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수정편 제 13 부
** 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수정편 제 13 부 ** [수정일. 2006 년 3 월.]
제 5 장. 보이지 않는 손 1.
비연선원(秘緣仙院)의 일층 접객실에는 강호협인(江湖俠人)들이 구름처럼 모여, 잔을 들어 술
을 나누며 미주가효(美酒佳肴:좋은 술과 안주)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의 틈사이로 비파를 손에든 여인이 육감적인 자태를 드러내며 천천히 들어 왔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아름다움을 지닌 비연선원(秘緣仙院)의 여주인.. 그녀가 천천히 다가오
자 모든 군웅(群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를 지르며 맞이하고 있었다.
「본 선원(仙院)을 찾아주신 시인문사(詩人文士) 그리고 강호협객(江湖俠客)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의 경연(競演)은 무공(武功)부터 시작 하겠습니다. 자신이 있으신 분은
누구든지 앞으로 나서서 경연에 참여를 하십시오.」
여인은 실내의 바닥에 한자정도 높여 만들어진 무대위에 올라서며 군웅들을 향해 옥을 굴리듯
낭랑한 목소리로 경연의 시작을 알렸다.
갑자기 실내가 소란스러워 지며 문무협객들이 여인을 향해 우루루 일어선다. 그들을 향해 여
인은 다짐하듯 당부를 했다.
「그러나 비무(比武)는 여러분들의 부상을 염려해 내공(內功)만의 겨룸으로 하겠습니다. 이
다섯개의 연꽂(蓮花) 노리개를 꽃잎하나 훼손하지 않고 거두어 오는 사람을 승자(勝者)로 삼
겠습니다. 그럼..!」
비연선원(秘緣仙院)의 여주인은 말을 마치자 머리에 꽂고 있던 연꽃 노리개를 뽑아 들고는 하
나씩 허공을 향해 날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인의 손에서 떠난 다섯개의 연꽂모양을 한 노리개 비연선원(秘緣仙院)의 실내를 빙글빙글
맴돌다 앞마당의 공중을 향해 날아 갔다.
휙.. 휙.. 실내의 군웅들이 마당을 향해 달려 나갔다.
노리개는 군웅들의 손에 잡힐듯 다가왔다 스르르 멀어지며 장중에 가득한 군웅들을 놀리듯
허공을 빙빙 돌고 있었다.
「에잇..!」
건장한 무사(武士) 한명이 신형을 허공으로 솟구쳐 연꽃노리개를 향해 손을 쭉 뻗었다.
그러나 노리개는 눈이라도 달린 듯 그 무사의 손 주위를 맴돌며 스스로 움직여 피해 나갔다.
「허허.. 이것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구나..!」
그 무사(武士)는 두손에 흡인공력(吸引功力)을 모아 손바닥을 쫘악.. 벌렸다.
「어윽..! 어이쿠..!」
손을 벌려 노리개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순간 뻗었던 팔을 감싸 않으며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터뜨렸다.
흡인력에 이끌려 손바닥 가까이 다가온 노리개를 막 잡으려는 순간 연꽂노리개에서 뻗어 나온
한줄기 잠력이 손바닥의 엄지와 검지 뼈가 만나는 지점인 호구혈(虎口穴)을 찔러 상반신(上半
身)이 저리고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허공을 날고있던 그 무사는 더 이상 견디지를 못해
신형은 땅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음.. 여인의 손을 떠난 노리개에는 여인의 공력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이기어검(以氣馭劍)
의 내공을 노리개에 응용을 하다니 저 여인의 무공이 과히 극을 이루었구나..!」
비연선원(秘緣仙院)의 한구석 자리에 앉아 열린 창문으로 마당을 내다보고 있던 상관명이 조
용히 입을 열었다.
「구(龜)아우.. 실내의 어느 누구도 저 노리개를 손에 쥘만한 인물은 없는 것 같구나..!」
구(龜)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득이며 싱긋 웃었다.
그 와중에 다시 여인의 목소리가 선원(仙院)의 군웅들을 향해 울려왔다.
