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厚の野望 59
초저녁 바람이 산등성이를 타고 평지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춘일장으로 부터 한 마장 거리를 두고 신협의 3천 무사들은 다섯 장로의 지휘 아래 반 포위망을 펼치고 있었다. 광협 측은 담장 쪽에 궁사와 암전에 능한 이들과 장창 같은 장거리 무기가 전문인 이들을 혼합하여 배치했다.
낮은 산기슭에 세워진 춘일장은 구조상 3천명이 우르르 달려가 포위하기는 미묘한 지형이었다. 남문 쪽에는 많은 수를 투입할 수 있으나, 나머지 삼문 방면은 담장 밖에 띠를 두른 것 마냥 면적이 좁았다. 1열은 투입할 수 있어도 남은 열은 비탈진 길에 서 있어야하고, 투사 무기만 아니라 통나무와 바위 같은 것을 굴린다면 낙하의 관성으로 피해가 컸다. 게다가 신협 측은 은밀하고 신속한 기동을 위해 담벽을 허물고 문을 파쇄 할 공성 물자가 없었다. 있다 해도 관부의 눈치가 보이니 대대적으로 동원할 수는 없겠지만.
건량으로 아침을 마칠 무렵, 문이 열리면서 백 명의 무사들이 질서정연하게 튀어나왔다. 선두에는 형욱과 광협이 서 있었다. 광협은 사자후처럼 쩌렁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여러 명사名士들께서 춘일장에 모이신 것은 어인 연유요?”
부동명왕공의 부작용(?) 때문에 성난 듯한 광협의 자태는 3천도 안중에 없는 듯, 태산 같은 위엄을 비치는 것 같았다.
“허허,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으니 가주께서 친히 오셨느니. 딴 뜻이 없다면 와서 이실직고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소?”
모 경진이 나섰다.
“이실직고라? 우리들을 힘 안들이고 쫓아내는 수작이 순리인가?”
“닥쳐라! 혁련 가에서 온 잡종 놈이! 이 몸이 직접 온 것은 적서구분을 바로 잡기 위해서다!”
신협이 참다 못 해 일갈했다. 잡종이라는 말에 광협의 미간에 핏줄이 꿈틀거렸다. 추이를 보던 모 경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한 번 어르고 달래볼 심산이었는데 젊은 가주가 되려 불을 붙여버렸다.
“누가 나가서 반도를 잡아오겠느냐?”
모 경진이 외치자 성질이 가장 급한 목숭유가 나섰다. 산적에 어울릴 법한 대감도를 어깨에 척 치켜들고 그 뒤를 호위단인 산군대山君隊 백 여 명이 패도를 뽑으며 나아갔다.
“한 수 견식 해 보리다!”
목숭유는 가장 강자인 단혼도를 노렸다. 거리가 이 장으로 좁혀졌을 때 도약했다. 후웅! 공기를 묵직하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도기가 맺힌 대감도는 태산도 쪼갤 듯했다. 단혼도도 피하지 않았다. 일대 일 대결도 아니고, 뒤에서 따라오는 산군대의 기세를 꺾어놓으려면 무리수를 각오해야 했다.
-꽈앙!
얇은 도와 대감도가 충돌한다면 전자가 부러지겠지만 검강을 끌어올린 터라 무사했다. 대신 양쪽 다 전신이 덜그럭 거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큽!”
콧속이 멍멍해지면서 비릿한 감각이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목숭유는 핏발이 선 눈으로 절기인 산왕도법을 전개했다. 형욱은 풍차와 같은 도세에 휩쓸려가 듯 몸을 날렸다. 자실행위 같지만 첫발로 미완성의 검강을 뽑아낸 대가로 기식을 고를 타이핑이 필요했다.
첫 일격과 다르게 형욱의 검은 흘려보내거나 튕기는 위주로 목숭유의 도격을 침착하게 해소했다. 정면충돌로 호호탕탕하게 몰고 오던 산왕대는 선봉이 막히자 일순 주춤했고,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광협이 부동명왕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전진했다. 그와 동시에 호위를 위한 무사들도 뒤따랐다. 만마를 앙복시키는 행보에 전의가 저도 모르게 고취 된 것이다.
“한 분 더 가시오! 광협 공자를 상대할 고수가 필요하오!”
밑에서 전세를 보던 모 경진이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일렀다. 이에 신협이 나서려하자 모 경진은 팔을 뻗으며 말렸다.
