 서리들은 이중장부를 작성하느라 주름살이 늘었지만 주머니가 든든했으므로 보람차게 마무리했다.


그렇게 해서 모인 곡물은 그 수효가 수십 만 섬에 이르렀다. 이 비축 분을 무기로 덕후는 고소영과 강부자로 하여금 다시 투자자들을 모으도록 했다. 앞서 맹활약하던 둘은 그때까지 저울질하던 중립세력을 남김없이 흡수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호수 한 가운데 자리 잡은 넓은 정자에서 실용상단의 중역들이 모여 자리를 빛냈다. 탁자들에는 미주가효들이 놓여 있고 덕후와 심우량은 상석에 같이 앉아 축배를 들었다.


“하하하! 올해가 가기 전에 세상은 천하제일상단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오.”


덕후가 큰소리를 치자 여기저기서 호응의 잔이 올랐다. 부어라 마셔라 하는 순배가 몇 차례 돌 무렵, 중역들에게 잔을 돌리던 덕후는 장보질에게 잔을 권했다.


“장 장주도 한 잔 하시오. 음? 낯빛이 어둡구려! 무슨 일이 있소?”
“별 일 아닙니다.”


장보질은 억지로 웃고는 잔을 들이켰다. 취하는 맛보다 쓰디쓴 맛을 느끼는지 인상을 무심코 찌푸렸다. 그것이 덕후의 비위를 거슬린 듯 하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면 심금을 털어놓으시오. 여기 모인 이들은 뜻을 같이하는 지우들이 아니겠소?”


덕후가 크게 말하자 동조의 소리가 각자 한 마디 씩 쏟아졌다. 장보질은 더 이상 빼기도 난처해서 털어놓았다.


“소주의 여론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랫것들이 이르길, 거리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다더군요. 이러다가 무슨 일이 터질지....”


부자들이 높은 담을 쌓고 무뢰들과 관계를 맺는 이유는 안전 때문이다. 가진 것이 천양지차로 많기에 불안한 것이다. 만약 폭동이 일어난다면 제 1차 목표는 관헌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지주들이다. 아문의 포쾌나 위소에 군대가 출동해도 다 털린 뒤다. 그래서 좀 생각이 있는 지주라면 뒤로는 땅 따먹기 놀이를 하고 소작농을 양산하더라도, 밖으로는 기부나 구제 활동을 하여 인근의 민심을 다져두는 편이다.


가급적 평온하길 바라는 장보질의 입장에서는 경계할 만한 현상이었다. 경중은 달라도 저마다 품었던 불안감을 장보질이 지적한 꼴이 되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덕후는 코웃음을 치고 상석에 돌아가 앉았다.


“걱정 마시오, 걱정 말아! 다 방도가 있소.”
“하오나, 이 번 일에 유생들이 나선다는 소문도 있더이다. 이는 전례에 없는 것 같습니다.”


장보질의 첫 발언에 힘을 입어 누군가 지적했다.


아문의 포위 사태 때 두 유생이 지부에게 부당함을 간하고 돌아오는 길에 체포될 위험에 빠지자 염미홍이 대신 나서서 잡혀 들어갔다. 후일 이 사실을 알게 된 두 유생은 관학생들과 서원의 학도들을 규합하여 풀어주라며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염미홍이 묘령의 미소녀라는 점도 있지만 이 사태는 소주의 백성들에게 일파만파 의거로 받아들여졌다.


한 발 물러서 관망하려던 소월하는 문주가 잡혀 들어가자 빡 돌았다. 덕후가 요 며칠간 귀가 몹시도 근질거리는 게 소월하가 자신을 무던히 씹어대지 않나 짐작했다. 소월하에게 있어 염미홍은 받들어 모셔야할 상전뿐만 아니라, 좋고 싫음을 같이 하는 자매와 같은 사이였다. 그래서 소주의 천하문도들을 총동원해서 여론을 부채질 하려했다. 마침 문주에게 구함을 받은 두 유생이 석방에 앞장서지 않던가? 일단 사람을 모아놓는 단계에서 인원 통계를 접한 소월하는 깜짝 놀랐다. 모인 이들이 수만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소주는 경제가 발달한 도시 다. 특히 상품 생산에 따른 시장 형성이 진행되고, 거기에 모인 재화는 유흥과 오락거리도 창출했다. 유통 네트워크가 잘 정비되었으니 소문의 전달 속도가 비교적 빨랐다. 전제 왕조에서는 원칙적으로 집회를 금했지만, 따로 자리를 잡은 것도 아니고 길거리나 광장 같은데 오가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이야기하는 것까지 모두 단속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이에 소월하는 따로 계책을 세우지 않고 부채질에 들어갔다. 천하문의 소속의 객잔과 음식점으로 하여금 무상으로 술과 음식을 베풀도록 하였다. 그리고 기녀와 호객꾼으로 하여금 각 거리의 여론과 정보를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자기네 문주가 -그것도 연약한!- 잡혀간데 공분을 샀기에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움직였다. 특히 기녀의 경우에는 단순히 전달 뿐만 아니라 교태와 아양, 그리고 눈물까지 곁들어져 효과는 몇 배는 증폭되었다.


