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V #7
...솔직히 아무리 지니라 해도 이 정도로 기뻐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도 더....심했다.
지니는 고물 폴라로이드를 받고 침대에서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마치 여섯 살짜리 꼬마 여자아이가 크리스마스 날 산타에게 선물 받은 것 같은 듯한 반응이다. 조금의 가식도 느껴지지 않는 정말로 좋,아,죽,겠,다,는, 그런 느낌.
"저기, 저기, 유진! 이걸로 유진 그림 만들어봐도 돼요? 네? 네?"
당연히 되지. 그렇고 말고.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이, 그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그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이, 그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난 그 날 지니의 행복에 가득한 표정과 눈빛, 행동, 들뜬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 속 깊이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이 여자를 얼마나 짧은 시간만에 사랑하게 되어버렸는지, 과연 내가 이제 이 여자 없이 살 수 있을지, 지니로부터 전해져오는 순수한 행복 속에서 난 섬칫한 불안감을....그때는 전혀 몰랐다. 내 앞의 지니를 보고 있는 그 순간에는.
폴라로이드를 눈에 갖다대고 구도를 잡는 지니. 세로로도 세워보고 뒤로도 물러났다,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왔다가. 단 한 장을 찍으면서도 온갖 난리는 혼자 다 쳐댄다. 뒤로 물러나려다 보기좋게 침대에서 굴러떨어지지 않았다면 그건 지니가 아니겠지?
바닥에 발라당 나가 떨어지면서도 절대로 폴라로이드는 손에서 놓지 않는 지니. 등부터 와당탕 바닥에 부딪히는 와중에도 손을 하늘 높이 번쩍들고 내 선물을 기어이 지켜낸다. 저렇게 떨어지면 아플텐데...
"헤헤, 바보같은 지니지만 유진 선물은 하나도 안 다쳤대~요~"
윙크하면서 씩씩하게 손가락으로 브이~하는 지니.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는 사랑스러운 여자다. 게다가 그렇게 발라당 누워 다리를 쫙 벌리고 있으니...까.. 핑크색의 예쁜 보지가 활짝 벌어져 그대로 시선에....헉! 위험하다! 또 발기라도 하면 그땐!
...바지로 가리고 있어서 다행. ...이럴땐 구구단을 외우는 거였던가...이이는 사, 이팔에 십육, 이구 이십...아니아니, 이단에서부터 틀리면 어쩌란 말야...
다행히(?) 내 발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지니가 다시 사진기로 나를 겨냥(?)하고 다시 셔터찬스를 노린다. 지니의 예쁜 보지를 사고로 훔쳐보고(?) 잔뜩 흥분해 굳어있는 내 얼굴이 맘에 안들었는지 지니가 뾰루뚱한 얼굴로 내게 말한다. 그건 그렇고 밤새, 또 오늘 아침에 그렇게 볼거 안볼거 다 봐놓고는 살짝 보지 좀 보였다고 이렇게 흥분하는 나는, 대체 어떻게 된 놈인거야? 무슨 여드름투성이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유진 표정이 별로 안 예뻐요. 아, 그렇지, 여기 보고 김치~해봐요. 김치~"
김치? 그건 무슨 말이지? 보통 치즈~라고 하지 않나?
"김치는 무슨 말이야?"
지니도 스스로 말해놓고 의아한 표정이다. 또 고개를 갸웃.
"헤헤, 지니도 몰라요. 아무튼 웃~어~요~"
내가 다 지니가 무의식중에 내뱉는 정체불명의 언어에 호기심이 한가득인데 막상 당사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군. 단순함은 이래서 좋은거라지.
내 억지웃음에 지니가 셔터를 누르고, 이어서 번쩍이는 플래쉬. 곧이어 폴라로이드에서 사진이 뽑아져나온다. 누구나 다 아는 신기할것 하나 없는 이런 거에 지니는 놀라고 신기해 어쩔줄 몰라한다. 정말 폴라로이드를 처음 보는 것같다.
"와~와~ 나온다, 나온다!"
하지만 막 뽑아져 나온 폴라로이드 사진은 아직 까말뿐이다. 지니는 그래도 전혀 실망하지 않고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뭔가가 나타나길 손을 꼽아 기다린다. 기대로 가득한 눈빛. 보는 내가 다 행복해진다. 흥분한 지니의 엉덩이가 계속 들썩인다. 이윽고 사진에 선명한 내 모습이 나타났다.
"와~와~"
지니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면서 내 사진을 신기한 듯이 쳐다본다. 교대로 내 얼굴도 바라보면서.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내게 묻는다.
"이거, 유진 그림, 이거 지니가 가져도 되요?"
"당연하지. 그거 이제 지니꺼잖아. 지니꺼에서 나온거니까 지니꺼지."
