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수정편 제 14 부
** 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수정편 제 14 부 ** [수정일. 2006 년 3 월.]
제 5 장. 보이지 않는 손 2.
하남(河南) 대평야의 중심지에 자리 잡아,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가 된 개봉(開封)의 우왕대
(禹王臺)아래 위치한 비연선원(秘緣仙院)의 경내(境內)는 비록 단촐하게 꾸며져 있었으나 그
아담한 장원에는 기화요초(琪花瑤草)가 가득하며 주변은 교목(喬木)으로 둘러싸여 운치를 돋
우고 있었다.
많은 여객(旅客:나그네)들이 이곳 우왕대를 찾아 옛 성현의 발자취를 느껴 시상을 떠올리고
빼어난 경치를 구경하며, 왕래를 하는 여행객 대부분이 비연선원(秘緣仙院)에 들려 향기로운
술과 맛있는 음식을 들며 여독을 달래곤 했다.
이러한 명성(名聲) 때문에 비연선원(秘緣仙院)의 이름은 날로 유명하여져 수백, 수천리 밖에
서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비연선원(秘緣仙院)은 겉모양과는 달리 경내의 후원 심처에 정교하고 치밀하게 두
곳의 누각을 지어 놓았고, 그 사이 사이에 물을 끌어 들여 조그만 호수를 만들어 은밀한 통로
를 이루어 놓았다.
그 위에는 대나무로 난간을 만들고 주위에는 잔디를 깔아 놓았으며 기묘한 화초를 심어 놓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다리 밑으로는 호수를 따라 잔디와 화초가 자라 온갖 화초가 만개하는 계절이 되
면 붉은색과 푸른색의 꽂들이 조화를 이루어 서로 다투듯 피어있어 보는 사람의 눈과 정신을
현란하게 하였다.
계절의 꽃이 떨어질 때가 되면 새로이 백화가 어울리 듯 피어나 비단같이 고운 꽃잎의 물결을
이루고, 그것은 마치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황홀한 경치를 만들었다.
그 각각의 정교하고 치밀한 누각들의 정면에는 제궁(帝宮)과 예원(藝院)이라 쓰여진 황금색
현판이 걸려 있었으며 제궁(帝宮)의 내부는 서원(書院)과 무원(武院)으로 이루어져 각종 서적
(書籍)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두 곳은 각각 따로 떨어져 있었으며 두 개의 누각중 하나하나의 누각에는 사방이 견고한
울타리로 둘러 싸여 있어 단 하나 돌로 된 다리 외에는 다른 통로는 없었다.
그리고 비연선원(秘緣仙院)의 접객실에는 무림명숙(武林名宿)과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을 위해
만여권의 책을 보존해 놓고 묵어가는 객인들이 독서를 하며 미주(美酒)를 마시고 음식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이 접객실의 여유와 운치만 가지고도 능히 강호에 소문이 날만한 주루(酒樓)였던 것이었다.
* * * * * * * * * *
「주군(主君).. 어느 것 하나도 불편함이 없이 지낼수 있도록 꾸며 놓았습니다. 이곳 제궁(帝
宮)은 주군께서 거처할 곳입니다. 저와 완(婉)아는 건너편의 예원(藝院)에서 지낼 것입니다.」
학련(鶴蓮)의 안내를 받아 비연선원(秘緣仙院)의 경내(境內)를 둘러보던 상관명의 입에서 감
탄이 절로 흘러 나왔다.
오랜 세월을 기다려 오면서 천궁(天宮)을 옮겨 놓은 듯 주인을 맞이할 완벽한 준비를 갖추어
놓았으며 또한 겉으로는 무수한 강호인이 드나드는 평범한 주루(酒樓)로 보였으나 그 깊은 내
부는 어느 누구도 감히 범접(犯接:함부로 가까이 가다)을 못할 요새(要塞)로 만들어 놓은 것
이었다.
「학련(鶴蓮)누님.. 천궁을 그대로 옮겨 놓은듯 하구려.. 정말 수고 하셨오.」
이 넓은 천하에 혈혈단신(孑孑單身), 천애고아(天涯孤兒)인 상관명에게 형제가 생겼고 거처가
마련된 것이다.
