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수정편 제 29 부
** 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수정편 제 29 부 ** [수정일. 2006 년 3 월.]
제 10 장. 취산이합(聚散離合)의 암투(暗鬪) 2.
연환서숙(捐幻書塾)의 내실(內室)에 앉아 말없이 천정만 올려다 보고있는 서문인걸(西門仁杰)
은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버님, 황보(皇甫)공자님 모시고 왔습니다.」
「오.. 왜 그리 늦었느냐..? 어서 모시고 들어 오너라.」
황보정(皇甫程)이 서문인걸(西門仁杰)에게 가볍게 예(禮)를 취하며 서숙(書塾)의 내실로 들어
섰다.
「대인어른, 저를 찾으셨습니까..? 마침 본가(本家)의 여동생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지체된 사정을 말하며 들어서는 황보정(皇甫程)을 서문인걸(西門仁杰)은 얼굴 가득 온화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어서오시게..! 그래 집안에 무슨 급한일이 있어 영애(令愛;남의 딸에 대한 경칭)께서 찾아
오셨던가..?」
황보정(皇甫程)이 시원스러운 대답을 못하고 우물거리는 사이 화령(華怜)이 앞을 나섰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두분의 얼굴이 무척이나 심각하게 보이는 것이, 긴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듯 보였습니다.」
「어허.. 화령(華怜)낭자, 그런 것이 아니외다. 다만..!」
당혹(當惑)해 하는 모습을 보이는 황보정(皇甫程)을 바라보던 서문인걸(西門仁杰)이 화령
(華怜)을 꾸짖었다.
「화령(華怜)아..! 공자께 여쭙고 있었거늘.. 또 나서고 있느냐..! 어찌 그리도 행동이 경박
하느냐..!」
겸연쩍어 하며 고개를 살짝 숙이는 화령(華怜)을 돌아보며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슬며시 미소
를 지어보인 황보정(皇甫程)은 다시 서문인걸(西門仁杰)을 향했다.
「화령(華怜)낭자를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다만 집안 일이기에..!」
「허허.. 그러신가..? 가내(家內)의 일이라면 그냥 두게나. 자.. 이리로 앉으시게, 다름이
아니고 내가 황보(皇甫)공자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은 것이 있으이..!」
서문인걸(西門仁杰)이 자리에 앉기를 권하자 황보정(皇甫程)은 서문인걸(西門仁杰)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대인어른.. 저의 의견이라 함은 어떤 것에 대한 의견을 말씀하시는지..?」
서문인걸(西門仁杰)은 궁금한 듯 묻는 황보정(皇甫程)의 앞으로 몸을 가까이 하며 낮고 조용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보(皇甫)공자, 지금 나라의 국경은 거란(契丹)과 서하(西夏)의 잦은 침공으로 일촉즉발
(一觸卽發)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예, 대인어른.. 잘못 국경의 수비가 소홀하면 누란(累卵; 새의 알을 쌓아놓은 것처럼 위태
로운 상황)의 위기가 닥칠 염려도 있습니다.」
「그렇지..! 조정은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많은 예물을 바쳐 겨우 나라를 지키고 있지..!
그런데 그 중요한 국경을 지키고 있는 야전군을 통합 지휘하는 총사령이 누구인지 공자는
알고 계시는가..?」
서문인걸(西門仁杰)의 갑작스러운 물음..!
그가 말하는 야전군(野戰軍)이란 지금 조정(朝廷)의 주병력(主兵力)이 아닌가..!
그 군(軍)의 총사령(總司令)은 지금 조정의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있는 조평환(趙平換)
의 아들 조익균(趙益均)이 아닌가..!
그냥 소홀히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어허..! 지난날 비연선원의 주인낭자와도 이와 같은 말들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녀와 깊이
시국을 의논하여 내가 이 서숙으로 온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어른도 조정의 형국을 들먹
여 말하기 시작한다. 뻔히 알고있는 사실을 새삼 묻고있는 이 어른의 심산(心算;속셈)이 과연
무엇인가..?)
머리속으로 여러가지 궁리를 하고 있던 황보정(皇甫程)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다음달 초순에 가친(家親)께서 제남(齊南)의 천불사(天佛寺)로 출타(出他)를 하신답니다.
동생 여경(如璟)이 그일 때문에 저를 찾아 왔었습니다.」
서문인걸(西門仁杰)의 물음과는 전혀 동떨어진 대답이었다.
「오오.. 부친의 전갈을 가져왔던가..?」
「예.. 대인어른, 가부(家父)께서는 저를 데리고 함께 제남(齊南)에 가시고자 하는 연락이었
습니다.」
순간 서문인걸(西門仁杰)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빛이 뻔쩍 스쳐 지나갔다.