“난전이니 귀한 몸이 상처 입을까 염려 됩니다. 아랫것들을 시키지요.”
“으음...!”
신협이 망설이고 있는데 관일창이 창을 꼬나 쥐며 나섰다. 경신을 발휘해 사람 키를 훌쩍 넘어 밀리는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광협이 있었다. 관일창의 창이 쇠뇌에서 쏘아진 것처럼 파괴력을 담은 채 섬전처럼 쏘아져갔다. 난전이라는 특수 상황을 이용해 단숨에 죽일 심산이다. 예지가 발달한 광협은 창이 닿기도 전에 미간이 찌르듯이 아파왔고, 관일창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허리 아래는 부동을 유지한 채 광협은 소매의 고정끈을 풀렀다. 그의 소매는 선비들이 그것보다 한배 반은 크고 길었는데 허공을 향해 풍차처럼 휘두르자 순식간에 전신을 가리는 회전 방패가 만들어졌다.
관일창의 창극이 1/3 정도 전진하자 광협이 소매를 다시 떨쳤다. 회선수의 묘리를 담은 소매는 창대에 교묘하게 감았고, 빨랫감의 물기를 제거하는 것 마냥 돌돌 휘말려졌다. 이렇게 되자 아직 허공에 떠 있는 관일창의 몸이 회전력에 말려 빙글빙글 돌 판이었다. 급히 천근추의 수로 지면에 착지하며 창끝을 땅에 찍었다.
-파파파파팟!
양쪽에서 보내는 경력이 땅을 지점으로 충돌하자 땅이 파이며 흙먼지가 분분히 비산했다. 관일창은 아귀를 통해 전달되는 충격이 다소 진정되자 창을 퉁겨내 광협의 인형을 향해 그대로 중단 찌르기를 하였다. 그러나 광협은 땅에 충돌하는 순간 소매 부위를 뜯어냈는지 맨 살뚝을 드러내며 장중한 권격을 쏟아냈다. 소림의 나한권이었다.
근접전으로 찌르기를 한 덕분에 관일창은 당장 광협에게 중상을 집히지 못하고 창을 넓게 잡아 장술杖術을 변용하여 권격을 막거나 차단했다. 당장 백중세를 이루고 있는데 목숭유 쪽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악!”
관일창이 힐끗 보니 목숭유의 팔이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정면충돌을 하지 않고 흘리기로 일관하던 형욱이 순간적으로 검강으로 찍어 내린 탓이다. 어른이 아이를 후려치는 것처럼, 초식도 없이 내력의 우위로 분탕질을 쳐놓은 것이다. 한쪽 팔을 못 쓰게 된 목숭유는 형욱의 적이 되지 못했다.
“목 형을 돕겠소!”
목하에 있던 장야직이 나섰다. 목숭유의 허리를 깊게 베던 형욱은 마무리를 못하고 장야직의 환검을 상대해야 했다. 겨우 숨을 돌린 목숭유는 급히 어깨와 허리에 혈을 짚어 응급처방을 하고 노호성을 지르며 형욱을 상대해갔다.
해가 완전히 지고 캄캄해질 무렵, 춘일장에서 멀지 않는 곳에서 폭죽 더미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것처럼 화광이 충천하고 미약하게 땅이 흔들렸다. 신협 측이 깜짝 놀라는 사이, 단혼도가 진기를 담아 외쳤다.
“원군이 온다! 힘을 내라!”
원군이라는 말에 뒤엉켜 싸우던 신협 측은 움찔했고, 광협 측은 기세가 등등해졌다. 뒤통수를 맞을까봐, 마음이 딴 데 쏠리는 바람에 손발이 어지러워지는 이들이 부기지수였다. 어둠이 한 몫하여 아군이 3천이라는 대병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덕분에 광협이 퇴각! 퇴각! 하고 외침에도 적극적으로 쫓지 못했다. 더욱이 장로 하나의 팔을 분지르고 둘의 합공에도 꿋꿋이 대응하는 단혼도가 검강을 있는 대로 뽑아내 뒤를 끊으니 가까이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광협 측은 부상자까지 무사히 수습해 춘일장 안으로 들어가 굳게 문을 잠갔다. 한바탕 교전을 하던 신협측 선봉대는 바람맞은 꼴이 되었다. 어찌 부상자를 수습해서 내려와 장야직이 제 본 바를 모 경진에게 고했다.
