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厚の野望 57
광협이 낙양으로 출분出奔 했다는 소식을 하루 늦게 접하자 신협은 즉시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실로 쓰이는 상방에는 긴 탁자가 있었고, 원래 가주가 앉는 상석 바로 옆에 마련된 의석에 상복을 입은 신협이 앉고 모 경진을 비롯한 장로들이 착석했다.
“낙양에 상주 노릇을 한다면 이곳에서 충분하지 않습니까?”
신협은 우회적으로 광협을 비난하며 불편한 심사를 숨기지 않았다. 장 야직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혀를 찼다.
“아무래도 제 2 상주 자리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습니다.”
광협은 상주 자리를 놓고 신협에게 아예 넘겨버렸다. 신협은 그가 패배를 선언하는 줄 알고 기꺼워했지만, 탈출한 것을 보니 네 밑에 들어 가줄까 보냐, 하는 심보임을 알게 되자 화가 치밀었다.
-외지인 주제에....
그에 비하면 자신은 전대 가주의 질녀 아들이다. 장자승계에 비추어보면 자신이야 말로 직계에 가깝지 않은가 말이다. 장로들이 지지하는 것도 그에 합당한 명분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광협 놈은 모른단 말인가.
“당장 데려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단혼도에 대한 해명도 들어야 할 것이고요.”
“그렇게 서두를 일이 아닙니다. 도리에 어긋나지만 분향소를 챙기겠다는 마음 또한 가주를 위한 것. 단혼도 문제는 천하문에 사자를 보냈고, 49제가 끝날 때 소환을 하고 그 때 어찌 나오는지 봐서 함께 손을 써도 늦지 않을 것 외다.”
모 경진은 그렇게 만류했다. 잡아오라는 쪽으로 기류가 흐르면, 장야직과 관일성이 왜 그 때 일처리를 제대로 안했느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었다. 중간에 놓아준 것으로 처리했지만 모 경진은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터치 당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러나 신협은 내막까지 알지는 못하고 큰 소리쳤다.
“수석장로님도 너무 무른 소리를 하시는군요.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해도 자격과 방법이 그르면 옳지 않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하지만 저희는 가주님이 아니라 장로입니다. 비록 서열상 공자님들과 동등하다해도, 광협님 또한 가주 후보이시라는 점에서는 위치가 틀리지요. 신협 공자님이 아직 정식 가주가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모 경진은 신협의 속을 긁으면서 그 분노의 대상을 광협 쪽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신협의 준수한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물론 심화心火 때문이었다.
“공자님은 탈상에 신경 쓰십시오. 광협 공자나 단혼도 같은 것 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모 경진의 타이름에 신협은 끙, 하는 신음을 삼켰다. 수석장로의 말대로 광협의 탈출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영호 세가에서 문상객이 온 것이다. 자신을 영호 운비라고 밝힌 청년은 문상 후, 동맹을 제안했다. 문상을 빌미로 결속을 재확인하거나 갱신하는 예는 있었지만 영호 가의 사자는 기존의 문상객들과 궤를 달리 했다. 양 집안이 대대로 앙숙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 자신과 광협도 가주를 따라 양 가문의 경계까지 가 대치한 적도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시절은 새 시절에 맞는 관계를 구축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적지에 쳐들어오고도 태연히 말하는 사자를 떠올리자, 신협은 주먹을 지그시 말았다. 나이 차도 별로 나지 않는 상대의 담대함이 자신을 깔보는 듯해서 언짢았기 때문이다.
“일단 49제가 끝날 때가지 답을 미루기로 했지만....굳이 맺어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늘의 적이 내일의 아군이 되고, 그 반대가 되는 것이 세상사가 아니겠는지요. 영호 가에서 동맹을 제의하는 것은 순수한 호의가 아닐 것입니다.”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오, 공자님의 혜안을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신협은 흠칫하다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우리를 방심시켜놓고 기습을 가하려는 수작이겠지요.”
모 경진은 과연, 하고 동조하듯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들었다. 속으로는 정저지와井底之蛙라 빗대어 비웃었지만.
