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厚の野望 50
“련주님을 뵙게 해주시오. 가능하면 오늘 내로 말이오.”
느닷없는 방문에 대총관 금천효는 잠깐 동안 상대를 보았다. 장보질로 한 때 실용상단이 주가를 올릴 때 몸담던 소주의 유력자다. 막판에 등을 돌림으로서 실용상단이 처절하게 몰락하는 가운데 궂은 바람을 피한 행운의 인물. 그렇게 뇌리에 상대에 대한 신상을 떠올림에도 겉으로는 십 년 넘에 익힌 예절로 응대했다.
“따라오십시오.”
잠시만 기다려라, 혹은 날짜를 잡고 다시 오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장보질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련주님은 제가 올 줄 알았단 말입니까?”
“언질은 주셨습니다.”
짤막하게 대답을 하고 금천효는 사방이 닫힌 객실로 안내하고, 시비를 불러 차를 내오고 시중을 들게 한 다음, 자리를 비웠다. 잠시 후, 자의미녀가 내왕했다. 은은한 광택이 나는 자색 비단을 입고 곱게 땋은 머리는 금실로 휘황하게 장식이 되어 있었다. 특별한 행장은 아니었지만, 깨끗한 외모아 함께 고급스러운 복장이 조화를 이루어, 묘령의 처자가 아닌 련주로서 위엄을 앞세우고 있었다.
반면 장보질은 투박한 옷차림이었다. 스스로 근신하는 마음에서였다. 서로 예를 표한 둘은 마주보고 자리에 앉았다.
“련주님의 신색이 나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것 같소이다.”
“그럴 리가요. 근래에는 항상 비만 오던 시기였는걸요.”
“비온 뒤의 땅이 굳어진다 하더이다.”
장보질의 조용한 언질에 금보옥은 훗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의 말대로 대상련의 주가가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이반했던 거래처나 산하 단체도 복귀를 청하고 있었다. 물론 금보옥은 그들을 순순히 받아주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유보 딱지를 붙여준 채 내부적으로는 수뇌들을 불러 대상련의 규범을 새로 작성하도록 했다.
덕후에게 들은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응용, 일정한 자격을 가진 주재자에게만 거래선과 영업권을 보장한 것뿐만 아니라 브랜드인 대상련의 간판을 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보니 실적과 자금 운용 내역와 거래처와 신용 사태 대한 정보가 필요했고, 신용 등급 별로 구분하기 위해 인증 제도가 요구되었다. 유동성이 강한 상업인 관계로, 한 번 인증했다 해서 끝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심사를 하여 갱신도 해야 한다. 당장은 자신과 금천효가 처리하고 있지만 적절한 후임자에게 물려주어야할 것이다.
일련의 프로젝트를 통해 금보옥은 쓸데없는 출납의 부담을 줄이고 하고 상거래의 통제를 대폭 강화시켰다. 실용상단에 경강의 계로 이반한 거간꾼들의 불신임을 명분삼아, 직접 표국들을 선임하여 지역할당식으로 운송과 납부를 책임지도록 했다. 이 일의 총책임자는 쟁자수로 시작하여 표국 세계에 잔뼈가 굵은 정익훈이 맡았다.
대상련은 느슨한 연맹체계에서 직접적 지배체제로 굳어지고 있었다. 원래 대상련이 생긴 것은 위기의식에 대한 발로였기 때문에 참가자들이 나름 발언권을 지닐 수 있었지만, 작금은 배를 갈아타려다가, 이 배가 아닌가벼? 하고 도로 찾아온 입장이니 선주인 금보옥이 강짜를 부려도 아쉬운 소리 못하는 입장이다. 이번에 금보옥은 작정을 하고 대대적인 심사를 통해 선별된 이만 품겠다니, 동종 업계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확실한 건 이 작업이 마무리되면 금보옥의 입지는 석년의 금대숭을 능가하고 남으리라는 것이다. 금보옥은 자신과 장보질의 차이가 어떠한지를 함축적으로 이해시켜주기로 했다.
“저는 매우 바빠요.”
“알겠소. 할 일 없는 늙은이가 공사가 다망한 분의 공연히 시간을 축내는 일이 없어야 하겠지. 실은 말이오.....”