원군이라는 보고에 모 경진은 성동격서를 우려했다. 일단 포위를 한 채 후위를 맡고 있는 백삼동에게 사람을 보냈다. 반 시진이 지나자 사자가 와서 보고하기를, 비밀 통로가 무너졌다고 하였다. 변고가 생기자 사방에 흩어져 감시하던 인원 200 명의 대부분 한 장소에 모였고, 그제야 백삼동은 교토삼굴, 다른 통로로 빠져나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른 곳을 급히 뒤지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쯧쯧, 백 장로가 속았군. 교토삼굴이 아니라 금선탈각이오.”
듣고 난 모 경진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참 숙고하다가 그리 말했다. 듣고 있던 신협이 궁금해 하며 물었다. 모 경진은 장로들의 주목을 받으며 한참 뜸을 들이다가 풀이해주었다.
“비밀통로를 요란하게 무너뜨린 것은 원군이 온다는 공성계요. 올 리 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창 격전에 주의가 팔리고 완전히 포위하고 있다는 자신감에 의혹이 생겨 깜빡 현혹당한 것이오.”
모 경진의 지적에 선봉에 싸웠던 세 장로의 얼굴에 분함과 부끄러움이 엉키었다.
“백 장로는 영민한 사람이니 폭파 현상에 수하들이 우르르 몰려오면, 주의를 한 곳에 집중시키는 책에 속았다는 생각이 들 것이오. 다른 통로로 몰래 빠져나가지 않았을까 하고 사방으로 수하들을 산개시켰을 것이오.”
“그럼 조만간 발각되지 않겠습니까?”
신협의 물음에 모 경진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듣자하니 광협 공자 곁에 지낭智囊이 있다던데 이도 계산에 넣지 않았겠소? 지금은 날이 어두워 면면들을 확인하기 힘들고, 미리 근방에 있는 수하 몇을 제압해서 옷을 입으면 간단하게 변할 수 있소. 한 장소에 우르르 모이면 구분하기가 용이하지 않고. 거기에 다른 통로를 찾느라고 넓게 분산시켜버리면 몰래 빠져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오. 춘일장 일대는 류 장로의 터전이고 밤낮의 구분은 아군과 달리 별로 장애가 아닐 터이니, 백 장로한테 사람을 보내 점고를 시키면 결번만큼 몇 명이 빠져 나갔나 알 수 있을 것이오.”
신협은 서둘러 사자에게 모 경진이 한 말을 그대로 전하라 보냈다. 백 삼동은 모경진의 말을 듣고 대경하여 수색을 중지하고 점고를 실시하니 세 명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원군이 온다 해도 시간에 맞추기는 어려울 것이오. 반도에게 식수와 양식이 많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 말이오.”
그렇게 혜안을 발휘한 모경진은 아군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렇게 수습했다. 다음 날, 담장 위로 백기가 올라오면서 문이 열렸다. 3천이 한결 같이 긴장된 눈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니 홑옷을 입은 세 명의 장정이 양 손에 찬합 같은 것을 들고 나왔다.
“아니, 저들은?”
장로들 중에 한 명이 알아보고는 손가락질을 하였다. 실종되었던 백삼동 휘하의 무사 셋이었던 것이다. 혈도가 제압되었는지 느리게 걸어온 이들은 곧장 신협과 장로들 앞에 와 무릎을 꿇었다. 신협이 채근하듯 사정을 캐내었다.
“어찌 된 일이냐?”
“순찰을 돌다가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의식을 잃었습니다. 깨어나 보니 황망하게 춘일장 안이더군요. 류 위범님이 오셔서 내일 아침에 바로 서신과 선물을 가지고 보낼 때 풀어준다고 하셨습니다.”
“안은 보았느냐?”
“눈과 귀를 가려서 자세히는 모릅니다.”
더 이상 아는 게 없어 보이자 주의는 찬합과 서신에 향했다. 찬합을 조심해서 열어보니 쌀밥과 반찬이 정갈히 담겨 있었다. 서신을 훑어 내리던 모 경진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신협에게 보였다. 신협은 읽다가 부르르 떨며 서신을 땅에 팽개치더니 찬합을 발로 걷어차며 성을 냈다.
“광협 이놈! 나를 우롱하다니!”