상관명은 치밀어 오르는 격정(激情)을 겨우 억누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고마워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제가 해야 할 임무 였습니다. 이제 주군(主君)의 과제는 이곳에서 천궁(天宮)의
제자들을 지휘해 천하(天下)를 논(論)해야 하는 일입니다.」
「알았소..! 내.. 그대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천궁(天宮)의 궁주(宮主)가 되리다.」
구(龜)와 학련(鶴蓮) 그리고 완(婉)낭자 까지 모두들 감격에 겨운 얼굴을 하며 상관명을 바라
보고있었다.
「모든 심부름은 완(婉)아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시킬 일이 있으면 완(婉)아를 부르시면 됩
니다.」
「어허.. 그럴 필요는 없어요. 나 혼자도 잘 합니다. 그 보다 학련(鶴蓮)누님.. 완(婉) 낭자
에 관해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구(龜)와 학련(鶴蓮)의 인연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소녀의 티를 갓 벗어난 듯한
완(婉)아는 도저히 누구인지를 생각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 주군(主君).. 완(婉)아는 어릴때 부터 저와 함께 자란 제 동생과 다름없는 아이입니다.
저아이의 선조(先祖) 역시 저의 집안과 함께 대(代)를 이어온 것이지요..!」
「오호.. 그렇다면 완(婉)낭자도 또한 당연한 천궁(天宮)의 제자 이겠구려..!」
「고맙습니다 주군(主君)..! 완(婉)아 어서 궁주(宮主)님께 제자의 예(禮)를 올리지 않고 무
엇하느냐..!」
자신도 천궁(天宮)의 진정한 제자가 된다. 완(婉)의 얼굴에 기쁨이 넘쳐 흘렀다.
* * * * * * * * * *
비연선원(秘緣仙院)의 제궁(帝宮)안에 들어 깊은 사색에 잠긴 며칠을 보낸 상관명이 구(龜)와
함께 학련(鶴蓮)이 거처하고 있는 예원(藝院)을 찾았다.
「학련(鶴蓮)누님. 오늘이 그날 이지요. 그들이 오면 이 예원(藝院)으로 모시도록 하십시오.」
준비를 당부한 후 선원(仙院)의 정원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신시(申時:오후3시∼5시)가 조금 지난 시각..!
남쪽의 관도에서 돌연 두 필의 준마(駿馬)가 선원(仙院)을 향해 질풍같이 달려 왔다.
앞의 말을 탄 사람은 스무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미청년의 모습 이었다.
그러나 어찌 사내가 그토록 충격적인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으며 저렇게도 무심한 얼굴을 할
수 있을까..?
그의 뒤를 쫒아 오는 또 한필의 말위에는 검은 옷을 입은 무인이 타고 있었다.
그 흑의인은 한편으로는 말을 달리며 또 한편으로는 이곳 저곳을 휘둘러 보며 사방을 경계하
는 눈빛이 날카로왔다.
그들이 비연선원(秘緣仙院)의 앞에 당도해 훌쩍 말위에서 날아 내리는 몸놀림이 여간 가벼워
보이지를 않았다.
「헉.. 저 청년은 공주가 남장을 한 것이구나..!」
가까이서 그들을 본 상관명이 긴장을 하고 있는 그 순간 허공에서 또 다른 두사람의 그림자가
날아 내리며 흑의무사(黑衣武士)에게 아는 척 인사를 했다.
「광진(光振)호위.. 소생 겨우 시간에 맞춰 당도 했습니다. 어.. 구(龜)공자도 이미 와 계셨
구려, 공주께서는 어디에 계신지..?」
구(龜)의 곁에 서 있는 상관명에게는 의례적인 눈인사만을 한 후 구(龜)를 반갑게 쳐다 보며
말을 건넸다.
「서문대인.. 우리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공주께서는 여기계십니다.」
광진(光振)이 남장 여인을 가리키며 대답을 했다.
그 남장 여인이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서문인걸에게 가
볍게 목례를 했다.
학련(鶴蓮)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어서 오십시오.. 비연선원(秘緣仙院)의 주인인 학련(鶴蓮)이라 합니다. 제가 안내를 하겠습
니다. 모두 저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학련(鶴蓮)의 안내로 호수의 돌다리를 지나 예원(藝院)의 실내로 들어와 사람들의 시선이 사
라지자 서문인걸이 비로소 자혜공주(慈惠公主)를 향해 옳바른 인사를 올렸다.