"와~와~"
해맑게 웃으면서 아까부터 계속 와~와~밖에 할 줄 모른다. 고작 이딴게 그렇게도 좋을까. 그때 진짜로 뭔가 제대로 근사하고 비싼 선물을, 언젠가 지니에게 꼭 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약혼녀에게도 이렇게 강렬하게 뭔가 선물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분명히 내가 뭔가에 씌인게지. 분명히.
"이번엔 유진이 지니 그림 만들어줘요. 네? 네?"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내게 사진기를 내미는 지니. 난 사진기를 받아 파인더를 통해 지니를 쳐다보았다. 날 쳐다보면서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의 지니, 그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난 충동적으로 셔터를 눌러버렸다. 터지는 플래쉬에 지니가 깜짝 놀랐다.
"앗! 지니 아직 준비도 안했는데."
뾰루퉁한 얼굴로 지니가 날 불만스럽게 쳐다봤다. 난 빙그레 웃으며 넉살좋게 대꾸했다.
"또 찍으면 되지,뭐. 난 방금 지니 표정이 제일 예쁜데."
"웅~그 말 후회할거예요. 지니가 무지 예쁜 포즈 잡아주겠어요. 잘 봐요!"
지니가 마치 전문 모델같은 몸짓과 표정으로 침대에 옆으로 누워 날 쳐다보며 내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내게 까닥까닥하며 색기가 잔뜩 어린 표정으로 나를 유혹한다. 셔츠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뽀얀 젖가슴, 짧은 셔츠아래로 길게 뻗은 다리. 그대로 플레이보이誌 커버에 실려도 충분할 정도다. 저절로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지니를 찍은 두 장의 사진은 이게 같은 인물을 찍은 사진이 맞나 의아할만큼 전혀 분위기가 달랐다. 처음 찍은 사진에서 지니는 베개를 껴안고 천장을 바라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얼핏 10대 소녀로 보이는 앳된 얼굴에 귀엽기 짝이 없는 표정. 반면에 두번째 사진은 고혹스럽기가 이를데 없었다. 중요한 부위는 절묘하게 다 가려져 있는데도, 아니 그래서 더 요염하기 짝이 없는 그 표정과 몸짓. 대체 이런 여자를 고작 싸구려창녀로 굴리는 그 미친 자식은 대가리에 뭐가 든거야? 이건 무조건 슈퍼모델감이라구, 제기랄.
...휴, 방금 지니가 떠났다. 자신을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2장을 선물이라며 내게 내밀면서 말이다. 이제 돌아가야할 시간이라면서 정말 떠나기 싫다는 표정을 하고 내 집을 나섰다. 물론 나도 지니를 이대로 보내지 않고 한평생 데리고 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키라는 녀석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런 겁없는 짓을 벌일 만큼 난 멍청한 녀석이 아니다. 분명히 놈은 지니같은 천사를 매춘부따위로 굴리는 멍청한 놈일지는 몰라도 그런만큼 아주 위험한 놈일거란 느낌이 들었다. 좀 전에 나에게 큰 실수를 했다고 혼자 오해하고 두려움에 벌벌 떨던 지니의 공포를 생각해보면 지니가 키를 무조건 따르고 사랑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뭔가 엄청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분명했다. 그래서 일단 지니를 돌려보내고 키의 주변을 탐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난 이미 지니를 사랑하고 있었다. 단 하룻밤만에, 그것도 고작 몸이나 파는 창녀를 나같은 녀석이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지만, 분명히 난 지니를 내 옆에 두고 늘 같이 있고 싶었다. 그저 그 녀가 내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지니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방문을 나섰다. 거듭 말하지만 나도 지니를 보내기 싫었다. 그러나 또 거듭 말하지만 지니를 그렇게 옭아매고 있는 괴물같은 포주 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무작정 지니를 놈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데리고 있는다는 건 지나치게 위험한 객기였다. 다시 한번 거듭 말하지만 난 그렇게 멍청한 녀석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애시당초 취재의 목적은 머나먼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그 후 일주일을 잡지사 일도 내팽개친채 키에 대해서 조사하고 다녔다. 사장의 잔소리가 듣기 따가웠던 건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난 일주일 내내 지니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뜻밖에 지니는 그후로 내 집에 찾아오지도, 연락 한번도 해오지 않았다. 분명히 그 순수한 눈빛으로 "좋아한다"(지니가 말하는 그 "좋아한다"는)고 말했던 지니가 말이다. 나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지니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저 내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철저하게 내가 원하는 모습을 연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같이 있던 꿈같은 그 날 내내 그녀는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지 않았던가. 내가 약혼녀를 잃고 사랑에 굶주렸다는걸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캐치하고 그런 연기를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심지어 나조차도 스스로 눈치채지 못한 내 감정을.
하지만 역시 말이 안되는 얘기였다. 실제로 그날 지니는 약속한 화대는 커녕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재산을 톡톡 털어서 내게 주고 갔다. 자기 몸을 팔아 번 돈까지 바치고 가는 창녀가 어디 있겠는가. 단순히 손님의 만족을 위해? 몸 팔아 돈을 버는 창녀가? 그건 도저히 논리적으로 맞질 않았다.