“하지만 노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영호 가에서 가장 뼈저리게 미워하는 이가 누구일지....”
“우문 가 아니오?”
목숭유가 앞지르듯이 반문했다. 그제야 신협은 사자의 모호한 내막을 감 잡을 수 있었다. 몇 해 전 우문 천강이 영호 세가와 충돌했고,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기민한 대응으로 추가타를 입는 것은 피했지만 강호强豪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영호 가는 이렇게 생각 할 것이오. 우리가 전력을 기울인다면 우문 가 정도는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사방을 다져 놔야할 것이다. 그 방법에는 무력 시위가 있을 것이고, 아니면....”
“화의를 신청한다?”
“공자님의 통찰력은 노부도 못 당하겠군요. 신도 가의 홍복입니다.”
모 경진은 아부했다. 노골적이긴 해도 선풍도골과 같은 외양과 언동이 고급스럽게 격조를 더해주는 듯 했다. 신협은 약간 기분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받아들이는 쪽이 이득일까요?”
“아쉬운 것은 어디까지나 저쪽. 잘 교섭한다면 우리 체면도 세우면서 여러 대가를 받아낼 수 있겠지요. 또한 최악의 경우를 고려한다면, 응당 그리하는 편이 좋겠지요. 내홍을 처리하기 위해서 외환의 요인은 가급적 줄이는 것이 유리 할 터.”
광협이 낙양을 기반으로 항쟁할 경우가 최악이겠군, 경진의 속뜻을 해석한 신협은 첫 만남 이래로 자신의 발목을 매번 잡아가는 듯한 광협에 대한 미움을 증폭시켰다.
-두고 보아라. 가주는 내가 될 것이다!
대회의가 끝나고 49제는 무사히 진행되었다. 많은 무림 명사와 개봉의 유지들이 다녀가고 신협은 장로들의 도움을 받아 상주로서 본분을 다했다. 그 와중에 십협은 한 가지 불쾌한 소문을 들었는데, 낙양에 당도한 광협이 위패를 세워놓고 상주 역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빈소는 아니고 분향소지만 규모 면에서는 이곳 못지않다고 했다. 간단히 소환으로 처리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한 신협은 모 경진을 비롯한 장로들의 달램으로 가까스로 소환을 미루고 봉분하는 날까지 참기로 했다.
그동안 애도했던 망자를 보내며 산 자들이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대부분 잠들 준비하는 시각, 유일한 예외라면 개봉의 환락가였다. 청사홍등이 처마 아래 요요한 빛을 비추고 그 아래 거니는 군상들 사이에 호탕한 웃음과 간드러진 음성이 반주처럼 밤거리를 울렸다. 간간히 저자거리로 흘리는 악곡 또한 색흥을 돋우는 듯 했다. 그런 환락의 세계를 덕후는 조용히 거닐었다. 모 진성이 감시역으로 붙었다는 것을 알기에 그와 동반하여 기루에 들락날락한 것이다. 젊은 모 진성은 상중이라 처음에는 한 두 번 마다했지만 결국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덕후는 가급적 천하문과 접선이 있는 곳을 골랐다.
모 진성과 혹시 모를 장로들의 세작을 감안하여 천하문과 끈이 닿는 기녀들을 끼고 있었지만 같이 자지는 않았다. 새삼 도덕군자 흉내 내기라기보다는 섹스까지 정략(?)의 수단으로 꾸린 자의 이해득실에 따라서 였다. 풍류를 찾는다고 아무 여자나 껴안는다면, 마누라들에게 애써 구축해놓은 유대와 성적 환상에 금을 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파에 섞여 골목길로 스며든 덕후는 사방을 둘러본 후 겉옷을 뒤집어 입었다. 잠복에 편한 야행복으로 탈바꿈한 뒤, 양손으로 안면을 몇 차례 문지르자 냉막한 얼굴로 변했다. 대낮이라면 한 눈에 봐도 역용술을 했다는 티가 날 정도로 어설펐지만, 어둠 속에서는 저승사자의 그것처럼 박력이 있는 듯 했다. 골목의 후미진 곳, 쓰레기나 잡동사니를 처분하는 각문에 접근한 덕후는 문을 길게 두 번, 짧게 세 번 두드렸다.