이렇게 소주 각 거리에 정보의 소통 화, 균일화가 진행되자 중구난방하던 민심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참여 인원이 너무 늘어나자 수군수군 대화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장場을 만들어 일정 시간을 주고 한 사람 씩 발언하는 식으로 돌아갔다. 특이한 것은 생원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의 사람들도 나섰다는 점이다. 각양각색의 발언에 따라 호응과 반박 때로는 야유와 풍자까지 쏟아졌다. 사공이 많다보니 화제가 산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고, 부화뇌동하기는 했지만, 차츰 민심은 그 방향은 징세관과 아문 그리고 실용상단에게 마이너스로 적용했다.


무언가 계기가 되면 폭발하게 되리라. 그 결과를 생각하니 정자에 모인 이들 중 눈치 빠른 자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허나, 지금 덕후는 무다무다와 로드롤러의 정신을 지닌 불도저의 화신이다.


“위소를 호출하지! 징세관에게 잘 말하면 될 것이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심우량이 제지하자 하나 같이 열렬히 긍정했다. 징세관을 움직이면 또 돈을 바쳐야하는 데다가 위소에서 나올 장수와 병졸들에게 떡고물을 나눠줘야 한다. 쓸데없는 지출은 피하고 싶었다.


“흐음....그렇다면 맞불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생원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거리에 나갔다면서?”
“수가 너무 많아 학장들도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심우량이 고개를 흔들었다. 덕후는 어깨를 으쓱하며 양 입 꼬리를 내렸다.


“씃! 생원들이 말이야. 과거에 합격만 하면 그만이지. 누가 세뇌시켰어? 앙?”


너냐? 너야? 하고 둘러보는 덕후와 눈을 마주한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되겠군. 교화시킬 알바...아니 일용직을 투입할 수밖에. 학장이나 원장들도 성명을 내도록 하시오. 반발이 심하다니 직접적으로는 말고 간접적으로 하시오. 명심해야 할 것은 이 3 단어는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오.”
“그 3요소란 무엇입니까?”
“[우려],[논란],[갈등] 이오.”


덕후은 에헴! 하고 거드름을 피웠다. 불리한 여론의 첨봉을 피하고, 비등한 듯 물 타기를 할 수 있으며, 양비론을 전개함으로서 “너도 별 수 없잖아~”,“그놈이 그놈” 라고 물고 늘어지거나- 결과가 시원찮으면 아님 말고! 로 정리된다.- 사태를 아직 모르는 제 3자에게 객관적으로 보고 개입할 여지를 주기보다는 쿨게이化 시킴으로서 여론 확장을 저지하는 고도의 연환계다.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이 함정에 낚이지 않으려면 팩트 뿐만 아니라 거기에 주어진 배후와 이해관계, 여러 매체의 정보를 취합, 두루두루 교차해서 검증을 해야 한다.


전생에는 시공의 범위를 초월하고, 물리적 구속력에 벗어나 방대한 정보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런 게 없다. 따로 막대한 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만 알 수 있는데,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관계官界 인물이거나 대부분 실용 상단 성향이라 보면 된다. 아, 천하문과 대상련이 있지만 이들 입장에선 어차피 몰락할 터이다.


“할 일 없고 목소리만 큰 노인이나 무뢰들에게 가스통...아니, 기름이나 각목을 줘서 광장에 앞세우도록 하시오. 어버이들을 몰라본다고 일장 훈계를 하도록 시키시오. 인원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 포쾌나 관속들을 붙여 아늑한 공간을 만들도록 하고!”


제정신인지 놀리는 건지 알 수 없어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이들 앞에 덕후는 근엄하게 지시했다.


“그 다음 적당한 기회에 어디서인가 살인 사건 같이 전환할 수 있는 걸 불러오시오. 드라마....아니, 각색으로 더욱 더 빛나면 좋소. 그리고 요즘 세태의 인의예의 와 법치의 정신을 신물나게 일깨워야하는 것이오. 후우, 지금 지부대인께서 구국의 결단을 위해 고군분투하시는데! 우리라도 보탬이 되어야하지 않겠소? 소주를...나아가 나라를 살릴 것은 우리 밖에 없지 않소? 세상은 우리가 없으면 안 되오!”


눈을 부릅뜨며 손바닥으로 탁자를 쾅쾅! 치면서 열변을 토한다. 뱃심이 뜨거워진 강부자, 고소영, 이매가가 앞장 서 옳소! 를 연발하니 다들 따라한다. 흐벅진 웃음이 터지는 가운데, 장보질은 문득 이 자리에 끌리듯이 앉아 있는 자신이 그토록 한심하기는 처음이었다. 술잔을 뚫어지게 보다가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만 두겠소.”


장보질은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중의 이목이 쏠리자 장보질은 심호흡을 하고 그동안 속에 꾹꾹 담았던 것을 풀었다.


“우리의 자리를 지키는 건 좋소. 하지만 공자께서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 하였소. 불가피한 일도 아니고 충분히 자족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왜 이렇게 작당들 해서 남의 피를 빨지 못해서 안달이냔 말이오.”
“아니, 이, 이 사람이!”