무슨 내용인지 궁금한 장로 하나가 신협의 눈치를 보며 구겨진 서신을 펼쳐보았다. 주변에 있던 장로들도 고개를 내밀어 같이 읽었다. 곧 장로들의 면상은 떫은 감을 씹은 듯 변했다. 장원에는 식량과 식수가 넉넉하니, 원한다면 한 달 정도 가주와 장로에게 하루 세 끼 식사를 대접해주겠다는 것이었다. 한 달은 버틸 수 있다는 의미였다.
“당장 쳐들어가야하지 않겠소?”
신협이 따지듯이 모 경진에게 제안했다. 수석장로는 고개를 슬며시 젓다가 중재하듯 말했다.
“가주님의 말씀도 옳지만...그래선 피해가 큽니다. 방법을 바꿔야겠습니다. 우리의 숫자가 적도의 대여섯 배는 되니까 편하게 쉬기보다는 번갈아 공격해서 최대한 진을 빼놓읍시다. 한 일주일 밤낮 없이 공세를 펼치다보면 지칠 것이니, 그때 가주님 의견대로 총공세에 나섭시다.”
모 경진은 내심 아쉬웠다. 무혈점령은 못해도 압도적인 승리를 노렸건만, 한 달이면 낙양에서 호응하러 올 수도 있다. 백삼동으로 하여금 낙양 방면의 정찰을 맡기고, 나머지 장로들은 순번을 뽑아 차륜전을 펼칠 계획을 구상했다.
한편, 모 경진의 예측대로 류 원종과 덕후, 세휘는 무사히 빠져나갔다. 몇 번 들킬 뻔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춘일장 일대를 노다녔던 류 원종이 길잡이를 해준 덕분에 요행이도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셋은 해가 뜨자 강탈했던 옷을 벗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화급을 다투는지라 셋은 아무 말 없이 경신법을 최대한 발휘하여 낙양으로 향했다. 중도에 덕후는 제 연기에 충실 한다고 씨부렁거렸으나, 류 원종이 참다못해 아혈을 짚고 저승사자 면상을 들이대며 협박을 하자 겁을 먹고 조용해졌다. 덕후의 경공이 가장 딸려 류 원종과 세휘는 번갈아 잡아주며 달려야만 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달린 끝에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때 셋은 낙양 성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둘이 가도 충분하겠는가?”
류 원종은 마시의 위치를 상세히 알려주며 일말의 우려를 금치 못했다. 세휘는 읍을 하며 부드럽게 불식시켰다.
“남 군사님은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백중을 자신하셨습니다. 하지만 류 장로님의 일에는 천운이 달렸다고 걱정하시더군요.”
“훗, 제 일이나 똑바로 하란 말이지. 스스로 금칠하는 것 같네만 낙양에서 내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자는 맹주님을 제외하고는 없다네. 운을 비네.”
류 원종은 병색이 완연한 얼굴과 다르게 호기롭게 웃고는 둘과 작별했다. 덕후와 세휘는 마시가 있다는 북문으로 향했다. 둘만 남자 세휘가 묵혀두었던 궁금증을 꺼냈다.
“전대가주의 사인은 찾았어요?”
“천운이 장난쳤더군.”
덕후는 주 영감의 존재만 빼고 곤륜원에 잠복해서 주워들은 것을 낱낱이 알려주었다.
“형욱이 알면 실망하겠네요. 둘 중에 하나가 원수라는 것을 알고 벼르고 있는 건데.”
“어느 쪽이든 악즉참! 하지 않아도 되니 부담이 적어진 것 아닌가? 그리고 지금은 신도 세가를 바르게 이끌 동량의 옥석을 가리는 것이니 마음 놓고 협조할 수 있을 거라네.”
“말은 잘하시네요.”
세휘는 즉각 빈정거렸다. 덕후는 흐흐 웃었다. 둘은 문을 나서 수욕이 가능한 객잔에 들러 몸을 씻었다. 단내가 나도록 뛰었기 때문에 신체가 땀과 흙먼지로 엉망이었던 것이다. 수욕을 마치고 점소이에게 미리 은자를 주어 새 옷을 사개 해 그것으로 갈아입은 다음, 간단히 요기할 국수를 주문한 뒤 바로 떠났다.
북문을 통과하여 한참 달리자 황토의 땅에 초지가 드문드문 펼쳐져 있었다. 이동용 천막인 겔이 군데군데 있고 말들이 넓게 운집해 있었다. 말을 탄 장정들이 구릉 위에서 말들이 이탈하거나 좀도둑이 오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 보였다.