「서문인걸(西門仁杰)의 부녀가 공주님을 뵈옵니다.」
서문인걸(西門仁杰)과 함께 화령(華怜)과 구(龜)가 공주를 향해 예(禮)를 드리는 것을 지켜
보며, 안내를 하던 학련(鶴蓮)과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서 있던 상관명도 함께 고개를 숙여 예
(禮)를 올렸다.
「모두들 반갑습니다. 오늘은 제가 여러분 들과 의논을 할 일이 있어 여기까지 오시도록 어려
운 부탁을 드렸습니다. 자.. 모두 자리에 앉읍시다.」
자혜공주(慈惠公主)가 일행들에게 자리를 권하고 그 사이에 학련(鶴蓮)은 완(婉)아를 불러 차
(茶)를 따르도록 눈짓을 했다.
「완(婉)아.. 우선 따뜻한 차를 한잔씩 올려라..!」
완(婉)이 따르는 찻잔을 손에 든 자혜공주(慈惠公主)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상관명을 찬찬
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 공주와 얼굴을 마주친 상관명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짐짓 무심한 눈빛으로 아
무런 내색 없이 바닥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한손은 목에 걸린 옥패(玉佩)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학련(鶴蓮)낭자는 이 선원(仙院)의 주인이라 하셨고 다른 분들은 제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자님은 누구신지 알지 못하겠군요..?」
자혜공주(慈惠公主)가 상관명을 가르키며 물었다. 그러나 공주의 목소리에는 무엇인가 찾아내
고자 하는 의구심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런 모습의 공주에게 구(龜)가 대답을 했다.
「이분은 저의 주군이며 주선진(朱仙鎭)에 있는 연환서숙(捐幻書塾)을 설립하신 분이기도 합
니다.」
상관명도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
「오오, 그렇습니까..? 몽매(夢昧)한 백성을 깨우치느라 강호에 칭송이 자자한 구(龜)공자의
주군이 되시는 분이라면 학식(學識)또한 높으신 분이겠습니다. 이렇게 고명하신 공자님을 만
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혜공주(慈惠公主)가 상관명(上官明)을 바라보며 칭찬을 하는 말에, 함께 자리하고 있던 화
령(華怜)이 피식.. 조소를 흘렸다.
그 잛은 순간 자혜공주(慈惠公主)는 깊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상하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이 공자의 얼굴이 낯이 익어 보이는 것은 어인 일인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다시 보고 또 생각을 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시절 한집에서 함께 기거를 한 서문부녀도 알아보지 못하게 변한 상관명의 모습을
한 순간 스쳐 지나간 공주(公主)로서는 도저히 알아 볼 수는 없었던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자혜공주(慈惠公主)가 자신의 뒤에서 눈을 부릅뜨고 묵묵히 서있는 광진(葉光)을 돌아 보며
말했다.
「광진(葉光)호위.. 문밖으로 나가 이곳에 잡인이 근접하는 것을 철저히 막아 주세요..!
그리고 학련(鶴蓮)낭자도 밖으로 나가셔서 이곳에 점원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당부를 해
주십시오.」
밀담(密談:비밀스러운 이야기)을 나눌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예, 공주님..!」
광진(葉光)과 학련(鶴蓮) 두사람이 방문을 나서 경호를 하기 위해 부산히 움직이는 것을 확인
한 자혜공주(慈惠公主)가 입을 열었다.
「서문대인, 본의 아니게 대인과 혈잠령(血潛領)의 영두(領頭) 유극관(劉克官)이 나눈 이야기
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굳은 기개에 우선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구(龜)공자.. 부패한 한림
학사원(翰林學士院)을 대신해 연환서숙(捐幻書塾)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노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무슨 중요한 말을 꺼낼까..? 귀 귀울이며 듣고 있는 그들을 향해 공주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렇듯 두분의 협심(俠心:의로운 마음)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협심을 믿어 제가 두분께
부탁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어떤 부탁을 말씀 이신지..?」
서문인걸(西門仁杰)이 공주에게 되물었다.