「호호호.. 아무도 연꽃노리개를 취하지를 못했습니다. 더이상 나설 협객이 없으면 무공의 겨
룸은 이것으로 끝을 내겠습니다. 다음 순서는 시문(詩文)과 서화(書畵)를 논(論)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었으나 아무도 첫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였으니 오늘의 경연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
습니다.」
갑자기 비연선원(秘緣仙院)이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낭자.. 비록 첫관문은 통과하지 못했으나 그냥 멈추기는 너무 허망하외다. 다음의 순서를
계속이어가는 것이 어떨지요..?」
실내의 군웅들이 한결같이 재촉들을 하고 있었다. 여인의 입에 빙긋 미소가 떠올랐다.
「여러분 모두가 원하고 있으니 다음 장을 펼쳐 보겠습니다. 완(婉)아.. 지필묵((紙筆墨)을
가져오너라.」
홍의 궁장여인이 무대위로 달려와 휜 종이를 펼쳐 놓으며 여인의 곁에 단정히 앉아 천천히 벼
루에 먹을 갈았다.
비연선원(秘緣仙院)의 여주인은 큼직한 붓끝에 먹물을 듬뿍 묻혀 일필(一筆)로 그림을 그려가
기 시작했다.
한획 한획 화선지(畵宣紙)위에 붓이 지날 때 마다 여인의 입에서 시(詩)가 음율(音律)을 타고
낭랑히 울려 나왔다.
ㅡ 옛 동산에 버들잎 파릇파릇한데
봄 들어 부는 노래 더욱 서러워라
강 위엔 초승달 더욱 밝구나
지난 날 옛 궁터에 비치던 달이 ㅡ [ 이백(李白:이태백)의 시(詩)중 소대람고(蘇臺覽古) ]
넓게 펼쳐져 있는 하얀 종이위에 먹물이 스며들어 서서히 그림의 형태(形態)가 나타났다.
학(鶴)이었다.
고개를 뒤로 향해 먼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목을 빼 들고 있는 학(鶴)의 형상이 하얀 종이위
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학은 마치 살아 움직여 하늘을 향해 날아 오를 것만 같았다.
여인의 입에서 시의 음률이 끝남과 동시에 그림이 그려진 하얀 종이를 펼쳐든 여인은 군웅들
을 향해 말했다.
「누구든지 이 학(鶴)을 화선지에서 불러내어 날아 오를 수 있게, 그 짝을 이룰 그림을 그려
주시는 분이 계시면 제가 진 것입니다. 약조(約條:약속)한 바와 같이 저는 진심으로 그분을
모실 것입니다.」
그림속의 학(鶴)을 무슨 재주로 날아 오르게 만든단 말인가..! 장중의 군웅들이 또 다시 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상관명이 조용히 구(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구(龜)야..!」
「예.. 주군(主君)..!」
이심전심(以心傳心) 이었다.
비연선원(秘緣仙院)의 한쪽 구석자리에서 상관명이 슬쩍 구(龜)를 돌아 보았고 구(龜)는 알았
다는 듯 대답을 했다.
구(龜)가 손을 술잔에 넣어 손가락에 듬뿍 묻은 술로 탁자위에 그림을 그렸다.
순식간에 큼직한 거북 한마리가 그려 졌다.
손바닥을 들어 앞으로 휘익.. 밀어내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술로 그려진 거북이 여인이 있는 무대 앞으로 엄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한다.
동시에 한편의 시문(詩文)이 한가락 노랫소리에 실려 선원(仙院)안에 울려 퍼졌다.
ㅡ 난릉의 술은 바로 울금향이로구나
크나큰 옥배에 넘쳐 호박 같이 빛난다
다만 주인으로 하여금 손을 취케하라
어디가 타향인 줄도 알지 못하게 ㅡ [ 이백(李白:이태백)의 시(詩)중 객중행(客中行) ]
청아(淸雅)한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던 군웅들의 입에서는 경탄(驚歎:몹시 놀라 감탄함)의 소
리가 터져 나왔다.