기분을 한바탕 망친 심우량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보질은 눈길을 피하지 않고 직시했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만사에도 과하면 부족함만 못한 법이라 하더이다. 차라리 옛날이 더 좋았지. 옛날에는 하녀들만 밖으로 보내도 괜찮았소. 하지만 지금은 호위할 장정 여럿을 붙여 보내야 할 판이오. 안 그러면 돈을 빼앗기고 폭행을 당하니까! 지주란 이유로 무조건 미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오.”
“하하하, 그거야 무지렁이들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소. 담장을 높이고 장정들을 대폭 늘리면 아무런 문제 없소이다.”


덕후가 아이 타이르듯이 충고했다. 장보질은 덕후를 휙 보았다. 눈에 불꽃이 튀는 듯해서 덕후는 움찔했다.


“여러분 주변도 마찬가지겠지만, 내게 돈을 융자해달라며 우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소. 그중에는 어릴 적 친구도 있었소. 나보다 머리가 좋고 자존심이 무척 대단한 친구였는데, 며칠 전에는 내 앞에서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비루하게 굴더이다. 처음에는 그 친구를 원망했지만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소.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이 따위로 몇 안남은 근심 없던 시절의 추억을 망쳐야하는지! 이쪽에서 마지못해 생색을 내야하는 건지! 그리고 받는 쪽에선 큰 은혜를 입었다는 듯 내게 고개를 조아려야하는지! 우리들만 정의라면서 남의 신세를 망치는 거라면 난 차라리 소인배가 되겠소.”
“그 무슨 망발을 하는가! 내가 자네를 섭섭하게 했는가?”
“내가 섭섭한 건 다 말했소. 귀는 제대로 잡힌 거요?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다면 결국은 자멸할 뿐이라는 그 이치를 왜 외면한단 말이오? 난 평범해도 좋으니, 내 자식들한테는 세간에 안팎의 평가가 극단적인 조상으로 남고 싶지는 않소.”
“난 달라! 심씨 가문을 재건해야한단 말이다!”
“아, 그렇구려. 우리라는 범위에서 묶어도 심 시랑과 나는 다르군. 이 나이가 돼서 들러리 신세는 사양이오. 짧으나마 관직생활도 했고, 여러 사람과 사귀었소. 장가장주 하나만으로 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할 것 없소만? 여러분들도 잘 생각하시오.”


장보질은 거침없이 연회석을 떠났다. 후련한 듯 껄껄 웃는 소리가 메아리 되어 남은 이들의 마음은 흔들었다. 심우량은 여전히 안색을 붉히며 씩씩 거렸다. 막상 장보질이 떠남에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랫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수가 적고 무던한 편이라 해도 장보질이 살아온 세월동안 쌓은 인맥과 지위는 무시할 게 못되었다. 장보질이 정말 작정하고 “누가 더 많이 해 먹었나 함 붙어볼까?”하고 진흙탕 레이드에 들어간다면 상처뿐인 승리만 남게 된다.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덕후가 사태를 수습했다. 겉으로나마 분위기가 수습되었을 때, 덕후는 아문에 들를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는 심우량에게 주도권을 주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향한 곳은 아문이었지만 정말로 만날 사람은 지부대인이 아니라 염미홍이다.


지부대인을 만나 슬쩍 30냥 중에 29냥을 준 다음, 한 냥은 따로 뺐다. 국가안보에 대해서 심도깊은 이야기를 한 다음 슬쩍 염미홍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한 번 볼 수 있겠소? 꽤 미인이라는데.”
“독방을 쓰고 있으니 어렵지 않을 게요.”


덕왕부의 집사라는 것을 알기에 비위를 거스리지 않으려고 지부대인은 선선히 응했다. 판관을 불러 옥리로 하여금 면회할 수 있도록 했다. 감옥에 이르자 덕후는 문지방을 넘다가 멈췄다. 옥리에게 인상을 썼다.


“벌써부터 썩은 냄새가 나는군. 청소는 언제 했나?”


옥리가 뜨악한 표정으로 그러나 귀빈이라는 것을 알기에, 열과 성을 다해 손으로 꼽아 헤아리기 시작했다.


“됐네! 이걸 줄 테니 죄인들 한구석에 몰아넣고 물청소 좀 하게.”


은 한 냥을 코앞으로 휙 던지자 받아든 옥리의 허리가 직각으로 굽혔다. 곧 옥사에 한바탕 클리닝 붐이 일었다. 덕후는 상전이 된 것인 마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지시를 내렸다. 옥리들은 왕건이 떨어지자 열과 성을 다했다. 효율적 셋팅이라는 미명하에 물을 일일이 길어오기 보다는 창살문 안에 들여놓을 수 있을 크기의 나무통을 찾아 하나 씩 비치 시켰다.  두 시진을 꼬박 그렇게 매달렸을까, 죄수들이 이리저리 치이며 장소를 옮기는 동안, 구석의 독방 하나는 홀로 남겨졌다.


덕후는 대청소한 옥리들에게 은을 뿌리며 저녁 식사 하고 오도록 한 다음, 비번으로 남은 옥리에게는 두 배를 주어 입구를 단단히 지키도록 했다. 슬쩍 염미홍의 신상에 대한 질문을 하여 음심을 품었다는 것을 암시 주었으니, 덕후가 나오기 전까지 꼼짝없이 지키고 있으리라.