장보질은 우선 실용상단의 몰락과 그 직전에 자신이 이탈한 것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는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실용상단의 몰락에 장보질은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실용상단 인사에 대해, 절차에서 강남 유력자들인 점을 감안해 나름대로 최대한 배려했다고 생각하는 감사와 세무조사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덕후와 심우량이 부채질하고 고소영과 강부자가 주역이 돼서 양주 일대에 유지와 거부들을 끌어들인 리스트가 감찰어사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사실 아무런 보증도 없던 덕후와 심우량의 석방 조건에는 이 리스트를 넘긴 것에 있었다.
하나 둘 아문으로 소환 돼서 조사를 받게 되자 양주의 재력가들은 똥줄이 탔다. 그렇다고 대신 무마해줄 구심점이 없었다. 심우량은 자살했고, 실용상단의 실세들은 막대한 벌금을 물어낸다가 죄목이 씌워진 상태니 두문불출해야할 입장이다. 그나마 실용상단 몰락 이전에 살짝 발을 빼고 인망도 적지 않는 장보질에게 매달리게 된 것이다. 장보질은 나 좀 살려달라는 애원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고민 끝에 금보옥을 찾아온 것이다. 이제 금보옥은 진짜 거물이므로, 애매한 소리나 협상은 필요 없을 것 같아 장보질은 사전에 유력자들로부터 자신에게 전권을 위임하겠다는 동의를 얻어왔다.
“소녀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군요.”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 금보옥은 쌀쌀맞게 나왔다. 장보질은 인내력을 총동원하며 침착함을 가장했다.
“다 압수되면 그게 다 어디로 갈 것 같소? 만 귀비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겠지.”
“그렇네요.”
속으론 아닌데요, 하고 답한다. 아마 감찰어사 뒤에 있을 우희선을 통해 덕후가 상당수 흡수할 것이고, 그 자금은 금보옥의 주머니로 도로 들어올 것이다. 이번에 워낙 피해를 봤어야 말이지. 속으로는 장보질이 그냥 돌아가길 바라고 있지만, 누군가의 예상대로 장보질은 움직이지 않았다. 본인은 의식하지 않아도, 망아지 같은 처자 셋을 잘 키운 덕분에 금보옥에게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흔들리지 않고 어렵지 않게 회화할 수 있었다.
“그렇지 말고 서로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봅시다. 만 귀비에게 바치기는 싫지만, 대상련에게 모두 맡기기도 난감하오. 하지만 백짓장도 함께 맞들면 낫다고 하지 않소?”
장보질은 탁자에 손을 올린 채 몸을 반쯤 일으켰다. 열과 성을 다해 설득하려고 한다. 금보옥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에 잠긴 척, 장보질의 기다림에 극에 달했을 때를 노렸다.
“공적자금이라고 했죠?”
“말장난에 불과하오.”
“그럼 정말로 공적자금으로 만들어버리세요.”
장보질의 귀가 솔깃해진다.
“원래 이건 대상련의 비상대책으로 한 기획한 것이었죠. 다행히 거기까지 갈 일은 없이 사태가 마무리 되었지만요.”
금보옥은 보장제도에 대해서 설명했다. 원래는 산업혁명과 대공황 이후로 정착된 것이지만, 여기서는 좁은 의미에서 사원보장제도였다. 물가 폭등과 맞물려 대상련의 악재로 소속원들의 의식주가 곤란해질 것을 대비하여 생계비의 일부 혹은 전액을 보장해준다는 항목이었다. 일당 같은 개념은 아니고, 특별히 의료나 산재에 대해서 대상련이 감당해준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상도덕 차원에서 지급해주기는 했지만, 문서상으로 명문화한 것이다.
“가입 조건은 다달이 일정액을 부담한다는 것이었죠. 금고나 감춰져 있던 푼돈이라도 모을 수 있을 테니까요.”
“알 듯 말 듯 하오. 그래서 공적자금을 그것으로 대체 하자는 말이오?”
현재 칼자루를 쥔 이들이 명의만 바꿨다고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다.
“이왕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죠. 소주는 물론이고 양주의 시민들, 일정 회비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전부 가입을 받아버리세요. 그걸로 공론화하면 감찰어사라도 독단으로 처리하기는 힘들 거예요.”