「어어어.. 그림이 움직인다..!」
「저런.. 저럴 수가..! 거북이 기어간다..!」
「이런.. 술로 그린 거북이 살아 움직인다..!」
기이한 모습에 군웅들의 눈이 둥그렇게 커지며 모두 놀란 표정을 짖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
라보던 비연선원(秘緣仙院)의 여주인이 곁에 서있는 홍의 궁장여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완(婉)아.. 저 공자님을 아무도 모르게 후원의 별궁으로 모셔라..!」
* * * * * * * * * *
비연선원(秘緣仙院)의 후원 깊은 곳.. 은밀히 꾸며져 있는 별궁의 내실 앞에 안내되어 온 구
(龜)와 상관명이 그 내실의 문앞에 서 있었다.
「모시고 왔습니다.」
방안을 향해 고하자 고운 목소리가 들려 나왔다.
「어서 뫼시어라..!」
안으로 들려고 하자 홍의 궁장여인이 상관명의 앞을 막아선다.
「시자(侍者:귀인을 모시는 하인)는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당황한 구(龜)가 입을 열어 말을 하려 하자 상관명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고개를 끄득
여 빨리 들어가 만나 보라는 시늉을 했다.
방안으로 들어서니 조금전의 그 여인이 조신(操身)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공자님..! 이렇게 무례하게 모시게 된 것을 사죄드립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탁자 위에는 단촐하게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 여인은 술을 한잔 따르며 한동안 가만히 구(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허.. 소생의 얼굴에 무엇이 묻어 있습니까..?」
부끄러움에 얼굴이 발갛게 물들며 말하는 구(龜)의 말에 언뜻 정신을 차린 여인이 말했다.
「조금전 아랫층의 경연장에서 제가 읊은 시의 대귀(對句:짝을 맞춘 시의 글귀)를 잘 들었습
니다. 정말 유려하게 앞과 뒤가 어우러진 글귀였습니다.」
「어어.. 그 시(詩)는 제가 읊은 것이 아닌데..!」
무심고 내뱉는 구(龜)의 말에 칭찬을 아끼지 않던 여인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그.. 그럼.. 공자께서 거북의 그림을 그려 제게 보내지 않았습니까..?」
어리둥절.. 당혹(當惑)헤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림은 제가 그린 것이 맞습니다. 허나 제게는 그림에 생명을 불어 넣을 재주는 없지요..!」
「헉.. 그렇다면 어찌 그 그림이 살아 움직이 듯 제게 다가올 수 있었는지..?」
구(龜)의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떠오른다.
학(鶴)의 그림을 그려 보여준 이 여인의 정체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하하.. 술로 그린 거북에게 원영(元孀)의 공력을 불어넣어 움직이게 하신 분은 지금 문밖
에 외로이 서 계시지요..!」
「뭐.. 뭐라고요..!」
놀란 토끼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달려 나가 두손으로 문을 활짝 열었다.
그 순간 문밖에 서 있던 서생이 활짝 펼쳐진 옥선(玉扇)을 손에 들고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평범해 보이던 백면서생(白面書生)이 어느새 헌헌미장부(軒軒美丈夫)로 변해 있었다.
그 미장부(美丈夫)는 방안으로 들어 서자 부채를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무극무흔결(無極無痕訣)의 구결을 외우며 덩실 덩실 무극연환무(無極捐幻舞)의 춤을 추고 있
는 것이었다.
ㅡ 마음도 없고 생각도 없으니
나도 없고 너도 없구나.
그림자도 흔적도 남기지 않을때
무(無)의 극(極)을 깨달을 것이다. ㅡ
여인이 얼른 앞으로 다가와 그와 마주하며 함께 어우러져 노래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ㅡ 마음도 없고 생각도 없으니 나도 없고 너도 없구나.