덕후는 근처 주루에서 시켜온 음식 바구니를 챙기고, 문 쪽에 밀집한 죄수들을 지나쳤다. 긴 복도 좌우의 빈 방을 몇 칸 지나 끝자리에 이르자 염미홍이 있는 독방이 나타났다.


“자기야?”


창살 너머로 염미홍이 고개를 들었다. 칼과 족쇄를 차고 있었다. 꾀죄죄하고 초췌한 안색이다. 덕후는 받은 열쇠로 창살문을 열고는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염미홍의 칼과 족쇄를 풀어주었다. 그 동안 옥죄이는 고통에 해방되자 염미홍은 자리에 일어나 기지개를 펴다가, 새빨갛게 된 팔다리를 주물렀다.


다소 꾀죄죄하긴 했어도 생기를 잃은 것 같지 않다. 덕후는 복도 너머를 힐끗 보더니 찬거리를 내왔다. 뼈를 발라서 포개 놓은 닭고기 찖과 대나무에 담은 밥. 보양재를 넣고 비린내를 없애고 담백하게 우려낸 육수. 염미홍은 눈을 반짝이며 냠냠 씹어 먹었다.


덕후는 그 것을 측은한 듯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다가 염미홍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다 먹고 트림을 할 때 슬쩍 물었다.


“맛있냐?”
“응, 감옥 밥은 억지로 먹는 거니까.”


잔뜩 묵은 쌀로 주는데, 쉰내 나거나 곰팡이가 슬어도 닥치고 주는 게 감옥 퀼리티다. 거지 시절을 보낸 염미홍은 그나마 먹을 만했지만, 금보옥이나 소월하가 본다면 거들 떠 보지 않았을 잡식이리라.


“소 군사라면 칼과 족쇄 정도는 풀어주도록 찔러 줄 텐데.”
“정치범이라서 엄중히 하래. 그나마 밥은 제 때 주지 뭐야. 독방도 깨끗한 걸로 줘서 벼룩이랑 이 같은 건 없어.”


염미홍은 제법 호사를 누렸다는 듯 히히 웃었다.


“감옥에 가본 적 있어?”
“웅, 두 번 갔나. 어휴~ 싫은 기억 떠올랐네. 처음 갔을 땐 쥐나 바퀴벌레가 돌아다녀서 선 채로 버티다가 옹송그리고 앉아서 꾸벅 졸았다니까.”
“두 번째는?”
“첫 경험을 반복하기 싫어서 옥리한테 냄새나는 자지 좀 빨아주고 편의 좀 얻었지 뭐.”


덕후는 자신을 보는 염미홍의 시선이 실 없이 웃는 듯, 하면서도 어딘가 단단히 토라진 구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귀염둥이가 무엇 때문에 삐졌을까?”
“흥, 이네요. 갈보겠지.”
“지금 당장 그 갈보 보지를 애무해줄 수 있지.”


덕후가 평이한 어조로 흘렸기에 염미홍은 한 박자 늦게 그 의미를 깨닫고 얼굴을 확 붉혔다.


“어...응? 농담이지? 나 며칠 씻지 못해서 지저분한데.”
“뭐, 상관없어. 풋풋하고 산뜻한 것 외에도, 발효된 듯~ 혹은 숙성 된 듯~ 미묘한 체취도 하나의 즐거움이니까. 치즈나~ 유산균 맛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해.”


음율을 붙여가며 당장 해볼까 하고 상체를 굽히자 염미홍은 발딱 일어나 사타구니를 가렸다. 뭐 마려운 듯한 포즈로 대치하자 덕후는 상체를 도로 폈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염미홍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싫으면 굳이 하지는 않겠는데. 진심이야. 난 네 것이라면 머리카락부터 발가락 끝까지 애정을 가지고 있으니까. 더러움은 더러움 대로 포옹할 수 있지.”
“그런 거, 안 해도 돼!”


염미홍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무슨 소리하려고 온 건데? 빨리 말하고 가.”
“마치 내가 목적이 있어서 온 것 마냥 들리네?”
“내가 멋대로 굴었으니까, 혼내주거나 갈음할 걸 대신 해주려고 온 거 아냐?”


사실은 그런 의도도 있었으니 덕후는 속으론 찔끔했다.


“아주 부정하긴 힘들다만, 궁금한 게 있거든. 왜 순순히 잡혀온 거야? 우리 문주님의 실력이라면 도피 정도는 가능 할 텐데.”


덕후가 손을 써서 구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잡혀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염미홍의 구금을 알린 소월하는 본인이 구하지 말라는 소리를 알렸다. 그래서 덕후가 따로 압력을 줄 것 없이 감옥까지 직접 온 것이었다.


“대신 기루가 쑥대밭이 되었겠지.”
“문주로서 책임감인가.”


다른 방법, 화끈한 안마라든가, 수고비 납세보다 순순히 끌려가는 것이 사태를 무난히 덮은 셈이다. 많이 자랐구나 하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덕후를 염미홍은 얄밉다는 듯 흘겨본다.