「지금 조정은 권력은 병권(兵權)을 손에 쥔 추밀원(樞密院)의 수장인 조평환(趙平換)의 손에
놀아나고 있으며 그의 휘하에 있는 황성사(皇城司)의 밀부(密部) 혈잠령(血潛領)이 악랄하게
백성들을 핍박(逼迫:심히 억압하여 괴롭힘)하고 있습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일이지요.」
「또한 혈잠령(血潛領)을 앞세워 강호의 세력조차도 손아귀에 넣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
도 얼마전 탐지를 했습니다.」
상관명이 싱긋 웃고 있었다.
혈잠령두(血潛領頭) 유극관(劉克官)이 숭정방(崇正邦)의 방주(邦主) 맹우량(孟宇亮)을 협박하
며 높은 관직을 준다고 회유를 하는 것을 자신도 보지 않았던가..!
「어허, 강호무림까지 장악해 조야(朝野:조정과 재야)를 몽땅 손아귀에 틀어쥘 작정 이로군.」
서문인걸(西門仁杰)의 혼자말 이었다.
이제 밀담이 오가기 시작한 이 중요한 자리에 꼼짝도 않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상관명
의 존재가 부담스러워진 화령(華怜)이 서문인걸(西門仁杰)에게 눈짓으로 상관명을 어떻게 할
까 물었다.
서문인걸(西門仁杰)이 고개를 끄득여 알아들었다는 표현을 하며 상관명이 앉아있는 모습을 흘
낏 쳐다보고는 구(龜)에게 말했다.
「저.. 구(龜)공자, 공자의 주군께서 밖으로 나가서 이 방의 주변을 좀 살펴주시면 이야기를
나누기가 수월하겠습니다만..!」
상관명에게 밀담의 내용을 알리기가 싫어 경계를 부탁한다는 핑계로 밖으로 내 보내려는 서문
인걸의 말에 구(龜)가 당황해 하며 상관명 돌아보았다.
그러나 상관명은 내색도 않고 못들은 척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와같은 말을 듣는다면 히히 웃으며 두말없이 자리를 비켜날 주군(主君)이 아니던가..!
허나.. 지금은 모른 척 미동도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자혜공주(慈惠公主)가 입을 열었다.
「그냥 계시지요. 구(龜)공자의 주군이라면 분명 오늘의 의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혜공주(慈惠公主)의 마음속에 상관명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하고픈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허허.. 공주님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서문인걸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공주의 제안을 듣기위해 재촉을 했다.
「그건 그렇고.. 공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 서문대인.. 지금과 같은 상황에 이르러 저의 힘으로 불의를 타파하고 황권(皇權)을 지
켜, 나라의 안위(安危:안전함과 위태로움)를 도모 하기에는 너무나 저의 세력이 미약 합니다.
이 시기에 서문대인과 같은 강직한 인물의 도움을 받는다면 천군만마(天軍萬馬) 얻는 것 보다
더욱 큰 우군(友軍)을 맞이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허허.. 공주께서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굳이 도움이라기 보다.. 저들은 이미 조정을 장악했고 강호의 제일문파인 숭정방(崇正邦)까
지 복속(服屬:복종시켜 휘하에 둠)을 시켰으니, 서문대인과 구(龜)공자 같은 의인(義人)이 저
와 힘을 합하면 저들을 대적하기가 훨씬 수월하리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자혜공주(慈惠公主)의 말을 듣고있던 구(龜)는 슬며시 상관명을 바라보니 고개를 끄득이고 있
었다. 그러나 서문인걸(西門仁杰)은 대답없이 눈만 반짝이며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서문인걸이 입을 열었다.
「공주께서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목적이 오직 황권을 보호하려는 그것입니까..?」
갑작스런 서문인걸(西門仁杰)의 물음에 자혜공주(慈惠公主)가 당황해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 그것이 황권의 확립이라기 보다, 근본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이지요. 모리배를
몰아내고 조정이 안정이 되면 백성들이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이시라면 공주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구(龜)공자의 생각은 어떠시오..!」
백성을 위한다는 공주의 대답에 서문인걸이 구(龜)의 의견을 구했다.