장보질은 련주의 말을 가만히 헤아려보았다. 만일을 대비한다는 마음이 이끌어낼 효과는 대단할 것이다. 제법 부유한 측에 들어도 부모가 중병에 걸려 가세가 순식간에 동났다는 소리는 이야깃거리에도 못 든다. 그러던 차에 이런 보장제도가 있으면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을 터. 장보질의 얼굴이 환해졌다가 금세 흐려졌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까지 해준단 말이오? 설령 되다 칩시다. 관리할 전문 인력도 없는 형편이오.”
금보옥은 침묵을 지켰고 얼마 안가 원하는 답을 얻었다. 장보질이 간곡한 어조로 청했기 때문이다. 말로만이 아니라 자리에 일어나 옆으로 비켜 금보옥 앞에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련주님이 앞장 서주시오. 련주님과 대상련이라면 충분히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소. 우리들을 살려주시오.”
“이러시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금보옥은 상대가 깃발을 들 것은 예상해도 이렇게 무릎을 꿇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비 뻘 되는 노인이 체면불구하고 이런 각오를 내비쳤는데 계속 외면하면 냉혈녀로 찍힐 것이다. 금전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되 줄 수 있지만, 돈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므로 평판에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매가나 고소영, 강부자 같이 확실히 척진 부류라면 모를까, 3공자와 관계있고, 소주에서 인망이 적지 않은 이가 장보질이다. 금보옥은 얼른 마주 무릎을 꿇은 다음 장보질의 팔꿈치를 잡고 일으켰다. 천장에 드리워진 줄을 당겨 시종에게 차를 내오도록 해서 장보질이 격양된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준 다음 말했다.
“좋아요. 조속히 수습해보죠. 우리가 어렵게 쌓은 부가 만 귀비 일당에게 그대로 들어가는 것은 반기지 않으니까요. 무한정 위탁을 받을 수는 없고 3년 뒤에 재가입하던가 탈퇴하던가 갱신 가능한 걸로 해요. 위탁 말고 다른 수가 있긴 한데 시기가 좀 안맞으니.....”
“다른 방도가 있소?”
장보질이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금보옥은 잠시 망설이는 시늉을 하다가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확정 된 것은 아닙니다만, 조만간 조정에서 감합무역의 수를 크게 늘릴 것이라 해요. 대신 기존의 해택을 그만큼 줄인다고 하네요. 완전 면세가 아니라 일부는 상인들이 부담해야 할 것입니다.”
“억! 해금령을 철폐한단 말이오?”
“확실하진 않아요. 일단 살펴보는 중이 아닌가 싶네요. 결과가 시원찮으면 원상복귀하고, 좋으면 단계적으로 해체할 수 있고....”
“기회라는 것은 알겠소. 허나, 상도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시오.”
둘은 협상의 단계가 아니라 금보옥이 장보질에게 주식과 투자의 개념에 대해서 질답을 이끌어가는 형국으로 흘렀다. 장보질은 굳은 머리로 금보옥이 말한 개념을 한동안 고민하고 나서야 겨우 이해했다.
“위탁과는 다르군요. 하지만 잃을 위험이 있는데....”
“일장일단이죠. 그만큼 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위탁도 그렇지만, 이것 역시 많은 조율을 거쳐야 할 거예요.”
장보질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로선 금보옥의 설명을 듣고 머리로는 감이 잡힐 듯 말듯 했다. 그만큼 신개념이었던 탓이다. 원래 이 시대의 부는 1차로 축적하는 것을 우선한다. 소유권도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고 서비스 빛 재화의 상호교환도 전문적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다.
이 시기 해외무역은 위험부담이 크다. 어중간한 규모로는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실패하면 폭삭 망한다. 한 마디로 일척도건곤의 승부인 것이다. 그것을 피해 안전을 꾀하려면 대자본을 지닌 상단에 들어가거나 투자를 하면 된다. 장보질이 보기에 금보옥과 대상련은 자신들의 투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단체였다.
장보질은 어떻게 하면 재산을 보존할 수 있을까에 사고 수준이 머무른 반면, 금보옥은 더 높은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2대에 걸친 위기에 쌓은 굳건한 처신은, 그 자체로 자금을 지속적으로 흡수할 신용으로 탈바꿈했다. 거기에 위탁으로 들어올 보장금과 해금령을 통해 끌어 모을 재화는 “대자본”이다. 다 내 꺼! 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지만, 그 자금력을 운용할 수 있는 자가 거의 독점적으로 자신뿐이라는 점, 그리고 투자와 교환을 통해 얼마만큼 수익을 올릴 수 있는지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이제까지 금보옥이 양주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면, 앞으로는 양주 전체의 부를 가진 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 걸까?