“그럼 다음 질문. 왜 그 사람들을 구해 준거니?”
“좋은 사람들이니까. 그때 광장에서 한 마디 해줬잖아. 도와주고 싶었어.”
“호오, 그 친구들이 영웅호걸의 자질이 있었는지는 몰랐는걸. 사주를 알아봐야하나 어디 재상의 재목이 있는지.”
“영웅이었어?”


염미홍이 뜬금없다는 듯 반문하자, 호들갑을 떨던 덕후는 맥이 빠져버렸다.


“뭔가 있으니까 도운 거 아니니?”
“있던가? 그건 잘 모르겠어. 그냥 한 번도 감옥 안 간 사람들 같은데, 괜히 잡혀가서 고초를 겪는 것보단 나같이 글러먹은 년이 대신 가주는 게 수지 맞을 것 같잖아.”


염미홍은 그 자리에서 쭈그리고 앉았다.


“하아,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지부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멀뚱멀뚱 있는데, 나와서 한 마디 하는 걸 보니 울컥하더라고. 옳은 소리를 했는데 도망가듯 숨는 게 왠지 부아가 치밀었어.”


풀이 죽은 음성이다. 가혹한 환경 속에 살아남기 위해 이기적인 성향으로 자라나던 염미홍이, 대방파의 주인이 되자 많은 부분에서 변했다. 주변에 신경을 쓰게 되고 참견을 많이 했다. 염미홍의 각오와 다르게 덕후는 비난하지 않았다. 밖에서 의거라고 염미홍을 칭송한다 해도 정작 본인은 염미홍은 그걸로 우월감이나 과시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혹시 나중에 내가 어려우면 열에 하나 정도는 도움 주겠지 하는 얄팍한 계산 밖에는.


유치했음에도, 그것이 덕후에게는 사랑스러웠다.


“조금만 더 참아.”


염미홍은 변수를 만들었다. 그러나 어쩌다보니, 인간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다보니 그렇게 된 셈이다. 그런 이에게 면죄부라고 광대 노릇을 시켜주기에는 조금 안쓰러웠다. 물론, 염미홍과 관계를 맺지 않고 생판 남이라면 죄책감 없이 부렸겠지만.


“다 괜찮은데 좀 씻고 싶어...근질근질하다고.”


염미홍은 몸을 뒤틀었다. 덥고 습기가 많은 이 지방 사람들은 자주 씻는 편이었다. 덕후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 침은 안 될까?”
“......그냥 죽어줘.”


염미홍이 학을 뗀다. 그래도 끝까지 농담이라고 말하지 않는 덕후를 향해 염미홍은 조금은 경계했다.


“잠시 눈을 감아 봐. 위문 선물로 가져온 게 있으니까.”
“...응.”


한참 뜸을 들인 뒤 염미홍은 순순히 눈을 감았다. 기척으로 덕후가 잠깐 나갔다 들어온 것을 감지했을 때, 눈을 뜨라는 소리를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웬 김을 모락모락 나는 욕조가 코앞에 짠! 하고 등장했다. 어른 하나가 팔다리를 굽히고 앉아야만 겨우 가슴께에 담글만한 면적이었다. 청소용으로 들여놓은 것이지만 아직 몇 통은 깨끗한 물로 남았고, 그 중 하나를 열양기로 데워온 것이었다.


“씻으려면 씻어. 물은 충분히 있으니까. 망을 봐줄게.”
“자기야...”


염미홍은 감격했다. 사고를 치고 감옥에까지 갔는데, 씻을 걸을 들여놓는 남편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염미홍은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자 눈물이 핑 돌았다. 굳었던 전신의 근육이 이완되고 혈류의 흐름이 활성화되면서 땀샘에서 땀이 노폐물을 함께 토하기 시작했다. 나른한 감각과 함께 마음이 너그러워진 염미홍은 덕후를 보았다. 덕후는 문 밖에서 창살을 등진 채 복도쪽을 응시하고 있는 데 두 손은 칼과 족쇄의 구멍을 소도로 깎아 넓히고 있었다. 죄이는 것을 헐겁게 하려는 것이다. 염미홍은 불쑥 치솟는 충동에 따라 속삭이듯 말했다.


“....나 다 씻으면 해도 좋아.”
“하지만, 거절한다! 감옥 플레이의 묘미를 모르는군. 씻기 전에 족쇄를 찬 상태에서 하는 감금의 미학은 이미 물 건너갔는데.”


가끔은, 아니 늘 느끼는 것이지만 덕후의 성적 취향은 내뱉는 외래어만큼이나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별난 변태적 성격도 참아줄 수 있는 건, 싫다고 말하면 채근하거나 강제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물통을 두 번 갈고 나서 염미홍은 덕후가 주는 새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사이 덕후는 욕조로 쓰였던 통을 치우고 도로 칼과 족쇄를 채웠다.


“늦어도 이번 주말이면 출소할 수 있을 거야. 잘 참고 있으라고.”


서커스의 막을 내리는 광대에 가장 어울리는 역은 덕후다. 사지가 결박당해 눈으로 배웅하는 염미홍에게 덕후는 혀가 엉키는 키스를 하고는 감옥을 벗어났다. 아문을 나왔을 때 덕후는 머리 속에 이미 새로운 매뉴얼을 짜고 있었다.