「저는 별 이의(異意)가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리하지요. 그러나 공주님..! 대신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자혜공주(慈惠公主)가 서문인걸의 대답에 반색을 하며 말했다.
「두분께서 기꺼이 도움을 주시겠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그 조건이란 무엇인지요..?」
서문인걸(西門仁杰)이 매우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무릇 어느 조직이나 그 수장이 분명하지 못하면 오합지졸이 되기 마련입니다. 해서 만약에
서로힘을 합치게 된다면 공주님 휘하의 호위(護衛)들까지 저의 지휘를 받아 들인다면 제가 공
주님을 도울수 있을 것입니다.」
일사불란(一絲不亂)한 명령의 체계..!
서문인걸(西門仁杰)의 말은 분명 이치에 합당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공주까지 자신
의 휘하에 둘 수 있는 지휘권을 보장하라는 말이 아닌가..!
쉽게 대답을 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었다.
「그.. 그건..!」
공주가 대답을 머뭇거리는 그 순간,
자혜공주(慈惠公主)와 구(龜)의 머릿속에 조그만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공주님.. 서문대인의 조건은 잠시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며 즉답을 피하십시오..!)
(구(龜)야.. 서문대인에게 공주와 조력을 하겠다는 결정에 감사한다고 말하며, 그 의협(義俠)
을 존경하여 연환서숙(捐幻書塾)을 대인에게 맡긴다고 말하거라..!)
자신의 머릿속을 울리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의 소리에 깜짝놀란 자혜공주(慈惠公主)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순간에 입을 달싹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높은 공력을 가진 고인이 전음입밀(傳音入密)을 시전 한다고 해도 입술의 조그만 떨림
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허나 지금 이 실내에 앉아 있는 누구도 그 입가에는 가벼운 움직임 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누가 나에게 전음을 전(傳)한 것인가..?)
궁금증이 더해 다시 살피려는 순간 구(龜)가 상관명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오호, 머릿속의 생각을 타인의 머릿속에 그대로 전한다는 뇌정입밀(腦靜入密)의 전음(傳音),
주군(主君)이구나..! 그런데 무슨 이유로 갑자기 서숙(書塾)을 넘기라 하는 걸까..?)
그러나 구(龜)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서문인걸(西門仁杰)을 향해 말했다.
「서문대인.. 대인께서 나라를 위해 공주님을 도우시겠다는 큰마음에 탄복 했습니다. 저도 그
뜻에 보답하는 의미로 연환서숙(捐幻書塾)과 제가 가르치던 서숙의 제자들을 대인께 맡기겠습
니다. 아마 제가 가르친 서숙의 제자들도 제법 학식과 무공이 뛰어나 충분히 대인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화령(華怜)낭자는 한동안 그들을 보아왔으니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대인께
서 화령(華怜)낭자와 함께 서숙을 맡아 주십시오. 주군(主君)께서도 이 보람있는 일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뜬금 없는 구(龜)의 말에 서문인걸이 오히려 당황을 하며 상관명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상관명의 표정은 그 따위 일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구(龜)를 향해 고개를 끄득이고 있
었다.
(구(龜)공자와 그의 주군이라는 저 청년도 선뜻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 놓는데 나는 서문인걸
의 제안을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구(龜)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자혜공주(慈惠公主)가 마음속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있는 그
순간 또다시 조그만 소리가 머릿속을 울려왔다.
(공주님.. 구(龜)의 말에 개의치 말고 적당히 변명을 하여 답을 회피하십시오..!)
한번 더 실내를 둘러 본 자혜공주(慈惠公主)가 서문인걸(西門仁杰)에게 대답을 했다.
「서문대인.. 대인의 염려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물론 연합을 한 전력이 오합지졸이 되어서는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겠지요. 그러나 대인의 제안은 나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니 충분히 의
의논을 한 후 말씀 드리겠습니다.」
공주의 말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휘권을 넘기는 일을 그렇게 혼자서 쉬 대답 할일은 아닌 것. 허나 함께 도움을 바란 구(龜)
도 자신에게 모든 기득권을 맡긴다는 공언을 했느니 공주도 자신에게 지휘권을 넘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서문인걸(西門仁杰)의 마음에는 자신감과 여유가 가득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