그림자도 흔적도 남기지 않을 때 무의 극을 깨달을진대
기다림에 지쳐 부르는 이 노래를 들어줄 이 그 누구인가 ㅡ
춤이 끝나자 여인이 상관명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오랜 세월 기다려온 천궁(天宮)의 제자 학련(鶴蓮)이 궁주(宮主)님을 뵈옵니다.」
상관명은 손을 내밀어 여인을 어깨를 붙잡아 일으키며 격정이 가득 담긴 어조로 말을 했다.
「그대와의 인연을 나도 알고 있었소..! 그대의 모습이 천궁(天宮)에서 본 그 모습과 너무나
닮아 금방 알아볼 수 있었지요. 여기 구(龜)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을 겁니다.」
「미리 알고 영접을 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완(婉)이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니 완(婉)
아가 아니라 제가 미흡한 탓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완(婉)아.. 어서 궁주(宮主)님께 인사
를 올려라..!」」
학련(鶴蓮)이,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홍의여인을 질책하며 더욱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하하하.. 그러게..! 앞으로는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지 않도록 단단히 교육 시키시오. 자자..
일어나시오. 자리에 앉읍시다.」
* * * * * * * * * *
비연선원(秘緣仙院)의 후원 별궁(別宮)의 내실..!
상관명을 정면의 상좌(上座:가장 높은 사람이 앉는 자리:상석)로 안내를 하는 학련(鶴蓮)을
보며 상관명이 웃을띤 얼굴로 말했다.
「구(龜)야.. 이리 오너라. 그리고 학련(鶴蓮)낭자..! 이쪽으로 와서 편히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학련(鶴蓮)이 말없이 다가오는 구(龜)에게 눈을 흘키며 말한다.
「안됩니다 주군(主君), 주군께서는 천궁(天宮)의 지엄한 궁주(宮主)이며 우리는 한낱 천궁의
제자이며 주군을 모시는 수하일 뿐입니다. 어서 상석으로 오르십시오..!」
「하하하하.. 구(龜)를 처음 만났을 때 처럼 어찌 두사람의 말은 그리도 똑 같은가..? 수천년
을 이어온 천궁(天宮)의 가족에게 지위(地位)가 무엇이며 신분(身分)의 고하(高下)가 어디에
있겠는가..! 같은 개봉(開封)의 하늘아래 살고 있으면서도 이 긴세월 서로를 모르고 지내다
이제야 겨우 만난 것도 억울한 일이거늘..!」
「주.. 주군(主君)..!」
「모두 이리로 오시오. 완(婉)낭자도 서있지만 말고 이리 와서 가까이 와서 앉으시오. 이렇듯
오랜세월을 기다려 만나게 된 천궁의 식구들 이외다. 어렵게 만나 가족을 이루었으니 이제 우
린 모두가 형제들 입니다. 구(龜)야 알겠느냐..! 그렇지.. 학련(鶴蓮)낭자가 스무 다섯의 나
이라 하니 누님이 되겠구먼..! 그렇다면 완(婉)아는 막내가 되는건가..?」
「주.. 주군(主君).. 안됩니다.. 그리 하시면..!」
상관명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 오르며 그 입에서 격정(激情)을 억누르듯 나즈막한 목소리
가 흘러 나왔다.
「천궁의 궁주(宮主)가 명(命)한다. 천궁(天宮)의 제자는 모두 들어라..!」
모두 달려와 상관명의 앞에 부복을 했다.
「우리는 모두 형제라는 것을 천궁의 궁주(宮主)인 내가 결정을 했고 천궁의 제자들에게 명
(命)을 하달(下達) 한다. 나의 명은 천궁의 법도(法道)일진데 또 다시 이의(異意:다른 의견)
를 제기할 시에는 천궁의 법(天宮之法)으로 다스리겠다. 나와 천궁(天宮)의 제자들은 모두 형
제자매(兄第姉妹)의 연(緣)을 맺을 것이다. 알겠느냐..!」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그 말속에 위엄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예.. 궁주(宮主)님, 제자들은 마음 깊이 명(命)을 받들겠습니다.」
구(龜)와 학련(鶴蓮) 그리고 완(婉)아까지 그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상관명의 앞에 깊이 고개
를 숙였다.