돌아온 덕후가 비장의 무기를 만든다면서 공방에 들락날락하는 동안, 소주의 인심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일로를 걸었다. 첫 시위가 별탈 없이 마무리 되자 이에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시위대를 더욱 확대시킬 계획을 짰다. 한편 유생들도 대대적인 항의문을 발표했다. 잡아간 시민들에 대한 석방과 물가 폭등에 의한 책임 소재와 경강의 계로 실용상단을 엄격히 감찰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사법과 행정에 대해 비교적 잘 알았으므로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고소장을 냈고, 아문에서는 접수를 해야만 했다.


천하문은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았지만, 가능한 많은 인원수를 모으고 계층 참여의 폭을 넓히기 위해 배후에서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아문에서 재판이 벌어지는 기일을 확인하고 그때 대대적인 시위에 계획했다. 소월하가 이런 예방을 취한 덕분에 실용상단 측에서 기획한 물타기+깽판 어택은 헛물을 켜고 말았다.


그리고 재판 당일, 새벽부터 소주의 거리는 어수선했다. 성내의 군중들이 거리마다 넘쳐 나왔고 구획별로 약간은 소란은 있어도 질서정연하게 행진했다. 이들은 아문에 모였다. 아문 가까이에는 수 백의 생원들이 자리를 깔고 앉았고 그 곁에는 장정들이 팔을 걷어붙인 채 서 있었다. 이들의 뒤로 만에 이르는 군중들이 겹겹이 포위하듯 아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떠들거나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지만, 수만의 호흡과 배가 되는 눈이 아문을 주시하자 견딜 수 없어진 지부대인은 동지를 시켜 슬쩍 의향을 떠오도록 했다. 동지가 아문 문을 살짝 열고 목적을 묻자, 대표로 나선 이가 조용히 말했다.


“고시할 내용이 궁금해서 모인 것이오. 계속 지켜볼 것이오.”


어떤 항의나 요구는 아니었지만, 동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고 말았다. 지켜본다는 말이 그렇게 무섭게 들리기는 처음이었다. 안에 가서 사정을 지부대인에게 알렸다. 동지와 판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지부대인은 초조해하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재판을 시작해야지!”
“어느 것부터 먼저 하오리까?”
“.....으음, 일단 실용상단을 심의한 뒤에, 잡혀온 자들에게 훈방 조치해야겠지.”
“그럼 그렇게 따르겠습니다.”
“고시의 순서는 바꾸게. 양민들을 훈방 조치한 다음에 실용상단을 알리고. 그리고 잡혀온 이들에게 서약서를 받아놓게.”
“서약서라뇨?”
“답답하기는! 이 일에 대해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가중 처벌 하겠노라 해야지! 그거라도 안 해놓으면 우리가 저 미천한 것들한테 졌다고 자임하는 꼴이 아닌가!”


지부대인이 벌컥 역성을 부렸다. 그래도 아랫것한테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는 안하는 것만으로, 윗사람으로 최소한의 자각은 있는 듯 했다. 동지와 판관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고 얼른 재판 준비에 들어갔다. 아침을 먹고 차 한 잔을 할 시기에 먼저 고소 측, 담죽군과 박가흥, 그리고 삼공자를 비롯한 소주의 직인, 노동자 등등 각계에서 뽑은 대표자들이 들어섰고, 뒤 이어 소환한 실용상단 관계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관리도 아니면서 아문 마당 안에서까지 가마를 타고 들어섰는데, 몸이 안 좋다는 이유만으로 지부대인이 통과 시킨 것이다. 가마 문이 열리고 심우량이 대표로 강부자, 고소영, 이매가, 덕후가 등장했다.


이들은 하나 같이 양 옆에 바퀴가 달린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덕후가 21세기에 쓰던 휠체어를 재현한 것이지만 이 시대에는 적당한 단어가 없으므로 그냥 이동 의자라고 하겠다. 피고인 측은 다들 얼굴이 창백했는데 혈기가 부족해서라기 보단 과도한 분칠 때문이었다. 각오를 단단히 하던 고소인 측은 무슨 수작인가 서로를 멀뚱히 볼 뿐이었다.


지부대인이 교의에 앉고 단 아래 정청에는 관리들이 도열한 가운데 원고인과 피고인이 좌우로 마주보고 있는 상태에서 시작했다. 먼저 고소인 측에서 “경강의 계”의 배후 세력으로 실용상단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실용상단 측에서 변론에 나섰다.


“그런 서신을 보냈는지 모르오!”
“...지시 여부를 묻는 것이지 서신이라고 확정해서 말하지는 안았습니다만?”


잘 걸렸다는 듯 잡고 늘어지자 실용상단 여기저기서 불편한 헛기침이 나왔다.


“소통 수단에는 서신도 있을 것 아니오. 그래서 그리 말한 게요. 그보다 쌀값 폭동은 대상련 책임이 아니오? 우리 실용상단은 오히려 억제하려고 곡물을 저렴하게 풀었소이다. 뭣하면 출납 장부를 가져와 확인시켜드릴 용의가 있소.”
“궁색하군요. 그럼 시중에 파는 곡물 값은 왜 그렇게 폭등합니까? 그들 장부를 입수해서 봐도 판매액수가 온전히 기재 되지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 반값 혹은 3/1 가격이더군요. 그럼 나머지 수익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요?”