그러자 잠깐 침묵 후 문이 살짝 열렸다. 임자는 허리가 구부정한 늙은이였다. 흑룡방을 뒤집을 때 잠깐 덕후를 도와주었던 주 노인이었다.
“경사에 있는 퇴물을 부를 정도니 어지간히 급했는가 봅니다.”
“만사 제치고 와!” 라고 급전을 보내놓고 기원에 심부름꾼으로 위장 취직(!) 하고 있으라는 것이니 젊은 놈이 노인네를 막 부려먹는다고 인상 쓸 법했다.
“이토록 짧은 기간에 위화감을 주지 않고 잠입할 수 있는 것은 주 노인이 아니면 누가 가능하겠소?”
덕후는 공치사로 하고 안내를 재촉했다. 보통 밤손님을 안내하기 위해서는 등롱을 들기 마련인데, 둘은 별빛에 의지해서 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후원을 거닐었다. 개봉 일대에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기원의 명성에 걸맞게 전각 하나당 상등기녀 한 명에게 마련된 것이었다. 만금을 가져다준다 해도 자격이 되지 않거나 본인이 거부한다면 아무나 들 수 없는 꿈의 낙원이었다.
인공호수와 가산 사이에 놓인 회랑과 전각을 유령처럼 지나가자 주 노인 발길이 멈췄다.
“저기가 곤륜원입니다.”
아주 낮은 소리로 주의를 준 후 주 노인은 척후로 먼저 뛰어들었다. 곤륜원의 기녀가 신도 세가로 종종 은밀히 불려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은 천하문 덕택이었다. 전신이 하오문에 두고 있는 천하문은 본거지인 남창뿐만 아니라 천하에 퍼진 하오문 계열을 요 3년 동안 꾸준히 흡수해가고 있었고, 그 성과로 기원에 일하고 있는 하오문도들 역시 천하문과 연계를 맺고 있었다.
덕후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자신이 알고 있는 은신술을 동원하여 곤륜원 안으로 잠입했다. 기녀의 시중을 드는 동녀와 어깨에 힘 좀 주는 삐끼-여기서는 경비 무사-들에게 들키지 않아야했다. 어릴 때부터 황궁 고수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잠행을 해야 했던지라 덕후의 은신술은 본신절기와 별도로 절정에 이르렀다. 주 노인과 함께 기원의 개략을 헤아린 후 덕후는 드문드문 난 관목에 의지하여 침실의 창가로 짐작되는 곳으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관목 밑에 엎드려 안력과 청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창문은 반쯤 열렸지만 내부 휘장 때문에 실루엣만 보이는 정도였다.
“...헉...헉!”
“으윽!”
훅훅, 하는 텁텁한 신음소리와 함께 갸르릉 거리는 미성. 한창 질펀한 정사중인 것 같았다.
-씁, 미연시처럼 스킵 기능은 없는 거냐?
호기심으로 좆이 팔딱 뛰는 중고딩이라면 모를까, 알건 다 아는 덕후에게는 성인광고 팝업창만큼이나 짜증났다. 일각이 흐른 후, 정사가 끝났는지 남녀의 실루엣이 보였다. 여자는 이곳 곤륜원의 임자이고, 남자는 영호 세가에서 사자로 왔다는 운비일 것이다. 청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탓에 대화를 얼추 유추할 수 있었다. 정분난 남녀 사이에 오가는 잡담이 차 한잔 마실 정도로 이어진 다음이었다.
“정말 아니오?”
“미쳤어요? 원수진 것도 아니고 제가 목숨을 여벌로 챙기고 다니는 것 같아요?”
“아아, 의심하는 건 아니오. 일이 워낙 공교롭게 돌아가서....”
“흥, 나이도 잊고 술김에 용을 쓰니 복상사한 거지. 내가 거기로 끌려가서 얼마나 닦달을 당했는지 생각만 하면...”