덕후와 세휘의 접근을 눈치 챘는지 올가(말머리를 잡을 때 사용하는 밧줄 달린 장대)를 든 한 남자가 인마일체가 되듯 순식간에 덕후와 세휘 앞에 도달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남무림의 사자로 왔어요.”
회색으로 탈색되어가는 머리카락을 지닌 중년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대 가주님이 귀천하신 것은 들어서 아오. 그러나 아직 새 가주가 즉위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소만.”
“조율 중이거든요. 그 때문에 찾아온 것이고요. 귀공께서 책임자이신가요?”
“아니오. 나는 이활특이라고 말을 관리하는 직책에 있소. 예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이활특이 길게 휘파람을 불자 가까이 있는 젊은 기수가 달려왔다.
“이 분을 접대 겔에 모셔놓게. 나는 소가주님께 보고하러 가겠네.”
젊은 기수는 짧게 알았다 답하고, 말에 내려서 겔로 직접 안내했다. 겔 안은 접이용 탁자 하나와 의자가 넷이 전부고, 천장에 유등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낮이라서 꺼져있으니 철저히 접대용 거처인 셈이다. 잠시 후 나갔던 젊은이가 차를 내왔다. 중원 식처럼 맑은 물이 아니라 묽은 타락(요구르트)에 찻잎을 섞은 것이다.
이상야릇한 냄새에 덕후와 세휘는 손을 뻗지 않았지만, 젊은이가 빤히 쳐다보느라 어쩔 수 없이 삼켰다. 다 비우자, 젊은이는 친근하게 웃으며 찻잔을 들고 나갔다. 세휘가 고개를 돌려 웩웩 헛구역질을 했다. 덕후는 부글거리는 위장을 문지르며 한탄했다.
“아....불가리스 먹고 싶다. 천연 유기농도 좋지만 가공 요구르트를 먹고 싶어.”
“전 GG가 좋아요.”
세휘가 맞장구친다. 덕후가 빤히 바라보자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한국에 얼마간 머물렀으니까요.”
분위기가 미묘해지는 가운데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두두, 지축을 가볍게 흔드는 소리가 천막 가까이 울리더니 정지했다. 그리고 휘장을 젖히면서 한 묘령의 처녀가 이활특과 함께 성큼 등장했다.
물결처럼 곱슬 거리는 연갈색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고, 반듯한 이목구비에 어울리는 녹주빛이 감도는 눈동자, 오똑한 콧날과 육감적인 입술, 착 달라붙는 의상을 통해 유감 없이 드러나는 몸매는 어떤가. 융기가 도드라진 가슴과 개미허리, 자기처럼 매끄러운 둔부의 곡선 아래 쭉 뻗은 탄탄한 다리는 야성적인 조형미를 유감없이 뽐내고 있었다. 한 눈에 지나가는 남자의 시선을 확 잡아끌 듯 하면서도 선뜻 말을 걸기 어려운 이국의 매력을 뿜어내는 미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여자에 비하면 머리가 반 정도 큰 편이라, 내다보며 수작 부리기 좋아하는 한량들 입장에서는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보면서 수작 걸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날 보자고 했나?”
의자에 털썩 앉으며 다리를 꼰다. 덕후는 바지 안의 모습을 상상하며 저도 모르게 헤벌쭉한 미소를 지었다. 주책으로 만남을 망치기 전에 세휘는 발뒤꿈치로 덕후의 발등을 밟아주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명성은 익히 듣고 있어요.”
“그래, 이 양옥에 대해서라....늑대들 사이에 꼬리치는 여우라고?”
화려한 미소가 입가에 띄워진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비스듬히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독부毒婦와 같은 위험한 매력을 발산하는 듯 했다. 혁련 양옥. 혁련 기록의 적녀로 막내였다. 원래 아들을 바랬던 기록은 위에 언니들은 혈연 동맹을 위해 각처로 시집을 보냈고, 마지막에 아들을 바랬으나 끝내는 딸이 태어나고 말았다. 대를 끊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 기록은 양옥를 후계자로 키우며, 데릴사위가 천산북로의 차기 주인이라는 것을 천명했다. 그래서 웅지雄志를 품은 황야의 남아들이라면 초원에서 제일가는 미녀를 품에 안기를 원했다. 그러나 마상무예와 기마전술 면에는 부친마저 능가하는 그녀를 아직까지 꺾은 자는 없었다.