날카롭게 추궁하자 실용상단측 변호인은 한동안 엷은 미소를 지으며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순수한 뜻으로 받아들여 주시오. 우리는 현장에 그런 일이 있는 것을 모르오. 현장에서 한 일에 대해서 우리 실용상단 수뇌들이 책임져야할 일이지 신중히 검토해야하오. 우리가 아무 때나 고개를 숙인다면 체면이 어찌 되겠소.”


그러자 고소인 측에서 차례차례 증거를 제시했다. 이에 대해 실용상단 측은 기억이 없다, 모르는 일이다, 내 소관이 아니라 입장 표명이 어렵다, 운운으로 피해갔다. 말로 빠져나가기 어려운 궁지에 빠졌을 때는 폐부에서 우러나는 격렬한 기침을 하거나 뇌가 지시하는 경기를 일으킴으로서 맥 빠지게 만들었다. 지부대인도 은근히 피고인 편을 들었으므로, 재판은 번번이 임시 중단되곤 했다. 중천을 차지했던 태양이 차츰 서쪽으로 기울었다. 차츰 고소인 측에서 엷은 절망감이 들고, 피고인 측에서 이번만 넘기면 된다는 결사의 각오를 불태울 무렵이었다.


“잠시 형을 멈추시오!”


지부대인이 판결을 내리려 할 때였다. 아문의 대문이 열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이 우르르 걸어왔다. 선두에 섰던 무인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감찰어사대인 납시오!”


그 소리에 아문이 발칵 뒤집혔다. 지부대인은 누구보다 빠르게, 굴러 떨어지듯 정청 아래로 내려갔으며, 후원에서 언제쯤 결과가 나오나, 느긋하게 노닥이던 태감조차 급보를 듣고 놀라 담을 넘어 도망가려다가, 민중들이 아문을 빽빽하게 에워싸는 것을 발견하고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기세등등했던 관리들이 대가리를 땅에 박고 엉덩이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뿐만 아니라 휠체어 신공을 펼치던 실용상단 측도 그 자리에서 껑충 뛰어 앞으로 오체투지를 했다. 고소인 측도 사태가 얼떨떨하기는 마련이라 무릎을 꿇었다.


감찰어사대인은 마흔 살의 엄격한 외모에 긴 수염을 배꼽 위 부근까지 늘어뜨린 이로 형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정청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방금 전까지 지부대인이 차지했던 교의에 앉았다.


“아문에 있는 모든 이들과 장부를 한 자리에 가져오너라!”
 
그 자리에 판관과 호조 관할의 관리들이 장부를 당장 긁어와 바쳤다. 감찰어사대인 사령 몇몇을 호출하더니 장부상 숫자와 실제와 수치가 맞는지 대조하도록 했다. 실용상단 측에 묵은 쌀을 판 뒤라 창고는 텅텅 비다시피 했다. 그 와중에 비밀 암호를 적은 장부를 발견했고, 사령은 호조 소속의 관리를 잡도리시켜서 곡물을 판 대가라는 것을 밝혀냈다.


보고를 받은 감찰어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문득 감찰어사가 고소인과 피고인 측을 번갈아 고갯짓을 했다.


“저들은 무슨 일로 왔는가?


지시를 받은 사령이 양측으로 달려가더니 사정을 취합해서 돌아와 아뢰었다. 감찰어사의 표정이 점점 서릿발처럼 변했다.


“감옥 안에 갇힌 이들을 모조리 대령하라!”


금세 정청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모조리 나와 미어터질 듯 했다. 정청이 시장통 바닥처럼 북적거리자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령이 고함을 질렀다.


“조용조용!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아닌 자들은 엄히 징계하겠다!”


소리가 잦아들자 감찰어사는 사태를 설명할 수 있는 자를 추려내도록 지시하다가 수감자들과 동떨어져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감찰어사는 의아함과 호기심을 느끼며 염미홍을 지목했다.


“고개를 들라. 이름이 무엇이며 무슨 죄목으로 잡혀온 것이냐?”
“나리, 소녀의 이름은 염미홍이라 합니다.”
 
염미홍은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알고,침을 꿀꺽 삼키면서 근래 소주에 있던 사태를 설명했다. 설명이 무척 조리가 있고 간결하여 감찰어사도 몰랐던 부분을 세세히 알게 되었다. 이는 염미홍이 특별히 머리나 언변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천하문주로 소주에 돌아가는 전말을 대강 알고 있었고, 사지가 구속된 감옥에서는 생각만 계속 하는 것이 일이므로 논리를 가담을 기회가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다 거짓말이옵니다! 듣지 마소서! 창녀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다!”


지부대인이 악을 썼다. 그러나 감찰어사는 지부대인에게 윽박질렀다.


“판단은 본관이 하오!”


감찰어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불꽃이 떨어질 듯 형형한 눈빛을 떴다.