게다가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지니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니와의 시간이 꿈이 아니었다고 유일하게 증명하고 있는 이 사진이.
남은 가능성은 하나. 지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
실제로 일주일 내내 프레이저거리는 물론 다운타운 전체를 통째로 이잡듯 뒤졌는데도 지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키의 존재조차도. 지니같은 매춘부가 있다는 사실은 마치 소문처럼 몇몇 녀석들에게 퍼져있을 뿐이었다. 내 예상대로 지니는 거의 거리에 나선 적이 없었다. 이 곳에 온지 얼마 안되던가 진짜로 창녀가 된지 얼마 안된게 틀림없었다. 사실 그 정도의 미인이 거리에 나섰다면 소문이 LA전체까지 퍼졌을 것이다.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지니는 그만큼 굉장했다. 나말고 지니를 만난 몇몇 녀석들도 눈을 빛내며 지니 얘기를 했으니까. 뜻밖에 소문이 별로 안난 이유도 나와 비슷했다. 소문이 나서 다들 몰려드는걸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요 일주일간 지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 몸이 달아 죽으려 하고 있었다.
내 스스로 우쭐해지기도 했다. 놈들은 죄다 지니의 기가 막힌 섹스와 미모밖에 모르고 있었다. 화대마저 거절하고 심지어 자기 돈까지 내게 줬을정도로 지니와 내 사이에 있었던 정신적인 유대감을 맛본 녀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 외에는 지니의 진면목을 깨달은 녀석이 단 한명도 없었다니. 지니에게 팁으로 1천달러까지 준 놈도 있었다. 그러고도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는데 솔직히 이해는 갔다. 지니를 본 남자라면 다들 이해할 것이다.
아, 나 말고 유일하게 지니와 공짜로 한 녀석이 있었다. 그 재수없는 거지녀석 빌이었다. 게다가 유일하게 키를 아는 녀석이라 공들여서 계속 질문도 하고 닥달도 해봤지만 엄청나게 무서운 남자라고만 할 뿐 이 빌어먹을 알콜중독자 폐인 녀석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게 전혀 없었다. 심지어 지니가 얼마나 예쁜 여자인지, 얼마나 천사같은 여자인지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놈은 그저 공짜로 좆물을 뺄수있는 기회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결국 일 주일째 되던 날, 난 미쳐버릴 지경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밤에는 잠도 이룰수가 없었다. 10대 소년이 사춘기 첫사랑에 괴로워하는 모습 딱 그대로였다.
결국 한동안 끊었던 술의 힘을 빌 수 밖에 없었다. 약혼녀가 바람나서 도망갔을 때 이후로는 한번도 입에 댄 적이 없는 술이었는데. 결국 또 이렇게 다시 술독에 빠지는구나,라는 느낌. 여전히 원인은 여자문제였고.
집 근처의 싸구려 술집을 찾았다. 한동안 발길을 끊은터라 바텐더도 이미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있었고, 술친구 할만한 아는 작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지금 기분에 아는 놈이 있어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나 하진 않았겠지만.
한참 독한 위스키를 들이키고 있는데 내 옆에 웬 남자가 하나 와서 앉았다. 그리 키가 크지 않은 나보다도 작아보이는 체구의 남자. 별 생각 없이 힐끗 훔쳐본 남자는 동양인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주변에서 그리 쉽게 볼수없는 인종이다. 중국인인가? 인디언일지도 모르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던 남자는 잘 들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바텐더에게 술을 주문하더니 군인들이 입는 것같은 외투와 모자를 벗었다. 반팔 티셔츠만 입고 있는 남자의 상체는 그리 크지 않은 덩치와는 달리 군살이라곤 하나도 없는 근육질이었다. 내 왼팔 바로 옆에 놓인 그 동양인의 오른쪽 팔뚝은 언뜻 보기에도 강철같았다. 이런저런 흉터에 문신까지 잔뜩하고. 쉽게 보기 힘든 사람이라는 생각에 기자로서의 호기심이 들어 난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곁눈질로 훔쳐보기 시작했다. 빡빡 깎은 대머리에 쫙 찢어진 눈. 얼굴조차도 온통 근육으로 뒤덮인 이 남자의 오른쪽 눈을 크게 가로지르는 굵은 칼자국이 "나는 무서운 놈이야"라고 조용히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난 순간 찔끔해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이 동네가 아무리 험한 동네라지만 이 남자는 정도가 좀 심했다. 여긴 갱들이나 좀 설치고 다니는 민간인 지역이지 댁같은 괴수한테는 저기 아프리카 내전지역같은 전쟁터가 어울린다구.
그때 남자가 외국 액센트가 잔뜩 섞인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요새 지니와 내 뒤를 캐고 다닌다던데, 맞나? 미스터 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