“일단 제 신분은 신도 세가와 상관없는 외객外客이라는 것을 밝혀두겠어요. 친구가 그쪽에 연을 두고 있어서 이 일을 맡은 거예요.”
세휘는 그렇게 신도 세가와 일정 선을 긋고 자신과 덕후를 소개했다. 세휘의 모습을 유심히 보던 양옥은 눈을 좁히며 유심히 보았다.
“혹시 자금성에 궁녀로 가지 않았나?”
“어떻게 아셨어요?”
“나 대신 영호 세가에서 궁녀로 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지. 얼굴은 모르지만 금발벽안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네.”
양옥은 세휘의 정체를 알자 친근감을 드러냈다. 세휘만큼 두드러지진 않으나 양옥의 외양도 중원인 보다는 서역인 쪽에 가까웠다.
“궁은 어떻게 나왔나?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 어렵다던데.”
“제가 모시는 분이 출궁하셔서 덕분에 경사를 벗어나게 되었거든요.”
양옥이 몇 마디 묻고 세휘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처음과 같이 떠보려는 기색이 많이 가셨다고 판단한 세휘는 본론을 꺼냈다.
“광협 공자께서는 양옥 님께 정식으로 동맹을 맺길 원해요. 그 증거로 자기편을 도와주시길 바라고 계세요. 대가로는 드리는 보상 외에 낙양의 마시뿐만 아니라 오 년 간, 하남 전역의 마시馬市에 공급을 열에 일곱 정도 과점할 수 있는 권한을 드리겠다고 하네요.”
혁련 세가가 지배하는 곳의 특성상 말과 양 같은 가축이 넘쳐났다. 이것을 마시를 통해 팔아치우고 차와 자기, 생필품 등을 수입해가서 천산북로의 상인들에게 되팔았다. 낙양은 양가의 지루한 전쟁 끝에 협정의 대가로 얻은 것이다. 한 귀퉁이만 차지했음에도 혁련 세가의 재정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흑자를 남겼다. 기한이 있다 해도 중원 전역에 마시 공급을 과점할 수 있다면 낙양의 마시에 비해 몇 배 되는 호기일 것이다.
“기존의 마상馬商들의 반발이 클 텐데?”
“그건 신도 세가에서 해결할 문제죠. 어떤 연줄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절대적으로 자신하더군요.”
세휘는 시침 뚝 떼고 말했다. 혁련 세가가 개입하는 동안 쫓겨날 마상들은 강동으로 옮겨갈 것이다. 덕왕부의 프로젝트 중에 하나가 왕부와 위소의 기병을 대대적으로 보강하는 것이다. 태업 모드인 덕왕을 대신해 왕비가 조정과 합의를 본 상태이고 실행만 남겨두고 있었다. 말을 대량 확보할 필요성이 있는데, 가서 일일이 모셔오는 것보다는, 판로 개척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오는 쪽이 구입에 유리했다. 이 흐름을 유도하기 위해 세휘는 덕후의 신분을 이용해 우연히 들은 것 마냥 남소락에게 언질을 했고, 남 소락은 주군을 설득하는 패로 활용했으며, 하남맹주는 혁련 세가를 끌어들일 카드로 써먹은 것이다. 그 시장을 움직인 검은 손께서는 양옥의 미모에 푹 빠진 듯 헤벌쭉 모드이지만.
“갑작스럽군.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이런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할 만큼 광협 공자님은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에요.”
양옥은 무심코 턱을 당겼다. 그녀의 암시대로 도와줄 시기를 놓쳤다가는 조건도 무산 될 것이다. 저울질 하는 소가주의 모습에 이활특이 몸을 구부려 간했다.
“위험합니다.”
“알고 있어.”
짧게 일축한 뒤, 양옥은 갑자기 살기를 어린 미소를 지었다.
“방금 다른 생각이 떠올랐어. 너희들을 포로로 잡아 신협 측에 넘기는 거야. 포상으로 그 조건을 역으로 제시하는 수도 있고.”
“그러시면 소가주님의 용돈벌이 하는 수준 밖에 되지 못할 걸요. 신협 공자님은 군식구들이 워낙 많다보니.”
“감히!”