진저리치는 듯한 여자의 음성에 덕후는 천협의 사인을 유추하고 실소를 흘릴 뻔했다. 심장마비라더니 정확히는 복상사한 모양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이 심혈관계 질병이 순간적으로 악화되면 뇌출혈이나 심장마비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천협은 고령에다가 가주 후계로 십 년 가까이 심로心勞를 기울였을 것이고, 형욱과 만남으로 극적으로 풀었을 것이다. 만취한 상황에 더해 격렬한 정사를 한다면 급사할 확률은 있을 수 있다. 파정의 순간 골로 가는 것이 복상사의 예로 알려져 있지만, 덕후는 전생의 기억을 통해 의학 사례 중에서 몇 시간 더 지나서 죽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쯧쯧, 저 여자는 자기가 얼마나 운 좋은 줄 모르는군. 현장에서 바로 갔으면 가주의 명예를 위해서 입막음을 당했을 텐데.
사내도 덕후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타일렀다.
“현장에서 일이 벌어졌다면, 이 곤륜원에 이렇게 한가하게 불평은 못하겠지.”
“아이 참, 그런 끔찍한 소리는 말고 다시 해요. 밤은 아직 길어요.”
교태어린 웃음소리에 남자도 끌리는지 여자를 쓰러뜨렸다. 덕후는 또 스킵해야하나 짜증을 냈지만, 바로 2라운드로 들어가진 않았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물건을 비교하면 어때?”
“이쪽이 훨씬 낫죠. 빈 말이 아니에요. 그 노친네는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는 것 밖에 아는 재주가 없는 것 같으니까.”
“풍문에는 씨가 없다더니 신빙성 있는 것 같군.”
덕후는 머리를 굴렸다. 친자식이 없는 천협은 노년이 되어서도 여자를 가까이 했다. 그것은 여체의 탐닉이나 성욕보다는, 종의 보전을 못하는 자의 절망감에 따른 성욕의 분출일지도 몰랐다. 천협의 사망에 배후가 있을 것 같아서 탐지망을 깔아놓고, 찌가 움직여서 직접 왔는데 결국은 우연사로 판명 났다. 다시 달뜬 신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덕후는 주 노인에게 신호를 보내고 조용히 왔던 길을 되감아가 듯 그 장소를 벗어났다.
순식간에 곤륜원을 벗어난 둘은 처음 만났던 각문 옆에 있는 허름한 숙소로 향했다. 심부름꾼들이 쓰는 허름한 숙소였다. 안으로 들어간 주 노인은 곯아떨어진 이들 사이로 들어가 일일이 수혈을 짚고 코 밑에 몽혼약 가루를 뿌려 흡입시켰다. 반 각 정도 꼼꼼한 작업을 마치고 나서야 주 노인은 덕후를 구석으로 안내했다. 무릎을 맞댈 만큼 좁은 곳이었다.
-아쉽게도 자연사인 것 같군요.
음모를 이용할 여지가 사라져서 아쉽다는 뉘앙스다.
-하하, 끼워 맞추기에 따라 복상사로 유도할 수 있지 않겠소? 대저 사람이란 이런 시시한 사실事實보다는 취향에 맞는 음모론에 끌리는 측면이 있으니 말이오. 조금 양념을 뿌린들 어떻소.
-그걸 보통은 날조라고 합지요.
-어허, 차기 대권을 잡기 위해 혈안 된 정국에서 진실眞實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겠소?
그렇게 농을 던진 덕후는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듯 자세를 바로 하였다.
-굳이 노야를 수고롭게 한 것은 이 일에는 노야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었소. 살생부殺生簿를 만들어 주시오.
삶과 죽음을 기록하는 책이라는 말에 주 노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누구를 말씀 입니까?
-십천什天!
-....왕야께서는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었는지요?