반문을 한 금보옥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일이 끝나고 덕후를 보면 한바탕 쥐어패려던 마음은 그가 아문에서 석방이 되며 소주 시민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사라졌다. 듣지 못할 욕설은 기본이요, 가래와 돌, 그리고 구정물 세례를 교외로 벗어날 때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곁에 있던 우희선의 서슬 퍼런 기세를 금보옥은 잊지 못했다.
“일단 위탁할 분들의 명단을 가져와주세요. 기증할 자산이 되나 조사해보고, 가치만큼 권리 증서를 발행하기로 하죠. 세부적인 것은 실무진을 구성해서 처리하도록 하고요.”
금보옥과 장보질은 다음에 만날 약속 시간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별을 고하려는 찰나에 장보질은 생각났다는 듯 하나 청을 했다.
“좋은 비단 세 필을 알아봐 수 있소?”
금보옥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렵지 않지만 장보질 정도면 굳이 자신을 통해 구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의문에 답하듯 장보질의 말이 이어졌다.
“내게 과년한 딸이 셋이 있는데 아이들이 받아도 부끄럽지 않을 예단(신부가 받는 것)을 알아보려고 하오. 원래는 가만히 있는 게 도리이겠으나 사위 후보들이 하나 같이 무부武夫라 그런데는 좀 미더워야지.”
“그러네요. 전 중원을 뒤져서라도 가장 좋은 걸로 알아볼게요. 이왕에 봉채(신랑이 받는 것)까지도요.”
금보옥은 활짝 웃으며 장보질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삼선녀와 삼공자 사이의 혼인은 당사자만의 경사뿐만 아니라, 앞으로 강남에 손꼽힐 유력자가 될 장보질과 재도약할 대상련 간의 연결 고리가 튼튼해짐을 의미했다.
첫 화합이 끝나고 나서 10일 뒤 소주를 시작으로 항주, 남경부, 복주, 남창, 등등 큰 도시에 다음과 같은 방문이 붙었다. “종합산업재해의료보험가입안내문” 이라는 긴 제목으로 시작된 이 공고문은 일정액을 납부하면 그 기간 동안 질병, 부상, 출산 혹은 사망에 대한 보험급여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상세한 약관 규정과 가입 요건에 대해서는 대상련 소속의 상관을 이용하도록 했다.
감찰어사에게 찍힌 유지들은 장보질의 주도로 두 말 할 것 없이 막대한 액수를 들어다 가입했다. 그리고 주변에 매뉴얼대로 보험제도의 좋은 점을 입 아프게 떠들어댔다. 피라미드 효과로 일정 수입이 있는 자들은 너도 나도 발 벗고 가입하느라 신청자가 폭주했다. 업무를 소화하기 위해 대상련 측에서는 낙방수재들을 대거 임시로 고용하여 즉석 교육을 시킨 다음 투입했다. 수습 기간 동안 성적이 좋은 이들에 한해서는 대상련의 정식 서기나 감독으로 임용한다는 당근을 던졌다. 박가흥처럼 학문과 셈은 남부럽지 않게 하나 과거 볼 실력까지는 못되는 이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또 이 보장제도의 실시는 프랜차이즈(여기 식으로는 결연회) 기획과 맞물려 또 다른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보장제도의 가입 조건에 “정규직”과 프랜차이즈의 “공정거래항목” 이라는 생소한 조건 때문이었다. 원래 1차 생산은 대부분 농가에 이루어진다. 이들은 스스로 창업 자본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빚을 내서 수확을 담보로 고리대로 빌리는 경우가 많았다. 겨우 완성한 물품은 시나 진(고을)에 나가는데 전국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대량으로 사들였다. 이때 일방적으로 값을 후려서 강매하므로 터무니없이 싼 값만 받게 되고, 겨우 손에 쥔 푼돈도 고리대의 이자를 갚는데 급급했다. 지금까지 농민들은 부지런히 일함에도 조정과 지주 그리고 상인들의 지속적인 수탈을 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대자본을 손에 넣은 금보옥과 혁신 정책에 힘입은 대상련은 저금리를 앞세워 공격적 투자를 실행, 쓸데없는 마진을 정리해버린다는 취지로 농민들과 커넥션에 낚시질을 했다. 이윤을 축적할 기회가 생긴 농민들 입장에서는 대환영이었다. 그리고 정규직은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장인 정신 촉진이라는 명목 하에 근로 환경 개선, 고용 보장과 부당 해고 방지를 조건으로 삼고 있었다. 전제적 권리를 행사하던 상주들 입장에서는 반발할 만했으나, 소주의 항거에 맛이 들린 소월하와 염미홍이 노사 단체를 만들고, 배후에 후원하는 식으로 집단 파업이나 조약 협상을 하도록 하였다. 또한 노사들이 폭력사태 같은 극단으로 치닫지 않게 갈등을 조율할 수 있는 자치기구도 만들었다. 이 틈을 타 천하문은 기존의 무뢰 단체나 하층민뿐만 아니라 노동자나 장인, 영세한 자영민에게 영향력을 대폭 확대하는 계기가 된다.
