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단편<2>
“아프진 않았어요. ... 그냥 챙피해요.”
오징어를 가늘게 찢어주며 숙인 고개를 여전히 들지 않은 채 그녀는 말했다.
오징어라도 없으면 어쨌을까 싶을 정도로 어색한 침묵이 거실을 휘감아돌고 있었다. 침대와 테이블 사이에 있는 거울로 그녀의 등과 어깨가 보였다. 의자에 앉아 엉덩이는 다 보이지 않았지만 제법 붉은 슬리퍼 자국이 비쳐 보였다.
난 맥주의 거품을 입술로 가만가만 씹었다. 간지럽게 부서지는 맥주의 거품을 입술과 혀로 핥다보면 묘하게 에로틱한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도 생맥주집이었다.
“새우튀김하고 쏘세지롤 하나 주문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때 이른 캐롤과 어설프지만 구색은 갖춘 크리스마스 트리가 카운터 바로 옆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12시가 거의 되가는 늦은 손님들이지만 생맥주집의 알바생치곤 밝은 표정과 힘찬 목소리로 주문을 받았다. 뒤돌아서며 싱긋 웃는 것을 잊지 않았던 그녀는 주문표를 내 앞에 놓으며 한번 눈을 마주쳤다. 특별히 예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미운 구석도 없는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곧 다섯 개나 되는 커다란 컵과 안주 접시 두 개를 한 번에 가져온 그녀는 이번에도 내 앞에 먼저 늘어놓았다.
“아가씨, 왜 자꾸 맛있는 거 거기만 놔요? 그 친구 맘에 들어요?”
짖궂은 농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녀는 그저 소리없이 웃기만 하고 나 역시 별 말 없이 앉아있었다.
실없는 농이 끝나고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던 친구가 일어나면서 슬슬 술자리도 끝나갔다. 공연히 차별대우 받았다고 우기며 계산서를 내게 맡기는 친구들에 떠밀려 술값을 내고 나서는 내게 그녀는 잊지않고 방긋 웃으며 안녕히 가란 인사를 했다.
다음날 혼자 그 호프집을 찾은 것은 그녀의 웃음때문이었음이 분명했다.
생맥주 한 잔과 어제처럼 새우튀김을 주문해 놓고 한참동안 마시다 조용히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또 오라는 그녀의 인사가 귀에 계속 맴돌았고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이 설레이는 것을 느끼며 빙그레 웃음이 이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다음날 다시 한 번 호프집을 찾았을 때 그녀는 본격적으로 아는 척 해주었으면 하는 내 기대에서 어긋나지 않았다. 주문 받고 나서도 두어 마디 내게 또 오셨네요 또 혼자시네요 하는 등 반쯤은 사무적으로 반쯤은 친근감을 표현하려는 듯 인사를 더 했다. 별 대답 없이 웃어주며 “보고 싶어서 왔지요.” 라고 하자 싫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고맙습니다라고 하며 주문을 받아갔다.
다음날은 하루 종일 호프집을 찾아가야할지 고민하며 보냈다.
“미애, 기억나나? 우리 처음 맥주 마시던 때?”
“당연하죠. 어떻게 잊어요?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1년 쫌 넘었는데.”
“그래. 난 그때 미애가 선뜻 다른 호프집에 같이 가 준 게 놀랍기도 했어.”
“저도 그래요. 맥주집에 온 손님이 다른 맥주집가자는 건 정말 웃겼어요. 왜 그 때 그게 그렇게 터프해 보였을까요”
“흠.. 미애 입술에 묻었던 맥주 거품이 생각나는군. 다시 맛보고 싶어.”
“또요? 호홋. 거품이 맛있어요, 아님 입술이 맛있어요?”
“둘 다 맛있는 술이지.”
“그래도 입술이 더 맛있잖아요?”
“그럼. 그야 물론이고. 다시 한번 맛보여줘.”
고개를 숙이고 오징어를 찢어대던 그녀는 금새 밝은 표정이 되었다. 새 잔에 맥주를 따라 마시는둥 입술에 잠시 대고 있다가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입술 위에 맥주 거품이 예쁘게 묻어 있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거품이 꺼질세라 그녀의 입술에 가만히 내 입술을 대었다. 입술과 혀 끝에 다소 싱거운 거품을 느끼며 그녀의 콧김을 함께 들이마셨다. 가만히 가슴을 내밀어 내 가슴에 닿게 하며 그녀는 약간 더듬으며 속삭였다.
“다시 때려줘 볼래요?”
그녀의 눈밑에서부터 볼 전체가 발그레해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에게 처음 스팽킹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첫키스를 한 직후였다. 꽤 놀란듯한 표정의 그녀에게 스팽킹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이제 그만 만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첫 스팽킹을 한 후 우리 관계를 확실히 하려면 그녀가 내게 먼저 스팽킹을 해 달라 말해야 한다고 다짐했었다.
첫 스팽킹은 내 차안에서 이루어졌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게 시작했고 어이없이 끝났었다. 그날은 장미축제가 한창인 용인의 에버랜드에 놀러갔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