주 노인은 헐헐 거리던 태도를 버렸다. 덕후는 이거 왜 이래? 하듯 씩 웃었다. 당금 천하에 정보 독점 면에서는 누가 1인자라고 묻는다면 이 부분에 한해서 덕후는 자신을 가리킬 것이다. 많이 양보해서 독점적 공급을 소유자들 - 가령 주 노인, 우희선, 십천의 수장 등등 - 과 덕후를 같은 카테고리에 놓을 수 있어도, 그 안에 따로 카스트 제도를 만들어야할 만큼 차이가 존재한다. 애당초 출발점 자체가 틀리기 때문이다.
간난아이 때부터 자극을 받아 뇌세포와 시냅스조차 세기의 천재에 버금 갈만큼 복잡하게 단련 된 데다가, 영호 세휘가 꾸민 모종의 프로젝트로 인해 외계外界의 정보를 강제로 전송 받아야했다. 그것은 주입식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경험과 인식까지 포함하는 총체적 사고를 포토그래프로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정밀하게 소화해야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이를 실현 가능하게 슈퍼컴퓨터 저리가라 할 수준으로 연산력까지 비례하여 증식해왔다. 전생의 기억과 인격을 지키고자하는 편집증세적 집착이 더해져 주변에 광증狂症으로 인지될 만큼 완전기억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환경적으로 왕야의 입장에서 정보를 닥치는 대로 모으고, 그것을 목적에 맞게 분석과 분류를 거듭한 덕분에, 게임 수치상으로 표현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가 천재라도 100인데 덕후 본인은 255를 찍는 마물이 된 것이다.
그 마물이 작정하고 배후를 탐문하겠다는 데 탐지 안 되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남경부에 왕부를 차린 뒤, 즉 고유결계에 가까울 만큼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기간, 3년 동안 섹파를 하면서 우희선과 주 노인의 배경을 역 추적했고 십천의 윤곽을 잡아냈다. 주 노인과 우 희선이 덕후의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은, 따로 정보요원 같은 것을 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방면에서 범인들의 행적을 통해, 산발적이고 단락적인 가십거리 수준들을 꾸준히 꼬아 순도 높은 정보를 추출해낸 것이다. 게다가 덕후가 있는 곳은 권력의 중추인 황실이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틀을 지니고 있으니 십천의 구성원이나 세부 명칭까지는 모른다. 그러나 윤곽과 목적의식 정도는 어렴풋이 감 잡을 수 있었다.
수면 밑의 오리발처럼 노가다 한 사연을 주 노인에게 그대로 전할 수 없으니 팔아먹을 이름을 내세웠다.
- 황상께 들었소. 아, 언질은 주셨소.
- 그렇습니까. 기대가 크셨던 모양이군요.
주 노인은 의혹을 느끼면서 덕후가 받은 파격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는 판단을 내렸다. 덕후는 적이 아니라 혈맹인 것도 크게 적용했다.
-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황실과 밀약을 맺지 않았습니까.
- 후후, 그게 황실이 진정으로 폐부에서 우러나서 한 것이라 믿소?
주 노인은 침묵으로 부정했다. 한참 만에 입을 연 것은 뜻밖이었다.
-왕야께서는 왕비까지 염두에 두십니까?
-와룡臥龍이 현주賢主로 하여금 초가집에 세 번 방문하게 만들 만큼, 큰 마노라께서는 양명揚名에 대해 각별한 마음씀을 가지고 있지.
덕후는 그렇게 선문답 같은 소리를 하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강동에는 그들의 세력이 미미하고, 있다 해도 큰 마노라의 영향권에 있으니 상관없지만.....중원은 틀리오. 아니, 앞으로가 다르겠지. 주 노인도 준비한 게 있으니 이 참에 확실히 파악해서 작성했으면 하오. 무척 지난한 일이 될 것이오.
주 노인은 차 한 잔이 간절해졌다. 이런 일이라면 덕후가 자신만 따로 호출할만했다. 그가 강호를 나온 이래, 속내를 종잡을 수 없었던 왕야의 심사를 알게 된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눈앞의 왕야 역시 주 씨의 일족이었다. 자기 외에는 남을 믿지 않고, 겉으로는 너그러운 듯 해도 속으로는 시기심이 가득한 주원장의 혈족 답게.