상주들도 대놓고 반발할 수 없는 게 노사분규가 잦거나 악덕상인이라 찍히면 대상련 프랜차이즈 가입에 지장이 많기 때문이다. 이에 상주들은 동종 업체끼리 연대하거나 합병을 함으로서 갖가지 요구를 감당하든가 제어하고 자기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게끔 규모를 키웠다. 이 과정에서 부실하거나 구조가 취약한 상회는 자연스레 도태되었다.
일련의 과정은 정부 시책처럼 위로부터 일괄적인 개혁이 아니라, 자발적인 형태를 띠었으므로 짧게는 몇 개월, 어떤 경우는 수년에 걸쳐 진행된다.
여름을 맞이한 소주의 기온이 서늘한 길일에 장가장에서 대례 의식이 행해졌다. 강윤식, 초제학, 황철웅 세 남자가 장가장의 꽃 같은 세 미녀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신부를 꽃가마에 태워 악사들을 대동한 채 친정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거리마다 인파에 휩싸여가 가는 행렬을, 무망루의 5층에서 하루동안 전세내고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월하, 저것 좀 보시구려. 올해 들어 소 군사의 최대 공로로 기억할 장면이오.”
난간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덕후가 빙긋이 웃었다.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상체를 내밀며 보던 소월하는 입술을 삐죽일 뿐 딴지 걸지는 않았다. 자신의 중매로 세 쌍이 백년가약을 맺었으니 이색적인 기분이 들었다.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지어달라는군요.”
금보옥이 부럽다는 듯 넌시지 알렸다. 소월하도 그 말에는 깜짝 놀랐는지 고개를 돌렸다.
“에? 제가요?”
금보옥이 고개를 끄떡이자 소월하의 얼굴은 깐깐함을 더 유지하지는 못하고 부드럽게 변했다. 염미홍이 한 마디 한다.
“아이들이 좋은가 봐?”
“꼭 그렇다가 보다는.....저 세 쌍은 좋은 가족이 되지 않겠어요? 전 양친을 일찍 보내고 할아버지와 함께 자랐으니까요. 앞으로는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랄 테니까요.”
소월하는 자신이 무심코 한 말이 얼마 안가 5층 일대를 고요한 정적으로 만들어버리자 당황했다. 여인들, 소월하를 포함하여 염미홍, 신도형욱, 영호세휘, 우희선, 금보옥, 마라 등등은 무언가 사로잡힌 듯 가만히 있었다.
“우엥! 아빠, 나도 어부바 해줘!”
마라가 거짓 울음소리를 내며 덕후에게 달려들었다. 돌아온 것은 이마가 따끔해지는 손가락 튕기기다. 딸의 반란을 조속히 막았으나 덕후는 등줄기로 식은땀을 흘렸다. 하나 둘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마라를 보니 세휘의 등 뒤로 물러나 혀를 살짝 내밀었다가 도로 말았다. 교활함이 갈수록 진화한다.
염미홍이 콧소리를 내며, 자기 딴에는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빛낸다고 했으나,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강렬하게 응시했다.
“자기야~ 나 뭐 하나 부탁해도 돼?”
“안 돼.”
“어우~ 자기야~! 그러지 말고~”
“....말 해봐.”
“아이를 가지고 싶어.”