「평장사(平章事)어른께서 제남(齊南)에 중요한 볼일이 있으신가 보구먼..! 그래, 함께 갈
요량(料量;헤아려 생각함)이신가..?」
은근히 황보정(皇甫程)의 판단을 묻고 있었다.
「하하하하..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모처럼 부자가 함께 여행을 하며 마음을 나누고 싶어 하신 것 같은데..! 으음.. 공자께서
굳이 동행을 거절한 이유가 무엇인가..?」
황보정(皇甫程)은 서문인걸(西門仁杰)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듯
물었다.
「대인어른..! 지금 조정(朝廷)의 주력군(主力軍)은 변방 국경을 지키고 있는 병력(兵力)
이며 그 병력(兵力)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인물이 조평환(趙平換)의 아들인 조익균(趙益均)
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나라 백성은 없습니다. 그 자명(自明)한 일을 저에게 묻고 있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않고 그 순간 황보정(皇甫程)이 물어오는 말에 오히려 서문인걸(西門仁杰)이 당황을
하기 시작했다.
「어.. 어, 그.. 그것은.. 음, 그래 말하지..! 군권(軍權)을 손에 쥐고 온갖 권력을 자신의
사욕을 위해 휘두르는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오직 아들이라는 그 하나의 명분으로 능력도
재주도 없는 인간에게 국방의 대임(大任)을 맡긴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을 공자에
게 묻고 싶었던 것일세..!」
황보정(皇甫程)이 얼굴에 빙긋 웃음을 머금고 대답을 했다.
「하하하.. 그것이었습니까..? 예, 말씀드리지요. 제가 저의 가부(家父)와 동행을 거절한
것은 현실을 도피해 조그만 평화를 얻고자 하는 그 어른의 마음가짐 때문이었습니다. 즉
권력(權力)에 맞서지 못하고 외면을 하여, 오로지 자신의 자리만을 보존하고자 하는 가친의
나약함 때문에 얼굴을 마주하기 싫었던 것이지요.」
「오호.. 그랬던가..?」
「비록 저의 가부(家父)이시지만 그런 어른이 조정의 수장으로 앉아 계시니 조익균(趙益均)
과 같은 필부가 그 중요한 총사령(總司令)의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었겠지요..!」
「이보시게 황보(皇甫)공자..! 그러나 그 어른이 나약한 것이 아니라 수중에 힘이 없으니
용기를내지 못하신 것이겠지..!」
슬쩍 변죽을 울려보는 서문인걸(西門仁杰)의 말이었다.
「용기(勇氣)라..! 힘이 없어 용기를 내지 못했다..? 후후후.. 대인어른, 용기(勇氣)는
힘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이지요..! 굳고 강건한 마음..!」
황보정(皇甫程)의 목소리는 스스로의 격정에 못이겨 강개(慷慨;의기가 복받치어 원통하고
슬픔)한 어조로 변해 서숙(書塾)의 내실을 울렸다.
그 모습을 본 서문인걸(西門仁杰)이 비분(悲憤)을 부추기듯 한마디를 더 던졌다.
「허허.. 황보(皇甫)공자, 평장사(平章事)어른께서는 공자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사신 분이지,
어른 나름대로의 처세(處世)가 있지 않겠는가..?」
「처세(處世)라..? 푸하하하.. 자리를 지키려는 보신(保身)이겠지요..!」
황보정(皇甫程)의 입에서 공허한 웃음이 터졌다.
잘 알고 있었다. 좌불안석(坐不安席) 힘들게 조정에 앉아 좌고우면(左顧右眄;어찌 할 바를
모름)하는 아버지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황보정(皇甫程)의 마음이었다. 그 때문에
아들이 되어 아버지를 도울 수 없는 자신을 자학(自虐)하는 웃음소리인 것이었다.
황보정(皇甫程)의 그러한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서문인걸(西門仁杰)의 얼굴에는
아무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황보정(皇甫程)과 나누고 있던 격렬한 대화.. 그 말들은 황보정(皇甫程)의 마음속
에 숨어있던 울분을 이끌어 내기위한 서문인걸의 부추김이었던 것이다.
「조정의 주력군(主力軍)인 국경의 병력(兵力)을 황보(皇甫)공자가 통솔을 하면 좋으련만..!」
「예.. 예..? 방금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느닷없이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는 서문인걸(西門仁杰)의 말에 놀란 황보정(皇甫程)이 움찔
고개를 들어 눈앞을 바라보았다.
「허허.. 황보(皇甫)공자 처럼 영민한 인재(人材)가 그 자리에 있으면 훨씬 나라가 안정되지
않겠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혼자 해본 소리라네..!」
황보정(皇甫程)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으음.. 이 어른,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무슨 의중(意中)으로 흘리는 말일까..?)
서로 얘기를 나누다 보니 마음속 깊은 생각의 일단까지 입밖으로 뱉어내고 말았다.