* * * * * * * * * *
「학련(鶴蓮)누님.. 며칠후 이곳에 은밀한 자리를 마련하라는 예약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호위무사인 광진(光振)이 한 말을 떠 올려 물어 보았다.
「주군(主君)께서 그 일을 어찌 아십니까..?」
「하하.. 구(龜)도 그 자리에 초대 받았습니다.」
「호호.. 어찌 주군이 아닌 구(龜)가..?」
「하하하.. 사정이 그리 되었습니다. 초대를 한 그 어느 분이 나와는 의논할 상대가 되지 않
는다고 합니다.」
이미 완(婉)아가 한번 저지른 실수가 아닌가..! 학련(鶴蓮)은 어찌된 사정인지 알겠다는 듯
겸연적은 웃음을 흘렸다.
「공주의 호위 광진(光振)이란 무인(武人)이 얼마전 황성사(皇城司)의 밀부(密部)인 혈잠령
(血潛領)의 영두(領頭)인 유극관(劉克官)과 서문인걸이 만나서 담판을 하는 모습을 정탐하고
간적이 있습니다. 그 직후 광진(光振)이 연환서숙(捐幻書塾)으로 찾아와 구(龜)와 만난 것이
지요.」
「호호.. 구(龜)를 주군(主君)으로 오인(誤認:잘못 보거나 잘못 생각함)을 한 것이구나..!」
이미 한가족이 되었다는 친밀함에 들떠있던 학련(鶴蓮)이 웃음띤 얼굴로 구(龜)를 바라보며
놀리고 있었다.
「내 짐작으로는 공주가 서문인걸의 뒤를 밟게 한 것은 서문인걸의 처신을 살피려 한 것일 겁
니다. 즉 서문인걸의 강호 행적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이 어느쪽에 기울어 있는가는
미처 알 수 없었던 것이었겠지요. 광진(光振)에게 뒤를 추적하여 행적을 살핀 후 조정에 협조
를 하지 않는 단호한 모습을 보고 도움을 청할 마음이 들어 회합을 마련했을 것입니다. 그 말
을 전하려던 자리가 마침 연환서숙 이었기에 서문인걸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고 서숙의 주인인
구(龜)에게 말을 전하며 함께 초대를 한 것이겠지요. 아마 공주는 서문인걸에게 자신의 입장
에 서 달라는 부탁을 것입니다. 그러나..!」
학련(鶴蓮)을 향해 설명을 하는 상관명의 말을 가벼운 마음으로 웃으며 듣고 있던 얼굴들이
갑자기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구(龜)와 학련(鶴蓮) 두사람은 며칠 후 그들과 마주하면 서문인걸(西門仁杰)의
속내를 면밀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 어른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광명정대(光明正大)함이
분명하나 그의 감춰진 눈빛을 보면 아마 깊은 계략을 숨기고 있을 듯 합니다.」
상관명의 말을 듣고있던 구(龜)는 혹시나 연환서숙(捐幻書塾)을 찾아왔던 서문인걸의 부녀와
친분을 쌓았던 일이 혹시 무슨 잘못된 행위는 아니었던가 얼굴에 당황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주군(主君).. 제가 서문대인을 자주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그 어른의 마음속에 사심(私心)
이 있는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서 어떤 음모의 낌새를 느끼셨는지..?」
구(龜)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은 짐작일 뿐이다. 다행히 오래전 나도 서문대인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비록 어릴 때
이기는 하였으나 그때도 그의 속내는 짐작조차 하지 못 할 만큼 깊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리
고 얼마 전 혈잠령두(血潛領頭)와 서문대인이 대좌(對坐: 마주 앉음)를 해 밀담을 나누는 자
리에 나도 곁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유극관(劉克官)의 제안을 당당하게
거절하는 서문대인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유극관(劉克官)의 제안에 대해 가부
(可否)를 분명하게 답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지켜 가겠다고만 한 대답이 자꾸만 마
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상관명이 구(龜)를 바라보며 하는 말을 구(龜)와 학련(鶴蓮) 그리고 완(婉)이 심각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