사탕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간절한 표정을 한다. 껴안아주고 싶은 마음에 일을 저지를 것 같아 고개를 돌리니 이번에는 금보옥이 심상치 않은 미소를 띠며 자기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는다. 형욱은 무표정했으나 뭔가 안타까운 기세고 세휘는 악동과 같이 빙글거린다. 우희선은 하염없이 바라보다 읍을 하며 청원했다.
“이제 큰 일은 마무리 되었으니, 슬슬 왕부에 후사가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당분간은 바쁘지 않소. 조만간 남경으로 거처를 옮긴 다음 혼인식은 거행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소.”
덕후는 과장되게 웃음을 터뜨리며 어떻게든 자리를 무마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우희선의 다음과 같은 중얼거림에 가까운 어조로 무너졌다.
“혼례도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하는데, 하늘이 점지한 후사는 십 년 다음이 될지 어떨지....”
이 시대 왕후장상의 결혼이 정략적 의미를 지녔다지만, 덕후처럼 철저하게 소화한 인간은 별로 없을 듯 싶다. 대외적으로 덕왕부의 심복이 강남을 접수하려다가 결딴이 나버렸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상심하고 분노한 덕왕은, 대상련주와 천하문주 그리고 밀천회주를 지목하여 내자로 맞이한다는 시나리오였다.
이렇게 되면 외견상 덕왕이 승리하고 강남을 장악한 것처럼 되지만, 실세는 여전히 그녀들이 가지고 있고 역으로 덕왕의 비빈이라는 특권을 이용하여 관부의 자질한 외압을 차단하고, 왕야의 수작질에도 직접 견제가 가능하다. 까놓고 말해 미인계로 덕왕을 꼭두각시로 삼아버리면 되는 것이다.
내실을 모르면 정말 그렇게 보일 정도로 덕후는 마누라들에게 전폭적으로 퍼부었다. 일단 우희선은 왕비로서 덕왕을 대행하여 삼사를 감시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겼다. 사법권과 처벌권을 통째로 넘긴 것이다. 금보옥의 경우에는 대상련주 직을 계속 수행하고 인재 추천할 권리를 보장하여 주어 행정권과 인사권을 주었고, 염미홍의 경우에는 소월하와 함께 세트로 자유권을 보장했다. 생존권+인권+저항권+언론을 합치한 것이지만, 우희선과 금보옥과 달리 권한과 규정이 애매한 것은 근대 이후의 개념이라 전제 왕조에 내놓기에는 미묘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덕후가 이 자유권에 참고하라고 골자로 내놓은 게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구빈법(1601년)이었다. 16세기 상업혁명으로 농민들이 도시로 몰리면서 자본가 혹은 노동자로 분화되기 시작하고 급격한 인구증가로 사회에 양극화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정치적 사안까지 겹쳐 교회에서 하던 빈민 구제와 자선사업을 국가가 책임짐으로서 사회와 경제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구빈법을 제정하게 된 것이다. 후일 사회보장제도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이 법규는 당시 중세시대의 한계를 안고 있어, 대상자의 권리는 상큼하게 무시하고 빈곤하게 된 원인 따위는 홀로 씹어 드시라는 지배자 중심의 정책이었다. 어디까지나 잉여 노동을 활용하여 생산을 재고함으로서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측면이 강해 “억압을 통한 구제”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도 다를 것이 없었다. 용감하게 지적하는 이들이 몇몇 있긴 했으나, 빈민 현상을 사회구조적 현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천성이나 업보쯤으로 여기고, 어디까지나 구휼 적 의미에 국한된 것이라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덕후의 의도는 자신의 대에 체제가 전복되지 않는 선에서, 이데올로기적 강령보다는 실무 중심으로 하층부와 상층부를 부딪칠 기회를 가능한 많이 꾀하려는 것이다. 침묵과 억압 끝에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유혈사태 보다는, 제 목소리로 고성방가를 하며 머리채 붙잡고 이단 옆차기를 하는 희극이 더 낫다는 판단에서 이었다. 이해집단 간에 타협을 이끌어내는 소통구 역할을 염미홍과 소월하에게 맡긴 것이고.
덕후의 역할은 비빈들 사이를 돌며 의견을 수렴한 뒤 법의 제정 및 수정과 폐지에 대한 입법 사안에만 간섭하는 것이다. 이것도 외부에서 보기에는 베개머리 송사로 응응~ 그래그래 ~ 하고 들어준 것처럼 보일 여지는 있다.