양옥이 갑자기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덕후가 움츠린 반면에 세휘는 두려워하는 낯빛 없이 당당한 표정이었다. 양옥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눈웃음을 쳤다.
“하하, 좋아. 너를 봐서 모험할 가치는 충분하겠어.”
“소가주님!”
이활특이 뭐라 제지하려하자 양옥은 주먹으로 탁자를 후려쳤다. 진기를 실었는지 쾅! 하고 다리가 부러졌다. 그러나 중년의 가신은 무력 시위에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월권 입니다. 저는 소가주님을 보좌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동시에 감독하는 역할도 있습니다.”
“누가 멋대로 동맹을 맺겠다고 했나? 일단 이 건은 네가 책임지고 가주님께 급전을 보내도록. 나는 낙양에 있는 가솔들만 이끌고 에움을 풀어줄 것이다. 딱, 거기까지만 움직일 생각이야.”
이활특이 무슨 소리인가 멍하니 바라보자 양옥은 바라보면 저절로 홀리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기회가 있는데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은 초원의 방식이 아니잖나? 자넨 가주님의 뜻을 좀 더 적극적으로 헤아릴 마음은 없는 겐가?”
“실패하면 낙양의 마시를 잃게 될 겁니다.”
“그땐 전면전이고.”
“소가주님!”
“고작 마시 하나 잃는 것이 두려워서 벌벌 떠는 건가? 우리가 손해 볼 건 없어. 느긋하게 몰이 사냥을 하면 돼.”
이활특은 그제야 양옥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광협을 돕되 그가 요행히 이기면 동맹을 받아들이고, 아니면 상잔 기간을 늘려 전력의 약체화를 가속시키겠다는 심산이리라. 신협 측이 겨우 승자가 되어 한숨을 채 돌리기 전에, 원기 왕성한 초원의 전사들의 함성과 말발굽을 맞이해야할 것이다.
“이틀은 주십시오. 계약 체결 마무리할 것도 있고 시내에 나간 아이들을 불러 준비시켜야 합니다.”
“하루!”
이활특은 한숨으로 복명하고는 천막을 나갔다. 양옥은 세휘를 뚫어져라 보았다.
“왜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는 줄 알겠지?”
“나중에 딴 소리하면 재미없을 거 확실히 전해드릴게요.”
“하하, 점점 마음에 드는데. 움직이는 건 내일부터 가능 할 테니, 오늘은 양껏 마시자고. 아이락(마유주)은 마실 줄 알아?”
“술은 딱히 가리지 않는답니다.”
“좋아. 안주거리로는 자금성 이야기를 들려 줘.”
“헤헤, 자금성이라면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공기화 되었다가 이때다 싶어 손을 비비고 나서는 덕후. 그를 보는 양옥은 눈살을 찌푸렸다. 듣도 보도 못한 잡것을 보는 반응이다.
“뭐야. 쟨? 시종 아니었어?”
“아, 저랑 같은 동행이에요.”
“여태 아무 소리도 못했으면서...너는 별 재주가 없는 것 같으니 장기 자랑 같은 거라도 해봐라.”
양옥은 그렇게 일축해버렸다. 양옥과 세휘는 술을 마시고, 번갈아 노래를 부르며 새벽이 곯아떨어지도록 즐겼다. 그 동안, 장기자랑을 명령 받은 덕후는 천막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을 안고 오브제를 연기했다.
케릭터 프로파일 #9
혁련 양옥 : 무공 87 지모 81 정치 84
모티브 : 모가미 요시아키, 사타케 요시시게.
내 력 : 혁련 세가의 소가주.
후일 아버지의 은퇴로 가독을 받아 세가를 다스리게 된다.
기마에 타의추종을 불허하며 개인적 비무보다는, 군세를 타는 난전에 더 위력을 발휘한다.
자신 대신 궁녀가 된 영호 세휘에게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고기 위주로 식생활이 편중될 수밖에 없는 유목민이 차 수입에 목숨을 걸었는데, 중원의 차 문화와 상이해서 물보다는 요구르트에다가 섞든지 여차여차 해서 먹는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습니다. 출전을 찾아보려는데 찾을 길이 없네요. 아시면 제보 바랍니다. 참, 내년 2월~6월까진 성수기라 월간 연재가 될 것 같으므로, 그 전에 가급적 신도 세가 편은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빨리 쓰려고 하니 딴 생각이 들어서 모 처에 팬픽을 써볼까 생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