-나는 조만간 낙양으로 몸을 뺄 것이오. 그 동안 신협과 장로들 측을 잘 감시해주길 바라오.
-감시를 받고 있을 텐데요, 낙양으로 빼낼 수가 있습니까?
3년 동안 왕부에 처박혀 있으니 새로운 무공이라도 닦았는가 싶었으나, 덕후는 두고 보면 알 뿐이라는 대답으로 둘러대었다. 주 노인과 덕후는 향후 계획을 전음으로 합의한 뒤에 제각기 갈 길로 헤어졌다.
그로부터 이틀 뒤, 덕후는 진성을 통해 모 장로 앞으로 호출 받았다. 장소는 장로원의 객실이었다. 장소의 용도를 듣는 순간 덕후는 바로 이해했다. 손자의 친구로 대하겠다는 게 아니라 탐문하려는 것이겠지. 짐작을 뒷받침하듯 모 경진뿐만 아니라 장로 하나를 동반하고 나타섰다. 장로들 중에 키가 가장 작은 백삼동이다.
미리 와 있던 덕후가 자리에 일어나 읍을 하자 모 경진은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는 백삼동과 나란히 앉았다. 시비가 차를 내오고 물러가자 경진은 운을 떼었다.
“손주에게 이야기는 들었네. 새 보표를 원한다지?”
“단혼도 만큼 젊고 실력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중에 그만한 조건을 충족할 고수는 없네.”
경진은 무리한 주문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없으면 그 뭐냐, 인근에 명문 고수는 없습니까?”
“명문이라니?”
“예를 들면 구파일방 소속 말입니다.”
덕후의 질문이 뜻밖이었는지 모 경진은 신광이 번뜩일 정도로 덕후를 유심히 살폈다. 침 한 모금 삼킬 시간이 지나고서 모 경진은 말문을 열었다.
“그들은 수십 년 전에 무림에서 종적을 감추지 않았나? 봉문해서 외부와 교류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네만.”
“아, 부자 집은 망해도 삼년은 간다고, 은거한 고수 한 둘은 남아 있을 거 아닙니까. 원하는 건 얼마든지 들어 줄 테니 불러주세요.”
턱을 살짝 내밀면서 말하는 폼이 거만하기 그지없다. 모 경진은 관자놀이가 은근히 땡기는 듯 했다. 때와 장소는 달라도 어디선가 많이 본 기시감 마저 느껴졌다. 갓 부임한 현령이나 지부가 지위와 배경을 믿고 강짜 부릴 때와 같은 뉘앙스다.
“그들은 무도武道를 추구하기 때문에 세속의 영리에는 구애받지 않을 걸세.”
“먹고 싸는 건 같으면서 무슨.”
덕후는 작게 씨부렁거렸으나 고수인 모 경진에는 크게 들렸다. 울화가 치밀었다. 이 눈 앞의 공자는 첫인상과 달리 자신의 손주와 남자들을 기루에 돌려 타락시키고 있었다. 그도 남자고 손주가 젊은 혈기에 부나방을 찾듯 기루에 드나드는 것까지 뭐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주 상중에 흥청망청 놀아나는 작태는 웃음거리였다. 손주를 불러 한 마디 하려하자, 술이 덜 깬 표정으로 감시는 잘하고 있습니다, 라는 답을 들었을 때 수양이 깊다고 자부한 모 경진의 안에 무언가 뚝!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랫것들을 시켜 무력을 동반한 훈육을 시켜주고 싶었지만 전날 아문의 끈을 통해 덕후가 경사에 높은 관리 자제라는 것을 확인받았던 터라 물을 더 흐리기 전에 쫓아 보내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으음, 아무래도 어려운 것 같으니 양보하겠습니다. 꼭 젊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실력은 확실히 단혼도 분과 자웅을 결할 정도의 인물이어야 합니다.”