덕후의 이러한 안배에 우희선을 비롯한 여인들이 의문을 표하자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정리했다.
“경사의 무고를 피하기 위해서라오.”
정난지변과 한왕 주고후의 난이 멀지 않는 과거의 일이다. 성화제가 세상을 뜨게 되면, 다음 황제인 홍치제와 덕왕 사이가 건문제와 연왕(후일 영락제)의 구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호신책으로 연왕 주체의 3류 연기(들판을 쏘다니며 야숙하는 등 미친 척 하기)를 따라할 생각은 없으므로, 섣불리 강남을 삼킬 야심을 드러냈다가, 현명한 아내들에게 역으로 눌려 꼼짝 못하는 호색 왕야 역할을 추구한 것이다.
물론, 위의 제반사항들은 덕후가 남경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 차차 이행될 것이다. 그동안 혼인 후보자들은 비련의 히로인을 연기하며 세간으로부터 동정표를 잔뜩 모으며 영향력을 강화할 예정이다.
“아이 계획은 십년 후가 좋지 않겠소?”
십년이라는 말에 우희선이 상처받은 얼굴이다. 창백한 안색을 보자 덕후는 서둘러 해명했다.
“우리 아이들만은 곁에서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며 사랑을 주고 싶소. 말로만 사랑한다하고 아이가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다면 부모로서 실격이 아니겠소. 관심을 가질 시간이 있어야 잘못한 것이 있으면 혼을 내주고, 잘했으면 칭찬을 할 게 아니오. 하지만, 당분간은 할 일도 많을 터, 그때까지는 보류하자는 거요.”
“그 십년 동안은, 십패를 정리하실 의향이십니까?”
소월하가 물었다. 단순히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듯 여인들의 기색이 동조하듯 심상치 않게 변한다. 덕후는 눈에 띄도록 식은땀을 흘리며 손 사레를 쳤다.
“아니, 뭐...굳이 거기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는데...그냥 믿을만한 후임자를 양성해서, 안심하고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면 되오.”
“이성으로는 알 것 같은데, 이 가슴으로는 도통 이해가 안가네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살짝 올리며 서늘한 말을 하는 금보옥의 뒤를 이어 염미홍이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하이 소프라노 톤으로 웃는다.
“그렇다면, 몸으로 묻자! 사탕발림으로 넘어갈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하나 진정으로 설득시켜보세요?”
소월하도 이번만은 염미홍을 꼬집지 않았다. 우희선도 무례를 탓하지 않았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미룬 일을 처결해야한다고 자리를 먼저 떴다. 그리고 각자도 할 일이 생각나며 줄줄이 퇴장한다. 형욱이 마지못해 세휘의 손에 이끌리며 퇴장하자, 무망루에는 덕후 혼자 버림받은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굳어버린 덕후의 곁으로 마라가 위로 하듯 발돋움하여 어깨를 토닥였다.
“아빠, 힘 내.”
자, 이 50화로 덕후가와 고산케御三家(....)의 창설. 설명만 잔득하고 마무리하는 것 같네요. (그렇다고 사실과 부합되느냐...고 질타하면 아니올시다, 라고 에두를 수 밖에 없고.ㅎㅎ;;) 양수마 이야기도 언급할게 있지만 자질구레해지는 것 같아서 2부로 미뤘습니다. 2부는 1부 마무리에서 2~3년 후의 시점일 것 같습니다. (연재 개시는 2~3달 후겠지요.)
50화를 올리고 지난 댓글들을 죽~ 보는데....데미 갓이 어느 정도냐? 는 질문을 확인했습니다. 4차원 영역입니다. 현 상태로 국군체조 하듯 정성(...)을 기울이면 시간 축에 자기 의지를 간섭시킬 수 있습니다. 잘 안 쓰지만요, 인간이라는 틀에 집착이 강한 편이라 무공도 1류 수준에서 스스로 그만 두었고. (빈사 상태나 생물학적으로 사망 시에는 방어기제로 원상 복구(?)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한해서는 방관하는 것이고요.)
ps - 분량을 계산해보니 1.1M군요. 앞으로 완결까지 이 분량 이상 더 써야한다니...몇 년이나 걸릴지...-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