비록 서문인걸(西門仁杰)의 독언(獨言;혼잣말)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생각 없이 한 말은 아닐
것..! 뛰는 가슴을 지긋이 누르고 서문인걸의 마음을 짐작하려 기색(氣色)을 살피고 있었다.
「황보(皇甫)공자..! 우리가 조익균(趙益均)을 제거하고 변방의 병력을 접수하면 어떨까..?」
「뭐.. 뭐라고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뱉는 말에 오히려 황보정(皇甫程)이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깊은 심계(心計)를 지니고 있는 서문인걸(西門仁杰)의 말이 아닌가..? 분명 마음속에
어떤 복안(腹案)을 숨기고 한 말일 것이다.
궁금한 마음이 앞서 다급히 물어 보았다.
「대.. 대인어른, 무슨 방법이 있으신지..?」
「방법이라..? 황보(皇甫)공자, 만약에.. 만약에 말일세..!」
입을 열고는 말에 뜸을 들인다.
「예.. 만약에요..?」
「만약에, 거란(契丹)이나 서하(西夏)가 국경을 침범 한다면 조익균(趙益均)의 능력으로
그들의 군사를 막아 낼 수 있을까..?」
「아마 고전(苦戰)에 고전을 거듭하겠지요.」
「그러나 조익균(趙益均)은 제 아비 조평환(趙平換)의 체면을 보아, 분명 그 전장((戰場;전쟁
이 일어난 장소)을 피해 꽁무니를 빼지는 못하겠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서문인걸(西門仁杰)의 마음속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쩌지 못하는 싸움에서 조익균(趙益均)이 전사를 할 경우도 생기겠군..!」
「헉..!」
갑자기 가슴을 망치로 치는 듯한 충격에 황보정(皇甫程)은 숨이 턱.. 막혔다.
분명 전쟁의 와중(渦中)에 조익균(趙益均)의 암살(暗殺)을 의미하는 말이 아닌가..!
「대.. 대인어른, 그 말의 뜻은..?」
「허허.. 뜻은 무슨 뜻..! 그럴 수도 있겠다는 거지. 그런데 그 싸움을 우리의 힘으로 승리
로 이끈다면 조평환(趙平換)까지도 탄핵을 할 수 있겠지..!」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 조정(朝廷)은 때마다 그들에게 조공(朝貢)을 바쳐가며 국경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그러한 변방의 나라들이 예물을 마다하고 서문인걸(西門仁杰)의 생각에
때맞추어 전쟁을 일으켜 주겠는가..?
「대인어른.. 지금의 조정은 시시(時時)마다 많은 예물과 준마(駿馬)를 보내 그들을 달래어
침공을 하지 못하게 화평(和平)을 유지하고 있으며, 때문에 조익균(趙益均)과 같은 인간이
그 자리에 있어도 전쟁의 불안 없이 무위도식(無爲徒食)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들이
국경을 넘지 않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 전쟁을 만들어 볼까..?」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만들어야지..! 만들면 될 것을..!」
(무서운 지모(智謀)를 가진 사람이다. 내가 이러한 사람과 대적(對敵)을 해 겨룬다면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섬뜩함을 느꼈다. 그러나 황보정(皇甫程)의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기대가 동시에 다가왔다.
(이사람을 잘 이용을 하면 세상을 바꿀 수는 있겠구나..! 만약 이사람과 가까이 지내, 나에게
힘이 보태어 진다면 아버님의 입지가 훨씬 편해 질 것이다.)
「어떻게 말입니까..?」
「흐흐흐.. 황보(皇甫)공자.. 조공(朝貢)으로 가는 예물과 준마(駿馬)를 가로채 버리면..?」
「그렇다고 저들이 금방 침공을 하리까..?」
「후후후.. 약탈과 방화..! 우리가 먼저 저들을 건드려 약을 올려 준다면..?」
「휴 우.. 우리를 따를 병력도 있어야 하고.. 저는 도저히 감당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자신과 서문인걸(西門仁杰), 단 두사람이 저지를 만한 일이 아니지를 않는가..! 그런데도
서문인걸(西門仁杰)은 아무 꺼리낌 없이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 숨겨둔 병력
이라도 있단 밀인가..?
「대인어른.. 도대체 복안(腹案)이 무엇입니까..? 답답해 못견디겠습니다. 시원하게 알려주
시지요.」
초조해 하는 황보정(皇甫程)을 입술을 꾹 다물고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서문인걸(西門仁杰)
의 입에서 진중(珍重)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황보(皇甫)공자..! 지금부터 나의 말을 믿고 따르시겠는가..?」
「예, 대인어른.. 이길이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면 두말없이 대인어른을 따르겠습니다.」
「좋다..! 지금부터 황보(皇甫)공자는 항상 나의 곁을 떠나지 말고 내 주변을 살피도록
하시게..! 화령(華怜)아 너도 공자의 곁을 지키며 공자를 도우거라..!」