“듣거라! 황상께서는 남경 이남에 벌어진 징세관의 횡포에 대해서 의문을 금치 못하시었다! 분명 소통으로 협조를 얻으라 했음에도, 이렇게 행패를 부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셨다. 그래서 본 어사로 하여금 실정을 조사해오도록 했다. 오늘 본관이 와서 개요만 살폈는데도, 이 정도라니 실로 가관이구나. 철저히 옥석을 가려 국법의 지엄함을 널리 알리겠노라!”


감찰어사대인의 엄포는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정청에 횃불을 대낮처럼 밝혀 심문을 계속했다. 밖에 있던 시민들은 어사의 등장과 대질심문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3분의 1이상이 집에 다녀오긴 했으나 대부분은 남았다. 남을 수 있던 데는 소주의 객주와 주루를 움직여 밥과 물을 조달한 소월하의 안배가 있기 때문이었다.


사흘 밤낮 내내 계속된 조사를 마친 감찰어사대인은 판결을 내렸다. 지부대인 이하 관원들은 일벌백계로 전원 면직이 되고 태감은 경사로 압송되어 형량이 정해질 것이었다. 권력 투쟁에 밀려난 터에다가, 황제 이하 문무관헌들이 징세의 과오를 몽땅 태감에게 덤터기 씌울 작정이라 사형은 필수였다.


지부 대인은 목숨은 건졌으나 사회적으로 사형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상련을 족치고 실용상단을 업어볼까 수를 부린 덕분에, 이제껏 대상련에 선을 대고 있던 은퇴한 선배들과 경사의 후배들이 합심으로 이를 갈고 있는 터라 보통 있기 마련인 구명 길은 아예 막혔다. 


실용상단 측은 그동안 비리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막대한 벌금을 물어내기 전까지 구금을 당했다. 덕후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예외로 하지 말라고 감찰어사의 배후에 있는 우희선에게 신신당부 했으므로 같이 굴비처럼 칼과 족쇄를 차고 감옥에 엮어 들어갔다.


이 고시가 성내 곳곳이 알려지자 소주 시민들은 위아래 할 것 없이 환호했다. 목적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시민의 승리로 막을 내린 것이다. 비록 조정-감찰어사의 강제 개입으로 인한 불완전한 성취였지만 하나로 뭉쳐, 항거와 청원이 먹혀들었다는 점에서 고무되는 데는 부족함 없었다.


그 사이, 감옥에 갇힌 이들은, 돈을 낼 수 있는 이들은 가솔들이 가산을 팔아 보석금을 내게 했고 하나 둘 출소했다. 이 돈으로 감찰어사는 측근을 시켜 조정에 바칠 것, 자신과 사령들이 출장비로 충당할 것을 슬쩍 분류한 다음, 나머지는 피해를 본 양민들에게 넉넉히 보상을 해주도록 했다. 


보름이 지나 감옥에는 심우량과 덕후만 남았다. 둘 다 보증을 서주고 보석금을 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감옥에서 심력을 무척 소모했는지 둘다 쇠약해져 있었다. 그나마 덕후는 젊은 편이라 괜찮았지만, 노인인 심우량에게 습하고 더운 공기와 불결한 환경은 심신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온 종일 사지가 굳어있다 보니 피가 안 통해 몸에 종기가 곪았다. 옥리에게 사정을 봐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코를 후빈 손바닥이었다. 돈을 달란 뜻이었다. 모욕감을 느낀 심우량은 침을 퉤! 뱉었고, 덕후가 무슨 짓이냐는 듯 기어가 손바닥을 싹싹 핥았다. 옥리에게 싸대기를 맞았지만 저녁밥에 고봉을 얻어서 받았고, 심우량은 밥이 숟가락 하나만큼 놓였다.


“석방이다, 나와!”


옥리의 외침에 둘은 칼과 족쇄를 풀고 나왔다. 절뚝절뚝 걷는데 봉두난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음울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라오!”


덕후가 고개를 척 들고 대답했다. 심우량은 덕후를 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욕심에 눈이 가려진거지. 흐흐흐, 내가 나 스스로를 망쳤을 뿐이네.”


그렇게 내뱉은 심우량은 기둥을 노려보더니 외마디 고함과 함께 몸을 날려 정수리를 찧었다. 무언가 둔중하게 깨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와 회색 뇌수를 쏟으며 심우량은 절명했다. 옥리가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떠느라 덕후의 출소는 사망 경위에 대한 심문을 받느라 반나절을 다시 지연했다.


아문을 나서기 전에 덕후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구름 몇 조각이 유유히 떠돈다.


“혼자 가야하나.”


고통은 같이 분담하는 게 좋은데 말이지. 덕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문을 나섰다. 보석을 통해 아문을 나선 이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옥리를 통해 귀동냥할 수 있었다. 문이 열리면서 심호흡을 한다. 곧장 시민들의 손가락질과 함께 증오와 조롱, 그리고 멸시가 소주를 벗어나는 동안 덕후에게 따라붙었다.


 


 


정의는 승리합니다. 다만 주인공이 정의가 아니었을 따름.(....)


각설하고, 다음 화로 파트 4, 1부가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한 편 더 올려서 마무리하면 여름 동안은 쉬겠습니다. (9월 중에 2부 재개할 듯.) 2부 시작 전에 다듬을 것도 있고 일 관계상 기사 자격증 딸 것도 있어서 어쩔 수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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