그만한 인물이라 해도 장로급은 붙여야한다는 소리. 경진의 시선이 백삼동에게 향하자 장본인은 인상을 팍 찌그렸다. 설마 자신을 저런 애송이 뒤치다꺼리 해주려고 부른 것이란 말인가? 모 경진은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흔들어보이고는 덕후를 달랬다.
“그도 어려울 것 같군. 상중의 일이 마무리되었다하나, 가주 즉위식과 여타 행사를 치러야하니 손이 많이 부족하네.”
“이 것도 안 된다, 저 것도 안 된다....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젊은 사람이 적반하장이 심하구먼!”
모 경진은 덕후의 억지에 더 이상 안되겠다는 듯 차갑게 일축했다. 덕후는 고개를 숙였다가 번쩍 들었다.
“제가 루저라서 그렇습니까?”
“무슨 소리인가?”
“제 키가 장로님보다 작아서? 7척(약 180cm) 이하면 인간도 아닙니까?”
어찌나 절절한 호소인지 백삼동 조차 정말 그런가, 하고 모 경진을 쳐다볼 정도였다.
“크흠! 키 이야기가 거기서 왜 나오는가? 아무튼 단혼도 만한 고수를 붙여주는 것은 어려우니....차라리 도로 데려가는 것은 어떤가?”
“네? 단혼도가 이 근방에 있습니까?”
덕후는 시침을 떼고 물었다. 겉보기에는 신주삼협을 끼고 기루에 탱자놀음하고 있으니 밖의 소식에 어두워도 이상함은 없을 것이다.
“그는 지금 낙양에 있네.”
“무슨 일로요?”
“그걸 노부가 알겠나? 신세진 사람이 본가 출신인데 그리로 용무가 있다 해서 따라간 듯 하이.”
“아, 그렇군요. 상중이 끝났으니 곧 돌아오겠지요.”
덕후는 크게 반색했다. 모 경진은 덕후를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이상한 점을 끝내 찾지 못했다. 그가 아무리 연륜 있고 눈썰미가 빼어나다해도 상대는 울고 웃는 것까지 하나하나 계산해야했던 황궁의 출신이다. 모 경진은 다른 안을 꺼내기로 했다.
“아마 이리로 안 올 걸세. 내 내세울 것은 없네만, 무림 선배로서 편지를 써 줄 테니 직접 데려가는 것은 어떻겠는가?”
“저더러 직접 낙양에 가라고요?”
“낙양에 가 계신 광협 공자를 모셔오기 위해 호위단을 보낼 걸세. 동행하는 동안은 신변은 매우 안전할 게야. 그뿐인가, 낙양의 풍물도 구경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지.”
덕후는 고민하는 듯 하다가 뾰족한 수가 없는지 응한다. 일정을 알려준 뒤 모 경진은 덕후를 내보냈다. 장로전으로 통하는 회랑을 같이 거닐던 침묵하던 백삼동이 제안했다.
“그걸로 충분할까요? 여차하면...”
목을 툭 치는 시늉을 한다. 그의 무공이 살문殺門의 비기 쪽을 이어받은지라 마음만 먹으면 쥐도 모르게 제거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모 경진은 고개를 조용히 저었다.
“순리에 따르세. 가서 단혼도를 데려가게 된다면 여차하면 광협의 힘이 될 무력을 떼어놓을 수 있게 되니 좋겠지. 아니라면 여기에 세작 질을 할 요인을 치울 수 있으니 좋고....최상은 불미스러운 일로 광협 공자가 책임지는 방향이 좋겠지만....그런 피라미는 적당한 기회가 되면 처리하고, 우선은 숲부터 보세나.”
백삼동은 수석 장로의 우선순위를 잊지 말자는 소리에 이견이 없었다.
49제가 마무리 되고 새 가주 취임식에 어울리는 길일을 택하기로 한 날, 낙양으로 떠난 광협 공자를 모셔오기 위한 호위무사 200여명이 아침 일찍 개봉을 떠났다. 그 안에는 수석장로의 편지를 품에 안은 덕후도 있었다.
덕후의 신장은 약 170대 후반. 그래도 루저.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